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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정은 신경과학을 도입하여 피고인의 형사 책임을 해명하거나 경감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피고인 측 변호사들은 외상성 뇌손상(TBI), 종양, 암, 약물 또는 알코올 남용, 유전적 이상 등으로 발병한 뇌 기능장애 주장을 뒷받침해 줄 신경과학에 눈을 돌리고 전문가 증인을 선임해서, 의뢰인의 죄 유무와 양형 수준을 결정할 때 뇌 기능장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후천적 외상성 뇌손상(TBI) 환자가 행동 변화를 겪을 수 있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사람은 자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형사 사법제도에 이례적인 도전이 된다. 두부 외상은 드문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가벼운 뇌진탕에서부터 입원이 필요한 중대한 외상에 이르기까지 매년 17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뇌손상을 입는다. 이중 많은 경우 신체적, 인지적 문제가 발생한다. 뇌손상 원인 1위는 추락사고이며, 그 다음으로 교통사고, 물체와 충돌, 폭행이 뒤를 이은다. 현재 TBI로 장애가 있는 미국인이 530만 명 이상이다. 일부 TBI 환자는 자신 생각이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다른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적대감, 공격성 등 과격한 증상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법에서 형을 면해줄 수 있다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병이 있는 사람이 정신이 건강한 사람과 반드시 같은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과, 이 불행한 범법자들은 이성적이거나 자발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광기와 정신이상이 있다고 해서 범죄자가 자신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정상 참작 요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무거운 형벌 대신 다른 대안을 모색할 기회를 얻었다.

 

 

책임이란 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도와 지식이 모두 있을 때 윤리적 책임이 생긴다고 했으며, 이 개념은 형법상 유죄 여부와 정신이상을 다루는 많은 현대 법제의 기초가 되었다. 피의자에게 형사 처벌을 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그 행위를 했다는 증거 그리고 그 행위를 자유의지로 했다는, 즉 행위가 의도적이었다는 증거(mens rea)가 있어야 한다. 라틴어 mens rea를 직역하면 ‘죄지은 마음’이다. 로마인들 또한 정신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에 대해 면책해주는 데 찬성했다. 기소된 범죄자가 마음에 대한 지배력이 결여(non compos mentis)되었다고 판단되면 그들 범죄행위에 대해 무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17세기 영국 상원에서는 정신이상 항변을 사용하는 형사 피고인 관련 상세 가이드라인을 수립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정신이상 주장을 판단할 때는 피고인이 범행을 저지를 당시 자신 행동을 인지했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판단해야 했다. 이 두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피고인의 정신이상 항변을 근거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1962년 미국법률협회는 정신이상 항변을 확장하여 피고인이 정신 장애로 인해 자신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경우까지 포함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범죄 행위와 그 결과는 인지하면서도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지를 두었다.

 

 

이러한 흐름이 발전하여, 이제는 법관들과 배심원들이 복잡한 과학을 검토하고 인간 행동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의견을 평가하고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법과 신경과학을 결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책임, 자유의지 개념, 인간의 삶에 있어서 뇌의 역할에 대한 사법제도의 판단방식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하는가 아니면 우리 힘 밖의 무언가가 이끄는 행동하는가의 문제다. 1980년대 벤저민 리벳은 ‘정상’적인 사람이 의사결정을 인식하기 0.5초 전에 뇌가 이미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거나 최소한 행동을 개시하려고 준비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는 행동이 먼저 일어난 ‘후에’ 결정과 의도가 의식화된다는 의미다. 즉 우리에게는 행동에 대한 자유의지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리벳은 의지에 따른 절차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시작되었더라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그 행동을 멈추거나 통제할 의식적 능력이 있기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인 신호가 행동에 선행하지만, 의식적 자유의지 역할은 자발적인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실제로 실행에 옮길지 여부를 ‘통제’하는 것이다. 리벳은 사실상 ‘우리에게는 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며, 이는 실제로 종교적, 윤리적 제한과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인간에게는 애초 자유의지란 없으며 물리적, 생리적, 생물학적 원인이 모든 동작과 행동을 촉발하므로 인간은 실제로 절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 인식보다 행동이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경생리학자 다마지오는 여러 선택지에 대한 사람들 몸이 다르게 반응하기에 감정이 의사결정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과거 경험이 신체 반응에 각인된다는 것인데, 이를 ‘신체 표지’라고 한다. 신체 표지가 무의식 단계에서 작용하여 사람들이 부정적인 길을 선택할 때 위험을 알리는 자동 알람 체계로 기능한다. 이 자동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뇌 속에서 1,000분의 몇 초 안에 작동하여 사람들이 즉시 부정적인 행동 방침을 기각하고 다른 선택지를 고려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선택지를 강조하여 재빨리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선택한다. 이 결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유의지가 훨씬 더 적은 것은 아닐까?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도 자신이 결정한 행동에 선하든 악하든 책임이 없다. 하지만 자유의지 개념을 포기하면 형사사법 제도 전체 그리고 형사 책임 개념의 기반이 무너진다. 누군가를 범행에 대해 죄가 있다고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뿐 아니라 의도적이었다는 점도 증명해야 하며 이것이 자유의지 개념이다.

 

 

사람들이 이성적일 때도 자신이 통제하는 범위 밖의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감정과 인지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뇌가 조종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형사사법제도의 초점을 처벌에서 갱생으로 옮김으로써 더 나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신경과학이 발전해가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사람들 상식이 바뀌어 우리 행동 많은 부분이 완벽하게 우리 통제 아래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범죄자들을 판단하고 처벌할 때 현실을 감안하고 인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인도적 대우란 피해를 입은 사회의 감정적 만족이나 ‘정의 실현’ 일환으로 처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처벌을 통해서 사람들, 즉 처벌을 당하는 사람과 그것을 보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로 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도까지만 처벌해야 한다. 죄인이 법을 준수하는 생산적인 시민으로서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처벌은, 아무리 좋고 옳게 느껴지더라도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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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뇌 문제와 범죄행위를 연결시킨 드라마틱한 사건이 알려졌다. 버지니아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41세 기혼 남성이 어느날 설명할 수 없이 갑자기 아동에 대한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아내 모르게 아동 포르노그래피를 수집하기도 하고 틈날 때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그의 욕구는 점점 커져서 소위 마사지샵 같은 곳에서 성매매를 하기도 하고 사춘기가 되지 않은 어린 의붓딸에게 은근히 성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의붓딸이 엄마에게 일렀고 아내는 남편이 몰래 숨겨둔 아동 사진들을 찾아내어 경찰에 신고했다. 이 남성은 아동 성추행혐의로 기소되었다. 유죄가 선고된 후 양형 심리 전날 밤 이 남성은 끔찍한 두통을 호소하여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는 뇌 촬영을 지시했다. MRI 영상상으로 우뇌 안와전두 쪽에 큼지막한 종양이 발견되었다. 외과의가 종양을 제거하자 이 남성의 소아성애충동증이 사라졌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어 성적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나중에는 아내와 의붓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두통에 시달리고 또 포르노그래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MRI를 찍자 종양이 다시 자란 것이 보였다. 다시 종양 제거술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성적 문제 행동이 사라졌다.


검사를 진행한 의료진은 이 남성의 종양이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을 고조시키고 충동을 억제하는 뇌 신호를 간섭하여 범죄적 아동성애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사례는 뇌 문제와 범죄행위 간의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알면서도 생물학적 손상으로 인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대표 사례로 자주 논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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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청소년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들은 또래집단의 압력에 더 민감하고 성인에 비해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그냥 미숙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전전두피질을 포함해서 뇌 구조가 거의 완성되지만 신경세포의 연결망이 정보를 소통하고 통합하는 능력은 여전히 발달하는 중이라서 성인에 비해 충동을 억제하기가 더 힘들다.


사람의 뇌는 약 25세가 되기까지는 완전히 성숙하지 않으며 그 성숙하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정신 장애와 행동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정보 통합에 관여하는 뇌 부위가 9세와 23세 사이에 여전히 활발하게 발달하며 9세에서 15세 사이에 가장 발달이 많이 이루어진다. 장기적인 이득을 위하여 눈앞의 보상을 포기하는 능력을 관장하는 신경 경로는 이 시기에 계속 발달하는 과정에 있으며 따라서 행동도 계속 변한다. 청소년들이 충동 제어, 의사 결정, 계획 수립에 있어서 성인만큼 강하지 않고 행동을 제어하는 능력은 9세에서 17세 사이에 측정 가능할 정도로 발전한다.


이 시기 스트레스가 적정한 뇌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 학대, 방치, 홀대는 뇌기능에 변형을 가져오고 정신, 정서, 행동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심리적 학대도 뇌 발달에 항구적인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뇌의 특정 부위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도 했다. 돌봄을 제공해주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으면 장기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뇌는 양육자, 가족, 지역사회로부터의 경험에 근거하여 성장한다.


보살핌이 결여된 상태에서 충격적인 폭력에 노출되면 성장 중인 아동 뇌의 중앙 신경 체계에 변형이 생겨서 더 충동적이고 수동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에 변화를 일으켜서 정상적인 뇌 발달을 방해하는 등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사회는 아동 양육 시기에 뿌린 씨를 거둔다. 생애 초기에 학대를 경험하게 되면 좀 더 화를 잘 내고 충동적이고 의심이 많아서 싸움을 걸거나 싸움에 맞서는 일에 휘말리게 되도록 뇌가 형성되어 이성만으로는 제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뇌는 그런 식으로 켜지고 꺼지지 않는다. 뇌 발달 자체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청소년기의 뇌는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움직일 준비가 된다. 학대 피해 아동은 옳고그름을 분별할 수 있지만 논리와 이성으로 공격적인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없었던 행동에 대하여 이 아이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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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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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에서 김정운 교수는 볼멘소리를 한다. “나도 가끔은 전형적인 교수 문체로 (어렵고 딱딱하게) 쓰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쉽고 재미있게 쓰면 사람을 아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는 거 아니다.” 맞다. 그러면 안 된다. 그런데 쉬운 글을 보면 내용이 빈약하다고 비판하고 싶어진다. 반면 다소 추상적이고 비유적인 글에는 별로 그런 비판이 없다. 독자의 내용 이해 정도와는 별 상관없는 듯하다. 왜 그럴까?


김정운 교수는 ‘에디톨로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존 텍스트를 해체하여 창의적으로 추론한 콘텍스트(맥락)에 따라 텍스트를 재해석하는 것”이 에디톨로지의 기본 설명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 혹은 “한마디로 분명하게 정의하기 힘들어 독자가 주체적으로 편집할 가능성이 있는 개념” 등 다양한 해석이 열려있는 편집이 좋은 에디톨로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쉬운 글은 단선적이여 재해석의 여지가 없는 반면, 추상적이고 비유적으로 쓴 글은 다양하게 열린 해석이 가능하여 독자가 주체적으로 재편집하여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독자는 쉬운 글은 가볍게 보고 어려운 글은 잘 비판하지 않는 듯하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이 재미 없는 건 에디톨로지 형식이 아니어서 일까, 아니면 돈 많은 CEO들 앞에서 강의한 것을 모아 만든 책이라는 내용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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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데카르트, 칸트 시대부터 근대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는 감정보다 이성이 지배했다. 적어도 감정을 무시할 수 없지만,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추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성과 감정이 서로 분리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최근 연구는 전통적인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고 있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에 따르면, 도덕심리학은 감정이,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직관이 도덕 영역이며, 이성은 오히려 직관에 부수된 작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그 후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혹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적당한 이유 찾기와 같은 ‘이성적’ 추론을 한다. 핵심은 사람이 감정적으로 먼저 판단을 내린 후 이성을 사용하지만, 반면 이성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잘못된 직관이라도 일단 형성(판단)되면, 그럴듯한 정당화 사유를 만들 수 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인식조차 못한다. 한 마디로 직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자신 스스로 내린 도덕적 판단이 틀리다고 여기지 않는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유발 하라리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오늘날 (뇌)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아는 없고 자아는 허구”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정신은 조작된 산물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우리 판단은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생화학 과정 산물이다. 우리 정신 안에 스토리텔러가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곡하여)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 책 <지능의 탄생> 저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근대 이성주의자들은 인간 사고 능력의 본질이 이성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들어서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에서는 직관이나 감정을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성, 감성, 추론, 예측, 직관, 통찰과 같은 개념은 분명 사고 과정의 본질이라고 할 만큼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 과연 생각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람의 문제 해결 능력을 ‘지능’이라고 보았을 때,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점은 ‘주체성’이다. 지능을 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지능이 누구를 위하여 복무하는가’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능이란 “그 주체(유전자) 스스로를 위한 생존과 번영의 다채로운 사고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예를 들면 AI 로봇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을 위해서 복무하므로, AI 로봇은 지능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인공지능을 진정한 지능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자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제시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복제 여부가 지능에 대한 효과적 정의가 된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가 자기복제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인공생명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공생명이 등장한다면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능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저자는 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뇌는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세포 생명체의 부속기관이면서, 동시에 유전자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더라도 독립적으로 행동을 선택하는 유전자의 ‘대리인’이다. 뇌는 유전자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환경 속에서 유전자를 무사히 복제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학습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개체 주인은 뇌가 아니라 유전자다. 뇌는 단지 유전자의 안전과 복제기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임무를 부여 받은 일종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뇌와 유전자 지향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 개체가 ‘나’라고 인식하는 주체는 이기적 유전자 본질과 다르게 작동한다. 그래서 때론 “유전자와 뇌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있을 수 있겠다.


“유전자와 뇌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유전자가 동물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서 뇌에게 미리 정해서 부여한 생존과 번식의 단순한 원칙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 인간들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유전자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뇌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뇌는 자신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유전자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뇌는 학습 능력을 갖고 있다. 환경이 변화할 때 그에 따라 달라지는 적합한 행동을 유전자가 실시간으로 직접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전자는 호기심이 많은 뇌를 발명해냈을 것이다. 당장 생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환경 변화를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의 지식이라면 언제가는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뜻에 반하여 “인간 행동이 변화할 수 있는 이유는 경험을 통해서 뇌의 시냅스 가중치(두 신경세포 간의 연결 강도)가 변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는 연결 강도가 약했던 두 신경세포가 특정한 경험을 한 이후에는 시냅스 가중치가 증가하여, 그 이후에는 시냅스 신경세포에 동일한 활동전압이 발생했더라도 더욱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냅스 가중치가 변하느 것을 시냅스의 ‘가소성(platicity)’이라고 한다.”


“자기복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이 이타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뇌를 만들어내개 된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 ‘오류’로 설명할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 모두가 협동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지고 옴에도 불구하고 협동이 깨지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게임 이론의 예측이 실재 인간 행동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게임 이론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의 딜레마 잘못된 가정은 반복적이지 않은 인간 관계를 전제했다는 점이다.


뇌는 생각보다 무척 사회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도 주로 자신 지난 일들, 즉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사회적인 것들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을 하곤 한다. 인간 뇌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지나치게 사회적인 뇌를 갖게 된 나머지 부작용이 생겼다. 바로 ‘의인화(anthropromorphization)’다. 의인화는 조금이라도 사람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사물을 마치 사람처럼 취급하는 뇌의 과민 반응이다.”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가 웃는다고 여긴다든가, “많은 자연현상 배후에 인간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진이나 대홍수를 신의 천벌이라고 여겨 인간을 상벌로 다스리려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미신적인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진화를 통해 지극히 사회적인 뇌를 갖게 된 결과, 모든 것을 의인화하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 또한 사회적 의사결정의 산물이다. 여러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서로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 상대방 사고과정에 관한 지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이와 같은 마음이론(theory of mind)’은 필연적으로 재귀적인 속성을 띠게 된다. 즉 나의 사고과정에 관한 상대방의 사고과정을 예측하고자 하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사고과정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사회적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뇌가 부수적으로 진화한 결과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다름 아니라 이해의 주체인 ‘내가’ 될 때는 필연적으로 골치아픈 ‘자기지시(self-reference)’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깍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만의 머리를 깍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하게 된다.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그와 같은 문제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자기지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진실’이나 ‘지식’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들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보여준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자기인식이 만들어내는 문제 중에는 자유의지도 포함된다. 자유의지란 나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기’라는 개념이 인간 의사결정 과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별도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굳이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답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어 많은 돈을 받으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반대로 하반신 불구가 되는 것처럼 불운한 일이 생기게 되면 평생 불행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행복감을 회복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은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속적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 하여, 이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행복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로 동서양의 어떤 이들은 금욕주의 사상을 택하기도 했다. 실제로 행복의 설정점이 존재한다면 뜻밖의 쾌락을 주는 대상을 가급적 피하는 금욕주의 삶이 더욱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금욕을 하는 동안 인간 뇌는 행복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추게 되므로, 그 결과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적지 않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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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03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적인 유전자와 사회적인 뇌(매트 리들리가 말한 ‘이타적 유전자‘와 같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의 균형과 갈등 속에서 우리 삶이 이루어지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0-03 19:0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일 수 있는 뇌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이기적과 이타적 고민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것 같습니다. ^^

AgalmA 2018-10-04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고 있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보면 우리는 자신이 납득할 만한 ‘사실‘만 받아 들이고 ˝사실이 우리 두뇌 안의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우리는 두뇌 안의 프레임을 그대로 남겨둔 채 사실을 무시하거나 반박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하죠. 이건 철학/사회학/심리학 분야에서도 이미 논의되어온 문제죠. 현재는 뇌과학적으로 검증하는 단계고요. 자기 주체성이 오류와 문제의 온상인 듯^^; 그러나 어쩌나요. 그게 인간의 한계인 것을. 인공지능에서는 또 인간처럼 주체성이 없어서 문제가 있다고 하....ㄱㅜ

북다이제스터 2018-10-04 20:24   좋아요 1 | URL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도 엄청 좋은 책이죠. ㅎ 아무튼 요즘 읽고 계신 책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다고 생각됩니다.
뭐랄까, 예전엔 인문학적이었다면 요즘은 좀 사회과학적이라고 할까요? ㅎㅎ
아무튼 저와 비슷한 분야로 리뷰 혹은 페이퍼 반갑게 잘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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