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노동자들은 물건만 만들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고 한참 더 지나고서야 그들은 상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역사의 기록을 보건대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네 가지 종류의 재화를 소유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것, 스스로 만든 것, 다른 사람들과 교환한 것, 거의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을 현금으로 구매해야만 했던 소수 품목이었다. 산업화로 도회지 주민들의 세계는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전통적인 가계 예산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한 지출은 식량과 의복이었다. 두 가지에 주택 비용을 더하면 가구 소득의 상당 몫이 사라졌다. 대부분 사람들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물건을 구매하거나 ‘소비’하지 않았다. 단지 생명을 보존했을 따름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유럽 주민의 압도적 다수에게 ‘가처분 소득’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었다. 1950년까지도 평균적인 서유럽 가구는 현금 지출의 절반 이상을 생활 필수품에, 즉 식량과 술, 담배에 썼다. 거기에 의복과 주거 비용을 더하면, 필수적인 물품 이외 쓸 돈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서 이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1953년 이후 20년 동안 서독과 베네룩스 국가들에서 실질 임금은 거의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탈리아에서 소득 증가율은 한층 더 높았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이 시기에 보통 시민의 구매력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1965년 영국에서 식량과 의복에 들어간 비용은 전체 소비의 31퍼센트에 불과했고, 1980년 북서 유럽에서 식량과 의복에 들인 돈은 평균적으로 전체 지출의 4분의 1애도 못 미쳤다.

 

 

사람들에게는 여분의 돈이 있었고, 그 돈을 쓰고 있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슈퍼마켓이 등장했다. 슈퍼마켓의 원리는 대부분 구매자인 주부가 원하거나 구매 충동을 느낄 수 있는 제품들이 편리하게 한 자리에 모여 있다면 한 번 장보러 나왔을 때 더 많은 돈을 쓰게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여성들이 식품을 집에 가져갔을 때 보관해 둘 곳이 있음을 가정했고, 결국 냉장고가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1957년 대부분 서유럽 가정은 아직 냉장고를 소유하지 못했다(이탈리아의 냉장고 소유 비율은 2퍼센트였다). 그 이유는 기술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이었다. 주부들이 한 번 나갔을 때 썩기 쉬운 음식을 많이 구매하여 집으로 가져올 여력이 생기기까지는 냉장고를 사는 데 목돈을 쓸 이유가 없었다. 1971년이 되자 이탈리아 가구 94퍼센트가 냉장고를 소유하게 되었다.

 

 

1957년 무렵부터,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젊은이들이 스스로 물건을 구입했다. 그 전까지 청소년은 별개의 소비자 집단이 아니었다. 실제로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가족과 지역 사회에서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 직업 전선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아이들이었고, 직업 전선에 들어서면 젊은 어른이 되었다. 지위가 아니라 연령으로 세대를 규정지은 ‘틴에이저’라는 새로운 중간 범주(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선례가 없었다. 그리고 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대가 별개의 소비자 집단을 대표할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부분 사람에게 가족은 언제나 생산 단위였지 소비 단위가 아니었다. 예전 가족 내 젊은 구성원이 홀로 현금을 벌어들여도 이는 가족 소득의 일부였고 공동 비용의 지출에 쓰였다.

 

 

사춘기의 새로운 소비력은 의상에서 가장 즉각적이고 명료하게 나타났다. 특정 연령의 고유한 의복은 독립성과 반항의 표현으로 중요했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과거에 젊은 성인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입던 옷과 똑 같은 옷을 입는 것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10대 소비 습관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의복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의복에 많은 돈을 썼지만 음악에는 한 층 더 많은, 아니 훨씬 더 많은 돈을 썼다. 60년대 초 자동적으로 생겨난 ‘10대’와 ‘대중음악’ 결합에는 문화적 토대는 물론 상업적 토대도 존재했다. 미국의 경우처럼 유럽에서도 10대가 가정에 기여하지 않아도 가족 생활비가 충분해지자 해방된 사춘기 청년들이 한 일은 축음기와 엘피판을 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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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제도만이 한 국민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 마담 드 스탈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훗날 사건들이 보여 주듯 좌파에게는 항상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끔찍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이끌렸다. 사회민주주의는 1960년대 중반이면 서유럽 일부에서 정치가 아닌 생활양식이었다. 이 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곳이 스칸디나비아였다. 1945년에서 1964년 사이 덴마크 사회민주당의 총선 득표율은 33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노르웨이 노동동당은 43퍼센트에서 48퍼센트 사이로 득표했고,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전후 득표율이 45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68년 선거에서는 50퍼센트를 넘기기도 했다.

 

 

놀랄 만한 것은 득표율 자체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일관성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 수십 년 간 중단 없이 정권을 장악했다. 인적 구성에도 연속성이 존재했다. 노르웨이의 에이나르 게르하르드센은 모두 14년 동안 사회민주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스웨덴에서 타게 에를란데르는 1946년에서 1969년까지 23년 동안 당과 국가를 지도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는 특정한 이점을 상속받았다. 해외 식민지나 제국주의 야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사회적으로 동질적인 소규모 국가였으며 오랫동안 입헌 국가를 유지했다. 1849년 덴마크 헌법은 의회 정부 권력은 제한하면서도 언론과 종교 자유는 폭넓게 인정했다. 스웨덴의 1809년 헌법(당시에는 노르웨이 헌법이기도 했다)은 비례대표제와 옴부즈맨 제도(이는 훗날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채택되었다)를 포함한 근대적인 정치 제도를 확립했으며, 정당 정치 체제가 발전할 수 있는 안정된 틀을 제공했다. 이 헌법은 1975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가난한 곳이었다. 숲과 농민, 어부, 소수 1차 산업이 존재한 지역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스웨덴에 있었다. 특히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노사 관계는 만성적인 분규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두 나라에서 파업 빈도는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이 지역 실업은 고질적이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스웨덴 노동력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는 성인 노동력의 40퍼센트가 실직했다. 스웨덴에서 위기는 폭력적인 대결을 낳았다. 특히 1931년 오달렌에서는 군대가 제지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을 진압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스칸디나비아가 유럽 변경의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다른 사회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격한 사회주의 교리와 혁명의 대망을 포기했으며, 1930년대를 지나는 동안 자본과 노동 사이에 역사적인 타협이 이루었다. 1938년 스웨덴 고용주와 노동자 대표들이 살트시에바덴에서 서로 협력을 협약했는데 이는 향후 스웨덴의 사회적 관계에 토대를 놓게 된다. 그 협약은 1945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형성된 신코포러티즘적 사회 협력의 전조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로 추정된 유권자들에게 아무런 환상을 품지 않았기에 어떠한 타협에도 열려 있었다. 반면 다른 나라 사회주의 정당들은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의존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오로지 노동 계급의 표에만 의존했더라면, 나아가 중간 계급 개혁가들과 연합한 노동 계급에 의존했더라도, 언제나 소수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들의 정치 전망은 그 지역에서 압도적이었던 농촌 주민들의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유럽 거의 모든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농촌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이 없었다. 농촌에 대한 반감은 ‘백치 같은 농촌 생활’이라는 마르크스 언급부터 ‘쿨라트’에 대한 레닌의 혐오에 이르기까지 유럽 좌파 대부분의 특징이었다.

 

 

사회민주당이 농업 협동조합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사적 생산(농민)과 집단적 목적(노동자)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선거에 큰 손해를 입혔다. 스칸디나비아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유별나게 독립적이었는데 사제나 지주에게 굴복하지 않은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주의자였다. 따라서 농민과 노동자 동맹은 장기간 존속하여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농민당과 사회민주당, 나중에는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이루어진 적-녹(Red-Green) 동맹은 다른 곳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모범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 산업 노동자가 손을 맞잡고 도시화 시대로 진입하는 도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는 단지 여러 정치 운동의 하나가 아니라 근대성의 형식 그 자체였다.

 

 

1945년 이후 전개된 스칸디나비아의 복지 국가 기원은 1930년대 두 가지 사회 협약, 즉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협약과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협약에 있다. 스칸디나비아 ‘모델’의 특징이 된 사회복지와 기타 공적 부조는 보편성과 평등 – 급격한 누진세로 자금을 모아 전 국민의 사회적 권리와 균등한 소득, 정액 급부금을 보장하는 것 –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기원을 반영했다. 따라서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대륙 유럽의 전형적인 제도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대륙 유럽의 모델은 국가가 가족과 개인에게 소득을 이전하거나 되돌려줌으로써 보조금을 받는 사적 보험과 의료 서비스를 위해 현금을 지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복지 제도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시행되었다. 덴마크에서는 1971년 가서야 전 국민의 의료 보험이 도입되었다. 북해 건너편 영국에서 국민 보건 사업이 시작된 지 꼭 23년만이었다.

 

 

스웨덴은 1960년대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축에 들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성을 위해 부와 서비스를 분배하고 균등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스웨덴에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이용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1918년 이후 핵심 신조와 정책을 늘 국가 소유의 장점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에 두었던 영국 노동 운동과 달리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사적 개인에게 자본과 주도권을 맡겨 놓는 데 만족했다. 중앙에서 재원을 할당하는 정부의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였던 영국 자동차와 같은 사례가 스웨덴에서 되풀이된 적은 없었다. 스웨덴은 볼보와 샤브, 기타 사기업이 흥하든 망하든 자유로이 내버려두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스웨덴의 산업 자본은 서유럽 그 어느 곳보다 더 적은 소수의 개인 수중에 집중되었다. 정부는 사사로운 부의 축적이나 상품과 자본 시장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도 15년간 사회민주당 정부가 통치한 후에 국가가 직접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경제 부문은 기독교민주당의 서독보다 사실상 더 작았다. 하지만 덴마크와 핀란드에서 그랬듯이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한 일은 가혹한 누진세를 거두어 사적 이윤을 공익을 위해 재분배한 것이다.

 

 

결과는 자명했다. 1970년에 스웨덴은 핀란드와 더불어 주민 1인당 구매력으로 평가할 때 세계 4대 경제에 속했다(나머지 두 나라는 미국과 스위스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세계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3세대 전 고립되고 빈곤한 북유럽 농민들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교육과 복지, 의료, 보험, 퇴직, 여가 등에 대한 서비스와 편의 시설 공급에서 어떤 나라도 (특히 미국과 사실상 스위스도) 이들을 필적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이면 유럽의 ‘얼어붙은 북부’는 거의 신화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다른 곳에서 쉽게 모방할 수 없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칭송되어 널리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1960년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 스칸디나비아 정치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북유럽 사람들의 우울증 성향, 알코올 중독, 높은 자살률을 지나친 경제적 안정과 중앙 지도로 초래된 도덕적 마비에 돌리면서 즐거워했다. 이러한 점이 스칸디나비아 모델에 반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악의 내용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국가에는 실제로 어두운 측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하였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에게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정부들은 인종 위생학의 이론과 실천에 관심이 많았다. 1934년부터 1976년 사이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에서 불임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모두 사회민주당 정부의 후원을 받거나 사회민주당 정부가 숙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덴마크인 약 6000명, 노르웨이인 4만 명, 스웨덴인 6만 명(90퍼센트가 여성이었다)이 ‘위생’상 목적으로, 다시 말해 ‘주민 개량을 위해’ 불임 시술을 받았다. 이러한 계획을 배후에서 추진한 기구인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인종생물학 연구소는 이 주제가 초고로 유행할 때인 1921년에 설립되어 55년이 지난 뒤에야 폐쇄되었다.

 

 

이 슬픈 이야기가 사회민주주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비사회주의, 비민주주의 사회와 정부였다면 분명 더 심한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전후 스칸디나비아에서 정부는 어떤 일이 공동 이익으로 간주되면 놀랄 정도로 별다른 감독을 받지 않은 체 자유롭게 실행에 옮겼다. 국가의 정통성 덕이었고, 시민들이 대체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국가에 권위와 주도권을 부여한 덕이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당이 지배한 전후 스칸디나비아에서 누진세나 남편 출산 육아 휴가를 ‘불완전한’ 시민의 재생산 능력에 강제로 개입하는 일과 구분하는 선은 결코 분명하지만은 않았던 듯 하다.

 

 

모든 관계자들이 영국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라고 기술하는 데 반대하겠지만 그러한 편협한 거부를 넘어선다면, 그럼에도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는 분명 독특한 점이 있었다. 영국 노동당은 처음부터 사회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노조 가입자들의 관심사인 임금에 추동된 노동 운동이었다. 따라서 영국 노동당은 시야갸 더 좁았으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덜했다. 바로 영국 정치 문화의 변함없는 안정 때문에, 그리고 비록 감소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노동 계급을 기반으로 둔 덕분에, 노동당은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어권 복지 국가를 만들었던 혁신적인 해결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영국적 타협의 특징은 수요를 조작하는 재정 정책과, 급격한 누진세와 거대한 국영 부문의 지원을 받는 고비용의 보편적 사회 급여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불완정한 노사 관계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주류는 노동당의 이러한 조치를 대체로 지지했다. 영국의 정치도 어던 의미에서 과거의 충격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대량 실업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 당을 떠나 널리 인정된 견해였다.

 

 

영국의 좌파(그리고 당시 정치권의 중도파와 중도우파의 대부분)를 사로잡았던 것은 공평함이라는 목표였다. 비버리지 개혁과 1945년의 노동당 몰표를 추동한 힘은 삶의 불공평함이었다. 1951년에 보수당을 권좌에 올리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눌러앉게 했던 힘은 보상과 서비스를 공평하게 분배하면서도 경제를 자유화할 수 있다는 그들의 약속이었다. 영국인로서는 누진세를 수용하고 보편적 건강 급여를 환영했지만, 이는 그 조치들이 ‘사회주의적' 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느끼기에 더 공정했기 때문이다.

 

 

급부금과 서비스를 정액으로 제공하는 영국식 제도는 유복한 전문직 중간계급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퇴행적이었다. 그렇지만 비록 표면적인 데 불과할지라도 이 또한 어쨌든 평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군말 없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0년대 노동당 정부의 가장 중요한 혁신 - 노동당의 장기적인 공약이었던 학교에서 우열반을 없앤 종합 중등 교육을 도입하고, 선택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폐지한 일은 그 내재적인 장점이 아니라 ‘반엘리트주의적' 이어서 공정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보수당 정부들이 사방에서 교육 개혁이 가져올 악영향을 경고했음에도 변화를 추구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노동당은 노동조합 지지에 의존한 탓에 기타 많은 사람들이 원한 산업 개혁을 지연시킬 수밖에 없었다. 영국 노사 관계는 작업장 내의 적대적인 대결과 직종에 근거한 성과급과 임금 분쟁으로 여전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스칸디나비아나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이 대륙의 사회민주주의가 이룬 업적을 전혀 모방하지 못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 같은 원인에 있었다.

 

 

게다가 영국의 복지 제도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제도보다 20~30년 앞서 도입된데다가 물질적 평등의 영역에서조차 영국이 이룩한 성취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실상은 가려졌다. 1967년까지도 영국 주민의 상위 10퍼센트가 모든 사유 재산의 80퍼센트를 소유했다. 전후 30년간 실시된 재분배 정책의 순수한 효과는 상위 10퍼센트로부터 그 밑의 40퍼센트로 소득과 자산을 이전 한 것이다. 안전과 복지에서 전반적으로 개선이 이루어졌음에도 나머지 50퍼센트가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유럽 복지 국가 시대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1957년 서독 사회보장개혁법은 노동자들에게 은퇴 시점의 임금을 기준으로 생계비 지수에 연계된 연금을 보장했기에 예산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스웨덴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소득 평준화도 명백히 개인 저축을 감소시키고 미래의 투자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서유럽의 복지 제도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복지 국가는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보호라는 핵심 정책에서 시작하여 자격 부여, 급부금, 사회 정의, 소득 재분배와 관련된 제도들로 옮겨갔으며, 정치적 비용을 거의 치르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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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북다이제스터 > 일의 불편한 민낯

“일”을 다시 생각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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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벨기에인이나 프랑스인, 러시아인에게 묻지 않고는 유럽인이 독일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 국민들에게 선량한 독일인이란 오직 죽어 있는 독일인뿐이다.’ 1945년 미국 군대의 참관인 솔 파도버가 자신 일기에 남긴 글이다. 파도버 관찰은 전후 유럽 분열을 설명할 때 꼭 명심해야 한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전후 스탈린이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를 부여한 논거는 자명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완전한 패배를 원했다.

 

 

2.


유럽에서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분명했다. 소련은 서방에 대한 불신을 거둔 적이 없었다. 불신의 뿌리는 물론 1917년을 지나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후 불신은 더욱 커졌다. 1917년에서 1921년에 이르는 러시아 내전 동안 서방이 군사적으로 개입한 일과 소련과 나치 독일의 파괴적인 싸움을 보고도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어부지리를 얻을 요량으로 전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는 소련의 직관적 인식도 불신을 키우는 데 한몫 했다. 전시에 동맹이 결성되고 독일을 패퇴시킨다는 공동 관심사가 분명했는데도, 서로 간 불신은 놀랄 정도로 심했다. 전시 동안 서방과 동쪽 진영 사이 민감한 정보를 교환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사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전시 동맹 해체와 뒤이은 유럽 분열은 실수가 아니라 노골적인 이기심 혹은 적대감의 소산이었고, 그 뿌리는 역사 속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과 영국을 한편으로 하고 소련을 다른 편으로 하는 양 진영 사이 관계는 언제나 팽팽했다. 문제는 어느 나라도 유럽 대륙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책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나라들은 여러 가지 고려 사항 중에서도 프랑스가 굴욕을 당하고 5년 뒤 독일이 패배함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럽에서 냉전의 반복은 언제나 가능했지만 불가피하지는 않았다. 냉전은 다양한 이해 당사국들의 목적과 욕구가 궁극적으로 양립 불가능했기에 성립되었다.

 

 

3.


전후 영국은 여건만 되었다면 자신도 섬으로 물러나고 서유럽 안전은 전통적인 수호자인 프랑스에 맡겼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38년까지 영국의 전략적 계산의 기본 원리였다. 다시 말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프랑스는 중부 유럽에 대한 독일 야심뿐 아니라 더 동쪽에서 향후 있을 소련 위협에 맞설 대항마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1940년 5월과 6월 위대한 프랑스 군대가 독일군 기갑 부대 급습을 받아 산산이 붕괴되었을 때, 유럽을 휩쓴 지진과도 같은 충격은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컸다.

 

 

깊은 상처를 남긴 6주만에 이제 프랑스는 강대국을 떠나 강국조차 아니었고, 훗날 드골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후로 전혀 강국이 되지 못했다. 1940년 6월의 완패 뒤 굴욕적이고 비굴했던, 품위를 상실한 점령기 4년이 이어졌다. 그 기간 프랑스의 비시 정권은 독일의 역할을 수행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고 난 후 한 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프랑스의 한 정부 관련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프랑스가 다음 세대에 세 번째 공격에 굴복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결국 영원히 굴복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한다.’

 

 

이는 비밀 문서였다. 프랑스는 전후 공개적으로 프랑스가 세계 강국으로서 동료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환상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가 그러한 권리를 지닌 듯 가장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소련은 서방에서 ‘영미’에 대한 불신을 공유할 전술적인 동맹국을 원했고, 영국은 프랑스가 영국을 대신해 유럽 본토에 관한 책임을 덜어주길 원했다. 심지어 미국도 프랑스를 상석에 앉힘으로써 큰 이득은 아니더라도 약간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받았으며, 독일의 미국 점령 지구 일부를 잘라 점령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미국을 신뢰할 수 없고, 특히 두 나라가 함께할 때에는 더욱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드골은 더욱 더 민감하게 느꼈다. 전시에 드골은 런던에 손님으로 갔을 당시 받았던 굴욕적인 대접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신을 하찮게 대한 일을 결코 잊지 못했다. 프랑스도 영국처럼 적어도 문서상 제국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점령기 동안 해외 식민지와 소원해졌다. 소련이 아시아에서 보인 움직임이나 다가오는 중동 위기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국과 달리 간접적으로만 관계된 문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축된 프랑스 시야에 유럽은 예전보다 넓어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로서는 유럽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전간기 프랑스 외교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인 동유럽에 대한 프랑스 영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 정치가들과 국민감정은 1947년 후반에 뚜렷하게 변했다. 소련이 마셜 플랜을 거절하고 코민포름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프랑스 공산당은 연정 상대에서 국내외 모든 프랑스 정치를 자유롭게 비판으로 변모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1947년 후반부와 1948년 내내 내란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동시에 파리에서는 독일의 복수에 대한 걱정과 소련의 침입이 임박했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결합되어 전쟁 불안이 드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마지못해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1947년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이 ‘프랑스를 신뢰해도’ 되는지 물었을 때, 프랑스 외무장관은 프랑스가 내전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 대답했다.

 

 

프랑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제 회복을 원하는 한 미국과 영국이 독일의 부활이나 소련 팽창에 대비하여 일정 수준의 안전 보장을 제공하기 원하는 한 프랑스는 결정에 따라야 했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진 식민지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프랑스는 독일을 파괴할 수 없다면 일종의 유럽 체제에 합류시켜 독일이 군사적으로 해악을 끼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이득을 가져오게 하려고 결정했다. 이러한 착상이 1948년 이전에 프랑스 지도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지막 방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지도자들이 마지막 방법을 받아들이는 데는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사실상 프랑스는 300년의 역사를 갑자기 부정하는 사태를 감수해야 했다.

 

 

4.


당시 볼셰비키 매력은 새롭고 유혹적이었다. 소련은 실제로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독일 침략을 받은 후 첫 6개월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소련군은 병력 400만과 항공기 8000대, 탱크 1만7000대를 잃었다. 하지만 1945년에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을 지닐 정도로 회복되었다. 1946년 내내 헝가리와 루마니아 두 곳에만 병력 약 160만 명이 주둔했다. 스탈린은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직간접으로 통제했다. 몽고메리 휘하 영국군이 빠르게 진격했기에 그나마 스탈린 군대가 북부 독일을 지나 멀리 덴마크 국경까지 전진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스탈린이 명령을 내렸다면 그 무엇으로도 소련군이 대서양으로 진격하는데 막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서방 장군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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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급격한 변화의 장애물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합법적인 망명 정부였다. 망명 정부들은 본국의 전시 저항 조직을 동맹자가 아니라 골칫거리로 간주했다. 망명 정부로서는 이 부주의한 젊은이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민간 생활로 돌아가게 할 필요가 있었고, 부역자와 반역자를 적절히 제거하고 정치권이 굴러가게 해야 했다.

 

 

귀환 정부는 5년 간 떠나 있었던 까닭에 나치 점령기에 이루어진 자국 고초와 사회 분위기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귀환 정부들은 사회 개혁과 정치 개혁에 관한 정책 문제에서 타협할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귀환 정부들은 드골 등이 생각한 ‘질서 있는 이행’을 고집했다. 연합군 점령군 또한 이를 원했기 때문에 레지스탕스의 이상은 곧 산산이 깨져버렸다.

 

 

동유럽에서 전후 정부 형태를 결정하고 그 활동을 지휘한 것은 소련이었다(유고슬라비아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서유럽에서는 임시 정권이 현안인 새로운 선거를 관리했다. 그리고 모든 저항 운동 단체에는 무기를 반납하고 조직을 해산하라는 권고가 전달되었으며 사실상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 돌이켜 보건대 이와 같은 제도적 현상 회복에 대한 저항은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노르웨이와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저항 운동은 전후에 평화적으로 정당과 정치 협회로 전환되었다. 이의는 적었다. 많은 사람들은 저항 운동의 힘과 큰 뜻이 국가 재건을 위한 정치적 계획에 쓰이리라고 기꺼이 믿으려 했다. 전후에 ‘레지스탕스 당’을 세우려던 계획은 어디서나 실패했다.

 

 

2.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 유럽인들은 좌파와 중도좌파 정치가들로 이루어진 동맹 통치를 받았다. 이 점은 이해할 만했다. 이 시기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전쟁 이전 정당들은 반파시스트 신임장을 얻은 정당들뿐이었다. 실제로 그러한 정당들은 공산당과 사회당, 소수의 자유주의자 집단이나 과격파뿐이었다. 기존의 좌파 정당들은 전시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다. 이 점은 특히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다.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전시의 (때때로 과장된) 공적을 정치적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공산당원 재닛 플래너는 1944년 12월 그들을 ‘레지스탕스의 위대한 영웅들’이라고 묘사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은 국가가 맡은 역할과 사람들이 국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는 영국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역사가 마이클 하워드 말을 빌리자면 ‘전쟁과 복지는 동반자였다.’ 몇몇 나라들에서 식량 공급과 의료 서비스 제공이 전쟁 동안 실제 개선되었다. 총력전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려면 그들의 상태에 관해 더 많이 알아내고 그들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특히 1947년 예상치 못한 생계 위기는 공산주의 호소력이 커지고 무정부 상태로 추락할 위험이 늘어만 갔다. 공산주의 매력은 현실적이었다. 각 국가 공산당이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여기에 무적의 러시아군이라는 후광이 더해져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방식의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이 그럴듯하고 매력있게 보였다. 1947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은 90만 7000명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 수는 225만 명으로 폴란드나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수보다 더 많았다. 덴마크나 노르웨이에서도 유권자 여덟 명 중 한 명은 처음에는 공산당이라는 대안에 기대를 걸었다.

 

 

3.


당시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경제) ‘계획’에 동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재앙, 즉 1918년 이후 잃어버린 기회,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에 뒤이은 대공황, 실업,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독재의 유혹을 안겨 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부정, 비효율, 거만한 통치 엘리트와 무능한 정치권의 뻔뻔스러운 무관심, 이 모든 것은 사회를 보다 좋게 계획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처럼 보였다. 민주주의 체계가 작동하고 그 매력을 회복하려면, 민주주의 체계는 ‘계획’되어야만 했다.

 

 

전후 유럽의 정치적 종교였던 ‘계획’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은 때때로 소련의 예로부터 유래했다고 지적되었다. 소련의 계획 경제는 표면상 자본주의 유럽의 상처를 피했고, 나치 공격을 막아 냈으며, 일련의 상세한 5개년 계획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지적은 완전한 오해다. 전후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공산당만이 소련형 계획 경제를 신뢰했고(공산당은 사실 계획 경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공산당조차 그러한 계획 경제를 자신들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수치상 목표와 생산 할당량, 중앙 지도에 관한 소련식 강박 관념은 당대 서유럽의 소수 계획 옹호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게는 생소했다. 그 소수 다양한 옹호자들은 서로 매우 다른 자료에 의존했다.

 

 

‘계획’의 유행은 1945년보다 훨씬 이전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공황을 겪는 동안 헝가리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종류의 계획 경제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또한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 중에서 제시된 몇 가지 견해는 옛 사회주의 전통에서 유래했으나, 1914년 이전 자유주의적 개혁에 기원을 둔 것이 더 많았다. 방위와 치안에만 전념한 19세기 ‘문지기’ 국가는 구식이 되어 버렸고, 그 논거도 사라졌다. 이제 정치적 동란을 예방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차원에서, 경제 문제에 개입하여 불균형을 시정하고 비효율을 제거하며 시장 불평등과 부정에 대해 보상하는 일이 필요했다.

 

 

1914년 이전 그러한 개혁주의적 사업의 주된 강조점은 누진세와 노동 보호, 이따금씩 요구되었던 제한된 수의 자연 독점 산업의 국유화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국제 경제가 붕괴되고 뒤이어 전쟁이 발생하자 계획은 더 긴요해졌고 더 큰 뜻을 담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젊은 기술자들과 경제학자들, 공무원들 사이 국가적 계획에 관한 서로 경합하는 여러 가지 제안들이 널리 유포되었는데, 그 제안들에서 국가는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핵심 부문을 지원, 장려하고 필요할 경우 지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요컨대 ‘계획'의 역사는 복잡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전쟁이 정부를 경제 생활의 중심에 가져다 놓았다. 1940년 5월 비상통치권법으로 정부는 누구에게나 국가 이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명령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산업 시설을 정부가 선정한 국가 목적에 할당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1945년에서 1951년 사이에 노동당 정부가 사회주의 원리를 실행에 옮긴 결과로 보였던 국가 기획과 국가 소유는 사실상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국가의 유산이었다.

 

 

계획은 실제로 국가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조정이나 분배를 담당할 별다른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는 오직 국가만이 개인과 궁핍 사이에 끼어들 수 있다는 많은 나라에 퍼진 인식을 반영했다. 근거가 충분한 이 같은 인식은 전쟁을 체험함으로써 강화되었다. 하지만 개입주의적 국가에 대한 당대 열정은 절망이나 이익 추구를 넘어섰다. 1945년 극적인 선거 결과로 처칠의 보수당에 패배를 안겨 준 영국 노동당 지도자 애틀리의 이상은 당대 분위기를 잘 포착했다. 필요한 것은 ‘잘 계획해서 잘 건설한 도시와 공원, 운동장, 집, 학교, 공장, 상점’이었다.

 

 

정부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모두에게 유용한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하게 존재했다. 확실히 이런 믿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특히 더 매력적이었다. 잘 계획된 경제가 더 부유하고 더 공정하며 더 잘 정비된 사회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매우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영국의 역사가 테일러는 1945년 BBC 청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는 아무도 미국 생활 방식을, 즉 사기업을 신뢰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기업을 신뢰하는 자들은 미래가 없어 보이는 패배자들이다.’ 테일러는 어느 때처럼 과장했고, 결국 틀렸으며(그렇지만 틀리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당시 미국의 독일 행정부에서 돋보였던 많은 뉴딜 지지자들의 계획주의적 열정에 대해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테일러가 대체로 옳았다.

 

 

대부분 서유럽 국가에서 공공 부문은 정부 지출이나 종사자 수로 측정할 때 급속하게 성장했다. 프랑스에서는 국가 기획에 대한 수사적 열정이 현실로 변환되었다. 영국처럼 전후 프랑스 정권들도 국유화를 진척시켰다. 1946년 5월, 프랑스 전체 산업 생산 능력의 5분의 1이 국가 소유가 되었다. 변화는 무엇보다 변화에 이미 우호적이었던 정치 문화의 산물이었다. 국유화 총괄계획국의 후원으로, 프랑스는 경제 성장과 경제 근대화를 공공 정책으로 삼아 전력을 다하겠다고 천명한 첫 번째 유럽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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