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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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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언어는 서로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언어는 ‘눈’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낱말로 ‘함박눈’에 해당하는 말을 가진 언어는 많지 않다. 한 언어가 적시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언어는 적시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는 확실한 것이 다른 부류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되며, 어떤 언어로는 절실한 진실에 다른 언어는 관심조차 없다. 언어가 서로 만날 때 이 불확실한 것들이 솟아올라와 산과 들을, 사랑과 증오를 새롭게 고찰하고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

한 언어 관점에서 다른 언어는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숨은 진실을 쌓아놓은 저장고와 같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언어를 지키고 가꾼다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의무가 된다.

모국어란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이 태를 묻고 성장한 땅의 방언이기도 하다. 이 방언은 세상의 모든 말을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방언은 자주 우리 언어 감각을 현실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끌고 내려간다. 표준어를 토론의 언어라고 한다면 방언은 자기 고백의 언어라고 하더라도 무방하다.

(영어라는) 기호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오직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인데, (우리)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정신의 식민화 저항

“글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많이 쓰게 되면 글 쓴 사람의 사고가 너무 단순하거나 게으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 있다. 이런 말들은 글에 현실감을 주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체성을 없애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살랑살랑’은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어느 정도 전달하지만 그 바람을 개별화해주지는 않는다. 상투적인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섣부른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설명 방식에는 이해가 쉽지 않은 것들을 가난이나 몽매함의 탓으로 돌려 농어촌을 도시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음모가 종종 숨어 있다. 그 음모 속에서 삶의 깊은 속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의 천박한 시선 아래 단일한 평면이 되어버린다. 나름대로 삶의 중심이었던 자리들이 도시의 변두리로 전락하는 것은 그다음 수순이다. 식민주의의 권력자들은 삶을 통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모더니즘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염두에 두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카오스 이론

“복잡성 이론은 내가 공부한 분야의 말로 이해하면 (복잡해서 해결할 수 없다는) 나쁜 믿음에 빠지지 말자는 말이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원인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은 그에 대한 관측과 추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당면 목표는 더 큰 목표와 어느 선에서건 연결되지 않으면, 벌써 알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줄 수 없다.”


무의식

“저 자신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저 자신도 바꾸지 못한다. 저 혼자만의 터전이 마음속 깊은 곳일수록 더 그렇다. 나의 무의식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의지에 따르지 않으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타자(무의식)를 품고 산다. 자기이면서 자기인 줄 모르는 자기, 자기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 자기 안의 타자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의지를 훼방하지만, 많은 창조자의 예에서 보듯이 때로는 의식과 의지가 이를 수 없는 것을 이 타자(무의식)가 이루어내기도 한다.”


스카이캐슬

“미숙한 선생은 그 영향력의 깊이로 자신의 교육자적 자질과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학생의 정신과 육체를 식민화하려 한다. 하지만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지배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국가의 본질

“철부지 정부가 일본과 무슨 협약을 했건 그건 정부의 일일 뿐이니 한국인들이 자기 손으로 세운 소녀상을 철거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돈부터 건낸 일본 정부는 한국에 사기를 당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사기는 무슨 사기, 우리가 보기에 일본이 서둘러 꾸며낸 협약은 조카가 가진 땅을 헐값에 사보겠다고 엉뚱하게 팔푼이 삼촌을 꾀어 꼐약서를 쓴 꼴과 진배없다.”


역사의 발전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하기 전에 사회는 먼저 여자에게 명령한다. 가부장 사회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부터 다른 일까지 삶의 실제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는 사회의 막중한 명령을 자신 어깨로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남자들은 자기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가부장 사회에서 착한 남자건 나쁜 남자건 남자의 서사는 같다.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희생자의 서사다. 역사의 발전은 늘 희생자의 서사로부터 시작한다.”


책 읽는 법

“제가 무지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


이런 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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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 도착을 미리 통지받는다네. 특급인지, 급행인지, 화물열차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벨 소리가 울리면 난 건널목 차단기를 내리고, 빨간불을 켜서 모든 차량 통행을 멈추게 한다네. 레일이 진동하기 시작하면,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수백명의 사람을 싣고 굉장한 속도로 통과한다네. 내가 차단기를 다시 올리고 빨간불을 파란불로 바꿔 놓으면 이번엔 자동차들이 길을 건너지. 운전자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어. 그리고 기차 승객이나 자동차를 탄 사람이나 모두 떠나 조용해지면 그때 나는 혼잣말을 하는 거야. “잘 했어 아주 잘 잘했어” 고작 수문 관리인인 집사람 오빠에게 내가 때론 이런 감동 어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는 꽤나 신경이 거슬리는 모양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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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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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밤은 선생이다’가 아닌 ‘밤이 선생이다’라고 한 점은 전환과 변환의 느낌을 살린 듯하다. 밤이 저자의 생각과 글에 자양분이 되었나 보네’란 생각으로 따뜻한 산문 80여 편을 읽어 내려갔는데, 책 중반을 넘자 저자가 ‘밤’에 대해 설명한다.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시인들은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 법을 독점하는 사회와 제도가 있다.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라고 저자는 밤의 의미를 말한다. 내 짐작은 반만 맞았다.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본다면, 사람은 나이 먹으며 본능적으로 보수화된다, 지킬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흔이 넘은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 법을 독점하는 사회와 제도”에 그는 “어둠의 입”으로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다. 저자는 날카롭다. 산문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앞 삼거리 한복판에 난데없이 돌덩이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전면에는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는 문장 하나가 큰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에피소드다. 나도 저자가 언급한 그곳에 자주 갔었기에 그 돌덩이를 여러 번 봤다. 내게는 그냥 ‘자기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란 스쳐 가는 불쾌감만 있었지만, 저자의 생각과 표현은 깊이가 달랐다.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은 그 비석 앞을 지나가며 그것을 보아야 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부도적자로 취급할 뿐 아니라, 개인의 행불행을 그 사람의 도덕성에 연결하려는 의도를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장래가 밝지 못한 사람은 모두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야말로 도덕을 빙자하여 그 불행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횡포다. 설령 그 문장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그것을 돌에 새겨 공공장소에 세워둘 권리는 없다. 설치물이 거리 한복판에 군림할 때는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무차별하게 위압할 수밖에 없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한 단체(바르게살기운동본부)가 공공장소를 점유하여 자신들의 도덕률을 온 천하에 호령할 수 없다. 게다가 한 장의 플래카드로 걸려 있을 때와 돌에 새겨져 있을 때는 그 의미의 무게가 다르다. 돌에 새긴 글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안을 넘어서서 모든 시대에, 다시 말해서 영원히, 그 진리성을 과시한다.” 저자 말은 승효상 건축가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서 말한 뜻과 맞닿는다. “미개한 사회로 갈수록 기념탑의 숫자가 많다. 기념탑이란 게 본시 구호와 선전을 위한 원초적 도구인 까닭이다. 선동과 구호의 선전을 위한 건축물 목적이 ‘도취’라면 인간을 비인간화시킨다. 이것은 비윤리적이다.”



저자는 ‘밤이 선생’이라 했지만, 내 느낌은 글에 있어 그의 선생은 ‘기억’이다. 저자는 기억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 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슬프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 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늠된다.”



이 책 80여 편의 산문은 거의 모두 저자의 기억 혹은 추억을 담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고향과 군대, 강사 시절 등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다. 저자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와 함께 들어간 주막에 대한 기억이다. “검은색으로 물을 들인 주모의 무명베 치마, 연기에 그을린 서까래, 가마솥 위 살강에 놓인 하얀 그릇들, 어설프게 닫힌 주막의 나무 문짝….” 또한, 저자의 군 복무 시절 기억의 한 토막도 그의 비범한 기억력을 보여준다. “내 머리 위 오리나무 가지의 나뭇잎들이 그 사각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푸른 벌레들이 오리나무 잎을 갉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따금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벌레들을 쪼아가곤 했다.” 이런 기억이 그 당시 실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깊은 감수성으로 느낀 순간을 포착하고 고이 간직하여 현재에 표현한다.



이처럼 이 책의 좋은 점은 많지만, 단연코 최고는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시도 아닌데 운율감 조차 느껴진다. “춘천은 봄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저 남쪽 땅 고흥의 금빛 들녘에 푸른 배추가 속살을 드러내고 마산에서 충무로 넘어가는 볕 바른 고갯길에는 진달래가 키 넘어 피어날 때도, 춘천의 아침은 여전히 손이 시리다. 플라타너스는 지난가을의 마른 잎을 3월 중순에도 외투처럼 둘러쓰고 있으며, 이따금 강의를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면 예술관 뒤 숲 너머로 대룡산 꼭대기에 눈 녹을 기미가 전혀 없다.” 누가 산문은 ‘운문에 대하여 운율이나 정형에 의한 제약이 없는 보통 문장’이라고 정의 내렸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읽기 몹시 지루했다. 더 정확한 표현은 피곤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삶의 통찰, 아름다운 문장 등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갖춘 책인데, 지루하고 피곤하다니. 그래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려고 서문을 펼쳤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와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고, 이제나저제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다. 발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 포기할 수 없는 전망 하나와 줄곧 드잡이해온 것 같기도 하다.” 저자 설명에 내 궁금증의 이유는 없었지만, ‘방식’이라는 단어에서 답을 찾았다. 저자는 ‘같은 방식의 생각’을 말했지만, 내게 책이 지루한 이유는 ‘같은 방식의 형식’에 있었다. 책 내용은 좋은데 형식이 날 피곤하게 했다.



산문 80여 편의 서술 방식은 거의 모두 같다. 그러니 읽기 힘들고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수록된 모든 산문은 길어야 4쪽을 넘지 않는데, 서두에 본인 추억이나 특정 상황을 툭 던져놓는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읽는 사람이 금세 파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던져놓은 서두에서 주제 혹은 단어, 개념을 연결고리 삼아 추가 몇 가지를 부연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하고 싶었던 말을 설명하며 맺는 식이다. 산문 몇 편은 이런 연결이 부자연스럽고 매끄럽지 않았으며, 한두 편도 아니고 80여 편 거의 모든 산문을 이런 같은 형식으로 계속 밀고 나간다. 책은 내용과 문체뿐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는 점을 알았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유희와 노름은 늘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삶과 노동은 이미 이루어놓은 결과에 졸곧 얽매여야 한다.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하지만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우리가 일상 쓰는 언어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구실 아래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하는 일이다.

발자크는 자기 안에서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자기 시대 비판의 창조적 열망으로 바꿀 수 있었기에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였다.

독재자는 국민들 나태와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저마다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다스릴만한 판단력이 있다고 믿지 않을뿐더러 그런 능력 자체가 위험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간섭했고 우리가 저마다 살아야 할 삶의 목표까지 정해주었지만, 사람들은 날마다 불안했고 나날이 주눅이 들어갔다. 판단하고 선택하기 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독창적인 사고는 어떤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갈 때에 자주 얻어지며, 그렇게 얻어진 사고는 이전 사고체계와 크게건 작게건 단절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한 사람을 사회에서 단절시키기도 한다. 아무도 성찰하지 않는 관행이 그렇게도 많고,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이 어디에나 통하는 진리여서 좋은 것이 너무나 많은 이 사회에서 좋다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낙원의 악마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을 때 프랑스 어느 가톨릭 신부는 경건하고 건강한 삶의 마지막 모델이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썼다. 동구권 노동자들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발자크와 도스코옙스키와 체호프의 소설, 보들레르와 투르게네프와 마야콥스키의 시집을 포함한 백 권 남짓한 책이 잘 정리되어 꽂혀 있는 그 서가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달력이나 잡지에서 오린 성인들의 초상화, 또는 쿠르베나 르누아르 그림을 집주인이 손수 만든 액자에 끼워 걸어놓은 식탁 옆의 아름다운 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일상 대화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정신을 집중하여 듣고, 어떤 가벼운 화제라도 정신을 집중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영영 사라질 것이라고 썼다.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연극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썼다. 지금 내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 바로 내 삶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던 바의 진의를 어느 정도 짐작한다. 어떤 원칙도 없이 허욕과 허영에 기대어 아슬아슬한 연극을 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의 옛날이라 하더라도 옛날은 외국이나 다름없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말들이 진실을 감추고 있어 우리가 불행한 세월을 오랫동안 눈감고 있는 것이다. 삶을 개혁한다는 것은 말들이 지니고 있는 힘의 질서를 바꾼다는 뜻도 된다. 진실을 꿰뚫으면서도 해석의 여지와 반성의 겨를을 누리는 새로운 문체 개발이 개혁의 성패를 가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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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9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31 21:15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밤에 기억 되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

cyrus 2016-12-29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산 교수님이 에세이를 쓰는 대신에 아폴리네르 작품을 많이 소개해줬으면 좋겠어요. ^^

북다이제스터 2016-12-31 21:21   좋아요 0 | URL
에세이는 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6-12-29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산 선생님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분이신가본데,
저 책만을 읽어서는 저는 그 뭔가를 잘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안목의 소박함을 탓했었죠.

이렇게 정성들인 리뷰로 조목 조목 열거해주시니, 완전 공감이 가고,
저안목의 소박함도 조금쯤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31 21:1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ㅎ 저만 읽기 불편한게 아니었네요. ^^

AgalmA 2016-12-31 0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예이론들 보면 내용이 형식을 끌고 온다고 말하죠. 즉 독창적인 사고는 독창적인 형식을 가져 옵니다. 우리가 천재라 부르는 그들이 그랬듯이. 직접 창작을 해보면 그게 어떤 건지 바로 알게 되죠.
그게 아니더라도 문학과 사회과학 글쓰기만 비교해봐도 바로 알 수 있죠. 그 내용 때문에 다루는 것, 방식이 상당히 다르죠. 각각에 익숙한 사람들은 타 장르의 글에 대해 또 만족이 다르고^^ 지금 북다이제스터님처럼.

황현산 선생님도 직접 말씀하신 바대로 하나의 전망, 집중하는 내용이 그랬기에 형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봐야죠. 황현산 선생님은 수석을 오래 들여다보듯 살피시는 스타일이시지 거기 없는 걸 잡아채는 스타일은 아니시니까요^^

암튼 북다이제스터님 새해 복많이 책많이^^/ 올해 저는 책을 160권 정도 샀더라고요. 나는 대체 어쩌자는 위인인지ㅜㅜ

북다이제스터 2016-12-31 21:18   좋아요 0 | URL
그런거 같습니다. 어떤 문예인가에 따라 글쓰기가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6-12-31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지난 한 해동안 경제고전과 서양미술사 관련하여 좋은 책 소개와 리뷰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17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31 21:20   좋아요 1 | URL
제다 오히려 더 감사한 한해였습니다.
겨울호랑이님의 좋은 글 많이 읽고 글쓰기 모범으로 정말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
새해 더욱 행복하세요. ^^
 
당신에게 실크로드 - 여자 혼자 경주에서 로마까지 143일
정효정 지음 / 꿈의지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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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탄’으로 끝나며 서로 구분조차 잘되지 않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스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인도유럽어족의 라틴어 status, 영어 stand와 어원이 같으며, ‘지방’이나 ‘나라’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스탄(stan)’이 우리나라 말 ‘땅’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說)도 있다. ‘-스탄’ → ‘ㅅ탄’ → ‘딴’ → ‘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 영향은 생각보다 뿌리 깊다. 백두대간 호랑이는 있어도, 사자는 없는 우리나라에서 함경북도 ‘북청사자놀음’ 민속은 오래전 서역 영향이기도 하다. 저자도 실크로드의 한 끝단을 중국 시안이 아닌, 우리나라로 보고 143일간 실크로드 횡단 대장정을 경주에서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신기한 이국 문물과 아름다운 경치는 이미 충분히 봤다. 이제 나는 (실크로드) 저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여행하며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지 그들 눈으로 보고 싶다”고 저자는 희망하며, 여행 가방을 꾸리고 자칭 노처녀 혼자 길을 떠났다. 저자는 키르기스스탄 송쿨(Song Kul) 호수로 가는 길에서 어느 부부로부터 “가족 소풍 초대를 받았다. 승용차 안을 보니 귀여운 아이 둘과 양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소풍 장소에 도착한 후 “아이들은 전통음악에 맞춰 어른들 앞에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공터 구석에 솥을 걸어두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발견했다. 아까 봤던 귀여운 양, 지금은 식재료가 되어 자기 가죽을 접시 삼아 부위별로 놓여 있었다. 머리는 가죽 옆에 눈을 감고 얌전히 놓여있고, 하얀 지방은 나무에 넓게 걸려 있다. 아, 문화충격.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소풍에 애완양을 데려가는 다정한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애완양은 무슨! 그날 점심 도시락을 애완양이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도시민의 무지함이라니.”

 

 

저자가 광활한 중앙아시아 대초원에서 만난 대자연은 묘사와 사진만으로도 감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키르기스어로 별은 ‘줄드스’라고 한다. 하늘 가까이에서 보는 별은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별은 까만 하늘에 점점이 박힌 2차원의 별이었다면, 이곳에서는 3차원이었다. 처음으로 별이 실존한다는 것을 느껴본 순간이었다. 문득, 가방 속 보드카가 떠올랐다. 보드카를 들고 호숫가로 나갔다. 지금 이곳에는 호수, 보드카 그리고 나뿐, 살면서 이런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에는 별이 가득 차있다. 그리고 눈앞에 이 모든 빛을 품고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호수가 있고, 호수 너머엔 산이 가만히 서 있다.”

 

 

중국 둔황의 명사산(鳴砂山)은 ‘모래가 우는 소리’라는 뜻이다. “바람에 모래가 날리면서 나는 소리가 울음소리 같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이 소리를 ‘밤에 여행자를 불러내는 유령의 소리’라고 했다. 대오에서 멀어졌을 때 동요 목소리인양 속삭이는 이 목소리를 따라갔다가 영영 길을 잃고 사라진다는 거다. 심지어 북과 같은 악기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환각에 사로잡힌다고도 했다. 사막에는 사막만의 소리가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모래가 항상 동서로 40km, 남북으로 20km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람이 불면 모래가 아래로 흩어지지만, 밤이 되면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흩어진 모래가 다시 위로 쓸려 올라간다고 한다. 모래는 밀가루처럼 곱고 금처럼 반짝였다.”

 

<명사산 월아천>

 

인간 욕망이 파괴한 대자연을 보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는 것 같다. 아랄 해는 남한 3분의 2 크기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담수호였다. 하루 160톤의 철갑상어와 잉어가 잡혔고 근처 통조림 공장은 24시간 돌아갔다. 하지만 1970년대 초 구소련은 목화재배를 위해 거대한 운하를 건설했다. 문제는 이 수로가 아랄 해로 흘러들어 가는 강줄기 방향을 돌려, 아랄 해에 수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금 바다 면적은 종전보다 10% 정도로 줄어 200km 넘게 축소되었다.” 바다 염도 또한 5배 이상 증가하여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은 바다가 되었다. “한때 바다였던 사막에는 배들이 죽어 있는 ‘배들의 무덤’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아랄 해를 복원하기보다 이 일대의 가스와 유전 개발에 힘 쏟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곳에 진출해 있다.” 그곳에서 저자가 만난 고려인은 “한때 이곳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과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기업 문화에 적응이 안 됐다고 한다. 물론 한국 기업과 일할 때 수입은 지금보다 나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두 번 다시 한국 사람과 일하고 싶지 않단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너는 회사가 일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해? 돈을 준다는 이유로? 난 아니라고 봐.”

 

 

저자는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 일련의 한국 청년 종교 선교단을 만났다. 일명 ‘할렐루야 루트’를 따라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에 선교하는 청년들이다. 저자는 그들에게 “지금 이 나라에서 선교하는 게 불법인 줄은 알아요?”라고 물었다. “무슬림 국가인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불법 선교로 강제추방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 저자가 방문한 안디잔의 주메 모스크에 남겨진 방명록에는 한국 방문객이 국어로 쓴 글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릅니다.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들의 악한 영이 무릎 꿇고 아버지의 영광이 승리하길 바랍니다’와 같은 기도문”들이 적혀있다.

 

 

이란에서 한국 드라마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장금 시청률은 90%, 주몽은 80%를 넘었다. “한 이란 청년이 아버지에게 양을 팔아 한국으로 가 소서노를 만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자 낙담해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이란에서 있기 있는 한국 드라마는) 죄다 사극이었다. 사극이 아닌 드라마는 거의 몰랐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여성이 바깥출입을 할 때 장옷을 쓰거나, 처첩 제도가 있거나, 아버지 권위가 강하다거나 등의 조선 시대 가부장적 정서가 자신들 문화와 비슷해 더욱 공감을 얻는다고 한다. 결국, 한국 드라마가 이란에 상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강한 가부장적 정서였다.” “애초 ‘한류 콘텐츠의 우수성’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김이 빠지고 말았다.”

 

 

저자가 방문한 투르크메니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북한”이라고 불린다. 전 대통령 “나야조프는 다양한 기행으로 본의 아니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웃음을 줬다.” “자신이 심장 수술을 받은 후 금연을 경고받자 모든 국민에게도 금연을 명한다거나, 대입시험, 졸업시험, 심지어 운전면허시험에도 자신이 쓴 책을 공부하게 했다.” “그는 서커스, 오페라, 발레 등도 자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했고, 수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엔 병원과 도서관도 폐쇄했다. 수많은 일화 중 가장 나를 웃게 한 것은 시적 감수성이 충만한 그가 매일 저녁 TV를 출연해 자작시를 낭송했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의 특이한 어법이었다. 그들은 말끝마다 ‘우리 대통령’을 붙였다. ‘우리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새 기차를 사주셨다’는 식이다. ‘대통령이 사준 게 아니고, 국민 세금으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한 것 아니냐’라고 물어봤지만, ‘그게 그거 아니냐’는 대답이다.”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에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의 국토는 한반도의 2.2배이며, 90%가 사막이지만, 사막엔 세계 5위의 원유와, 4위의 가스, 3위의 광물자원이 묻혀있다.” 경제 잠재력은 정치보다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힘들고 긴 여행 후 저자 소감은 다음 문장들에서 알 수 있었다. “경계를 벗어난 세상 밖에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갔다. 이렇게 사는 것도 삶이고 저렇게 사는 것도 삶이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수가 따르고 있다고 해서, 그게 정답일 리 없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마음이 연약한 우리가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위한 도피처였고, 타인 시선으로부터 공격받지 않으려는 방공호였다.”
이 책 읽으며 저자와 함께한 이틀 간 실크로드 여행은 즐겁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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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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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人生なんてくそくらえ>를 구글 번역기에 돌려 보니,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로 우리나라 책 제목과 똑같이 나온다. 일본어를 잘 모르는데, ‘엿 먹어라’는 한국식 표현 아니었던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 평생 삶을 원망하며 인생 말년 비참하게 죽기 바로 전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말하며 후회하지 말고, 독립심을 갖고  자존감을 느끼며 평소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호기롭게 외치고 인생 역경을 헤쳐나가라’ 는 73세 작가의 진심 어린 에세이다. 주장에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저자가 재미있게 쓴 글솜씨를 남긴다.

 


1. 가족에게서 독립하라
부모가 당신을 왜 낳았는가? 부모 자신이 태어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해, 자식에게도 그런 감동을 경험하게 하려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한심한 부모다. 머리에 썩은 된장이 꽉 차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이 비극과 참극으로 얼룩져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부모 자신이 다소나마 행복을 누렸다면 그건 그저 우연이다. 항간에 떠도는 지옥이란 바로 이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부모들이 판단력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런 잔혹한 세상에 자식을 낳는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겠는가? 그들은 상당히 막연하고 안이한 이유로 당신을 낳았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언뜻 사랑이 넘치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부모의 동물적인 이기심에 지나지 않으며, 사상이나 사고와는 동떨어진 본능 그 자체에 좌우된 끔찍한 결과일 뿐이다.

 


당신이 학생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부모를 떠나야 한다. 부모 기대를 저버리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포함한 가정환경에 세뇌되어서다. 가장 악질적인 경우는 부모 자신 노후를 책임지게 하고 보살핌 받고 싶어 자식을 낳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는 부모는 남보다 훨씬 못한, 악마나 다름없다. 부모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대가성 있는 이기적 사랑, 안타깝게도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부모가 보이는 사랑의 진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안을 해소하고 싶어서 부모와 자식 서로 언제까지나 들러붙어 있는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면, 다 같이 무너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이 좀 더 빨리 서로의 길을 걷는다면, 서로 각자 사는 기술을 일찌감치 체득할 수 있다. 그저 서로에게 의지하고 어리광 피우는 관계는 진정한 부모 자식 사이라 할 수 없다. 자식은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인생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구실을 둘러대며 단 하루일망정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출이나 다름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이 경우 망설임은 목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란 울고 매달리는 데 명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자기밖에 염두에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부모를 버리는 것이냐 유의 비난과 애정과 정에 이끌려 판단해서는 안 된다. 행여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양심에서 우러나왔다 볼 수 없으며, 부모나 국가에 유리한 형태로 조작된 도덕 등의 독을 먹어 발생한 경련에 불과하다. 만약 자식이 보살핌 속에 살아온 탓에 집을 떠날 마음이 전혀 없다면, 부모는 강제로 쫓아내는 수밖에 없다.

 


가정이 추악한 꼴로 붕괴하기 전, 가족은 아름다운 꼴로 해산해야만 한다. 뒷집 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아닌 한, 자식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인생을 헛되이 날리면서까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설령 부모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났어도 혼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라면 멀찍이 지켜보는 정도면 된다. '요즘 젊은이는 부모를 버리고도 태연하다'는 노인네들의 투정을, 혹시라도 귀담아들어서는 안 된다. 미안해해서도 안 된다. ‘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입에 붙은 그들 실체는 교활함 자체이다. 어떤 부모이든 부모임에 틀림없다는 고리타분하고 감정적인 논리에 굴복해 버리면, 그 순간 서로 인생은 숨통이 끊기고 만다. 부모 자식이 다 함께 타고 남은 재 같은 가엾은 인생을 살게 된다.

 


2. 직장 월급쟁이가 되지 말라
문명 발달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복잡함이 일 대부분을 불쾌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켰다. 인류 모든 고뇌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원래 산다는 것은 훨씬 즐겁고 사는 의미를 굳이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좋고 말고 없이,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야만 한다.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아무 재미없는 일에 구속되어 잿빛 인생을 살아야 한다.

 


고용주가 당신 학력을 그렇게나 중시하는 까닭은 오로지 순종할 인물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상 가치관에 어디까지 순종적일 수 있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한 인간인지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직장인 처지란 노예 그 자체라는 것을 모르는가? 왜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가? 제정신인가?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9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일이다. 인생 전부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것이다. 지시에 따르며 인형 취급당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이라는 거짓으로 점철된 무지갯빛 꿈을 꾸는 동안 인간으로서 존엄성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안정된 직장이란 아버지의 무사안일주의에서 태어나고, 어머니가 심어 준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직장인이라는 직업은 없다 치고 일을 선택해야 한다.

 


3. 국가를 믿지 말라
국가는 불특정 다수의 것이 아니라, 특정 소수의 것이다. 불과 한 줌도 안 되는 인간들이 독차지한 더없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며 불합리한 사유물이다. 그들은 세심한 조처로 정체를 절묘하게 감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라를 어떻게든 마음대로 움직일 힘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러기 위한 충분한 자금이 있다. 때로는 세금까지도 당당하게 마음대로 쓴다. 무엇보다 법률이 그들 편이다. 민주주의다 자유주의라는 국가일 경우에는 수많은 국민에게 환상과 착각을 심어 줄 가능성이 있다. 가령 더는 민주적일 수 없을 만큼 민주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특정 소유의 사유물이거나 거의 사유화된 동산이나 부동산이다. 국가는 불특정 다수인 국민 따위에 애초 관심이 없다. 국민의 비극이 폭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국가는 이런 현실을 무시한다. 국가가 국민의 것이었던 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 한 번도 없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대원칙이며,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국가 대표라는 나부랭이가 된 작자들은 국가를 지배하는 실체인 대기업 수하가 되어 이권과 금권에 들러붙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적이거나, 자신들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자들에게 눈에 띄지 않는 음흉한 수법으로 채찍을 휘두른다. 인생을 봉인하고 출세를 방해하거나 직장에서 쫓아내는가 하면, 아예 직장을 갖지 못하게 하는 등 사회적 음지로 내쫓아 해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인간으로서 질적 수준이 낮은 국민이 국가를 정의와 이상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최대 주범이다. 음흉한 자들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지지하는 국민 또한 악당의 아류다.

 


국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국가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할 고매한 정신과 능력의 소유자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존재할지 모른다는 환상조차 단 한 순간도 품지 마라. 국가는 적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정해져 있다는 인식밖에 없고, 절망적인 체념밖에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늘어 국가는 크게 안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더 바랄 나위 없는 국민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절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모범적인 노예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가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이다. 국가 질서를 따르고 사회 상식에 발맞추면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무난히 헤엄쳐 나갈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 파국의 씨앗이다. 국가를 사유화한 특정 소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절대 저항하지도 않는 젊은이를 교육이 육성하고 있다. 국가는 삶이란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이라느니, 때로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느니 하며 마음이 넉넉한 양 자세를 취한다. 국민 불만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는 속셈이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국민 분노에 불이 붙는 것이다. 대규모 집회나 노동쟁의 등으로 격렬하게 추궁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국민은 그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멍청해졌다. 자신 처지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굴욕적인 평온에서 헤어날 용기가 없고 특별 취급을 받는 무리를 뭉뚱그려 싹 잘라 버릴 배짱도 없다. 하물며 폭동이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하는 지배층은 대지진이나 중대한 원전사고를 당하고도 양처럼 온순하게 처신하는 국민을 보고서 더 확신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군사비는 늘어나고 끝내 정말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는 채산이 맞지 않게 되어, 전쟁이 시작되면 늦는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독재자에게 굴복해 소총을 들고 군가를 흥얼거리며 행진하고 있는 허울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총알받이 하나로 최전선에 배치되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이는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잔혹하게 살육하는데, 비극의 연출가는 안전한 곳에서 유유자적 희생자 수를 아주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작전을 짜고, 피도 눈물도 없는 명령을 내리며 흐뭇해 할 것이다.

 


4. 종교를 멀리하라
종교는, 악 그 자체이다. 종교단체는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을, 구원을 찾아 모여드는 타율적인 얼간이들을 미끼로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신이라는 옷을 두른 악이며, 원래 자유로워야 할 개인을 속박하는 컬트이다. 신자는 고독이 바로 해소된 듯 착각에 빠져 기뻐하고, 자신이 생각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환경에 취한다. 신자는 모두, 사람의 나약함을 노리고 가만히 앉아서 한탕 하려는 악당들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립정신이 깎여 나간다. 마음과 정신은 물론 혼까지 쏙 빼앗기고는 거의 백치가 되어, 존엄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가엾은 노예 신세로 전락한다. 사실 종교단체는 신자 대부분이 신의 은혜로운 구원을 얻기 위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태생에 갖가지 문제점이 있고 특히 육친의 사랑에 굶주려 마음이 뻥 뚫린 사람들은 사랑을 과대평가해 그것만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리라는 큰 오해를 품고 자신 전 인생을 갖다 바치고, 어떤 불합리한 명령에도 복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복잡하지도 않은 세뇌 요법을 반복 사용하면, 신자들을 죽을 때까지 봉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 안의 힘을 믿어라.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에서 헤어날 수 없고, 헤어나려 몸부림칠 필요도 없다. 자립의 길을 따르면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들에 휘둘려야 하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만에 하나 아무리 분투해도 모자라 비참한 일을 당했거나 사면초가에 빠졌다 해도, 할 수 있는 만큼 다 하고 그런 지경이 되었다면 시원하게 그것도 인생 일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5. 찌질한 사랑을 하지 말라
연애라는 말은 리얼한 성욕을 중화하기 위해 아름답고 예쁘게 포장했을 뿐이다. 뱀의 교미보다 끔찍하고 난잡한, 그저 암컷과 수컷의 뒤엉킴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연애의 마지막 단계다. 그리고 씁쓸한 기분과 넌더리가 날 정도의 환멸을 통과해야 비로소 어른으로 한 걸은 더 나아가 인간적인 성장을 꾀할 수 있다. 동물과 같은 족속인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예쁜 연애만 원하는 일본 초식남 젊은이들을 언급하는 글인 것 같다). 남자의 소녀 취향적인 이미지와 여자의 타산이 우연히 일치해 결혼이 성립되었다 해도, 여전히 나르시시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자와,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은 초조함에 남자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계산이 엇나간 여자 사이에 금세 수습이 불가능한 균열이 생긴다.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핵심인데, 이를 싹 무시하고 자신이 혹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연애 놀이는 몇 번을 한들 행복이라는 종착역과 한참 거리가 멀다.

 


6.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 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하는 것이다. 사실 훌륭하게 마친 일생이라는 말도 기교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비참하지 않은 최후는 없다. 나는 칠십을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 안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한다.

 

 

 

 


일본 젊은이들 현 상황을 잘 모르지만, 그들은 집에서 안 나가는 것일까, 혹은 못 나가는 것일까? 자영업 창업을 안 하는 것일까 혹은 못하는 것일까? 찌질한 연애만 하며 결혼하지 않는 것은 그들 취향이며 의지 때문일까? 개인 탓이 아닌 일본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못’ 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꼰대의 또 다른 잔소리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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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3-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공감 가려하네요 :-)

북다이제스터 2016-03-29 20:00   좋아요 0 | URL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3-2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이다 가튼 구석이 있죠 : ㅡ)

북다이제스터 2016-03-29 20:00   좋아요 0 | URL
정말 톡 쏘고 시원했습니다.

cyrus 2016-03-29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지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져요. 그래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기 쉬워요. 머리 아프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면 살아야겠어요. 한번뿐인 인생인데 황혼기를 대충 흘러 보내면 아쉽잖아요.

북다이제스터 2016-03-29 20:02   좋아요 0 | URL
아직 인생 황혼기 아니시잖아요? 아닌가요?

cyrus 2016-03-29 20:02   좋아요 0 | URL
네. 아직 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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