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역학은 자연계에 적용되는 변화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돌이 날아간다’라고 할 때 돌의 ‘특성’을 지칭할 개념과 돌의 운동을 지칭할 ‘상태’ 개념이 구체화되어야 의미 있는 서술 및 예측이 가능하다. 돌이 날아가는 현상에 대해 대상의 특성은 보이는 그대로의 돌이 아니라 숨겨진 성격인 질량과 이것이 받는 힘에서 찾아야 하고, 대상의 상태 또한 겉모습이 아니라 서술에 적합한 위치와 운동량으로 삼아야 한다.

 

 

이처럼 대상 ‘특성’과 ‘상태’를 규정하고 나면, 어떤 존재자의 운동을 서술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해답을 추구한다는 말과 같게 된다. 존재자 ‘특성’, 곧 질량과 이것이 받는 힘을 일단 알아냈고, 또 이것의 현재 ‘상태’, 곧 현 시점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관측을 통해 알아냈다고 할 때, 미래 시각에서 상태 값은 얼마인가 하는 물음이다. 뉴턴 고전역학의 핵심은 바로 이 일반적 방식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참고로 운동량은 물체의 질량에 의존하지만, 물체의 위치와 속도는 처음 위치와 속도에 의존할 뿐 물체 질량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중력을 받는 물체의 운동 궤적은 그 질량에 무관하게 초기 속도와 위치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초기 위치 및 속도 크기와 방향에 따라 낙하 운동, 포물체 운동이 되고, 또 초기 속도가 일정한 값보다 커지면 쌍곡선 형태의 궤적에 따라 지구에서 영구히 벗어난 운동이 될 수도 있다.

 

 

반면 고전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은 위치와 운동량으로 상태 개념을 설정하는 것이 부적절하며, 위치와 운동량은 오히려 ‘진정한 상태’가 외부와 접촉에 의해 그 성격 일부가 드러나는 ‘흔적’에 해당한다. 양자역학 초기에 입자라고 여겨졌던 존재물(예컨대, 전자)은 파동성을 가진다는 특성이 알려졌지만, 이것이 수면 위 파동이나 음파와 같이 실제로 시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의 파동이 아님은 확실했다. 대상은 파동적으로 행동하지만 그 위치를 측정해보면 여전히 한 점에서 충돌하는 입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이 입자성과 더불어 파동성을 지닌다고 하는 이른바 이중성 논지를 펴기도 했지만, 이것은 빛이나 물질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들의 ‘상태함수’를 나타내는 성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곧이어 이것이 대상 입자가 시공간 안에서 관측될 확률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으나, 실제 물체가 어느 시공간 안에 ‘있으리라’ 추정하는 통상적 확률과도 그 성격을 달리한다. 실제로 이 파동 값은 실수가 아니라 복소수로 표시되기에, 이 값의 절대치 제곱은 대상이 그 지점에서 ‘발견될’ 확률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다가 점차 이것은 물질 분포나 확률을 직접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술하려는 대상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임이 밝혀졌고, 이것을 대상의 ‘상태함수’라 부르게 되었다.

 

 

상태함수가 의미하는 바는 대상이 ‘어느 시점에, 어느 위치에서 존재할 확률이 얼마냐’하는 시공간 분포를 말한다기보다는, 대상이 ‘어느 위치에 존재할 확률이 얼마냐’ 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상은 어느 시점에서나 확률 1로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단지 공간적 변화만을 보려는 입장이다. 이렇게 얻어진 상태함수를 통해 그 대상 관련한 모든 물리량을 산출해내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상태함수를 통한 대상 존재의 서술은 결코 사건 자체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대상이 지닌 ‘사건 야기 성향’만을 말해준다. 결국 이러한 사건야기 성향을 지닌 대상이 ‘사건유발 능력’을 가진 외부 존재자와 조우하게 될 때 두 가지 형태(입자성 혹은 파동성)의 사건이 실제 발생하며, 그 각각에 대한 확률 및 결과로 대상 및 외부 존재자에 나타날 변화를 명시해주는 것이다. 심지어 관측을 했느냐 안 했느냐 와도 상관없는 일이다.

 

 

양자역학이 밝혀낸 가장 새롭고 중요한 사실은 고전역학처럼 존재물의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 값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함수’로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상태함수의 전형적 형태는 존재물 그 자체가 ‘위치와 운동량을 지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상태함수로 표현되는 ‘상태’에 있을 뿐이며, 이것에 대해 관측되는 모든 성질, 예컨대 위치와 운동량은 상태함수를 통해 일정한 방식으로 도출되는 구조를 가진다.

 

 

하지만 고전역학에 오류가 있다기보다는 양자역학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단순화된 부분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는 ‘상태 층’과 ‘사건 층’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상태 층’이라 함은 주체가 접하는 모든 대상이 ‘상태’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층위로서, 이는 실재 일부를 대표하는 것이기는 하나 어떠한 관측에도 직접 포착되지 않는, 말하자면 수면 이하 세계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이에 비해 ‘사건 층’이라 함은 사건 또는 빈-사건의 총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오직 이것만을 통해 대상 존재가 외부와 관계를 맺게 되는 층위에 해당한다. 이는 말하자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세계를 의미하는데, 인식주체는 오직 이 층위에서만 대상과 어떠한 교섭을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일상 경험하는 세계는 당연히 ‘사건 층’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 자체만으로 서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바탕에 ‘상태 층’을 깔고 있으며 ‘상태 층’에 의해 조정되는 외피에 해당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원론적으로 고전역학에서도 성립한다. 고전역학에서의 상태 또한 ‘상태 층’을 형성하며, 구체적으로 관측되는 물리량이 ‘사건 층’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외부 관측 장치와 아무런 교섭이 없는 한, 고전역학에서도 대상의 상태를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고전역학에서는 상태 자체를 관측하는 물리량 값(위치와 운동량)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이러한 구분 자체가 현실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의불식간 이 두 층위를 하나의 존재론적 실재로 묶어버리고, 물리적 실재로서 별도의 ‘상태 층’을 수용할 여지를 아예 배제해버린다. 따라서 고전역학 관점에서 보면 약자역학에서 나타나는 ‘상태 층’을 수용할 별도의 존재론적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 ‘비실재론’이라든가 ‘도구주의’라는 명칭으로 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반면 양자역학을 통해 마련된 중층적 존재론 관점에서 보면, ‘상태 층’이라고 하는 그동안 묻혀 있던 새로운 층위의 존재가 선명한 구분을 가지고 밝혀진 셈이며, 그간 실재 세계라고 여겨졌던 현실세계가 실은 ‘사건 층’이라고 불려야 할 실재의 한 구성 층위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2.


특수상대성이론은 원칙적으로 빛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순수하게 시간-공간에 관한 이론이며, 단지 시간과 공간 변수들이 하나의 보편 상수 c를 통해 4차원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빛이 하필이면 이 보편상수 c에 해당하는 속도로 움직이게 되는 것은 시간-공간이 지닌 성격 때문이라고 말해야 옳다.

 

 

사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보편상수 c, 곧 광속 불변의 가정은 우리 직관에 크게 위배된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두 좌표계에서 모두 같은 값을 가진다는 것을 가정으로 내세웠다. 예를 들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를 시속 99킬로미터로 가는 차에서 관측하더라고 여전이 이것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가는 것으로 관측되는 일에 해당한다. 하지만 나를 기준으로 할 때 앞 차는 시속 1킬로미터로 달렸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린 것이 아니다. 사실 칸트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이른바 직관 형식으로 우리 사고를 지배하는 ‘바탕 관념(아 포리아)’이라고 했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속 불변’은 바탕 관념에서 크게 벗어난다.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 4차원을 형성한다는 데 있다. 실제 3차원 공간은 눈에 보이고 몸으로 더듬을 수 있는 사물을 담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차원인 시간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과 관계되며, 특히 3차원 공간에 수직하게 또 하나의 축을 세워 서술할 그 어떤 단서도 잡을 수 없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미 18세기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가우스 시대부터 허수 단위 i(i^2=-1)가 알려졌고, 이것이 실수축에 수직 방향으로 또 하나의 축인 허수축을 구축하면서 가우스 평면이라는 2차원의 복소수 공간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허수 공간은, 설혹 ‘허수’라 지칭되기는 하지만, 실수 체계와 무관하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좀 더 수학적 정합체인 ‘복소수’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공간의 한 차원을 1차원 실수 공간에 대응시킨다면, 시간은 허수 공간에 대응됨으로써 공간-시간의 2차원 구조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공간은 서로 수직인 세 개의 실수축을 지닌 3차원 공간에 해당되므로 시간은 이들 모두에 수직인 허수 공간을 차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4차원 시공간을 이루게 된다. 4차원을 이룬다는 말 속에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상 모든 방향이 대등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대등하다는 것은 이 평면상 어느 방향을 기준 축으로 설정해서 관측하더라도 자연법칙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평면상에 서로 다른 기준 축을 택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속도를 지닌 관측 계를 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4차원 시공간을 이룬다는 말 속에는 이미 ‘모든 자연법칙은 관측자의 속도에 무관하게 일정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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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25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상식이 3차원의 지구라는 공간에서 한정적으로 얻어진 경험임을 생각한다면, 긴 시간의 관점에서 폭넓게 생각할 때에는 개인의 편견은 접어두어야겠습니다.^^:)
 

 

 

 

 

 

 

 

 

 

 

 

 

 

 

 


"미국 법정은 신경과학을 도입하여 피고인의 형사 책임을 해명하거나 경감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피고인 측 변호사들은 외상성 뇌손상(TBI), 종양, 암, 약물 또는 알코올 남용, 유전적 이상 등으로 발병한 뇌 기능장애 주장을 뒷받침해 줄 신경과학에 눈을 돌리고 전문가 증인을 선임해서, 의뢰인의 죄 유무와 양형 수준을 결정할 때 뇌 기능장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후천적 외상성 뇌손상(TBI) 환자가 행동 변화를 겪을 수 있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사람은 자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형사 사법제도에 이례적인 도전이 된다. 두부 외상은 드문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가벼운 뇌진탕에서부터 입원이 필요한 중대한 외상에 이르기까지 매년 17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뇌손상을 입는다. 이중 많은 경우 신체적, 인지적 문제가 발생한다. 뇌손상 원인 1위는 추락사고이며, 그 다음으로 교통사고, 물체와 충돌, 폭행이 뒤를 이은다. 현재 TBI로 장애가 있는 미국인이 530만 명 이상이다. 일부 TBI 환자는 자신 생각이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다른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적대감, 공격성 등 과격한 증상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법에서 형을 면해줄 수 있다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병이 있는 사람이 정신이 건강한 사람과 반드시 같은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과, 이 불행한 범법자들은 이성적이거나 자발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광기와 정신이상이 있다고 해서 범죄자가 자신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정상 참작 요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무거운 형벌 대신 다른 대안을 모색할 기회를 얻었다.

 

 

책임이란 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도와 지식이 모두 있을 때 윤리적 책임이 생긴다고 했으며, 이 개념은 형법상 유죄 여부와 정신이상을 다루는 많은 현대 법제의 기초가 되었다. 피의자에게 형사 처벌을 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그 행위를 했다는 증거 그리고 그 행위를 자유의지로 했다는, 즉 행위가 의도적이었다는 증거(mens rea)가 있어야 한다. 라틴어 mens rea를 직역하면 ‘죄지은 마음’이다. 로마인들 또한 정신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에 대해 면책해주는 데 찬성했다. 기소된 범죄자가 마음에 대한 지배력이 결여(non compos mentis)되었다고 판단되면 그들 범죄행위에 대해 무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17세기 영국 상원에서는 정신이상 항변을 사용하는 형사 피고인 관련 상세 가이드라인을 수립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정신이상 주장을 판단할 때는 피고인이 범행을 저지를 당시 자신 행동을 인지했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판단해야 했다. 이 두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피고인의 정신이상 항변을 근거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1962년 미국법률협회는 정신이상 항변을 확장하여 피고인이 정신 장애로 인해 자신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경우까지 포함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범죄 행위와 그 결과는 인지하면서도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지를 두었다.

 

 

이러한 흐름이 발전하여, 이제는 법관들과 배심원들이 복잡한 과학을 검토하고 인간 행동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의견을 평가하고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법과 신경과학을 결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책임, 자유의지 개념, 인간의 삶에 있어서 뇌의 역할에 대한 사법제도의 판단방식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하는가 아니면 우리 힘 밖의 무언가가 이끄는 행동하는가의 문제다. 1980년대 벤저민 리벳은 ‘정상’적인 사람이 의사결정을 인식하기 0.5초 전에 뇌가 이미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거나 최소한 행동을 개시하려고 준비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는 행동이 먼저 일어난 ‘후에’ 결정과 의도가 의식화된다는 의미다. 즉 우리에게는 행동에 대한 자유의지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리벳은 의지에 따른 절차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시작되었더라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그 행동을 멈추거나 통제할 의식적 능력이 있기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인 신호가 행동에 선행하지만, 의식적 자유의지 역할은 자발적인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실제로 실행에 옮길지 여부를 ‘통제’하는 것이다. 리벳은 사실상 ‘우리에게는 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며, 이는 실제로 종교적, 윤리적 제한과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인간에게는 애초 자유의지란 없으며 물리적, 생리적, 생물학적 원인이 모든 동작과 행동을 촉발하므로 인간은 실제로 절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 인식보다 행동이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경생리학자 다마지오는 여러 선택지에 대한 사람들 몸이 다르게 반응하기에 감정이 의사결정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과거 경험이 신체 반응에 각인된다는 것인데, 이를 ‘신체 표지’라고 한다. 신체 표지가 무의식 단계에서 작용하여 사람들이 부정적인 길을 선택할 때 위험을 알리는 자동 알람 체계로 기능한다. 이 자동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뇌 속에서 1,000분의 몇 초 안에 작동하여 사람들이 즉시 부정적인 행동 방침을 기각하고 다른 선택지를 고려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선택지를 강조하여 재빨리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선택한다. 이 결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유의지가 훨씬 더 적은 것은 아닐까?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도 자신이 결정한 행동에 선하든 악하든 책임이 없다. 하지만 자유의지 개념을 포기하면 형사사법 제도 전체 그리고 형사 책임 개념의 기반이 무너진다. 누군가를 범행에 대해 죄가 있다고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뿐 아니라 의도적이었다는 점도 증명해야 하며 이것이 자유의지 개념이다.

 

 

사람들이 이성적일 때도 자신이 통제하는 범위 밖의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감정과 인지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뇌가 조종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형사사법제도의 초점을 처벌에서 갱생으로 옮김으로써 더 나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신경과학이 발전해가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사람들 상식이 바뀌어 우리 행동 많은 부분이 완벽하게 우리 통제 아래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범죄자들을 판단하고 처벌할 때 현실을 감안하고 인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인도적 대우란 피해를 입은 사회의 감정적 만족이나 ‘정의 실현’ 일환으로 처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처벌을 통해서 사람들, 즉 처벌을 당하는 사람과 그것을 보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로 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도까지만 처벌해야 한다. 죄인이 법을 준수하는 생산적인 시민으로서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처벌은, 아무리 좋고 옳게 느껴지더라도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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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뇌 문제와 범죄행위를 연결시킨 드라마틱한 사건이 알려졌다. 버지니아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41세 기혼 남성이 어느날 설명할 수 없이 갑자기 아동에 대한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아내 모르게 아동 포르노그래피를 수집하기도 하고 틈날 때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그의 욕구는 점점 커져서 소위 마사지샵 같은 곳에서 성매매를 하기도 하고 사춘기가 되지 않은 어린 의붓딸에게 은근히 성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의붓딸이 엄마에게 일렀고 아내는 남편이 몰래 숨겨둔 아동 사진들을 찾아내어 경찰에 신고했다. 이 남성은 아동 성추행혐의로 기소되었다. 유죄가 선고된 후 양형 심리 전날 밤 이 남성은 끔찍한 두통을 호소하여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는 뇌 촬영을 지시했다. MRI 영상상으로 우뇌 안와전두 쪽에 큼지막한 종양이 발견되었다. 외과의가 종양을 제거하자 이 남성의 소아성애충동증이 사라졌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어 성적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나중에는 아내와 의붓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두통에 시달리고 또 포르노그래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MRI를 찍자 종양이 다시 자란 것이 보였다. 다시 종양 제거술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성적 문제 행동이 사라졌다.


검사를 진행한 의료진은 이 남성의 종양이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을 고조시키고 충동을 억제하는 뇌 신호를 간섭하여 범죄적 아동성애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사례는 뇌 문제와 범죄행위 간의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알면서도 생물학적 손상으로 인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대표 사례로 자주 논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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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청소년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들은 또래집단의 압력에 더 민감하고 성인에 비해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그냥 미숙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전전두피질을 포함해서 뇌 구조가 거의 완성되지만 신경세포의 연결망이 정보를 소통하고 통합하는 능력은 여전히 발달하는 중이라서 성인에 비해 충동을 억제하기가 더 힘들다.


사람의 뇌는 약 25세가 되기까지는 완전히 성숙하지 않으며 그 성숙하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정신 장애와 행동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정보 통합에 관여하는 뇌 부위가 9세와 23세 사이에 여전히 활발하게 발달하며 9세에서 15세 사이에 가장 발달이 많이 이루어진다. 장기적인 이득을 위하여 눈앞의 보상을 포기하는 능력을 관장하는 신경 경로는 이 시기에 계속 발달하는 과정에 있으며 따라서 행동도 계속 변한다. 청소년들이 충동 제어, 의사 결정, 계획 수립에 있어서 성인만큼 강하지 않고 행동을 제어하는 능력은 9세에서 17세 사이에 측정 가능할 정도로 발전한다.


이 시기 스트레스가 적정한 뇌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 학대, 방치, 홀대는 뇌기능에 변형을 가져오고 정신, 정서, 행동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심리적 학대도 뇌 발달에 항구적인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뇌의 특정 부위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도 했다. 돌봄을 제공해주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으면 장기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뇌는 양육자, 가족, 지역사회로부터의 경험에 근거하여 성장한다.


보살핌이 결여된 상태에서 충격적인 폭력에 노출되면 성장 중인 아동 뇌의 중앙 신경 체계에 변형이 생겨서 더 충동적이고 수동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에 변화를 일으켜서 정상적인 뇌 발달을 방해하는 등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사회는 아동 양육 시기에 뿌린 씨를 거둔다. 생애 초기에 학대를 경험하게 되면 좀 더 화를 잘 내고 충동적이고 의심이 많아서 싸움을 걸거나 싸움에 맞서는 일에 휘말리게 되도록 뇌가 형성되어 이성만으로는 제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뇌는 그런 식으로 켜지고 꺼지지 않는다. 뇌 발달 자체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청소년기의 뇌는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움직일 준비가 된다. 학대 피해 아동은 옳고그름을 분별할 수 있지만 논리와 이성으로 공격적인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없었던 행동에 대하여 이 아이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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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연구자들은 한때 우리 몸 지방이 피부 밑과 내부 기관 주위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몇 부위가 집중적으로 살이 찌는 것은 유전적 특수성이나 운동 습관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가장 마른 야생 포유동물조차 몸 특정 부위에 살이 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람쥐, 오소리, 사슴, 아메리카오소리, 낙타, 인간 할 것 없이 포유동물은 모두 젖가슴, 앞다리 윗부분(인간의 경우 팔의 윗부분), 꼬리뼈 주위, 넓적다리 부근, 복근의 여덟 부위 중 세 부위와 목덜미에 지방층이 쌓인다. 실제로 상당 많은 포유동물은 심장 주위에 지방층을 갖고 있다.

 

 

식품에 들어 있는 지방은 아주 쉽게 체지방으로 변화한다. 섭취된 지방을 저장 가능한 지방으로 변화시키는 대사 과정에서 소화계는 섭취된 지방 분자에 들어 있는 에너지의 2%만 쓰고 나머지는 지방세포에 저장한다. 이에 반해 탄수화물을 저장 가능한 에너지로 변화시킬 때는 섭취된 탄수화물에 내재된 칼로리의 절반이 대사 과정에서 소비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식품에서 지방을 만드는 것보다 지방에서 지방을 만드는 것이 훨씬 쉽다.

 

 

게다가 훗날 대비해 지방 분자를 저장하는 지방 조직은 거의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다. 이는 지방 조직이 피부를 제외한 다른 신체 조직과 다른 특성이다. 지방세포는 원래 크기의 열 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 지방세포는 크고 둥근 지방 방울을 싸는 얇은 막과 같은데, 돼지고기로 채워진 소시지의 막보다 더 잘 늘어난다. 섭취한 식품에 지방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서 체내 존재하는 지방세포가 다 흡수할 수 없으면, 신체는 새로운 지방세포를 생산해서 남은 지방을 흡수한다. 또 지방세포는 한번 생성되면 죽은 법이 없다. 체중이 줄 때는 지방세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수축하는 것뿐이다. 한번 만들어진 지방세포는 절대로 죽지 않고 지방질이 풍부한 식품을 늘 기다리고 있다.

 

 

현대 남성의 복부 비만은 건강에 상당히 위험하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복부 지방층이 자극받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만성적 스트레스로 아드레날린이 계속 분비되면, 지방세포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에 자극받아 끊임없이 혈액 속에 지방산을 방출한다. 방출된 지방산은 먼저 간으로 갔다가 순환계 활동으로 우리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 근육 활동을 위한 에너지로 쓰인다. 하지만 간에 너무 많은 지방산이 들어가면 간은 인슐린 활동에 장애를 일으킨다. 그러면 혈중 포도당 수치가 급격히 증가하고 이자에서 분비되는 인슐린 양은 더욱 많아져 고혈압, 당뇨병, 급성 심장질환 등을 일으키게 된다.

 

 

근면, 성실함과 게으름


근면이 미덕이라는 윤리의식이 있지만, 게으름 피우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변별 있는 행동 양식이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미덕이다. 이솝 우화에는 일벌과 일개미가 대단히 부지런한 동물로 나온다. 하지만 그 동물들이 과즙을 모으거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은 낮 시간의 20%에 불과하다. 그 외 시간에는 할 일을 적어둔 쪽지를 잃어버리고도 걱정조차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처럼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 개미나 벌이 근면한 동물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벌집이나 개미집 전체가 보여주는 번잡함 때문인 듯하다. 벌집이나 개미집은 겉보기에는 쉴새 없이 움직이는 작은 우주 같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각각의 개미와 벌이 매순간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체 하나하나에 일일이 꼬리표를 붙이고 관찰한 결과, 벌과 개인의 휴식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에는 군집생활을 하는 곤충들이 사소한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개미와 벌은 축전지와 같아서 집단을 위해 사용할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재충전 되지 않기에 빨리 사용하거나 천천히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잘 먹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한다고 해서 더 얻을 수는 업다. 결국 열심히 일할수록 빨리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꿀을 모으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하는 벌들의 심정에 공감이 간다.

 

 

인간은 생존에 쓰고도 남을 양의 자원을 모은다. 인간의 그러한 물욕은 대개 문화적인 훈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고, 그렇게 획득한 자원을 대체로 그날그날 소비하는 동물들은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한다. 사실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싶어하는 선천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게으름을 육욕, 대식과 함께 일곱 죄악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동물을 의인화하면 안 되는가?


과학은 현실적인 학문이면서도 종교처럼 ‘죄악’이라는 것에 대단히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과학에서는 죄악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상당히 많은데, 예를 들어 실험 결과를 조작하거나 동료를 불신하는 태도 등은 과학에서 큰 죄에 해당하고 실험을 게을리 하고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는 행동 등은 작은 죄에 해당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가 가장 피해야 할 작은 죄로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동물을 의인화하는 태도다. 이는 동물이 인간 속성이라 여겨지는 감정, 목적, 의식, 지적 능력, 욕구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태도를 말한다.

 

 

하지만 최근 의인화도 올바르게 적용하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동물 생활과 감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동물행동학자들이 적잖게 등장하면서 이 오래된 금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인화를 신봉하는 학자들은 만만치 않은 반대 세력에 부딪히면서도 많은 동물이 자신과 타자를 인식하고 어느 정도의 지력과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실험 대상인 동물이 동기와 욕구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물학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고 보다 효과적인 실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인화를 열렬히 신봉하는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동물들이 환경 상당 부분을 의식적으로 조작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 생각은 없다. 그저 동물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의인화론은 인간과 자연계 다른 동물 사이에 부정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어째서 인간 심리와 행동을 특출한 것이라 여기고, 지구상 다른 생물체는 그런 요소가 없다고 믿는 것일까? 의인화론에서는 인간을 다른 유기체와 연장선상에 있는 유기체로 보고 우리 동료인 다른 생명체 행동에서 인간과 같은 특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의인화란 동물 세계를 규정하는 시력과 냄새, 울부짖음과 웽웽거림 등을 동물 입장에서 파악하고 동물이 주의를 기울이는 일과 무시하는 일, 예기치 못했던 일에 직면했을 때 취하는 반응 등을 동물 입장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동물 뇌가 정교하고 가치 있는 기관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물론 자연을 지나치게 인간적인 시각으로 관찰하는 태도가 낳는 위험도 있다. 시궁쥐의 우리를 지나치게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것을 들 수 있다. 시궁쥐는 악취를 맡아야 마음의 안정을 얻기 때문이다. 의인화 논쟁은 또한 학자들간에 동물차별주의를 양산하여 저마다 자신이 연구하는 동물이 가장 영리하고 고등하고 따라서 가장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게 할 위험이 있다.

 

 

동물과 인간 관계에 대한 논쟁은 현재 동물이 자신 행동을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는가와,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고려해야 하는가에 초점 맞추고 있다. 의인화를 비판하는 몇몇 동물행동학자는 뇌 기능을 밝히는 과학기술이 아직 너무 조잡해서 동물이 의도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도출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물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인간에게 언어나 시각적 도구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동물에게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 의인화론자들이 동물의 목적의식이 과학 영역에 속한 것처럼 주장해 본말을 전도할 뿐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동물이 간청하기라도 한 것인 양 가장한다고 비난한다.

 

 

의인화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동물행동학자라면 자신이 연구하는 동물과 강한 유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훌륭한 과학자라면 자신 연구 성과가 폭넓게 이용될 수 있도록 정확한 자료를 공정하게 분석하여 주관성이 배제된 연구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물이 스스로의 행동을 인식한다고 보는 태도는 과학의 제1원칙, 즉 과학자라면 자신이 관찰하는 것을 가장 순수하게 해석해야 한다라는 명제와 동물은 인식이나 감정, 전략적인 계획 없이 행동한다는 가정에 충실한 연구 자세다.

 

 

이미 50년 전에 누군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세균이 고양이나 개만큼 커진다면, 세균 또한 소망과 느낌,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세균들이 의식적으로 설탕물이 떨어지는 쪽으로 달려가고 독극물이 있으면 달아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글은 의인화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사고가 가장 적절하게 드러난 글인 듯하다.

 

 

이에 대해 의인화론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동물에 대해 가장 확실하고 명확하고 합리적인 가정을 내리고 있으며, 맹목적인 인간 우월론자들이 인간의 배타적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반박한다. 인간 우월론자들은 수년 전에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뒤 침팬지나 코끼리 같은 몇몇 동물이 나무 막대기와 돌 같은 물건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인간만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침팬지가 막대기를 목적에 따라 변형시킨다는 사실이 또다시 밝혀졌다. 그들은 이제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해 다른 도구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자연계에서 인간만이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과학적 발견 앞에서 휘어지고, 주춤거리고, 수정되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면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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