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우울과 세속비평의 즐거움

며칠 전 올해 팔봉 비평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됐다. 오래만에 갖고 있는 비평집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 김영찬의 <비평의 우울>(문예중앙, 2011)이 그것이다. 최종심에서 같이 거론된 평론집은 조강석의 <겸험주의자의 시계>(문학동네, 2010)와 소영현의 <분열하는 감각들>(문학과지성사, 2010)이었다. 수상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1. 05. 09) "비평의 질 심화와 문학교사 역할 병행이 과제" 

"비평이 문학 종사자 외의 일반 독자들에게 소외돼 있는 게 현실이고, 저로서도 독자와의 소통을 어떻게 열어 갈 것인가가 큰 고민입니다. 비평의 질을 심화하는 작업과 동시에 독자와 한국 문학을 연결시켜 주는 문학 교사로서의 역할을 병행해 나가는 게 과제입니다."

22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인 계명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김영찬(46)씨가 말하는 소외와 소통은 비단 비평이 짊어진 짐만은 아닐 것 같다. 이번 수상작은 올해 2월 출간된 비평집 <비평의 우울>(문예중앙 발행). 이 우울은 비평만이 아니라 문학 작품과 그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이란 세 가지 층위에 겹쳐진 먹구름이다. 책 서두에 제시된 이런 진단처럼. "지금 한국 소설은 그렇게 한국 사회의 정상적 실패의 증거로서 그 자신의 실패를 음미함으로써, 제 각각의 우울을 앓는다"(7쪽).

문예지뿐 아니라 인터넷 웹진 등을 통해 창작과 연재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 넓어져 장편소설이 양적 부흥기를 맞은 듯하지만 그 속내를 보면 생명 연장 장치를 덧댄 무기력증 환자의 기계적 숨소리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극소수의 스타 작가 외에 사회적 주목을 끄는 작품이 거의 나오지 않을뿐더러 소설의 질적 수준 자체가 전반적으로 떨어졌다는 진단에서다. 김씨 역시도 이 같은 음울한 시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현실과의 긴장을 놓친 자기 충족적 세계에 갇혀 있고 인물은 단면적이고 세계는 협소하며 의식은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비평집은 그러니까 최근 수년간 문단의 뜨거운 화두였던 근대문학 종언론을 화두 삼아 2000년대 후반 한국 소설의 침체를 성찰하고 그 출구를 모색한다. 2006년 첫 비평집 <비평극장의 유령들>에서 2000년대 전반기 문학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포착했던 그가 5년 만에 낸 두 번째 평론집의 기조가 우울이라는 것은 현 문학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침체를 단지 작가의 역량 탓으로 돌리지 않고, 문학사와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동시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시야는 한결 폭넓고 종합적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한국 사회 자체가 문학의 정신적 동력인'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린 까닭에 소설 역시 불가피하게 우울과 체념의 세계를 펼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역으로 한국 사회가 여전히 희망의 길을 모색하는 그 만큼, 소설도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란 기대도 잃지 않는 것이다.

외국의 특정 이론으로 작품을 단편적으로 재단하기보다 문학 안팎의 다양한 현실을 두루 통찰하면서 작품의 위상을 종합적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김영찬 비평의 특장. 두 권의 비평집을 통해 200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 문학의 항로를 첨예하게 그렸던 그는 이번 수상으로 비평 분야 3대상을 모두 휩쓸게 됐다.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평론 부문)로 등단한 그는 <비평극장의 유령들>로 대산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두 번째 저서로 팔봉비평문학상까지 거머쥐었다.

지난해 가을호부터 복간된 계간지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을 맡으며 현장 활동을 활발히 펴고 있는 그의 요즘 화두는 장르의 벽을 넘는 독자와의 소통이다. 문학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시대적 감성과 접속하려는 것이 계간지의 지향점. 그의 향후 비평적 관심도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서사에 대한 분석에 맞춰져 있다. 그는 "지금은 서사의 시대라 이를 만한데 TV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부터 정치적 수사에까지 다양한 서사들이 등장해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고 경쟁한다"며 "서사 일반으로 영역을 넓혀 시대를 진단하는 동시에 한국 문학사를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송용창기자) 

11.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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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1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우울을 앓더라도 비평은 우울해하면 안 될 텐데요ㅎㅎ 하긴 뾰족한 수가 없기도 하겠네요... 음,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여전히 바쁘시죠?^^

로쟈 2011-05-12 10:02   좋아요 0 | URL
후와님도 바쁘시던데요.^^
 

격주간 기획회의(29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이번호는 '거리로 나온 인문학'이 특집이군). 모처럼 비평집을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번역 문제를 다룬 조재룡의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에 대한 독후감을 간단히 적었다. 마감이 한참 지나 편집자의 애를 먹이며 쓴 기억이 난다.   

  

기획회의(11. 05. 05) 다시, 번역이 문제다

“다시 번역이 문제가 된다”를 화두로 내건 ‘비평집’을 읽었다. 불문학자 조재룡 교수의 비평집 <번역의 유령들>이다. 번역을 주제로 한 비평집이기에 ‘번역비평’이라 부름직하지만, 비평의 대상이 분명하거나 딱 떨어지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는 ‘번역’이 아니라 ‘번역의 유령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번역의 유령이, 번역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미 ‘유령’이라고 지정하고 또 명명하였기에 미리 짐작해볼 수 있지만 책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고한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를 끊임없이 포위하고 우리의 내부로 침투하여, 이질적이건 동질적이건, 우리들의 저 관계들을 조정해나가면서 모국어의 잠재적 가능성을 일깨우는 유령”이 바로 ‘번역’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줄여서 ‘모국어의 잠재성을 일깨우는 유령’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그 형체가 손에 잡히진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인 여정이 그려질 수 있을까. 번역의 유령이 떠돌아다니며 남겨놓은 흔적들의 여정 말이다.  

저자는 “문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국어도 번역의 혼백(魂魄)이 풀어놓은 산물”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구두점’의 체계적인 사용에서부터 일본식 한자어와 조선식 구어를 혼합해 최남선이 우리식 ‘에크리튀르’ 곧 서기체계를 만드는 것은 빅토르 위고나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다. “번역의 유령은 1895년 유길준의 국한문혼용체의 실험에서 1908년 최남선까지, 이어 1919년 김안서의 조어(造語) 창출과 이를 통한 시적 변용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불려나온다. 저자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번역의 작업과 역할은 우리만의 특수한 정황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 “서양문학사를 돌이켜보면 문학장르가 탄생하는 매 시기, 번역의 유령들이 분탕질을 해댄, 바로 이 섞는다는 행위가 있었다”고 하니까.  

이제는 많이 알려진 대로, 한국 근대시의 효시로 평가되는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만 하더라도 번역의 유령이 불러낸 영감과 혼용의 결과였다. “번역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창작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행위이자 장르가 분화되고 새로운 유형의 문학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매개”였다는 사실에 대한 추인을 바탕으로, 한국 근대문학사는 한국 번역문학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거개가 일본에서 이루어진 근대 개념어들의 번역이 수용돼 우리말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서 근대적 사유가 열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순수 한글’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히 추정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의 근대가 ‘번역된 근대’였다면 우리의 근대는 ‘중역된 근대’였다.  

이러한 사실, 곧 ‘번역이라는 유령’의 존재성을 부인․부정하는 태도는 국가적․정치적․문화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특정한 나라의 문학과 그 문학 특유의 ‘감수성’이란 그 ‘특유’를 참칭하는 사람들에게만 특유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불문학자 황현산의 말을 인용하면, “실은 타자로 다시 일어서지 않는 주체는 주체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주체라는 공허한 메아리이며 그 그림자일 뿐이다.” 그 그림자 뒤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그러한 이데올로기이다. 타자로 다시 일어서는 일이 ‘모국어의 감옥’을 깨뜨리는 일과 등가적이라면 그것은 달리 번역의 유령과의 조우이기도 하다. 이 유령과의 만남 이전에 주체다운 주체란 없다. ‘나는 번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도출되는 이유다.  

번역의 유령들은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하기에 저자는 근대 이후를 ‘번역의 유비쿼터스 시대’라고까지 말한다. 그러한 편재적 양상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건 시이고 시 번역이다. 시에 대한 편애는, 하지만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시인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번역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앙리 메쇼닉)이라는 관점을 확장하여 “번역은 시를 시답게 구성하는 요소들, 때에 따라 한 단어가 될 수도, 텍스트 전체가 될 수도 있는 지점들로 파고들어, 그것을 읽어내고, 다시 쓰는 작업”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맥락에서는 저자는 시의 아포리아가 곧 번역의 아포리아라고 말하며, ‘번역의 눈’으로 시를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를 읽지 못하는 사회는 시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제 결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서두에 못박아 놓고,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상상세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평문도 포함하고 있지만 이 비평집이 본격적인 시비평집은 아니다. 하지만 ‘예고편’으로서는 충분한 역할을 한다. “새로운 독자를 상정해온 젊은 시인들은, 지금, 새로운 독자를 요청해야만 하는 지점에 와 있다”란 진술에 기대 말하자면, 우리는 ‘새로운 독자’에 대한 요청을 ‘새로운 비평가’에 대한 요청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시비평 대신에 저자는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번역가의 모습을 추적하고 불문학자였던 평론가 김현의 번역의식과 번역론을 재평가하며 보들레르와 이상의 가상 인터뷰를 시도한다. 그와 함께 다양한 언어, 다양한 장르의 글과 이미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일본만화와 정훈이의 만화도 포함돼 있어서 자못 ‘심각한’ 비평담론에 숨구멍을 내준다. 남기남이 등장하는 두 컷 만화는 이런 내용이다. (소년 남기남은 어려서부터 의기총명하고) “I am a boy, 나는 오전의 소년이다.” (한심대학 영문과 강의실) “아이 애무 어 보이(I'm a boy), 나는 소년을 애무한다.” ‘독창적인’ 번역의 사례로 들고 있는 예이다. 저자의 관심영역이 얼마나 폭넓은가를 짐작하게 한다.  

대부분 출판계에 몸담고 있을 <기획회의>의 독자라면 익숙할 법한 에피소드도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저자는 번역가의 ‘반역’을 부추기는 출판사의 행태를 직접적인 경험담을 통해 밝혀놓고 있는데,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한 모 출판사 부장과의 대화 장면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번역을 맡아준 데 감사를 표하면서 아무개 부장은 번역 원고의 양을 최대 A4 120매에 맞춰주도록 부탁한다. 아무리 적어도 140매 이상은 나올 거라고 말하자 아무개 부장 왈 “필요 없는 부분은 빼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내용도 삭제하면 되지 않나요?” 물론 그런 부조리한 요구를 들이민 것은 알만한 속사정 때문이다. “이게 원래 똑같은 분량의 시리즈로 구성되어야 하거든요.” 그런 요구 속에서 번역가의 존재가 사회적 차원의 ‘유령’으로 전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다시, 번역이 문제다.  

11. 05. 10.   

P.S. 저자가 이론적 지주로 삼고 있는 학자는 앙리 메쇼닉인데(책의 한 장이 메쇼닉에 할애돼 있다), 이미 번역서와 연구서를 몇 권 출간하기도  했다. <시학을 위하여1>(새물결, 2004)가 나오다 만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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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아이템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강준만 교수가 지적한 '한국형 평등주의'에 대해 쓰게 됐다. 참고한 책은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인물과사상사, 2011)이며, 슬로터다이크의 말은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소셜네트워크 시대의 사생활과 사회윤리의 문제는,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최근에 불거진 서태지, 이지아 커플의 이혼 파문 등을 염두에 두었다.

       

경향신문(11. 05. 10) [문화와 세상]평화를 위해 때론 무관심 필요

대한민국은 특별한 나라인가?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그렇다. “한국인은 한국을 잘 알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새로운 한국학’을 제안하는 그의 책 제목이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이니까. 지난 겨울에 나온 이 책에서 ‘영어의 문화정치학’이란 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강 교수는 한국 사회의 영어 광풍을 한국형 평등주의란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형 평등주의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삶의 철학이다. 물론 “너도 하면 나도 하겠다”는 평등의식이 많은 부작용도 낳았지만 한편으론 한국 사회를 이만큼이라도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는 게 강 교수의 평가다. 한국인들에게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는 욕심만큼 강력한 성취동기도 드물었다. 

이 평등주의가 특별히 ‘한국적’인 것은 한국만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갖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좁은 땅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 살아온 것이 한국인의 삶이었다. 그래서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고밀집사회’로 분류된다. 게딱지처럼 붙어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400㎞이고 KTX로는 두 시간 반 거리다.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선망하는 나라, 미국은 어떤가. 동서로 약 4300㎞에 이르고 네 시간의 시차가 있을 정도로 광활해 동서횡단이 말 그대로 ‘대륙횡단’이 되는 나라다. 아무리 성조기를 흔들면서 닮아보려고 애를 써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좁은 땅에 살다 보니 미국에 없는 것도 갖게 됐다. 이웃과의 강박적인 비교다. 다시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이 ‘이웃 효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라다. ‘엄친아’나 ‘엄친딸’이란 말이 한국만큼 유행어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포함한 모든 일은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렇듯 강한 타인지향적 인정 욕구가 ‘영어전쟁’에도 개입돼 있기에 단순히 ‘광풍’이라고 비판해봐야 먹히질 않는다는 게 강 교수의 지적이다. 애초에 영어전쟁의 목적이 영어를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서열을 정하는 데 있기에, 혹 모두가 영어를 잘하게 된다면 이번엔 중국어 광풍이 불 나라가 한국이다.

이 이웃 효과의 또 다른 양상은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참견이다. 연예인뿐 아니라 대중매체에 노출된 일반인들까지도 ‘이웃’으로 간주돼 사생활이 까발려지고 품평의 대상이 된다. 이런 일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태도도 한몫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한국형 평등주의가 사회 전체의 불평등에 대한 관심과는 자주 엇갈린다는 점이다. 사생활에 관한 고백과 폭로로 여론공간이 도배되는 일이 사회적 평등의 구현이라는 대의에 과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바야흐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이고 이웃의 범위는 전 지구적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거기에 걸맞은 사회윤리적 규범을 우리가 갖고 있는지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더 많은 의사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면서 세계화 시대에는 ‘서로를 이해하기’와 함께 ‘서로 비켜서기’란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웃 간의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물리적·정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 비켜서기’다. 그러한 거리두기 혹은 소외가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기본권이라면 우리에겐 자신만의 고독을 온전하게 향유할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 때론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평화와 공존의 조건이다. 

11. 05. 09.   

P.S. 참고로, 일반적 평등주의가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는 데 비해서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삼는다는 비판을 강준만은 <88만원 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의 칼럼에서 인용하는데(238쪽), 해당 칼럼을 찾아서 옮겨놓는다.  

시사IN(08. 10. 07) 부자에게 유리한 한국형 평등주의   

세제개편안을 둘러싼 정부의 발언을 지켜보노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화가 나서? 아니, 웃겨서.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감세 효과의 53%가 중산층과 서민에게 돌아간다”라면서 밝힌 중산층의 기준이 “통계청 과표구간으로 연소득 8800만원 이하”란다. 통계청 과표구간상 연소득 8600만원만 해도 실제 연봉은 1억원이 넘어간다. 이 발언이 기사화된 직후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사람이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중산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류 인생이었다”라는 식이다. 여론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부자를 중산층으로 둔갑시키는 ‘강부자’ 정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애초 중산층이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허술한 개념이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강부자 정권’이라 불리는 이 정부가 하는 일마다 부자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이다. 즉, 부자가 부자를 궁지로 몰아간다. 대한민국 서민이 ‘중산층’이라는 말에 얼마나 민감한데, 거기에 대고 “소득 8800만원” 운운했으니 작정하고 벌집을 쑤신 꼴이 아닌가.

어느 사회이건 지배계급은 자기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 ‘포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설득력 있는가가 바로 지배계급의 역량을 재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유능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급소’와 ‘성감대’가 어디인지 귀신같이 파악한다. 대영제국의 신화는 무력으로만 이루어진 게 결코 아니었다. 식민지에 관한 방대한 지식의 집적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이렇게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기 이익을 관철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그리고 한국의 부자를 보면 도무지 지배계급의 역량이란 걸 눈 씻고 봐도 발견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이렇게 무식한데 어떻게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할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의 부자는 “평등주의 근성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라 망친다는 건, 자기가 망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저건 ‘한국형 평등주의’가 얼마나 부자에게 유리한 이념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피지배계급의 의식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라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는 데 비해,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처지에 서면 필연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처지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부자 되기’ 처세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구실을 한 게 바로 이것, 한국형 평등주의였다. 존재를 배반하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의 무능을 상쇄시키는 한, 지배-피지배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슬프고 기묘한 균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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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1-05-1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형 평등주의..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주제이군요.
(시사인 기사를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사인 기사 퍼가겠습니다. 재펌이되겠네요.)

로쟈 2011-05-14 10:07   좋아요 0 | URL
일종의 '유사 평등주의'라는 거지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5월호)에 실린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자연 재난에 관한 책 세 권을 다루고 있는데, 책 선정은 편집부에서 했다.     

책&(11년 5월호) 자연 재난과 인류

지난 3월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재난 앞에서 인간과 문명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한 번 더 실감하게 해주었다.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인재의 성격이 강하다 하더라도, 가공할 자연의 재앙 앞에서 여러 도시가 초토화됐고 추정으로는 4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아무런 예고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재난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대자연의 무자비한 폭력에 어떻게든 맞설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어떤 의미라도 부여할 수 있을까.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베링어는 <기후의 문화사>(공감IN, 2010)는 ‘기후’라는 가장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운명을 조망하도록 해준다. “기후는 항상 변화해왔다.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화의 문제”라는 것이 기후의 문화사를 보는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물론 한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문명단위의 역사도 변화의 연속이긴 하다. 하지만 기후의 변화는 스케일이 좀 다르다. 최근 100만년 동안의 기온변화 그래프를 통해서 저자는 빙하기와 간빙기(온난기)가 교체돼 온 것이 지구의 역사라는 걸 보여준다.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수적인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일정 수준으로 감축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이긴 하지만 미리부터 종말론적 예측에 기대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일례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터져 나오기 전인 1970년대에 과학자들은 지구냉각화를 막기 위한 대책을 주문했었다. 좀 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저자는 기후변화가 일종의 ‘도전’이라면 이에 대한 ‘응전’을 통해서 인류가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기후가 변화한다면 인간 또한 그에 적응하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낙관적’ 전망이다.  

리처드 험블린의 <테라: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미래의창, 2010)은 그 ‘낙관적’ 전망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부제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으로,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 1783년 유럽 기상이변,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 그리고 1946년 힐로 쓰나미가 저자가 꼽은 4대 재난이다. 이들 재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검토하고는 있지만 초점은 피해나 참상보다는 그것이 가져온 변화에 두어진다. 가령 1755년 11월 1일 아침에 발생한 리스본의 대지진과 거대한 쓰나미는 번화한 항구도시를 순식간에 폐허로, ‘지상에 구현된 지옥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현세에서 신이 내리는 모든 심판들 가운데, 그 무엇이 갑작스럽고 파괴적인 지진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라고 토로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자연재앙의 의의는 그러한 신학적 해석을 끝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스본 대지진은 ‘최초의 현대적 재난’이며, 지진에 대한 전례 없는 관심을 이끌어냄으로써 지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하게 했다. 지진과 기상이변, 화산폭발 등은 분명 지구의 위력과 함께 자연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진일보시킨 전환점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두 권의 책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류 차원의 응전을 다루고 있다면, ‘타임’지의 기자 아만다 리플리가 쓴 <언씽커블>(다른세상, 2009)은 개인의 생존을 주제로 한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재난 재해 보고서’이다. 재난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리플리 역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모든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우리가 ‘재난인격(disaster personality)’에 대해 알아두면 생존가능성이 조금은 커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재난을 뜻하는 영어단어 ‘disaster’는 라틴어 dis(벗어나다)와 astrum(별)을 합친 말이니 “운명의 별이 궤도를 벗어나 운수가 사납다”는 뜻이다. 이 ‘사나운 운수’에서 어떻게 다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생존의 길’이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걸 발견한다. ‘거부’와 ‘숙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세 가지 시간적 단계인데, 긴급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의 인지에서 상황에 대한 신중한 판단을 거쳐 행동에 나서기까지의 과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결정적 순간의 행동에 ‘마비’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도  도망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는 죽은 척하거나 병든 척하는 것이 합리적인 진화적 적응 전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자는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을 예로 드는데, 비올랜드라는 학생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마비 덕분에 조승희의 주목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가 프랑스어 강의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렇다고 마비가 만능인 건 아니다. 1994년 에스토니아호가 발트해에서 침몰할 때 희생자 대부분은 충격에 얼이 빠져 있다가 그대로 수장된 경우였다. 누가 어떻게 재난에서 살아남았는지 아는 것도 우리의 재난 대처력을 조금은 높여줄지 모른다

11. 05. 09.  

P.S. <언씽커블> 계열로 재난으로부터의 생존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몇 권 연이어 나왔다. 벤 셔우드의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민음인, 2011), 코디 런딘의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 권의 책>(루비박스, 2011), 제임스 웨슬리 롤스의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초록물고기, 2011) 등이다. '재난 생존법'이란 주제를 다룬다면 같이 묶어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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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에 임시저장해놓은 페이퍼를 올려놓는다. <신경제사회학>(성균관대출판부, 2011)란 책에 대한 소개기사이다.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의 사회학>이란 제목의 책들이 더러 나온 적이 있고, 이 책은 그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신경제'사회학이 아니라 '신'경제사회학이다.  

  

서울신문(11. 05. 04) 유홍준·정태인 교수가 말하는 ‘신경제사회학’은

“아이폰 쇼크에 당황하는 삼성을 보며 안타까웠다. 대기업이 관료들보다 더 관료화됐다.” 최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던진 ‘말폭탄’이다. 그런데 이런 지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외국 유명대학 출신 재벌 2, 3세들에 대해 “파이낸싱(자금조달 기법)만 배워 와서 막상 물어보면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잘 모르더라.”고 평가했다. 대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둔 채 투자를 안 한다는 현 정권의 불만이나, 그렇기에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을 막아야 한다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선언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의 관점과 유사하다. ‘혁신’(Innovation),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개념을 내놓은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생산’ 노동 개념을 대공장제 생산이 일반화되지 못한 초기 자본주의 단계의 얘기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지도’ 노동 개념을 내세웠다. 생산 그 자체보다, 시장의 흐름을 보고 무엇을 생산해서 얼마나 공급할지 결정하는 경영자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덕분에 경영자는 ‘피도 눈물도 없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냉혈한’에서 ‘창조적 파괴로 혁신을 이끌어내는 모험가(Entrepreneuer)’로 위상이 달라졌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슘페터의 경제학적 논의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학적 논의가 있다. 이 지도 노동을 수행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슘페터는 전문 기술관료, 즉 테크노크라트를 지목했다. 한국과 같은 재벌가 2, 3세 세습오너들이 아니다. 정부가 아무리 규제 철폐·고환율 정책 등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 행보를 해도 혁신과 창조적 파괴가 터져나오지 않는 것은 이런 사회학적 이유 때문은 아닐까.

유홍준(53)·정태인(51) 성균관대 교수가 내놓은 ‘신경제사회학’(성균관대출판부 펴냄)은 그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경제학 책과 함께 사회학 책을 펴 보자고 제안한다. 두 저자는 사회학의 중요한 개념인 ‘권력’과 ‘계층’ 문제를 기존 경제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배제해버린 점을 문제 삼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내는 깨끗한 이론을 추구하다 보니 현실에서의 ‘더러운 손’(Dirty Hand)을 외면했다는 비판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주류 경제학이 독립하는 계기가 되는 19세기 유럽의 ‘방법론 대논쟁’을 일부 다룬 점이 눈길을 끈다. 이 논쟁은 경제학이 수학적으로 정교한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에 대해 얼마나 비합리적인 가정을 했는지 드러내준다.

예컨대 ‘아노미’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1858~1917)은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나가던 경제학에 대해 “인간을 사회적으로 일탈된, 즉석사진(snapshot)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경제학적 인간을 두고 ‘합리적 바보’ 혹은 ‘사회적 저능아’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사회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산업혁명이 인간을 상품화했다고 비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렇듯 인류학적·문화적 관점에서 경제에 접근하는 폴라니 진영은 ‘인센티브’(Incentive)라는 경제학적 개념으로 사회현상 전반을 설명하려 드는 ‘괴짜 경제학’(Freakonomics)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괴짜 경제학’은 몇 년 전 국내에서도 번역돼 큰 인기를 끌었던 스티븐 레빗(44) 미국 시카고대 교수의 저서다.

유홍준·정태인 두 저자는 폴라니의 핵심 개념(배태·Embedness)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괴짜 경제학’ 또한 거리낌 없이 인용한다. ‘통섭’이란 이름으로 사회학이 경제학을, 혹은 경제학이 사회학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장점을 한데 따서 모아야 ‘경제사회학’이라는 분야가 확립될 수 있다는 저자들의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사회학 콘서트’ 같은 대중적인 책을 다음 작품으로 준비 중이라고 했다. ‘경제사회학’의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은 여기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조태성기자)  

11. 05. 09.  

P.S. 학부시절 가장 관심이 없던 분야가 경제학 쪽이었는데(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혐오감!), 최근 들어서는 자주 손에 들게 된다. 손에 든다고 물론 다 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큼 자주 눈에 띈다는 얘기는 된다. 이정전 교수의 <경제학을 리콜하라>(김영사, 2011)와 천진의 <하버드경제학>(에쎄, 2011)이 책상에 놓여 있고, 던컨 폴리의 <아담의 오류>(후마니타스, 2011)은 곧 받게 될 책이다. 주류 경제학이 어떤 것인지(<하버드경제학>), 그리고 그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왜 필요한지(<경제학을 리콜하라>, <아담의 오류>)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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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za 2011-05-11 04:11   좋아요 0 | URL
'배태'의 원어는 embedness가 아니라 embeddedness 입니다. 기자분이 잘못 쓰셨네요.

로쟈 2011-05-11 16:14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