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비평집을 즐겨 읽던 관성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가끔씩은 챙겨두곤 한다. 가장 최근에 챙긴 건 김영찬의 <비평의 우울>(문예중앙, 2011). 첫 비평집 <비평극장의 유령들>(창비, 2006)로 화려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던 저자의 두번째 비평집이다(제목과 달리 비평가는 유령이 아니었다!). 표제가 된 비평문이 따로 없으므로 '비평의 우울'은 책을 내면서 붙여진 것이겠다. 비평의 우울이 '비평가의 우울'로도 전염되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던 비평집을 읽는 일은 전혀 우울하지 않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강, 2010)에 대한 마지막 글의 제목을 따자면 '세속비평의 즐거움' 그대로이다. 좀 희한한 일인가?..
한국일보(11. 02. 26) 불화와 대결의 자의식이 타오르는 순간 희망은 되살아나리…
"요즘 한국 문학에 현실적 주제를 치열하고 역동적으로 그린, 수준 높은 장편소설이 없다"는 소리는 문단 바깥의 푸념만은 아니다. 장편소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근대문학이 아예 끝났다는, 가리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최근 수년간 문학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희망을 잃고 떠난 이도, 실천적 관심을 잃은 작가의 역량을 탓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겠는가, 우리 사회가 치열하고 수준 높지 못한 걸. 소설이란 불가피하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거칠게 말하면, 문학평론가 김영찬(46ㆍ사진) 계명대 교수가 새 비평집 <비평의 우울>에서 전하는 얘기가 그렇다. "지금 한국 소설은 그렇게 한국 사회의 '정상적 실패'의 증거로서 그 자신의 실패를 음미함으로써, 제 각각의 우울을 앓는다"(7쪽)는 것이다.
<비평의 우울>은 2006년 <비평극장의 유령들>로 현대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동시에 받았던 김 교수가 5년 만에 내놓은 비평집. 2000년대 후반 한국 문학, 특히 근대문학의 핵심 장르인 장편소설이 부딪힌 막다른 길을 진단하고 있는 그의 시선을 요약하면 '직시(直視)의 비관'이다.
그는 한국 소설이 세계와의 대결 의지를 잃고, 심지어 자본과 제도의 알리바이로도 기능하면서 현실과의 긴장을 놓친 자기 충족적 세계에 갇혀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극히 비관적이다. 소설 내적으로 봐도 "인물은 단면적이고 세계는 협소하며 의식은 추상적이다"(41쪽). 요즘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그의 평가도 인색하다.
그러나 이를 작가의 역량 탓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물로 본다는 점에서 냉정하다.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한국 사회 자체가 근대문학의 정신적 동력인 '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린 데서 장편소설의 사망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근대문학의 죽음을 인정하며 그 뒤의 문학을 모색하고 있지만 김 교수가 젊은 작가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여전히'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로서 대결의 자의식'이다. 그는 "최근 신인들의 소설에서 한국 소설이 잊었던 불화와 대결의 자의식이 조금씩 힘겹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한국 소설에 대한 조심스런 낙관을 그래도 놓지 않아야 할 이유"라며 한 가닥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의 부활을 염원하면서 죽은 근대문학의 유령을 호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선상에서 책은 강영숙 편혜영 권여선 김사과 천명관 박민규 김애란 전성태씨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피며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짚고 있다.
11. 03. 04.
P.S. 저자는 지난해 복간된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문예중앙>(2011년 봄호)의 특집은 '문학이란 何오'(1916년 이광수가 묻고 답했던 질문이다)이다. 11명의 필자가 이 질문에 응했는데, 나도 그 중 하나다('문학들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을 달았다). 권여선, 박민규 두 작가의 대담과 함께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시네마 노트'도 첫회분이 실렸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