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 오성.정념.도덕 本性論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63
데이비드 흄 지음, 김성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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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걸친 기간, 영국 도덕철학에 두 가지 주요 조류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철학은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인식을 의미한다. 당시 도덕철학에는 ‘이기설’이라 불리는 흐름과 ‘이타설’ 혹은 ‘도덕 감각설’이라고 불리는 흐름이 있었다. 홉스의 <리바이던>에서 이기적 인간이 국가를 설립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심신양면이 평등하며, 자기보존을 위해서어떠한 수단을 써도 좋다는 자연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런 자연권 행사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전쟁 상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각자 생명 자체가 위험에 노출된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보호를 위한 평화를 추구하려는 자연법(이성의 목소리)에 따라 자연권을 포기하고 서로 계약을 맺어 대표자인 주권자를 선택해 국가를 설립한 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이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생명보호=자기보존이다. 한편 맨더빌은 <꿀벌의 우화>에서 개인 부덕이 사회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평가하고 인정했다. 맨더빌은 홉스로부터 이기적인 인간관을 계승하여, 모든 인간 행위는 이기적 동기에 근거한다고 말하며, 전통적인 도덕의 허위와 위선을 폭로했다. 홉스와 맨더빌 이론의 주요 특징은 첫 번째로 이기적 인간관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기심을 억제하는 강대한 힘을 개인 외부에 요구한 점이다.


인간 중심의 이기심은 인애(仁愛)라고 하는 이타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극복하려고 하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기적 개인이 그대로 어떻게 사회를 형성하고, 이 사회에 있어서 사적 이익을 유지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기초로 정의론을 전개해야 한다.


도덕과 정의

모든 덕의 감각이 자연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몇 가지 덕은 인류가 놓인 여러 가지 일과 필요로부터 발생한 인위 혹은 고안에 의한 쾌감이나 시인(是認)을 낳는 것이다. 정의가 이런 종류의 덕이다. 정의로운 덕은 자연스러운 덕이 아니라 인위적인 덕(artificial virtue)이다. 반면 덕망 있는 행위는 그 가치를 덕망 있는 동기에서만 얻는 것이며, 행위 자체에 대한 고려(의무감)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된다.


공공 이익은 정의의 모든 규칙 준수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정의의 모든 규칙이 확립된 후에 공공 이익이 엮인 것일 뿐이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채권자에 지불 약속을 이행하거나, 절도나 강도 같은 정의롭지 못한 모든 일을 단념하려 할 때, 공공 이익을 깊게 고찰하는 것도 아니다. 공공 이익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숭고한 동기다. 그러므로 공공 이익의 고찰이 정의의 근원적인 동기라고 생각할 수 없다. 정의의 단독적인 행위에는 자연적인 동기가 존재하지 않으나 정의의 방식 내지 방책의 전부는 사회 유지와 각 개인 행복에 대단히 이바지할뿐더러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 묵약과 사적 이익 확보

우리가 공평의 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동기는 공평 그 자체와 준수에 가치가 있다는 것 이외에는 진실로 보편적인 동기는 없다. 정의와 정의롭지 못한 감각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교육과 인간의 묵약(묵계 또는 편의적인 약속)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인간 본성의 중심이 이기심이라는 것은 변경할 수 없지만, 이런 이기심 발동을 억제하여 공공 이익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이기심의 충족을 가져오는 제도, 즉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이기심의 방향 전환이 묵약이다. 묵약은 단순한 공통 이익의 일반적인 감각이 아니다. 사회 모든 구성원은 이런 감각을 서로 표시해 가며 이 감각에 이끌리고, 각자 행위를 몇 개의 규칙에 의해 규제하는 것이다. 묵약은 개인 이기심의 자기규제 결과로서 성립하지만, 자기규제의 최후 목적은 공공 이익의 실현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 이익 확보인 것이다.


인간 본성이 선이냐 악이냐는 문제는, 사회의 기원과는 별개 문제였다. 사회는 인간이 그 유리함을 지각하기에 형성되어 존속한다. 이 지구상에 번식하는 모든 동물 중에서, 언뜻 보았을 때 인간만큼 자연으로부터 잔인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없다. 인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욕구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주어진 수단이 몹시 빈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구와 허약함이 부자연스럽게 서로 맞닿아 있다.


인간이 이와 같은 결함을 보충하여 다른 동물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이 가능한 이유는 사회 덕분이다. 인간의 모든 허약함을 사회를 통해 보상받는다. 개인이 고립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역할 때, 인간 힘은 너무나도 작아서 대단한 일을 수행할 수가 없다. 자신 모든 여러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인 노력이 이용되기에 개개 기술이 완전하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용된 힘과 그 성과와는 항상 동일하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 한 가지만 실패해도 불가피하게 불행과 파멸을 동반하는 것이다. 사회는 이런 결함을 각자 힘을 결합하여 생산력의 증대, 분업에 의한 기술 향상, 상호 원조에 의한 안전 확보로 보충하는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사회가 유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유리함을 꺠달아야 한다. 인간이 야만적인 상태에 있을 때는, 이런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사회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 중 가장 명백한 것은 이기심이다. 하지만 이기심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강조해 온 것만큼 끔찍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 이외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할 수는 없지만,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타인을 사랑하는 때는 자신과 가까운 것이나 관계가 있는 것에 사랑을 품는 존재다. 여기서 정념 사이에 대립이 생기고, 이 대립은 다음과 같이 특이한 외적 상정이 더해지면 위험이 한층 더 커진다.


묵약의 이유 - 재산 소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한 것(보물)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즉 마음의 내적 만족, 신체의 외적 우위, 근면과 행운에 의해 얻게 된 재산의 혜택 등이다. 첫 번째 혜택은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타인이 빼앗을 수 없기에 완벽하게 보장된다. 두 번째, 신체의 외적 우위는 빼앗을 수는 있으나, 빼앗은 자의 우위가 될 수 없다. 세 번째 재산의 혜택은 타인 강탈 위험에 노출되어 타인 소유물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재산의 양은 모든 사람의 욕망과 필요를 채울 정도로 충분치 않다. 그러므로 재산을 소지하는 데 따르는 불안정과 희소성이 사회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이런 불편함을 구제하는 대책은 인간의 계몽되지 않은 본성에서 찾아내려 하여도 헛수고일 뿐이다. 이 구제책은 자연으로부터 오지 않고 인위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사람이 판단과 지성에 의해 사회를 형성하는 것으로부터 초래되기 때문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이 맺는 묵약에 의해 재산 소유에 안정성을 부여하고, 각자가 행운과 근면을 통해 획득한 것을 평화롭게 누리게 하는 것이 그 길이다.


묵약은 약속과는 그 본성이 다르다. 약속 자체가 인간 묵약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묵약이라는 것은 공통 이익의 일반적인 감각이다. 예를 들어 만약 타인이 내가 타인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나를 대한다면, 나에게 있어 타인 재산을 타인이 소유하도록 두는 것이 나의 이익이 될 것이다. 또한 타인도 자신 행위를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 이익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공통 이익의 감각이 서로에게 표시되면 거기에 묵약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약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하는 것일까. 보트를 젓는 두 사람은 노를 저을 때 절대로 약속을 주고받지 않지만 묵약 내지 합의에 의해 노를 젓는다. 이와 같이 소유의 인정에 대한 규칙도 인간 묵약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묵약은 점차 일어나는 규칙 위반의 불편함을 반복해서 경험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나 교환의 공통 척도인 금과 은의 확립과 같이 서서히 확립된다. 미개하고 고독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그 상태의 불행을 깨닫고 사회 형성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예견하여, 소유의 안정을 위해 묵약을 맺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이런 반성은 실제로는 모르는 사이에 점차 일어난다.


정의의 근원 - 재산 소유

이렇게 하여 타인 소유물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는 묵약이 맺어지고, 각자가 자신 소유물의 안정을 획득해 버리면, 즉시 정의와 불의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또 소유와 권리, 책무의 관념이 일어난다. 소유라는 것은 정의에 의해 항상 확립되어 있는 재산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정의 기원을 구명하기에 앞서 소유와 권리, 책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정의 기원이 인위와 고안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소유에 대한 어떠한 관념도 가질 수 없다.


소유 구별과 안정에 대한 묵약은 사회 확립에 가장 필요한 사정이며, 이 규칙을 확정하고 준수하는 합의를 얻은 뒤에는, 사회 평화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은 거의 남지 않는다. 이 규칙이 확립되면 인간 이기심이 억제된다. 결국 정의는 인간 묵약으로 만들어진다. 이 묵약은 인간 마음의 일정한 성질과 외적 사물의 상황 협력에서 발생하는 몇 가지 불편함을 구제하는 대책으로서 의도된 것이다. 이 마음의 성질은 이기심과 관대함의 부족이다. 또한 외적 사물의 상황이라는 것은, 사물이 소유자를 쉽게 바꾸는 것이며, 사람들의 요구와 욕망과 비교할 때 사물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정의와 불의에 왜 덕 관념을 결부시키는 것일까. 인간은 각자의 이기심과 관대함의 부족이 제멋대로 작용하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을 정의의 규칙으로 억제하여 타인과의 교제가 더욱 안전하고 편리해지도록 도모하게 된다. 정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사람들을 가장 먼저 이끄는 것은 단지 이익에 대한 고려이지만, 사회가 확대됨에 따라 이런 이익을 놓치고 눈앞 이익만 쫓아 정의에 등을 돌리게 된다.


공감 - 도덕적 선악 감각

그럼에도 우리는 부정으로부터 받은 손해를 절대 간과하지 않는다. 부정이 매우 멀리서 일어나 우리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라도, 우리를 불쾌하게 만든다.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을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유해하며, 우리는 부정을 저지른 사람을 접할 때의 불쾌감을 ‘공감’에 의해 알기 때문이다. 공감이야말로 정의와 불의에 도덕적 선악 감각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인간 행위에 있어 불쾌감을 주는 것은 부덕이라 불리고, 쾌락을 낳는 것은 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공감 원리야 말로 정의에 덕의 관념을, 불의에 부덕의 관념을 결부시킨 것이다. 이기심은 정의를 확립하는 근원적 동기이지만, 공공도 이익에 대한 공감이 정의의 덕에 수반되는 도덕적 시인(是認)의 원천이다.


이렇게 정의의 규칙(법적 개념으로서의 정의)이 묵약에 의해 확립된 뒤, 그것을 전제로 공감에 의해 정의를 준수해야만 한다는 도덕 감각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정의와 불의의 도덕적 구별은, 두 개의 다른 기초를 가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스스로 억제하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관찰했을 때의 이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초와 사람들이 그 이익을 한번 관찰하여, 사회의 평화에 유용한 행위에서 쾌락을 얻고 또 그것에 반하는 행위에서 불쾌감을 느낄 때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기초다. 첫 번째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묵약 내지 인위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의의 법은 그런 한에서 인위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이익이 한번 확립되어 승인된 뒤에는 규칙을 준수하는 것의 도덕 감각이 자연스럽게, 게다가 저절로 거기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성질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이기심과 타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성향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공감의 작용에 의해 사회에 참여하는 존재다. 공감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매우 강력한 원리이며, 개인성을 뛰어넘는 계기를 각자에게 줄 뿐 아니라, 도덕적 구별의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덕과 부덕 문제를 해명하려면 공감의 본성과 힘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감은 다음과 같이 성립한다. 내가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몸짓 가운데 정념의 결과를 알아차리면, 내 마음은 바로 이런 결과에서 그 원인으로 옮겨가, 정념에 대한 생생한 관념을 형성한다. 이 관념은 즉시 정념 그 자체로 변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감동의 원인을 지각하면, 내 마음은 결과로 옮겨져, 상통하는 감동으로 움직여진다. 타인의 어떤 정념도 직접적으로는 내 마음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원인 또는 결과를 눈치챌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인 또는 결과에서 정념을 추론하고, 그 결과로서 이런 것들이 우리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공감원리는 많은 경우에 도덕적 감정을 낳는다. 예를 들면 정의의 덕이 그렇다. 정의는 인류 서능 향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도덕적인 덕이다. 정의는 이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고안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사회의 선은 자기 자신 이익 또는 친구 이익과 관련이 없을 때에는 공감을 통해서만 쾌감을 주기에 공감이야말로 모든 인위적인 덕에 대해 지불되는 존경의 근원이다.


그런데 자연적인 덕에 대해서도, 그 대부분이 사회 선을 향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온순, 자애, 배려, 관대, 절제, 공정함 등을 사회 선을 향하는 경향을 갖는 것에서 ‘사회적인 덕’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자연적인 덕은 거의 모두 사회 이익과 관계가 있으며, 이 점에서 인위적인 덕인 정의와 같다.


자연적인 덕과 정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다. 자연적인 덕으로부터 발생하는 선은 하나하나의 단독적인 행위에서 일어나며, 어떤 자연적인 정념의 대상이다. 한편 정의의 행위는, 그 자체로서 생각하면 자주 공공의 선에 반하는 일이 있으나, 행위의 전체적 조직으로서 작용할 때 비로소 공공의 선에 공헌하게 된다.


정부의 기초 - 여론

사회 현상을 냉정하게 고찰할 수 있는 자에게 있어, 다수자가 소수의 사람에 의하여 쉽사리 지배되고 있는 것만큼 놀라운 일은 없다. 그 원인을 따라가 보면, 실력은 언제나 피지배자 쪽에 있으므로 지배자가 지주(支柱)로 의지하는 것은 여론 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의 기초는 여론뿐이다. 이 원리는 가장 자유로운 인민정부에도, 사장 전제적이고 군사적인 정부에도 들어맞는다.


여론은 ‘이익’과 ‘권리’로 구별된다. 이익에 관한 여론이란 현재의 정부가 다른 어떤 정부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유익하며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한다. 이러한 여론이 한 나라의 대부분을 지배할 경우, 그 정부는 크나큰 안정을 획득할 수 있다.


권리에 관한 여론이란, 사람들이 장기간 그들 사이에 존재해 온 권위나 묵약을 지지하는 선입관을 말한다. 이 여론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권력에 대한 권리와 재산에 대한 권리로 구별된다. 권력은 인민이 자국 정부에 대하여 드러내는 애착을 말하며, 재산은 재산권에 대한 여론을 말한다. 이들 세 가지의 여론 즉 사회적인 이익, 권력에 대한 권리, 재산에 대한 권리에 관한 여론이 모두 정부의 기초인 것이다.


자기 이익, 공포, 애정 등이 복종의 강력한 동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분명 자기 이익과 공포, 애정은 이들 여론의 활동을 규정하거나 변경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작용력도 가질 수 없을분더러 여론의 작용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이익과 공포, 애정은 정부의 2차적인 원리이며 차적인 원리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일신교 - 사회 불안의 증표

사람들이 자연의 소산(所産)을 정관(靜觀)하여 우주 조직의 통일과 조화 가운데 신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많은 신이 아니라, 단 하나의 창조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연의 소산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족적을 인생 여러 가지 사건 안에 더듬어 가면, 필연적으로 다신교에 도달하여 제약된 불완전한 신들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인생의 사건은 다양성과 불확실성으로 흘러넘친다. 사람들은 행복을 향한 소망, 먹을 것이나 필수품에 대한 욕망, 미래의 곤궁에 대한 공포, 죽음의 공포 등으로부터 즉, 희망과 공포, 상상력으로 신들을 믿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역사는 다신으로부터 일신에, 일신으로부터 다신이라고 하는 두 개의 상반된 변천 과정을 따라 간다. 다신교에 있어서 신들은 은혜로운 신이기에 그 효능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회불안이 높아졌을 때에는 특정 신이 신앙의 중심에 되어, 유일신적인 성격을 갖는 일도 생긴다. 그 예로 종교개혁 이전에 성모 마리아가 전능신과 같은 성격을 가졌던 경우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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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감정과 이성의 싸움에서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시켜, 이성 명령에 따르는 한 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흔해 빠진 것도 없다. 그러한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를 이성으로 규제해야 하며, 만약 어떤 다른 동기나 원칙이 행위를 이끌려고 하면 끝까지 그것에 저항하고 진압해야 한다. 하지만 윤리적 이성주의 사고방식은 잘못되었고 그 오류를 밝히기 위해 다음 두 가지 명제를 증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명제는 ‘이성만으로는 어떠한 의지 작용에도 절대 동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행위의 충동은 이성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에 의해 인도될 뿐이다. 어떤 대상에 애착 또는 혐오가 생기는 것은 즐거움이나 고통을 예상하기 떄문이다. 이러한 감동은 이성과 경험의 지시에 의해 그 대상 원인과 결과로 퍼져 가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원인이나 결과가 우리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라면, 어떤 대상이 원인이고, 어떤 대상이 결과인지에 대해 아는 것은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대상의 인과적 결합을 발견할 뿐이므로, 대상이 우리 마음을 움질일 수 있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다.

 

 

두 번째 명제는 이성만으로는 어떠한 행위를 발생시키지 못하므로, 즉 의지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므로, 같은 이성이라는 기능이 의지 작용을 방해하거나 정념과 우위를 다툴 수 없다. 우리가 정념과 이성의 싸움에 대해여 말할 때는, 엄밀히 말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그 정도에 불과해야 하고, 이성은 정념을 받들고 복종하는 것 이외 결코 어떠한 역할을 감히 할 수 없다.

 

 

정념은, 이것을 무언가 다른 존재 또는 변용을 복사하는 것 같은 재현적 성질을 조금도 포함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화내고 있을 때 나는 현실에 정념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 감동은 다른 현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따라서 이 정념이 진리나 이성과 대립한다든가 모순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정념은 인상의 부류에 속하며, 그러므로 원초적 존재다. 또한 독특한 존재이자 존재의 원초적 변용으로, 다른 정념이나 행위와의 관계를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념은 관념의 관계에 일치하거나 다른 실재를 복사할 수 없으므로, 이성과 대립하거나 싸우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것은 지각밖에 없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은 지각이라고 하는 명사에 포괄되지 않은 그 어떤 기능으로서 작용을 나타내는 일은 결코 없다. 이 명사는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에도 다른 모든 마음에 작용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기서 지각은 인상과 관념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구별이 도덕에 대하여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덕과 부덕을 구별하여 어떤 행위에 대하여 비난당해 마땅하거나, 혹은 칭찬할 가치가 있다고 선고하는 것은 관념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인상에 의한 것인가라는 문제다.

 

 

덕과 부덕은 우리 행위나 정념에 관계되는 것이며, 아울러 단순한 관념 그 자체는 행위나 정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덕과 부덕은 관념에 의하여 구별할 수 없다. 덕과 부덕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인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어떤 철학자는 도덕을 논증할 수 있다는 견해를 열심히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논증을 한 걸음이라도 진전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관계 없이 철학자들은 도덕학을 기하학과 같은 확실성으로까지 초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처음부터 전제했다. 이런 가정에 바탕을 두고, 덕과 부덕은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게 된 것이다.

 

 

이들 철학자는 덕과 부덕이 어떠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도덕성 관계와 그 관계가 이성에 의해 식별 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성은 이러이러한 관계에 있고 이러이러한 행위가 덕망 있는 행동이며, 다른 이러이러한 관계에 있는 이러이러한 행위는 부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덕과 부덕이 논증할 수 있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유사와 반대, 어떤 성질의 정도, 양이나 수의 비율이라는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모순에 빠지게 되어, 그 모순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비이성적인 것을 비롯하여 생명이 없는 것에도 적용할 수 있기에 생명이 없는 것조차도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불합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본질은 그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게 된다.

 

 

도덕적 선악을 알리는 인상은 어떤 특수한 쾌고(유쾌함과 불쾌함),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구별에 대한 연구에 있어, 왜 어떤 성격이 칭찬받거나 비난을 받는지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성격을 보았을 때의 만족 또는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원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예를 들면 어떤 행위나 성격은 덕망이 있으며, 어떤 성격은 부덕하다. 우리가 그것을 보면, 어떤 특수한 종류의 유쾌함 또는 불쾌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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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론(필연성 학설)에 의하면 인간 행동과 욕구, 사상 등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결정론이 참이라면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면 만약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몇몇 사건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는 일이 된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생기는 것은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경우도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자유 의지에 관한 문제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기 쉽고,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또한 근대에 와서 자유 의지 문제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도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과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와,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는다는 자연 감정의 충돌이 계기였다. 이처럼 자유론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불합리하고, 또 다른 의미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이 우세한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어떤 행동을 수행한 다음 특정한 견해나 동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자인하더라도, 우리가 필연성의 지배를 받아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함을 확신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필연성을 관념을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힘과 방해 및 구속력 따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유에 있어서도 폭력에 대립하는 자발적 자유와 원인의 부정을 의미하는 무차별 자유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발적 자유는 가장 일반적인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유일한 자유이기도 하다. 우리 사유는 주로 이런 종류의 자유에 몰두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자유를 무차별 자유와 혼동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이다.

 

 

둘째, 무차별 자유에서조차 거짓 감각 혹은 거짓 경험이 있다. 이 사실은 무차별 자유가 실재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간주된다. 정신적 행동이건 신체적 행동이건 관계없이, 모든 행동이 필연성은 정확히 말하자면 행위자의 고유 속성이 아니라 그 행동을 고려할 수도 있는 사유하는 존재, 즉 지성적 존재의 속성이다. 바꿔 말해 어떤 선행 대상으로부터 그 행동을 추정하도록 그의 사유를 한정하는 데 있다. 반면 자유 또는 우연은 바로 이런 한정의 부재와 산만함일 뿐이다. 우리가 한 대상의 관념에서 다른 대상의 관념으로 옮겨 가거나 옮겨 가지 않을 때 느끼는 방종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인간 행동을 되새겨 볼 때 그런 방종이나 무차별성은 거의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 자체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무차별성이나 무관성 따위와 비슷한 어떤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관련되거나 유사한 대상들은 모두 쉽게 혼동된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인간 자유에 대한 논증적 증거뿐 아니라 직관적 증거로도 활용되고 있다.

 

 

우리는 자신 행동이 대개 의지를 따른다고 느낀다. 또 의지 자체는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의지를 시험할 마음이 내킬 때, 우리는 의지가 어떤 방향으로든 쉽게 움직이고,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측면에도 의지 자체의 영상을 산출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지의 이 심상 또는 희미한 운동이 의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을 부정하면 두 번째 시험을 통해 자유 의지는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완전히 헛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변덕스럽고 불규칙적인 모든 행동을 실행할 수도 있다지만, 우리 자류를 명시하려는 욕구야말로 우리 행동의 유일한 동기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성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내면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찰자는 외부에서 우리 동기나 성격을 통해 우리 행동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추정할 수 없을 때에도 자신이 우리 처지와 기분 그리고 우리 표정과 성향의 가장 은밀한 원천을 완전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의 행동을 추정할 수 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필연성의 실제 본질이다.

 

 

사람들이 자유론을 그 반대론보다 더 잘 수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종교에서 발생한다. 자유 의지는 종교와 도덕에 있어 극히 본질적이어서 이 필연성이 없다면 곧 종교와 도덕이 완전히 전복되어야 할 정도다. 말하자면 그 밖의 모든 가정 또한 신이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법칙은 모두 보상과 징벌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보상과 징벌이라는 이 두 동기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선한 행동을 낳고 악한 행동을 방지하는 기초적 원리로 가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향력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향력은 일상적으로 행위와 결합된다. 상식은 이 영향력을 원인으로 간주하며 내가 확립하려고 하는 필연성의 사례로 보아야 한다.

 

 

신을 입법자라고 생각하고 신이 인간을 그 법에 복종시키기 위해 징벌을 가하고 보상해 준다고 가정되는 한, 이 추론은 신의 법칙에 적용해도 역시 견고하다. 하지만 나의 주장은 신이 주재적인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가증스러움과 흉함 때문에 범죄를 응징하는 자로 간주될 때조차, 인간 행동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면 정의와 도덕 형평에 맞게 징벌을 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초에 징벌을 가하는 것이 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미움 또는 분노 따위의 항상적이고 보편적인 개성은 인간 또는 사유나 의식을 타고난 피조물이다. 그리고 무언가 범죄적이거나 불법적인 행동이 미움이나 분노 따위의 정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오직 그 사람에 대한 행동 관계 또는 연관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의지에 대한 자유론 또는 우연론에 따르면 이 연관은 없어져 버린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아주 무의식적이고 우발적인 행동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다. 행동은 바로 그 본성 때문에 순간적이며 또한 곧 소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이 그 행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성격과 성향 따위에 있는 몇 가지 원인에서 유래되지 않는 경우에, 그 행동은 그 사람에게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행동이 선하다고 해서 그에게 명예가 될 수 없고, 그 행동이 악하다고 해서 그에게 불명예가 될 수 없다. 행동 자체는 비난받을 수도 있다. 즉 행동이 도덕성과 종교 따위의 온갖 규칙과 상반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행동은 인물에게 지속적이거나 항상적인 무언가를 낳지 않으며, 또한 그런 성질의 것을 전혀 남겨 두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 행위 때문에 징벌과 보복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유의 가설에 따르면, 사람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도 마치 갓 태어난 순간처럼 순진무구하며, 사람의 성격은 자신 행동과 전혀 무관하다. 사람 행동은 자신 성격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므로 행동의 사악함도 성격의 타락에 대한 증거로 활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 의견은 이와 상반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오직 필연성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 행동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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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로크는 우리가 언제나 ‘자아(self)’라 불리는 것을 가까이 의식하고 있고, 자아의 존재 및 자아 존재의 계속을 논증에 의한 확증성 이상으로 확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경험에 반하고 있어, 우리는 여기서 설명된 자아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자아 관념은 어떠한 인상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명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애초에 어떤 관념을 낳는 것은 하나의 인상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자아는 몇 개의 인상과 관념이 관련성을 가진다고 가정되어 있다. 또 만약 어떤 인상이 자아 관념을 낳는다면, 그 인상은 인간 생애를 통해서 변함없이 같은 모습이 아니면 안 된다. 이는 철학자들이 생각한 자아란 그런 방법으로 존재한다고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항상적이고 변하는 않는 인상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항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각과 자아 관계를 고찰해 보면, 우리는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깝게 들어갈 때 뜨거움과 차가움, 사랑과 미움, 쾌락과 고통 같은, 어떤 특수한 지각을 만나는 것이다. 어떤 때에도 지각 없이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없고, 또 지각 이외 어떠한 것도 깨닫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각이 없을 때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계속해서 계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계속 움직이는 다양한 지각의 다발 또는 집합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계기하는 지각에 동일성을 귀속시켜서, 자기 자신 생애를 통해 변하지 않는 존재, 즉 인격동일성을 가진다고 가정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각 부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구하는 경향은, 부분의 공통 목적 위에 부분 상호의 공감을 부가할 때 한층 더 뚜렷해진다. 예를 들면, 동물과 식물의 경우 각 부분이 전체 목표에 관계할 뿐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결합하고 있다. 그것들은 몇 년 동안에 완전히 변화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동일성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 마음에 돌리는 동일성은 허구에 의한 것으로, 동물과 식물의 신체에 돌려지는 동일성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마음 구성 요소인 지각은 어떤 것이든 각각 다른 존재이고, 다른 지각과 달리 구별되고 분리된다. 이러한 구별과 분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각의 전체가 동일성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고 상상한다. 거기서 동일성이라는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 동일성의 관계가 지각을 실제로 결합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상상에 의해서 그러한 지각을 연합하고 있는 것뿐일까. 바꾸어 말하면, 어떤 사람의 동일성에 대하여 말할 때 지각 사이에 실재하는 연결고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연결고리가 느껴질 뿐인 것일까. 답은 후자다.

 

 

상상에 의해서 관념을 결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질로는, 유사와 접근, 인과성 이 세 가지와 관계 있다. 따라서 동일성은 세 가지의 관계 중 어느 것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문제는, 우리들이 인격의 계속적 존재를 생각할 때에 어떠한 관계에 의해 이러한 중단 없는 사고의 진행을 낳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접근은 이 문제에 전혀 영향이 없기에, 유사와 인과성을 고찰하면 된다.

 

 

먼저 유사에 관해서 말하자면, 상상은 유사의 존재에 의해 동일성을 낳기 쉽게 된다. 이 때 기억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지식 계기(어떤 현상이 잇따라 일어남)의 온갖 변동 속에 있고, 이 계기에 관계를 부여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이란 과거의 지각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인과성이 문제가 된다. 마음이라는 관념은, 지각의 묶음 혹은 집합일 수밖에 없다 할 때 그것은 다양한 지각을 불러 모으는 것 같은 집합이 아니고, 지배와 복종이라는 연결고리로 결착된 하나의 조직 아닌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음이라는 관념은 인과 관계에 의하여 이어 맞춰진, 상호에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지각 즉 존재의 체계인 것이다.

 

 

인과성의 경우에도 기억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혹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인과성을 생각할 수 없고, 자아를 구성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도 생각이 못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인격동일성의 원천이지만, 실제로 인격동일성을 낳는 것은 인과 관계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인과성에 대한 생각을 기억에 의해 획득한 후에, 인과의 연쇄를 기억이 없는 곳까지 미치게 하여 인격동일성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 관념은 지각이라는 심적인 것으로 집합한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자아 그 자체는 단순하게 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과 신체의 여러 성질이 자아이기에 자아는 신체와 마음의 복합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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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완전히 인간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다고 해도, 분명히 깊고 난해 한 곳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위대한 천재들도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실패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고 진리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확실히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모든 학문은 많건 적건 인성(人性)과 관련 있고, 또 인성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학문도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인성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심지어 수학과 자연학, 자연종교조차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학’에 의존한다. 그러한 학문은 인간 관리 아래 있으며, 또 인간의 능력이나 기능을 통해 그 진위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 지성 범위와 역량을 완전히 이해하고, 추론에 사용되는 관념이나 그때 동원되는 작용의 본성을 밝혀낼 수 있다면, 이들 학문이 얼마나 변화하고 진보할지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1. 기본 전제


인간 정신에 나타나는 모든 지각은 결국 서로 다른 두 종류인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상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 정도에 있다. 최고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에 우리는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때 감각과 정념, 정감 등이 우리 영혼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선 이것 모두 인상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킨다. 또한 관념은 사고와 추리에 쓰이는 감각, 정념, 정감의 흐릿한 반영을 나타낸다. 예컨대 지각 가운데 시각과 촉각에서 비롯되는 약간의 것을 제외하고, 또 직접 야기되는 쾌감이나 불쾌감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각을 뜻한다.

 

 

인상이 관념에 앞선다는 원리가 제1원리다. 이 원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인상과 관념 중 무엇이 앞서느냐에 관한 이 물음은, 본유관념이 있는지 또는 모든 관념이 감각과 반성(reflection)에서 비롯되는지 등의 논쟁에 출발점이 된다.

 

 

2. 인과관계


(흄이 필연성의 관념을 어떠한 대상 속에서도 찾지 않고 추론자의 마음속에서 찾은 것은, 인과성 문제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인과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그때까지의 철학자와 일반 사람이 믿어온 것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근거로 추리할 때,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는 관념, 즉 ‘신념’을 품는 것이다. 새로운 추론 내지 단정도 없이 과거의 반복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것을 ‘습관’이라 할 때, 어떤 현재의 인상에 따라 일어나는 신념은, 오로지 습관이라는 기원에 유래한다. 두 가지 대상이 연접하는 것이 눈에 익으면 그 한쪽이 나타남 혹은 관념에 의해 우리는 다른 한쪽의 관념으로 운반되는 것이다.

 

 

인상에서 유래하지 않는 관념은 없기에 만약 필연성의 관념이 있다고 한다면, 이 관념을 생기게 하는 어떤 인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연성은 항상 원인과 결과로 귀착되므로, 그러한 인과 관계에 있는 두 가지 대상을 조사해 보자.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대상이 시간적, 장소적으로 접근해 있는 것과 원인이라 불리는 대상이 결과라 불리는 대상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서로 비슷한 대상이 언제나 비슷한 접근과 계기(繼起)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현재의 목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들어가서 살펴보면 반복이 새로운 인상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반복은 모든 점에서 같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상을 낳고, 다시 그것에 의해 지금 검토하는 관념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 반복하다 보면, 대상의 하나가 나타날 때 마음은 습관에 의해 규정되어, 그것이 언제나 수반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의 대상과의 관계 때문에 훨씬 강하게 비춰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필연성의 관념을 주는 것은 이 인상, 즉 이 규정인 것이다.

 

 

두 가지 대상의 항상적 연접을 관찰하면 대상의 한 가지가 나타나면 이 연접에 의해 만들어진 ‘습관’에 의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음을 다른 대상에게 이행시켜, 그 추론을 개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필연성이란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지, 대상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고금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논의를 일으킨 문제 가운데 하나는 원인의 효력에 관한 문제, 즉 원인이 그 결과를 수반하는 성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설명은 로크 학설이었다. 그것은 물질에는 물체 운동과 변동 같은 새로운 생성이 있는 것이 경험에 의해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운동과 변동을 낳는 힘이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고 단정하고, 여기에서 추리에 의해 힘 또는 효력의 관념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물리치려면 두 가지의 명백한 원리를 제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먼저, 이성만으로는 어떠한 근원적 관념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쨰 원리는 경험에서 구별된 이성은, 원인이 모든 존재의 시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단정을 결코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리에서, 이성은 효력의 관념을 결코 성립시키지 않기에 효력의 관념은 경험에서 유래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관념은 인상에서 생기는 것이기에, 힘과 효력의 관념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지각되는 사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생득관념 원리에 의해 논의를 진행시켜, 신을 물질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생득관념이 허위인 이상, 신을 가정한다 해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모든 관념이 인상에서 유래한다면, 신의 관념도 같은 기원에서 생기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어떠한 인상도 힘과 효력의 인상을 지시하지 않기에 신에게서 그러한 활동 원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원인과 결과를 결합시키는 필연성이란 힘이 아니라 인과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향하는 마음의 규정이고, 원인이 작용하는 장소는 원인의 속이나 신의 속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주제 관련 철학에 아주 많이 퍼져 있는 여러 선입견과 통속적 오류를 제거할 수 있는 보조 정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지금까지의 학설에서 모든 원인은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동력인과 필수인을 구별하는 것, 또는 동력인과 형상인, 질료인, 모형인, 목적인을 때때로 구분하는 것이 전혀 근거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효력의 관념은 두 대상들의 항상적 결부에서 유래하므로, 이런 결부가 발견되면 원인은 언제나 효력을 가지며, 항상적 결부가 없는 경우에도 어떤 종류의 원인도 있을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원인과 우인(偶因)도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낸다고 가정되면 거부해야 한다. 우인이라고 일컫는 것에 항상적 결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우인이 곧 실재적 원인이다.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그 우인은 전혀 인과적 관계가 아니며 어떤 논변이나 추론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둘째, 동일한 추론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것이다. 단 한 종류의 원인이 있듯이 필연성도 한 종류만 있으며, 따라서 도덕적 필연성과 자연적 필연성 사이의 일상적 구별은 사실상 아무 근거가 없다. 정신의 결정과 대상들의 항상적 결부가 자연적 필연성을 이루므로, 이것을 제거하는 것은 우연과 같은 것이다. 대상은 반드시 연결되거나 그렇지 않으며, 또한 정신은 반드시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도록 결정되거나 그렇지 않으므로, 우연과 절대적 필연성 사이에 어떤 중간적인 것을 용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결부와 결정이 약해진다고 하더라도 필연성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물체의 작용에서조차도 그 물체들은 필연성의 관계와 다른 종류를 산출하지 않고 다른 정도의 항상성과 힘을 갖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능력과 능력의 실행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

 

 

셋째, 우리는 이제 모든 반감들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반감은, 우리가 존재의 모든 시초들 각각에 대한 원인의 필연성이 논증적이든 직관적이든 간에 어떤 논변에도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앞의 추론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것이다. 원인에 대한 앞의 두 가지 정의에 따르면 그와 같은 의견이 아주 낯설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원인을 다른 것에 선행하고 그것에 인접한 하나의 대상이며, 여기서 후자와 유사한 대상은 모두 전자와 유사한 대상에 대해 선행과 인접이라는 비슷한 관계로 놓인다고 정의한다면, 존재의 시초는 그런 대상을 수반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필연성은 없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원인을 어떤 대상에 앞서서 인접하는 대상이며, 전자와 상상력에 합일되이 있기에 한 대상의 관념이 다른 대상 관념을 형성하고, 한 대상의 인상은 다른 대상의 좀더 생생한 관념을 형성하도록 정신을 결정한다고 정의한다면, 이 의견에 동의하는 데 어려움이 훨씬 덜할 것이다. 정신에 미치는 이러한 영향은 그 자체로는 완전히 놀랍고 이해할 수 없으며, 경험과 관찰을 통하지 않고는 그 실재를 결코 확인할 수 없다.

 

 

넷째, 어떤 대상이든 그 관념을 형성할 수 없을 때,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존재에 관한 추론은 모두 인과성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인과성에 관한 추론은 모두 경험된 대상들의 결부에서 유래하며, 어떤 추론이나 반성에서 유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로 이 경험이 존재하는 대상의 개념을 제공해 주며 대상에 관한 결론에서 모든 신비를 제거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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