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제도만이 한 국민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 마담 드 스탈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훗날 사건들이 보여 주듯 좌파에게는 항상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끔찍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이끌렸다. 사회민주주의는 1960년대 중반이면 서유럽 일부에서 정치가 아닌 생활양식이었다. 이 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곳이 스칸디나비아였다. 1945년에서 1964년 사이 덴마크 사회민주당의 총선 득표율은 33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노르웨이 노동동당은 43퍼센트에서 48퍼센트 사이로 득표했고,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전후 득표율이 45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68년 선거에서는 50퍼센트를 넘기기도 했다.
놀랄 만한 것은 득표율 자체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일관성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 수십 년 간 중단 없이 정권을 장악했다. 인적 구성에도 연속성이 존재했다. 노르웨이의 에이나르 게르하르드센은 모두 14년 동안 사회민주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스웨덴에서 타게 에를란데르는 1946년에서 1969년까지 23년 동안 당과 국가를 지도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는 특정한 이점을 상속받았다. 해외 식민지나 제국주의 야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사회적으로 동질적인 소규모 국가였으며 오랫동안 입헌 국가를 유지했다. 1849년 덴마크 헌법은 의회 정부 권력은 제한하면서도 언론과 종교 자유는 폭넓게 인정했다. 스웨덴의 1809년 헌법(당시에는 노르웨이 헌법이기도 했다)은 비례대표제와 옴부즈맨 제도(이는 훗날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채택되었다)를 포함한 근대적인 정치 제도를 확립했으며, 정당 정치 체제가 발전할 수 있는 안정된 틀을 제공했다. 이 헌법은 1975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가난한 곳이었다. 숲과 농민, 어부, 소수 1차 산업이 존재한 지역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스웨덴에 있었다. 특히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노사 관계는 만성적인 분규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두 나라에서 파업 빈도는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이 지역 실업은 고질적이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스웨덴 노동력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는 성인 노동력의 40퍼센트가 실직했다. 스웨덴에서 위기는 폭력적인 대결을 낳았다. 특히 1931년 오달렌에서는 군대가 제지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을 진압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스칸디나비아가 유럽 변경의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다른 사회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격한 사회주의 교리와 혁명의 대망을 포기했으며, 1930년대를 지나는 동안 자본과 노동 사이에 역사적인 타협이 이루었다. 1938년 스웨덴 고용주와 노동자 대표들이 살트시에바덴에서 서로 협력을 협약했는데 이는 향후 스웨덴의 사회적 관계에 토대를 놓게 된다. 그 협약은 1945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형성된 신코포러티즘적 사회 협력의 전조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로 추정된 유권자들에게 아무런 환상을 품지 않았기에 어떠한 타협에도 열려 있었다. 반면 다른 나라 사회주의 정당들은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의존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오로지 노동 계급의 표에만 의존했더라면, 나아가 중간 계급 개혁가들과 연합한 노동 계급에 의존했더라도, 언제나 소수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들의 정치 전망은 그 지역에서 압도적이었던 농촌 주민들의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유럽 거의 모든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농촌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이 없었다. 농촌에 대한 반감은 ‘백치 같은 농촌 생활’이라는 마르크스 언급부터 ‘쿨라트’에 대한 레닌의 혐오에 이르기까지 유럽 좌파 대부분의 특징이었다.
사회민주당이 농업 협동조합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사적 생산(농민)과 집단적 목적(노동자)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선거에 큰 손해를 입혔다. 스칸디나비아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유별나게 독립적이었는데 사제나 지주에게 굴복하지 않은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주의자였다. 따라서 농민과 노동자 동맹은 장기간 존속하여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농민당과 사회민주당, 나중에는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이루어진 적-녹(Red-Green) 동맹은 다른 곳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모범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 산업 노동자가 손을 맞잡고 도시화 시대로 진입하는 도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는 단지 여러 정치 운동의 하나가 아니라 근대성의 형식 그 자체였다.
1945년 이후 전개된 스칸디나비아의 복지 국가 기원은 1930년대 두 가지 사회 협약, 즉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협약과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협약에 있다. 스칸디나비아 ‘모델’의 특징이 된 사회복지와 기타 공적 부조는 보편성과 평등 – 급격한 누진세로 자금을 모아 전 국민의 사회적 권리와 균등한 소득, 정액 급부금을 보장하는 것 –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기원을 반영했다. 따라서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대륙 유럽의 전형적인 제도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대륙 유럽의 모델은 국가가 가족과 개인에게 소득을 이전하거나 되돌려줌으로써 보조금을 받는 사적 보험과 의료 서비스를 위해 현금을 지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복지 제도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시행되었다. 덴마크에서는 1971년 가서야 전 국민의 의료 보험이 도입되었다. 북해 건너편 영국에서 국민 보건 사업이 시작된 지 꼭 23년만이었다.
스웨덴은 1960년대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축에 들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성을 위해 부와 서비스를 분배하고 균등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스웨덴에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이용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1918년 이후 핵심 신조와 정책을 늘 국가 소유의 장점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에 두었던 영국 노동 운동과 달리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사적 개인에게 자본과 주도권을 맡겨 놓는 데 만족했다. 중앙에서 재원을 할당하는 정부의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였던 영국 자동차와 같은 사례가 스웨덴에서 되풀이된 적은 없었다. 스웨덴은 볼보와 샤브, 기타 사기업이 흥하든 망하든 자유로이 내버려두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스웨덴의 산업 자본은 서유럽 그 어느 곳보다 더 적은 소수의 개인 수중에 집중되었다. 정부는 사사로운 부의 축적이나 상품과 자본 시장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도 15년간 사회민주당 정부가 통치한 후에 국가가 직접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경제 부문은 기독교민주당의 서독보다 사실상 더 작았다. 하지만 덴마크와 핀란드에서 그랬듯이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한 일은 가혹한 누진세를 거두어 사적 이윤을 공익을 위해 재분배한 것이다.
결과는 자명했다. 1970년에 스웨덴은 핀란드와 더불어 주민 1인당 구매력으로 평가할 때 세계 4대 경제에 속했다(나머지 두 나라는 미국과 스위스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세계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3세대 전 고립되고 빈곤한 북유럽 농민들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교육과 복지, 의료, 보험, 퇴직, 여가 등에 대한 서비스와 편의 시설 공급에서 어떤 나라도 (특히 미국과 사실상 스위스도) 이들을 필적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이면 유럽의 ‘얼어붙은 북부’는 거의 신화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다른 곳에서 쉽게 모방할 수 없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칭송되어 널리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1960년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 스칸디나비아 정치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북유럽 사람들의 우울증 성향, 알코올 중독, 높은 자살률을 지나친 경제적 안정과 중앙 지도로 초래된 도덕적 마비에 돌리면서 즐거워했다. 이러한 점이 스칸디나비아 모델에 반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악의 내용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국가에는 실제로 어두운 측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하였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에게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정부들은 인종 위생학의 이론과 실천에 관심이 많았다. 1934년부터 1976년 사이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에서 불임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모두 사회민주당 정부의 후원을 받거나 사회민주당 정부가 숙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덴마크인 약 6000명, 노르웨이인 4만 명, 스웨덴인 6만 명(90퍼센트가 여성이었다)이 ‘위생’상 목적으로, 다시 말해 ‘주민 개량을 위해’ 불임 시술을 받았다. 이러한 계획을 배후에서 추진한 기구인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인종생물학 연구소는 이 주제가 초고로 유행할 때인 1921년에 설립되어 55년이 지난 뒤에야 폐쇄되었다.
이 슬픈 이야기가 사회민주주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비사회주의, 비민주주의 사회와 정부였다면 분명 더 심한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전후 스칸디나비아에서 정부는 어떤 일이 공동 이익으로 간주되면 놀랄 정도로 별다른 감독을 받지 않은 체 자유롭게 실행에 옮겼다. 국가의 정통성 덕이었고, 시민들이 대체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국가에 권위와 주도권을 부여한 덕이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당이 지배한 전후 스칸디나비아에서 누진세나 남편 출산 육아 휴가를 ‘불완전한’ 시민의 재생산 능력에 강제로 개입하는 일과 구분하는 선은 결코 분명하지만은 않았던 듯 하다.
모든 관계자들이 영국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라고 기술하는 데 반대하겠지만 그러한 편협한 거부를 넘어선다면, 그럼에도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는 분명 독특한 점이 있었다. 영국 노동당은 처음부터 사회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노조 가입자들의 관심사인 임금에 추동된 노동 운동이었다. 따라서 영국 노동당은 시야갸 더 좁았으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덜했다. 바로 영국 정치 문화의 변함없는 안정 때문에, 그리고 비록 감소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노동 계급을 기반으로 둔 덕분에, 노동당은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어권 복지 국가를 만들었던 혁신적인 해결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영국적 타협의 특징은 수요를 조작하는 재정 정책과, 급격한 누진세와 거대한 국영 부문의 지원을 받는 고비용의 보편적 사회 급여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불완정한 노사 관계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주류는 노동당의 이러한 조치를 대체로 지지했다. 영국의 정치도 어던 의미에서 과거의 충격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대량 실업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 당을 떠나 널리 인정된 견해였다.
영국의 좌파(그리고 당시 정치권의 중도파와 중도우파의 대부분)를 사로잡았던 것은 공평함이라는 목표였다. 비버리지 개혁과 1945년의 노동당 몰표를 추동한 힘은 삶의 불공평함이었다. 1951년에 보수당을 권좌에 올리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눌러앉게 했던 힘은 보상과 서비스를 공평하게 분배하면서도 경제를 자유화할 수 있다는 그들의 약속이었다. 영국인로서는 누진세를 수용하고 보편적 건강 급여를 환영했지만, 이는 그 조치들이 ‘사회주의적' 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느끼기에 더 공정했기 때문이다.
급부금과 서비스를 정액으로 제공하는 영국식 제도는 유복한 전문직 중간계급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퇴행적이었다. 그렇지만 비록 표면적인 데 불과할지라도 이 또한 어쨌든 평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군말 없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0년대 노동당 정부의 가장 중요한 혁신 - 노동당의 장기적인 공약이었던 학교에서 우열반을 없앤 종합 중등 교육을 도입하고, 선택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폐지한 일은 그 내재적인 장점이 아니라 ‘반엘리트주의적' 이어서 공정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보수당 정부들이 사방에서 교육 개혁이 가져올 악영향을 경고했음에도 변화를 추구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노동당은 노동조합 지지에 의존한 탓에 기타 많은 사람들이 원한 산업 개혁을 지연시킬 수밖에 없었다. 영국 노사 관계는 작업장 내의 적대적인 대결과 직종에 근거한 성과급과 임금 분쟁으로 여전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스칸디나비아나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이 대륙의 사회민주주의가 이룬 업적을 전혀 모방하지 못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 같은 원인에 있었다.
게다가 영국의 복지 제도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제도보다 20~30년 앞서 도입된데다가 물질적 평등의 영역에서조차 영국이 이룩한 성취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실상은 가려졌다. 1967년까지도 영국 주민의 상위 10퍼센트가 모든 사유 재산의 80퍼센트를 소유했다. 전후 30년간 실시된 재분배 정책의 순수한 효과는 상위 10퍼센트로부터 그 밑의 40퍼센트로 소득과 자산을 이전 한 것이다. 안전과 복지에서 전반적으로 개선이 이루어졌음에도 나머지 50퍼센트가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유럽 복지 국가 시대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1957년 서독 사회보장개혁법은 노동자들에게 은퇴 시점의 임금을 기준으로 생계비 지수에 연계된 연금을 보장했기에 예산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스웨덴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소득 평준화도 명백히 개인 저축을 감소시키고 미래의 투자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서유럽의 복지 제도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복지 국가는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보호라는 핵심 정책에서 시작하여 자격 부여, 급부금, 사회 정의, 소득 재분배와 관련된 제도들로 옮겨갔으며, 정치적 비용을 거의 치르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