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5월호)에 실린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자연 재난에 관한 책 세 권을 다루고 있는데, 책 선정은 편집부에서 했다.     

책&(11년 5월호) 자연 재난과 인류

지난 3월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재난 앞에서 인간과 문명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한 번 더 실감하게 해주었다.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인재의 성격이 강하다 하더라도, 가공할 자연의 재앙 앞에서 여러 도시가 초토화됐고 추정으로는 4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아무런 예고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재난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대자연의 무자비한 폭력에 어떻게든 맞설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어떤 의미라도 부여할 수 있을까.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베링어는 <기후의 문화사>(공감IN, 2010)는 ‘기후’라는 가장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운명을 조망하도록 해준다. “기후는 항상 변화해왔다.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화의 문제”라는 것이 기후의 문화사를 보는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물론 한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문명단위의 역사도 변화의 연속이긴 하다. 하지만 기후의 변화는 스케일이 좀 다르다. 최근 100만년 동안의 기온변화 그래프를 통해서 저자는 빙하기와 간빙기(온난기)가 교체돼 온 것이 지구의 역사라는 걸 보여준다.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수적인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일정 수준으로 감축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이긴 하지만 미리부터 종말론적 예측에 기대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일례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터져 나오기 전인 1970년대에 과학자들은 지구냉각화를 막기 위한 대책을 주문했었다. 좀 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저자는 기후변화가 일종의 ‘도전’이라면 이에 대한 ‘응전’을 통해서 인류가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기후가 변화한다면 인간 또한 그에 적응하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낙관적’ 전망이다.  

리처드 험블린의 <테라: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미래의창, 2010)은 그 ‘낙관적’ 전망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부제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으로,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 1783년 유럽 기상이변,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 그리고 1946년 힐로 쓰나미가 저자가 꼽은 4대 재난이다. 이들 재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검토하고는 있지만 초점은 피해나 참상보다는 그것이 가져온 변화에 두어진다. 가령 1755년 11월 1일 아침에 발생한 리스본의 대지진과 거대한 쓰나미는 번화한 항구도시를 순식간에 폐허로, ‘지상에 구현된 지옥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현세에서 신이 내리는 모든 심판들 가운데, 그 무엇이 갑작스럽고 파괴적인 지진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라고 토로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자연재앙의 의의는 그러한 신학적 해석을 끝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스본 대지진은 ‘최초의 현대적 재난’이며, 지진에 대한 전례 없는 관심을 이끌어냄으로써 지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하게 했다. 지진과 기상이변, 화산폭발 등은 분명 지구의 위력과 함께 자연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진일보시킨 전환점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두 권의 책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류 차원의 응전을 다루고 있다면, ‘타임’지의 기자 아만다 리플리가 쓴 <언씽커블>(다른세상, 2009)은 개인의 생존을 주제로 한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재난 재해 보고서’이다. 재난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리플리 역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모든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우리가 ‘재난인격(disaster personality)’에 대해 알아두면 생존가능성이 조금은 커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재난을 뜻하는 영어단어 ‘disaster’는 라틴어 dis(벗어나다)와 astrum(별)을 합친 말이니 “운명의 별이 궤도를 벗어나 운수가 사납다”는 뜻이다. 이 ‘사나운 운수’에서 어떻게 다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생존의 길’이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걸 발견한다. ‘거부’와 ‘숙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세 가지 시간적 단계인데, 긴급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의 인지에서 상황에 대한 신중한 판단을 거쳐 행동에 나서기까지의 과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결정적 순간의 행동에 ‘마비’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도  도망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는 죽은 척하거나 병든 척하는 것이 합리적인 진화적 적응 전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자는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을 예로 드는데, 비올랜드라는 학생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마비 덕분에 조승희의 주목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가 프랑스어 강의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렇다고 마비가 만능인 건 아니다. 1994년 에스토니아호가 발트해에서 침몰할 때 희생자 대부분은 충격에 얼이 빠져 있다가 그대로 수장된 경우였다. 누가 어떻게 재난에서 살아남았는지 아는 것도 우리의 재난 대처력을 조금은 높여줄지 모른다

11. 05. 09.  

P.S. <언씽커블> 계열로 재난으로부터의 생존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몇 권 연이어 나왔다. 벤 셔우드의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민음인, 2011), 코디 런딘의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 권의 책>(루비박스, 2011), 제임스 웨슬리 롤스의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초록물고기, 2011) 등이다. '재난 생존법'이란 주제를 다룬다면 같이 묶어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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