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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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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이라는 시간은 100년을 사는 인간 개인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지만 진화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1만년 전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역량은 오늘날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당시 인간 삶을 어설프거나 원시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고대인 삶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 이래 많은 변화와 진보가 있었던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문명 이후 인류가 같은 세계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입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것들의 형태와 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근원적인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오늘의 나는 고대인보다 지혜로운가? 그들보다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고전이 남아 있어서다. 우리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 안에서 오늘 나의 고뇌와 욕망을 고스란히 비춰보게 되어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베다>의 브라흐만과 노장 사상의 도(道), 불교의 열반 혹은 공(空),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모든 것의 이론(ToE)이 그리는 세계는 범신론이다. 이것은 추상화 과정의 끝으로, 궁극의 전체를 의미한다. 유일신론과 범신론은 일반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 관계에 대해서 큰 관점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유일신론은 신과 인간을 단절 관계로 파악하는 반면, 범신론은 신과 인간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한다. 범신론인 <베다>의 브라흐만은 우주와 세계 그 자체인 동시에 개별적인 인간의 참된 자아와 동일시된다. 즉, 신은 모든 것이고, 자아의 본질은 신과 동일하다. 여기서는 ‘내가 신이다’라는 말이 불경하지 않다.


1.

<베다>에서 말하는 자아인 아트만은 무엇인가? 나의 지능과 기억, 내가 사용하는 언어 능력, 심리적 욕망 등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것들은 본질적인 자아라고 할 수 없다. 내 지능이 향상되거나 저하되어도, 내가 새로운 추억을 쌓거나 옛 기억을 상실해도, 신체 변화에 따라 내 욕구와 욕망 형태가 달라져도 나는 자신을 자신이라 느낄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벗어내도 당신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의 1인칭 관점, 무엇인가를 보는 자,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능력, 관조하는 무엇, 다시 말해 텅 빈 의식만이 남아 있다.


이 의식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즉 ‘내면을 경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 영사기를 떠올려보자. 영사기 앞에는 필름이 돌아가고, 영사기 빛이 필름 상을 스크린에 비춘다. 그러면 우리는 스크린에 맺힌 상을 실재인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의식이 작동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우리 내면에는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이 있다. 기억과 감각, 감정, 꿈, 느낌이 돌아가며 세상을 그려낸다. 이때 이러한 모든 정신 작용을 일으키는 영사기 빛이 의식이다. 스스로는 특정한 상을 갖지 않지만 모든 상을 일으켜 세우는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 이것이 자아의 순수한 본질적 상태다. 고대 인도인은 자기 내면의 이 투명한 의식을 아트만이라 부른 것이다.


자아의 본질이 의식임을, 하나의 투명한 의식 능력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된다. 즉, 자아는 하나의 등불이고 세계란 그저 그 등불이 비추는 범위임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유 전환을 가져온다. 이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아다. 등불이 고정된 세계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등불의 범위 안에서 세계가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전환은 서양 철학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관념론이라 한다.


<베다>에서 자아라는 존재는 고정된 틀을 갖지 않는다. 자아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이다. 자아는 모든 존재의 탄생이고 시작이며, 끝이자 죽음이다. 자아는 영원하니 결코 태어난 적이 없고 결코 죽은 적이 없다. 자아는 모든 곳과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하고 자기 속에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자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없다.


인도 사상의 거대 줄기인 ‘범아일여’를 이해하기 위해 투명한 수정구슬을 떠올려보자. 그 안에 담긴 왜곡된 세계를 관찰하면, 수정 구슬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마음’인 동시에 ‘내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다.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마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 다른 것은 없다. 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그려낸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이성적으로 나마 범아일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다.


2.

노자의 덕이란 특별하고 인위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로서의 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가 그것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덕 역시 무위(無爲)의 자연스러움을 따를 때 발현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유학에서 강조하는 인과 의, 예를 갖춘 사람이 덕이 낮은 사람처럼 우선은 모두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예다. 예는 예절 바름을 말하는데, 이들은 몸가짐과 언행을 바르게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노자는 이러한 인위적인 예에는 아무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기에 예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 예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노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덕이 없는 사회에서는 인이 강조되고, 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의가 강조되며, 의마저도 없는 사회에서는 예만 강조된다. 쉽게 말하면, 자기 내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이 중요시되고, 인자함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의리가 중요해지며, 의리가 사라진 사회에는 예절이 강요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사람들 마음 속에서 도와 덕이 사라지고 있음을 안타깝게 주시하고 있었다. 인과 의, 예가 사회에서 장려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 사회에 어짊과 의로움, 예절이 없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인과 의, 예를 강조하는 공자가 노자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을 때, 노자가 공자를 따끔하게 지적한 것은 아마도 공자에 대한 나무람이 아니라 예절을 가르쳐야 할 정도로 땅에 떨어진 사회 타락과 부조리에 대한 한탄이었을 것이다.


<도덕경> 제38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예가 강조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충성과 신의가 사라진 혼란한 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표식일 뿐이다. 미래를 전망하고 예측하여 애쓰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도와 멀어지고 있는 우둔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라면 ‘변화하는 형상 세계’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본질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


3.

불교의 사성제는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첫 번째 고성제의 구체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우선 생로병사(生老病死) 4고가 있다. 이외 또 다른 네 가지 고통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거나 사별하는 고통(애별리고, 愛別離苦),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원증회고, 怨憎會苦), 무엇인가를 얻고 싶고 또 자기 생각대로 추진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고통(구부득고, 求不得苦), 마지막으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다섯 가지 조건 때문에 비롯되는 고통(오온성고, 五蘊盛苦), 즉 현대인이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서 겪는 고통이 8고의 범주 안에 모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붓다는 고성제를 제시함으로써 진리를 향한 첫걸음으로 당신이 처한 현실을 스스로 직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두 번째 진리인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제시한 것으로, 집착을 의미한다. 붓다는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두 가지에서 찾는다. 그것은 갈애(渴愛)와 무명(無明)이다. 갈애란 그치지 않는 갈증, 갈망을 말한다. 무명은 알지 못함, 무지를 말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나 괴로운가? 우리가 그치지 않는 집착 상태에 놓여있고, 동시에 그 집착이 고통 원인임을 알지 못해서다. 이것은 마치 어리석게도 갈증 때문에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과 같다.


붓다는 갈애가 구체적으로 세 종류임을 말한다. 그것은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다. 우선 욕애는 감각적 욕구로서, 현실에서 오감을 통한 쾌감을 추구하는 욕망을 말한다.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으려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려 하고, 끝없이 안락해지고자 하는 집착이다. 유애는 존재에 대한 욕구로서,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집착이다. 무유애는 존재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욕구로서, 허무주의적 태도로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집착이다. 불교는 세상을 허상으로 보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경계하지만, 그것이 허무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이 모든 것이 안 된다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집착이고, 무지며, 그래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붓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아라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자아는 무아(無我), 즉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불교의 자아는 <베다>의 아트만과 달리 고정된 실체가 없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임시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임시로 모여 있는 상태를 붓다는 모래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는 의미에서 온(蘊, 쌓을 온)이라 하는데, 특히 다섯 가지 요소로 쌓여 있다는 의미에서 오온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색, 수. 상. 행. 식이다. 색(色)은 물질 요소로, 육체를 말한다. 생각해보면 육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 몸속 피는 46초마다 한 바퀴 돌고, 피부 세포는 2~4주 사이에 바뀌며, 뼈의 조직 세포는 10년이면 모두 대체된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신체와 지금 당신 신체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색이 육체적인 측면을 말한다면 수, 상, 행, 식은 정신적인 측면을 말한다. 수(受)는 육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말한다 오감이 일으키는 고통, 쾌락 등의 단순 감정이다. 상(想)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표상 작용으로, 심상과 영상 등을 말한다. 행(行)은 의지와 같은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식(識)은 앞서 모든 마음 작용을 일으키고 종합하는 의식 활동을 말한다. 즉 내가 나의 마음과 정신, 주관,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범위 혹은 밑바탕을 의미한다. 식은 쉽게 말해서 우리 마음을 의미한다.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 마음으로서의 의식뿐이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실체를 갖지 않는 삼라만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진짜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은 그러한 삼라만상이 드러나는 자신 마음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허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마음, 즉 의식이 된다.

 

 

식은 의식, 의는 무의식에 해당하며 더 깊은 마음은 아뢰야식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능력으로서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당신 내면 세계 그 자체이자, 당신 내면 세계를 일으켜 세우고 존재하게 하는 힘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야뢰야식을 근본 의식이라는 의미에서 본식(本識)이라고 부른다. 야뢰야식의 두 번째 역할은 모든 존재와 법칙의 씨앗을 담지하는 기능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행한 모든 것은 야뢰야식에 씨앗처럼 가능성의 상태로 남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착한 행위와 나쁜 행위의 과보가 기록된다는 의미를 넘어서, 의식적 존재로서의 모든 체험이 평가나 처벌과 무관하게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은 윤회에서의 업(카르마)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경험한 의식은 그 체험이 흔적으로 남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신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어서다.


붓다는 지혜롭게 말한다. 너 자신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라.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너를 구성하는 전부다. 이 외는 없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요소 중에서 불변하고 고정된 것은 없다. 이것들은 그저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나, 즉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붓다가 오온무아(五蘊無我)를 설파헸던 것은 자아의 고정된 실체가 없음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믿으며 집착하는 태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해탈에 대한 집착이 해탈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처럼, 참된 나를 찾고자 하는 집착이 참된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와 집이 고통의 원인이라면, 멸과 도는 고통이 사라지는 원리다. 세 번째 진리 멸성제는 깨달음의 상태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짐 평온의 상태. 어떻게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명확하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멸성제는 집착을 풀어지게 함으로써 괴로움을 소멸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열반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착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인 바로 네 번째 진리인 도성제다. 이것은 열반과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그래서 이를 팔정도라고 부른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목숨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른 신념을 가지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바르다’란 것은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다. 하지만 불교에서 중도 사상은 더 심화되었다. 불교에서 중도는 존재론적 측면까지 나아간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불교가 심화한 중도 사상이다. 중도 사상에 따르면 유에도 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삶에도 죽음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자아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가 연기이기 때문이다.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기대어 존재한다.

 

 

모든 존재는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발생하므로 실제로 고정된 자기 본질을 갖지 않는 공의 상태고, 이러한 공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으므로 중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연기와 공, 중도는 실제로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굳이 나눠본다면 연기는 눈앞의 현상을 말하고, 공은 그것의 실체이며, 중도는 이러한 진실을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은 단순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작용은 있으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마치 꿈처럼 말이다. 이렇듯 세상은 사실 공인데 묘하게도 실존하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붓다는 이미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생겨나므로 거기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연기설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므로 불교의 오랜 사상을 반야 사상이라고 한다.

 

오온이 불교가 바라보는 자아 실체라면, 연기(緣起)는 불교가 바라보는 세계의 실체다. 연기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짐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세상 모든 것 중에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다른 것과 얼키고설킨 인과의 톱니바퀴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불(佛)을 본다. 여기서의 법은 우주 법칙, 즉 진리를 말하고 불은 부처, 즉 깨달은 자를 말한다. 다시 말해, 우주 실체가 연기임을 꿰뚫어보는 자는 진리를 보게 되고, 그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연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가 그것이다. 유전연기는 존재와 삶이 발생하는 방향으로의 연기를 말한다.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기는 방향으로의 연기다. 사성제 중에서 고와집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환멸연기는 존재와 삶이 소멸하는 방향으로의 연기를 말한다. 이것이 멸해 저것이 멸하는 방향으로의 연기다. 사성제 중에서 멸과 도가 이에 해당한다. 사성제는 연기라는 세계관 위에 성립하는 진리인 것이다. 오온도 마찬가지다. 자아는 얽히고설킨 연기의 조건 위에서 잠시 발생한 것일 뿐이다.

 

 

오온인 무아, 연기인 무상과 고. 이 세 가지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으로 정리된다. 삼법인은 초기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무아, 무상, 고 각각은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열반적정(涅槃寂靜)에 해당한다. 제법무아란 자아는 영원불멸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도 없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즉 자아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현상은 잠시도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생멸하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즉 우주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무아와 무상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에 집착할 때 고통이 발생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무지를 깨뜨리고 연기를 꿰뚫어 이해할 때 우리는 마지막 열반적정에 도달하게 된다. 열반적정은 번뇌의 불꽃을 바람을 불어 꺼뜨리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다.

 

 

고대인은 원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인은 세계를 환영이라는 뜻으로 ‘마야’라고 불렀고, 서양철학에서는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로 ‘현상’이라고 불렀으며, 불교에서는 ‘식’이 모습을 변화한 것으로 ‘색(色)’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마야와 현상, 색은 모두 실제로는 실체를 갖지 않고, 그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의 상태에 있다. 즉 공(空)의 상태인 것이다.

 

 

4.


서구의 이항 대립이 해결된 것은 18세기 이르러서였다. 철학에서는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분리를 극복해내었고, 신과 인간의 완벽한 분절을 전제하던 기독교에서는 독일 신비주의 등장과 함께 일원론 가능성을 발견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기존까지 배제되었던 관찰자 존재가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원론이 분절된 절반의 세계 가치만 인정하고 필연적으로 나머지 절반 세계에 폭력을 가하게 된다는 비극은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구 사회가 깨달은 실상이었다. 이것을 선명하게 지적했던 인물은 니체였다. 19세기 독일에서 활동했던 그는 유럽인이 병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플라톤주의, 즉 이원론과 주체중심주의였음을 날카롭게 밝혀냈다. 그래서 니체 이후 서양 철학은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 또한 플라톤이 가치 절하했던, 생성되고 사라지며 변화무쌍한 불완전한 것들을 복권해내는 데 집중한다.

 

 

칸트로부터 출발한 관념론 철학은 20세기 현상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현상학은 하나의 철학 운동이었다. 그들은 의식에 드러난 현상을 특정 이념이나 사상에 의한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근원으로서 순수 의식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현상학이 의식에 대해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칸트가 인간 인식 과정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초월적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칸트가 ‘의식 일반’이라고 부르기도 한 초월적 자아는 인식 주체가 인식 활동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발견이다. 인식 주체는 자신의 인식 능력을 통해 인식 대상에 색깔을 입히고 정리함으로써 능동적으로 현상 세계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활동이 그 활동 주체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즉 인식 주체는 인식 형식을 통해 세계를 제약할 뿐, 인식 형식에 제약당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 주체는 매 순간 나에게 경험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인식 주체는 결코 나의 인식 활동에 포착되지 않는다. ‘세계를 보는 자’는 현상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연극 무대의 제작자는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칸트는 우리 인식 과정에 경험적인 요소뿐 아니라 비경험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인식 주체는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자아가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자아라는 의미에서 칸트 철학은 초월적 관념론 혹은 초월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매우 날카로운 통찰이다. 나는 세상을 보지만, 그 보는 자는 나의 세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칸트의 초월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으로 이어졌다. 후설은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칸트로부터 계승했다. 하나는 현상, 다른 하나는 의식이다. 우선 현상에 대해서 후설은 ‘사물의 현상 그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표어처럼 특정 사상이나 이념에 기반을 둔 선입견에서 벗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종교와 사상은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본질을 가정하고, 현상보다는 본질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칸트의 물자체처럼 우리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기에 학문적 탐구 대상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어떠한 전제나 선입견 개입 없이 나의 눈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를 엄밀히 분석할 때 우리 세계에 대한 더 순수한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 이원론의 그림자가 천천히 걷히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의 세계관은 이원론을 벗어나지 않았다. 천국과 지상, 신과 인간의 분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고 교회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어져왔다. 기독교 안에서 이원론을 극복하는 시도가 결코 불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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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실용적인 이유부터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 동서양의 고전을 펼친다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원래 고전이 어렵기 때문도 아니고, 학창 시절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며, 철학과 인문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 세계밖에 모른다는 데 있다.


인류 사유를 출발시킨 위대한 스승들은 일원론을 말해왔는데, 우리는 이원론 세계에서 태어나 그 밖으로는 한걸음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지만 인류의 위대한 고전 대부분은 일원론의 거대한 대륙 위에서 탄생했다. 당신이 고전을 펼치고 그 안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내면 세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는 일원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다음으로는 당신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그는 자기가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인으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불교 세계관에, 이슬람 세계관에, 유물론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자신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유물론자로 태어나서 유물론자로 죽고, 어떤 이들은 실용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허무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과학주의자로 태어나고 성장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세상 모든 이가 수많은 세계관을 가장 근원적인 기준으로 나눈 것이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 한국인은 이원론 세계관 위에 서 있다.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 위를 걸어 다니는 존재라고 매 순간 인지하며 성장하다가 죽는다. 우리는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이 사실은 우리가 이원론 세계관 위에 발 딛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눈앞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 물질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가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내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 말에 휘둘리게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에 갖게 된 사유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먼저 세상 목소리를 의심해야 한다. 가족과 학교, 사회, 국가, 종교, 미디어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당신을 주저앉히려 할 때, 당당히 ‘아니요’라고 말하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TV를 끄고, SNS 닫고, 당신 모든 시간을 분주하게 만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당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 두었던 내 삶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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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조적 독서는 세상의 모든 텍스트에는 이상적 인간과 이상적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전제하고서 이 메시지를 뽑아내려는 독서입니다.”


2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제도로 물리력과 이데올로기로 설득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말합니다.

경제도 이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근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념투쟁을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념을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근대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숙명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해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개인의 정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그러한 개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를 고려하는 ‘개인적 공동체주의‘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사실 서로 모순되는 말을 붙인 것이라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되지 않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는 고전을 읽다보면 저절로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시민 작가는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은 진보자유주의자 혹은 사회자유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런데 진중권 교수는 ‘사회자유주의자‘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 <인문 고전 강의>도 개인적인 것(자유주의)과 공동체주의(사회주의)가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양한 인문 고전으로 분명히 보여준다.

 

 


고대는 이른바 ‘자기의식‘ 이라는 것이 정신에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나’ 라는 개념에 곧바로 대응하는 객체는 없습니다. 나는 팔과 다리, 몸과 얼굴 등이 모여서 된 것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추상적 개념일 뿐입니다. 그런데 호메로스 서사시가 쓰였을 당시에는 아직 이러한 통일체로서의 ‘나‘ 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싸웠다‘ 고 말하지 않고 ‘내 팔이 싸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킬레우스를 가리킬 때도 ‘날쌔다‘는 말을 쓰지 않고 ‘발이 빠르다‘ 고 표현합니다. ‘아름다운‘ 브리세이스가 아니라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입니다. 아직 추상적인 단어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을 신체 일부분들의 집합체로만 볼 뿐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인간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입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첫째 문장은 아주 멋집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가 말하는 그 시대는 희랍 시대입니다. 루카치에 따르면, 고대 희랍 시대에는 우주와 인간이 하나였지만, 근대 사회에 와서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모두 끊어져 버렸 고 오로지 인간 중심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공자의 인문주의는 역사로 귀결합니다. 이것이 공자의 궁극적인 기준입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용감한 태도입니다. 초월적인 것은 인간의 힘으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에 남으며 계속해서 시시비비의 대상이 됩니다. 역사에게 묻는 것이 용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유가 이념에 충실한 사람은 역사를 씁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합니다.

초월적인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속적 세계, 역사적 세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신의 뜻입니다. 초월적 신을 믿는 이들은 그 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여긴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교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초월적 신을 믿는 종교의 잔인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두려움을 느낍니다. 남의 이목이 두렵습니다. 매사가 조심스럽습니다. 반면 신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인(仁), 의(義), 예(禮)가 무엇인지 살 펴보겠습니다. 먼저 의(義)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인(仁)은 극기복례(克己復禮)입니다. 극기를 하려면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의(義)는 이때의 판별기준입니다. 의(義)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는 유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비입니다. 리(利)는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부터 부구가병에만 힘을 쏟는 일까지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말이 항상 국가의 정치 차원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의(義)의 첫째 뜻은 ‘올바름 입니다. 백성에 일을 시킬 때는 의(義)로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의‘는 ‘공정함‘ 을 가리킵니다. ‘의‘ 의 첫째 뜻이 아주 폭넓은 의미의 ‘올바름’이었다면, 둘째 뜻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공정함‘ 입니다.

당위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대립하고 있다가 당위적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밀어내면 그것이 바로 극기입니다. 그러면 당위가 승리하고 사람 본래의 모습인 예로 돌아갑니다. 당위는 원래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 전수받은 것입니다. 즉 잊고 있던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해진 그대로의 사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문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사람이 군자, 사대부, 지식인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자기관조를 촉구하고, 관조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당위(문화)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가장 강한 리(利)는 돈입니다. 한번 거기 파묻히면 몸에 붙어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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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덤의 <파놉티콘>


"근대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 주체성을 드높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인간 본질을 (윤리적, 도덕적 측면을 배제하고) 물질적 이익 측면에서만 규정하여 결국 인간 참모습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구 근대 문명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는 19세기다. 하지만 이 문명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완전히 파산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 대규모 전쟁을 통해서 유럽은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 미국은 마샬플랜을 통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유럽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유럽이 오늘날처럼 살아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유럽은 미국 그늘 아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유럽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공리주의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표어로만 기억한다. 이것은 얼핏 듣기에는 아주 좋은 목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구호가 등장하는 과정에는 계산 가능한 이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벤덤의 공리주의가 가장 잘 구현된 조직이 기업이다. 기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기업 논리를 완전히 받아들이면 효용 중심의 인간이 탄생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업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에 그런 식으로 하면 민주주의 정치도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논리의 효용을 믿기에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정치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다는 말조차 아까운 사람들이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베버는 국가를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유일한 인간 공동체’로 정의한다. 자유주의 국가는 시민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의무가 없다. 공동체에서 제멋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공권력으로 처벌하기만 하면 된다. 서양에서 말하는 근대국가는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정치권력이다. 그 안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만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개념은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아주 독특한 발명품이다. 이 개념을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애국심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가는 주권자인 각각 개인이 갖고 있는 폭력행사권을 위임받았다. 근대국가의 정치가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정치 세계에서는 절대윤리를 추구하는 자선사업가를 칭송할 수 없다. 고대 세계의 정치는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덕치(德治) 이상이 생겨났다. 하지만 근대 세계에서 영혼의 구원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내 영혼은 내가 돌보는 것, 이것이 근대국가에 사는 개인의 숙명이다. 근대국가에 사는 개인들이 신념윤리에 사로잡혀 있으면, 근대국가의 정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베버는 신념윤리를 규준으로 정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물리력을 전유하는 국가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관료다. 우리는 대통령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정부에서 고위직 공무원을 지냈던 이가 조금은 자조적으로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씁쓸한 표현이 아니다. 근대 관료의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직업관료에게는 영혼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국가 장치와 기구에 영혼이 없듯이 그 기구 종사자들에게도 영혼이 없다. 아니 영혼을 요구할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자유주의 국가를 운영할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는 이에 유념해야 한다. 그래야 현대 사회의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심정적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동아시아인들은 정치에 대한 도덕적인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의 정치인은 이러한 도덕과는 무관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 직업으로 삼는다. 여기서 직업적 정치가가 출현한다.

 

 

‘정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경제활동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활동에 묶여있지 않는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생활이다. 그는 완전히 불로소득 생활자다. 이 불로소득 원천은 지대일 수도 있고 유가증권이나 이와 유사한 금리수입일 수도 있다. 국가나 정당은 전적으로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지도층이 ‘금권 정치적’으로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정치의 특징은 정당들을 지탱하던 정치 이념은 사라지고 순전히 관직사냥 정당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근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정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치가 굉장히 고상한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근대는 정치가 윤리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시대다. 근대사회에서 정치는 더러운 것이다.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나 있기에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의 정당이 형성된다. 정당은 근대국가의 민주주의 제도가 낳은 조직이다.

 

 

폴라니는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서 세계를 움직인 결과 서구에 파시스트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믿고 시스템을 운용했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파시스트적인 해법이 나왔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보기에 파시스트 체계에서 인간은 이익을 따지는 존재조차 되지 못한다. 그저 체제 전체의 부속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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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크의 <통치론>


"로크는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본다. 그런데 그 합리성이란 자신에게 물질적으로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계산능력을 가리킨다. 딱 거기까지다. 로크는 인간을 그가 가진 경제적 재화에 따라 판단한다. 그에게 의미 있게 규정되는 인간은 재산을 가진 존재다. 그것 외 속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는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인격’을 갖고 있다. 로크가 말하는 <통치론>에서 국가는 ‘재산을 규제하고 보전할 목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한다. 이러한 사회가 인정하는 인격 바탕에 자연권인 ‘욕망의 권리’가 있다. 욕망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주 많으므로 그 토대는 무척 단단하다. 존 로크 사상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를 통해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친일파 윤치호를 보자. 윤치호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윤리적 자기완성이라는 열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세련되고 이성적 합리적 체계이지만 실천에 관한 강한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는 내세의 구제를 위한 조건으로 자기완성을 인간에게 강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신에 대한 그의 초기 이해는 ‘윤리적인 자기완성의 주체인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하나의 선한 주술적인 힘과 같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윤치호의 세계관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해진다. 기독교의 신은 근대 산업문명이라는 지고 지순한 가치를 수호하는 신이고, 그에 따라 기독교를 믿는 사회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산업 문명의 사회가 되어 점점 더 진보하게 된다. 또한, 세계 역사는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신적인 목표를 실현해가는 무대다. 이는 바로 윤치호가 19세기말 서구 산업문명의 종교로서 제국주의적 세계지배를 정당화한 기독교와 사회진화론의 결합을 자신 세계관으로 정립했음을 의미한다.

 

 

윤치호는 해방정국에 친일파로 몰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윤치호 삶을 친일파의 일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서구 근대 사상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식인들에게 수용되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아야 한다. 왜 세상물정을 알만한 사람들이 친일파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여기서 풀린다.

 

 

소유권 보호를 최고 임무로 삼는 것이 로크주의적 국가, 즉 경찰국가다. 이렇게 보면 소유권은 사람들의 타고난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아주 확실해 보이는 소유권이 사실은 상당히 허약한 기반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법을 바꾸면 소유권에 관한 규정도 바꿀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로크의 <통치론>은 잉글랜드와 딱 붙어있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에서 설파된 내용은 잉글랜드가 세계제국으로 팽창하여 대영제국이 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사상의 중심 수용자는 미국이었다. 정치사상은 이런 식으로 보편화된다. 반드시 그것을 실어나를 제국이 있어야 한다. <통치론>은 로크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정치사상이다. 로크는 17세기에 새롭게 대두하는 신흥상업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한 사상가다.

 

 

근대 이후 싸움은 늘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연동되어 일어난다. ‘이념 싸움은 그만, 이제는 경제’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정치적 이념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경제 싸움이 곧 이념 싸움이다. 로크가 <통치론>을 쓸 당시 잉글랜드 내전은 표면적으로 왕당파와 의회파 싸움이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대토지 소유 귀족과 신흥상업부르주아의 싸움이었다. 어떤 종류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정치적인 패거리가 갈린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동산과 동산의 대립이다.

 

 

사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으며, 또 어떤 경제적 처지에 있는 사람을 편드는지도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냥 듣기 좋은 말로 ‘국민’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사회는 그 국민이 경제적 처지에 따라 나뉘어 있다. 자신이 어떤 경제적 처지에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 이것이 근대 정치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특징이다. 이렇게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처지에 따라 자신 입장을 뚜렷하게 갖는 것을 ‘당파성’이라 한다.”<인문 고전 강의>(라티오, 2010)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정론지는 가능하지도 않지만 필요하지도 않다. 정론은 당위가 아니라 경합과 갈등으로 획득하는 가치다. 진리는 독단에서 나온다. 균형 패러다임에서는 내용의 의미와 효과를 알 수 없다. 자기 당파성도 모르고 상대방 도그마도 모를 때, 균형 감각론이 등장한다. 문제는 독단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이지 독단 자체는 죄가 없다. 균형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

 

 

 

세계사에 법칙이 있다. 세계사를 읽다보면 나라가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공통징후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쓸데없는 돈을 쓰는 것이다. 이는 재정파탄과 불평등한 과세, 그리고 조세저항을 일으킨다. 조세저항이 일어나면 사회 불만세력이 생기고 사회비판이론이 등장한다. 이때 상층 지식인들은 선진국 사상을 수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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