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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볼셰비즘이 동유럽으로 확산되자 발칸 반도의 각국 정부는 스스로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정치인들은 소자작농층의 창출로 사회적 안정을 이루어 혁명이 폭발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토지를 잘게 나누다 보니 농민들은 환금 작물 생산에만 매달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서구 대량 생산 농작물과 경쟁이 되지 않아 농민 부채가 증가하고 농촌 현대화는 늦어졌다. 발칸 정부가 조세부담을 낮추고, 신용조합을 확산하는 것만으로 발칸 국가들이 직면한 인구과잉과 비산업화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발칸 각국 정부는 관세장벽을 높이고 외화 공급을 제한하며 곡물 수매로 빚을 탕감해주는 방식으로 농민들을 보호하자 성장세를 나타냈다.”<발칸의 역사>

 

 

 

 

 

 

 

 

 

 

 

 

 

 

 

 

 

 

 


"우리는 왜 옥수수를 바탕으로 하는, 생물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음식을 선호하게 되었는가? 대체 왜 사람들은 반추동물에게서 풀을 빼앗아버린 것일까? 어떻게 해서 옥수수와 화석 연료로 생산한 패스트푸드 햄버거가 풀과 태양광선으로 생산한 햄버거보다 가격이 저렴한 음식이 된 걸까?

 

 

가장 분명해 보이는 대답 한 가지는 틀린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밭이 풀밭보다 더 많은 음식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랜드 연구소는 연구를 통해 1에이커 옥수수 밭보다 잘 관리된 1에이커 목초지에서 더 많은 영양소(탄수화물과 댄백질)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많은 종의 풀을 기르면, 매순간 방목지 곳곳에서 광합성 작용이 일어나 더 많은 태양광을 흡수하고 따라서 옥수수 밭보다 더 많은 바이오매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또한 방목지에서 자란 풀은 사실상 그 전부를 가축이 먹을 수 있는 반면 옥수수 밭에서는 옥수수 낟알밖에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값싼 옥수수 유혹은 강력하며 값싼 에너지의 유혹만큼 저항하기 힘들다. 사육장이 생겨나기 전에도 쓸 만한 풀들이 바닥날 때면, 특히 가을이나 겨울에, 농부들은 소에게 옥수수를 먹이곤 했다. 도축하기 전에 살을 찌우기 위해서였다. 소를 키우는 사람들은 옥수수가 밀도 높은 칼로리 원천으로 풀보다 더 빨리 고기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옥수수는 훨씬 더 동질적인 상품이었다. 풀을 먹고 살찐 소의 고기에서 흔히 발견되는 계절적, 지역적 차이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한 양의 풀을 길러 소에게 일 년 내내 풀을 먹인다는 생각은 점차 사라졌다.

 

 

이와 함께 옥수수는 계속하여 더욱 풍부해지고 더욱 값싸졌다. 농부들이 옥수수를 기르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농장에서 식용 가축을 기르는 일이 경제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소들은 집중가축사육시설(CAFO)로 들어갔다. 한편 방목지를 갈아엎어 시장에 내다팔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부들은 겨울에는 일손을 놓고 플로리다로 날아갈 수 있었다. 정부는 이제 농부들이 생산하는 엄청난 양의 옥수수를 처분하고자 했다. 정부는 젖을 땐 송아지에게 풀 대신 옥수수를 먹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했다. 사육장 신설에 세금 우대 형태로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풀로 살찌운 소고기보다 옥수수로 살찌운 소고기에 유리한 마블링에 기초하여 등급 제도가 만들어지도록 힘썼다. (정부는 또한 CAFO에서 대기 오염 방지법과 수질 오염 방지법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그 동안 소 자체도 변했다. 산업이 줄곧 옥수수에 잘 맞는 가축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축들은 일반적으로 훨씬 몸집이 컸고, 풀에서 모든 필요한 에너지를 얻지 못했다. 낙농가들은 홀스타인처럼 생산적인 종들로 옮겨갔다. 홀스타인종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에 풀만 먹고는 거의 살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반추동물에게 옥수수를 먹이는 행위가 어떤 경제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다. 나는 ‘어떤’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제적인 의미가 우리 경제를 바라보는 특정한 시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시각에서는 옥수수로부터 생산되는 값싼 음식 에너지의 고비용을 감추는 경향이 있다. 패스트푸드 햄버거 가격의 99퍼센트는 이 음식에 실제로 들어간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토양과 석유, 보건, 국가의 자금 등 이런 비용은 소비자에게 직접 부담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납세자나(보조금 형태로), 건강 관리 제도나(음식 때문에 생긴 질병이나 비만 형태로), 환경에(오염 형태로) 부담이 지워진다. 사육장과 도살장에 일하는 일꾼들의 복지 그리고 가축들의 복지는 말할 것조차 없다. 이런 눈먼 자들의 계산 방식이 없었다면, 오늘날 풀은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 때가 목초지에서 나와 사육장 안으로 걸어 들어간 이유는 매우 많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 우리 문명과 음식 시스템이 꼼짝없이 산업 논리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는 이유이다. 산업 논리 아래서는 균일성, 기계화, 예측 가능성, 교환 가능성, 규모의 경제가 중시된다. 옥수수에 관한 모든 것이 이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뀌에 잘 맞아들어간다. 하지만 풀은 그렇지 못하다.

 

 

곡물은 자연에서 산업적인 상품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곡물은 저장, 이동, 대체가 용이하다.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비축할 수 있고 또 교환할 수 있기에 곡물은 재산 형태가 되었고, 또한 무기가 되었다. 언제나 잉여 곡물 생산량이 많은 나라가 생산량이 부족한 나라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각국 정부는 자국 농부들이 보다 많은 양의 곡물을 생산하도록 장려했다. 기근에 대비하거나, 다른 목적에 노동력을 투입하거나, 무역 수지를 개선하거나, 아니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국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였다. 농부가 키운 작물의 진정한 수혜자는 소비자가 아니라 군산복합체다. 산업 경제에서 곡물 재배는 더 큰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화학 및 바이오 산업, 석유 산업, 자동차 산업, 약학 산업(약물 없이는 CAFO에서 가축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 기업 농업 그리고 무역 수지 등 옥수수를 재배하면 옥수수 재배를 지원하는 바로 그 군산복합체를 지원할 수 있다. 정부가 그토록 후한 지원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웬델 베리는 <온전한 말(馬)>에서 세계 경제에 의해 지역 경제가 입은 피해와 땅에 가해진 재난은 ‘소규모 지역 생산자와 지역 소비자들이 기업의 전 지구적 산업주의에 저항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로컬푸드 시스템 출현에서 그리고 ‘질 좋고 신선하고 신뢰할 만한 음식을 요구하는 시장의 성장’에서 이런 저항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무엇보다 음식이 이런 저항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가? 음식이 세계화로부터 위협을 받는 수많은 가치의 강력한 메타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지역 문화와 정체성, 지역적 풍경의 존속, 생물 다양성 등 여러 가치가 세계화 위협에 직면해 있다.

 

 

세계화 논리에 저항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음식 세계화는 못마땅해 한다. 세계화 논리에서는 음식 역시 다른 모든 것처럼 상품으로 취급되는데, 이것은 사람들 신념이나 경험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유 무역에 대한 마지막 장벽이 허물어지고  마지막 정부 농민 지원 프로그램이 끝나면, 우리 음식은 가장 싸게 생산될 수 있는 세계 어딘가에서 수입될 것이다. 경쟁 가격이라는 철의 법칙에 따라, 만약 다른 나라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음식을 생산할 수 있다면(토지 혹은 노동력 비용이 저렴하거나 아니면 환경 관련 법률이 더 느슨하거나 뭐든 그 이유에 상관없이)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 음식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글로벌 경제 체제 아래서는 이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자유로워진 땅을 보다 생산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 많은 집을 짓는 데 사용될 것이다.) 미국 토지가 상대적으로 비싸고, 농업 관련 오염과 동물 학대에 대한 우리 인내심이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기에 미래에 우리 모든 음식은 다른 곳에서 수입될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음식을 보다 값싸게 생산할 수 있다면 굳이 자국에서 음식을 생산할 필요가 있겠는가? 십여 가지 이유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또는 나라가 자급자족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농촌의 아름다움, 농부들이 우리 고장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는 지역적 지식과 식견, 슈퍼마켓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농부로부터 음식을 산다는 만족감, 고장의 향취가 묻어 있는 치즈나 꿀의 맛에 대해 생각해보자. 세계화는 효율과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전원의 가치를 표현하는 이 모든 것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 전망은 그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전망과 매우 유사하게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신념을 요구한다. 세계 자본주의는 만약 지금 이곳에서 무엇인가가 사라지도록 허용한다면 우리가 언젠가는 더 큰 행복과 번영을 성취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WTO가 세계 자본주의 지배를 인정하는 현시대에서는 계란을 깨지 않고서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던 레닌 말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감상적인 공산주의가 바로 음식 문제 때문에 혼쭐이 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련은 수백만 명의 소농을 희생시키며 집산화된 산업 농업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소련 집산주의적 농업은 음식 시스템에 맡겨진 책임, 즉 나라를 먹여 살리는 책임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농업 집산화 시스템이 붕괴될 무렵, 소련에서 소비되는 음식 반 이상은 공식적인 규제를 받지 않는 각 가정의 밭과 소농 밭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소련이라는 거석의 외진 구석과 깨진 틈에 있는, 이런 눈에 안 뜨이는 곳이 중요한 음식 생산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라는 거석 심장부에 자리하는 산업 농업도 ‘소비에트식 농업의 말기’를 생각나게 한다. 중앙 집권화된 음식 시스템은 사람들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 우리 음식 시스템 문제는 나쁜 음식이 너무 많이 생산된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경제 안에서 우리 삶은 많은 부분이 개인 통제력을 넘어서 있다. 우리 직업에서 일어나는 변화나 주유소 기름 값, 의회 표결은 개인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음식은 다르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음식사슬에 참여해야 할지 아직도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산업적으로 생산되어 슈퍼마켓 매장에 진열된 산업식품을 거부하고, 다른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결정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시작은 될 수 있다. 이미 다른 음식을 먹고자 하는 소비자측 요구로 110억 달러에 상당하는 유기농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 시장은 시스템 바깥에서 서로 힘을 모은 소비자와 농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아무런 정부 도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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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국에 너무 많은 옥수수가 재배되어서 생산비가 시장 판매 가격보다 낮은데도 올바른 정신을 가진 농부들이 왜 계속 더 많은 땅에 옥수수를 심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하다. 그것은 고전적인 수요와 공급 법칙을 무시하는 왜곡된 농업 경제와 관련 있다. 또 농부들 심리와도 어느 정도 관련 있으며, 농업 정책과는 더 큰 관련이 있다. 한때 생산량을 제한하고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즉 농부들의 생활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정부 농업 프로그램은 생산량을 증대하고 가격을 낮추는 방향으로 조용히 바뀌었다. 달리 말해 정부는 농부들을 후원하는 대신 농부들을 희생시키면서 옥수수 생산 확대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일러 곡선은 기본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떨어질 때 왜 농부들이 모든 합리적인 경제 행위를 무시하고 생산량을 늘리는지 보여준다. ‘가격이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한 농부들이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청구서 대금을 지불하고 채무 이자를 지불하고 싶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바로 생산량을 늘리는 일이죠.’ 농장을 경영하는 가족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년 일정량의 현금 자금이 필요하다. 따라서 옥수수 가격이 떨어지면 수지를 맞추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옥수수를 파는 일밖에 없다. 네일러 말에 다르면, 생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농부들은 결국 토질을 저하시키고 생산성이 없는 땅에도 옥수수를 심고 더 많은 질소 비료를 뿌리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땅에서 몇 부셀의 옥수수라도 더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각 농부가 생산하는 옥수수 양이 많아지면 가격은 더 내려가고 또 다시 과잉생산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부들은 고집스럽게 1에이커당 옥수수 생산량으로 성공을 평가한다. 따라서 그들이 파산한다고 하더라도 생산량은 늘어날 것이다.
    

‘농업에서 자유 시장이라는 건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가족 농장의 경제는 회사 경제와 매우 달라요. 가격이 떨어지면, 회사는 직원을 해고하고 공장을 놀리고 제품을 덜 생산하면 되죠. 그러면 마침내 시장은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게 될 거예요. 하지만 식량에 대한 수요는 탄력적이지 않아요. 먹을거리가 싸다고 해서 사람들이 음식을 더 먹지는 않죠. 또 농부를 해고한다고 해도 공급량을 감소시키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누군가는 나를 해고할 수도 있지만 내 땅을 해고할 수는 없지요. 더 많은 현금을 필요로 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농장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농부가 들어와서 내 땅에다 옥수수를 심을 게 뻔하거든요. 내가 농사일을 그만두더라도 이 땅에서는 계속 옥수수가 생산될 거예요.’
    

다른 모든 음식사슬처럼 산업적 음식사슬 양쪽 끝은 자연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쪽에는 농부의 들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있다. 자본가 시각에서 보자면, 이 둘 모두는 전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날씨 변화와 전염병에 취약한 농장은 과잉 또는 생산 부족이라는 위기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이 두 가지 상황은 모두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원료 가격이 오르면 이윤이 감소한다. 그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원료 가격이 떨어진다고 좋아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여러분은 낮은 가격에 더 많은 제품을 팔아야 하겠지만, 식품의 경우에는 그런 일을 실현할 수 없다. 인간은 아무리 음식이 싸더라도 정해진 양 이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식품 회사 중역들은 이를 ‘양이 정해진 위’ 문제라고 부르고, 경제학자들은 ‘비탄력적 수요’라고 표현한다.) 자연은 음식사슬을 조작하는 기업들에게 이윤율 감소라는 처방으로 저주를 내렸다.
    

식품 산업 성장은 언제나 이 곤란한 생물학적 사실과 충돌한다. 아무리 노력해보아야 우리 각각은 일 년에 대략 1500파운드 음식만 먹을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많은 상품과 달리, 배가 터지도록 먹지 않는 한 우리 각자가 소비할 수 있는 음식 양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식품 산업에서 의미하는 바는 산업 성장률이 일 년에 대략 1퍼센트에 머물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인구 증가율이 대략 일 년에 1퍼센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식품 회사들이 그런 미미한 성장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맥도날드 같은 회사들에게는 인구 증가보다 더 빠른 성장을 원할 경우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똑같은 1500파운드의 음식에 더 많은 돈을 쓰도록 사람들을 유도하든지 아니면 실제로 더 많은 음식을 먹게 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전략은 물론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식품 산업은 이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기 위해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값싼 옥수수를 복합 식품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좋은 방법이다.
    

어떤 경영 컨설턴트가 식품 산업 의뢰인들에게 말한 적이 있듯이 ‘제품 아이덴티티가 특정한 원료에서 벗어날수록, 즉 가공 과정이 강화될수록 가공 업자는 자연 변화에 영향을 덜 받는다.’ 제품을 복잡하게 만들면, 소비자가 식품에 사용하는 돈 가운데서 더 많은 부분을 가져올 수 있다. 예컨대 계란 같은 자연식품에 소비되는 1달러 가운데 0.4달러는 농부에게로 돌아간다. 이와 비교하자면, 가공 원제품을 생산하는 농부는 옥수수 감미제에 소비되는 1달러 가운데 0.04달러밖에 가져가지 못한다. 코카콜라 같은 가공 업자가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 식품 회사 중역은 이렇게 말했다. ‘식품 산업에서도 돈을 벌 수 있지, 작물을 재배할 생각만 버린다면 말이야.’
    

탐식에 대한 뿌리 깊은 문화적 금기는 성경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대죄 가운데 하나이기에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맥도날드는 탐식에 대해 교황의 관면(寬免)을 베풀어주었다. 즉 슈퍼사이즈를 만든 것이다! 맥도날드는 양이 정해진 인간 위를 넓힐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배가 부르면 이런 괴물 같은 크기의 음식을 더 이상 먹거나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 허기가 그런 식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고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많은 음식이 앞에 놓이면 사람들(그리고 동물들)은 원래보다 최대 30퍼센트까지 더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의 식욕은 놀랄 정도로 탄력적이다. 여기에는 탁월한 진화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수렵, 채집 생활을 했던 우리 조상들은 나중에 꼼짝없이 굶고 지내야 할 때를 대비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능한 많은 음식을 먹어 지방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맘껏 먹고 마실 수 있는 패스트푸드가 풍부한 오늘날 환경에서는 재앙이 된다.
    

사람들이 더 많은 음식을 먹게 만들고자 할 때, 가공 식품이 왜 뛰어난 전략이 될 수 있는지 이제 여러분도 이해할 것이다. 식품 과학의 힘은 음식을 각각 영양소로 분해한 다음 특정한 방법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식품 과학은 이런 능력을 통해 우리 진화적 버튼을 누르고, 잡식동물 고유 음식 선택 방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무엇이든 지방이나 당을 첨가하면, 동물 혀에는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진다. 쥐는 수크로오스 용액이 앞에 놓이면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자연에는 거의 만나보기 어려운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병이 난다. 쥐가 어떤 영양학적 지혜를 갖고 태어났든, 비자연적인 형태로 농축되어 있는 당과 지방을 만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세계 경작지에서 한해 생산할 수 있는 총 칼로리는 한계가 있는데, 가공식품은 과도한 양의 칼로리 에너지를 소비하고 또 낭비한다. 멕시코인이나 많은 아프리카인처럼 옥수수를 직접 먹으면, 옥수수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다. 그런데 옥수수를 수송아지나 닭에게 먹이면, 90퍼센트 에너지는 잃어버리고 만다. 옥수수는 소나 닭이 뼈나 깃털, 털을 만들거나, 활동하거나, 신진대사를 하는 데 소모된다. 채식주의자들이 ‘음식사슬의 낮은 단계’에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음식사슬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음식 에너지 양이 10분의 1로 감소한다. 자연 생태계의 경우 먹이에 비해 포식자가 지극히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식품을 가공해도 역시 에너지가 소모된다. 치킨 맥너깃 일인분 같은 음식을 만들면서 잃어버리는 음식 에너지 양이라면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을 먹일 수 있다. 한 명이 점심식사로 섭취한 빅맥 햄버거 한 개 칼로리 뒤에는 수만 칼로리의 옥수수더미가 있다. 그 정도면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의 배를 채워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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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현대사에서 중대한 전환점, 즉 오늘날 음식 산업화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순간은 1947년 어느 날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이날 엘리배마에 있는 군수품 공장이 화학 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부는 폭발물을 만드는 주요 성분인 질산암모늄이 엄청나게 남아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질산암모늄은 식물에게는 질소의 뛰어난 공급원이 될 수 있었다. 정부는 목재 산업을 돕기 위해 이 화학 잉여물을 숲에다 살포해버리는 거 어떨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았다. 하지만 농무부 농학자들에게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것은 질산암모늄을 비료로 농지에 뿌린다는 생각이었다. 화학 비료 산업(전쟁 때 개발된 독가스에 기초하는 살충제 산업과 함께)은 전쟁 수단을 평화 시 용도로 전환하려는 정부 노력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잔재를 먹고 살고 있다.’

 

 

잡종 옥수수는 이런 변화의 가장 커다란 수혜자였다. 잡종 옥수수는 가장 탐욕스런 식물로서 다른 어떤 작물보다 더 많은 비료를 먹어치웠다. 합성 질소 발견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옥수수와 농장, 음식 시스템뿐 아니라, 지구상에서 생명이 살아가는 방식까지 변화시켰다. 모든 생명은 질소에 의존하고 있다. 자연은 질소를 재료로 아미노산, 단백질, 핵산 따위를 만든다. 생명에게 지시를 내리고 삶을 지속시키는 유전 정보는 질소 잉크로 씌어져 있다. (과학자들이 탄소가 생명 양을 규정하고 질소가 생명 질을 규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활용 가능한 질소는 공급이 제한되어 있다. 지구 대기는 약 80퍼센트가 질소이지만, 모든 질소 원자는 단단히 결합되어 있어 쓸모가 없다. 질소가 식물이나 동물에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원소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단단한 결합을 쪼개고 나와 수소 원자와 결합해야 한다. 화학자들은 대기에서 원자를 가져다가 생명체에 유용한 분자에 결합시키는 이런 과정을 ‘고정’시킨다는 말로 표현한다.

 


프리츠 하버라는 유대계 독일인 화학자가 1909년 이런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 지구상에서 활용 가능한 모든 질소는 콩과류 식물의 뿌리에 사는 토양 박테리아에 의해 고정되거나 이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번개의 충격에 의해 고정되었다. 번개는 공기 중에 있는 질소 결합을 쪼개 비옥한 비를 내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시대에 농부들은 옥수수 때문에 땅이 망가지는 일을 막기 위해 옥수수와 콩을 번갈아 심었다. 또 결코 같은 밭에 5년에 3번 이상 옥수수를 심지 않았다. 따라서 질소를 고정시키는 하버-보슈 공정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명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정이 아니다. 프리츠 하버의 발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지구상 다섯 명 중 두 명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컴퓨터나 전기 없는 세계는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화학 비료가 없었다면 수십억 명 사람들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숫자가 암시하듯, 프리츠 하버가 우리에게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주었을 때 인간은 자연과 파우스트적 거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얻으면서 토양 생산력은 태양 에너지가 아니라 화석 연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버-보슈 공정에서는 촉매와 함께 엄청난 열과 압력으로 질소와 수소를 결합시킨다. 열과 압력은 엄청난 양의 전기를 통해 공급되고, 수소는 기름, 석탄 아니면 오늘날 가장 흔히 사용되는 천연 가스(화석 연료)에 의해 공급된다. 물론 이런 화석 연료는 수십억 년 전 어느 때인가 태양에 의해 생성되었다. 하지만 화석 연료는 재생되지 않으며, 이 점에서 태양광선을 받고 자란 콩과는 다르다. (이런 질소는 사실 콩 뿌리에 사는 박테리아에 의해 고정된다. 박테리아는 콩이 필요로 하는 질소와 소량의 당분을 교환한다.)"

 

 

 

 

 

 

 

 

 

 

 

 

 

 

 

 

“번개는 질소의 공급원이다. 번개 굵기는 엄지손가락 정도지만 온도는 태양 표면보다 높다. 맹렬한 열기가 질소 분자들을 찢어놓으면 떨어진 질소 원자에 산소 원자가 달라붙는다. 대기를 가르며 내리치는 번갯불이 한 줄기 질소산화물 증기를 남긴 채 사라지면, 이 증기는 대기로 퍼져 결국 비와 눈에 섞여 땅으로 떨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에는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번개로 인해 먹이사슬에 유입된 질소가 어느 정도 들어있다. 질소가 첨가되지 않으면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는 수천 종의 단백질을 만들 수 없다. 공기 한 뭉텅이 속에 질소가 78%나 들어 있다. 대기에 이렇게 질소가 많아도 우린 필요한 산소와 달리 질소를 호흡으로 충당할 수 없다.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폐에 질소를 가득 채우고 있어도 음식으로 질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다.”<원자, 인간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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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 동물이나 육식 동물에게는 식사 문제가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인간이나 쥐 같은 잡식동물은 자연이 차려놓은 많은 먹거리 가운데 어떤 것이 안전한지 알아내기 위해 뇌의 많은 공간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우리는 놀랄 만한 인식 능력과 기억력 덕분에 독성 물질을 피하고(‘지난주 이 버섯을 먹어서 병이 났었지!’) 영양가 높은 식물을 찾을 수 있다(‘저 빨간 과일이 과즙이 더 풍부하고 더 달아.’). 미뢰도 도움을 준다. 우리 몸은 달콤한 맛에 끌리고 쓴 맛을 멀리하도록 되어 있다. 달콤한 맛은 자연 속에 있는 탄수화물 에너지 존재를 알려주고, 쓴 맛은 식물에서 만들어진 유독한 알칼로이드 성분 존재를 알려준다. 우리는 구역질을 통해 썩은 고기처럼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많은 인류학자는 인간 뇌가 그토록 크고 복잡하게 발달한 것이 바로 잡직동물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잡식은 다양한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선택 가능성은 스트레스와 함께 음식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을 갖게 했다. 먹으면 좋은 것과 먹으면 나쁜 것으로 자연을 구분하게 된 것이다. 슈퍼마켓에 펼쳐진 풍요로운 음식 풍경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맛있게 보이는 음식이 목숨을 앗아갈지 모른다는 걱정을 다시 해야 한다. 음식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다루기 위해 역사적으로 활용했던 수단들도 날카로움을 잃거나 무용지물이 되었다.

 

 

먹는 행위는 생태학적 행위이며 또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사실이 많이 불분명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는 정도가, 그리고 자연 세계가 달라지는 정도가 결정된다. 이 모든 사실을 의식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자칫 부담스럽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삶에서 그만한 만족을 주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산업적으로 먹는 즐거움, 즉 아무것도 모른 채 먹는 즐거움은 덧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연 세계에 관한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이 산업적 음식사슬을 기반으로 한 음식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우리 입맛을 망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은 먹는 즐거움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앎을 통해서 깊어질 수 있는 즐거움이다.

 

 

다양한 선택의 전당인 슈퍼마켓은 사실 하나의 식물로 이루어진 지극히 한정된 생물학적 토대에 의존하고 있다. 지 메이스, 우리가 옥수수로 알고 있는 이 키 큰 열대 식물이 바로 그 식물이다. 일반적으로 슈퍼마켓은 약 4만 5000천 가지 물품이 있는데, 그중 4분의 1 이상에 옥수수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식품 이외 다른 물품에도 들어있다. 치약과 화장품에서부터 일회용 기저귀, 쓰레기봉투, 표백제, 숯, 성냥, 배터리, 그리고 계산대에서 우리 눈을 사로잡는 잡지 표지의 광택제까지 모든 게 옥수수다. 언, 날 농산물 코너에 더 이상 옥수수를 팔지 않는다는 안내 문구가 내걸린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여전히 엄처난 옥수수가 있을 것이다. 오이 광책을 내는 식물성 왁스에도, 농산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살충제에도, 또 농산물을 담는 판지 코팅에도 여전히 옥수수가 들어 있다.

 

 

동물은 식물이나 초식 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는 탄소 분자 형태로 저장되고, 칼로리로 측정된다. 우리가 먹는 칼로리는 옥수수 이삭이든 스테이크이든 식물이 획득했던 에너지를 나타낸다. 똑같은 양의 태양광과 물, 기본 요소에서 옥수수만큼 많은 유기물과 칼로리를 생산할 수 있는 식물은 없다. (옥수수를 이루는 성분은 97퍼센트는 공기에서, 3퍼센트는 땅에서 생성된다.)

 

 

인간에게 사육되거나 재배되는 생물종 가운데 옥수수만큼 생산성을 증가시킨 또 다른 종은 홀스타인 젖소 뿐이다. ‘많은 생산량’은 꽤 추상적인 개념이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한 줄기에 더 많은 옥수수속이 생산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옥수수속에 더 많은 낟알이 생긴다는 것인가? 둘 다 아니다. 현대 품종의 높은 생산량은 식물을 더 조밀하게 심어서 생기는 것이다. 30년 전에 1에이커당 8000개 씨앗을 심었지만, 현재는 3만 개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자연 수분을 하는 예전 품종을 조밀하게 심으면 햇빛을 받기 위해 다투어 자라면서 줄기가 가늘어졌다. 그러면 결국 옥수수들은 바람에 쓰러지곤 했다. 하지만 새오운 변종들은 줄기가 두껍고 뿌리가 단단하여 밀집해서도 잘 자라고 기계 수확도 잘 견딘다. 기본적으로, 현대 병종 품종은 옥수수 도시 생활이라고 할 만한 환경에 잘 견디고, 도시적 스트레스에 굴하지 않고 북적대는 가운데서도 잘 자라는 것이다. 옥수수 1대 잡종은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어떤 식물 개체도 다른 식물 개체에 경쟁적인 우위를 타고 나지 않았기에, 햇빛, 물, 토양 성분 같은 귀중한 자원이 동등하게 공유된다. 햇빛이나 비료를 독식하는 알파 옥수수는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바로 1대 잡종 식물의 들판에서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영화 <인터스텔라> 장면

 

1950~60년대를 시작으로 값싼 옥수수가 홍수같이 쏟아졌다. 그러자 사육장 소들에게 풀이 아니라 옥수수를 먹여 살을 찌우고, 닭을 농가 마당이 아니라 거대한 공장에서 기르는 일이 수익성이 더 높아졌다. 아이오와에서 가축을 기르던 농부들은 그들이 재배한 값싼 옥수수 때문에 엄청나게 많아진 가축 공장과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닭과 소들이 농부 농장에서 사라졌고, 이와 함께 방목장과 건초용 풀밭, 울타리도 사라졌다. 둘 이상의 작물을 재배하던 자이레 이제 농부들은 다른 무엇보다 아은 작물인 옥수수를 심을 수 있었다. 옥수수 가격이 떨어질 때마다 그들은 더 많은 양을 재배했다. 비용을 메우고 손익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 이르면, 아이오와에서 많은 식물과 동물이 자라는 가족 농장은 이제 역사 박물관으로 사라졌고, 옥수수는 왕좌에 올랐다.

 

 

인간의 도움으로 옥수수는 동물과 동물들이 먹는 작물을 땅에서 몰아냈고, 방목장과 들판으로 꾸준히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제 옥수수는 사람들을 몰아냈다. 옥수수에 의해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농장들은 예전 농장과 달리 인간 노동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농부들이 16열 파종기와 화학 제초제를 사용하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단일 재배를 하면서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더 넓어졌다. 또 돌볼 가축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주말에 휴식을 취하고 겨울을 플로리다에서 보낼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따라서 농장을 더 커졌지만, 계속하여 떨어지는 옥수수 가격으로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사람들은 마침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들판은 옥수수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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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20-11-2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아주 좋죠

북다이제스터 2020-11-26 15:15   좋아요 1 | URL
이렇게 좋은 책을 이제야 읽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ㅋㅋ
너무 재미있어 손에서 놓기 아깝고 빨리 다 읽을까봐 걱정이 앞설 정도입니다.^^

자목련 2020-11-26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욕망하는 식물>도 함께 읽으면 좋아요.

닷슈 2020-11-26 17:22   좋아요 1 | URL
그책도 매우좋죠 관점을 바꿔준걸로 기억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11-26 17:27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가 쓴 책은 독자가 무엇을 알고 싶고 무엇을 읽기 좋아하는지 맥을 잘 짚는 것 같습니다. 책 기획과 구성이 아주 뛰어난 것 같습니다.
추천해 주신 동일 저자 책도 많이 기대됩니다.^^
 

 

 

 

 

 

 

 

 

 

 

 

 

 

 

 

"스토아 학파에게서 비물체적인 것들은 물체적인 것들의 표면 효과입니다. 예컨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건도 왕관이라는 물체와 머리라는 물체가 만들어 내는 운동으로서, 이 물체들의 표면에서 나타나는 효과로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에게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 효과’입니다. 이는 플라톤 주장과 반대됩니다. 플라톤에서는 비물체적인 것들이 물체적인 것들 저편의 실재죠. 스토아 학파에서는 반대죠. 비물체적인 것들은 물체적인 것들 이편의 표면 효과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이 세상, 이 사건들은 플라톤에게는 형상의 그림자이지만 스토아 학파에게는 물질적 운동이 야기시킨 표면 효과들입니다.

 

 

물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 곧 ‘시뮬라르크’입니다. 그런데 이 표면 효과는 곧 의미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들뢰즈가 단순한 의미에서의 유물론자가 아닌 것은 이 때문이죠. 요컨대 들뢰즈에게서 물질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철학이고 형이상학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근대적 이분법과 같죠. 그런데 그 ‘의미’라는 것이 근대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스토아 학파에 근거하는 독특한 형태의 의미인 것이죠.

 

 

들뢰즈가 보기에 현상학 입장도 사건을 제대로 이해시켜주지 못합니다. 현상학이란 대상과 주체의 맞물림에서 출발하여, 주체에 의한 의미(=본질)의 구성이라는 틀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사건이란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일종의 본질도 아닙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세계 내로의 생성/나타남 그 자체죠. 주체에 의한 구성이나 본질로서의 의미가 포착되는 것은 그 후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들뢰즈는 후설적인 ‘구성’에 의해서든 메를로-퐁티적인 ‘표현’에 의해서든 주체가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죠. 의미 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장(場)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구조주의 의미론에로 가 보아야 합니다. 주체의 모든 생각이나 느낌이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장, 주체가 그렇게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개체는 장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라는 것은 그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 간 관계를 통해서 형성됩니다. 요소와 요소 사이에 차이가 형성하는 관계, 또 요소들의 계열화가 생산하는 것이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는 주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체는 이미 존재하는 구조 내의 어느 자리/위치에 있느냐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들뢰즈가 보기에 이런 식 의미론은 순환론에 빠지는 거예요. a가 뭐냐 물르면 b와의 차이다. 또 b 의미는 c와 차이다. 이렇게 빙빙 도는 거죠. 기호와 기호가 서로 맞물면서 빙빙 도는 거예요.

 

 

들뢰즈에게 의미란 사건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할 무엇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행하는 모든 문화적 활동은 의미를 전제합니다. 이미를 전제함으로써 우리 행위는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문화적 활동이 됩니다. 의미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길거리 신호등은 그저 빨간빛을 내는 유리일 뿐이죠. 의미는 문화의 선험적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의미는 문화의 가장 아래 층위,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문화로부터 문화 이전 차원으로 벗어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반대 방향으로 말해 봅시다. 문화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시작되는 것이죠. 그리고 의미란 문화의 선험적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의미란 바로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넘어가는 바로 그 경계선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더 정확히 말해서 그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반대 방향에서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의미란 바로 자연과 문화가 접하는 바로 접면, 그 표면(들뢰즈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표면’이라고 부르죠)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이상학적 표면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건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사건이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접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의미라고 하는 것은 기호들의 놀이도 아니고,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시 대상 자체도 아닙니다. 이 세계가 운동할 때 사건과 더불어 발생하며, 바로 그 발생을 통해 문화의 가능성을 탄생시키는 그런 두 얼굴을 가진 존재가 의미인 것이죠.

 

 

의미라는 것은 한편으로 물리적 변화, 사건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사건을 기호화한 그 언표 안에 들어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폴레옹 머리에 왕관이 얹힐 때 의미가 발생하지만, 그 의미는 또한 ‘나폴레옹은 왕이 되었다’라는 이 언표 안에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이 언표되었을 때, 의미는 이 사건임과 동시에 그 사건을 언표하는 언표 안에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그 사건 의미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지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라고도 물어보죠. 의미라고 하는 것은 사건으로서 발생하지만, 동시에 언어로 포착되어 기호화됨으로써 언표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언표화된 의미가 바로 지시 작용, 현시 작용, 기호 작용의 토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사건 자체와 언표 속에 들어간 사건은 다르죠. 정확하게 말해 의미가 언표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말하자면 논리적 가능성으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잠재성’으로서 존재합니다. 이제 ‘의미란 명제 안에 존속하는 순수 사건’이라는 말이 좀 이해가 되죠? 들뢰즈는 바로 의미의 이런 성격을 ‘표현’이라는 말로 씁니다. 들뢰즈에게는 표현이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의미 성격이고, 이 표현이라는 작용 위에서 지시, 현시, 기호 작용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표현’이란 물체 차원과 문화 차원의 접면에서 사건이 무의미이자 동시에 의미로서 발생하고 순수 사건이 특정한 사건에 구현되고 언표로 포착되어 존속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시 대상으로서 의미나 주체 현시로서 의미나 기호 놀이로써 의미는 표현이라는 차원 위에서 성립하는 그 후의 과정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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