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837년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칸 야르 무하마드가 시행한 야만적인 관행 가운데 한 가지는 부하들에게 페르시아군의 목을 잘라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목적은 적군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성벽에 머리를 전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혐오스러울 뿐 아니라 역효과도 낳았다. 포상을 받기 위해 머리를 베느라 정신이 없는 아프가니스탄군의 돌격은 늘 흐지부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만 야만적으로 행동했던 건 아니었다. 페르시아 진영에서도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의 창자를 꺼내는 등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페르시아의 아프가니스탄 포위 공격은 몇 주, 몇 달 동안 계속되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 우위를 보이지는 못했다. 페르시아군은 도시 외곽 방어선은 돌파했지만 도시 전체를 둘러싸지는 못했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될 때에도 성벽 가까이에 있는 들판에서는 계속 경작과 목축이 이루어졌다. 포위를 당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매일 밤 페르시아군을 향해 돌격했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성벽에 계속 폭탄을 퍼부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계속 수리를 했다.

 

 

페르시아 공격군은 대포 외에 로켓포도 갖고 있었다. 불이 붙은 비행체가 도시 위를 지나가면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지붕에 모여 기도하거나 울었다. 박격포는 대포나 로켓포보다 더 정확해 몇 주 동안 많은 집과 가게, 건물을 파괴했다. 박격포탄 하나가 도화선에서 불꽃을 반짝이며 어느 집 지붕을 뚫고 잠자는 아기 옆에 떨어졌다. 공황에 사로잡힌 아이 어머니는 폭탄과 아기 사이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몇 초 뒤에 폭탄이 터지면서 어머니는 몸이 잘리고, 날아간 그녀의 몸이 아기 위에 떨어져 아기는 질식해 숨졌다.

 

 

새해 들어 페르시아 공격군이 아프가니스탄 성벽에 20센티미터짜리 포탄을 쏠 수 있는 육중한 대포를 가져오는 바람에 성안 거주자 7만 명은 깜짝 놀랐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커다란 포탄이었다. 하지만 대여섯 발을 쏘고 나자 대포 밑의 운반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는 쏘지를 못했다. 페르시아군이 성벽에 구멍을 뚫는 데 성공을 했을 때조차 그 구멍을 이용하지는 못했다. 죽은 전우들 머리가 성벽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바람에 기가 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러시아 고문관들의 말을 믿고 금세 승리할 줄 알았던 페르시아의 샤는 우월한 군사력으로도 아프가니스탄 도시 헤라트를 점령하지 못하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항복을 했던, 칸의 친동생 셰르 무함마드를 보내 헤라트 사람들에게 항복을 설득하게 했다. 하지만 칸은 변절한 동생과는 의절을 했다면서 만나지도 않으려 했다. 하지만 동생 셰르는 페르시아 진영으로 돌아가기 전에 샤의 군대가 헤라트로 진격하면 칸은 개처럼 목을 매달고 노새몰이꾼이 그의 처자식을 사람들 앞에서 욕보일 것이라고 칸에게 경고했다. 만일 헤라트가 계속 샤에게 저항하면 동생 자신도 페르시아인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칸은 샤가 동생을 처형해준다면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니 기쁠 따름이라고 답했다.

 

 

이따금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양편에서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페르시아 샤는 헤라트에 원하는 것은 병력의 공급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현재 전쟁도 헤라트보다는 영국령 인도를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헤라트가 자신과 힘을 합치면 함께 인도를 정벌하러 가서 그곳 부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말라기도 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의 칸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페르시아 제안이 진지하다면 우선 포위부터 풀라고 요구했다. 칸과 샤의 대변인이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회담은 성벽 밑 도랑 옆에서 열렸다. 하지만 샤가 칸이 페르시아군 전체가 보는 데서 공식적으로 항복할 것을 요구하지 칸은 회담을 끝내버렸다.

 

 

헤라트가 금방 페르시아군 손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던 페르시아 테헤란 주재 영국 공사 존 맥닐 경과 러시아 군사 고문관 시모니치 백작은 테헤란에서 헤라트로 이동해 샤의 막사에 머물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두 사람은 중립적인 관찰자였지만, 각자 상대의 게임을 망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맥닐은 샤에게 공격을 중단하라고 설득했으며, 시모니치는 헤라트 항복을 빨리 받아낼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공성이 시작된 지 거의 다섯 달이나 지났기에 보급품이 바닥나 페르시아군은 눈에 띄는 대로 야생식물을 캐다 먹고 있었다. 참호는 가끔 물이나 진흙이 무릎 높이까지 찼다. 하루에 열 명, 혹은 스무 명이 죽었기에 병사들 사기와 인내심은 바닥나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 안에서 방어군이 겪는 곤경은 그보다 더 심했다. 식량과 연료 부족은 심각했다. 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이 페르시아군 대포에 맞아 죽은 사람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말을 도살했다.

 

 

게다가 묻지 않은 주검 때문에 악취가 심했을 뿐 아니라 전염병이 돌 위험도 있었다. 방어군은 도시가 과밀해서 겪는 괴로움을 덜기 위해 일부 주민을 내보내기로 했다. 그들이 성벽 밖에서 마주칠 위험이 안에서 마주칠 위험보다 크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노인과 부녀자 등 600명 무리가 밖으로 나가 페르시아인들에게 운명을 맡기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처음엔 포를 쏘아댔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몽둥이와 돌을 이용해 도로 들여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책임진 아프가니스탄 관리가 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성벽에서 이들을 향해 사격을 하는 바람에 페르시아군이 공격할 때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은 마침내 그들 통과를 허용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칸은 성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제까지 겁쟁이라는 욕을 들은 적이 없었던 칸은 페르시아군이 도시로 돌진해 들어올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마음이 약해졌다. 성벽의 열린 틈으로 향하는 칸 걸음이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이내 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칸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방어군도 그 모습을 보았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는 핑계로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병사들은 칸의 망설임을 보았다. 병사들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자 거꾸로 칸도 다시 용기를 잃었다. 칸은 지원군을 데려와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사실 교착 상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가 헤라트에서 성과를 거둘 것을 두려워한 영국 정부가 마침내 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특별 부대를 페르시아 만으로 보내기로 했다. 샤가 동쪽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동안 그의 영토 반대편을 위협하면 헤라트를 움켜진 손을 풀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영국의 대군이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수도 테헤란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내륙으로 퍼져나갔다. 샤는 포위를 풀라는 명령을 내렸고 테헤란으로 돌아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세기 초 러시아의 얀 빗케비치 대위는 리투아니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학창 시절에 폴란드에서 반러시아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열일곱 살이던 빗케비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처형을 면하고 대신 러시아의 일반 병사로서 시베리아에 끌려갔다. 빗케비치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고 중앙아시아 언어들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곧 언어 능력을 비롯한 다른 재능이 오렌부르크(러시아 오렌부르크주의 주도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인 우랄강에 위치)의 고위 장교들 눈에 들었다. 그는 순조롭게 중위로 진급해 국경 지대의 이슬람 부족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오렌부르크의 러시아 사령관 페롭스키 장군은 그를 개인 참모로 임명하면서, 빗케비치가 비록 한때는 반대파였지만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다른 어떤 장교보다 이 지역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랑했다.

 

 

러시아 차르의 선물과 더불어 친서에 대한 답장을 아프가니스탄 도스트 무함마드 칸에게 전달하는 까다로운 임무를 맡을 사절을 뽑는 문제가 나오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빗케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외무장관 네셀로데로부터 직접 지침을 전달받은 뒤 페르시아의 테헤란에 있던 러시아 고문관인 시모니치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빗케비치는 워낙 은밀하게 행동했기에, 그곳에서 러시아 활동을 면밀하게 감시하던 영국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영국은 러시아 대사를 불러 빗케비치 대위가 영국에 매우 적대적인 행동을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양국 정부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음을 알렸다. 영국 수상 파머스턴은 당장 빗케비치를 불러들이라고 러시아에 요구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환당한 빗케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1839년 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 젊은 장교는 희망을 가득 품고 귀환했다가 외부장관 네셀로데에게 냉대를 당했다. 네셀로데는 이 사태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빗케비치 대위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에 자기 멋대로 음모에 개입한 모험가 가운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빗케비치는 외무부를 방문한 직후 호텔로 돌아와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져온 정보가 담긴 문서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런 뒤에 친구들에게 간단한 작별 편지를 남기고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았다. 그레이트 게임이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낳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영국 대사였던 더럼 경은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강해 보이지만 이것은 방어적인 가치만 있을 뿐이며, 차르 니콜라이가 확장주의 꿈을 품고 있다 해도 그 꿈에 빠져들 입장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외국으로 모험에 나서는 데는 엄청난 자원이 필요한데, 더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밀 연줄을 통해 러시아에 그런 자원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러시아 힘은 매우 과대평가되어 있다.’ 더럼은 1836년 3월 총리가 외부부에서 받은 가장 뛰어난 보고서라고 말한 문건에서 그렇게 말했다. ‘러시아 힘의 요소들 가운데 그에 상응하는 ... 약점으로 상쇄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러시아 힘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다. 자연이 러시에 부여한 난공불락의 요새 – 러시아의 기후와 사막 –에 기대고 보호를 받으면 러시아는 무적이다. 나폴레옹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 점을 확인했다.’

 

 

반면 맥닐은 페르시아 테헤란 공사로 부임하기를 기다리면서 러시아가 표트르 대제 시대에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서 영토의 이득을 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책을 썼다. 이 책은 1836년에 영국 총리 요구에 따라 익명으로 <동양에서 러시아의 진출과 현재 위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나온 그레이트 게임 문건 가운데 가장 논리 정연한 글이었다. 이 책에는 커다란 지도를 접어서 끼워 넣었는데, 이 지도는 러시아가 지난 150년 동안 놀라운 만큼 팽창했다는 사실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이 지도에는 합병이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영토를 얻어 러시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도 붙어 있었다. 표트르가 즉위한 후 차르 신민은 1500만에서 5800만으로 거의 네 배가 늘었다. 동시에 러시 국경은 콘스탄티노플 쪽에서 800킬로미터, 테헤란 쪽으로 1600킬로미터나 뻗어 나왔다. 유럽에서 러시아가 스웨덴으로부터 획득한 영토는 한때 막강했던 이 왕국의 남은 부분보다 더 컸다. 폴란드에서 획득한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와 거의 맞먹었다. 이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더럼 경이 그린 순수하게 방어적인 러시아라는 그림과는 완전히 달랐다.

 

 

맥닐은 이렇게 썼다. ‘이런 엄청난 영토 획득의 모든 부분이 영국의 의견과 소망, 이익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스웨덴의 해체, 폴란드의 분할, 터키 여러 지반과 페르시아에서 분리된 지방의 정복은 모두 영국의 이해관계에 해를 끼쳤다.’ 맥닐은 러시아가 이 모든 것을 도둑질로 얻었으며, ‘연속적인 잠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잠식 가운데 어느 것도 유럽 강국들과 맺은 우호적인 관계를 해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앞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번 반복하게 될 과정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기도 했다.

 

 

맥닐 예측에 따르면 러시아의 다음 두 목표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병든 쌍둥이였는데,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차르의 군대의 단호한 공격에 맞설 수가 없었다. 만일 터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손에 들어간다면 유럽과 지중해에서 영국 이해관계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될 터였다. 러시아가 페르시아를 점령하게 되면 인도 운명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맥닐 진단은 우울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주요 전략가들과 더불어 모든 반러시아 논평가와 신물들이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러시아가 다음 행동에 나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며, 그 대상이 터키와 페르시아 가운데 어느 쪽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반이라고 보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1-09-15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먼저 러시아 역사의 700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때 러시아인의 특징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인들은 이후 유목민에 의해서건 핵미사일 기지에 의해서건 포위를 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몸에 배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막무가내로 아시아를 향해 동쪽과 남쪽으로 밀고 나아가 결국 인도 영국인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적그리스도 병사들이 마지막 무시무시한 추수를 하러 온다.’ 13세기 한 학자는 몽골인 무리를 두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말을 탄 몽골 궁수들의 신속한 기동력과 더불어 낯설고 기발한 전술 때문에 그들과 맞서는 부대는 평정을 잃었다. 오래전부터 부족 전쟁에서 사용하던 책략들 덕분에 자신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거짓 퇴각으로 노련한 적군 지휘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요새들은 돌격대 앞에 포로들 – 남자와 여자, 아이들 –을 몰고가는 야만적인 전술로 공략했다. 포로들의 시체가 도랑과 해자를 메워 인간 다리를 형성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몽골군의 긴 공성 사다리를 요새 벽까지 가져가야 했다. 다른 포로들은 방어군 공격을 받으며 공서용 무기를 설치했다. 이런 포로 가운데는 방어군 가족이나 친구도 있어 방어군이 함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아시아를 가로질러 왕국들을 차례로 부수고 벌벌 떠는 유럽을 향해 다가가던 몽골군은 흑색선전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진군하기 전에 자신들 야만성에 관해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오싹한 소물들을 먼저 퍼뜨렸다. 식인도 그들의 수많은 악덕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포로로 잡은 처녀 젖가슴은 고위 지휘관들에게 바친다는 말도 있었다. 즉시 항복을 해야만 약간이라도 자비를 얻을 희망이 있다고 했다. 전투에 패배한 적군 지휘관들은 승리한 몽골군의 잔치판 바닥에 깔린 널빤지 맡에서 짓불려 천천히 죽어가기도 했다. 포로가 더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정복한 도시의 모든 주민을 다 죽이는 일도 많았다. 그래야 나중에 다시 위협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집단으로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했다.

 

 

러시아는 200년이 넘도록 몽골(이 죽음의 상인들은 스스로 ‘황금 군단’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서부 제국 사령부의 황금 장대를 꽂은 황금 천막에서 나온 말이다)의 굴레에 묶여 침체와 고통을 겪었다. 침략자들은 무시무시한 물질적 파괴를 자행했을 뿐 아니라 약탈적 통치를 통해 러시아 경제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상업과 산업을 마비시키고 러시아 백성을 농노로 바꿔놓았다.

 

 

타타르 지배기(러시아인들은 그들 역사의 이 암흑기를 그렇게 부른다)는 동시에 아시아 통치 방식을 비롯한 동양 관습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관습은 기존의 비잔틴 체제에 덧씌워졌다. 러시아 사람들은 서구 자유주의 영향력에서 차단되어 그 관점이나 문화가 점점 더 동양적으로 바뀌어갔다. ‘러시아인의 껍질을 벗기면 타타르인이 나타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편 러시아의 유럽 이웃들은 이처럼 몰락한 상태와 군사적 약세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러시아 영토를 손에 넣기 시작했다. 독일 공국들, 리투아니아, 폴란드, 스웨덴이 모두 이 일에 가담했다. 몽골인들은 조공이 계속 들어오는 한 이언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아시아 영토 쪽에 관심이 컸다. 그곳에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헤라트와 바그다드 등 부와 호화로움에서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도시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로 지은 러시아 도시들은 그런 도시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쪽 유럽의 적들과 동쪽 몽골인 사이에 끼어 짓눌리던 러시아인들은 침략과 포위에 대해 편집증적인 공포를 갖게 되었으며, 이런 공포는 그 이후로 줄곧 그들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몽골 침략은 러시아의 정신에 오랫동안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외국인 혐오(특히 동양인에 대한 혐오), 빈번한 호전적 외교 정책, 국내의 압제를 금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설명해준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침략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런 공포를 더욱 굳혀주었다. 칭기스칸이 세상에 풀어놓은 그 사나운 작은 기병들은 마침내 힘을 잃고 미미한 존재로 전락했지만,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이 글을 쓰느 지금(2006년)은 100년에 걸친 영러 대립의 진원지 노릇을 해온 아프가니스탄에서 유혈 사태가 거의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1979년 러시아는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를 지원하려고 10만 병력을 들여보냈다. 하지만 십 년 간의 극심한 갈등 뒤에 그들은 수모를 겪으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철수하면서 이전의 꼭두각시 대통령 나지불라 장군을 남겨두고 왔지만, 사 년 뒤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항복하면서 나지불라도 몰락했다. 나지불라는 피난처로 삼았던 UN 구역에서 끌려나와 야만적으로 구타와 거세를 당하고,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지불라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끔찍한 사진은 전 세계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나지불라가 이 책 <그레이트 게임>을 파슈토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과거의 끔찍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에 뒤이어 2001년에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NATO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비밀 알카에다 기지에서 서방을 목표로 한 9.11 유형의 공격이 다시 계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촉발된 일이었다. NATO가 이끄는 군대는 이런 기지들을 파괴하는 것 외에도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고, 거대 마약 거래상을 없애고, 재건을 원조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국은 지금까지 22명의 전사자, 즉 평균 여드레에 한 명 꼴로 전사자를 냈다. 그럼에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악몽과 다를 것이 없는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부대를 파병할 계획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현재 벌어지는 잔혹한 싸움의 결과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강력한 두 선수, 즉 미합중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가스와 석유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평화롭고 협조적인 상태로 유지하기를 바란다. 사실 세계 무대에서 러시아의 새로운 힘은 송유관을 자신들이 통제한다는 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신생 국가 중 어느 하나가 이란의 예를 따라 석유와 근본주의, 핵무기를 무모하게 뒤섞어 휘두를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놀라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지만.

 

 

미국과 러시아 외에도 이 지역의 다른 강국, 특히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곳을 유심히 살피며 우려를 하고 있다. 소련 붕괴로 중앙아시아는 다시 역사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 간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오직 용감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만이 미래를 예측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중앙아시아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뉴스의 한복판으로 돌아왔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 이야기가 별다른 의미는 갖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지난 100년 간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보여줄 것 같다.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의 대사관 습격, 외교관 살해, 페르시아 만을 향한 전함 파견. 이 모든 일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사실 오늘날 신문 표제는 100년 전의 것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교훈에서 배운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1842년에 영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은 불행한 일을 기억했다면 러시아인들은 1979년 12월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똑같이 무시무시한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그랬다면 아프가니스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고한 피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1만 5000명의 러시아 젊은이들 목숨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스크바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길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이 선택한 전장에서는 과거의 막강한 전투 능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속하게 최신 전쟁 기술까지 끌어안았다. 한때 영국 군인들을 수도 없이 학살했던 총열이 긴 치명적인 제자일(화승총의 일종)은 현대에는 열을 추적하는 스팅어 미사일로 탈바꿈하여 러시아의 무장 헬리콥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레이트 게임이 사실 끝난 것이 아니며, 판돈이 훨씬 더 커졌다고 주장한다.

 

 

예전부터 러시아는 이슬람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가 확실하게 그들 세력권 안에 있다고간주했다. 외교와 교역을 목표로 한 러시아 사절단은 1820년 10월 오렌부르크에서 출발했다. 사절단은 차르가 아미르(군사령관 ·총독 ·황태자 등을 뜻하는 아라비아어)에게 보내는 아첨으로 가득 찬 편지를 들고 갔으며, 아미르는 자국 출신 중개인을 통해 사절단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러시아인들은 또 일을 쉽게 하기 위해 총과 모피, 손목시계, 유럽산 도자기를 포함한 푸짐한 선물도 들고 갔다. 물론 부유한 중앙아시아 부하라 사람들이 그런 물건들을 얻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러시아 공장들(이제 그 숫자는 5000개 정도로, 노동자 20만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은 새로운 시장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내 시장은 너무 작고 가난해서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반면 경쟁자인 영국은 더 고급스러운 기계를 사용해 유럽과 아메리카 양쪽에 싼값으로 물건을 공급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신 문간인 중앙아시아에 잠재력이 큰 거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시장은 워낙 외졌기에 경쟁자와 마주치지 않았다. 영국이 중앙아시아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했다. 오래된 비단길의 시장들은 러시아 상품들로만 채워져야 했다. 특히 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게 그레이트 게임은 정치적, 군사적 팽창의 문제만이 아니라 상업적 침투 문제이기도 했다. 물론 깃발 – 머리가 둘 달린 제국의 독수리 –이 러시아 상품을 싣고 가는 카라반을 쫓아가는 것이 그다음 순서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물론 1820년 러시아 사절단 임무는 상업적 정찰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사절단은 부하라 방어군의 자세한 배치도와 더불어 군사와 정치 등의 정보도 최대한 모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절 가운데 한 사람인 독일 태생 의사 에페르스만은 사절단과 호위대가 도시 성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변장을 하고 수도로 들어가 아미르 백성과 어울리며 정보를 수집하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시도를 했다. 그들은 기병과 보병 호위대 외에 강력한 대포도 2문을 가지고 갔다. 여차하면 부하라의 진흙 성벽, 궁, 모스크를 파괴해버리려는 것이었다.“<그레이트 게임>

 

 

 

 

 

 

 

 

 

 

 

 

 

 

 

 

 

“플라톤은 만일 인간이 단순하다면,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로 충분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어찌하여 그런 낙원은 도무지 찾아오지 않는가, 어찌하여 이러한 유토피아가 지도 위에 나타나지 않느냐고 플라톤은 질문한다. 플라톤은 탐욕과 사치 때문이라고 답한다. 상업과 금융은 새로운 계급 분열을 낳는다. 부의 분배에서 이 변화는 필연적으로 정치 변화를 가져온다. 상인 부가 토지 소유자의 부를 능가하면 귀족정치는 금권적 과두정치에 길을 양보하며, 부유한 상인이나 은행가가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여러 세력을 조정하는 정치는 책략과 관직의 이용만을 일삼는 정략으로 변해 버린다.

 

 

전쟁 요인은 외국 무역이기에, 이를 방해하는 분쟁은 피할 수 없다. 사실 무역의 경쟁은 전쟁의 한 형태다. 평화란 단순한 어휘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 지도자들은 무역과 산업을 감독하여 개인의 지나친 부와 가난을 막아야 한다. 누구든 시민 평균 재산의 4배 이상을 획득하면 초과분을 국가에 양도해야 한다. 따라서 이자는 금지되고 이익은 제한되어야 한다.“<철학이야기>

 

 

 

 

 

 

 

 

 

 

 

 

 

 

 

 

 

“자본 축적은 실물 장비로 축적되지 않는다. 자본 가치는 실물 장비의 내재적 생산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작동을 둘러싸고 있는 일반적인 제도, 정치, 경제적 환경에 좌우된다. 유조선울 예로 들어보면, 유조선의 원유 운반 능력은 잘 변하지 않으며 그 변화 또한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재로서 가치는 석유 가격의 변동에 아주 심하게 영향 받는다. 중동 지역의 전쟁, 산유국 회의(OPEC)의 단합 등 환경이 변하면 석유 가격이 인상되어 사회 전체 소득에서 더 많은 몫이 유조선 소유자에게 돌아갈 확률이 커진다. 유형 자산의 생산성은 그대로인데 가치가 올라가는 일이 벌어진다.

 

 

미국과 같은 나라는 매년 엄청난 무역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유 무역을 주창하고 매년 많은 국가와 자유 무역을 넓혀 간다. 자유 무역이 확산되면 미국의 무역 적자가 완화될 것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 무역 적자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대기업들에게 무역 자유화란 무역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유로운 해외 투자가 숨겨져 있다. 수출은 대기업이나 중소 기업 모두에게 이윤을 늘려 주지만 해외 투자 수익은 거의 대부분 가장 큰 기업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대기업들에게 수지 맞는 것은 무역이 아니라 소유권을 얻기 위한 해외에 투자하는 것이다. 해외 투자 자유화는 무역 자유화와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수입 경쟁과 무역 적자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무역 자유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해외 투자도 여타 투자와 마찬가지로 항상 권력의 문제다. 대기업이 산업의 통제권을 쥐고자 직접 해외 투자를 한다. 또한 신규 설비 확장으로 야기되는 과잉 설비 투자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전 세계 총 해외 투자의 75퍼센트는 국경을 넘는 인수 합병 형태로 나타난다.“<권력 자본론>

 

 

 

 

 

 

 

 

 

 

 

 

 

 

 

 

“선진국과 선진국 경제에 종속된 도상국 및 선진국과 경합하는 위치에 있는 후진자본주의국 사이에는, 바꿔 말해 ‘남북’ 간에는 심각한 적대와 전쟁 위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종교적 대립의 양상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경제적, 정치적이다. 이와 같은 적대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저 군사적으로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진짜 적대성이 사라지는 것은 국가 간의 경제적 격차가 사라지는 것, 그뿐만 아니라 격차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사라지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선진국에서 도상국으로 원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분배적 정의’는 차이를 해소하기는커녕 새로운 차이를 낳는다. 또 ‘분배적 정의’는 재분배를 하는 국가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또 강화시킨다. 그것은 남북 간의 ‘전쟁상태’를 영속화시키는 것이다.“<세계사의 구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1-09-13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다님! 세계사의 구조 이해하려고 해도 마르크스랑 칸트 알아야 하나요?ㅎ 이분 책은 두 철학자 때문에 좌절모드라서!트랜스크리틱을 읽다가 말았다는 걸 문득 느낌니다!ㅎ

북다이제스터 2021-09-13 19:11   좋아요 2 | URL
전 <트랜스크리틱> 앞부분, 즉 칸트 부분은 거의 안 읽고 건너뛰고 뒷부분 마르크스 부분만 읽었습니다. 앞부분은 엄청 어렵더라구요 ㅠㅠ

제가 고진 책 네 권을 읽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세계사의 구조>가 가장 쉬울 뿐 아니라 가장 잼있고 가장 많은 걸 배웠습니다. ^^

막시무스 2021-09-13 19:35   좋아요 1 | URL
정말 감사합니다! 자신감을 주셨네요!ㅎ 즐건 저녁시간되시구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