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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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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언어는 서로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언어는 ‘눈’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낱말로 ‘함박눈’에 해당하는 말을 가진 언어는 많지 않다. 한 언어가 적시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언어는 적시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는 확실한 것이 다른 부류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되며, 어떤 언어로는 절실한 진실에 다른 언어는 관심조차 없다. 언어가 서로 만날 때 이 불확실한 것들이 솟아올라와 산과 들을, 사랑과 증오를 새롭게 고찰하고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

한 언어 관점에서 다른 언어는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숨은 진실을 쌓아놓은 저장고와 같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언어를 지키고 가꾼다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의무가 된다.

모국어란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이 태를 묻고 성장한 땅의 방언이기도 하다. 이 방언은 세상의 모든 말을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방언은 자주 우리 언어 감각을 현실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끌고 내려간다. 표준어를 토론의 언어라고 한다면 방언은 자기 고백의 언어라고 하더라도 무방하다.

(영어라는) 기호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오직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인데, (우리)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정신의 식민화 저항

“글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많이 쓰게 되면 글 쓴 사람의 사고가 너무 단순하거나 게으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 있다. 이런 말들은 글에 현실감을 주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체성을 없애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살랑살랑’은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어느 정도 전달하지만 그 바람을 개별화해주지는 않는다. 상투적인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섣부른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설명 방식에는 이해가 쉽지 않은 것들을 가난이나 몽매함의 탓으로 돌려 농어촌을 도시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음모가 종종 숨어 있다. 그 음모 속에서 삶의 깊은 속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의 천박한 시선 아래 단일한 평면이 되어버린다. 나름대로 삶의 중심이었던 자리들이 도시의 변두리로 전락하는 것은 그다음 수순이다. 식민주의의 권력자들은 삶을 통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모더니즘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염두에 두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카오스 이론

“복잡성 이론은 내가 공부한 분야의 말로 이해하면 (복잡해서 해결할 수 없다는) 나쁜 믿음에 빠지지 말자는 말이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원인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은 그에 대한 관측과 추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당면 목표는 더 큰 목표와 어느 선에서건 연결되지 않으면, 벌써 알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줄 수 없다.”


무의식

“저 자신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저 자신도 바꾸지 못한다. 저 혼자만의 터전이 마음속 깊은 곳일수록 더 그렇다. 나의 무의식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의지에 따르지 않으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타자(무의식)를 품고 산다. 자기이면서 자기인 줄 모르는 자기, 자기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 자기 안의 타자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의지를 훼방하지만, 많은 창조자의 예에서 보듯이 때로는 의식과 의지가 이를 수 없는 것을 이 타자(무의식)가 이루어내기도 한다.”


스카이캐슬

“미숙한 선생은 그 영향력의 깊이로 자신의 교육자적 자질과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학생의 정신과 육체를 식민화하려 한다. 하지만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지배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국가의 본질

“철부지 정부가 일본과 무슨 협약을 했건 그건 정부의 일일 뿐이니 한국인들이 자기 손으로 세운 소녀상을 철거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돈부터 건낸 일본 정부는 한국에 사기를 당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사기는 무슨 사기, 우리가 보기에 일본이 서둘러 꾸며낸 협약은 조카가 가진 땅을 헐값에 사보겠다고 엉뚱하게 팔푼이 삼촌을 꾀어 꼐약서를 쓴 꼴과 진배없다.”


역사의 발전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하기 전에 사회는 먼저 여자에게 명령한다. 가부장 사회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부터 다른 일까지 삶의 실제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는 사회의 막중한 명령을 자신 어깨로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남자들은 자기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가부장 사회에서 착한 남자건 나쁜 남자건 남자의 서사는 같다.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희생자의 서사다. 역사의 발전은 늘 희생자의 서사로부터 시작한다.”


책 읽는 법

“제가 무지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


이런 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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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 도착을 미리 통지받는다네. 특급인지, 급행인지, 화물열차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벨 소리가 울리면 난 건널목 차단기를 내리고, 빨간불을 켜서 모든 차량 통행을 멈추게 한다네. 레일이 진동하기 시작하면,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수백명의 사람을 싣고 굉장한 속도로 통과한다네. 내가 차단기를 다시 올리고 빨간불을 파란불로 바꿔 놓으면 이번엔 자동차들이 길을 건너지. 운전자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어. 그리고 기차 승객이나 자동차를 탄 사람이나 모두 떠나 조용해지면 그때 나는 혼잣말을 하는 거야. “잘 했어 아주 잘 잘했어” 고작 수문 관리인인 집사람 오빠에게 내가 때론 이런 감동 어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는 꽤나 신경이 거슬리는 모양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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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표기 문자는 발화 언어와는 완전히 별개의 언어를 이루고 있다.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화적, 인지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 때문에 별개 언어를 쓰는 편이 같은 언어의 두 가지 형태를 쓰는 것보다 더 논리적일지 모른다. 그들 발화 언어 어순은 완전히 자유롭고 별다른 우선순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문장 속 어의문자들을 읽을 때 특별히 선호하는 어순은 없다. 문장 어디에서 읽기 시작해도 좋았고, 그대로 뻗어가는 절들을 따라가면 결국 문장 전체를 읽는다.

 

그들 문자는 단어로 분할되지 않는다. 문장 획들이 여러 개의 구를 가로지른다. 그들은 구성 단어들에 해당하는 어표를 결합해서 문장을 표기한다. 회전하고 수정하면서 어표들을 결합시킨다. 필요할 때마다 어표를 갖다붙여 거대한 복합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한다. 이점은 그들이 최초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자를 읽는 사람도 메시지 전체 문맥을 미리 알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들과 같은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그들 언어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나에게 지금까지 사고란 보통 마음속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청각장애인이 수화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처럼. 사고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의 사고가 도형 형태로 코드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로 전제조건과 결론을 서로 호환할 수 있게 숙고할 수 있다. 각 명제들 사이 관계에 고유한 방향성은 없고,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은 동등하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절박한 느낌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하는 느낌. 미래를 아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그들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한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다. 선택의 자유는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래를 아는 것과 선택의 자유 모두 동등하고 타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미래를 아는 지금 난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한다.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한다. 인과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이 양립하는 물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적 사건은 정보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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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06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rrival을 못 봤지만,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언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 같네요. 실천으로 옮겨진 언어는 지시적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3-06 15:22   좋아요 1 | URL
Arrival(컨택트) 못 보셨다면,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이웃님인 AgalmA 님, 고양이라디오 님, 나와 같다면 님 등의 호평 보시면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 느끼실 수 있으십니다.^^ 아니, 빌 드뇌브 감독 작품은 전부 추천합니다. 시카리오, 프리즈너스, 특히 그을린 사랑...
감독의 단편 15분 짜리 영화 <다음 층>은 유투브에도 있으니 오늘 퇴근하시면서 보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가 단순히 정보 전달에 있지 않고, 계획 혹은 의도의 현실화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드 창은 그걸 교묘하게 엮어 뛰어난 소설을 창작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3-07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추천해 주신 <다음 층>을 봤습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먹기만 하면서 끊임없이 추락하는 현대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라 여겨지는데, 제가 잘 이해했나 모르겠네요. 대화도 없는 짧은 영화가 이토록 흡입력이 강한 것을 보면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네요^^:)!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3-07 16:18   좋아요 1 | URL
네, 그 감독 모든 영화의 흡입력이 엄청납니다. 또한 항상 엄청 불편합니다.
전 <그을린 사랑> 보고 몇일 간 멍~~~ 했던 경험이 있을 정도로요. ^^

AgalmA 2018-03-11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다시 생각하면....
전후 과정을 모두 아는 일종의 다층적 사유와 사고를 한다 해도 3차원의 이 세계에서 행동으로 구현할 때 어떤 틈이, 우연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결과‘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소멸 뿐이지 않겠나...싶습니다. 과정은 과정일 뿐이니까.

북다이제스터 2018-03-11 20:09   좋아요 0 | URL
어려운 말씀이세요. 생각의 여지가 많은...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는 빛이 공기에서 물속으로 들어갈 때의 경로다. 빛은 수면에 달할 때까지 일직선으로 나아가다, 물의 굴절률이 공기와 다르기에 빛이 방향을 바꿔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원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원인(물의 굴절률)에 따라 결과(방향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보자. 빛은 공기보다 물속에서 더 천천히 움직이기에 빛이 전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 한다는 목적론 관점에서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를 바라볼 수도 있다.

 

 

“빛은 언제나 극치(極値)의 경로, 바꿔 말하자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든지 아니면 최대화하려는 경로를 택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해. 최소와 최대는 어떤 수학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모든 물리학 법칙은 하나의 변분 원리*로 다시 기술될 수 있어. 유일한 차이는 어떤 속성이 최소화되는지 아니면 최대화되는지에 달려있어. 페르마 원리가 적용되는 광학에서 극치를 가져야 하는 속성은 시간이야. 역학에서는 또 다른 속성이 적용되지. 전자기학에서는 또 다른 속성이 대두되고. 그러나 그런 원리들은 수학적으로는 모두 비슷해.”

 

 

“물리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 같은 변분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야. 의인화를 통해 확대해석을 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야 해. 결국 빛은 자신이 도달할 목적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정보도 갖고 있는거지. 한마디로 빛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는 거야.”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것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굴절률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애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햅타포드(외계인)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이 없다.”

 

 

“인류와 햅타포드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이 이런 차이를 낳은 결과였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햅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와 최대화 목적을.”

 

 

 

 

 

 

 

 

 

 

 

 

 

 

 

 

“뉴턴 역학은 주어진 힘 때문에 가속도가 생기고 운동이 결정된다는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외부 원인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는 것은 다분히 ‘기계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헤밀턴-라그랑주 역학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용이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는 양인데, 에너지는 힘처럼 외부에서 주어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운동에너지나 잠재에너지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의, 정확히 말하면 계의 성질입니다. 따라서 외적 요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의 내부 성질에 따라서 정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기보다는 작용을 최소화하는 기본 원리가 자연에 내재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지요. 다분히 ‘목적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완전히 다른 전제에서 출발했는데도 해밀턴-라그랑주 역학은 수학적으로 뉴턴역학과 완전히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지요. 자연을 타당하게 해석하는 관점이 아주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2008년)

 

 

 

 

* 변분원리

변분법으로 나타낸 물리학의 기본법칙으로 어떤 이론을 일반화할 때 사용되는 원리이다. 이 원리의 장점은 운동방정식의 방법과 비교해서 시간에 대한 도함수 중 낮은 차수만 풀며, 얻은 방정식이 전체적으로 앞뒤가 맞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물리학의 기본법칙은 모두 변분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역사적으는 광학에서의 페르마의 원리, 모페르튀의 최소작용원리(1747)에 이미 변분원리의 단서가 있었다. 현재는 역학의 법칙이나 전자기장의 법칙 등 물리학의 기본법칙은 모두 변분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를테면 역학의 법칙은 라그랑주함수를 써서 δ∫Ldt=0의 형식으로, 또 진공 속의 전자기장의 법칙도, 전기장의 세기 및 자기유도의적당한 함수(라그랑주함수밀도) L을 써서 δ∫L dx dy dzdt=0인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물리법칙의 미분방정식 표기이며, 라그랑주의 운동방정식 및 맥스웰의 기초방정식과 등가(等價)임이 알려졌으나, 미분방정식의 경우와는 시간 ·공간의 어떤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전체로서 관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분원리 [variation principle, 變分原理]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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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3-1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의 내부 성질!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 책에서 절판된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를 적극 추천하더니 역시 그럴 만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8-03-11 20:07   좋아요 0 | URL
<과학은 그 책을~>이란 좋은 책이 있었네요. ㅎㅎ
목차 방금 봤는데, 읽어 본 책도 있었고 인정할 수 없는 책도 몇 권 있지만, 대부분 공감되는 책, 읽고 싶은 책들 잘 간추려 논 책입니다. ^^
 

 

 

 

 

 

 

 

 

 

 

 

 

 

드리나 강의 다리는 예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다리는 보스니아를 세르비아와 잇는 길을 연결하고 터키(오스만)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 심지어 이스탄불까지 잇고” 있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역사를 약간이라도 안다면 소설의 다음 문장들을 이해하는데 수월하다.

 

 

"드리나 강변의 왼쪽에는 기독교도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강의 오른쪽에는 태어나서 전혀 세례를 받지 않은 이슬람 아이들이 살았다."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린 예니체리 행렬이 동부 마을에서 아좌미-오글린으로 선발한 일정수의 기독교 아이들을 데리고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10살에서 15살 사이 건강하고 영리하며 용모가 수려한 남자 아이들은 혈세였다." 

 

“19세기 초 세르비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일과 항상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먼 데서 생긴 사소한 일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속되면서 세르비아에서의 폭동은 보스니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특히 경계선에서 불과 도보로 한 시간이면 도작하는 이 마을의 생활에는 더욱 세찬 파도가 밀어닥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리나 강의 다리>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지역의 간략한 역사는 이렇다.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지역’은 7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대거 이주했고, 슬라브계 크로아티아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9~10세기경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으로 여겨지며, 1377년 보스니아 왕국이 건국되었다.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은 보스니아를 정복했고 이 지역에 많은 무슬림을 이주시켰다. 이 시기 보스니아 거주 세르비아인 중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보스니아는 오스만 통치를 받았다. 한편 ‘세르비아 지역’은 1371년 세르비아 공국이 창건된 후 1389년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사실상 동맹국에 가까운 관계였다. 세르비아 공국은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두 강국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다 결국 1459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고, 4백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다.

 

19세기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운동이 격렬해지면서 1817년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반면 보스니아는 1878년 베를린 회의 결정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양해로 보스니아를 합병하자 세르비아가 격렬히 반발했다. 결국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가 세르비아계 테러 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차 세계대전 후 1918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지역’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연합 왕국이 되었고, 이후 유고슬라비아로 개칭된다. 하지만 민족적, 종교적으로 상이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결속력이 떨어졌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계가 떨어져 나가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되었다. [<발칸의 역사>, <동유럽사>, 나무위키 참고]

 

 

 

 

 

 

 

 

 

 

 

 

 

 

 

 

 

 

정말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다. 소설은 오스만 제국 통치 시절인 1516년에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드리나 강의 다리가 폭파되는 1914년까지 대략 4백년 기간이 이어진다. 사실 역사라는 물줄기로는 시대의 큰 흐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굴곡진 역사를 몸으로 직접 겪은 기록되지 않은 많은 민초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1878년까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처형당한 사람들 머리가 말뚝에 꽂혀 드리나 강 다리 여기저기 매달리거나 내둘렸으며, 이후 큰 사건이나 역사적인 변화가 있을 경우 성명서나 공고문들이 다리에 나붙었다. 특히 혼란스런 시절에는 그런 일들이 매일 벌어질 정도로 빈번했다.” “인간 사회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연히 세워진 건축은 있을 수 없다. (드리나 강의 다리처럼) 모든 위대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건축물의 기원과 생명은 그것이 세워진 장소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듯 그 안에 다양하고 신비스러운 역사를 안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을 사람들 삶과 드리나 강 다리는 함께 수백 년 동안 이어오는 긴밀한 연대가 있다. 마을 사람들과 다리의 운명은 어찌나 서로 얽혀 있던지 따로 생각할 수도 분리해서 말할 수도 없다.”

 

 

드리니 강의 다리 주변 마을 사람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통치를 시작하면서 근대화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부자연스러운 근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갖가지 법령과 규정, 명령은 사람, 가축, 사물 할 것 없이 온갖 형태의 생활을 간섭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 외형은 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풍속과 습관을 뜯어고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평화롭게 그리고 그다지 얘기도 없이, 완력이나 도발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의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들이 시작한 모든 일들은 장난 같고 심지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측량했고 숲에 나무를 심었으며 변소와 하수구를 검사했고 말과 소들의 이빨을 들여다보았으며 무게와 상태를 물었고 사람들이 질병이 있는지 과수원 규모와 어떤 과일이 있는지 양이나 가축 종류에는 무엇이 있는지 조사했다(그들은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주민들 눈에는 그들이 하는 이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없고 비현실적이며 소용없는 짓으로 여겨졌다). 1년이 지난 후 그토록 어리석어 보이던 이런 일들의 참 의미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의 행정관청은 삼림보호법, 발진티푸스 예방법, 과일 판매법 그리고 가축 반출의 허가 등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매일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거나 개인 자유를 구속하는 임무들이 생길 때면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가 감소되고 의무가 증가되는 것을 느꼈지만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이방인들이 한 가지 일에 무작정 정력을 쏟아 그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방인들은 집을 짓고 또 땅을 파고 세우고 메우고 시설을 꾸몄다가는 다시 고치고 하는지 또 왜 그들은 자연력의 작용을 예측해서 그것을 피하고 극복하려는 영원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 한 명도 없었다.” “가구 수를 세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수를 세었는데, 이런 조사는 나중 세금을 매기거나 남자들을 강제노동이나 군대, 혹은 양쪽 모두 써먹기 위함이었다.” “훌륭한 통치 체계를 갖춘 새로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터키(오스만) 세력들이 횡포를 저지르고 약탈을 하거나 비합리적으로 수탈해갔던 강압적인 식으로가 아닌 고통 없는 방법으로 백성들의 세금과 공과금을 떼어가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방법은 같은 돈을 아니, 좀더 많은 돈을 거둬들이면서도 훨씬 더 신속했고 확실했다.”

 

 

“이제껏 보지도 못했던 많은 양의 돈들이 마치 신선한 피처럼 공공연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금화, 은화, 지폐 등을 적어도 눈요기만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곤경은 단지 일시적이고 그래서 참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전에도 물론 돈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흔치 않았고 구렁이가 몸을 감추듯 돈을 감추고 살았으며 권력이나 자기 방어라는 형태로만 자신들의 우월성을 나타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부는 향락과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형태로 공공연하게 표출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의 환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감추던 향락을 이제부터는 돈으로 살 수 있고 드러내놓고 즐길 수가 있었다. 이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더욱 돋웠고 향락을 찾는 사람의 수를 늘렸다. 이제껏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거나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던 여러 가지 정욕과 식욕, 기타 욕구가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추구되었다.”

 

 

“철도 등 다양한 공사가 시작되면서 시장에 큰 돈이 풀리자 물건 값과 생활필수품 가격이 뛰었다. 돈벌이가 있고 품삯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 필요한 것보다 언제나 적어도 20% 정도는 부족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더욱 고되게 하고 점점 미치게 만드는 인위적인 장난이었다. 이방인들이 가져다 준 풍족한 이윤과 안락한 생활에는 동시에 대가가 있었고 또 아무도 그 법칙을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어서 누구도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하고 불가사의한 조작의 단계라는 것이 점점 더 뚜렸해 졌다.” “새로운 철도로 사람이 얼마나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를 가는지 어떤 일로 가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가 언제나 이로운 것이 아니다.” “어느 정부가 자기들의 시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붙일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반대로 진행된다던가 혹은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껑충 뛰어오른 물가는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히려 계속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 세르비아 은행과 이슬람 은행 두 곳이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약을 먹듯이 어음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손쉽게 빚을 지게 되었다. 벌어들이는 돈보다 계획 없이 써대는 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더 수월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물가가 더 올라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물건들이 더욱 늘어났다. 장사는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점점 더 값싼 것만 찾게 되었다. 물건을 많이 사고는 갚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유일하게 확실하고 훌륭한 사업은 군대나 정부 기관에 물건을 대는 것이었지만 그 일을 누구나 따낼 수도 없었다. 국세와 지방세는 점점 더 늘어났고 종류도 많아졌다. 세금을 걷는 태도도 갈수록 깐깐해졌다. 주식으로 생기는 이익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넘어갔고 손해는 방방곡곡으로 번져서 영세 상인들에게서 소매업자, 소비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모든 인간 세대는 문명에 대한 자신들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문명이란 장소와 보는 시각에 따라 항상 불타고 그을리고 또 사라지고 하는 법이다.”

 

 

저자 이보 안드리치는 이 소설로 196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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