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막을 내릴 즈음 미국인은 도덕이 쇠퇴하고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음을 느꼈다. 당시 대중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다윈주의였다. 그 옹호자들은 사회 진보는 적자생존을 필요로 하며 ‘시장의 자연법칙’에는 정부가 일체 간섭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조직된 사회에서는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실패할 것이며, 부적격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이 인위적 방해없이 진행되면 사회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몇몇 중요한 측면에서 이 철학은 규제 받지 않는 시장을 숭배하며 요즘 미국에서 다시 한 번 인기를 끌고 있는 자유 지상상주의자들의 선조 격에 해당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서 사회적 다윈주의 비판자들이 점차 지적으로 그리고 더 크게는 정치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이 철학적 전환이 일어난 부분적 이유는 도시 참상을 폭로한 언론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슬럼가 공동주택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제이콥 리스의 <나머지 절반이 살아가는법>(1890), 도시의 비참한 생활과 정치 부패를 폭로한 링컨 스테픈스의 <도시의 수치>(1904), 1904년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횡포를 잡지 <맥클루어>에 고발한 아이다 타벨, 이민 노동자에 대한 학대를 그린 소설 <정글>(1905)의 업튼 싱클레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학대 사례와 비참한 상황을 폭로하는 일보다는, 소규모 마을의 생활이 갖고 있던 공동체적 가치를 찾으려는 열망을 광범위하게 표출했다. 사회 변화는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전통적 관계를 산산이 부쉈다. 그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해체의 느낌을 대단히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했다. 1914년 월터 리프먼은 ‘우리 존재의 뿌리 그 자체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노동자와 고용주, 그 어떤 관계를 막론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인간관계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문명에 익숙해 있지 않지만, 인간적 접촉과 영원한 권위가 사라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너무 빨리 환경을 바꾸어놓았다.’

 

 

작가 부스 타킹턴은 19세기 말 도시화를 동반한 사회 변화를 겪기 전 고향 인디애나폴리스를 이렇게 회상했다. ‘한 세대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그곳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던 이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즐거운 큰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느긋하고 친절한 곳, 그래서 ‘내 집 같은’ 마을이라고 부르던 그런 곳이었다. 대단한 부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 가난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당시 진보 시대 지식인들은 도시화, 산업화되는 미국에서 과거 밀접한 공동체적 유대의 붕괴를 비판했다. 작은 타운, 가족, 친구 연대 관계로 이루어진 탄탄한 유대는 사라지고, 인간관계가 제거된 시장을 통한 비인격적이며 희미한 유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표현 한 사람들 ‘관계는 피상적이고, 여론에 의해 부과된 제약은 취약하고, 자기 이웃과 공통의 대의는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은 당시 미국 사회 질서에 잘 들어맞았다.

 

 

당시 진보 시대 사회개혁가들은 사회적 병폐, 빈곤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원인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개인 노력을 통한 자수성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새롭고 더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환경에서는 날이 갈수록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며, 보다 유기체적인 사회관으로 점차 바뀌었다. 진보 시대 지식인들도 자기 이익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은 애정과 명성, 심지어는 이타심 등의 비물질적 가치에 의해서도 움직인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간단히 말해 이 시대는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했다. 기술 진보와 전례 없는 경제 번영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약속은 넘치고 있지만, 보다 통합된 인간적 유대 관계에 대한 그리움도 깊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약속하는 듯 보였지만, 사려 깊은 사람들은 혹시 그러한 공동체가 오히려 위험하거나 속빈 강정은 아닐까 우려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회적 질병으로 가득 찬 냉혹한 현실에 입각한 비관론, 그리고 바로 직전의 경제 호황이 만들어낸 낙관주의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와 기업 힘의 새로운 집중 현상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에 의문을 제기했다. 안락한 중간 계급은 사회 유대 회복이라는 보다 근본적이 요구와 현실 탈출의 매력적인 유혹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질주의, 정치적 냉소주의, 행동보다는 물러나 구경하려는 성향이 이상주의적 개혁 운동을 좌절시키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 연계의 오랜 끈들이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의해 닳았거나 심지어 썩고 있었다. 신중한 관찰자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길을 다시는 밟을 수 없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을 분명히 포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기술 진보가 탄생시킨 자기만족은 불만으로 바뀌었으며, 불안과 희망의 혼합물은 시민적 창조성, 그리고 조직화된 개혁의 열정을 지폈다. 그 뒤 수십년 동안 새로운 사회 연계성을 형성하며 뻗어가는 다방면의 운동이 크게 번성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의 시대를 만들어갔다.

 

 

복고적인 낭만주의자들은 작고, 단순하며, 목가적인 시대로의 회귀를 생각했지만, 상당히 실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진보 시대 지식인들은 그러한 호소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 미덕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산업 시대는 많은 결함을 안고 있지만 시민 진보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들에게는 ‘근대성의 수용 혹은 거부’가 아니라, 우리 전통의 지속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이 새로운 세계에 어떻게 우리 행동과 사고 습관을 적용시키고, 제도를 어떻게 개혁하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진보 시대 지식인의 독특한 특징은 사회적 악이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태도는 무모하다는 확신이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과연 민주주의와 경제적 평등이 산업 사회에서 가능한지 알고자 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곳의 영세민 거주 지역에 에너지를 쏟았고, 도시 빈민들 속에서 같이 일했다. 새로운 성직자 세대는 설교대를 내려와 성경 말씀만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어려운 사람 편에 적극적으로 서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내세가 아닌 현세에 의미를 갖도록 만들고자 했다. 여성 클럽도 점점 관심사를 문학 토론에서 사회 문제 해결과 논의로 전환시켰다.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 사이 다시 점화된 미국 시민 생활의 활력이 보여주는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단체 형성의 붐이며, 여러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농민공제조합, 엘크 협회, 노동자연맹, 아메리칸 레전, 보이스카웃 같은 수 많은 단체가 그 때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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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깃발에는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이상이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 민주주의자들이 의도했던 박애는 사회적 자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 깃발 위에서 혹은 그 후 철학적 논쟁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이 가치 세 개가 항상 공존하느냐는 것이다. 지난 2백 년 동안 서양 정치 논쟁 대부분은 자유와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중심으로 전재되었다. 즉 지나친 자유 혹은 특정 형태의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다. 혹은 지나친 평등 혹은 특정 형태의 평등이 너무 지나치면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이보다는 덜 친숙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단히 중대한 문제는 세 번째 가치에 해당하는 박애와 자유,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다. 즉 지나친 박애는 자유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가?

 

 

먼저 사회적 자본과 평등 관계를 보면, 20세기 대부분 기간 사회적 자본과 경제적 평등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부와 소득 분배라는 측면에서 1950년대와 60대 미국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평등했다. 당시는 사회적 연계성과 시민적 참여가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최고 수준의 평등과 최고 수준의 사회적 자본은 일치했다.

 

 

반면 20세기 말 기간은 불평등의 확대 그리고 사회적 자본의 감소 시기였다. 20세기 말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격차는 거의 30년 동안 계속 늘었는데, 최소한 20세기 들어 불평등이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늘어난 시기였다. 평등과 박애의 상관관계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사회적 자본은 평등을 이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적 자본은 없는 사람들의 중요한 무기였는데, 이들은 다른 형태의 자본을 갖지 못했다. ‘단결이여 영원하라’는 인종적 소수자이거나 노동계급처럼 일반적인 정치 영향력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고 전략적으로 현명한 구호다. 따라서 촘촘하게 짜인 공동체가 보다 평등한 사회적, 정치적 장치를 지탱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납득할 만하다. 반면 부와 권력의 커다란 격차는 구성원의 광범위한 참여, 그리고 넓게 공유된 공동체 통합을 훼손시킨다. 따라서 인과관계의 화살은 평등에서부터 시민 참여와 사회 자본으로 진행한다는 것 역시 타당해 보인다.

 


다른 한편, 공동체 유대에 맞서는 자유주의자 반론은 공동체가 자유를 제약하고 편협성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주장은 옳을 수 있다. 사회적 자본과 자유는 양립하기 어려울 수 있다. 1990년대의 미국은 50년대 심지어는 70년대의 미국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관용과 다양성이 꽃을 피웠을 때, 이 현상은 사회적 자본 하락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미국인은 해가 갈수록 더 관용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서로 연계와 접촉은 줄어들었다. 사회적 자본과 편협성 사이에는 일종의 철칙이 있어서, 관용적 개인주의 성장에 따른 사회적 자본 쇠퇴는 필연적 부수 현상으로 보인다. 결국에 가면 우리는 고통스럽고 자의적인 가치 선택에 직면하지 않을까? 공동체와 개인 중 어느 하나, 자유와 박애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하지만 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까?”<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2016)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현재 흑인이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은 사회에서 퇴출된 반면, 흑인이 문제가 있는 하위문화에 속해있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말은 흔하게 오간다. 우리는 생물학적 모욕에는 민감하지만 사회학적 모욕에는 둔감하다.

 

 

생물학에서 문화로 전선이 이동한 것은 단순히 의미 없는 용어 변경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심오한 이동이며, 현실적인 여파는 아주 넓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큰 동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부색이 짙은 사람에게 피부를 희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근거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아프리카계나 무슬림이 서구 문화의 규범과 가치를 택하지 않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 2018)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곳에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차이를 교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관용(똘레랑스)이 요구된다. 쉽게 변하거나 교정 가능한 차이는 관용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관용은 차이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이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게 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대체로 개인이 선택하고 사적으로 누린다고 간주된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각자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다문화주의 교육은, 문화에 자유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관용 태도가 뿌리 깊은 자유주의 사회는 문화 특수성을 넘어선 공적 유대와 공정함, 정의라는 관점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평등보다 차이를 부각하는 오늘날, 국가가 평등 보장이라는 자신 역할에 태만할수록, 국가는 점차 관용에 더 많이 호소할 것이다. 국가는 평등한 대우와 보호를 관용으로 대체하여, 시민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임무에서 벗어난다. 게다가 관용은 본질적 차이라는 담론을 순환시켜 관용 대상이 관용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순간 국가 폭력이 정당화된다.”<관용>(갈무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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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공공 업무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그 어떤 집합적 이익, 다른 사람과 함께 실현하는 그 어떤 목적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들과 경쟁한다고만 생각하며 어느 정도는 타인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이익만 내세운다. 그에게 이웃은 동료나 협력자가 아니다. 그는 공통 이익을 위한 그 어떤 공동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기에 이웃은 경쟁자일 뿐이다.


이와 달리 공동 작업에 참여하는 시민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이익을 중요시하도록 요구 받는다. 서로 주장이 충돌할 경우에는 자신의 개별적 특수성과는 다른 규칙을 따르도록 요구 받는다.” - 존 스튜어트 밀, <대의정부론>

 

 

"사려 깊은 사회 비판가들은 자본주의가 사람과 사람 사이 유대와 사회적 신뢰를 좀먹음으로써 개인 성공적 삶을 위한 전제조건을 훼손시킬 것을 오래전부터 우려해왔다. 게오르크 짐멜에서부터 칼 마르크스에 이르는 19세기 사회 이론의 거장 중 많은 사람이 시장자본주의는 우호적 인간관계에 필요한 인간적 온기를 상실하고 인간 유대를 단순한 상품 지위로 떨어뜨리는 ‘차가운 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회적 해체 일반 이론이 갖는 문제점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수세기 동안 시장자본주의의 축소판이었지만, 그동안 우리의 ‘사회적 자본’과 시민 참여 규모는 큰 폭으로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상수(常數)는 변수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란 개인들 사이 연계(connections),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reciprocity)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적 자본 이론 핵심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다. 스크루드라이버(물리적 자본) 혹은 대학 교육(인적 자본)이 개인적, 집단적 생산성을 모두 향상시킬 수 있듯, 사회적 접촉 역시 개인과 집단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자본은 몇몇 사람들이 ‘시민 품성(civil virtue)’이라고 부르던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민 품성은 호혜적 사회관계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사회적 자본’은 주목한다. 바로 이것이 단순한 시민 품성과 사회적 자본의 차이점이다. 시민으로서의 품성은 풍부하게 갖추고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 못한 고립적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사회적 자본이 풍부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사회 자본은 미국 지식인 사회의 오래된 논쟁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미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명 인사들은 개인주의를 압도적으로 높이 찬양했지만, 공동체주의는 이러한 경향에 맞서 끊임없이 반기를 들어왔다. 19세기 개인주의 찬가라고 할 수 있는 에머스의 <자립>, 소로의 <시민 불복종>, 휘트먼의 <나의 노래>부터 최근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개인 독립과 자유는 미국 문화의 기존 주제다. 따라서 미국의 국가적인 신화는 개인적 영웅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반면 집합적 노력의 중요성은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회적 자본이 개인과 공동체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으려면 먼저 사회적 자본은 어떻게 그 마법을 발휘하는지 알아야 한다. 높은 수준의 신뢰와 시민 참여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의 희망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하는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사회적 자본은 시민에게 집단적 문제를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사회과학자들은 집합 행동의 딜레마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한 딜레마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며 그 운동 방식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적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할 경우, 각자에게 맡겨진 몫을 다하면서 서로 협동한다면 전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구성원의 협조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집합 행동의 문제’ ‘죄수의 딜레마’ ‘무임승차 문제’ ‘공유지의 비극’ 등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즉 집단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구성원이 지키도록 보장하는 힘을 갖춘 제도적인 메커니즘이 있으면 문제가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규범, 그리고 그 규범을 집행하는 네트워크가 바로 그러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둘째,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를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고 신뢰를 받을만한 곳, 그리고 동료 시민과 상호작용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일상의 사업과 사회적 거래는 훨씬 비용이 덜 든다. 다른 사람이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만일 그렇지 않으면 벌칙을 가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쓸 필요가 없다. 사회적 자본은 경제적 효율성을 증진시키며, 따라서 우리 호혜성 네트워크가 깊어지면 우리 모두가 혜택을 볼 것이고, 만일 위축되면 우리 모두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를 권하고 있다.

 

 

셋째, 사회적 자본은 우리 운명이 연결된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인식 폭을 넓힘으로써 우리 처지를 개선한다. 가족, 친구, 같이 볼링 치는 사람 누구라도 좋다. 타인과 적극적이고 신뢰성 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은 사회 나머지 부분에서도 유익한 특징을 발전시키거나 유지한다. 타인과 적극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은 보다 관대하고, 덜 냉소적이며, 다른 사람 불행에 더 공감한다. 타인과 연결 관계가 없는 사람은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나 혹은 보다 공식적인 토의 속에서 자기 생각이 옳은지 시험할 수 없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나쁜 충동에 지배될 가능성이 높다. 갑자기 늘어난 학교 내 총격 사건 같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 행위는 주로 ‘외톨이’로 지내던 사람이 저지른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교외 주거 지역과 농촌 공동체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계속 터져 나온다는 것은 공동체 붕괴가 보다 환경이 좋은 곳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경제적 풍요와 교육은 집단적 비극을 막는 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네트워크는 우리 목표를 손쉽게 달성하게 해주는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도관 구실도 한다. 예컨대 많은 미국인은, 아마 우리 대부분이 다 그렇겠지만, 인간적 연결 관계를 통해 직업을 얻는다. 우리가 만일 사회적 자본을 결여하고 있다면, 경제사회학자들이 지적했듯 제아무리 재능과 훈련(즉 인간 자본)이 많아도 우리의 경제적 전망은 심각하게 축소된다. 이와 유사하게 시민적 상호작용을 결여한 공동체는 정보를 공유하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기회를 성취하고 위협에 저항하는 데 사람을 동원하기가 훨씬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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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한 세대 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집 밖에서 일하고 있기에 우리 공동체 유대 역시 집보다는 직장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고 친구도 여기서 많이 사귄다고 생각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생각들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사회 연계의 약 90퍼센트를 직장에서 찾고 있어요.’ ‘내 생각에는 사람들 생활이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친구도 직장에서 사귀지요, 공동체 봉사활동도 직장을 통해서 해요.’ ‘저는 직장 공동체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이 훨씬 강해요. 제가 일하는 산업 분야에서 내 회사 공동체, 내 사무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그런 기분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경향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산업혁명 자체가 일하는 장소를 거주 장소에서 분리해내는 과정의 시작이었으며, 우리는 집 밖 공장과 사무실에서 더욱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세기 말에 오면서 미국 노동 인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1950년에는 59퍼센트였으나 1997년에는 67퍼센트에 달했다. 동료들과 점심, 저녁을 같이 먹고, 같이 여행하고, 일찍 출근해서 늦게까지 일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더 자주 이혼하고, 그나마 결혼이라도 한다면 늦게 결혼하며, 혼자 사는 사람 숫자는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많아졌다.

 

 

직장 업무량뿐 아니라 성격도 변했다는 사실은 직장이 사회적 상호작용의 더 큰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혼자서 하루 종일 밭을 갈았던 농부는 일을 끝낸 후 교회 친교회나 지역 농민공제조합의 모임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겠지만, 대규모 복잡한 조직체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많은 미국인은 저녁에 또 다른 직장 모임에 참석한다. 더구나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종합적 품질관리’ ‘품질관리 서클’ ‘팀 만들기’ 열풍이 기업 경영에 밀어닥쳤다. 경영진에게 기업 내부에 공동체 느낌,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분위기를 확립할 것을 촉구했다.

 

 

많은 기업이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직원들이 모여 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교 장소’ ‘대화 장소’ ‘친목회’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을 만들면서 직장을 직원들이 연대감을 높일 수 있는 장소로 꾸미기 시작했다. 한 사회학자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기업에 널리 스며든 이 새로운 경영 기업들은 직장을 단순한 작업장에서 공식 조직이기는 하지만 정이 우러나오는 일종의 개인적인 세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해오고 있다.’

 

 

이렇게 현대 직장은 동료들끼리 규칙적인 협조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장려한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직장이 공동체 형성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에서 돈독한 우정을 쌓고,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공동체 감정을 느끼며, 일에 대해서는 상부상조와 호혜성 규범을 누린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직원 10명 중 9명이 ‘나는 매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 ‘정말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느낀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여러 연구는 모든 근로자의 약 절반이 직장에서 최소한 하나의 아주 가까운 개인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했다. 근로자의 하루 대화 3분의 2 이상이 직장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친밀한 개인적 연계를 맺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보다 넓은 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직장에 기반을 둔 연계에는 추가적 혜택이 있다. 직장은 어느 사회 환경보다도 인종적으로, 심지어 정치적으로도 훨씬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현재 미국에서 공동체 중심지가 지역에서 직장으로 옮겨갔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추가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직장에서의 유대는 격식을 차리지 않고 즐겁기는 하지만 그렇게 친밀하지는 않고 서로를 따뜻하게 깊이 격려하지 않는다. 가장 세심한 연구를 보면, 사람들에게 제일 친한 친구 10명 이름을 적어보라고 요청할 경우 모든 정규직 근로자 중 동료 직원 이름을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다. 평균적으로 이웃들이 동료 직원보다 명단에 더 많이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중요한 일’이 닥치면 누구와 상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모든 정규직 근로자 중 동료 직원을 단 한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집 밖에서 일하는 우리 대부분은 직장 동료 중에서 친구를 두고 있지만, 친밀한 개인적 유대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맺고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지난 20년 동안 직장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중요한 경향은 직장 내 사회적 유대를 상당히 훼손시키고 있다. 평생 고용을 보장하던 묵시적 고용 계약은 ‘적정 규모 유지’ ‘조직 개편’ 등을 비롯한 경제적 구조조정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경기가 한창 좋았던 90년대에도 구조조정은 경영의 일반적 지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제로 한 연구를 보면 90년대 한창 호황 국면에서조차 모든 기업의 거의 절반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각 회사 노동 인력의 평균 10퍼센트에 해당하는 큰 규모의 해고였다.

 

 

치열해진 세계시장의 경쟁, 정보기술의 향상, 단기적 투자 회수에 대한 집중, 새로운 경영 기법이 하나로 합쳐져 모든 일자리를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특히 화이트칼라 근로자의 고용 관행의 변화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승진을 예측할 수 있고 안정된 월급을 받던 튼튼한 평생 직업의 옛날 고용 체계는 끝났다.’ 이러한 변화는 근로자 불안감을 높이게 했지만, 직원들에게 주어진 보다 높은 자율성, 완화된 위계질서, 연공서열과 충성심보다는 업적과 성취에 따른 보수 체계는 많은 기업과 그 직원들에게는 좋은 현상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직장에서의 신뢰와 사회적 연계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 대차대조표는 적자다.

 

 

구조조정을 겪고 있던 기업에서 사회적 계약이 변함으로써 나타난 가장 흔한 반응은 ‘고개 숙이고 딴 데 쳐다보지 않기’였다. 용케 살아남은 근로자조차 소위 ‘생존자 충격’을 경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율성과 보다 더 큰 기회를 즐겁게 누리는 직원도 있었지만, 잘 나가는 기업에서조차 대부분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동료끼리 서로 의지하기보다는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더욱 고립되고 있으며, 누가 상관하지 말고 혼자 놔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월급도 오르고 고용 안정도 보장되는 현실이 만들어낸 한 가지 결과는, 단순한 암시일지라도, 동료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다. 여러분이 생계를 놓고 팀 동료와 은밀히 경쟁하고 있을 때 팀워크가 그렇게 우호적으로 느껴질 리는 없다. 또한 컨설턴트 같은 ‘독립 계약자’, 임시 교사 같은 ‘호출 노동자(on-call workers)’, 시간제 근무, 임시 직원 등등의 비정규직이 미국 노동력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을 뿐 아니라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국 노동자의 거의 30퍼센트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이 모든 구조적 변화, 즉 더 짧아진 고용 기간, 임시직과 시간제 근무뿐 아니라 독립 계약직의 증가 현상은 직장에 기반 둔 사회 유대를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독립 계약자의 4분의 3은 늘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직장 동료가 전혀 없다. 고용 불안정과 더불어 직장에서 우정 또한 줄어든다. 자발적으로 일자리를 바꾸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고용 관계의 패턴 변화로 인해 생긴 이러한 결과 중 놀랄 사실은 전혀 없다. 나그네는 대개 둥지를 틀지 않는 법이다.

 

 

늘어난 근무 시간, 팀워크 강조는 직장에서 일상적인 공동체가 양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인력 감축과 개별 기업에 대한 유대감 쇠퇴, 임시직 증가 등의 특징은 정반대 경향을 가리키고 있다. 1995년 연구 조사에서 ‘당신은 직장 업무를 수행할 때, 혹은 직장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을 할 때, 이 중 언제 더 즐겁습니까?’라는 질문에 겨우 16퍼센트만이 즐겁다고 말했다. 다른 조사에서 자기 업무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미국인 비율은 36퍼센트였다. 최근 조사들은 직원 4명당 1명이 업무에 만성적 분노를 갖고 있음을 시사해주며, 많은 연구자들은 직장에서 공격성과 무례한 행동이 증가일로에 있다고 믿는다. 물질적 불안정과는 별도로 미국 근로자들은 직장에서 만족도가 전혀 높지 않으며, 덜 만족하는 쪽으로 점차 더 기울고 있다.

 

 

더구나 직장에 있을 때 우리 시간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용주의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것이지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받지 않는다. 그리고 고용주는 이 둘 사이에 선을 그을 권리를 갖고 있다. 법원 결정은 고용주에게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을 감시하고 통제할 광범위한 재량권을 주었다. 각 고용주는 직원 발언 내용뿐 아니라 정치적 견해나 활동을 빌미로 해고시킬 수 있다. 개인적 유대 형성에 핵심 요소인 언론과 사생활 자유가 직장 내에서 불안정하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미국 성인 3명 중 고용되지 못한 1명에게 직장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직장은 우리의 쇠약해진 공동체 사회의 구세주가 아니다.”<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2016)

 

 

 

 

 

 

 

 

 

 

 

 

 

 

 

 

 

 

‘임종 때 사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할 사람은 거의 없다’라는 서양 격언처럼,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며, 우리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 손에 맡기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 온다. 고용주들은 자기계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근로자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할 동기 부여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이것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고용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경영자들 또한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고, 양측 모두 이상적인 일터를 찾아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심지어 회사들의 직장 보육시설 혜택, 직장 건강보험 같은 복지 혜택조차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제도는 선의에 의한 것이지만, 직장인들은 일과 고용에 대한 미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고용인들이 보육시설이 필요하다면 ‘직장’이 아닌 ‘공동체’ 속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고용이 불안정한 환경에서 일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것은 회사 외 다른 사회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직장 보육시설은 아마도 부모에게는 훌륭한 혜택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직장을 잃게 되면 자녀의 삶 또한 붕괴한다. 이렇듯 직업 안정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세계에 사는 이상, 우리는 이제 우리 복지와 사회적 삶의 중요한 부분을 회사에 맡겨서는 안 된다.

 

 

기업들은 고용인들을 하나의 행복한 대가족으로 변화시키는 문화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사업상의 저녁 식사, 회사의 맥주 파티, 운동회, 산악회, 친목행사 등의 명목으로 고용인들의 직장 외 여가를 빼앗음으로써 노동자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고용인들이 자신의 더 많은 부분을 필요 이상으로 일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했다.

 

 

우리 삶의 다른 측면, 즉 회사 각종 동호회 등으로 직장에 예속될 때, 일과 삶 ‘모두’에 대한 통찰력을 잃는다. 반대로 일 외 삶의 다른 측면이 직장 외에서 구현된다면, 우리가 직장을 잃거나, 바꾸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를 지지해줄 다른 친구들과 공동체, 관심사가 지속된다.”<일의 발견>(다우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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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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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성은 실제 기분 상태가 아니라, 세상을 설명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그 이데올로기란 ‘긍정적 사고’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 그 자체를 뜻한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려고만 한다면, 시련에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찾으려고만 한다면,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고 보는 시각이다.


긍정적 사고에 담기 두 번째 의미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낙천적인 감정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실제로 행복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있다. 마국인은 자기들에게는 독특하고 우월한 애국심이라는 게 있다고 여기는 반면 세르비아인이나 러시아인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쓴다. 미국인들에게 민족주의가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현상이다. 미국 민족주의의 핵심 신조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것이다. 특히 보수 기도교 지도자들은 미국인이 신의 선택을 받은 국민이며 미국이 세계 지도자가 될 운명이라고 역설하면서 자만심을 부추긴다.


하지만 미국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미국은 유아 사망률이 높고, 아이들이 가난 속에서 성장하는 비율도 높다. 거의 모든 사람이 시인하다시피 미국 의료 서비스는 ‘파탄’해 있고, 의료 기반 시설은 붕괴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1위를 기록하는 분야는 자부심은커녕 당황스러울 뿐이다. 미국은 수감자가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부와 소득의 불평등 수준도 세계 최고다. 또 총기 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개인 부채에 짓눌려 있다.


긍정적 사고는 미국의 국가적 자부심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일종의 상징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소비 자본주의는 긍정적 사고와 죽이 잘 맞는다. 소비 자본주의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개인 욕구와 성장이라는 기업 지상 과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 문화는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부추기고, 긍정적 사고는 소비자에게 ‘당신은 더 많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정말로 그것을 원하고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면 실제로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한편 경쟁 속에서 상품을 생산하고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성장 이외 다른 대안이 없다. 시장점유율과 이익을 지속적으로 키워 나가지 못하는 기업은 퇴출되거나 덩치가 더 큰 기업의 먹이가 된다. 한 기업이든 경제 전체든 영원한 시장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는 영원한 성장이 숙명인 것처럼 꾸미거나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혜택은 줄고 노동시간은 늘어난 반면 직업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21세기 노동자들에게 긍정적 사고는 유용한 메시지였다. 동시에 고위 경영자들에게는 해방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대차대조표와 따분한 위험 분석을 들여다보며 안달할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낙천적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무엇 때문에 엄청난 부채와 잠재적 파산 위험을 걱정하겠는가?


긍정적 사고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부정하고, 불행에 즐겁게 굴복하고, 닥친 운명에 대해 오직 자기 자신을 비난하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긍정적 사고는 환자의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사, 간호사 등 의료 종사자나 환자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병이 악화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


긍정적인 사고에서는 모든 도전이 내면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칭찬’해 주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 그들은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그런 뉴스를 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까 환경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할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존재한다는 점을 시인하는 셈이다.


칼뱅주의와 긍정적 사고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유사성은 양쪽 모두 자기반성이라는 부단한 내면적 과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칼뱅주의는 느슨함, 죄악, 방종함의 징후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감정을 감시했다. 한편 긍정적 사고에서는 분노나 의심과 관련된 부정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이제 자아는 영원히 맞붙어 싸워야 할 적대자가 되었다. 칼뱅주의는 사악한 성향을 이유로, 긍정적 사고는 부정성을 이유로 자아를 공격한다. 이런 적대감은 손목에 고무 밴드를 감는 방법 등을 써서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는 흔한 충고 속에 분명한 드러나 있다. 그러려면 기묘한 자기소외가 요구된다. 과제 대상인 자아가 있고, 그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또다른 자아가 있다.


긍정적 사고는 기업 고용주 손에 의해 19세기 주창자들이 짐작도 하지 못할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영업사원은 외로운 이들이다. 그들은 대개 본사로부터 단절되어 고속도로와 모텔, 공항을 끝없이 유랑하는 삶을 살아간다. 영업사원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며, 하루하루가 거절이나 패배로 끝나기 십상인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리 외롭고 마음이 상하더라고 자신을 일으켜 세워 다음 고객, 다음 도시, 다음번 거절에 대비해 신선한 열의를 보여야 한다.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낙천성을 생성해 내는 방법이 절박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동기 유발 산업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고치라는 제안하는 것뿐이다. 기업 구조 조정은 환영해야 할 즐겁고 진보적인 변화이고, 실업과 같은 위기는 스스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AT&T는 2년 동안 1만 5000명을 정리 해고할 것이라고 발표한 당일, 직원들을 ‘성공 1994’라는 동기 유발 행사에 보냈다. 그행사의 주연급 연사인 열광적인 기독교인 지그 지글러가 전한 메시지는 이랬다. ‘그건 당신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정리 해고 후 남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대중적인 기법은 역시 ‘팀 빌딩’이다. 워낙 광범위하게 실행되었기에 동기 유발 산업과 상당 부분 겹치는 팀 빌딩 산업이 출현할 정도다. 정리 해고라는 기업의 결정 자체가 팀이라는 개념을 조롱하고 있는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미시적 팀 수준에서 집단 목표 의식과 동료애를 찾으라고 내몰렸다. 계속되는 다운사이징으로 전체 조직이 한 팀으로서의 의미를 잃으면 잃을수록 경영진은 그 허구적인 단위에 헌신하라고 개인을 더 몰아붙였다.


대중 인기를 끄는 긍정적 사고론과 마찬가지로, 긍정심리학 또한 개인이 자신 관점을 조정해 내부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변화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인간 행복을 결정하는 데 환경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글에서 드러내 놓고 사회 변혁에 반대한다. ‘좋은 소식은 때로는 환경이 행복을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이런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대개 실행 볼가능하며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부분 ‘실행 불가능하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주장은 노예제 폐지에서 성차별 금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는 논리로 사용되어 온 말이다. 긍정심리학은 환경이 개인 행복을 결정하는 데 미약한 역할만 할 뿐이라는 점을 주장 또는 ‘발견’하여 현상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긍정적 사고론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이 없다. 누구라도, 정말로 누구라도, 단지 자신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 언제든 부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이 생각과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독일인, 캐나다인, 핀란드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덴마크인에 비해 계층 상향 이동 가능성이 더 낮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라는, 기분을 풀어주는 상쾌한 약을 복용하는 데 힘입어 신화는 강화되고 있다. 기회와 상향 이동 가능성에 관한 강한 믿음은 미국인들이 불평등을 잘 감내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조사 대상 미국인 대다수는 장래에 자신이 평균 소득 이상을 벌 것이라고 믿고있다(이는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가 정말로 개선되어 왔는가?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유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겠지만, 우리가 처한 전반적인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요즘 대학에서도 행복과 긍정적 사고에 관한 강좌가 유행이지만,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다. 비판적 사고란 본질적으로 회의를 품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또 가장 성공할 학생은 잠깐 교수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학생이다. 이는 학계가 반대 의견을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의 권위자들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로 그 ‘지나친 합리성’을 추구하고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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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20-01-12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 비판서적들과 함께 이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의 긍정에 대한 지적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며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인데, 자기계발서들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북다이제스트’님께서 지적하신 바에 동감합니다. “긍정적 사고론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이 없다.”

북다이제스터 2020-01-13 07:46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자기계발서 비판서 중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데, 저는 이제야 읽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문제점들을 잘 정리해 놓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분이 쓴 다른 책 <노동의 배신>을 읽어 본 적 있는데, 발로 뛰며(발품을 팔아) 현장 밀착된 현실적인 책을 잘 쓰는 작가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