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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만이 무기다 - 읽기에서 시작하는 어른들의 공부법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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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저작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칸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 머리가 특별히 좋아서는 아니다. 칸트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나름의 비교나 치환 작업을 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비교나 치환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 내부에 비교나 치환을 만들 재료와 경험이 있어야 한다. 칸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비교하거나 치환할 수 있는 자신의 일상생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수준의 사례로, 서구문명의 문화적 이해가 없는 이슬람교도가 서구적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 내부에 경험이나 지식이 없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와 비슷한 개념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습과 경험이 적을수록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 내부에 축적된 정보가 적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나 경험, 지식도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는 자기 투자의 개념이 아니다. 독서의 가장 큰 의미는 자신과 타인을 ‘알아 가기’위한 것이다.”

 

 

 

이 책은 “공부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하거나 더 나은 모습으로 변모”하길 원하는 성인을 위한 책이다. “공부를 해보려는 의욕을 가진 성인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여 각오하고 공부를 시작하며, 배운 것이 몸에 배이고, 살아가는 방식도 변화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저자는 지성을 강조하는 데, “인간이라는 이족보행 동물이 자기 보존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지성”이라고 본다. 지성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이며, “표현력과 전달력이 약하면 상대방의 이해 정도는 급격히 낮아져, 이는 살아가는 데 상당히 불리한 일”이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풍부한 어휘는 곧바로 사고력을 확대시키는 요인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지와 언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휘력은 발상의 다양함으로 연결되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손쉽게 찾아내는 강인한 해결책으로 직결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저자가 평소 하는 공부는 ‘특별’한 게 아니다. 의도적으로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위해 “종교 서적부터 세계문학, 양자역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다.”

 

 

 

 

 

 


인간은 ‘언어의 분절화 작용’에 의해 생겨난 관념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 우리는 언어의 분절화 작용에 의한 착각 렌즈를 통해 바라보므로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언어의 분절화 작용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본래 나눌 수 없는 대상을 나눠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 테면 아이와 어른이다. 세계 각지의 문화에 따라 의식이나 나이를 기준으로 편의상 아이와 어른을 나누지만, 실제로 그 경계는 없다. 민족 또한 본래 나눌 수 없는데 인간을 민족의 명칭으로 나누어 언어의 분절화 작용이 적용된다. 아이들은 일곱 가지 색깔로 선명하게 나뉜 무지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진짜 무지개는 결코 색깔이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좀 더 애매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들은 배운 관념을 그림으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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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10-09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지개가 뜬다면 그 색깔을 신중하게 관찰해보라.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 띠가 고르게 분포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아닐 수도 있다. 흰 햇빛이 입자 때문에 구부러지거나 반사되거나 산란되어 하늘에 생긴 색깔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 입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경우에 이 입자들은 빗방울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색깔은 빗방울의 크기를 알려준다. 무지개의 색깔이 희미할수록 빗방울이 더 작지만, 원한다면 좀 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만약에 무지개에 아주 밝은 보라색과 초록색 띠에 분명한 빨간색 띠가 보이지만 파란색은 거의 안 보이거나 무지개의 호 제일 위쪽이 덜 밝게 보인다면, 빗방울이 지름 1밀리미터 이상으로 크다.
색깔 중에서 빨간색이 눈에 띄게 흐리지만 어쨌든 보인다면 중간 크기 빗방울이다.
호가 옅고 보라색만 밝게 보이며 흰 줄이 있거나 빨간색이 아예 안 보인다면 빗방울이 작다.
이런 세세한 사항은 기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빨간색이 잘 보일수록 빗방울이 크다고 기억하면 된다.˝
ㅡ트리스탄 굴리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중

우리가 말하는 무지개는 너무 이미지적이죠ㅎ; 분절의 각도는 아주 다양할 수 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10-09 18:59   좋아요 0 | URL
제게도 무지개가 일곱 색깔로 보인적 없습니다.
그림 그리시는 AgalmA 님께는 더욱 그러하실 듯 합니다. ^^
 

 

 

 

 

 

 

 

 

 

 

 

 

 

“혁명을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엥겔스는 1848년 혁명 상황을 회고하면서 과거 1789년 혁명 이미지가 미래 혁명의 도래를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했다. 1848년의 혁명가들은 반세기 전 1789년 혁명 모델을 가지고 혁명을 시도했다. 엥겔스는 1848년 혁명 실패가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즉 혁명은 전혀 혁명 되지 않았던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지미, 즉 ‘바리케이드’가 오랫동안, 심지어 오늘날에도 혁명가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엥겔스는 혁명전쟁의 유망한 가능성을 그리스도교에서 보았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의 이 ‘전복 당’은 놀랍게도 로마라는 군대와 맞붙어 싸우기 이전에 ‘군 전체를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떤 면에서 이제는 군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군대를 이기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스도교는 효과적으로 ‘지도’ 되었기에 성공한 게 아니라 효과적으로 ‘전염’ 되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혁명 역시 그런 게 아닐까. 그것은 ‘지도’되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는 것이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낡은 혁명을 은근히 바라고 선동하는 것은 오히려 지배권력 쪽이다. 엥겔스는 그들 도발에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무기를 집어 들고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더는 영웅적이지 않다. 그것은 힘도 아니고 용기도 아닌, 어리석음만을 보여줄 뿐이다. 지배권력은 폭력으로 응징하기 위해 폭력을 기다린다. 오늘날 언론이 시위대를 묘사할 때, ‘폭력 충돌’ ‘폭력적 항의’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쓴다. 경찰과 언론은 실제로 폭력 장면을 발견해내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권력자를 가장 곤란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이것의 상대적 결여이다. 정부기관은 무장 저항이라는 익숙한 형태로 빠져들 것을 거부하는 혁명운동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

 

 

“엥겔스가 고민했듯이 ‘지금은 기습의 시대가 아니다. 소수가 수행하는 혁명 시대는 갔다. 사회조직의 완전한 개조가 문제인 곳에서 대중 스스로 함께 거기에 있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무기는 대중들을 서로 엮어주는 무기, 대중들을 소통시키는 무기, 대중들을 전염시키는 무기다.” 엥겔스의 주장에 따라 우리는 촛불집회를 대안으로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촛불은 한동안 쇠파이프나 화염병이 뚫을 수 없는 경찰의 방패를 뚫는 최강의 무기였다. 하지만 이제 그 약발도 다하고 있다. 촛불은 더는 변화를 이끌어낼 무기가 아닌, ‘순수한 평화’, 아니 그보다도 못한 ‘낡은 관행’의 상징이 되고 있다. 폭력은 경찰과 언론의 먹잇감(혹은 미끼)이고, 촛불은 심리적 위안만을 주는 무기력한 저항이 되어가는 상황이다. 나는 간디의 ‘비폭력 집단행동’, 즉 혹자는 투쟁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 할지 모르는 비폭력 투쟁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다.”

 

 

“집단 이기성 때문에 개인 도덕은 집단에 투영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들 도덕성으로 부도덕한 집단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톨스토이 류의 개인 도덕성 함양으로 사회가 개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비버는 급진주의자가 주장하는 폭력이나 혁명과는 명확한 선을 긋는다. 방법은 이성에 기반을 둔 정치력이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이 비폭력 저항이다. 비폭력 저항은 무저항과 다르며, 예상과 달리 폭력 저항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비도덕적인 집단을 바꿀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빈곤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유 시장경제의 일상이다.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한 사회의 익숙한 풍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빈곤을 풍경처럼 보는 내 눈이 무섭다. 잘사는 사람이 더 잘살게 되고 못사는 사람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경제가 어렵다는 허망한 말에 수긍하는 내 고갯짓이 놀랍다. 잘사는 소수를 만드는 과정이 비참한 다수를 만드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는 나의 신속한 패배주의. 빈곤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악랄한 방해자가 이것이다.

20세기 말 지구의 지니계수는 낮추어 잡아도 0.67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계 상층 3분의 1이 모든 것을 갖고, 하층 3분의 2는 굶어죽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체가구의 15%, 즉 6~7가구 중 한 가구는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부자의 증가율에서 한국이 세계 1위다. 가난한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는 속도와 부유한 사람이 더 부유해지는 속도가 세계 최고수준인 나라, 그것이 지금의 우리나라다. 지난 10년간 국가와 자본이 저지른 가장 잔인한 짓은 대중으로부터 ‘이유’와 ‘근거’를 박탈한 것이다. 대중이 자신 몫을 요구할 이유와 근거를 박탈한 것이다. 직장을 잃은 노동자, 농토를 잃은 농민이 누구를 찾아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유가 없고 근거가 없을 때, 대중의 ‘살게 해달라’ 요구는 구걸밖에 안 된다.

따라서 시장의 폭력으로 생겨난 빈곤층을 없애기 위해 시장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시장활성화론’ ‘근로복지연계론’ 같은 정책이 나온다. 빈곤 상황에 대한 보고서보다 우리를 더 암담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제안들이다. 복지예산이나 기부금 모집은 빈곤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다.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낸 복지예산이나 기부금이 축소된 복지를 만회해줄 수도 없지만, 빈곤에 대한 그런 접근이야말로 빈곤층을 사회적 부를 축내는 문제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빈곤층을 양산한 자본과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빈민을 돕고 대변한다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빈민을 양산하는 원리에 눈감으며, 빈민을 대신해 자본과 국가에 구걸해주는 선행으로 빈민들의 직접작인 정치세력화를 막는 것이다. ‘1% 나눔운동’ 등을 전개하는 시민단체가 진정 빈곤을 없애고자 한다면, 빈민들의 생계지원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향한 빈민들의 투쟁 자금으로 지원해야 한다.

인권위원회가 고용문제를 다루고 있다. 노동자들 목소리가 ‘내 몫을 달라’라기보다는 ‘나를 살게 해달라’는 쪽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 권리를 옹호해줄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자원이 괴멸되었다. 사장 경쟁력과 효율성이 모든 권리 요구들을 제압한 상황에서 인권은 사실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상품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인권을 박탈하는 체계다. 경제적 인권에 대한 요구들 중 상당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지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를 부당한 억지 내지 경쟁력 저해 비용으로만 간주한다면, 사회가 자본주의보다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진짜 쿨한 리얼리스트였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괴물이 아니라 ‘온갖 연기를 피우며 시끄럽게 짖어대는 위선적인 개 한 마리에 불과하다.’ 국가가 없다면 끔찍한 전쟁과 혼동이 찾아올 것이 라고 흔히 겁을 준다. 그래서 우리가 국가에 반항하거나 국가에 의문을 표하는 것을 금한다. 국가 없는 사회가 원시부족들에게는 실재했다. 국가의 부재는 그들의 미개함이 아닌, 어떤 능력, 어떤 투쟁의 결과이다. 경제적 교환과 잉여의 축적을 막고, 추장의 군주로서의 전환을 막는 원시사회의 다양한 장치들이 국가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막는다. 이런 사회는 단순히 ‘국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대항한 사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갚기 위해서 죽었다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가 모두 구원받았다는 복음(福音)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다’는 화음(禍音)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최대 선물을 안긴 이는 인류를 최대의 빚쟁이,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빚을 안기고는 그것의 완전 상환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신의 술책이다. 채권자인 신은 채무자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창안해냈다. 그래서 인류는 신에게 영원히 빚진 자로서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자본의 술책이 이런 신의 술책을 닮았다는 사실이다. 자본의 술책은 세계를 언제나 증대하는 빚 속에 빠뜨리는 동시에 빚이 청산되지 않도록, 그 어떤 것과도 교환될 수 없도록 하면서 빚의 상환에 전념하게 만드는 데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을 알고 사랑하는 데는 아무런 계시도, 아무런 기적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 기적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때 그 사람의 무지와 무능을 본 것이다. 기적이란 자연 질서가 어긋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일 텐데, 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질서를 깨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저 하늘에 별이 그대로 반짝이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당신 얼굴이 빨갛게 되는 것, 즉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신적이며, 충분히 경이롭고, 충분히 사랑스럽다.

신의 행복에 도전한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불경한 사람은 신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라, 신들에게 대중의 견해를 덮어씌우는 사람이다.” 선한 사람을 축복하고 악한 사람을 벌한다는 생각은 인간적인 선악의 잣대로 신의 행동을 구속하는 짓이다.

벤야민은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도약했다.’ 그는 현재와 지금이라는 시간을 구분했다. 과거로 도약하는 지금, 무덤을 파헤치는 지금, 이러한 우리 실천이 우리가 현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한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딴 미래가 존재할 수 있다. 미래는 과거에 있으며, 그 과거는 열려있다. 그래서 과거로 도약은 현재와는 다른 현재, 즉 다른 미래를 갖게 한다.

표상[철학], 재현[예술], 대의[정치]를 뜻하는 representation은 실존에 개입하는 어떤 이중작용을 가리킨다. ‘현존하는 것(present)을 다시(re-) 나타낸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사과라고 부를 때 그 사물은 그 자체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사과’라는 말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권력이 작동할 여지가 여기서 생긴다. 이 재현 과정에서 권력이 개입한다. 실존하는 것은 표상된 것이라는 말을 뒤집으면 표상되지 않으면 실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국회의원들이 대의 하지 않는 국민 뜻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미숙함. 그녀의 진정성에 대한 그의 독단적인 상상. 그것이 그가 그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자연을 대하는 철학자의 미숙함도 마찬가지다. 현상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한 상상.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현상의 다양한 생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가면이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옷을 벗기면 그녀의 참된 속살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것. 그런 한에서 남성은, 철학자는 어리석다. 심오한 본질? 가려진 진정성? 그런 것은 없다. 단지 그것에 대한 남성과 철학자의 상상만이 있을 뿐이다. 표면이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본질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표면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심오했기 때문에 표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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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8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같이 ‘도덕’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상황에 니버의 책을 읽어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눈길을 가게 되니까 자꾸 미루는 중입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의 글을 읽으니까 니버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7-02-28 19:03   좋아요 0 | URL
제 기준으로 보면 <도덕적 인간 ~> 번역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냥 참고하세요.^^

포스트잇 2017-02-28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이 추천했던 책이네요.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사실 이런 책은 박근혜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으련만..

북다이제스터 2017-02-28 19:0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유시민 작가가 추천하여 읽게 된 책입니다.^^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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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이 목표인 사람 중 저자처럼 호기로운 사람을 본 적 없다. 조금 무모하다는 느낌조차 든다. 짧은 인생을 사는 한 개인이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알고 말겠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쓴 54살 당시 이미 3만 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저자 설명처럼 그림책 보던 나이 이후 평생 이틀에 한 권꼴로 새로운 책을 읽은 분량이다. 저자의 다독 이유는 명확하다. 의식 있는 삶을 사는 의미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상적 행동이란 대부분 (의식하지 않는) 자동화된 부분에 의해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이 자신 행동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모니터하여 결과를 남기는 것은 아주 미미한 부분입니다. 지적 욕구 수준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자동화된 삶에 만족하여 곧 학습에 대한 의욕을 잃습니다. 오직 여러 가지 육체적 쾌락을 즐기거나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TV를 보면서 실없이 웃으며 살아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근데 중요한 점은 “인간은 자동화된 행동에 대해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팔과 다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나중에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켜 의식화된 행위를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그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남습니다. 인간의 정신, 인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이 가진 과거에 대한 기억 총체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접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 기억의 총체, 경험의 총체입니다. 자동화된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과 의식 내면은 텅 빈 채 단지 그날그날 행위만이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에게 남겨진 본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인간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명석한 정신 상태로 책 읽을 날들이 본인 생애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염려하며, 두 가지 독서 방향성을 수립하여 실천하고 있다. 먼저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다고 밝힌다. “논픽션 서적을 탐독하면서 문학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학창 시절 왜 그렇게 쓸데없는 책을 읽는 데 열중하였는지 도리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독서 방향성은 고전을 읽지 않는 점이다. “독서론을 말할 때 무엇보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견해에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고전이라고 하면 “대개 톨스토이라든가 도스토옙스키 등 19세기 전형적인 문학이 주류를 이룹니다. 심한 경우 로맹 롤랑까지 고전 범주에 넣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칸트나 헤겔에 의해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성립된 저 난해한 사변 철학 역시,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18~19세기 도서가 과연 인류에게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출판물인지는,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 정도 시간 속에서 검증받고 후세에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나 헤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책은 역사 검증을 거치면서 결국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서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읽어 보면 다소 재미있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런 난해한 책을 전부 읽으려는 사람은 지금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자는 진짜 고전이라 할만한 책은 실려 있는 내용이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경우인데, 잘 읽어보면 시시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플라톤 저서를 읽으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저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가 토론 대상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소재로 활용되기에 적절한 책입니다. 그런 책만이 결국 진정한 의미의 고전으로 살아남게 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저자가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 책은 “인간 지의 총체가 걸어온 계통수” 끝에 있는 최신 도서다. “고전에는 인류의 지가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 있을 때 탄생한 작품만이 포함됩니다. 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과거 지의 총체라는 것은 현대의 지와 직접 관련된 주류만 선별하여 그것에 대한 최신 보고서를 읽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무의미하게 고전만을 고집하게 되면 현대의 지와 직접 관련된 주류를 간과할 우려가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덧붙인다. “오히려 진정한 과거 지에 관한 총체는 언제나 최신 보고서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과거 지의 총체를 알고자 한다면 결코 고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며, 또한, 고전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3만 권을 읽은 다독가의 이런 주장은 평소 문학과 고전을 거의 읽지 않는 내게 상당히 위로가 된다. 하지만 저자 주장이 과연 맞을까, 라는 의문도 든다. 저자는 이 책을 쓴 후 어느덧 세월이 흘러 현재 70대 중반이 되었다. 저자 과거 추세라면 현재 추가 만권을 읽었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책 만권을 더 읽은 후 생을 마감할 때 그가 진정 의미 있고 기억에 남는 책을 되뇐다면, 과연 최첨단 ‘지식’ 관련한 책일지 궁금하다. 혹시 본인 감성을 풍요롭게 했던 ‘고전’ 문학작품이나 깨달음을 준 철학책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






문제점에 대해 조사를 거듭해 가면서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머리를 짜내다 보면 적절하고 좋은 표현이 떠오르게 됩니다. 발견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해서, 저조차도 글을 쓰는 도중에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장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만들어 보고 있을 때는 아직도 매우 혼돈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구체적인 문장을 여러 가지 조합하다 보면, 불현듯 ‘아, 그렇지‘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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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6-12-12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지 않는다니 상당히 특이한 관점이군요. 재미있는 리뷰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12 19:3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주장 첨이라서 당혹스럽습니다. ^^

cyrus 2016-12-12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을 선호하지만, 문학 소설을 읽지 말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12 19:33   좋아요 1 | URL
네 짐작했습니다. 저자의 책 사랑 읽으며 싸이러스 님 떠 올렸습니다. ㅎ^^

cyrus 2016-12-12 22:07   좋아요 1 | URL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독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자 롤 모델이 다치바나 다카시거든요. 그 사람을 좋아할수록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점을 보지 못하거나 일부러 외면하면 그건 잘못된 애정이죠. 박사모처럼 행동하는 것은 곤란해요. ^^

AgalmA 2016-12-12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논리모순입니다.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이 과거 지의 총체로서 당시 최첨단이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군요. 현재의 최첨단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오류들이 드러나 계속 수정 보완되고 있는 역학은 저자의 생각에서 빠져 있어 실망... 우리는 짧은 시간을 살기에 인간의 여러 기록을 살피며 과거의 지와 현재의 지를 끊임없이 연결 종합해 최선의 모색을 할 뿐입니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신화를 다시 불러와 각성을 촉구했듯이, 우리는 무수히 놓치는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요.
북다이제스터님 요즘 리뷰 읽으며 저는 계속 ˝실망˝을 연발하고 있네요;;; 북다이제스터님께 실망이란 소린 아니고.

북다이제스터 2016-12-12 19:34   좋아요 1 | URL
인생 사는데 정답 없듯이 독서에도 정답 없다는 생각입니다. ^^

yureka01 2016-12-12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기야 당대에 나온 현재의 책조차도 다 보기도 어려운 마당에..책은 끝이 없을듯요.

북다이제스터 2016-12-12 19:35   좋아요 0 | URL
네, 끝없는 책 쏟아짐에 나름 독서법은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

2016-12-14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5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5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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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문한다. “늘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을, 이번에도 나만 늦게 깨우친 것일까?”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책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책을 쓴 사람과 그 책을 이미 읽은 사람들 바로 다음에 내가 깨닫는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어서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성을 느껴서 하는 공부”라고 밝힌다. 내가 내 리뷰 블로그 이름을 궁리할 때 품었던 비슷한 생각이다. 내게 책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책 읽기 전후 생각이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저자가 한 권의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나라 IMF 상황을 조금 달리 판단했다. 당시 국민이 환란을 정부나 재벌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들에게 분노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내 탓이오"라고 외치며 ‘금 모으기 운동’에 열중한 것은 국민이 “슬기로웠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보았다. “다시 말해 정부와 재벌을 과녁으로 환란의 분명한 책임을 격렬히 추궁하면, 국민은 ‘나라가 깨진다’고 느꼈던 것”이다. 사실 장정일처럼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국민이 정부에 분노하지 않는 해괴한 상황에 대해 논리를 억지로 끼어 맞추기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을 해야 했을 것이다.

 

 

저자는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저자가 “희망적으로 보았던 ‘내 탓이오!’ 현상에 대해 슬기라고 표현한 것을 고미숙은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것은 슬기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자동 기술에 포박된 꼭두각시 행렬이었다고! 그렇다, 세계가 놀랐던 것은 금 모으기 운동 자체가 아니라, 우리들의 민족주의였을 것이다.”

 

 

그럼, 이번엔 내가 <장정일의 공부>로 깨달은 것이다. 우리나라 친일청산을 ‘친일’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해결해 보자고 소개한 내용이다. 사실 난 이 문제를 조금도 다르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일본에 협력했다는 것은 “민족주의라는 잣대로만 볼 때는 친일이고 매국노지만 근대성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는 다른 차원을 가진다.” “해방 정국에서 친일 인적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은 민족주의가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 협력한 부류(친일파)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 참여했던 부류(전범)는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협소한 잣대에 얽매여 친일파의 행적만을 문제 삼을 때, 우리가 만주나 태평양 도서에서 저질렀던 만행은 청산할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 중국군을 토벌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가 아니라 남태평양의 팔라우 섬에서 미군에게 잡혔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그는 많은 한국계 일본군 장교들처럼 전범으로 처형됐을 공산이 크다.” “반복하건대 우리가 친일을 단죄하는 것은 민족주의 잣대다. 그 잣대가 무의식중에 제국주의 전범을 보호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라는 빗장을 풀고, 우리 손으로 전범을 규정하는 것에서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먼저 “우리 스스로 한국인 전범자를 탄핵함으로써 아직도 자신의 전쟁 죄과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압박을 행사하고, 나아가 일본 천황제 청산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일본에 협력했는지가 모호한 사람들에게 다른 가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전범을 제외하고 나면, 일본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자들이 남는다. 그들을 민족주의 시각에서 단죄하지 않고, 인간의 기본권이라든지 다른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민족이 기준이 되는 한, 기본권 같은 객관적 기준이 제시될 수 없어 애초에 (친일) 개념의 모호함을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일제의 행정 조직이나 금융 조합과 같은 공서에서 근무했다고 해서 친일분자라고 몰지 말고, 고문과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범한 자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장정일의 공부>에서 소개하는 수십 권의 책 중 읽고 싶은 것이 많았다. 소개한 책을 한 권씩 차근히 공부하겠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 콩도르셰

근대 여성해방과 여성에 대한 교육은 우리가 오해하듯이 인권 차원이나 평등 개념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국민으로 동원(호명)하기 위한 필요에서 추진되었다. 국가가 이용 가능한 인적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자들에게 짐 지워진 봉건적 굴레를 벗겨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성해방이란 것은 여성에게 성적 주체성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모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다시 한 번 탈성화(脫性化)시킨 것이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한류 열풍의 상당 부분이 한국 문화의 ‘지체’ 탓에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는 한국 대중문화보다 너무 앞서 나간 탓에 중국인들에게 현실감을 주지 못하는 데 반해, 지체가 심한 한국 대중문화는 중국보다 아주 약간 빠르거나 거의 동시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보다는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에 통할 가능성이 높다.

한 가지 알고 있는 게 있어서 알려 주마. 인간 뇌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다 바보라는 것. 아니, 현대 과학은 뇌에 대해 겨우 2퍼센트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뇌에 대해서는 어떤 멍청한 말을 해도 다 옳다는 것이다!

(개인) 기호나 취향은 물론 모든 예술양식은 계급과 계급 간의 주도권 싸움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바로크 음악은 일단 곡이 시작되면 템포의 갑작스런 변화나 현저한 차이 없이 시종일관 규칙적인 속도로 진행된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교회와 봉건적 위계질서, 절대 군주와 같이 무한한 신의 섭리로 질서 정연하게 유지되는 사회체계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부르주아 사회가 성장하면서 개인주의적인 특성과 개성이 부각되면서 멜로디가 솟았다. 실내악 발전이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능력과 상응하며, 현악4중주의 탄생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 계급의 사적인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부르주아는 오페라 부파(희극)보다 세리아(비극)을 더 선호했다. 영웅이나 높은 신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세리아는 당대 상류계급의 가치와 미덕을 나타내 주었으나, 부파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촌극으로 여겨졌다.

민주주의란 더도 덜도 아닌, 책을 읽는 능력이다. 책을 읽는 능력의 저하는 민주주의가 태어나고 자란 요람을 파괴하는 일이다. – 모리스 버만

나치의 유대인, 집시, 거지, 부랑자, 게름뱅이, 방탕아 등에 대한 멸절 정책은 서구의 ‘진보’ 사상에 내재한 병리에서 연유한다. 사회를 규범화하고 정상화하겠는 근대성의 병리로써 사회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나치가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사회는 능력과 노동 의지를 가진 자들만이 정상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고, 일탈과 혼란을 야기하는 자들은 사회적으로 불필요했다. 노동과 생산에 쓸모없다고 판명된 사람들은 수용소에 격리되었고 안락사를 선고받았으며, 종전(終戰)까지 20만 내지 35만명이 불임시술을 받았다. 노동 대중은 상급에게 도전하거나 작업 속도를 늦추거나 병가를 자주 얻을 경우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노동운동을 폭력적으로 불법화한 나치나, 법률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해서든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현재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오니즘 운동은 나치와 적극적으로 결탁했다. 시오니즘 지도자들은 아이히만 같은 나치 친위대의 고위 인사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초대하여 나치의 지지를 끌어냈다. 박해받고 있던 유럽의 유태인들을 돕기 위해 영국과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려고 했을 때 시오니스트들은 조직으로 그 법안을 저지했다. 구조 법안이 팔레스타인의 식민화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유태인들을 구해 봤자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할 것이며, 그렇다면 구출 활동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려는 자신들 계획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역사를 구성해 내는 일은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며, 민족주의적인 역사 서술과 역사학의 초점은 항상 국민이다. 이 말은 왜 모든 국정(또는 검정) 교과서가 역사 왜곡일 수밖에 없는가를 웅변한다. 근대 국민국가가 파열되고 변화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역사학이 가능하다.

대학의 자유와 자율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이념을 비판한 하이데거는 대학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호기심에 따라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명백한 자각에 입각하여 학문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 독일 대학은 국가에 종속되고 말았으며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독일 대학의 자멸을 초래했다.

현대의 국가는 다국적기업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서비스 기관’이면서 다국적기업 활동을 법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로펌’에 불과해졌다. 개발 국가나 주변부 국가의 정부 경우에는 철거 ‘용역(깡패) 회사’가 되어 다국적 기업가들의 활동을 지켜 주는 합법적인 무장력을 제공한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는 실질적인 의회가 된 지 오래다. 국가는 대기업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존재하며, 국가의 개입으로 다국적기업이 커다란 혜택을 보기 위해 존재한다. 대통령의 일반적인 역할이 ‘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하는 이런 체계를 촘스키는 연대 국가 자본주의(alliance state capitalism) 또는 기업 중상주의(corporate mercantilism)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다국적기업과 국가(정부) 사이의 야합이 깊게 이루어지는 곳이 최첨단 테크놀로지 산업이다 최초의 연국 개발에는 대체로 공공 자금이 대대적으로 투자되고, 그런 후에는 기업의 과점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기술이 군에서 개발된 후에 개인 기업으로 이전된다. 공공 분야의 창의적 발상과 공공 자금으로 개발된 모든 것은 당연히 공공 재산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민간 기업에 양도된다.

정부가 국민의 정신을 통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대중을 민주주의의 참여자에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제나 얌전하게 있어야 할 대중, 예컨대 여성과 젊은이, 소수 민족을 포함한 전 국민이 정치 토론에 끼어들려고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대중이 온순하고 무관심하게 존재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는 국민의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는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비해 미국과 영국에서 홍보 산업이 월등히 발전하게 되었다. 선전, 선동에 능할 것 같은 전체주의 체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그 수범과 목표가 뻔히 읽힌다.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무력을 사용해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 체제는 선전을 비롯한 온갖 분야에서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이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대중 이해를 왜곡시키고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정치심리학적 해석은 현실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면서 그럴듯한 변명 거리만 만들어 준다. 정치 행동 그 자체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결국은 정치적 무지와 무관심을 양산하게 된다. 게다가 심리학을 정치 지도자나 그들의 행동에 잘못 적용하면, 중립적인 학문(정신분석)을 가장한 교묘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되기 십상이다.

흔히 봉건 시대에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군주 전제 정치 형태가 나타난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프랑스 루이 14세(1638~1715),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1712~1786),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리지아 여왕(1717~1780), 러시아 표트르(1672~1725)와 에카테리나 여왕(1729~1796)이 그 예다.

전체주의(독재)를 경험한 모든 국가에서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가진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은, 독재자에 대한 대중 동의가 폭력이나 세뇌에 의해 강제적, 일방적으로 얻어진 게 아니라 시민사회의 일상과 대중의 심성 속에 전체주의의 가치가 성공적으로 이식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20세기 독재가 중세의 왕권 통치와 크게 다른 점은 인민의 자발적인 지지와 동의를 이끌어 내려는 합리적인 수단과 통치자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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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28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분명히 읽은 거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ㅜㄷᆞ

북다이제스터 2016-09-28 21:42   좋아요 1 | URL
알고 있습니다. ㅎ
10여년 전에 남기신 리뷰 읽어 보았습니다. ㅎ
붉은돼지 님께서 기억하신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6-09-28 22:08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10여년 전에도 알라딘에 계셨던건가요? 살아있는 화석이시군요! 꾸준함 존경스럽습니다^^

2016-09-29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9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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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가 침엽수 같았다면,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는 녹황색 백합나무나 연분홍 벚나무 아래에서 봄날 햇살을 받는 느낌이다. 사회비판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정혜윤의 글에서는 좀 더 따뜻함과 폭넓음이 느껴졌다. 책은 묻고답하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물음 #1.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일상에서 '지루해'라는 말 한마디 안에 돈과 성공만을 최고 가치로 강요하는 사회 모습과 거기에 굴복하고 마는 인간이 겪는 마음의 황량함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서 살아가는 도리밖에 없겠지.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것만으로도 힘들어, 뭐 즐거운 일이 있겠어'라고 되네이게 하는 그런 패배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하나의 흥미에서 다른 흥미로 끝없이 관심사를 옮겨 가기만 하는 그런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나날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것이 목적인 시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목적인 시간, 삶에 문제가 있어도 문제를 잊어버리는 것이 목적인 시간들로 촘촘히 일정표를 짠다면 우리 삶도 비극이자 코미디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요?"


"돈을 벌지 못해도 충분히 휴식하지 못해도 '자기 자신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물음 #2.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자신이 능력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소외'에 대해 말해 보고 싶습니다. 소외된 개인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원해서 그것을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그건 자긍심을 갖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 한 인간으로 기쁘게 사는 것과 가장 멀어지는 길입니다."


"자기가 능력없다고 자기를 무시하는 인간은 속으로 남도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너도 별수 없는 인간이잖아'란 말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이런 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이 말에서 전 생애에 걸친 변명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물음 #3.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우리는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기는커녕 몇 년 뒤에 꼭 '필요 없는' 사람의 목록에 오를 가능성이 더 높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공동체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은 '너는 너, 나는 나'라고 주장하는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 혼자서 해결하라, 네 힘으로 스스로 돌봐라'라는 말을 넘치도록 듣고 삽니다. 이제 연인들은 서로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헤어집니다. 어떻게 서로 힘이 될까 생각하기에 우린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책은 우리에게 대놓고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책은 자꾸 자신을 만나게 합니다."


물음 #4. 책은 쓸모가 있나요?
책의 쓸모요? 인간 삶 자체도 "이유가 없는데, 무엇을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자기 삶을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이상"한데, 책의 쓸모를 생각하세요?


"우리 자체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삶을 어떤 결과를 내느냐 마느냐 하는 기능으로 축소"하는 것 입니다. 예전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차지했던 자리가 '삶에 대한 공포'가 차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린 스스로 남들보다 쓸모 있고 싶어 합니다. 점점 삶에 대해 방어적이고 계산적이 되고 경쟁적이 됩니다. 순종적이 되고 안정과 확실한 것을 추구합니다. 안주하게 됩니다.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됩니다."


물음 #5.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책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는 세상과 이웃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때만이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물음 #6.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르트르의 '고매성의 협약'이란 말입니다. 고매성의 협약은 상대방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내고 최고의 기대를 하는 겁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최고로 잘 읽을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독자는 작품 속에서 최고의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것 입니다."


"책은 우리가 예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 하지만 아직도 확실히 알 수 없는 것, 언젠가 알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해 줍니다." 그런 책의 힘에 기대는 것 입니다. "책에 담긴 힘을 빌려 자신 마음에 깃든 자신에게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 입니다. 뭔가에 의지해서 애쓰고, 어렵게 알아내고, 그리고 그 가치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면, 책을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물음 #7.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우린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 문제 해결은 각자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남과 힘을 합친다는 생각은 누구라도 하기 어렵습니다. 고통을 공론화"하는 책을 읽으세요. "공론화의 이유는 힘을 합치기 위해서 입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선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관심과 선의가 필요하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선 다른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같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 그러한 고통의 정체를 꿰뚫어 본 책을 읽으세요.


물음 #8. 비밀 질문
책을 읽는 저만의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도, 그리고 제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영혼도 이렇게 제 혈관 어딘가에 흐르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을 지금 당장은 제가 불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 글들이 '네, 저 여기 있어요'하고 나오게 해 주십시오." 아멘.


"가장 콤플렉스가 강한 인간은 주어진 것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가장 냉소적인 사람은 인간 힘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냉소적인 인간이 된 것은 냉소적인 인간을 낳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은 정말 지루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삶 자체가 지루한 사람도 존재합니다. 지루하단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성공이나 이익 말고는 추구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이 책에 대한 내 리뷰 평가 별점은 만점이 아닌데, 순전히 내 문제다. 저자는 수십 권의 소설 위주로 책을 소개하는데, 읽고 싶은 책이 단 한권도 없다. 언제 난 소설에 가까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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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04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제가 올린 페이퍼 속 생각과 겹치는 게 많네요. 자립과 유대에 대해서.
그리스인 조르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겐 방드르디가 한 수 위로 보였습니다. 말이 아니라 미러링(좋은 뜻에서)으로 로빈슨을 깨닫게 하는데 캬~
글쓰기 실력은 날로 향상되시는데, 소설 읽기 문제는 여전하셔서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9-04 18:52   좋아요 0 | URL
프라이데이가 방드르디인거 첨 알았습니다. ㅋ <로빈슨 크루소>가 그런 함의가 많은지도 첨 알았습니다. 곧 만화 개봉하던데 봐야겠습니다. ^^

AgalmA 2016-09-04 18:59   좋아요 1 | URL
프라이데이를 프랑스어로 하면 방드르디^^ 미셸 투르니에가 디포 <로빈슨 크루소>의 한계를 프랑스 지성인으로서 재구성한 셈~
투르니에가 철학하려다 잘 안 되어서 문학으로 투신한 게 더 잘된 일인지도ㅎ
존 쿳시는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또다르게 이야기하기도 했죠.
해석이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요^^

소설은 잘 안 보시면서 영화쪽은 애정하시니 차별입니다!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9-04 19:01   좋아요 1 | URL
네 해석도 다양하지만, 로빈슨 크루소 그 책 자체의 저작 의도도 몹시 나쁘고 아주 불손한 불량 서적이란 것도 최근 <상인이 왜 지배하는가> 읽고 알았습니다. 예전엔 좋아했던 책인데요. ^^

cyrus 2016-09-04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에 `능력`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똑똑한 사람이 독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책은 똑똑한 사람들만 읽는 거라는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북다이제스터 2016-09-04 18:53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책 종류가 워낙 다양하니 취향에 맞게 읽으면 될 듯 합니다. 이상은 제가 소설을 읽지 않는 변명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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