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성향의 낸시 레이건은 마약 문제에 단호하게 ‘노’라고 자신 뜻을 밝히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그녀 아이디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약 문제 원인은 절망적인 사회 상황이거나 동료의 적극적인 권유, 중독 등의 문제이기에 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의 가치 시스템에서 마약은 단호하게 ‘노’라고 거부할 수 있는 개인의 자제력과 관련된 문제다. 이는 개인의 가치 문제지, 사회 변화나 마약치료센터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자제력 훈련이 결여된 사람, 즉 ‘노’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그래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보수는 믿는다.

 

 

보수의 자제력 부족 판단은 사람의 기질 문제로 확대된다. 만약 한 개인을 가리켜 ‘그 사람은 가슴속까지 썩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 사람의 비도덕적 행동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기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안다면, 그 사람의 변하지 않는 기질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도 안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삼진아웃’ 제도가 그렇다. 어떤 사람이 같은 법률을 반복 위반하는 일은 변할 수 없는 기질적 결함이 있으며, 장래 불법행동으로 이끌 선천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본 기질이 ‘가슴속까지 썩’었기에 변화하거나 갱생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진보는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감정을 이입해야 한다고 믿는다. 완전한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네가 그 사람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황금률 그 이상이다. 이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당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진보의 감정이입 원칙은,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욱 강한 황금률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을 위해 하려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해주어라’는 의미다.

 

 

진보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입은 인간이 선과 악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 가치를 통해 세상을 보고, 진정으로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당신과 다른 도덕 가치를 가진 모든 사람을 적이나 악마를 대하듯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사람 가치에 대한 존중과 열린 마음이다.

 

 

반면 자기중심적 감정이입을 하는 보수는 자신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만 돕는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 공동체 밖에 있다고 간주할 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많은 보수는 재난을 당한 이웃(가치를 공유하는 명확한 공동체 구성원)과 다친 외국인 노동자(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들)를 구별하여 돕거나 돕지 않는다.

 

 

진보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을 고양시키려면 자신이 가능한 행복한 상태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 조건에서 말이다. 타인 감정에 이입하기 위한 헌신이라는 맥락에서 자신을 가능한 행복하게 한다는 점은, 도덕적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입을 촉진하기 때문에 결코 쾌락주의라고 할 수 없다. 진보에게는 자신 행복을 배양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 목적을 갖는 반면, 보수는 행복이 절제와 힘든 노력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여긴다.

 

 

진보는 개인의 비도덕적 행동 원인이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보수 관점에서 이것은 난센스일 뿐이다. 비도덕적 행동은 개인 기질 탓이지, 사회가 원인이 아니라고 보수는 본다. 보수에게는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다. 중요한 점은 당신이 옳은 행동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한지 여부다. 기질 문제인 것이다. 만약 극단적 보수주의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예를 들어,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보수주의 그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고 보수는 생각한다. 대신 그 개인의 광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쁜 사람이야.’ 이 말이 보수에게 유일하고 충분한 대답일 뿐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대답으로 보인다. 사회가 원인이라는 설명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도덕관


1) 자제력 있고 자립적인 사람
2) 보상과 징벌을 지지
3) 같은 가치를 공유한 시민 보호

 

 

진보주의 도덕관


1)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입
2)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보호
3) 자신 행복의 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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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안녕(安寧)의 경험과 관계된다. 도덕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다른 사람의 안녕을 장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거나 안녕을 파괴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방지하는 것과 관련된다. 여기에서 '안녕(well-being)' 이라는 단어 의미를 부분적으로 소개해 보자. 다른 조건이 동등하다면, 당신은 병든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좋은 상태다. 가난함보다는 부유함이, 약함보다는 강함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자유로움이, 버려지는 것보다 보살핌 받음이, 슬픔보다는 행복함이, 결여된 것보다는 온전함이, 지저분함보다는 깨끗함이, 추함보다는 아름다움이, 어둠 속에서보다는 밝음에서 활동하는 편이, 적의에 둘러싸이거나 고립되어 사는 것보다는, 친밀한 사회적 연대감을 안고 공동체 내에서 사는 것이, 당신을 위해 훨씬 좋은 상태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안녕에 대한 경험적 형태들이다.

 

 

 

이처럼 도덕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 간에 가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단어(개념)는 고립되어 독자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단어는 개념시스템에 연관하여 정의되어야만 한다. 만약 보수주의자들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진보주의자가 이해하려 한다면, 먼저 보수주의자들의 개념시스템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익히 들어온 단어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 의미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큰 정부’는 정부 규모가 크다거나 사용하는 예산이 많다는 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의 국방 예산과 교도소 예산 증액을 지적하며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정부' 라고 이의를 제기하면, 보수주의자들은 비웃는다. 이것은 진보주의자들이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여성 낙태를 '반대' 하는 것을 보고, 여성의 선택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진보주의자가 지적하고 항변하는 것도 잘못이다. 여기에서도 진보는 보수주의 사전에 들어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가 같은 사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현상을 그리고 언제나 상대방을 거의 이해자지 못하고 무시하며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설명해준다.

 

 

보수주의자에게 진보주의자 태도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어리석게 보인다. 진보는 복지와 교육을 지지하기에 어린이를 도울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도 낙태를 지지하며 태아를 살해하는 입장을 옹호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진보는 어린이 살해범과 같은 범죄자를 옹호하면서 어린이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는 어떻게 범죄자 권리를 보호하면서 피해자를 위한 감정이입을 주장할 수 있을까? 진보는 AIDS 연구와 치료를 위한 정부 예산을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AIDS를 퍼뜨리는 자유스런 성행위를 허용하여 AIDS 확산을 조장할 수 있을까? 진보는 게이 권리를 보호하는 동성애를 허용한다. 그들은 학교에서 콘돔 공급을 지지하며 10대들의 섹스도 허용한다. 이처럼 진보는 AIDS로 이끄는 행위를 찬동하는 한편으로 AIDS 확산을 중지시키길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는 개발을 제한하고 일자리를 없애는 환경보호조치를 지지하면서, 어떻게 노동자를 지원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진보는 기업가를 위축시키며, 세금을 많이 발생시키는 투자를 규제하는 정부조치를 지지하면서, 어떻게 경제 성장을 지지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보수 입장에서 진보는 비도덕적이고, 비꼬였고, 잘못된 교육을 받았고, 비합리적인 그저 멍청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진보 입장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반면, 보수는 인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가정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들은 자제를 배우고 품성을 쌓아야 한다. 만약 경쟁이 제거된다면, 사람들이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제를 하지 않게 되므로, 이 세상은 경쟁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람들을 위한 모든 것이 풍족하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할 만큼 분배되어, 사람도 더 좋아지리라는 가정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한 세상은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보수는 도덕적 자제(힘)를 약화시키는 그 무엇이든 비도적으로 본다. 만약 복지가 노동에 따르는 동기를 빼앗아 간다면, 복지는 비도덕적이다. 진보주의자가 고등학생에게 콘돔을 나눠주고, 마약 사용자들에게 깨끗한 주사바늘을 나누어주는 것은 10대 임신과 AIDS 확산을 낮출 수 없다고 보수는 생각한다. 보수는 10대 섹스와 불법 마약 사용은 자제의 결여임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콘돔과 깨끗한 바늘 제공은 비도덕적이다. 도덕적으로 강한 사람이라면, 섹스와 마약에 대해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도덕적으로 약한 사람이다. 도덕적으로 약함은 비도덕의 한 형태고, 비도덕적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보수의 도덕적 힘(자제)은 사회계층을 반영하는 그 어떤 설명도 배제한다. 만약 도덕적인 사람이 항상 마약과 섹스에 단호하게 ‘노’라고 외치고, 이 기회의 땅에서 그들 자신을 부양한다면, 실패하는 것은 도덕적 약함이므로 비도적적인 것이다. 따라서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수는 생각한다. 만약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나태하고, 도덕적으로도 나약한 사람이다. 만약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연 질서에서 낮은 위치에 처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도덕질서에서도 낮은 위치에 처한 사람이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가 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지 연구하는 분야가 인지과학이다. 인지과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하는 대상 중 하나는 상식이다. 일반적으로 상식은 무의식적인 개념적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상식을 구성하는 요소다. 여기서 무의식이란 프로이트 학파에서 말하는 억압된 무의식이 아니라, 단순히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다. 우리 무의식 시스템은 개념적 비유와 연관되어 있다. 개념적 비유는 한 가지 경험 영역을 다른 것에 비추어 개념화하는 전통 방식이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도덕을 재정적 거래와 회계에 비추어 개념화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호의에 보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서 도덕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도덕에 관해 바로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보복 · 배상 · 복수, 그리고 정의 같은 개념은 전형적으로 재정적인 용어 내에서 이해된다.

 

 

사람들은 단어를 ‘단순한 단어'로 - 객관적인 실체에 붙여진 라벨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를 이용하는 방식은 우리 생각이 무엇인지 반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준다. 언어와 관련된 문제들과 아이디어(가끔 비유적 아이디어)는 언어 문제에 의해 표현된다. 그렇기에 도덕적 배경 안에서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데는 중립적 개념이란 없고 중립적 언어도 없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몇 가지 착각을 한다.

 

 

첫째, 뉴스 보도는 개념들이 글자 그대로 뜻을 가지며, 초당파적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개념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전형적으로, 특히 도덕과 정치 영역에서는 당파적이다. 둘째, 언론의 언어 사용은 중립적이고, 임의적이고, 글자 그대로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도덕과 정치에서 그것이 진실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언어는 개념시스템에 관련된다. 셋째, 뉴스 보도는 논쟁 지향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정치적 논쟁을 도덕적 기반에서 분리해낼 수 있다는 태도다. 하지만 정치적 논쟁을 도덕적 기반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혹시 가능할지라도 매우 드문 일이다. 넷째, 언어는 중립적이라 가정하기에, 중립적인 용어로 보도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얘기를 보도하기 위한 담론의 형태와 언어 선택은 편견으로 이어진다.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중립을 지킬 수 있다 할지라도,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섯째, 언어는 중립적인 것으로 가정되기에, 단순한 언어 사용이 토론자에게 불리함을 안겨줄 수는 없다는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도 잘못된 얘기이다.

 

 

예컨대, ‘일(work)’을 보수와 진보 입장에서 각각 보자. 보수 입장에서 봉급은 일에 대한 보상이다. 이에 따라 일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로 확장한다. ‘고용주는 정당한 권한을 갖는다. 고용인은 그 권한의 지배를 받는다. 고용주는 고용인에게 명령할 권한과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징벌 권한을 가진다. 순종은 고용의 조건이다. 고용인이 고용주에게 순종하는 것은 도덕적이다.’ 반면 일을 교환의 객체로 간주하는 진보 입장은 보수와 다르다. ‘일은 교환 가치의 객체다. 노동자는 일의 소유자다. 일의 본질과 가치는 계약에 의해 상호간 동의된다. 봉급은 교환에 관한 동의 문제이지 보상이 아니다. 적절한 보상 규정에 따라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보수와 진보 차이는 일에 대한 개념이 중립적이지 않고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도덕은 허용된 범위 내에서 허용된 길을 따라가는 행위다. 비도덕적 행동은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 규정된 길이나 경계를 벗어난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인가된 길에서 벗어나거나 인가된 영역을 벗어나는 행동은 단순한 비도덕적 행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 행동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일탈은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을 지배하는 목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사회기준에서 그러한 일탈은 보통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며, 보편적이고 성스러운 가치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일탈’한 사람들은 엄청난 분노를 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도덕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협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추방되고 고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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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16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의미가 이렇게나 다르니, 이들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도 당연하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9-16 19:14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지난 번 쓰신 드워킨은 진보주의 사상 틀을 갖고 주장하기에, 다른 사고방식(보수주의) 개념과 이념적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설득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이성적, 이론적 설득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2019-09-16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8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덕의 정치
조지 레이코프 지음, 손대오 옮김 / 백성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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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과연 도덕적일 수 있을까? 한 달 넘게 난장판이된 조국 사태를 보며 느낀 감정이다. 검증 대상인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자연인 한 개인의 사생활을 정치권은 무차별 폭로하고 그걸 검증없이 퍼나르는 언론을 보면서, 정치에는 역시 도덕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 <도덕의 정치>를 만났는데, 저자는 내 마음을 읽고 콕 짚어 꼬집는다.


“보수-진보 양 진영은 서로를 비도덕적이고 부패하고 우둔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양쪽 다 상대를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이라고 보는 것로 원치 않는다. 그 어느 쪽도 정치 중심에 두 가지 상반되는, 정밀하게 조직되고 근거가 확실하며,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치는 기본적으로 도덕에 관련된 것임을 깨닫는데 실패했기에 정치의 격이 떨어진다. 그런 태도는 모든 정치인들을 비도덕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입장의 배후가 되는 깊은 논리를 보이지 않게 한다.”


이 책 옮긴이도 한마디 거든다. “우리 정치계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가치관, 세계관, 도덕관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채 권력다툼이 정치현실의 전부이고, 우리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이라면, 국민들 또한 언제나 그 수준에서 농락당하고 배반당하는 정치판이 되고 만다. 한국 정치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우리는 각 정당의 도덕관과 세계관을 물어야 하고, 정당은 국민에게 도덕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정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경쟁하면서 설득할 때 우리 정치의 도덕성과 보수·진보 논쟁이 새로운 차원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올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도, 세계관도 없이 권력 창출만을 위해 설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이제 용도 폐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진영 각각이 어떠한 ‘믿음’에 기반하는지를 인지과학 관점에서 쓴 글이다. “다른 많은 진보주의자들처럼 나도 한때는 보수주의자들을 천박하고, 감정이 메마르거나 이기적이며, 부유한 사람들의 도구이거나 혹은 철저한 파시스트들일 뿐이라고 얕잡아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자로 간주하며, 그들이 깊이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보수주의에 왜 그토록 열렬하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잘 이해하게 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보수주의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나를 이전보다 더 진보적이 되도록 해주었다.


진보주의의 최고 도덕 가치는 감정이입인 반면, 보수주의는 도덕적 자제가 높은 우선권을 가진다. 그 바로 위에는 도덕적 권위, 도덕적 질서, 그리고 보복(징벌)이 위치한다. 보수주의 도덕에서 감정이입은 낮은 우선권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권위, 도덕적 자제 그리고 보복에게 윗자리를 양보해야 된다. 이것은 일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복지수혜자, 기술 훈련 없이 직업을 구하려는 사람, 섹스를 자제하지 못한 미혼모, 등과 같이 도덕적 힘(자제)이 없는 사람들과 충분히 감정이입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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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리에 사람이 바뀌었다고 크게 기대 말라.


"사회적 삶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려면 반드시 ‘지위’ 그 자체와 ‘지위를 가진 사람’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을 혼돈하면 오직 개인 층위에서만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누군가 특정 지위에 임명되기 전에 가졌던 견해는 새로운 자리에 오른 이후에 대해 별로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위가 사람에게 강력한 한계를 부여하기 때문인데, 지위를 얻게 될 때까지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지위에 오른 사람은 과거 선례를 중시하고, 선례를 뒤엎는 시도를 극도로 자제한다. 자리 위치를 보면 얼마든지 자신 뜻대로 할 수 있음에도 실제로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이유는 지위에서 오는 책임감이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려면 개인 성향이나 의도보다는 지위를 알아보는 쪽이 더 정확하다. 정치인이 공약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유권자들은 시스템 자체를 바꾸기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시스템 속으로 편입시키는 쪽이 더 쉽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2. 가난과 범죄는 불평등에서 나온다.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할 때 범죄율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범죄율은 자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가져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갖지 못할 때 높아진다. 공동체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삶의 기준을 갖고 있을 경우 공동체 구성원은 통상적인 기준과 일치하는 가치를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공동체 내부에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있다면 절도를 비롯한 재산 범죄가 늘어난다. 부를 추구하는 가치는 공유되는 반면 부를 얻을 기회는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도시에서 강도와 절도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다. 도시의 절대적 빈곤 수준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난하지만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보다 전체적으로 형편이 낫지만 특정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보다 부유한 공동체에서 더 많은 범죄가 일어난다. 가치 분배와 기회 분배는 시스템에 속한 개인 특징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 특징이다.

 

 

3. 청소년기와 청소년 일탈은 얼마 안 된 일이다.


근대 초기 생산 기능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이동하자 아이들의 역할도 가정 안팎에서 모두 변화했다. 아이들을 공장에 보내 일을 시키면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성인과 경쟁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끔직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아이들을 착취하기 쉽다는 우려에 따라 아동노동은 법으로 금지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이 성인 노동 세계에서 떠나자 유년기와 성년기 사이에 ‘청소년기’라는 단계가 생겨났다. 이와 함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문화적 시선도 크게 변했다. 아이들이 가정 내에서 경제적 가치를 잃자 부모에게는 아이들의 ‘정서적’ 가치가 커졌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이이들의 의존적이고 감정적인 애착은 가족 삶 속에서 아이들이 가졌던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산업자본주의가 세계를 변화시키기 전에 모든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가족의 생산적인 구성원이었다. 그 위치를 잃은 아이들은 자신 쓸모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자신이 잃은 자리를 대체할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주변 성인문화와 단절된, 성인문화와 마찰을 빚곤 하는 또래 문화가 확장되었다. 주류 문화의 가치를 거부하는 청소년기는 점차 일탈과 폭력적인 행동의 근원이 되었다. 청소년기 남자아이는 가장 많은 범죄를 저지르는 연령집단이 되었다.

 

 

4. 톨스토이類 인간성 햠양만으로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단순히 인종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인종차별주의를 종식시킬 수 없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백인 특권 시스템을 형성하는 복잡한 구조적 합의와 얽혀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백인들이 이러한 ‘합의’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약 흑인이 하층계급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중산계급에 속하는 백인들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며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값싼 노동력 역할을 맡지 않을 것이다. 백인 혹은 자본주의적 기업은 그런 인종적 진보를 환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사람들은 편견이 지지하는 인종 특권과 자본주의 경제 구조보다는 문화적 편견이라는 한 가지 문제에만 쉽게 집중하게 된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문화적인 측면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변화시킨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5.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미국은 매번 상당히 많은 투표권자가 자신의 헌법적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원칙을 기리는 정치 시스템이 실제로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 선거의 원칙은 승자독식이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활동하는 자신 대표자를 가지려면 특정한 선거구에서 과반수의 득표를 얻을 수 있는 후보자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소수자 관점을 누군가 대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진다.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의회 의석 배분은 각각 당이 받은 득표수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만약 어떤 당이 받은 득표수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만약 어떤 당이 총투표수의 5퍼센트만 차지했다면 5퍼센트의 의석을 얻는다. 하지만 미국은 49.99퍼센트의 표를 받은 당이 단 한 개의 의석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특정 선거구에서 과반수 표를 얻은 후보자나 당을 지지하지 않는 한 한 사람의 표가 변화를 일으키기 매우 어렵다. 반면 유럽 유권자들은 투표하러 갈 때 자신이 던진 한 표가 더해져 실제로 국가 정치 정당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 정치 시스템이 두 개의 주요 정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전체적으로 자본주의와 부, 사유재산, 국가 이익을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군사력 가용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두 당은 복지에 의지해 살아가는 빈곤층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이들은 이민자, 하층계급, 10대 미혼모와 유색인종을 사회문제 희생양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비롯한 특권과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행동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같다. 이 같은 관점에서는 어떤 당이 집권당인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투표 참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투표 결과가 어떻든 투표자 입장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투표 인구의 과반수에 의해 통제되는데, 이들은 지금 그대로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선거는 민주주의라는 설득력 있는 ‘위장’ 속에서 작동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로 투표소에 가서 투표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선거의 결과는 공공의 필요나 현실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실제 투표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자신 삶에 만족하는 이들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정부다. 상황이 이렇기에 시민들이 단지 ‘관심이 없어서’ 투표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공허하다.

 

 

6. 우리는 원래 어떤 사람들인가?


공연을 보는 관객도 결코 관객 입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관객도 연기할 역할이 있다. 극장 연기자가 대사를 잊거나 실수로 공연을 망치고 있을 때 객석에 자리한 사람들이 종종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 실패한 공연을 목격하는 사람’이라는 역할은 어렵다. 단지 거기 앉아 그걸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연기자 고통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연기자 실패의 일부가 된다. 만약 관객인 우리가 현장에 없었다면 실패는 일어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기자를 실패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한다. 배우가 대사를 잊거나, 발을 헛디디거나,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거나, 뻣뻣하게 대사를 전달할 때 주위를 환기시키지 않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무대 위’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공연이 계속되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연극’의 진실성뿐 아니라 연기자들과 우리 자신 역시 보호한다. 연기자와 관객으로서 우리는 관리해야 할 자신의 인상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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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01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대적 불평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의 다른 사람이 가진 부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도 원인이 되겠지만, 더 큰 문제는 ‘평균‘이라는 함정에 의해 세워진 기준으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9-01 11:36   좋아요 1 | URL
평균의 함정은 대부분 평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도덕


"에밀 뒤르켐은 ‘우리라는 집단의식이 사람 행동을 통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도덕은 구성원의 집단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 도덕이란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규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시스템에 속한 사람들의 본질을 공유하는 의식이다. 도덕성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도덕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집단이나 사회로 묶어주는 애착감이다. 이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길을 잃은 기분을 느끼고 시스템은 산산조각 날 것이다.

 

 

누군가 규칙을 어기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행위다. 규칙을 어기는 것은 ‘우리라는 경계’ 의식을 위반하는 행위며, 전체 시스템과 관계 속에서 자신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틀린’ 옷을 입고 회사에 간다면 그가 정말로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지, 회사의 ‘본질’에 헌신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을 것이다. ‘복장에 대한 규칙이 도덕성과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량한 사람에 대한 통념에 비추어 보면 그에 대한 답은 대부분 ‘별 상관 없다’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도덕성이란 어떤 집단이나 사회의 본질을 결정하고 구성원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정의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복장과 도덕성 간의 상관 질문의 답은 조금 더 복잡해 진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행동하는 방법이든, 회사에서 입는 복장이든 모든 규범은 소속감의 의미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의무를 부여하면서 시스템과 우리 자신에 대해 설명해 준다. 특히 도덕성을 소속감과 관련된 요소로 보면 아웃사이더처럼 보이는 이들이 도덕 강령을 위반한 일탈자 취급을 받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낙인(stigma)이다. 낙인은 아웃사이더의 특정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정체성 문제로 일탈자가 될 때 발생한다.

 

 

(무)감정


감정, 믿음, 가치의 혼합은 문화의 핵심 요소다. 자부심, 수치심, 죄책감, 사랑, 혐오감, 충성심, 존경심, 공경심, 오만함, 겸손함, 연민, 애국심, 동정심, 공감, 배려, 고마움, 거만함은 모두 그 대상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존재한다. 그리고 거리 두기나 무감정한 태도처럼 감정이 결여된 상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감정한’ 상태란 불가능한데, ‘무감각한’ 상태 또한 깊이 감동한 상태나 격분한 상태와 다르지 않는 감정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생기 없는 공허감 비슷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엄연한 감정적 상태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매우 강력한 행동을 가능케 한다. 잔혹함의 바탕을 이루거나 엄청난 잔혹성을 숨기는데 이용될 수도 있고, 전쟁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처럼 쉽게 잔인한 일을 벌이도록 만들 수도 있다. 전신이 느끼는 혐오와 공포 같은 감정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이런 일을 수행하기 어렵겠지만 공허한 느낌이나 ‘난 그냥 내 일을 할 뿐이야’라는 식의 감정이 차지하면 일을 쉽게 저지를 수 있다.

 

 

‘무감정한’ 태도는 큰 영향을 지니고 있다. 특히 권력을 지닌 남성에게 기대되는 태도다. 많은 문화권에서 진정한 남성성과 리더십의 기준을 외견상 무감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높은 위치를 갈망하는 이들은 모두 무감정한 태도에 끌린다. 이런 감정적 거리 두기는 판단이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감정은 좋지 않다는 문화적 믿음과 결합시킨다. 남성의 무표정이 솔직하고 감정적인 여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가치 평가와도 연관된다. 따라서 문화 속에서 감정적으로 자라난 여성은 남성 지배적인 직업 세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감정한 태도를 지향한다.

 

 

이런 일은 다양한 유형의 사회 불평등과 함께 나타난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성격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감정적이라는 문화적 고정관념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쉽게 사용된다. 흑인이나 여성이 직장에서 차별당하고 분노를 표출하면 그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서 평정심을 잃기 쉽기에 타인 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고정관념을 작동시킨다. 결과적으로 흑인이나 여성은 적절한 태도를 갖추기 어렵기에 높은 위치에 오르는 건 부적합하다는 논의에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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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01 0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성‘을 ‘감정‘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문명화가 되면서 ‘아폴로‘가 ‘디오니소스‘보다 더 숭배받는 현실의 예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9-01 15:25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 디오니소스가 아폴로보다 강하다는 것이 점점 부각되는 것 같아 기쁨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