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제도만이 한 국민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 마담 드 스탈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훗날 사건들이 보여 주듯 좌파에게는 항상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끔찍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이끌렸다. 사회민주주의는 1960년대 중반이면 서유럽 일부에서 정치가 아닌 생활양식이었다. 이 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곳이 스칸디나비아였다. 1945년에서 1964년 사이 덴마크 사회민주당의 총선 득표율은 33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노르웨이 노동동당은 43퍼센트에서 48퍼센트 사이로 득표했고,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전후 득표율이 45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68년 선거에서는 50퍼센트를 넘기기도 했다.

 

 

놀랄 만한 것은 득표율 자체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일관성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 수십 년 간 중단 없이 정권을 장악했다. 인적 구성에도 연속성이 존재했다. 노르웨이의 에이나르 게르하르드센은 모두 14년 동안 사회민주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스웨덴에서 타게 에를란데르는 1946년에서 1969년까지 23년 동안 당과 국가를 지도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는 특정한 이점을 상속받았다. 해외 식민지나 제국주의 야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사회적으로 동질적인 소규모 국가였으며 오랫동안 입헌 국가를 유지했다. 1849년 덴마크 헌법은 의회 정부 권력은 제한하면서도 언론과 종교 자유는 폭넓게 인정했다. 스웨덴의 1809년 헌법(당시에는 노르웨이 헌법이기도 했다)은 비례대표제와 옴부즈맨 제도(이는 훗날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채택되었다)를 포함한 근대적인 정치 제도를 확립했으며, 정당 정치 체제가 발전할 수 있는 안정된 틀을 제공했다. 이 헌법은 1975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가난한 곳이었다. 숲과 농민, 어부, 소수 1차 산업이 존재한 지역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스웨덴에 있었다. 특히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노사 관계는 만성적인 분규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두 나라에서 파업 빈도는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이 지역 실업은 고질적이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스웨덴 노동력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는 성인 노동력의 40퍼센트가 실직했다. 스웨덴에서 위기는 폭력적인 대결을 낳았다. 특히 1931년 오달렌에서는 군대가 제지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을 진압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스칸디나비아가 유럽 변경의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다른 사회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격한 사회주의 교리와 혁명의 대망을 포기했으며, 1930년대를 지나는 동안 자본과 노동 사이에 역사적인 타협이 이루었다. 1938년 스웨덴 고용주와 노동자 대표들이 살트시에바덴에서 서로 협력을 협약했는데 이는 향후 스웨덴의 사회적 관계에 토대를 놓게 된다. 그 협약은 1945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형성된 신코포러티즘적 사회 협력의 전조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로 추정된 유권자들에게 아무런 환상을 품지 않았기에 어떠한 타협에도 열려 있었다. 반면 다른 나라 사회주의 정당들은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의존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오로지 노동 계급의 표에만 의존했더라면, 나아가 중간 계급 개혁가들과 연합한 노동 계급에 의존했더라도, 언제나 소수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들의 정치 전망은 그 지역에서 압도적이었던 농촌 주민들의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유럽 거의 모든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농촌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이 없었다. 농촌에 대한 반감은 ‘백치 같은 농촌 생활’이라는 마르크스 언급부터 ‘쿨라트’에 대한 레닌의 혐오에 이르기까지 유럽 좌파 대부분의 특징이었다.

 

 

사회민주당이 농업 협동조합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사적 생산(농민)과 집단적 목적(노동자)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선거에 큰 손해를 입혔다. 스칸디나비아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유별나게 독립적이었는데 사제나 지주에게 굴복하지 않은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주의자였다. 따라서 농민과 노동자 동맹은 장기간 존속하여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농민당과 사회민주당, 나중에는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이루어진 적-녹(Red-Green) 동맹은 다른 곳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모범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 산업 노동자가 손을 맞잡고 도시화 시대로 진입하는 도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는 단지 여러 정치 운동의 하나가 아니라 근대성의 형식 그 자체였다.

 

 

1945년 이후 전개된 스칸디나비아의 복지 국가 기원은 1930년대 두 가지 사회 협약, 즉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협약과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협약에 있다. 스칸디나비아 ‘모델’의 특징이 된 사회복지와 기타 공적 부조는 보편성과 평등 – 급격한 누진세로 자금을 모아 전 국민의 사회적 권리와 균등한 소득, 정액 급부금을 보장하는 것 –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기원을 반영했다. 따라서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대륙 유럽의 전형적인 제도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대륙 유럽의 모델은 국가가 가족과 개인에게 소득을 이전하거나 되돌려줌으로써 보조금을 받는 사적 보험과 의료 서비스를 위해 현금을 지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복지 제도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시행되었다. 덴마크에서는 1971년 가서야 전 국민의 의료 보험이 도입되었다. 북해 건너편 영국에서 국민 보건 사업이 시작된 지 꼭 23년만이었다.

 

 

스웨덴은 1960년대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축에 들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성을 위해 부와 서비스를 분배하고 균등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스웨덴에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이용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1918년 이후 핵심 신조와 정책을 늘 국가 소유의 장점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에 두었던 영국 노동 운동과 달리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사적 개인에게 자본과 주도권을 맡겨 놓는 데 만족했다. 중앙에서 재원을 할당하는 정부의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였던 영국 자동차와 같은 사례가 스웨덴에서 되풀이된 적은 없었다. 스웨덴은 볼보와 샤브, 기타 사기업이 흥하든 망하든 자유로이 내버려두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스웨덴의 산업 자본은 서유럽 그 어느 곳보다 더 적은 소수의 개인 수중에 집중되었다. 정부는 사사로운 부의 축적이나 상품과 자본 시장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도 15년간 사회민주당 정부가 통치한 후에 국가가 직접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경제 부문은 기독교민주당의 서독보다 사실상 더 작았다. 하지만 덴마크와 핀란드에서 그랬듯이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한 일은 가혹한 누진세를 거두어 사적 이윤을 공익을 위해 재분배한 것이다.

 

 

결과는 자명했다. 1970년에 스웨덴은 핀란드와 더불어 주민 1인당 구매력으로 평가할 때 세계 4대 경제에 속했다(나머지 두 나라는 미국과 스위스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세계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3세대 전 고립되고 빈곤한 북유럽 농민들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교육과 복지, 의료, 보험, 퇴직, 여가 등에 대한 서비스와 편의 시설 공급에서 어떤 나라도 (특히 미국과 사실상 스위스도) 이들을 필적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이면 유럽의 ‘얼어붙은 북부’는 거의 신화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다른 곳에서 쉽게 모방할 수 없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칭송되어 널리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1960년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 스칸디나비아 정치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북유럽 사람들의 우울증 성향, 알코올 중독, 높은 자살률을 지나친 경제적 안정과 중앙 지도로 초래된 도덕적 마비에 돌리면서 즐거워했다. 이러한 점이 스칸디나비아 모델에 반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악의 내용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국가에는 실제로 어두운 측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하였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에게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정부들은 인종 위생학의 이론과 실천에 관심이 많았다. 1934년부터 1976년 사이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에서 불임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모두 사회민주당 정부의 후원을 받거나 사회민주당 정부가 숙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덴마크인 약 6000명, 노르웨이인 4만 명, 스웨덴인 6만 명(90퍼센트가 여성이었다)이 ‘위생’상 목적으로, 다시 말해 ‘주민 개량을 위해’ 불임 시술을 받았다. 이러한 계획을 배후에서 추진한 기구인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인종생물학 연구소는 이 주제가 초고로 유행할 때인 1921년에 설립되어 55년이 지난 뒤에야 폐쇄되었다.

 

 

이 슬픈 이야기가 사회민주주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비사회주의, 비민주주의 사회와 정부였다면 분명 더 심한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전후 스칸디나비아에서 정부는 어떤 일이 공동 이익으로 간주되면 놀랄 정도로 별다른 감독을 받지 않은 체 자유롭게 실행에 옮겼다. 국가의 정통성 덕이었고, 시민들이 대체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국가에 권위와 주도권을 부여한 덕이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당이 지배한 전후 스칸디나비아에서 누진세나 남편 출산 육아 휴가를 ‘불완전한’ 시민의 재생산 능력에 강제로 개입하는 일과 구분하는 선은 결코 분명하지만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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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북다이제스터 > 일의 불편한 민낯

“일”을 다시 생각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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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벨기에인이나 프랑스인, 러시아인에게 묻지 않고는 유럽인이 독일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 국민들에게 선량한 독일인이란 오직 죽어 있는 독일인뿐이다.’ 1945년 미국 군대의 참관인 솔 파도버가 자신 일기에 남긴 글이다. 파도버 관찰은 전후 유럽 분열을 설명할 때 꼭 명심해야 한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전후 스탈린이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를 부여한 논거는 자명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완전한 패배를 원했다.

 

 

2.


유럽에서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분명했다. 소련은 서방에 대한 불신을 거둔 적이 없었다. 불신의 뿌리는 물론 1917년을 지나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후 불신은 더욱 커졌다. 1917년에서 1921년에 이르는 러시아 내전 동안 서방이 군사적으로 개입한 일과 소련과 나치 독일의 파괴적인 싸움을 보고도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어부지리를 얻을 요량으로 전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는 소련의 직관적 인식도 불신을 키우는 데 한몫 했다. 전시에 동맹이 결성되고 독일을 패퇴시킨다는 공동 관심사가 분명했는데도, 서로 간 불신은 놀랄 정도로 심했다. 전시 동안 서방과 동쪽 진영 사이 민감한 정보를 교환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사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전시 동맹 해체와 뒤이은 유럽 분열은 실수가 아니라 노골적인 이기심 혹은 적대감의 소산이었고, 그 뿌리는 역사 속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과 영국을 한편으로 하고 소련을 다른 편으로 하는 양 진영 사이 관계는 언제나 팽팽했다. 문제는 어느 나라도 유럽 대륙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책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나라들은 여러 가지 고려 사항 중에서도 프랑스가 굴욕을 당하고 5년 뒤 독일이 패배함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럽에서 냉전의 반복은 언제나 가능했지만 불가피하지는 않았다. 냉전은 다양한 이해 당사국들의 목적과 욕구가 궁극적으로 양립 불가능했기에 성립되었다.

 

 

3.


전후 영국은 여건만 되었다면 자신도 섬으로 물러나고 서유럽 안전은 전통적인 수호자인 프랑스에 맡겼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38년까지 영국의 전략적 계산의 기본 원리였다. 다시 말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프랑스는 중부 유럽에 대한 독일 야심뿐 아니라 더 동쪽에서 향후 있을 소련 위협에 맞설 대항마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1940년 5월과 6월 위대한 프랑스 군대가 독일군 기갑 부대 급습을 받아 산산이 붕괴되었을 때, 유럽을 휩쓴 지진과도 같은 충격은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컸다.

 

 

깊은 상처를 남긴 6주만에 이제 프랑스는 강대국을 떠나 강국조차 아니었고, 훗날 드골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후로 전혀 강국이 되지 못했다. 1940년 6월의 완패 뒤 굴욕적이고 비굴했던, 품위를 상실한 점령기 4년이 이어졌다. 그 기간 프랑스의 비시 정권은 독일의 역할을 수행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고 난 후 한 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프랑스의 한 정부 관련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프랑스가 다음 세대에 세 번째 공격에 굴복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결국 영원히 굴복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한다.’

 

 

이는 비밀 문서였다. 프랑스는 전후 공개적으로 프랑스가 세계 강국으로서 동료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환상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가 그러한 권리를 지닌 듯 가장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소련은 서방에서 ‘영미’에 대한 불신을 공유할 전술적인 동맹국을 원했고, 영국은 프랑스가 영국을 대신해 유럽 본토에 관한 책임을 덜어주길 원했다. 심지어 미국도 프랑스를 상석에 앉힘으로써 큰 이득은 아니더라도 약간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받았으며, 독일의 미국 점령 지구 일부를 잘라 점령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미국을 신뢰할 수 없고, 특히 두 나라가 함께할 때에는 더욱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드골은 더욱 더 민감하게 느꼈다. 전시에 드골은 런던에 손님으로 갔을 당시 받았던 굴욕적인 대접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신을 하찮게 대한 일을 결코 잊지 못했다. 프랑스도 영국처럼 적어도 문서상 제국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점령기 동안 해외 식민지와 소원해졌다. 소련이 아시아에서 보인 움직임이나 다가오는 중동 위기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국과 달리 간접적으로만 관계된 문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축된 프랑스 시야에 유럽은 예전보다 넓어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로서는 유럽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전간기 프랑스 외교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인 동유럽에 대한 프랑스 영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 정치가들과 국민감정은 1947년 후반에 뚜렷하게 변했다. 소련이 마셜 플랜을 거절하고 코민포름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프랑스 공산당은 연정 상대에서 국내외 모든 프랑스 정치를 자유롭게 비판으로 변모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1947년 후반부와 1948년 내내 내란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동시에 파리에서는 독일의 복수에 대한 걱정과 소련의 침입이 임박했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결합되어 전쟁 불안이 드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마지못해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1947년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이 ‘프랑스를 신뢰해도’ 되는지 물었을 때, 프랑스 외무장관은 프랑스가 내전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 대답했다.

 

 

프랑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제 회복을 원하는 한 미국과 영국이 독일의 부활이나 소련 팽창에 대비하여 일정 수준의 안전 보장을 제공하기 원하는 한 프랑스는 결정에 따라야 했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진 식민지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프랑스는 독일을 파괴할 수 없다면 일종의 유럽 체제에 합류시켜 독일이 군사적으로 해악을 끼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이득을 가져오게 하려고 결정했다. 이러한 착상이 1948년 이전에 프랑스 지도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지막 방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지도자들이 마지막 방법을 받아들이는 데는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사실상 프랑스는 300년의 역사를 갑자기 부정하는 사태를 감수해야 했다.

 

 

4.


당시 볼셰비키 매력은 새롭고 유혹적이었다. 소련은 실제로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독일 침략을 받은 후 첫 6개월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소련군은 병력 400만과 항공기 8000대, 탱크 1만7000대를 잃었다. 하지만 1945년에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을 지닐 정도로 회복되었다. 1946년 내내 헝가리와 루마니아 두 곳에만 병력 약 160만 명이 주둔했다. 스탈린은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직간접으로 통제했다. 몽고메리 휘하 영국군이 빠르게 진격했기에 그나마 스탈린 군대가 북부 독일을 지나 멀리 덴마크 국경까지 전진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스탈린이 명령을 내렸다면 그 무엇으로도 소련군이 대서양으로 진격하는데 막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서방 장군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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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급격한 변화의 장애물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합법적인 망명 정부였다. 망명 정부들은 본국의 전시 저항 조직을 동맹자가 아니라 골칫거리로 간주했다. 망명 정부로서는 이 부주의한 젊은이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민간 생활로 돌아가게 할 필요가 있었고, 부역자와 반역자를 적절히 제거하고 정치권이 굴러가게 해야 했다.

 

 

귀환 정부는 5년 간 떠나 있었던 까닭에 나치 점령기에 이루어진 자국 고초와 사회 분위기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귀환 정부들은 사회 개혁과 정치 개혁에 관한 정책 문제에서 타협할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귀환 정부들은 드골 등이 생각한 ‘질서 있는 이행’을 고집했다. 연합군 점령군 또한 이를 원했기 때문에 레지스탕스의 이상은 곧 산산이 깨져버렸다.

 

 

동유럽에서 전후 정부 형태를 결정하고 그 활동을 지휘한 것은 소련이었다(유고슬라비아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서유럽에서는 임시 정권이 현안인 새로운 선거를 관리했다. 그리고 모든 저항 운동 단체에는 무기를 반납하고 조직을 해산하라는 권고가 전달되었으며 사실상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 돌이켜 보건대 이와 같은 제도적 현상 회복에 대한 저항은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노르웨이와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저항 운동은 전후에 평화적으로 정당과 정치 협회로 전환되었다. 이의는 적었다. 많은 사람들은 저항 운동의 힘과 큰 뜻이 국가 재건을 위한 정치적 계획에 쓰이리라고 기꺼이 믿으려 했다. 전후에 ‘레지스탕스 당’을 세우려던 계획은 어디서나 실패했다.

 

 

2.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 유럽인들은 좌파와 중도좌파 정치가들로 이루어진 동맹 통치를 받았다. 이 점은 이해할 만했다. 이 시기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전쟁 이전 정당들은 반파시스트 신임장을 얻은 정당들뿐이었다. 실제로 그러한 정당들은 공산당과 사회당, 소수의 자유주의자 집단이나 과격파뿐이었다. 기존의 좌파 정당들은 전시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다. 이 점은 특히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다.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전시의 (때때로 과장된) 공적을 정치적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공산당원 재닛 플래너는 1944년 12월 그들을 ‘레지스탕스의 위대한 영웅들’이라고 묘사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은 국가가 맡은 역할과 사람들이 국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는 영국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역사가 마이클 하워드 말을 빌리자면 ‘전쟁과 복지는 동반자였다.’ 몇몇 나라들에서 식량 공급과 의료 서비스 제공이 전쟁 동안 실제 개선되었다. 총력전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려면 그들의 상태에 관해 더 많이 알아내고 그들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특히 1947년 예상치 못한 생계 위기는 공산주의 호소력이 커지고 무정부 상태로 추락할 위험이 늘어만 갔다. 공산주의 매력은 현실적이었다. 각 국가 공산당이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여기에 무적의 러시아군이라는 후광이 더해져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방식의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이 그럴듯하고 매력있게 보였다. 1947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은 90만 7000명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 수는 225만 명으로 폴란드나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수보다 더 많았다. 덴마크나 노르웨이에서도 유권자 여덟 명 중 한 명은 처음에는 공산당이라는 대안에 기대를 걸었다.

 

 

3.


당시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경제) ‘계획’에 동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재앙, 즉 1918년 이후 잃어버린 기회,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에 뒤이은 대공황, 실업,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독재의 유혹을 안겨 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부정, 비효율, 거만한 통치 엘리트와 무능한 정치권의 뻔뻔스러운 무관심, 이 모든 것은 사회를 보다 좋게 계획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처럼 보였다. 민주주의 체계가 작동하고 그 매력을 회복하려면, 민주주의 체계는 ‘계획’되어야만 했다.

 

 

전후 유럽의 정치적 종교였던 ‘계획’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은 때때로 소련의 예로부터 유래했다고 지적되었다. 소련의 계획 경제는 표면상 자본주의 유럽의 상처를 피했고, 나치 공격을 막아 냈으며, 일련의 상세한 5개년 계획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지적은 완전한 오해다. 전후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공산당만이 소련형 계획 경제를 신뢰했고(공산당은 사실 계획 경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공산당조차 그러한 계획 경제를 자신들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수치상 목표와 생산 할당량, 중앙 지도에 관한 소련식 강박 관념은 당대 서유럽의 소수 계획 옹호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게는 생소했다. 그 소수 다양한 옹호자들은 서로 매우 다른 자료에 의존했다.

 

 

‘계획’의 유행은 1945년보다 훨씬 이전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공황을 겪는 동안 헝가리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종류의 계획 경제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또한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 중에서 제시된 몇 가지 견해는 옛 사회주의 전통에서 유래했으나, 1914년 이전 자유주의적 개혁에 기원을 둔 것이 더 많았다. 방위와 치안에만 전념한 19세기 ‘문지기’ 국가는 구식이 되어 버렸고, 그 논거도 사라졌다. 이제 정치적 동란을 예방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차원에서, 경제 문제에 개입하여 불균형을 시정하고 비효율을 제거하며 시장 불평등과 부정에 대해 보상하는 일이 필요했다.

 

 

1914년 이전 그러한 개혁주의적 사업의 주된 강조점은 누진세와 노동 보호, 이따금씩 요구되었던 제한된 수의 자연 독점 산업의 국유화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국제 경제가 붕괴되고 뒤이어 전쟁이 발생하자 계획은 더 긴요해졌고 더 큰 뜻을 담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젊은 기술자들과 경제학자들, 공무원들 사이 국가적 계획에 관한 서로 경합하는 여러 가지 제안들이 널리 유포되었는데, 그 제안들에서 국가는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핵심 부문을 지원, 장려하고 필요할 경우 지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요컨대 ‘계획'의 역사는 복잡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전쟁이 정부를 경제 생활의 중심에 가져다 놓았다. 1940년 5월 비상통치권법으로 정부는 누구에게나 국가 이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명령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산업 시설을 정부가 선정한 국가 목적에 할당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1945년에서 1951년 사이에 노동당 정부가 사회주의 원리를 실행에 옮긴 결과로 보였던 국가 기획과 국가 소유는 사실상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국가의 유산이었다.

 

 

계획은 실제로 국가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조정이나 분배를 담당할 별다른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는 오직 국가만이 개인과 궁핍 사이에 끼어들 수 있다는 많은 나라에 퍼진 인식을 반영했다. 근거가 충분한 이 같은 인식은 전쟁을 체험함으로써 강화되었다. 하지만 개입주의적 국가에 대한 당대 열정은 절망이나 이익 추구를 넘어섰다. 1945년 극적인 선거 결과로 처칠의 보수당에 패배를 안겨 준 영국 노동당 지도자 애틀리의 이상은 당대 분위기를 잘 포착했다. 필요한 것은 ‘잘 계획해서 잘 건설한 도시와 공원, 운동장, 집, 학교, 공장, 상점’이었다.

 

 

정부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모두에게 유용한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하게 존재했다. 확실히 이런 믿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특히 더 매력적이었다. 잘 계획된 경제가 더 부유하고 더 공정하며 더 잘 정비된 사회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매우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영국의 역사가 테일러는 1945년 BBC 청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는 아무도 미국 생활 방식을, 즉 사기업을 신뢰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기업을 신뢰하는 자들은 미래가 없어 보이는 패배자들이다.’ 테일러는 어느 때처럼 과장했고, 결국 틀렸으며(그렇지만 틀리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당시 미국의 독일 행정부에서 돋보였던 많은 뉴딜 지지자들의 계획주의적 열정에 대해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테일러가 대체로 옳았다.

 

 

대부분 서유럽 국가에서 공공 부문은 정부 지출이나 종사자 수로 측정할 때 급속하게 성장했다. 프랑스에서는 국가 기획에 대한 수사적 열정이 현실로 변환되었다. 영국처럼 전후 프랑스 정권들도 국유화를 진척시켰다. 1946년 5월, 프랑스 전체 산업 생산 능력의 5분의 1이 국가 소유가 되었다. 변화는 무엇보다 변화에 이미 우호적이었던 정치 문화의 산물이었다. 국유화 총괄계획국의 후원으로, 프랑스는 경제 성장과 경제 근대화를 공공 정책으로 삼아 전력을 다하겠다고 천명한 첫 번째 유럽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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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고 1945년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난 유럽 전쟁은 총력전이었다. 전쟁은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끌어들였다. 사실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까지, 노르웨이에서 그리스까지 나치 독일이 점령한 나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주로 민간인의 경험이었다. 정규군 전투는 전쟁 시작과 끝에 한정되었다. 그사이 전쟁은 점령과 억압, 착취, 절멸에 관한 전쟁이었다.

 

 

나치 독일은, 특히 후기에, 점령한 국가의 경제를 약탈함으로써 (1805년 이후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보헤미아-모라바이, 그리고 특히 프랑스는 본의 아니게 독일 전쟁 수행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나라들의 광산과 공장, 농장, 철도는 독일 요구에 도움이 되도록 관리되었으며, 주민들은 독일의 전시 생산을 위해 처음에서는 자국에서, 나중에는 독일에서 일해야만 했다. 대부분 자신 의사와 무관하게 독일에 끌려왔던 이들은 독일 노동력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나치의 착취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사실상 독일 민간인들은 1944년에나 가서야 전시의 제한과 부족의 충격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정한 전쟁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서유럽이 아니라 동쪽으로 더 나아간 곳에 있었다. 비록 이용해 먹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만, 나치는 서유럽인들을 어느 정도 존중하여 대했고, 서유럽인들도 비교적 독일 전쟁 수행을 망치거나 방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하지만 동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독일 점령군은 가혹했다. 그 지역의 빨치산들, 특히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우크라이나 빨치산들이 희망이 없는 중에도 독일 점령군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동부에서 독일의 점령, 소련의 진격, 빨치산 투쟁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은 서유럽 전쟁 경험과는 전혀 다르게 더욱 처참했다.

 

 

유럽인들이 전쟁 중 겪은 물질적 손실은 비록 끔찍하기는 해도 인명 손실과 비교했을 때는 하찮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가 가장 큰 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민간인과 군인 등 모든 사망자를 다 계산할 때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소련, 그리스가 최악이었다. 폴란드는 전쟁 이전 인구의 약 5분의 1을 잃었다. 교육받은 주민 사망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나치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파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이전 주민의 8분의 1을, 소련은 11분의 1을, 그리스는 14분의 1을 잃었다. 두드러진 차이를 강조하자면, 독일은 15분의 1, 프랑스는 77분의 1, 영국은 125분의 1의 희생을 보였다.

 

 

전쟁에서 주된 희생자는 연령 불문의 모든 여성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소련군이 도착한 이후 3주 동안 여성 8만7,000명이 병사들에 의해 강간당했다. 소련군이 독일 베를린에 진입하면서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그들 대부분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5월 2일에서 5월 7일 사이 당했다. 이 수치는 분명 둘 다 적게 어림한 것이며, 소련군의 오스트리아 진격로와 서부 폴란드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하는 길에 있던 촌락과 도시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은 합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전쟁 기간 내내 소련 군대에 휴가란 없었다. 많은 보병과 전차 승무원은 3년이라는 끔찍한 시간 동안 중단 없이 지속된 일련의 전투와 진격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서부 소련을 가로질러 왔다. 그들은 전진 중에 독일군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 넘치는 증거를 보고 들었다. 나치가 전쟁 포로와 민간인, 빨치산 그리고 실로 그 앞길에 놓인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처리한 방식은 그 지역 주민들과 소련군 병사들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소련군이 마침내 중부 유럽에 도달했을 때, 지친 병사들은 다른 세계를 보았다. 러시아와 서유럽은 언제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 차르 알렉산드로 1세는 오래 전 러시아인들에게 서유럽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도록 허락한 것을 후회했다 – 전쟁 중에 그 차이는 훨씬 더 두드러졌다. 독일 병사들이 동부 유럽에서 파괴와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 독일 자체는 계속 번영하고 있었다. 너무나 번영한 나머지 독일 모든 민간인은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는 전쟁의 물질적 비용에 대한 느낌을 거의 갖지 못했다. 전시 독일은 도회지의 세계, 식량과 의복, 상점과 소비재 세계, 영양 상태가 상당히 좋은 여인들과 이이들의 세계였다. 소련 병사들은 황폐해진 고향과의 극명한 차이를 이해하기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소련 사람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이제 그들이 당할 차례였다.

 

 

소련군은 서부로 가는 길에 헝가리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에서 강간하고 약탈했다(이 표현은 이 경우만큼 더럽게 적절하다). 하지만 독일인 여성들이 단연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다. 1945년에서 1946년 사이 소련의 독일 점령 지구에서는 15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 아기들’이 태어났으며, 이 숫자는 보고되지 않은 수 많은 낙태 수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낙태 결과로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은 태아와 함께 사망했다.

 

 

 

 

레지스탕스 신화가 가장 크게 문제시된 곳은 서유럽인데, 사실 서유럽을 나치가 점령했을 때 서유럽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엄청난 수의 진짜 빨치산들이 점령군과 교전하고 또 상호 간에도 공공연히 교전했던 그리스나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는 다른 점에서도 흔히 그렇듯 사정이 훨씬 더 복잡했다. 예를 들어 소련 당국은 해방된 폴란드에서 무장 빨치산이 공개적으로 찬양받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무장 빨치산은 최소한 나치에 반대했던 만큼 공산주의에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1945년 그리스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듯이, 정권은 찾을 수 있는 모든 무장 빨치산을 체포하여 투옥하거나 사살했다. 요컨대 ‘저항 운동’은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하며 불분명한 범주였고 어떤 곳에서는 창안된 범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역’은 또 다른 문제였다. 부역자란 어떤 사람들인가? 부역자는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협력했는가? 살인이나 절도 같은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역자의 죄는 무엇인가? 누군가 국민이 겪은 고통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인 난제들은 나라마다 달랐으나 일반적인 딜레마는 동일했다. 6년 간 유럽인들이 겪은 경험은 선례가 없었다.

 

 

1939년 이전에는 ‘점령군에 협력’했다는 범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점령하는 군대가 피점령국 국민들로부터 협력과 지원을 구하고 얻어 낸 전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는 범죄가 아니라 전쟁에 부수된 손해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어쨌거나 하나의 대륙 전체가 그러한 규모로 일련의 부역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규정하고 범죄자들을 재판이라고 할만한 것에 부쳐 처벌하려 했던 적은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없었다. 카뮈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혐오스러운 견해라도 사람을 그 견해를 이유로 비난하고 처형하는 것은 부당하고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당시에 최악의 범죄들에 대해 동포를 비난하려 했던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러한 범죄들의 온전한 책임은 독일인들이 져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정서였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까지도 면죄부를 받았다. 1943년 맺어진 연합국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최초 희생자’로 선언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이는 윈스턴 처칠이 나치즘의 프로이센 기원을 주장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다른 동맹국들에도 편리했다. 오스트리아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했고 중부 유럽 정황은 앞날이 불확실했으므로, 오스트리아 운명과 독일 운명을 분리시키는 것이 신중한 일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가 나치즘에 허비했던 시절에서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장하는 것이 지역 모든 이해 당사자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전후 나치에 대한 재판이 독일과 독일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재교육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재판들이 ‘승자의 재판’이라고 분개했으며, 실제로 승자의 재판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실제 범죄자들에 대한 실제 재판이기도 했으며, 미래 국제 재판에 중요한 판례를 수립했다. 재판은 개인이 저지른 범죄는 이데올로기 목적이나 국가 목적에서 했더라도 개인 책임이며 법에 다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재판의 결점은 재판 절차의 성격에 내재했다. 히틀러 자신을 위시한 나치 지도부의 사적인 죄과는 너무나 완전하게 또 면밀하게 입증되었기에 많은 독일인들은 나머지 국민이 무죄이며 독일인도 집단적으로는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나치즘을 거역하지 못한 희생자였다고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치의 범죄들은 ‘독일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을지 모르지만, 독일인들이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진정한 인식은 없었다.

 

 

특히 미국은 이를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곧 신들의 점령 지구에서 재교육과 탈나치화 일정을 시작했다. 목표는 나치를 폐지하고 그 근거를 파괴하며 독일의 공적 생활에 민주주의와 자유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독일의 미국 군대에는 일단의 심리학자들과 기타 전문가들이 동행했는데, 이들에게는 독일인들이 그토록 심하게 탈선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내라는 과제가 할당되었다.

 

 

독일 민간인들은 의무적으로 강제수용소를 방문해야 했으며 나치의 잔혹한 행위들에 관한 기록영화를 관람해야 했다. 나치 교사들은 퇴출되었고, 도서관의 책을 새로 교체했으며, 신문 용지와 종이는 연합국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공급되어 진정한 반나치 신임장을 받은 새로운 소유주와 편집자들에게 할당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서독 수상인 아데나워가 볼 때 탈나치화는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전혀 이롭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재판을 통해서든, 그밖의 법정이나 재교육 사업을 통해서든 독일인을 나치 범죄에 대면시키는 일은 회개를 부르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만 불러일으킬 공산이 더 컸다. 나치즘은 그 정도로 독일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에 수상은 그 문제에 관해 침묵을 허용하고 더 나아가 장려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 독일인들은 나머지 세계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인들과 독일의 지도자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피점령국 유럽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충보다 전후 어려웠던 자신들의 식량 부족, 주택 부족 등의 문제에 더 열중해 있었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희생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으며, 따라서 재판과 나치 범죄의 대면을 승리한 연합국이 소멸한 정권에 대해 벌이는 복수로 간주했다. 독일의 전후 정치적, 종교적 권력은 이러한 견해에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

 

 

재교육 효과는 확실히 제한적이었다. 독일인들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 가도록 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영화를 보도록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본 내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탈나치화는 단연코 큰 효과가 없었다. 1951년에 바이에른 주에서는 판사와 검사의 94퍼센트, 재무부 직원의 77퍼센트, 지역 농업부 공무원의 60퍼센트가 나치 전력자였다. 1952년에 본의 외무부 공무원 중 셋에 하나는 이전 나치당 당원이었다. 새로 구성된 서독 외교단의 43퍼센트는 전직 친위대 대원이었고 17퍼센트는 보안대나 게슈타포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에서 1949년에 이르는 동안, 대다수 독일인들은 변함없이 ‘나치즘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잘못 적용되었다’고 믿었다. 독일인의 37퍼센트는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절멸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은 아리아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견해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부의 통치를 12년간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진정 놀라운 일은 6년 뒤에 이루어진 여론 조사였다. 조사 결과 약간 더 높은 비율인 37퍼센트의 독일인들이 자신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단언했다.

 

 

전후 정치적인 활동을 대가로 나치 전력이나 파시스트 전력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트리아는 종종 파시스트 전력자들을 애호하여 언론이나 기타 민감한 직종에서 일하도록 허용했다.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1949년 9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 의회에서 행한 첫 번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방공화국 정부는 많은 사람들이 중하지 않은 죄과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속죄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를 잊는 것이 받아들여질듯한 곳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업다. 탈나치화가 무산되었다면, 그 이유는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인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자발적으로 ‘나치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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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15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내용의 책인 것 같습니다.

분량이 후덜덜하긴 하지만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북다이제스터 2019-10-15 18:4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근간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꽤 유명한 책이고 호평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직 몇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잘 몰랐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몇 가지 짚어보면요.....

1. 4년 간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 시 대부분 지역에서 군인들 전쟁은 시작과 끝에서만 있었다는 점
2. 독일은 자국 경제의 어려움 없이 전쟁을 수행했고 독일 국민은 별로 경제적 고통이 없었다는 점
3.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대부분 영화는 서유럽을 배경으로 하기에, 그곳 희생이 컸다는 착각을 주지만, 실질적으로 더 큰 피해 지역은 동유럽과 남동유럽, 러시아라는 점
4. 다양한 책과 영화로 호도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신화는 과장되었을 수 있고, 독일 점령시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 국민 희생이 다른 나라 비해 월등히 적었다는 점에서 결국 현명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5.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적군에 부역이 범죄라고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 (무언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개념도 형성된 지 정말 얼마 안 되었다는 점)
6. 주축국인 오스트리아가 독일만큼 비난받지 않는 이유. 결국 처칠 같은 사람이 프레임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사람들 생각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 (불가리아가 독일 편이었다는 사실은 덤으로 알게 됨)
7. 일본과 달리 독일은 전쟁범죄자를 철저하게 심판하고 처벌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일본과 달리 현재 전 세계에 반성하는 메시지를 지속 내보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으로 책을 읽으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