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인디고유스북페어 강연에 뒤이은 질의응답이다. 사회자의 질문에 이어서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에 답했다. 지면에 정리된 원고를 그대로 옮기되 일부 수정했다. 



인간의 가능성을 찾아서


사회자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을 해주셨고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지평을 넓혀주시는 말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인간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 행사의 큰 주제이기도 한데요. 선생님이 쓰신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에 소개된 많은 작품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선한 인간, 악한 인간, 고뇌하는 인간, 슬퍼하고 고통받는 인간, 추악한 인간, 우스꽝스런 인간 등등. 저는 문학을 읽으면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여러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류는 지금껏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대규모 학살과 전쟁을 경험하였고, 한편으로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선한 개인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때로는 악랄하고 이기적이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삶을 내던지는 인간이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선한 의지와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문학을 읽는 행위가 우리를 인간답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현우   너무 큰 질문이긴 하죠. 인간이라는 가능성과 인간에 대한 신뢰가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할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볼테르가 이야기한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5분 만에 3만 명이 희생된 대참사였어요. 볼테르를 포함해서 당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앙인이건 아니건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는 거죠. 지진이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악인들만 처벌해야 하죠. 그런데 무차별적으로 땅이 다 갈라져 버리고 그냥 다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데, 주인공 캉디드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모든 것은 최선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라이프니츠적인 낙관주의를 계속 유지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런 낙관론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많이 읽히는 작품이 『캉디드』이기도 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란 책에서도 흥미로운 생각이 소개됩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상상을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유일신이면서 선신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선신과 악신이 존재하고 세계 역사는 두 신의 투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류가 배제하는 한 가지가 가능성은 유일신이 있고 그 신이 악신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다 이해가 돼요. 세계의 온갖 미스터리를 다 이해할 수 있죠. 지진이 왜 일어나는가, 악신이 있어서 그렇죠. 생각해볼 이유가 없어요. 근데 선신이 있다고 믿으면, 우리의 생각이 곡예를 해야 해요. 더 다른 뜻이 있는 거다, 섭리가 있는 거다,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작품에도 나옵니다. 신부가 등장하는데, 처음에 페스트가 퍼지니까 신의 심판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너희가 지은 죄가 크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페스트가 좀 더 진행되니까 순진무구한 어린이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희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부가 설교 도중에 입을 다물어요.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없다, 이렇게 해요. 굉장히 곤혹스럽습니다. 선신이라서 그렇습니다. 소설 속 신부가 믿는 신이 악신이었다면 '원래 짓궂으시잖아요'라고 이야기하면 모두 이해가 돼요. 맞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신에 대한 관념은 긴 인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들이 있습니다. 신석기 혁명 이후에 정착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이전하고 이후하고 공동생활의 규모가 현격하게 달라집니다. 수렵채집단계에서는 무리의 규모가 수십 명에서 많아야 150명 그 이상 넘어가질 않아요. 지금 영장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만 마리의 원숭이가 떼 지어 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전에 여러 군집이 나뉩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비대해지고, 그때 등장하게 된 것이 종교입니다. 이렇게 대규모로 함께 살면 예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급이 분화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수천, 수만 명씩 모여 살게 되면 안면 공동체가 될 수가 없어요. 현대 사회에는 이것이 일반적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요구된 게 종교입니다. 절대적인 존재자, 신을 가정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덜게 됩니다. 약간 모순적일 수도 있는데, 신을 믿음으로써 이웃사랑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많은 경험을 통해 신을 믿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상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온갖 종교전쟁은 그래서 일어났습니다.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명분이 돼서 죽이는 겁니다. 내가 인간적으로는 너랑 원수진 게 전혀 없지만 그런데 나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말하지요. 󰡒너는 신교를 믿고 나는 구교를 믿잖아󰡓, 종교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맨정신에 이웃을 죽일 수가 없어요. 신을 사랑해야 죽이는 겁니다. 즉, 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신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저는 그게 정치적 이념으로서 박애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혁명 이념이긴 한데 자유․평등․박애라는 이념이 있어요. 오늘 주제가 󰡒문학은 자유다󰡓이지만, 저는 이 말 세 가지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자유다, 문학은 평등이다, 문학은 박애다. 자유․평등․박애는 동시적인 것이 아니고 순차적인 이념이에요.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 이후에 시민 계급이 자유를 쟁취하게 됩니다. 근데 그게 민중계급으로까지 확산되어가는 것, 그게 평등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리가 보편화되는 것, 그게 박애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지막 단계에서 저항이 많아요. 난민문제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지요. 그들은 남인데, 어떻게 동등하게 대할 수 있냐는 것이에요.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국민들이나 챙겨요, 난민들 챙길 생각하지 말고"라는 장벽이 있어요. 


그런데 박애라고 하는 것은 그 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자세로 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그걸 극복하고 더 나아가는 것, 그게 박애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설 때,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설 때 세계가 탄생합니다. 저는 먼 훗날 인간이 더 진화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기다리기는 어렵고, 좀 빨리 뭔가를 바꿔보려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바뀌는 걸로 충분한가, 하는 것도 확실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해볼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 생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우리의 유전자 본성 안에 없어요. 우리가 따로 입력해야 하는 겁니다. 주입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은 나하고 가족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건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동물들도 그래요. 근데 나하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타인에게까지 도움을 주는 것,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해요. '의인'이라고 부르는 건 드물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데 다른 사람을 구하는 사람들이 높이 칭송받는 그런 게, 우리 DNA 안에 없어서 그래요. 그런 사례를 들을 때마다 혹시 그들의 판단에 착오가 생겼거나 아니면 실수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죠. 물론 흡혈박쥐들도 동료 박쥐들에게 자신이 먹은 피를 나눠주기도 합니다. 순번이 있지요. 가족이나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부터 나눠줍니다. 그런 본성을 우리도 갖고 있어요. 그런데 박쥐처럼 고정적 규모에서는 이게 가능한데 문제는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하고 전혀 낯선 사람들과 공존한다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자 한다거나 그들을 돕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 안에 없다고 봐야 합니다. 본성 안에 없으면 문화로 취득할 수밖에 없어요. 강제적으로 주입받아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래요. 


세계라는 것은 새로운 겁니다. 새로운 것이고 탄생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요. 지리상 발견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세계라는 걸 갖게 됩니다. 전혀 새로운 환경이고 새로운 조건입니다. 거기에 맞는 사고, 감정 이런 게 만들어져야 해요. 몸의 변화는 더디겠지만, 사고는 유연하게 변할 수 있어요. 그게 우리가 기대해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의 관행적인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 시대에 문학을 읽는 방법


사회자    지난 8월, 제주도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된 비자림로의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삼나무숲에서 마치 면도기로 민 듯 900여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도로확장 공사를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편리함과 경제발전을 위해서 자연을 훼손해온 지금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가 너무도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릴 때, 그 숲길과 숲에 살고 있었을 생명의 권리에 대해서, 그 숲길을 달리며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숲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새로운 가치와 문화가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문학은 언제나 가장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계를 끌어안고 세계의 문제를 말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학이 그 힘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시대의 문학은 그 사회에 어떠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 한 사회의 문화와 가치를 바꾸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현우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기준, 가치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합니다. 거기에 문학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하는데요. 제가 2015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내한했을 때 했던 질문이었어요.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여쭸더니 "성경도 인간을 바꾸지 못했다. 뭘 기대하느냐"라고 답하셨지요.(웃음) 그게 일단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대단히 타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집에 가면 다 기억 안 날 거예요, 아마. 망각기제들이 제대로 다 작동하기 때문에 보통 듣고 싶은 말만 우리는 듣고 기억하죠. 다시 말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은 우리 의식과는 매우 다르게 굉장히 급속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 다 갖고 있는 스마트폰이 발명된 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사용해요. 우리 몸이 변하는 건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근데 기술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속도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 간극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이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역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때 해야 해요.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몇 가지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세기에 감상주의 문학이 있었는데 인간의 감정을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것이 인권에 대한 관념을 갖게 했다고 평가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요? 관심법으로 아나요? 이게 감상주의 문학의 중요한 기여이기도 한데, 인물들이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게 문학의 중요한 역할이고, 분명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높이 평가할 순 있지만, 동시에 과대평가해선 안 됩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용소의 관료들이 저녁이면 클래식을 듣고, 괴테 시를 읽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사람을 죽였어요. 학살에 부역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교양인이었어요. 예술적 교양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예술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악행을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죠. 그러나 또 과소평가할 순 없어요.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확실한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 없어 안타까운데,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진 말자는 겁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버리진 말자는 것이구요. 만약 작품을 더 읽었더라면 환경 파괴, 나무들이 개발에 베어나가는 일은 좀 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기대를 걸어보는 겁니다. 그렇지만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의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희망을 버리진 말되 너무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거기까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문학을 사랑하기 위해서


청중    저는 문학과 교육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문학이 신념과 철학을 전달하는 매개체이자 세상의 시선을 담아내는 눈, 그 외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국어교육이 시간 내에 지문을 해부하는 걸 중점으로 두고 있어 큰 실망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많은 친구가 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이 어떻게 문학을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조언과 앞으로 우리나라의 문학 교육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현우   저도 작품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으니 문학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 불만은 다들 품고 있더라고요. 예민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못 견뎌 하는 수준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문학이라곤 거들떠보지 않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개선이나 변화를 시도해봐야 하는데 시간이 문제입니다. 오래 걸려요. 희생하는 셈 치고, 후배들, 후배들의 후배 정도에 가면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계속 애를 써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도나 교육에 대해서 빨리 포기해야 해요. 그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하나는 좀 희생하더라도 제도의 변화를 위해 애를 쓰는 것, 그것이 문학에 대한 사랑을 지킬 첫 번째 방법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딪치는 겁니다. 학교에서 뭐라 가르치든 간에 나는 다르게 읽겠어요, 하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자신을 잘 보존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조금만 참으면 잘 이뤄집니다. 중․고등학교는 특별히 애쓰지 않는 이상 6년이면 끝이 납니다. 그러면 자기 시간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 동안 문학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국어 선생님이 아무리 나무라더라도 상처받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다가 대학에 가서 자유로워진 다음에 그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됩니다. 시험문제는 그냥 그렇게 해줘요. 그런 걸 요구하니까 그렇게 해주는 거죠.(웃음) 시험문제와 자신의 신념을 일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스트레스를 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세계문학이어야 하는 이유


청중    세계문학을 통해서 세계시민의식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만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도약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사람마다 취향과 감정선이 다 다르듯이 문학의 묘미는 읽는 사람에게 달린 것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계문학이라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현대소설이나 현대의 시를 통해서 인간의, 혹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 아픔을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이나 보편이 정해진 게 아니고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세계문학의 정의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현우   당연히 문학을 보는 여러 관점이 있어요. 그리고 그 관점 간의 어떤 차이가 해소 가능한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깁니다. 말씀하셨듯이 복수의 문학관이 있기 때문이죠. 말씀드린 건 제가 보는 문학입니다. 제 견해를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렸다기보다는 어떤 요청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문학이 필요하다는 제 바람이고 주문입니다. 



어떤 문학 작품들은 별도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감동이나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견해에도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항상 의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생각하는데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예를 들어 파울루 코엘류의 『연금술사』라는 작품이 있어요. 저는 그런 작품을 세계문학하고는 다른 지구문학이라고 부르는데, 저 혼자 그렇게 불러요.(웃음) 지구문학은 전 지구적 문학시장에서 상품으로 널리 유통되는 문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가 그렇습니다. 그런 문학가들의 탄생 시기는 80년대 말부터예요. 그 이전에는 탄생할 수가 없어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 비로소 전 세계적인 문학시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구문학을 세계문학과 구별을 두는 건 세계문학으로서 역할에 미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문학이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줬기 때문에 많이 읽힌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왜 문제적으로 보느냐 하면 세계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갖게 하고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안 주기 때문이죠. 『연금술사』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런데 산티아고라는 양치기가 보물을 찾는 이야기에요. 그사이에 연인도 만나게 되는데 결말에 보물도 찾고 사랑도 찾고 그래요. 『인어공주』 같은 유명한 작품이 있잖아요? 그런 동화만 하더라도 다리를 얻기 위해서 목소리를 잃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현실은 냉정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연금술사』는 완벽한 판타지 세계에요. 간절히 바라면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다,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과 세계관이죠. 그런 시각으로 독자들을 현혹하고 감동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감동했다고 한다면 자기를 개조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자신에게 좀 냉정해야 해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다 좋은가요?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날것으로 보면 너무나 위험합니다.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도 있어요. 한편으론 이기적이고 가짜 만족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작가 밀란 쿤데라가 강조한 것이기도 한데, 인식적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시보다는 근대문학의 중심이 산문 소설이 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 재현하고 그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끔 해주는 것. 그런 점에서 여타 장르에 비해서 소설문학이 우월성을 갖고 있어요. 저는 정서나 감정도 중요하긴 하지만 인식적 깨달음이라는 게 중요하고 문학을 판단할 때 그런 부분을 많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서 과정은 고통이에요. 책장도 잘 안 넘어가고 잘 안 읽히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뭘 깨닫게, 인식하게 해줍니다. 우리를 너무 만족스럽게 하는 건 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겁니다. 쉽게 감동해선 안 됩니다. 


18.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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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18-09-2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후에 책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게 경계심을 가져야되고 문학에 대한 -도서선택- 책임의 무게가 무겁네요

anathema 2018-09-2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에 대한 인간의 비판은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신이고, 그 신의 더 다른 뜻은 없는거고, 섭리도 없는거고,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면 거짓이라는 그 오래된 주장을 또 사용하는것이지요.

two0sun 2018-09-2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문단이 가슴에 와서 얹히네요.
어쩌면
쉽게 편하게 만족해하고
정작 불만족스러워해야 할것엔 눈을 감아버리고
무엇이 감동인지도지도 모르면서(모른척하면서)
살고 싶었는지도.

한발한발 내딛을수록 고통인걸 알면서도 이젠 되돌아 갈수도 없는 길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저 주저앉지 않고 느리게라도 나아갈수 있길~~


김건우 2018-09-2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 되어버렸다고요. 다른 분야가 그렇게 되었듯이, 경계에 놓인 것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버렸습니다. 한때는 비극만이 예술이라 주장하던 시절도 있었고, 행렬이 ‘순수한‘ 수학이 될 것이라 믿던 사람도 있었어요. 누군가는 전기와 자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외치기도 했죠. 그러나, 그 모든 분야들은, 범주는 하나로 뭉쳐져서 거대한 혼돈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어떤 정의를 들고 나온다고 한들 그 반례를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간단한 것이 되었고, 이제는 모든 정의가 잘못된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세상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가지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싶습니다. 공장과 같은 곳에서 만들어내는 소설과 정식절차를 제대로 밟은 사람이 쓰는 소설은 사실 본질적인 곳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달에 부산 인디고유스북페어에서 '문학은 자유다'를 주제로 강연을 가졌는데, 그 강연과 질의응답이 정리돼 '인디고잉' 가을호에 실렸다. 일부 내용을 옮겨놓는다(약간 수정했다). 인디고잉은 부산의 인디고서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인문교양지이다.  



인디고잉(18년 가을호) 세계와 문학과 나


(...)

세계문학을 통해 문학의 책임과 관련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계문학'이라는 말에는 저작권자가 있습니다.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1827년의 괴테입니다. 통상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세계 각국 문학의 총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세계문학은 괴테 이전에도 있었어요. 괴테가 이야기한 세계문학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개념적으로 달라요. 괴테가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라는 말을 씁니다. , 존재하던 문학이 아닙니다. 이건 앞으로 도래할 문학이고 요청된 문학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괴테가 자세하게, 충분하게 얘기하진 않았어요. 이건 이제 화두로 던져진 거고 그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살을 붙이고 하는 일은 후대 몫으로 남겼습니다.

괴테가 말한 세계문학이란 말의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계문학이 세계 각지의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데, 가장 먼저 '세계'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논리론적으로 나 그다음에 우리 가족, 그다음에 지역, 국가 이런 식으로 확장되어 갑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게 그런 차원으로 가닿은 개별 국민문학입니다한국문학미국문. 일본문학, 프랑스문학 등이죠. 세계문학은 여기 없어요. 국가는 있지만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직 우리의 관심이나 시야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경험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전 세계가 폭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런 문제는 개별적인 국민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황사, 미세먼지 같은 것도 다 마찬가지죠. 전 지구적 문제입니다. 전 지구적 차원에 있는 세계적 문제들이 있어요.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야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필요한데, 이게 세계인이 되어야 해요. 한국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세계인, 혹은 세계시민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국민문학과 세계문학

국민문학을 가지고 세계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그걸 다루려면 다른 문학이 있어야 해요. 중간 단계에 있는 것도 있습니다. 국제문학(International Literatur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많이 쓰이는 개념은 아닌데 저는 많이 안 쓰이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국민문학(National Literature)이라는 말은 많이 쓰는 데 그것보다 시야를 더 확장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글로벌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준해서 인문학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문학이라는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대작을 대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연합군인 프랑스 군대 대략 육십만 정도가 러시아에 쳐들어왔었고 거기에 러시아인들이 맞서 싸우는 그런 내용입니다. 톨스토이는 그 전쟁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러시아인들이 프랑스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깨닫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작품을 국민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러시아국민문학입니다. 그런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국민문학은 춘향전같은 작품이 있겠지요.

이 작품들이 그 자체로 세계문학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민문학이 올바른 세계문학이라 공표하기는 어렵습니다. 조금 다른 층위이고, 뭔가 다른 요건이 더 충족되어. 근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수준이 다릅니다. 전작인 톰 소여의 모험에서 어떤 도약이 있어요. 톰 소여의 모험에서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두 사람의 인류애를 그리죠. 주인공인 헉핀은 모험을 하던 중 흑인 노예인 ''을 만나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나이로 보면 부자(父子)관계에요. 만약 짐이란 흑인이 백인이었다고 한다면 부자관계 비슷하게 됐을 거예요. 그런데 흑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격 없이, 동등한 관계로서 동료가 됩니다. 우정이 쌓이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짐이 도망간 노예였다는 겁니다. 소설의 배경 당시는 노예 해방 이전입니다. 도망 노예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소유물이에요. 헉핀은 그 주인에게 짐의 행방을 알려줘야 해요. 알려주지 않으면 범죄행위고 헉핀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요. 짐의 주인인 백인 아줌마를 잘 알기 때문에, 심지어 그 아줌마가 자기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짐의 소재를 알려주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헉핀이 굉장한 고민에 빠집니다. 짐과의 우정을 지킬 것인가 법을 따를 것인가 굉장히 고심하다가 마지막에 결단을 내리게 돼요. "그래 좋다, 지옥에 가겠다." 

지옥에 가겠다는 건 뭔가요, 짐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에 의하면 짐의 편에 선다는 것은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이고 속인 것이니, 지옥에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매장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지옥에 떨어지는, 큰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옥에 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목 때문에 이 작품이 세계문학이 됩니다. 짐과 헉핀의 뗏목은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세계라 하는 것은 나와 타자가 있어야 합니다. ''가 확장되는 게 아닙니다. 나의 확장으로서 가족, 우리로서 국가라는 공식처럼 항상 거기에는 반대편에 대립이 있어야 해요. 그런 외부가 없는 게 세계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짐이 만났는데 인종적인 타자예요. 신분상의 차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정을 통해서 하나가 돼요. 그럼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세계문학은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런 세계관이 우리에게 부족하죠이게 더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문화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 그게 문학의 과제입니다. 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거는 기대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만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면 없어져도 됩니다근대문학이 한때 대단한 역할을 했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문학에 대해서 더 기대하는 게 없다고 그 종말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어요하지만 그렇게 끝낼 것이 아니라근대문학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세계문학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세계문학의 징후들은 있어요몇 가지 표본들이 있고 또 시범들도 있습니다다만 그게 더 많아져야 되겠죠그것이 문학의 과제입니다. 

세계시대를 위한 문학

두 가지의 감각이 다 있어야 합니다.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 한국인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트럼프처럼 되는 겁니다. 인간의 지적능력은 너무나 많이 발전했습니다. 얼마 전에 태양탐사선도 보낼 만큼이죠. 그런데 인간의 도덕적 능력, 양심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지적능력에 걸맞을 정도로 성장해왔는가, 진화해왔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회의적입니다. 세계가 점점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제 초연결 시대라 그러죠, 점점 좁아지고 있어요. 점점 밀착되어있고 그래서 서로 가까워지다 보니까 서로 이제 영향을 너무 많이 주고받아요.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이제 기후문제까지도 주고받습니다. 근데 그런 현실에 다룰 수 있는 우리의 능력, 혹은 책임감은 그에 상응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 능력을 향상할 수 있을까요? 책이나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이란 문화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 몸이 진화하는 걸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체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 20만 년 정도 걸렸습니다. 과거의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 우리와 다른 것은 조금 못생겼다는 것 정도입니다. 큰 차이는 없어요. 그러니까 몸의 진화를 통해서 무엇바뀌어야 해요. 책을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의식을 바꾸는 것. 그게 유일한 선택지가 아닌가, 그런 인가 바뀌기를 기대하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화가 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은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할 만큼 굉장히 심각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은 종말의 시대라고 이야기해요. 지구가 이미 끝난 것 아닌가,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사 그런 비관론이 있다고 한들 여러분에게 권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책임의식,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민이 바로 세계문학의 도래와 연결이 될 것입니다.

18. 09. 25.

P.S. 이어지는 질의응답은 분량이 길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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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중 가장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새로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황인숙인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삼인)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고종석의 독자라면 '인숙낭자'를 기억할 텐데, 바로 절친인 황인숙 시인이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책으로 묶였다. 



"세상에 척진 것도 모난 것도 없는 '고양이 시인' 황인숙과 세상에 까탈스럽고 문제 많은 고종석은 동년배에 성별을 넘어선 삼십년지기다. 맨 무릎을 맞대고 앉은 채 뇌출혈 후유증 이야기와 담배 끊으라는 잔소리가 오가고, 어린 시절 소년잡지 이야기에 순간 그 시절로 함께 돌아가는 영락없는 절친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두 사람의 자잘한 일상과 관심사를 따라가다 보면 편안한 친구들의 평범한 수다를 듣는 것 같다."


밑줄긋기를 읽다 보니 그간에 뇌출혈로 큰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라 한다. 언젠가 들은 듯싶기도 하다. 알려진 대로 고종석은 트위터리언으로도 이름을 날렸고 많은 안티(적)를 만들기도 했다. 인숙 낭자의 질문과그에 답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황인숙: 윤필이는 네가 정치적 포부로 그리는 그림이 보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네가 펼치고자 하는 정치 프로그램이 획기적으로 가치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궁금해 했어. 자꾸 망상, 망상, 그러지 마. 그저 돈이 없어서 망상이 되고 만 빛나는 신념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 그때 진지하게 편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는 자꾸 농담으로 돌리려 했지…. 

너는 아마 트위터로 가장 크게 망한 사람일 거야. ‘망한’을 ‘망가진’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꽤 될 거야. 숱한 적을 만들고 친구도 여럿 잃었지. 트럼프도 망 트위터리언의 하나인데, 그에게는 지지 댓글도 많을 거야. 나는 네 트위터 글에 구십 분 동의했는데, 나 같은 사람도 적지 않을 거라고 짐작해. 그런데 네겐 악플만 벌떼처럼 따라다녔지. 그 차이는 트럼프에게는 있고 고종석에게는 없는 것, ‘권력’이 만든 거라고 생각해. 상처 많이 받았지? 


 

고종석: 상처를 아예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정도는 아닐 거야. 나는 소셜미디어에다 글을 쓸 때 논쟁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내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는 스타일이니까. 내가 그렇게 적을 많이 만든 것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직함 때문이기도 했어. 예컨대 이런 거야. 몇 년 전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였어. 나는 그 때 트위터에 ‘선생을 20년 이상 가둬놓은 파시스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선생의 책에서 배운 것은 거의 없다.’고 썼거든. 정확한 워딩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암튼 그런 요지의 글을 썼어. 그와 동시에 내 댓글창이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과 자칭 ‘좌파’들의 욕설로 난리가 났지.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후회하지 않아. 나는 신영복 선생의 책을 다 읽어봤는데, 그냥 세속의 지혜를 단편적으로 모아놓은 거야. 시인 류시화 씨의 번역서나 라즈니쉬의 책이 그렇듯. 사실 그 책들만 못하지. 신영복 선생에 대한 그 트윗 때문에, 당시에 경향신문 지면에 연재하던 〈고종석의 편지〉에서 신영복 선생 비판이 다루어지게 될까 봐 경향신문 편집진은 즉시 〈고종석의 편지〉를 중단해 버렸지. 사실 내가 그 비판을 예고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영복 선생께 보내는 편지를 탈고하기까지 했는데, 마감 직전에 경향이 나를 필자에서 자르더군.



아마도 못 부친 편지까지 포함해 <고종석의 편지>도 책으로 묶여 나오지 않을까 싶다. 황인숙 시인도 올해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시 '간발'을 포함한 새 시집을 나올 만한다. 검색해보니 <꽃사과 꽃이 피었다>(문학세계사)라는 시선집도 2013년에 나왔었다. 못 들어본 꽃소식이다. 뭐, 시집이 나온다고 내게 통지가 오는 건 아니니...


18.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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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닥 재미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의무감으로 읽는 책이 ‘인류세‘를 주제로 한 책들이다. 최근에 나온 건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이상북스).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이 부제. 올여름에 실감하기도 했고, 지구촌의 이상기후는 앞으로 상시화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미 접하고 있다. 극지방의 빙하가 심각하게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 시스템에 뭔가 근본적인 균열(변화)이 일어난 것인데 이를 가리키는 말이 ‘인류세‘다(인류세에 진입함으로써 5만년후에 도래할 예정이었던 빙하기가 13만년 뒤로 늦춰졌다고 한다). 재미없다고 방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인류세라는 말은 인간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라는 뜻으로 폭넓게 쓰이기도 하는데 <인류세>의 강점은 매우 엄밀하게 정의하면서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성찰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45억 년 된 지구에 현생인류가 등장해 살아온 지 20만 년이 지나 역사상 현 시점, 즉 ‘인류세’(Anthropocene)에 도달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암중모색하는 책이다.˝

인류세를 다룬 책은 가이아 빈스의 <인류세의 모험>(곰출판)이나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문학동네) 등이 나와있고 기후변화를 다룬 몇몇 책들도 관련서로 분류할 수 있다. 조금 딱딱하게 쓰이긴 했지만 해밀턴의 <인류세>가 기본 개념과 문제에 대한 압축적인 소개를 제공하고 있어서 출발점으로 유용한다(예상컨대 관련서는 계속 나올 것이다). 지구 시스템 학자들은 현재의 추이가 비가역적이라는 데 생각이 일치하지만, 향후 몇십년간의 인류의 선택이 그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그 책임을 떠안게 되는 시대다. 과연 그 책임을 제때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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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댁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가벼운 책을 하나 빼들었다. 이동중에나 잠시 카페에 들러 읽을까 해서인데, 책장에서 손에 집힌 책이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21세기북스)이다. 대학에서 ‘행복의 과학‘이라는 인기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는 저자의 행복학을 기대하게끔 하는 책. 30년간 이루어진 행복 분야의 연구를 갈무리하여 ˝굵직한 결론들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생존과 맞물려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과 줄다리기가 인간의 모습이라고 지적하면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경험이기에 의식이나 생각으로부터 분리시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의 일부만 행복과 연관되기에 생각을 바꿈으로써 행복해진다는 건 극히 제한적으로만 옳다. 착각에 가깝다는 것이다. 행복을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로 전환한 것은 타당하며 동의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저자의 서술이 정연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강의로서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책의 서술로는 비약과 공백이 많다. 게다가 이성과 의식, 본능과 감정 등의 개념을 별다른 정의 없이 혼용하고 있어서 독서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참지 못하고 이런 지적을 하게 만든 대목이다.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보다 중요한 원인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술사의 현란한 기우제 춤 때문에 비가 온다고 믿었다. 춤은 눈에 띄지만, 비의 원인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여러 번 읽었는데, 저자는 이성적 능력을 기우제 춤에 비유한 것으로 읽힌다. 옛사람들이 기우제 춤을 믿음으로써 비의 진짜 원인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이성적 능력을 신뢰한다면 행복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지. 나로서는 기우제 춤 같은 주술적 행위를 이성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도 특이하게 여겨지면서(그런 주술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반이성적 활동이 되는가?) 동시에 저자는 ‘이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를 행복이라고 해보자. 이 비가 언제, 왜 내리는지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습도나 풍향 같은 자연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술사의 춤이나 기우제 음식 같은 가시적인 것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단비(행복)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습도나 풍향)을 말해주는 것이 아마도 저자가 소개하려는 행복의 ‘과학‘인 듯싶다. 그런데 그 과학은 이성적 사고와 무관한 것인지. 이성적 사고를 주술사의 춤에 비유하면 과학은 대체 어떤 능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가. 가시적인 것에 현혹되어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했는데, 그때 행복은 가시적인 것인가, 비가시적인 것인가. 행복을 본다는 것은 볼 수 없는 것(보여질 수 없는 것)을 본다는 뜻인가.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나는 이런 비유(우회)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행복은 뇌의 문제이고 뇌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바로 주장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의 과학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뇌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뇌과학의 성과를 통해서 행복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는 것. 그런데 저자가 분리시키려고 하는 사고(생각)도 뇌의 활동이다. 이성 역시 뇌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을 ‘뇌=본능=동물‘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성을 그 대척점에 놓고 있는데 이는 무리한 단순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술사의 춤만 보고 있어서 저자의 논의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주장을 매끈하게 이해하는 독자들의 뇌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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