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솔직히 많이 놀랐다. 그의 이전 모든 작품을 보았고, 개인적으로 그를 조금은 알고 있지만, 아직 그 상을 수상할 정도로 충분히 역량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나라 영화 산업 10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나 관련 단체에서 좀 심하게 로비를 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영화 <기생충>을 보니,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생충>과 같이 자본주의 문제점을 다루는 영화들은 기본적인 흔한 코드가 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가 그 코드를 따랐다. 계급 대립이 있고, 상류계급이 하층계급을 착취하며, 종국에는 혁명으로 치닫는 것이다. <설국열차>는 원작이 있었기에 전형적인 코드를 벗어나기 어려웠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크게 실망했던 느낌이 기억난다. 그렇지만 이번 <기생충>은 그 코드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전형을 벗어났기에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제각기 자유롭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등장인물 엔딩 크래딧에는 소개되지 않은 주인공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나’와 ‘당신’이다. 당신과 나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사는 상류계급이나 반지하 집에 사는 하층계급에 속하지 않으면서, 그 중간 어정쩡한 집에 사는 우리나라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간계급일 가능성이 크다. <기생충>은 중간계급이 채워져야 완성되는 영화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계획’이다. 송강호, 실질적으로는 봉준호 감독은 계속해서 ‘계획’과 ‘무계획’이란 단어를 중간계급에게 던진다.

 

 

상류계급이나 하층계급 모두 현재 위치는 자신 계획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감독은 일깨운다. 사회에서 성공이나 실패 모두 본인 능력 혹은 비역량을 바탕으로 계획적으로 추진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의 현재 상태는 계획된 일이 아닌, 한마디로 그냥 ‘운’일 뿐이다. 물론 ‘운’은 우리 중간계급에도 적용된다. 우리 현재 상태도 계획된 것이 아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하여 경쟁에서 이기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감독은 중간계급을 일깨운다. 일단 이러한 인식 전환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영화 마지막에서 송강호의 아들 기우는 아버지를 위해 계획을 세운다. 대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부자가 되겠다는 계획인데, 하층계급이 그만큼 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관객들도 영화를 해피 엔딩이 아닌 새드 무비로 인식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기생충>은 일단 성공한 영화다. 중간계급이 기우에게 감정이입이 충분히 되었다면, 그 다음에 드는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럼 어떡하지?’ 아닐까. <기생충>은 혁명이 나오지 않는 혁명 영화다. 봉준호 최고…^^

 

 

“중산계급이 하층계급과 정치적으로 연대할 필요가 있고, 이런 연대야말로 중산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가장 효과적으로 얻어 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정치적 현안과 관련하여 중산계급은 대개 하층계급과 대립하는 상류계급 편을 들기 마련이다. 이유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보지 못하도록 중산계급 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상당 부문은 중산계급이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성공’, 즉 그저 진취적이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층계급의 가난은 꿈도 야망도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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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생충」을 보셨군요. 저도 봐야하는데... 이러다가 IPTV 로 볼 듯 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6-05 19:20   좋아요 1 | URL
요즘 엄청 바쁘시군요. ㅠㅠ
꼭 보셔야 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9-06-24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북다님 역시bbb

저도 <기생충> 재밌게 봤습니다. 그 중 ‘계획‘ 이라는 것에 감독의 어떤 의도가 숨어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북다님의 해석을 들으니 만족스럽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6-24 20:3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고양이라디오 님. ^^
나심 탈레브 좋아하시니 아마 공감 되신 것 같습니다. ^^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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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영화(책)는 우리 인생과 붙어 있다. 우리는 몸으로 영화(책)을 본다. 영화(책) 내용은 감독(작가)의 ‘연출(저작) 의도’가 아니라 관객(독자)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역할과 책임
사람들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생에서 ‘내 일을 했을 뿐’으로 정당화되는 일은 없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데, 이런 말은 인간을 혼자 살게 내버려 둔다. 이 말에 사람들은 깊게 상처받는다.


가족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부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과장이 아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도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남자 며느리가 웬 말이냐!’) 이처럼 가족은 정치경제적 영역인데도 자연적인 장소로 묘사된다(특히, 모성).
어떤 글이나 텍스트를 읽어도 가족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한지 정말 놀랍고, ‘그들의 무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랑의 본질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이다. 사랑은 시점이 개념을 좌우한다.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 혹은 ‘식었을 때’ 태도의 차이가 인간의 인격 기준이라 믿는다. 사람은 역사적 산물이다. 내 사랑도 특별하지 않다. (현재) 사랑은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 종교이자 산업이다.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계산,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의 상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본인이 매력적이고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남성 중심주의
남자의 삶에서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 몇 개월이 유일하다(여성들은 거의 평생 남성을 위해 자신을 조절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성의 또 다른 측면은, 남성이 여성의 친밀성 능력과 감정 노동을 착취한다는 점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남자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여자들이 자신이 지닌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


여성과 출산
‘여성이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성 출산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사실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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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5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늦었지만 메리 클스마스 되시고 앞으로 더 많은 소통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8-12-25 22:41   좋아요 1 | URL
항상 경쾌하신 분... 항상 좋은 기운을 많이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
북플에서 좋은 분 만나고 알게되어 반갑습니다. 남은 한 해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
 

 

 

 

 

 

 

 

 

 

 

 

 

 

 

“훌륭한 비평가는 모름지기 하나의 작품에서 복잡성과 그것이 독자에게 가져오는 힘을 보통 사람보다 더 강력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느끼고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몸 구석구석,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그것이 가져오는 힘을 생생하게 느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지적으로 우수하여야 하며, 본능적으로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재능도 갖추어야 한다.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기술도 터득해야만 한다. 그는 훌륭한 작품을 보면 거기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괴상한 정열도 타고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도덕적으로 대단히, 대단히, 용기 있고 또 정직해야만 한다.” - 이창국 <문학비평 이야기>

 

 

문학이나 영화 비평가의 덕목이 이것뿐일까? “보통 사람보다 더 강력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느끼고” 본능적으로 남이 보지 못하는 메타포를 발견하는 재능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이 책 저자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일부 젊은이들이 영화평을 쓰면서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이 베트남전이라는 공적 비극을 개인적 비극으로 축소시켰다고 간단하게 매도했는데, 이는 미국 영화의 메커니즘과 미국인들의 관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전쟁 책임과 같은 것은 아마도 정치학 같은 사회과학 영역이거나, 아니면 역사학 같은 인문과학 영역일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전쟁의 무책임함과 잔혹성과 부조리성 같은 것들이 어떻게 군대라는 집단 속에서, 그리고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개인’ 삶과 인간성과 세계관을 파괴하는지 고발함으로써, 전쟁에 책임을 져야 되는 세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을 택한다.
간접적 비판은, 영화나 문학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에게, 그 어떤 직접적인 단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비판 수단이 된다. <플래툰>에 대한 그러한 식의 그릇된 비판은 비교적 관대한 국내사회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냉정한 국제무대에서는 자칫 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국제사회에서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작품들을 그런 시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상식 이하의 짓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집합적인 의식을 개인적인 문제로 바꾸는 경향을 갖고 있다. 집단적 갈등을 곧 개인적인 고뇌로 바꾸어 놓는다. 집단적인 경험이나 무의식을 사적인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미국인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은 예컨대 베트남전 참전 미군 병사들이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사실은 전장에서의 살상을 곡 개인적인 책임감과 죄의식으로 느끼는 그들 특유의 심리구조 때문이다.”

 

 

“한국에서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타워링> 같은 대재난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 무엇보다도 협동정신과 단결이 강조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 대재난 영화들은 단순한 집단의식보다는 역시 개인적인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부각시킨다. 특히 어떤 공동체를 다룰 때면 미국 영화들은 언제나 집단 속에서 개인 문제, 그리고 공공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등을 통해서 더 큰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므로 대재난도 한 집단이 공동적으로 겪는 것으로 묘사되기보다는 각기 다른 개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겪는 것으로 그려진다.
개인 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대재난 영화에서 중요한 또 하나 모티브는 ‘가정의 수호’다 사실 대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상당 수가 재난을 겪은 후 한때는 파경 위기를 맞았던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은 그들에게 가정을 되찾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영화 <엑소시스트>와 <가디언> <크러쉬>는 베이비시터의 손에 맡겨진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보호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아닌 위탁 보호자, 즉 베이비시터 손에 맡겨져 있고 그 보호자(가디언)은 오히려 아이들을 해치고 있다. 가정은 파괴되고 아이들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우리의 심각한 현실이다. 오늘날 직장 일에 쫓겨 아이들을 등안시하고 있는 현대인 가정에 커다란 경종을 울린다.”

 

 

저자는 “사람들이 흔히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숨겨진 의미나 새로운 시각을 찾아내 밝히려고”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지는 못 한다. 저자는 미국 영화에 지겹게 나타나는 자유주의나 가족애(愛)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못한다. 자유주의는 개인 고립의 이데올로기며, 가족애는 우리 공동체의식을 억제한다. 미국 영화는 끊임없이 개인들을 모래알처럼 분열시킨다.

 

 

가족은 사회 질서에 따라 사랑이 증감한다. 사회가 개인에게 충분한 안전을 보장하면, 개인은 가정에서 벗어나 공동체에서 성장한다. 반면 위협받는 개인에게 사회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면 가정이 보호처가 된다. 가족애를 강조하는 국가는 안전하지 못한 사회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에서는 현재의 잘못된 상황의 근원 혹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간 다음 다시 현재로 되돌아보는 과정 – 미셜 푸코가 ‘반기억’(counter-memory)이라고 부른 과정 –을 통해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전략이다.

소수 정예라는 의미의 영화 <어 퓨 굳 맨>은 자신 신념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으며 스스로 소수 정예라는 엘리트의식에 젖어 있는 잭 니콜슨이 나온다. 그의 눈에는 자신 허물은 보이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의 잘못과 무능력만이 보일 뿐이다. 진급이 빠른 것을 자신 능력과 효율성 때문이라고 믿고 자랑스러워한다. 소수 정예를 자랑하는 특권집단일수록 이탈자를 처단하는 내부 규율이 엄격한 법이다.

융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은 바로 문명화되기 전의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곧 유색인들과 원시인들에게서 자신들의 감추어진 모습(융의 용어로 ‘그림자’)을 발견하고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싫어하고 그들을 문명화시키려는 백인들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는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다른 진리들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것은 얼핏 진리의 부정으로 인한 혼란의 자초나 허위 인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제도와 권력에 의해 우리에게 절대적 진리로 강요되어 온 것들의 유효성을 심문하고, 그것들의 횡포를 거부하며, 허위로 규정되어 제외되어 온 다른 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의미할 뿐, 결코 일반적인 진리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혼란은 낡은 진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정보이론과 엔트로피 이론에 의하면, 오직 정보에 있어서만은 결핍보다 과잉이 좋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과잉은 언제나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는 결국 엔트로피를 초래한다. 하지만 정보는 통제나 조종보다는 차라리 정보의 방출과 넘침이 더 효과적으로 엔트로피를 억제한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이론은 곧 정보를 통제하려는 지배 권력의 의도를 무산시키고, 결국 새로운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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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7-03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록버스터나 전쟁영화가 가족애, 애국심 고취로 빠지지 않고 의미있는 화두로 끝맺음하기 쉽지 않은 거 같아요. 관객의 정서를 끌어내기에 그 감정선을 건드리는 게 가장 쉬운 것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최근 <군함도>도 거기서 못 벗어났던 거 같고. 흥행을 생각하면 애매한 모험은 피하기 마련이라...
베트남전 다뤘던 <디어 헌터> 인간의 일그러짐을 낱낱이 잘 드러내줬죠.

북다이제스터 2018-07-03 11:14   좋아요 1 | URL
<디어 헌터>도 무척 좋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베트남전 영화는 <야곱의 사다리> 였습니다. 안 보셨으면 강추...ㅎㅎ

AgalmA 2018-07-03 15:36   좋아요 1 | URL
야곱의 사다리 보려고 찜해 놓고 아직 못 봤는데 꼭 보겠습니다^^
 

 

 

 

 

 

 

 

 

 

 

 

 

 

 

지난 주말 충격적인 영화 <하이-라이즈>를 봤다. 영화 내용이 충격이 아니라, 관람객 대다수 후기가 충격이었다. 영화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라디오 육성을 들려주며 끝난다. “Capitalism is the only option, and ‘where there is state capitalism, there will never be political freedom.’” (국가 자본주의만 존재하며, 결코 정치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 친절하게 주제를 제시하는데, 관객 영화평은 이해 안 된다는 말 일색이다. “상징과 은유가 넘치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거 왜 때문이죠?” “더럽고 잔인하고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어리둥절…” “휴… 영화 즐겨보는 사람인데 하나도 모르겠다 뭐가 뭔지…” “설명이고 나발이고 집어치운 영화” “난해한 표현과 세계관, 복잡한 감정선을 가진 인물들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잠이 들었다.” “때깔은 좋지만, 내용이 텅 비어있어서 아쉽고 30분은 줄여도 될 듯. 지루해서 죽을 뻔”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관람 후기 일부는 맞다. 상징이 너무 많아 전부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많은 후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 여겨지지 않으며,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세계로 인식되게 한다”<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 라는 말이었다. 자본주의는 이제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이해하고자 들어도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특히 “바람직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정치 의제들을 부추기되, 스스로 이데올로기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라고 말하며, 억압적 의제들에 사람들이 수긍하게 한다.” 혹시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고 ‘대안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걱정되었다. 영화는 분명 끔찍한 지옥을 서사 하는데,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나라 예고편은 이 영화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수직 버전’이라고 홍보한다. 계급 대립 투쟁이란 측면에서는 맞지만, 큰 차이가 있다. <설국열차> 주인공은 하층계급이지만, <하이-라이즈> 주인공인 뇌 외과 의사 닥터 랭(톰 히들스턴)은 중산계급이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중산계급 시각에 초점 맞춘 영화로 보인다. <하이-라이즈> 등장인물의 계급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거주 층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높이 40층 건물 하이-라이즈의 설계자인 안토니 로열(제레미 아이언스)을 비롯한 상류계급은 펜트하우스에 산다. 주인공 닥터 랭은 25층, 하층계급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는 10층에 산다. 닥터 랭은 입주 후 상류계급과 어울리려 노력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과 냉대받은 후 마음의 상처를 입고 개인주의에 빠진다. 상류계급은 하층계급을 건물(자본주의)의 구조적 오류로 억압하는데, 와일더를 제외한 하층계급 누구도 상류계급에 저항하지 않는다. 닥터 랭 표현처럼 와일더만이 하이-라이즈 건물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사람이다. 와일더만이 상류계급 비밀을 파헤치려 노력하지만, 주인공 닥터 랭도 도움에 소극적이며 무관심을 보인다.

 

“중산계급이 하층계급과 정치적으로 연대할 필요가 있고, 이런 연대야말로 중산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가장 효과적으로 얻어 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정치적 현안과 관련하여 중산계급은 대개 하층계급과 대립하는 상류계급 편을 들기 마련이다. 이유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보지 못하도록 중산계급 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상당 부문은 중산계급이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성공’, 즉 그저 진취적이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층계급의 가난은 꿈도 야망도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 닥터 랭도 직장과 체육관만 정신없이 오가며, 주변 상황에 눈 감는다. “성공 의식은 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하이-라이즈 설계자 안토니 로열은 건물이 혼란과 파괴로 치닫자, 나름 문제 원인을 진단한다. “건물(자본주의)에 빠뜨린 게 있는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걸 집어넣은 거야.” “자본주의 주춧돌이 되는 것은 자유로운 지나친 개인주의다. 자유로운 지나친 개인주의는 홀로 서고자 하는 개인을 낭만화하여, 다른 사람의 요구, 심지어 다른 사람 생존보다 사리사욕을 우선시하며, ‘우리’ 대신 ‘나’에게만 줄곧 집중하여 사회 전체, 특히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과 대립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에도 크게 영향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환상까지 선사한다.” <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

 

관객 영화 후기 중 ‘광기와 파괴에 휩싸인 하이-라이즈 건물에서 사람들이 왜 나가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이 많았다. 영화 평론가조차 “이들은 오직 이 세상에 '하이-라이즈'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는데 영화에서 이 지점이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해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면, 이 영화는 일단 성공한 것이다. 감독 혹은 원작자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대처 전 영국 총리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자본주의만 존재하는 것처럼 군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가 명확하게 해명하길 바랄 정도로 자본주의의 억압적 의제와 자본주의에서 탈출하지 못 하는 이유를 평소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중산계급 닥터 랭은 상류계급의 펜트하우스에 갈 방법을 노트에 적어 하층계급 와일더에게 전달한다. 그곳에서 와일더는 건축 설계자를 만나지만, 우발적으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러자 바로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와일더를 칼로 난도질하며 영화는 끝난다,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을 남기며. 하층계급 힘으로만 자본주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 닥터 랭이 했듯이 중산계층이 하층계급과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처럼 현실도 상류계급 특권층에 도전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봉인된다. 영화 관람 후기 중 “대중성은 낮지만, 무척 현실적이다”란 표현이 가장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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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내일을 위한 시간 : 한정판 B타입
장 피에르 다르덴 외 감독, 마리옹 꼬띠아르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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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너무 현실적이라 더욱 애절하다. 영화 줄거리가 우리 삶과 같다. 내용을 조금만 바꾸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어느 날 금요일 오후 집에서 병가 중이던 여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회사 전화를 받는다. 그녀 병가 중 직원 투표로 그녀가 해고되었다는 통보다. 나머지 직원 16명은 그녀 희생 대가인 인건비 절감으로 천 유로의 보너스를 각각 받게 되었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남편 권유로 일단 사장을 직접 만나 주말 이후 월요일 재투표 승낙을 받아낸다. 투표 시 작업반장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녀 복직을 위해 찬성했던 사람이 2명, 반대로 보너스를 선택한 사람이 14명이었다고 회사 절친 중 한 명이 알려준다. 산드라는 직장과 월급이 절실하다. 절친과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그녀는 주말 내내 14명의 회사 동료 집을 방문하며, 자신이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월요일 투표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녀 표현에 의하면 ‘구걸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 주말 내내 동료 집과 거리를 헤매는 그녀 노력이 월요일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영화 끝까지 계속 지켜보게 한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그녀 병가(우울증 치료) 중 해고는 법적으로 문제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결국, 사장 결정과 직원 투표가 그녀 해고의 결정 기준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접근하는 문제 해결 방식은 재투표와 그에 따른 결과뿐이다. 큰 판은 사장이 그려 놓았는데, 그녀와 직장 동료는 그 판 안에서만 해결하려 든다. 사장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잘못된 구조 속에서 각 요소가 발버둥 치는 모양새다. 그러면서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고 서로 탓을 한다.

 

 

그녀가 회사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많이 듣던 질문이 “그래서 남들은 뭐라고 하던데?”이다. 자신 선택 이전 남들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하다. 가난한 그들에게 보너스 천 유로는 큰돈이다. 일 년 치 전기세와 수도세로 비교되어 있다. 본인들에게 큰돈이라 그녀 부탁을 거절해야 하지만, 우선 여론을 파악하는 것이다. 산드라와 그녀 남편은 개별 방문하여 인간적으로 호소하면 14명 중 절반 이상은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여론과 공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녀는 한 명씩 만나기 전 호의적 여론부터 형성해야 했다. 하긴, 감독이 여주인공 병을 우울증으로 설정한 것은 평소 그녀가 동료들과 별로 사이좋은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전 장치이다. 그녀는 병 때문에 평소 동료들과 아주 가깝지 않았고 호의적 여론 형성에 불리했다.

 

 

산드라와 동료 간 이간질한 것으로 묘사되는 작업반장은 영화 끝부분에만 잠시 나온다. 주인공은 반장을 만나자 따져 묻는다, 당신이 직원들에게 압력을 가했냐고. 반장은 딱 잡아뗀다. 작업반장 표정은 진심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은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 우리 현실도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애초 아군 적군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등장인물 중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주인공 남편이다. 회사 동료와 만나는 과정에서 거듭 절망하는 아내를 끝없이 극한으로 내몬다. 동료들이 냉혹하게 거절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더라도 이 일을 끝까지 완수하라고 아내를 달래며 설득한다. 착한 남편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중반 그녀는 동료 거절의 상처와 남편 설득에 절망하여 진정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까지 시도한다. 이쯤 해서 남편 역할 위치 선정의 해석이 필요하다. 구조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개인을 구조 개선에 안내하거나 함께하지 않고 끝없이 지엽적인 동료 문제로 해결하라고 몰아치는 남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남편은 주인공 눈을 멀게 한 한 사람이다. 그런 남편에게 덕분에 고맙다는 의미로 “우리 잘 싸웠지?”라는 말을 건네며, 영화는 끝난다. 남편에게 진정 고마워하는 표정과 말투다.

 

 

 

우리는 구조에 속고, 동료에 속는다. 적인 듯이 하는 사람도 적이 아닐 수 있으며,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한다고 나서는 사람도 잘못된 방향으로 고통이 될 수 있다.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열린 영화를 훌륭한 영화라고 하던데, 정말 이 영화 감독의 의도를 모르겠다. 국내 제목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 미래 지향적이지만, 원제는 <Two Days One Night>로 가치 중립적이다. 감독의 영화 주제 관련 의도인 듯하다. 하지만 주인공의 이런 어려운 경험으로 영화 이후 시간에서는 성격이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바뀌었으리라 추정하며,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좋게 해석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와 현실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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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2-24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봐야겠네요.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ㅎㅎ 북다이제스터님의 선견지명으로 보실때 제가 좋아할 영화겠죠?
우문인것같네요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2-24 07:45   좋아요 0 | URL
사회문제에 관심 많으시니 분명 좋아하실 영화입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6-09-30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덕분에 좋은 영화 즐겁게 관람했습니다^^ 저는 결말 부분이 너무 멋지고 좋았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9-30 18:36   좋아요 0 | URL
잼있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