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번에 밀란 쿤데라의 '서사적 바람둥이'를 다룬 걸 고려해 이번엔 '돈 후안 텍스트'의 원조 격인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 후안>(을유문화사, 2010)을 골랐다. 이전에 두 차례 번역됐지만 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어서 최근 번듯하게 새로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기도 했다(한 가지 미스터리한 건 영역본까지 포함해서 이 티르소의 텍스트가 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본인지 헷갈린다). 내친 김에 바이런의 <돈 주안>까지 번역돼 나오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한겨레(10. 08. 28) 미래 저당잡힌 ‘사기꾼’ 돈 후안의 최후 

<소설의 발생>이란 저작으로 유명한 이언 와트의 유작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서양 문학사의 네 신화적 인물의 형상을 근대 개인주의의 시조로 조명하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파우스트와 돈키호테, 돈 후안과 함께 로빈슨 크루소가 그가 분석하는 네 인물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제외하면 모두 신화적 인물들로서 많은 작품군을 거느리고 있는데, 특히 돈 후안과 관련하여 와트는 17세기 스페인의 성직자 겸 극작가 티르소 데몰리나의 <돈 후안>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몰리에르의 <동 쥐앙>과 모차르트와 다 폰테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대중적으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조 격’ 작품은 티르소의 <돈 후안>이다.

 

작품명이 <돈 후안>이라고 줄여서 표기되지만 원제목은 좀 길다. 처음 번역됐을 때는 <세빌랴의 난봉꾼 돌부처에 맞아죽다>(1995)라고 의역된 제목이었고, 두번째 번역본은 <돈 후안-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2002)란 제목을 갖고 있었다. 모두 절판된 상태에서 나온 세번째 번역본은 <돈 후안-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2010·을유문화사)라고 읽어준다.

특이하게도 이 문학사적인 작품의 제목이 아직 고정돼 있지 않은데, 그래도 공통적인 건 원제의 ‘burlador’를 ‘난봉꾼’ 혹은 ‘유혹자’로 옮긴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 돈 후안의 화려한 여성편력과 유혹술을 고려하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와트에 따르면 이 단어의 스페인어 의미에 더 가까운 건 ‘사기꾼’이다.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위인이 바로 돈 후안이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여인들을 속이고 배신하는 돈 후안의 유혹술은 실상 사기술이기도 하다.

‘스페인 최고의 사기꾼’ 돈 후안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Tan largo me lo fiais’이다. 초고본의 제목으로도 쓰인 문구라고 하니까 티르소판 <돈 후안>의 핵심 주제라고도 할 만하다. 우리말 번역본들은 “참으로 오래도록 나를 믿어주네” “오래도 두고 보시는구먼”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등으로 옮겼다. 원문구는 상투적인 스페인어 표현이라고 하는데, “청산의 날은 아직 멀었다”란 뜻도 있다고 한다. ‘청산의 날’은 물론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돈 후안은 자신이 아직 젊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참회는 늙어서 해도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돈 후안은 원칙적으로 무법자가 아니며,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이지도 않다. 단지 자신의 경우에는 그 법칙이 유예될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라고 와트는 정리한다. 곧 돈 후안주의의 핵심은 현재의 젊음을 근거로 미래의 죽음과 심판을 간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무분별한 여성편력은 그러한 태도의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티르소판 <돈 후안>에서 돈 후안의 판단은 들어맞지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서 코러스는 “이승에 살아 있는 동안/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이런 말 하는 자 저주 있을지니./ 그 말의 대가를 치르리라”라고 노래하며 결말을 암시하는데, 예언대로 돈 후안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불의 심판을 받는다. 마지막 순간에 돈 후안은 고해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참회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는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으며 지옥에 떨어진다. 요즘 인기를 끄는 뮤지컬 <돈 주앙>의 ‘사랑스러운 매력남 돈 주앙’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는 ‘사기꾼 돈 후안’의 운명이다

10. 08. 27.  

P.S. '돈 후안 텍스트'에 대해서는 예전에 푸슈킨의 <석상손님>(<석상방문객>이라 번역돼 있다)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티르소 데 몰리나판 <돈 후안>의 매력은 돈 후안에 대한 단호한 응징에 있다. 시간과의 내기에서 아주 오만했던 돈 후안에겐 참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점이 후대 작가 호세 소리야 이 모랄의 <돈 후안 테노리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안다. 언젠가 돈 후안 텍스트에 대해서는 몇 작품 더 읽고 비교해고픈 욕심이 있다. 소개된 책 가운데 더 참고할 만한 것은 페터 한트케의 <돈 후안>(베가북스, 2005), 그리고 더글라스 에이브람스의소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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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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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1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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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9 07: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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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9 1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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