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치


“가톨릭교회가 유럽을 지배했던 중세, 학자들은 가치란 신의 정당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간주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만큼 남에게 해 주어야 한다는 성 마태오 개념에 영감 받아, 거래가 양쪽 당사자에게 동등한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하며 ‘실제’ 가치보다 더 비싸게 물건을 파는 행위를 비난했다.

 

 

13세기 도미니크회의 수사, 마그누스는 거래되는 재화가 투입된 일의 양과 기타 지출을 포함하고 있을 때 정당한 거래라고 단정했다. 이후 그의 개념은 상품의 고유가치는 거기에 투입된 일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가 됐다. 정당성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가격을 보려는 경향은 자본주의가 발달함에도 살아남아 18세기 상당한 위세를 떨쳤다. 경제학 고전 시대 최고 사상가인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라카도는 고유가치에 상당한 정성을 들였다. 그들은 고유 가치를 생산물에 포함된 일의 함수로 보았으며, 수요와 공급 변동에 따라 결정되는 시장 가격과는 별개 개념으로 보았다.

 

 

노동가치


예를 들어, 스미스는 노동가치가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시키며, 2세를 기를 수 있는 약간의 돈까지 포함된 비용의 총합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곧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우선 거기에는 자본 역할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노동자 땀에 의해서만 가치가 발생할 수 있기에, 이윤은 부도덕한 탈선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일반 상식하고도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비평가는 오래된 와인이 새로운 와인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노동이 아니라 숙성을 위해 사용된 다른 가치, 즉 시간에 있다고 지적했다.

 

 

사용가치


하지만 노동가치설이 사장되기 전에 마르크스가 수용하여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노동가치설에 근거해, 기계를 비롯한 각종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자신 영향력을 이용해 노동자로부터 가치를 훔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하나의 생산품은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모든 노동과 같은 가치를 가지며, 거기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과 그 도구의 도구를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 등이 포함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오로지 생계유지에만 대가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갖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다. 이런 노선에 따라 사고를 전개할 경우 사상가들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겉보기와 달리 서로 다른 사물 사이의 가치 관계는 사물의 고유한 특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마르크스는 결론 내렸다.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투입된 노동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 결론은 우리가 무더위 속에서 따끈한 맥주보다 차가운 맥주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양배추 가치가 가격보다 높아도, 나는 양배추를 구입할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간절한 양배추 애호가를 만났는데, 그녀가 내게 양배추에 지불한 가격 두 배를 주겠다고 접근해 온다면 나는 그녀에게 양배추를 팔 것이다. 양배추의 내재적 가치와 시장가격 사이에는 어떤 신비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양배추를 먹고 느끼는 만족도가 서로 다른 두 명의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19세기 경제학 사상은 사물이 절대적이거나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물건을 사거나 팔 때 적용되는 실제 가격을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제품은 만들 때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비용은 해당 제품이 처음 공급될 때 가격의 밑바탕이 된다. 하지만 특정 제품 가치는 제품에 내재된 성질과 같지 않다. 특정 사물의 가격은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결정되는 주관적인 성질이다. 교환되는 물건의 상대적 가격이 바로 그들 사이의 상대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격은 인간이 무엇을 원하며,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알려줄 수 있다.”<모든 것의 가격>(김영사, 2011)

 

 

 

 

 

 

 

 

 

 

 

 

 

 

 

 

 

노동가치


하지만 “상품 사용가치로는 그 상품의 가치를 증대시킬 수도 없지만 다른 상품의 가치도 증대시키지 못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사용을 잘 했다고 해서 가치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는 가치에 관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 중 사용가치를 통해, 그러니까 상품의 사용을 통해 가치가 증식한 경우가 있는지 찾아보자고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유통은 상호 평등한 존재로서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나는 곳이니 잉여가치가 생겨나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품의 등가성을 엄밀히 재기 때문이다. 단순한 상품유통이든 노동력을 포함한 확대된 상품유통이든, 유통에서는 잉여가치가 생길 수 없다. 상품교환의 기본 공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을 교환한다. 하지만 교환할 때의 가치는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상품유통에서는 가치 증식을 해명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갈리아니의 말을 인용했는데, 너무 얄미울 정도로 간명하다. ‘평등이 있는 곳에는 이익이 없다.’

 

 

원래 생산 과정에서는 원자재와 기계 같은 상품과 상품소유자의 관계만 있다. 상품은 소유자가 행한 노동을 충실히 담아낼 뿐이다. 목재를 책상으로 만듦으로써 상품 가치를 늘린 것은 사실이다. 목재 가치에 제작자의 노동량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더한 노동량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은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 내지 처분권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달리,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투입한 것 이상의 가치를 낳게 할 수 있다. 노동력을 사용해 가치를 증식시킨다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증식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가치가 늘어나는 것은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을 사용해서 만든 상품의 가치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도 엄밀히 하자면, 상품 자체의 가치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최종상품 제작에 투입된 것들의 가치 합계보다 최종생산물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이다.”<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천년의상상,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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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격 -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격의 미스터리!
에두아르도 포터 지음, 손민중.김홍래 옮김 / 김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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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경쟁적인 시장은 거의 드물다. 새로운 발명품을 위한 시장에서는 특허라는 이름의 합법적인 독점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경쟁적인 분야에 있을 때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다.

 

 

아이디어로 돈을 벌게 된 이래로,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고유 아이디어를 베껴가는 이들로부터 창작자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사람들은 항상 주장해 왔다. 1421년 피렌체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도시 정부의 유력자들에게 아르노 강을 가로질러 대리석을 옮길 수 있는 기중기가 달린 거대한 바지선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그 기계는 르네상스를 건축하는 데 필요한 원자재에 대한 피렌체 갈망을 채워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피렌체 정부가 자신이 내거는 다음 조건에 수락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규정이 피렌체 의회에서 승인된 순간부터 3년 동안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피렌체 영토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유수(流水) 위에서도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할 수 없다. 물 위에서 어떤 상품이나 물건 잡화 등을 선적하거나 운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계를 보유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사용하거나 또는 새로 발명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개조할 수 없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19세기 후반까지 창작물인 음악 저작권 침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작곡은 재산권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페라단 대리인들은 라이벌 오페라단의 개막식에 참석해 멋들어진 가락을 훔치고 자신들의 극에 사용하곤 했다. 19세기로 넘어와 낭만주의파들이 ‘천재 작가‘ 라는 개념을 퍼뜨리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작곡가들은 비로소 불평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베를리오즈는 표절자와 해적출판인들을 도둑과 암살자라고 불렀다.


기술은 게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19세기 후반 영국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중을 위한 세계 최초의 음반 산업, 즉 낱장 악보 사업이 번성하게 되었다. 1900년 무렵 영국은 인구 10명 당 피아노 한 대를 갖추고 있었고, 악보 출판업자들은 도트라고 불리는 악보를 1실링 4펜스에 판매하여 떼돈을 벌었다. 푸치니와 헨델은 물론 다른 수많은 음악이 피아노 연주를 위해 다시 편곡되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불법 인쇄업자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들은 사진 석판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해 악보를 복제하고 한 장에 고작 2펜스에 팔아 치웠다.


그리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대다수 여론은 해적들의 편에 서 있었다. 1902년, 영국 의회는 불법 악보를 즉시 압수할 수 있는 음악 저작권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불법 악보 압수는 시장에 더 많은 악보의 난무를 부추길 뿐이었다. 그러다 그해 12월, 마침내 경찰이 인민음악출판사를 운영하는 ‘해적왕‘ 제임스 프레데릭 월 레츠를 체포했다.


법정에서 윌레츠는 해적 행위에 대해 강력한 옹호론을 펼쳤다. 그는 작곡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혼자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능은 대중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 신이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적 행위를 통해 회사들이 매긴 터무니없는 가격을 감당할 수 없는 소비자들에게 작곡가가 재능의 과실을 전해 주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윌레츠는 재판에서 패소하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특허권 기본 원리는 600년 전 브루넬레스키가 주장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발명가가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발명을 계속할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보상은 발명가들에게 자신 창작품을 활용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특허권은 차선의 해결책이다.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특정한 상품이나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생산 비용을 능가하는 혜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특허권은 발명가들에게 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창조물을 한계 비용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그로인해 소비자들은 자유로운 접근권을 차단당한다.


특허권에는 또다른 어두운 면이 숨어 있다. 신약에 높은 가격을 정하면 그것으로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많은 환자들이 접근권을 차단당하게 된다. 최초 개발자의 이해(利害)와 생명을 구할 의무 가운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신약 연구 사업을 하지 않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인도, 그외 개발 도상국들은 최근까지도 의약품의 특허권을 인정하길 거부해 왔다. 1970년에 시행된 인도의 특허권법은 인도의 제너릭 제조업체들이 다국적 기업의 특허권을 손쉽게 피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같은 조처는 제너릭 약품 산업을 크게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들은 특허 의약품을 개발한 제약업체들보다도 훨씬 싸게 비슷한 약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


국지적인 독점도 일상적인 현상이다. 극장 안의 팝콘 매점을 생각해 보라. 심지어 평범한 공산품의 경우에도 생산자들은 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특정 제품이 다른 제품보다 독특하다고 소비자를 설득함으로써 경쟁자의 제품과 객관적 비교가 어렵게 만드는 방법은 이미 효과가 널리 입증된 기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먼저 값싼 물건으로 소비자를 유혹한 다음 나중에 그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기해서는 더 비싼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면도기와 면도날, 프린터기와 잉크가 그렇다.


기업이 경쟁의 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한다. 그중 널리 알려진 기법 중하나는 소비자들이 자신의 보유 금액에 맞는 최적의 가치를 어디에서 획득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비슷한 품목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여 가격 비교를 어렵게 한다. 카운터를 거쳐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가는 경로에는 고급 물품이 진열되어 있고, 출구 쪽에는 패키지로 묶어서 싸게 파는 물건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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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인당 국민 소득은 스웨덴보다 25퍼센트 더 높지만, 스웨덴의 소득이 가장 적은 노동자가 미국의 최소 노동자보다 평균적으로 60퍼센트 더 많은 수입을 얻는다. 이런 격차는 서로 다른 선택의 결과물이다. 대서양 양편 미국과 유럽 차이를 통해 우리는 이기적이고 경제적인 동기가 어떻게 이념과 뒤엉켜 서로 다른 현실의 결과를 나타내는지 알 수 있다.

 

 

유럽인은 인생이란 제비뽑기와 같은 운의 문제일 뿐이라고 믿으며, 부자가 큰 재산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유럽인은 성공을 노력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 대신 성공을 뜻밖의 횡재나 외적인 사회 조건 덕이라고 본다. 세상은 불공평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그들은 불공평한 세상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높은 세금과 공격적인 수입 재분배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인이 수입에 분배가 필요하고 기회 제공이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고 믿는 이유는 아마 봉건적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봉건 사회에서 성공은 노력이 아니라 얼마나 적절한 부모를 두었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미국인들은 유럽인들과 다르게 생각한다. 정직과 근면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으며, 아메리카 드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노력만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고 믿는 미국인 비율은 운이 중요하다고 믿는 미국인보다 10배나 더 많다. 서유럽 국가는 그 비율이 2배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독일인의 4분 3 이상이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그렇게 생각하는 미국인은 7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같은 서로 다른 믿음 체계는 경제 현실에도 반영됐다. 시장의 공정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유럽인들은 소득 재분배를 선호하고, 불평등을 억제하는 규범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고율의 세금과 사회 보장에 대한 대규모 지출, 노동 시장에 대한 엄격한 규제 등이 포함된다. 반면 미국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 세계가 사람들이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투자하도록 자극할 뿐이라는 믿음에 따라 규범을 정해왔다. 그 결과 자신 자식들이 경제적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데 열을 올린다. 또한 낮은 세율과 최소한의 정부는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이념적 토대에 기반한다. 게다가 가난은 바로 본인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땅이 제공하는 정직한 보상을 받지도 못할 정도로 게으르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미국인들의 이러한 생각이 인종적 다양성 때문에 더욱 강화됐다고 분석한다. 미국 백인들이 복지 정책에 반기를 드는 이유는 그들이 힘들게 벌어서 낸 세금이 능력 없는 흑인들에게 제공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시장 경제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유용한 세계관으로 간주한다. 공정한 시장이 투자를 부추기며 대부분의 경우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미국인들이 믿는 바와 정반대다. 미국인의 경제적 이동성은 낮다. 소득 분포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어떤 미국인의 아들이 아빠와 동일한 경제적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확률은 42퍼센트다. 반면 스웨덴은 25퍼센트다.

 

 

만화 <피너츠>에 나오는 ‘철학자’ 강아지 스누피는 ‘내 인생엔 목표도, 방향도, 의미도 없어. 그런데도 난 행복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 내가 뭘 잘하고 있는 거지?’라고 말하며, 근원적인 인식론 문제를 대단히 정확하게 건드렸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것이 성취되면(명예, 재산, 이상적인 배우자 등) 행복해질지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미래가 되어 그것을 성취하고 나서 완전한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는 평생 지속되는 만족감과 순간적인 만족감을 구별할 줄 안다고 느끼지만, 사실 순간적인 즐거움이 현재의 우리 존재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삶의 질은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비교할 때 나의 삶의 질이 어떠한가?’ 라는 점이 우리 행복을 좌우한다. 계층 간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다. 행복이 상황 중심적이고 단기적 특성을 갖고 있기에 250년 전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생각은 ‘산업 사회를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교묘한 착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우리가 제자리걸음만 하는 ‘행복의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다고 본다면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텍사스 주 여성 1000명을 연구 분석했다. 그 결과 여성이 가장 행복하게 느끼는 순간은 섹스, 퇴근 후 친구들과의 교제, 휴식이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출퇴근하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하루 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은 약 3시간 40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약 9시간은 하기 싫은 활동을 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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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 09: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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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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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신앙을 이렇게 제안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내기를 걸었을 때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비교해 보자. 만약 신이 존재할 경우 신앙은 영원한 행복을 제공하는 반면,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을 선사할 것이다.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다고 해도, 신을 믿어서 잃을 것은 작거나 아예 없다.’ 파스칼 관점에서 보면 신앙은 현명한 선택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확률이 존재하는 한, 그 확률이 아무리 미비해도 천국이라는 무한한 보상은 현재의 유한한 비용보다 훨씬 크기에 신앙은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의 내기 이론은 완벽하지 않다. 미래에 보상을 얻기 위해 신앙을 갖는 것이 결국 부정한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다. 신은 신앙을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대가를 바라고 신을 믿는 자에게 지옥 형벌을 가할 수도 있다. 또한 파스칼은 추론 과정에서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며, 일부 종교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 벌을 가하는 신도 있다는 사실을 얼버무렸다. 그의 내기는 잘못된 신을 선택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마 가장 중요한 오류는, 존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어떤 신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면, 내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점이다.

 

 

비록 논거에 허점이 있지만 파스칼 추론은 종교적 사고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종교의 지위를 우리가 기꺼이 비용으로 지불할 서비스로 설정했다. 이점이 재앙에 대비할 보험으로써 종교다. 실제로 종교는 일련의 거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신자는 신앙의 혜택과 비용을 저울질한다. 천국에 갈 프리미엄 일부는 돈으로 지불된다. 거기에는 현금이나 십일조, 기타 등등의 형태가 있다. 하지만 가장 성가신 비용은 단식에서부터 혼외정사를 피해야 하는 것까지 신도들이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엄격한 율법이다.

 

 

분석가들은 신앙이 천국 이외 금전적 가치를 제공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신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 없다. 종교가 신도들에게 제공하는 혜택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보험과 사회 보장이 혼합된 형태를 취한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정통파 유대교인들로 구성된 긴밀한 조직체가 병자에게 문병객을 보내고, 독신자에게 배우자 후보를 소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 정통파 유대교인 공동체는 신속하게 돈을 모아 곤경에 처한 신자에게 수천 달러를 무이자로 빌려줄 수도 있다. 게다가 신용도 보장된다. 모든 것은 랍비 말 한 마디로 보장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 지원 체계는 기독교를 비롯해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를 포함하는 대부분 종교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기로 인해 사람들이 신의 품으로 달려갈 때, 영적인 위로는 물론 일종의 보험으로써 신을 포옹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인도네시아를 강타하여 루피화 가치가 85퍼센트나 하락하고 식료품 가격이 거의 세 배로 뛰어오르며 임금은 거의 절반이나 하락했을 때, 코란을 배우는 사람 숫자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하지만 종교는 단순히 상호 보험을 위한 체계가 아니다. 어려운 시기 종교는 도움 이상의 것을 제공한다. 신과 그를 믿는 공동체가 지켜보고 있기에 종교는 특정 행동 체계를 장려하고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억제하는 능력도 발휘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신뢰하고, 정부와 법률 체계를 더 많이 믿으며, 가급적 법을 어기려고 하지 않는다. 한 실험에서 ‘영혼’이나 ‘희생’ 같이 특정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용어가 포함된 문장을 읽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낯선 사람에게 두 배나 더 많은 기부를 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며, 사회적으로 인내심이 많아지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질수록 종교 목적은 점점 더 퇴색된다. 20세기 후반 부 내내 신에 대한 믿음은 사실상 모든 서유럽 국가와 심지어 일본에서도 쇠퇴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속화 경향을 보이는 산업 국가 중에서 미국은 지난 100년 동안 신에게 열광했다. 2001년 미국인 중 46퍼센트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종교 행사에 참석하여 20년 전 비해 3퍼센트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종교적 열정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두 배나 높고 개발 도상국인 터키나 멕시코, 베네수엘라에 상응하는 수준이다.

 

 

독특하게도 신에 대해 미국인들이 강한 애착을 갖는 이유는 부유한 나라치고는 미국에 빈곤층이 많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 미국 내에서도 가장 부자인 주인 뉴햄프셔에 무신론자가 가장 많은 반면, 가장 가난한 미시시피 주에 종교인이 많다는 점이 이를 예증한다. 사회학자들은 잠재적 위험에 대한 보험으로써 종교적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국가가 발전할수록 감소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보면 미국은 발전한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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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7-17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파스칼은 또한 신앙을 가졌을 때 비용도 고려하지 않은 듯합니다. 십일조에 해당하는 교회헌금도 고려한다면, 신앙 선택에 더 신중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좀 더 비용이 적게 (?) 소요되는 제3의 길을 갈 수도..

북다이제스터 2019-07-17 21:09   좋아요 1 | URL
영원한 행복인 천국에 비해 십일조 정도는 푼돈이라 본 것 같습니다만, 그러한 걸 떠나 십일조는 정말 어마어마한 액수인 건 맞는 거 같습니다. 그걸 받는 교회는 세금조차 안 내고 파악조차 안 되니 가치는 엄청난 것 같습니다. ^^

syo 2019-07-17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끌리는 신간인데? 싶어서 눌러보니 2011년 출간이군요..... 정말 북다님 안계셨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책들이 산더미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18 17:42   좋아요 0 | URL
저도 syo 님 덕분에 좋은 책 많이 알고 읽게 됩니다.^^
감사요~~~.^^
 

 

 

 

 

 

 

 

 

 

 

 

 

 

 

 

 


"우리는 노예 제도를 혐오하라고 배웠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사회가 노동 방식을 선택하는 기준은 가치관이나 도덕보다 노동 이용에 따르는 수익성과 관련 있다. 자유 노동자를 고용하여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과 노예를 사서 노예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방식 중 어느 쪽이 더 저렴한지에 좌우되었다.

 

 

자신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생산하던 원시 수렵 사회에서 노예 제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식량 생산의 진보로 더 많은 사람에게 양식을 제공할 만큼 잉여물이 창출되자 지주들은 노동 비용 상승을 피하기 위해 강제 노동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놓고 경쟁할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나서야 비로소 지주들에게는 임금 제도가 노예 제도보다 더 매력적인 제안이 되었다.

 

 

어떤 이유로 토지 대비 노동력이 감소하면 노예 제도가 곧바로 부활했다. 러시아의 경우, 16세기 이전 농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격히 줄자 지주 계층은 소작농의 이동성을 제한하기 위해 황제에게 로비를 벌였고, 도주 소작농을 되찾도록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고 채무 예속을 통한 소작농을 땅에 귀속시킬 수 있었다.

 

 

농노제가 400년 동안 인기를 끈 중세 서유럽의 경우, 아이러니컬하게도 흑사병이 농노제 소멸을 재촉한 듯 보인다. 물론 이곳 영주들도 소작농을 땅에 귀속시키려 했지만, 동유럽에는 없었던 서유럽의 유력한 도시 자본가들 역시 노동자를 원했기에 그들이 영주들의 노력을 막았다.

 

 

노예 제도는 기술 개발에 따르는 생산성 증대를 둔화시킨다. 값싼 노예들을 계속 추가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면 노동 절약 기술에 투자할 인센티브를 고용주는 거의 갖지 못했다. 강제 노동자들도 생산성을 높일 인센티브를 갖지 못한다. 그래 봐야 고용주에게 더 많은 잉여물을 안겨주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영향이 모두 경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남북 아메리카에서 노예 제도는 자급자족 경제 성장의 침체로 이어졌다.

 

 

노예 가격을 검토해 보면 노예 제도가 생산성 증대를 둔화시켰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노예 한 명 가격은 1720년 약 110.37달에서 1800년 약 307.54달러로 상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가 상승률과 거의 일치하는 수준이다. 실질적으로 노예 가격은 전혀 오르지 않은 셈이다. 노예 가격은 농부들이 노예 노동으로부터 기대하는 수익의 추세를 반영해야 한다.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는 점은 기대 수익이 크게 오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노예를 불법 이민자로 바꿔보면 오늘날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패턴이 나타난다. 수십 년 동안 미국 농민들은 값싼 이민자의 노동력에 의지하여 농작물을 재배했다. 미국 농민들은 더 이상 노동 절약 기술을 투자하지 않았다. 자본 투자가 정점에 달했던 1980년에 비해 1999년은 46.7 퍼센트 하락한 상태였다.

 

 

오늘날 노동 시장도 노예 제도나 강제 노동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이 너무 저렴하기에 굳이 실질 노예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물가 상승 고려 시 미국 연방 최저 임금은 30년 전보다 낮아졌다. 게다가 국제화 때문에 제조업자들은 값싼 노동력을 풍부하게 제공받게 되었다.

 

 

물론 노예 제도가 자유노동 시장으로 바뀐 이후 임금은 계속해서 개선되었다. 선진국의 경우, 지난 20세기만 해도 임금이 크게 상승했다. 1918년 달걀 열두 개 가격은 미국 보통 제조업 노동자의 노동 시간으로 환산하면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이와 동일한 노동자가 5분 미만의 노동만으로 같은 수량의 달걀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노동 시장이 과거에 비해 더 관대해졌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가혹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임금을 좌우하는 요인은 두 가지다. 생산성(해당 일이 고용주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가)과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다. 임금 상승은 정의(定義)와는 전혀 상관 없다. 오늘날 노동자는 1890년 노동자가 한 시간에 걸쳐 수행한 일을 10분 안에 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임금이 오른 이유다.

 

 

한때 고용주에게서 좀 더 많은 임금을 받아내는 수단이 되었던 노조는 그 힘을 잃었다. 민간 부분 노동자 가운데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소득 수준이 21퍼센트 높았다. 하지만 노조를 조직한 기업들이 규모가 줄거나 파산하고, 신생 기업들은 필사적으로 노조를 거부하면서 노조들이 죽어가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단체 협약을 적용받은 민간 부분 노동자는 약 21퍼센트에서 7퍼센트로 줄었다.

 

 

오늘날 밭을 갈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100만여 명의 고용 노동자들 가운데 약 70퍼센트가 불법 이민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막대한 이민을 부추긴 불평등은 자본주의 경제의 불가피한, 사실상 필수적인 한 가지 특징이다. 빈곤한 경제에서 경제 성장이 빠르게 이뤄지면 일부 노동자는 새로운 기회로 이익을 얻고, 또 어떤 노동자는 그럴 수 없게 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된다. 지난 15년 간 미국 상위 1퍼센트 가정이 국민 소득 전체 증가분의 절반을 쓸어갔다. 1980년에는 그 비율이 약 10분의 1에 불과했다. 오늘날 상위 1퍼센트가 국민 소득의 거의 4분의 1을 가져가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부국 가운데 소득 분배가 가장 편향적인 나라다. 상위 10퍼센트 미국인 소득은 하위 10퍼센트의 6배다. 이에 반해 스웨덴은 2.8배다. 게다가 미국인은 경제적 이동성이 낮다. 소득 분포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미국인 아들이 동일한 경제적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확률은 42퍼센트다. 반면 스웨덴은 25퍼센트다.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아메리칸 드림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2009년 공장 노동자의 평균 시급은 1972년보다 낮았다. 맞벌이 부부에 두 자녀를 둔 일반 미국 가정의 수입은 10년 전보다 낮아졌다. 평균 노동자가 평균 임금으로 주당 40시간 일할 경우 일반 가정의 청구서들을 지불할 수 있었던 시기는 40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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