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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키예프 공국


"키예프 공국 문화는 외국의 다양한 영향으로 발전했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는 비잔티움이지만, 다른 나라들도 키예프 문화에 못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키예프와 이란 서사시의 관련성이라든지, 동슬라브족과 일부 투르크 부족 음계의 관련성 혹은 키예프 장식 발전을 스키타이, 비잔티움, 이슬람 무늬와 연관시켜 논의해본다면, 키예프 문화 유산이 얼마나 복잡한지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키예프 공국은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882년부터 980년까지 지속된 첫 번째 시기에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지역에서 콘스탄티노플로 통하던 일명 ‘바랑기아인들로부터 그리스인들에게로’라는 아주 중요한 교역로에 키예프가 있었다. 키예프는 이러한 위치를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다른 동슬라브인들을 자신 지배하에 두었다. 대략 980년부터 1054년까지 두 번째 시기는 두 명의 비범한 공(公)인 블라디미르 대공과 야로슬라프 현공 통치기에 해당한다. 이때가 키예프의 가장 큰 발전과 번영, 안정, 성공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쇠퇴와 몰락 시기다. 외부로부터 침입과 내전, 도시로서 키예프가 갖는 중요성이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몽골인들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된 1240년까지 시기다.

 

 

키예프 루시인들은 언어적, 민족적으로 세 부류로 나뉘었다. 보통 그냥 러시아인아러고 일컬어지는 대러시아인과 또 다른 민족인 우크라이나인, 마지막으로 벨라루스인 혹은 백러시아인이 바로 이들 세 민족이다. 이 집단들의 특정한 차이는 더 오래 전 기원에 연유하지만, 궁극적인 분화 과정은 키예프 공국 몰락과 해당 지역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남서부와 서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민족이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지배로 영향을 받았던 반면, 대러시아인들 영토는 사실상 그 영향력 바깥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키예프 국의 블라드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정치적 행위였다. 종교로 다양한 민족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비잔티움과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려고 했다. 기독교가 러시아로 전래된 것이 로마가 아니라 비잔티움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동구 교회와 서구 교회 사이 분열은 1054년에서야 발생되었지만, 러시아가 비잔티움에 충성을 바친 것은 러시아의 이후 역사에 많은 것을 결정짓거나, 결정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는 러시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 외부에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고, 반대로 러시아가 가톨릭 교회가 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나머지 유럽 및 라틴 문명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가 서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도록 크게 부추겼고,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 사이의 비극적인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 다른 한편으로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풍부한 대가를 얻기 위해서 당대에 할 수 있었던 최상의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라틴어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역 언어를 강조한 것은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로써 종교가 대중에게 가까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슬라브어 의식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민족문화 발달에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루시인들의 언어 키릴 알파벳 역시 기독교 개종에서 영향 받았다. 슬라브인들에게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가 9세기 후반에 원래는 모라비아인들을 위해 이 글자를 창안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 키릴이 키릴 문자 전신인 글라골 알파벳을 창안했고, 키릴 문자는 그보다 후대에 아마도 불가리아에 있던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발전시킨 것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키예프 국의 민주정 요소는 자유민 집회와 유사한 민회, 즉 ‘베체’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보통 모든 가장(家長)은 시장에서 개최된 배체 모임에 참여해서 전쟁이나 평화, 긴급 법령, 공(公)들 사이 갈등과 같은 중대 사안을 결정할 수 있었다. 흔히 만장일치제를 채택했던 배체 관행은 대표권이나 다수 지배와 같은 원칙이 아닌, 직접 민주주의를 적용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배체는 선사 시대부터 유래되었으므로, 공의 권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었다. 그리하여 배체가 공의 권위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예프 쇠퇴 원인은 국제교역에서 키예프 지위가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드네프르 강변에 있는 키예프 시는 11세기부터 교역망 변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변화는 주로 지중해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동과 다른 한편으로 서유럽과 중부 유럽 사이에 보다 긴밀한 관계 성립된 점, 그리고 비잔티움과 소아시아 사이 관계가 긴밀해져 키예프를 우회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1240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면서, 바그다드 칼리프국이 쇠퇴하면서 키예프는 더욱 불리해졌다.

 

 

남부 러시아 스텝 지대를 몽골이 차지함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수세기 동안 옥토 상당 부분을 빼앗겼고, 인구와 경제 활동, 정치 권력이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비잔티움으로부터, 또 부분적으로 서구에서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고, 상대적 고립 상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몽골인들이 없었더라면 러시아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같은 유럽의 획기적인 발전에 당연히 참여했을 것이다. 몽골인들의 세금 징수는 러시아인들의 빈곤하고 혼란스런 경제가 감당할 준비가 거의 되지 않은 때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었다. 몽골 지배로 발전하고 세련된 키예프 생활방식과 문화 수준이 급속히 하락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몽골 침입과 지배가 러시아 발전을 약 150~200년 지체시켰다고 평가했다.

 

 

5. 킵차크 한국


그렇지만 떨어져 살았던 몽골인들이 러시아인들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은 훨씬 적었다. 몽골인들은 지배하던 신민들에게 공물만 요구했다. 몽골인들이 여전히 이교도였던 초기 때나, 킵차크 한국이 이슬람교도가 되었던 후기 때나, 두 민족 사이에는 종교로 인해 엄청나게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몽골인들은 아주 기꺼이 러시아인들이 자신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사실 그들은 정교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몽골 사회와 러시아 사회는 서로 유사점이 거의 없었다. 몽골인들은 씨족 단계의 유목민으로 남아 있었기에 제도와 법은 훨씬 더 복잡한 농경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몽골인들은 러시아에서 결코 자신 왕조를 수립하지 않았고, 러시아 공들의 상위 주군으로서만 행동했다. 몽골 국가들은 존속되는 동안 대체로 알력과 전쟁으로 계속해서 찢겨져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전횡과 부패, 악정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통치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 국가 존속을 위해서 사실상 피정복 민족들로부터 알파벳에서 자문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차용할 수 밖에 없었다.

 

 

킵차크 한국은 처음에는 몽골 제국의 한 부분이었다가, 나중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자 독립국가가 되었다. 다루가치가 책임을 맡았던 사라이의 한 부서가 러시아 문제를 처리했다. 공물 및 세금 징수와 더불어 지방 및 국제 상업 활동은 킵차크 한국의 핵심 역할이 되었다. 킵차크 한국은 우즈베크 칸(1313~1341)의 재위기에 부유하고 강력한 행정 및 상업국가로서 전성기에 도달했다. 그리고 우즈베크는 자신 국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일에 착수했는데, 이로써 좀 더 큰 이슬람 세계와 유대 관계는 더욱 확대되었다.

 

 

1300년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공은 쿨리코보 평원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에서 몽골인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인들은 비록 간신히 복귀하기는 했지만, 불패 신화가 깨어졌고 통치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몽골의 멍에가 최종적으로 벗겨지기까지는 또 다른 100년이 지나야 했다. 1400년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의 이반 3세는 칸에 대한 자신과 러시아의 충성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몽골인들은 그의 행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나중 러시아는 킵차크 한국을 계승한 국가들을 흡수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1552년 카잔 한국이, 1556년 아스트라 한국이, 마침내 1783년 크림 한국이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5. 모스크바 공국


사실 동유럽 평원에 생겨난 강력한 모스크바 공국은 앞서 존재했던 키예프 공국과는 아주 달라 보였고, 종종 실제로 아주 다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 공국은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키예프 루시와 연결되어 있었다. 적어도 키예프 유산 중 일부를 물려받아 보존했다. 비판자들은 이 이야기가 민족주의 신화 만들기 일종이라고도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인들은 키예프 루시와 자신들 초기 국가 사이의 연속성을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당시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 유산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다고 본다. 역사학자들은 키예프와 분령(分領)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 공국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이 점차 늘고 있다.

 

 

모스크바 공국 발전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먼저 모스크바는 주요 강인 오카 강, 볼가 강, 돈 강, 드네프르 강 4개 상류 근처에 위치했다는 드문 행운을 갖고 있었다. 특히 신생 공국을 둘러싼 산맥이나 다른 자연 장애물이 전혀 없었기에 물길이 난 평원을 가로질러 팽창해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한 가지 덧붙이면, 모스크바는 러시아 내에서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외부 침입으로부터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북서부 외적에 계속 맞서야 했던 곳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노브고로드 공국이었으며, 남동부에서 티무르 침입은 랴잔이 최초 타격을 흡수해야 했다.

 

 

모스크바 공들은 몽골 칸들에게 완전히 복종하며, 실제로 열심히 협력했다. 그들은 몽골인들을 도우면서, 참을성 없고 투지가 넘치는 트베리와 몇몇 다른 러시아 땅이 파괴되도록 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후, 대공으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이에 더해서 몽골인들을 위하여 공물을 거두고, 다른 러시아 공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재정적인 권위,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사법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사실, 몽골 칸들은 공물을 지불할 수 없었던 모든 분령지를 모스크바 공국의 공들에게 넘겨주었다.

 

 

1328년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지위를 차지한 이반 1세는 언제나 킵차크 한국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대공 지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다른 러시아 공들로부터 칸에게 바치는 공물을 거두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는 늘어나는 수입으로 더욱 많은 땅을 사들였다. 그중 파산한 통치자들로부터 분령지 전체를 산 경우도 있고, 개별 마을을 사들인 경우도 있었다. 그는 대공으로서 자신이 보유하던 블라디미르 공국을 모스크바 공국에 합병시키고 수도로 삼았다. 그는 몽골인들에게 러시아인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한 다음에 모스크바 국 땅에 정착시켰다. 대체로 이반 1세는 자신 공국 영토를 몇 배나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바 성공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통치를 담당한 공들에게 있는데, 이런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프랑스를 통일시킨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모스크바 공들은 여러 세대 동안 단절이나 갈등 없이 계속해서 아들 계승자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들의 아들들은 제위를 놓고 다툴 ‘삼촌들’이 없었다는 행운을 누렸다. 삼촌과 조카 사이에 벌어진 고전적인 싸움이 바실리 2세 통치기에 마침내 분출되었을 때, 부자간 직접 승계 방식은 모스크바 공국에서 도전을 물리칠 만큼 이미 충분한 지위와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공들은 ‘러시아 땅을 모으는데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모스크바 국이 영토를 획득하는 주요 방법은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구입, 무력 점령, 킵차트 한국 도움을 받은 상태에서 외교적인 점령, 분령지 공들과의 봉직계약, 볼가 강 넘어인 경우 모스크바 국 사람들의 정착 등의 방법이었다.

 

 

정치적 정통성을 위해 새로운 신화와 상징을 구축했던 것도 모스크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중대한 측면이었다. 모스크바 공들은 비잔티움과의 관계와 콘스탄티노플이 사실상 1453년 투르크인들에게 함락된 이후 신성한 역할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활발하고도 창조적으로 강조했다. 이반 3세가 소피아와 결혼한 일과 비잔티움의 쌍독수리에 용을 죽이는 성 게오르기의 모스크바 국 문장을 결합시킨 새로운 국가 문장을 만든 일, 차르와 전제자라는 칭호를 채택한 일 등은 전부 이런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도인 성 안드레가 러시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주장, 모스크바 국의 공들 기원이 로마 황제들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주장, 비잔티움 황제가 루시 공들에게 통치자 예복을 준 것이라는 주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독트린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반 3세는 모스크바 크렘린을 재건축하기 위해서 이탈이라 건축가를 고용했다. 목적은 크램린을 모스크바의 새로운 탁월함의 표시로써, 러시아인들과 외국인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기 위한 상징이자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1453년 투르크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이어서 발칸 반도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했다. 고대 러시아가 키예프 시기뿐 아니라 분령 시기에도 아주 중요한 종교적이고 문화적 연계를 가진 대상은 바로 비잔티움과 발칸의 슬라브인들이었다. 투르크인들은 이런 연계를 약화시키고, 러시아가 완전한 고립 상태가 되도록 했다. 이것은 또한 모스크바 국이 외국인을 혐오하고 자신만을 존중하는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북동부 러시아에 위치한 모스크바 공국이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서구의 지식을 이용해 주요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던 바로 그때, 모스크바의 고립적 성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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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자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지리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예를 들면, 러시아라는 국가 성장은 확장을 방해하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던 광대한 평원에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러시아의 강과 호수는 아주 잘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러시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기후는 대체로 높은 위도, 육지로 둘러싸였다는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심한 대륙성 기후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북부 그리고 심지어 중부는 미국 알래스카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해 있으며, 남부 러시아는 서반구에서 보면 미국보다는 캐나다가 있는 위치에 더 부합된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기후를 보다 온화하게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멕시코 만류는 러시아의 일부 북부 해안에는 거의 미치지도 않는다. 북극해의 차가운 바람은 산맥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유럽 러시아로부터 흑해로까지 휘몰아친다. 시베리아의 날씨는 남동부 끝의 모서리 지방을 제외하고는 훨씬 더 가혹하다.

 


그러므로 유럽 러시아의 북쪽 지역에 있는 토양은 1년 중 8개월은 얼어 있다. 우크라이나조차도 1년에 3개월은 눈으로 덮여 있으며, 흑해로 들어가는 강물은 이 기간에 줄곧 얼어 있다. 일반적으로 시베리아, 특히 북동부 시베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속한다. 베르호얀스크의 기온은 섭씨 약 영하 67.8도를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러나 대륙성 기후의 성격에 따라서 마침내 여름이 오면 - 여름은 보통 아주 갑자기 온다 - 기온은 급상승한다. 모래를 서쪽으로 아주 멀리 날려버리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많은 지역에서 한동안 혹서는 흔한 일이다.

 


약 800만 제곱마일 이상의 땅 중에서 단지 100만 제곱마일 정도만 농사가 가능하다. 러시아 영토 중 많은 부분은 식물의 짧은 생장기, 너무 적거나 너무 많은 강수량, 빙퇴석층, 얕거나 모래로 된 표층 등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가장 좋은 토지인 남부 스텝 지대의 탁월한 흑토 지대조차도 농업을 위한 조건에서 보면, 그보다 따뜻한 아이오와나 일리노이의 농업 조건이 아니라 캐나다의 대평원과 비교될 수 있다. 러시아는 한편으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삼림자원이 엄청나게 풍부하다. 러시아의 숲에는 목재만이 아니라 사냥감, 산딸기류, 식용작물, 물고기가 풍부하다.

 


2.


러시아 이전 러시아 지역 지배집단은 기본적인 문화적 연속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 이후 몇 세기 동안 수차례에 걸쳐서 교체되었다. 먼저 키메르인들은 대략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700년 사이에 남부 러시아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의 지배 범위는 한때 캅카스 지역 깊숙이까지 확대되어 역사학자들은 키메르인들이 남부 러시아의 상층민이었으며, 대부분의 주토착민들로서 흑해의 북부 해안에서 지속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추정한다.

 

 

키메르인들 다음으로는 스키타이인(Scythian)들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그들은 키메르인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국가를 파괴했다. 이 새로운 침입자들은 비록 몽골적인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중앙 아시아에서 왔으며, 이란어를 말하면서도 인도유럽 어족에 속했다. 그들은 기원전 7세기로부터 기원전 3세기 말까지 남부 러시아를 지배했다.

 


스키타이인들도 중앙 아시아에서 왔으며 이란어를 말하던 또다른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인(Sarmatian)들에게 패배하고, 남부 러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내주었다. 사르마티아인들의 사회조직과 문화는 비록 몇몇 두드러진 차이점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스키타이인들의 것과 유사했다. 사르마티아인들은 몇 개의 부족으로 나뉘었는데, 그중 인구의 숫자와 세력이라는 점에서 알란족(Alans)이 우위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 캅카스 중부에 살고 있는 오세티야인(Ossetian)들은 알란족의 직계 후손들이다. 남부 러시아에 대한 사르마티아인들의 지배는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후 3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흑해의 북부 해안과 러시아의 스텝 지대에서 그리스 및 이란계 문화가 발전한것은 스키타이-사르마티아 시기였다. 이란적인 요소는 우선 스키타이인들과 사르마티아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대변되었다. 그들은 거대하고 지속적인 군사 국가를 세웠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 대한 정치조직의 기본 형태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이란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수 세기 동안 이웃하여 생활하며 일했다.

 

 

 

스키타이인들과 사르마티아인들은 남부 러시아의 그리스인 식민시들을 결코 파괴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인들과 적극적인 교역관계 및 다른 접촉을 맺고 유지하려고 했다. 통혼, 이란인들의 그리스화, 그리스인들의 이란화는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 결과 문화적인, 때로는 정치적인 통합이 상당할 정도로 진행되어서 이 두 요소는 불가분하게 혼합되었다.

 

 

흑해 북쪽의 스텝 지대에 대한 사르마티아인들의 지배는 고트족(Goths)에 의해서 분쇄되었다. 북쪽에서 온 이 게르만족 계통의 침입자들은 원래는 발트 지역에 살다가 남동쪽으로 세력을 뻗쳤다. 그들은 남부 러시아에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나뉘었고, 후자는 결국 헤르만릭의 지배하에서 흑해로부터 발트 해에 이르는 대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200년에서 370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는 러시아의 고트족 시기는 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침입자들, 즉 훈족(Huns) 등장과 함께 갑자기 종식되었다. 게다가 고트족이 훌륭한 군인이자 선원이라는 것은 입증되었지만,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남부 러시아의 문화보다도 상당히 뒤쳐져 있었기에 그들이 그곳의 문화에 기여한것은 거의 없었다.

 

 

370년 무렵에 고트족을 급습했던 훈족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남부 러시아에 이르는 유서 깊은 초원길을 이용하여 대규모로 이동해왔다. 훈족은 유럽 역사에 등장했을 당시 놀라울 정도로 잡다한 집단이었다. 아주 신뢰할 만한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었으며 상당한 수의 몽골족과 우그리아족의 파견대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중부 유럽과 심지어 서유럽을 휩쓸 때, 그들은 자신들이 제압하고 도중에 뽑아두었던 다양한 게르만인과 이란인들을 대동했다.

 


훈족은 남부 러시아에 온 민족들 중 가장 원시적인 민족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추진력과 군사적인 용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정복했고, 소위 유럽의 대민족 이동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451년에 프랑스 깊숙한 곳에 있는 샬롱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이탈리아를 침입했고, 전설에 따르면 교황 레오 1세가 그들의 지도자인 아틸라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로마를 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453년에 아틸라가 갑자기 죽자, 조직력이 빈약하던 훈족 국가는 붕괴되었다. 훈족 국가를 계승한 민족 가운데에는 불가르인(Bulgar) 등 다수 유목 민족이 있다.

 

 

 

다음으로 남부 러시아를 침입한 인적 물결은 또다시 아시아계였으며, 몽골어와 투르크어를 사용하며 비교적 원시적인 민족인 아바르족(Avars)이었다. 558년에 침입한 그들이 세운 국가는 러시아에서 약 1세기, 그리고 도합 250년 이상 동안 존속되었는데, 마지막에는 흔적도 없이 갑자기 해체되었다. 이것은 정착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발달되지 못하며 문화적으로 취약한 유목민 제국들이 흔히 겪는 운명이었다. 아바르족은 전성기 때 러시아 동부로부터 다뉴브 평원에 이리는 전 지역을 지배했는데, 다뉴브 평원에 수도를 건설하고, 러시아에서 통제권을 상실한 이후에는 그곳에 남아 있었다. 아바르족 군대는 비잔티움을 위협했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샤를마뉴의 제국과 큰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7세기에는 새로운 세력이 남부 러시아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볼가 강 하류와 북캅카스 그리고 남동부 러시아의 스텝 지대 전반에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하자르국이었다. 하자르족이 등장한 충격으로 인해서 불가르인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집단은 발칸 반도에 확실히 정착해서 다수인 슬라브족에 동화되었고, 오늘날 불가리아에 그 이름을 남겨주었다. 다른 집단은 북동쪽으로 후퇴해서 결국 볼가 강과 카마 강의 합류 지점에 국가를 건설하고 대(大)불가르 시를 그 수도로 삼았다.

 

 

하자르족 역시 아시아에서 왔으며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또다른 민족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역사적 역할은 훈족이나 아바르족 경우와는 아주 달랐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선 그들은 아라비아인들과 격렬하게 싸웠고, 이슬람교가 유럽으로 확산되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벽 역할을 했다. 하자르족은 반유목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볼가 강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시를 건설했다. 하자르가 번영한 것은 분명히 국가의 자원보다는, 중요한 교역로를 가로지르는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그들의 특이한 역사에 또다른 예외적인 장면이 추가되었다. 하자르인들은 고정 급료를 받는 군대를 처음 창설한 민족 중 하나라고 거론되어왔다. 아라비아 및 비잔티움 세계만이 아니라 몇몇 다른 문명들과 맺었던 긴밀한 연계,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교역관계, 전반적인 세계시민주의 등 하자르인들이 이룩한 발전은 키예프국이 등장할 무렵에 대러시아 평원에서 전개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한 흐름을 잘 대변하고 있다.

 

 

3.

 

루시인 혹은 러시아인이라고 알려진 키예프 공국을 건국한 민족은 스키타이인도, 그리스인도, 하자르인도 아니었다느 점 또한 사실이다. 그들 중에서 압도적인 수의 사람들은 동슬라브족에 속했다. 사실 동슬라브족이라는 용어 자체도 언어학적인 것이다. 종종 러시아어라고만 불리는 대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그리고 백러시아어 혹은 벨라루스어가 바로 그것이다. 슬라브어의 다른 갈래는 폴란드어와 체코어가 포함된 서슬라브어, 그리고 예를 들면 불가리아어, 크로티아어, 세르비아어로 대표되는 남슬라브어가 있다. 슬라브어는 오늘날 유럽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언어와 아시아에서 사용되는 일부 언어를 포함하는 인도유럽 어족에 속한다. 원언어와 언어고향을 주장 근거로 삼을 때, 우리는 인종이 아니라 언어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위에서 열거된 범주는 모두 인종이 아니라 언어학적인 것이며, 어떠한 물리적 특성과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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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01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기원에 있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분열했던 북방유목민족들의 연합체라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근대 이후 성립한 미국과 기원에서 유사한 성격이 있는 듯 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10-01 18:44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저도 러시아 역사를 잘 모르지만, 책 읽다보니 그 당시(기원전 약 10세기)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다민족이 함께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현재 민족주의 영향으로 단일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우리도 다민족 국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럽사 속의 전쟁 현대의 고전 9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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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훨씬 이전부터 유럽 모든 나라에서 군대 능력은 소규모 전문 부대의 전투력이 아니라 인구에 따른 동원 가능한 병력 수와 적절한 전략 철도망 두 가지 결합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른 면이 동일하다고 할 때, 이와 같이 결정적인 유리함을 확보한 국가라면 거의 하룻밤 안에 유럽 정치 지도를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출생률 자체가 군사력의 지표가 되었으며, 징집된 병사들의 체력도 중요했다. 기초 교육 수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군사 사상가들은 20세기 전쟁은 단기간에 종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대중이 총동원되는 전쟁이 달리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 징병 연령에 해당하는 모든 남성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누가 밭을 갈고 공장을 돌릴 것인가?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모든 금융 기구가 붕괴되는 것은 아닐까? 현재 작동하는 세계 무역과 금융 체계의 국제적인 골격이 전쟁으로 해체된다면 어쨌든 모든 금융 기구는 붕괴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1차 세계대전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나야만’ 했으며, 어느 누구도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마련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나지 않았다. 자신 군주에게만 책임을 지는 18세기 정치가들이었다면 1914년 같이 엄청난 비용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론도 도출하지 못한 회전이 끝난 1915년 초 한데 모여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평화 협정을 일구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폭발한 대중 열정과 기대, 분노의 힘은 쉽게 고삐를 틀어잡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유럽 국민들은 기꺼이 무기를 들고 인내하며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전쟁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전략 목표가 적군의 괴멸이 아니라 적국의 경제적 자원을 고갈시키는 ‘소모 전략’이 되었다. 돈이 가장 많은 측이 이길 터였다. 그러므로 군대는 더 이상 국민전의 대리인이나 투사가 아니었다. 군대는 교전국들이 상대국 자원과 병력을 출혈시켜 고갈케 하는 도구였다. 시민들이 이와 같은 종류의 전쟁이 자신들에 가한 부담을 아무런 불평없이 감내했다. 여성은 공장과 농촌에서 남성의 자리를 대신했다. 시민들은 갈수록 더 가혹해지는 필수품의 배급을 감내 했으며, 상점에서 소비재가 사라짐에 따라 허리띠를 졸라맸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 역사 속에서 가장 엄청났던 전쟁, 모두 합쳐 약 13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지 불과 20년 만인 1939년, 자신들 사회에 더 큰 규모의 파괴를 가져다줄, 또한 자신들의 우월한 전 지구적 지위를 완전히 종결시킬 전쟁에 또다시 휩싸이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적군은 인도주의적으로 처우받았다. 상호주의와 국제 감시는 전쟁 포로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확고히 다졌다. 그 결과 최전방 병사들까지도 자신 선조들이 부러워했을 법한 조건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은 충분한 양의 식사를 때 맞춰 했다. 사실 그들 중 많은 수는 자국에서 민간 생활을 할 때보다도 더 보살핌을 받았다. 전후 세계로 복귀한 참전 병사들은 후일 유럽에 형성되었던 끔찍한 공포라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이미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이에게 전후 세계는 실망스러웠으며 지루했다. 전후 자신의 군대 친목 모임을 통해 동지애와 모험, 도전과 승리, 그와 더불어 경제적인 안정과 가정 내 책임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줬던 지난 전쟁이 자신 삶에서 진정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안정과 지위, 삶의 목적을 가져다줬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향수는 1920년대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을 낳은 혼돈스러운 정치 운동의 중요한 요소였다.


20세기 전쟁은 과거 전쟁과 달리 각국 군대만의 싸움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각국 재무성 사이 싸움도 아니었다. 20세기 전쟁은 호전적인 국민들의 의지와 사기의 쟁투였다. 궁극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은 군사적 승리 자체가 아니라 지도자 뒤에 있었던 일반 시민들의 단결과 전쟁 수행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요구되었던 손실과 고통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자 했던 의지, 즉 후방(Home Front)이라고 알려진 국내 정치체의 분열이었다. 전쟁 수행을 위한 노력의 중핵이 군대가 아니라 시민 대중에 있다면, 전쟁 목표는 적 시민 대중에게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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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가 되고서야 유럽에서 전쟁은 ‘자신 나라’를 위해 평시나 전시에 항상 복무하는 전문 직업 군인들이 치렀다. 애국주의가 유럽 국가 사이에 전쟁의 핵심 요소가 된 것이다. 직업 군대가 가능했던 것은 국력과 국가 조직의 발전이었다. 특히 국가가 해당 사회 자원의 통제권을 증대시킴에 따라 전문 직업 군대가 가능했으며, 역으로 전문 직업 군대가 외부 적 방어뿐 아니라, 국가 내부적으로도 강제 수단으로 작용함에 따라 자원에 더 큰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실 17세기 초만 해도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네덜란드만이 해외무역으로 획득한 부를 기반으로 자국 군대를 1년 내내 무장시킬 수 있었다. 당시 모든 용병이 굴욕적인 업무라 치부했던 두 가지 일, 참호를 파고(dig) 반복 훈련(drill)하는 일이 직업 군인에게나 가능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방어 능력을 매우 증대시켰다. 네덜란드가 그렇게 오랜 기간 난공불락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운하가 제공하는 자연 방어막과 더불어 연속 이어진 참호 구축과 유지 덕분이었다. 게다가 반복 훈련은 화력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중요해졌다. 화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대형과 화력을 지속적으로 제어할 절차를 고안하여 훈련시키는 것이 긴요해졌다.

 

 

전투 운영상에서 이 같은 발전은 전장 자체에 대한 상당히 높은 수준의 통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가동의 통제, 화력의 통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self) 통제가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규율(discipline)이 요구되었다. 규율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군대 생활이라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한 부분이 되었기에 17세기 유럽 전쟁에서 얼마나 새로운 현상이었는지 이해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중세 중기병은 서로를 지위가 아니라 평등한 동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네덜란드 병사들에게 규율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높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탈영 비율은 매우 높았다.

 

 

규율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통제, 금욕, 권위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었는데, 이를 스토아 철학에서 재발견했다. 자기 헌신과 복종의 스토아 철악은 개신교의 건전한 생활양식에도 매우 잘 부합했다. 그 같은 철학은 개인주의, 명예에 대한 의식, 허세를 부리고자 하는 열망, 영광의 추구가 스페인인들과 프랑스인들, 이탈리아인들보다 개신교인 네덜란드인들과 더불어 스웨덴인들,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더 적합했다.

 

 

전쟁은 원래 군인을 제외한 사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또 관심을 가지도록 분위기가 조장되지도 않았다. 특히 공동체 부를 증대시키고 전체 인구 극소수만 참여했던 해전에 대한 대중 지지가 다른 어느 곳보다 컸던 영국에서조차 사람들이 거의 전쟁을 인지하지 못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상업과 여행, 문화적 교류와 학문적 소통이 전시에도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 전쟁은 왕들의 전쟁이었다. 시민 역할은 세금을 내는 것이고, 건실한 정치경제는 시민이 자신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돈을 벌게 내버려두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젊은 혈기에 자극받지 않는 한 전쟁이 발발해도 참전할 것을 요구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1792년 프랑스 대혁명에 반대하는 적군들이 침공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부르주아 혁명군은 기왕지사 ‘자연인’이라는 루소적인 개념을 지침으로 삼고 자유인으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고 선동했다. 하지만 1793년에 이르면서 지원병 수가 감소하자 ‘8월 23일 법’은 ‘오늘부터 공화국 영토에서 적들을 완전히 물리칠 때까지 모든 프랑스 남성은 영구적으로 군에 징집돤다’고 공표했다. 이 덕분에 프랑스군은 모든 전장에서 결정적인 수적 우세를 확보했다. 당시 전쟁 장관 라자르 카르노는 ‘더 이상 계략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군사 기교는 필요치 않다. 오로지 화력과 강철, 애국심뿐이다’라고 외쳤다. 무기와 군수품, 제복, 군장비 제조는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무기 생산과 관련된 여타 문제를 연구하도록 징집되었다. 과학이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전쟁을 위해 활용된 것이다.

 

 

적들이 물러간 1794년 이후 프랑스는 엄청나게 커진 군대를 해산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프랑스 내부가 혼란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연명하도록 하는 것 역시 가능치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전쟁은 처음에는 약탈전으로 이후에는 정복전으로 변했다. 집정부는 프랑스 군대가 해외에 주둔하는 한 군대가 어디로 가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796년 청년 보나파르트는 약탈의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 하나를 걸고 굶주리고 기진맥진해진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로써 그 나름의 관성을 지니게 될 정복 전쟁을 개시했다.

 

 

한편 프러시아 육군은 국민으로부터 경멸받고, 채찍에 의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오합지졸이었다. 군대는 스스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자신 나라를 지키는 이들이라 여겨지는 진지하고 똑똑하고 신뢰할 만한 애국자들로 구성되어야만 했다. ‘조국을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게 조국을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조국이 단순히 왕가 가문의 세습 영토를 지칭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좀 더 광범위하고 좀 더 숭고한 개념으로서 독일을 의미하는 것일까?

 

 

후자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사실 호엔촐레른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그들을 수반했던 귀족들은 바로 그와 같은 ‘애국심’을 억누르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한다고 믿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을 이렇게 맞불로 대응하는 것은 결코 매력적인 전망이 아니었으며, 궁정 내뿐 아니라 육군 내에서도 극심하게 반대했다. 클라우제비츠를 포함한 군인 중 일부는 자포자기하며 러시아 육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1813년 나폴레옹 군대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러시아에 궤멸되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독일 전역에 걸쳐 모든 계급을 망라하여 폭발한 애국적 열망은 구질서의 수 많은 장벽을 무너뜨렸다. 징병제가 도입되었으며, 국민 병역에 입각한 군대가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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