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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조적 독서는 세상의 모든 텍스트에는 이상적 인간과 이상적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전제하고서 이 메시지를 뽑아내려는 독서입니다.”


2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제도로 물리력과 이데올로기로 설득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말합니다.

경제도 이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근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념투쟁을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념을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근대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숙명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해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개인의 정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그러한 개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를 고려하는 ‘개인적 공동체주의‘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사실 서로 모순되는 말을 붙인 것이라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되지 않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는 고전을 읽다보면 저절로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시민 작가는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은 진보자유주의자 혹은 사회자유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런데 진중권 교수는 ‘사회자유주의자‘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 <인문 고전 강의>도 개인적인 것(자유주의)과 공동체주의(사회주의)가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양한 인문 고전으로 분명히 보여준다.

 

 


고대는 이른바 ‘자기의식‘ 이라는 것이 정신에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나’ 라는 개념에 곧바로 대응하는 객체는 없습니다. 나는 팔과 다리, 몸과 얼굴 등이 모여서 된 것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추상적 개념일 뿐입니다. 그런데 호메로스 서사시가 쓰였을 당시에는 아직 이러한 통일체로서의 ‘나‘ 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싸웠다‘ 고 말하지 않고 ‘내 팔이 싸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킬레우스를 가리킬 때도 ‘날쌔다‘는 말을 쓰지 않고 ‘발이 빠르다‘ 고 표현합니다. ‘아름다운‘ 브리세이스가 아니라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입니다. 아직 추상적인 단어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을 신체 일부분들의 집합체로만 볼 뿐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인간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입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첫째 문장은 아주 멋집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가 말하는 그 시대는 희랍 시대입니다. 루카치에 따르면, 고대 희랍 시대에는 우주와 인간이 하나였지만, 근대 사회에 와서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모두 끊어져 버렸 고 오로지 인간 중심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공자의 인문주의는 역사로 귀결합니다. 이것이 공자의 궁극적인 기준입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용감한 태도입니다. 초월적인 것은 인간의 힘으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에 남으며 계속해서 시시비비의 대상이 됩니다. 역사에게 묻는 것이 용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유가 이념에 충실한 사람은 역사를 씁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합니다.

초월적인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속적 세계, 역사적 세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신의 뜻입니다. 초월적 신을 믿는 이들은 그 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여긴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교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초월적 신을 믿는 종교의 잔인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두려움을 느낍니다. 남의 이목이 두렵습니다. 매사가 조심스럽습니다. 반면 신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인(仁), 의(義), 예(禮)가 무엇인지 살 펴보겠습니다. 먼저 의(義)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인(仁)은 극기복례(克己復禮)입니다. 극기를 하려면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의(義)는 이때의 판별기준입니다. 의(義)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는 유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비입니다. 리(利)는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부터 부구가병에만 힘을 쏟는 일까지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말이 항상 국가의 정치 차원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의(義)의 첫째 뜻은 ‘올바름 입니다. 백성에 일을 시킬 때는 의(義)로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의‘는 ‘공정함‘ 을 가리킵니다. ‘의‘ 의 첫째 뜻이 아주 폭넓은 의미의 ‘올바름’이었다면, 둘째 뜻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공정함‘ 입니다.

당위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대립하고 있다가 당위적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밀어내면 그것이 바로 극기입니다. 그러면 당위가 승리하고 사람 본래의 모습인 예로 돌아갑니다. 당위는 원래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 전수받은 것입니다. 즉 잊고 있던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해진 그대로의 사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문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사람이 군자, 사대부, 지식인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자기관조를 촉구하고, 관조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당위(문화)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가장 강한 리(利)는 돈입니다. 한번 거기 파묻히면 몸에 붙어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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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덤의 <파놉티콘>


"근대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 주체성을 드높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인간 본질을 (윤리적, 도덕적 측면을 배제하고) 물질적 이익 측면에서만 규정하여 결국 인간 참모습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구 근대 문명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는 19세기다. 하지만 이 문명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완전히 파산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 대규모 전쟁을 통해서 유럽은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 미국은 마샬플랜을 통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유럽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유럽이 오늘날처럼 살아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유럽은 미국 그늘 아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유럽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공리주의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표어로만 기억한다. 이것은 얼핏 듣기에는 아주 좋은 목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구호가 등장하는 과정에는 계산 가능한 이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벤덤의 공리주의가 가장 잘 구현된 조직이 기업이다. 기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기업 논리를 완전히 받아들이면 효용 중심의 인간이 탄생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업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에 그런 식으로 하면 민주주의 정치도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논리의 효용을 믿기에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정치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다는 말조차 아까운 사람들이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베버는 국가를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유일한 인간 공동체’로 정의한다. 자유주의 국가는 시민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의무가 없다. 공동체에서 제멋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공권력으로 처벌하기만 하면 된다. 서양에서 말하는 근대국가는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정치권력이다. 그 안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만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개념은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아주 독특한 발명품이다. 이 개념을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애국심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가는 주권자인 각각 개인이 갖고 있는 폭력행사권을 위임받았다. 근대국가의 정치가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정치 세계에서는 절대윤리를 추구하는 자선사업가를 칭송할 수 없다. 고대 세계의 정치는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덕치(德治) 이상이 생겨났다. 하지만 근대 세계에서 영혼의 구원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내 영혼은 내가 돌보는 것, 이것이 근대국가에 사는 개인의 숙명이다. 근대국가에 사는 개인들이 신념윤리에 사로잡혀 있으면, 근대국가의 정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베버는 신념윤리를 규준으로 정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물리력을 전유하는 국가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관료다. 우리는 대통령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정부에서 고위직 공무원을 지냈던 이가 조금은 자조적으로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씁쓸한 표현이 아니다. 근대 관료의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직업관료에게는 영혼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국가 장치와 기구에 영혼이 없듯이 그 기구 종사자들에게도 영혼이 없다. 아니 영혼을 요구할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자유주의 국가를 운영할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는 이에 유념해야 한다. 그래야 현대 사회의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심정적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동아시아인들은 정치에 대한 도덕적인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의 정치인은 이러한 도덕과는 무관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 직업으로 삼는다. 여기서 직업적 정치가가 출현한다.

 

 

‘정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경제활동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활동에 묶여있지 않는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생활이다. 그는 완전히 불로소득 생활자다. 이 불로소득 원천은 지대일 수도 있고 유가증권이나 이와 유사한 금리수입일 수도 있다. 국가나 정당은 전적으로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지도층이 ‘금권 정치적’으로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정치의 특징은 정당들을 지탱하던 정치 이념은 사라지고 순전히 관직사냥 정당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근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정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치가 굉장히 고상한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근대는 정치가 윤리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시대다. 근대사회에서 정치는 더러운 것이다.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나 있기에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의 정당이 형성된다. 정당은 근대국가의 민주주의 제도가 낳은 조직이다.

 

 

폴라니는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서 세계를 움직인 결과 서구에 파시스트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믿고 시스템을 운용했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파시스트적인 해법이 나왔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보기에 파시스트 체계에서 인간은 이익을 따지는 존재조차 되지 못한다. 그저 체제 전체의 부속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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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크의 <통치론>


"로크는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본다. 그런데 그 합리성이란 자신에게 물질적으로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계산능력을 가리킨다. 딱 거기까지다. 로크는 인간을 그가 가진 경제적 재화에 따라 판단한다. 그에게 의미 있게 규정되는 인간은 재산을 가진 존재다. 그것 외 속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는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인격’을 갖고 있다. 로크가 말하는 <통치론>에서 국가는 ‘재산을 규제하고 보전할 목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한다. 이러한 사회가 인정하는 인격 바탕에 자연권인 ‘욕망의 권리’가 있다. 욕망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주 많으므로 그 토대는 무척 단단하다. 존 로크 사상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를 통해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친일파 윤치호를 보자. 윤치호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윤리적 자기완성이라는 열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세련되고 이성적 합리적 체계이지만 실천에 관한 강한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는 내세의 구제를 위한 조건으로 자기완성을 인간에게 강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신에 대한 그의 초기 이해는 ‘윤리적인 자기완성의 주체인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하나의 선한 주술적인 힘과 같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윤치호의 세계관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해진다. 기독교의 신은 근대 산업문명이라는 지고 지순한 가치를 수호하는 신이고, 그에 따라 기독교를 믿는 사회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산업 문명의 사회가 되어 점점 더 진보하게 된다. 또한, 세계 역사는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신적인 목표를 실현해가는 무대다. 이는 바로 윤치호가 19세기말 서구 산업문명의 종교로서 제국주의적 세계지배를 정당화한 기독교와 사회진화론의 결합을 자신 세계관으로 정립했음을 의미한다.

 

 

윤치호는 해방정국에 친일파로 몰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윤치호 삶을 친일파의 일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서구 근대 사상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식인들에게 수용되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아야 한다. 왜 세상물정을 알만한 사람들이 친일파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여기서 풀린다.

 

 

소유권 보호를 최고 임무로 삼는 것이 로크주의적 국가, 즉 경찰국가다. 이렇게 보면 소유권은 사람들의 타고난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아주 확실해 보이는 소유권이 사실은 상당히 허약한 기반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법을 바꾸면 소유권에 관한 규정도 바꿀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로크의 <통치론>은 잉글랜드와 딱 붙어있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에서 설파된 내용은 잉글랜드가 세계제국으로 팽창하여 대영제국이 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사상의 중심 수용자는 미국이었다. 정치사상은 이런 식으로 보편화된다. 반드시 그것을 실어나를 제국이 있어야 한다. <통치론>은 로크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정치사상이다. 로크는 17세기에 새롭게 대두하는 신흥상업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한 사상가다.

 

 

근대 이후 싸움은 늘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연동되어 일어난다. ‘이념 싸움은 그만, 이제는 경제’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정치적 이념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경제 싸움이 곧 이념 싸움이다. 로크가 <통치론>을 쓸 당시 잉글랜드 내전은 표면적으로 왕당파와 의회파 싸움이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대토지 소유 귀족과 신흥상업부르주아의 싸움이었다. 어떤 종류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정치적인 패거리가 갈린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동산과 동산의 대립이다.

 

 

사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으며, 또 어떤 경제적 처지에 있는 사람을 편드는지도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냥 듣기 좋은 말로 ‘국민’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사회는 그 국민이 경제적 처지에 따라 나뉘어 있다. 자신이 어떤 경제적 처지에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 이것이 근대 정치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특징이다. 이렇게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처지에 따라 자신 입장을 뚜렷하게 갖는 것을 ‘당파성’이라 한다.”<인문 고전 강의>(라티오, 2010)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정론지는 가능하지도 않지만 필요하지도 않다. 정론은 당위가 아니라 경합과 갈등으로 획득하는 가치다. 진리는 독단에서 나온다. 균형 패러다임에서는 내용의 의미와 효과를 알 수 없다. 자기 당파성도 모르고 상대방 도그마도 모를 때, 균형 감각론이 등장한다. 문제는 독단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이지 독단 자체는 죄가 없다. 균형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

 

 

 

세계사에 법칙이 있다. 세계사를 읽다보면 나라가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공통징후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쓸데없는 돈을 쓰는 것이다. 이는 재정파탄과 불평등한 과세, 그리고 조세저항을 일으킨다. 조세저항이 일어나면 사회 불만세력이 생기고 사회비판이론이 등장한다. 이때 상층 지식인들은 선진국 사상을 수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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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의 <위대한 전환>


"자유주의 입헌국가는 개인 사적 이익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헌법에 명시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 바탕에는 개인이 전 세계에서 우뚝 선 고유 존재며, 개인 판단과 생각,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개인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가족, 국가, 공동체와 연결고리를 끊고 오롯이 독자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 중심주의는 데카르트부터 시작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개인 주체성을 내세운 철학자다. 내 몸과 내 정신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로크 사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자적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노동 산물도 오로지 개인의 것일 수 없다. 근대 세계는 ‘데카르트적 자아’라는 형이상학적 토대부터 잘못되어 있다. 그 결과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독자적 개인을 강조했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시스템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개인을 집단 속에 무자비하게 집어넣은 것이다. 폴라니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사람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파시스트 체제로 귀결될 것이다. 파시즘은 자기조정 시장 붕괴를 목격한 체제가 이 시장을 끝까지 지키려고 할 때 발생하는 발악적 강제동원이다. 지금 우리는 폴라니 분석을 통해서 데카르트적 자아의 몰락을 목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윤리가 정치체계로 완결된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란 사람들이 자신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위대한 지도자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단주의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를 합리주의라고 한다면, 결단주의는 메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둘은 정반대다.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갖고 살았다는 점에서 서양인들은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나타난 윤리학설은 크게 보아 키니코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이렇게 셋이다.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와 무관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정치와 무관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윤리 내용도 굉장히 소극적이다. 내 의지를 갖고 행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한다. 스토아 학파는 ‘욕심을 줄이든지 아주 없애든지 하라’는 것이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서로 맘이 맞는 사람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즐기라’는 것이며, 키니코스 학파는 ‘정말 모르겠네’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어질 때 윤리 역시 그만그만한 것으로 전락하며, 윤리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을 때 정치 역시 저급한 싸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정치학은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또 우리는 가령 병법이나 경제학, 또 수사학처럼 가장 높이 평가받는 능력까지도 정치학 밑에 놓여 있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의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해보자면, 인간의 실천적 삶 전체를 통찰하는 총체적 탐구가 정치학이다. 그리고 이 정치학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결국 이성, 즉 ‘지적 탁월성’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합리적 선택은 지성이나 사유 없이 생기지 않고, 또 성격적 품성상태 없이도 생기지 않는다. ‘잘 행위한다’는 것은 사유나 품성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지적 탁월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이성을 알아보면, 이성 기능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학문적 인식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헤아리는 부분’이다. 학문적 인식은 영원하고 파괴되지도 않는 불변하는 필연적인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 지식은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연역적 추론, 즉 증명은 더 이상 증명이 불가능한 윈리에서 시작하는데 원리 자체는 학문적 인식이 알아낼 수 없다. 이것을 알아내는 일은 직관적 지성 또는 통찰이다. 한편 ‘헤아리는 부분’은 우연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우연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불확실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 노력에 따라 개선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헤아리는 부분’은 정답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 실천 활동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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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5-23 0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테드 창 신간 소설을 읽으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인공지능이나 많은 기술들이 인간 개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특이점. 이때의 반응은 여러가지죠. 인간의 나약과 한계를 느끼며 겸손 & 기계 문명에 대한 반감 등.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 존엄을 따지는 건 무너지고 싶지 않은 인간 중심주의 희망이겠죠. sf에서 인간과 로봇의 경계나 정체성 문제를 꾸준히 다루면서 ‘개인 중심주의‘의 허점을 자주 보여줬지요. <공각기동대> 보셨을테니 북다이제스터 님도 생각해보셨을 겁니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도 그런 걸 짚고 있었잖아요. 네트워크와 기술과 합체된 신인류. ‘인간‘, ‘개인‘ 등의 정의들이 과연 지금의 인간상과 미래까지 두루 담지하고 있는가 점검해봐야 할 지점이겠죠.

북다이제스터 2019-05-23 19:49   좋아요 0 | URL
<공각기동대> 20년 전에 봐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전 그런 의미에서 AI 로봇 발전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인간중심주의, 즉 인본주의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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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폴 라파르그는 일생 동안 주로 사회주의 정치활동에 헌신했다. 1865년부터 5년간 런던에 체류하며 마르크스 집을 자주 방문했고, 1868년 마르크스 둘째 딸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했다. 그 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파 지도부를 구축하는 활동을 벌였고, 프랑스 노동자당을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69세인 1911년 그는 더 이상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아내와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성직자, 경제학자 그리고 도덕가들은 이처럼 정신 나간 생각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의 주위에 성스러운 광채를 드리우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온갖 형태의 지적 타락을 가져오는 동시에 모든 생명체를 기형으로 만드는 원흉이다. 아직 타락시키지 못한 고결한 미개인을 보라. 그리고 나서 기계의 노예가 되어버린 비참한 현대인을 보라.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지극히 비천한 일이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의 그리스인들도 철저하게 노동을 경멸했다. 고대 철학자들은 노동에 대한 경멸을 가르치면서 노동은 자유인을 타락시킬 뿐이라고 설파하고, 시인들은 신들이 보내준 게으름을 선물로 찬미했다. 수염도 제대로 깍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우리의 친절한 이웃 아낙네들, 바쿠스의 연인이자 대담하고 솔직하게 수다를 떠는 그네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늘 이곳 저곳 마실 다니기를 좋아하고, 요리를 즐기며,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고통 없이 건강하고 활기에 넘친 아이들을 낳는 매력적인 여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공장에 다니는 젊은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들은 빈혈에 걸린 대다 위는 그만 병 들어버렸으며 팔다리는 힘없이 축 쳐져 있어, 마치 생기 없이 시들어버린 꽃을 보는 듯하다. 그들은 건강한 열정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 즐거움을 유쾌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능력도 없다. 우리 시대는 노동의 세기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 불행, 부패의 세기다.

 

 

자본주의의 헤어나올 길 없는 법칙은 이렇다. ‘노동자들이여, 일하고 또 일하라, 사회적 부와 너 자신의 개인적 가난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라. 더 가난해지기 위해. 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일하라. 그러면 그만큼 더 비참해질 것이다.’ 이처럼 경제학자들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노동자는 노동의 재앙에 몸과 마음을 모두 넘겨주게 된다. 이들은 사회 전체를 과잉 생산에 따른 산업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으며, 이것이 일종의 유기체로 작동하는 사회에 대혼란을 일으킨다. 맹목적인 노동 숭배 때문에 야수가 되어버린 노동자들은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한 과잉 노동이 자신들에게 해를 입히고 현재의 비참함을 만들어낸 원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도 못한다.

 

 

노동자들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노동은 단지 게으름의 쾌락을 위한 양념에 불과해야 한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일은 나의 힘을 넘어서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현대적 생산 수단은 무제한적인 재생산 능력을 갖고 있기에 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한 과도한 열정을 버려야 한다. 노동자 계급은 아무 생각 없이 노동과 금욕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자본가 계급은 나태함, 강제적인 향유, 비생산, 과소비를 평생 동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왜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는가?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일을 분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에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일자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곧바로 일자리를 얻으려면, 조난당한 배에서 식수를 나누듯이 일을 똑같이 할당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젠 체하고 툭하면 도덕을 내세우는 경제학자들은 마치 불운을 예고하는 까마귀 떼처럼, 작업 시간을 1시간 줄이면 산업은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까악거렸다. 하지만 인간의 생산성을 강화시키려면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유급 일수와 축제 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기업은 이를 확신하지 못한다. 오, 바보같으니, 산업 시설이 느리게 발전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일하기 때문이다. 산업 시설이 무제한적으로 발전하도록 하려면, 노동자 계급은 어쩔 수 없이 길들여진 금욕과 절제의 취향을 버리고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소비 능력을 무제한 개발해야 한다.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인권선언’ 또는 단지 불행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일할 권리’가 아니라, 누구든 하루 세 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철의 법칙을 주조하기 위해 봉기해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 윤리에 의해 타락한 노동자들에게 이처럼 진짜 사나이다운 결심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

 

 

 

 

 

 


통상적인 노동 시간은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된 산업혁명기에 가장 길게 연장되었다. 그후 생산성은 몇 배 증가되었지만 노동 시간은 단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고대의 통상적인 수준으로 단축되었다. 통상적인 노동 시간과 그것의 생산성 내지는 필요성 간에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착취에 대항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 좀더 많은 상품과 좀더 자유로운 시간을 얻기를 바라는 노동자들의 소망, 노동 시간 연장이 고용주에게 미치는 이익과 불이익 – 이것들이 노동 시간의 규정 요소가 되어왔다.

노동은 신성하기는커녕 지옥의 고통이며, 오히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운동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몸부림이자 문화와 계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인 셈이다. 소위 선진 사회의 야만성을, 그리고 역으로 원시 사회의 ‘문명성’을 드러낼 수 있는 전복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노동 시간이 줄어들어도 그만큼 여가 시간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정부 정책에 따라 우리는 한 장소에서 일하고 나서 수마일 떨어진 곳에서 수면을 취하고 또다시 다른 곳에서 레크레이션을 즐긴다.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은 이런 결과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술수를 부리지만, 실제로 이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재화를 모두 빨아먹는다. 우리의 문화 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다니고 우리를 지배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삶의 양식을 자유라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에트 세계의 동료 노동자들과 달리 일이 끝난 후에도 정치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는 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저 아리게 쑤시는 등을 곧게 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것들을 위해 주당 노동 시간의 단축을 촉구해야 한다. 일반 노동자들은 주당 노동 시간의 단축을 원하지 않으며, 설사 그만큼 휴가가 늘어난들 이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만큼 영리하지도 못하고, 아내들도 늘어난 휴가를 어쩌지 못해서 남편들이 집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또 달리 찾아갈 곳이라고는 선술집 외에는 없기에 의사들도 선술집밖에 그냥 머물러 있으라 할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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