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의 <규방철학>(도서출판, 2005)이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밀실에서나 하는 철학>(민음사, 2011). <안방철학>(새터, 1992)을 원조로 치면 세번째 번역이다. 같은 제목을 피하기 위해 좀 비튼 것이겠지만 <밀실에서나 하는 철학>은 '격조'가 좀 떨어지는 제목이다('밀실'이라니? 밀실에서 궁리한 제목일까?). 이 참에 사드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절판된 책이 많아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몇 되지 않는다.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사드의 규방철학
D.A.F. 사드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8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1년 05월 05일에 저장
구판절판
밀실에서나 하는 철학
사드 지음, 정해수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1년 05월 05일에 저장

미덕의 불운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11,800원 → 10,620원(10%할인) / 마일리지 5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1년 05월 05일에 저장

사랑의 범죄
D.A.F. 사드 지음, 오영주 옮김 / 열림원 / 2006년 1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1년 05월 05일에 저장
품절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침에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시어도어(테오도르)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강, 2005)에 대한 기사를 읽고 책을 챙겨놓기로 했다. 서양사학자 이영석 교수가 자신에게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책의 의의를 재발견하게 돼 반갑다(알라딘의 상품 이미지 넣기는 언제쯤 정상화되는 것일까?).

  

교수신문(11. 05. 02) '시어도어 젤딘' 혹은 감성과 삶의 역사

내가 옥스퍼드의 역사가 시어도어 젤딘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1995년 무렵인가 런던의 한 서점에 들렀다가 베스트셀러 서가에 진열된 책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샀다. 이 책의 모티브는 만남과 대화다. 젤딘은 저명한 방송인에서부터 어린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세계로 나아간다.

사실 이 책은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다. 25개 장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책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다. 한동안 나는 이 책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그의 재치 있는 농담이 한 줄기 섬광처럼 가슴에 파고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 4장 ‘일부 사람들이 고독에 대해 면역성을 얻게 된 경위’를 보자. 그는 콜레트라는 세무서 직원과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장학금을 받아 상급학교에 진학해 나중에 공무원이 되었다. 비록 성공한 여성이지만,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남성의 독점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얻으려고 한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이다. 이 시점에서 젤딘은 인간의 삶에서 외로움이 갖는 의미에 관해 역사의 바다를 항해한다.

고독은 오래 전부터 낯익은 것이다. 힌두교 신화는 창조주가 외로움 때문에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옛날부터 사람들은 고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려고 노력했다. 은자의 삶을 동경하고 자기성찰에 매진하기도 했다. 유머와 웃음으로 고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거나 내면적인 신앙을 갖는 것 모두가 고독 면역법의 전통이 되었다.

이와 달리 현대인은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여기에서 젤딘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외로움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일반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외로움은 모험이다.” 혼자 있을 권리나 예외로 남을 권리 또한 다른 사람과 만나 교제할 권리 못지않게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고독은 고통일 뿐이라는 일반론을 떨칠 수 있다.

나는 젤딘의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이전 책들도 읽었다. 원래 젤딘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사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연구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프랑스인의 일상생활에 녹아 있는 감성과 정감을 다룬 다섯 권짜리 책 <프랑스 1848-1945>를 펴낸 이후의 일이다. 여기에서 그는 프랑스인 특유의 감성과 정감을 탐사한다. 각권은 ‘야망과 사랑’, ‘번민과 위선’, ‘지성과 자존심’, ‘정치와 분노,’ ‘맛과 부패’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들 부제만 보더라도 그의 작업이 기존 역사학의 통념을 과감히 벗어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젤딘은 일반적인 역사서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그가 역사서술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성찰하는 데 있다.

박식한 역사가 젤딘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는 동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그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감성에 대해서도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준다.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세계는 중국인의 '恥', 한국인의 '恨', 일본인의 '忍'으로 대변된다. 이는 각기 부끄러움, 후회와 쓰라림, 더 나은 시대를 대망하는 기다림을 나타낸다. 젤딘에 따르면, 동아시아인의 감성은 유럽인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포용력이 있으며 부드럽다.

결국 젤딘이 추구한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을 얻는 작업이다. 그는 이성과 지식보다 감성과 정감의 영향을 받는 삶의 영역을 더 중시한다. 그의 저술에서 역사지식은 인간의 감성이나 삶에 관한 갖가지 질문의 해답을 추구하는 여정의 방향타이자 나침반이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지식을 추구한다기보다, 그 지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젤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오랫동안 계급이나 산업화 같은 거시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이들 주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다. 젤딘의 책은 지적 방황을 거듭하던 내게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알려준 나침반이었다. 나는 역사 연구의 지향점이 삶의 성찰에 있으며, 그것은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 나는 의식적으로 삶의 섬세한 측면을 확대해 보려고 노력한다. 알게 모르게 젤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11. 05. 0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andemian 2011-05-07 19:57   좋아요 0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로쟈님 서재에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이 책 재미있습니다^^

로쟈 2011-05-07 22:17   좋아요 0 | URL
저도 원서와 같이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원전이 정답이 아닌 이유

지난주에 체르노빌 원전 사고 25주기에 관한 기사를 포스팅했는데, 러시아 전문가이기도 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칼럼이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한 책이 더 출간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11. 05. 03) [와다 하루키 칼럼]‘이유있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를 겪고 있는 우리는 4월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25주기를 맞았다. 체르노빌 사고 후 25년이 지나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는 옛소련에서 개발한 흑연감속로형(RBMK형)의 원전 사고로 이 모델의 특징은 격납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4기의 원자로 가운데 4호기의 정기검사를 위해 가동을 멈추려는 사이 발전 실험을 해버렸다. 긴급정지를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폭주한 원자로는 대폭발을 일으켜 다량의 방사성물질을 대기 중에 뿜어냈다. 타고 있던 4호기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석관에 봉인됐다. 작업에 투입된 많은 이가 숨졌다. 사고 직후 반경 30㎞ 지역의 주민 13만여명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방사선에 피폭된 어린이들이 속출했다. 고방사능이 검출된 주변지역 주민 27만명도 피난했다. 그야말로 묵시록적인 대재앙이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체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때 소련에는 고르바초프라는 55세의 젊은 공산당 서기장이 등장,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제창했다. 필자는 1987년 출간한 <내가 본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고르바초프 정치의 ‘결정적인 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2006년 공개된 고르바초프 시대의 정치국 의사록으로 입증됐다.

통제받지 않은 학자·정부 부처 탓
사고 발생 사흘 후인 4월29일 공산당 정치국이 특별협의회를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방사능의 원천 봉인을 주요 과제로 보고 루이시코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사고대책반을 꾸린다. “성실함과 정보 공개가 없으면 안된다”며 “파국을 초래한 원인을 조사할 것”을 주문한 고르바초프는 사고 후 18일째인 5월14일 TV를 통해 사고 상황 및 정부의 대응책을 설명했다. 그후 5월22일 그는 정치국에서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는 습관과 놀라울 정도의 무책임에 맞닥뜨리고 있다. 사고는 모든 사람과 연관돼 있다. 본인의 기술적 의무를 뛰어넘어 넓게 보지 못하는 관료주의에 직면하고 있다. 만인이 알아야 한다. 무책임하고 엉터리인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음을.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 세계에 감추지 말고 말해야 한다.” 고르바초프는 원자력학의 권위자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소장이자 과학아카데미 총재였던 알렉산드로프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 연구소의 ‘위험한 독점’을 비판했다.

그는 6월5일에도 “체르노빌 사고는 장관이나 중앙위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련돼 있다”면서 “지금 가동 중인 것은 안전성이 최대한 확보돼야 한다. 원전 관련 사안을 인민과 말하는 것을 피해선 안된다. 달콤한 말은 삼가고, 감추지 말고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6월16일 공산당 중앙위원 총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사고를 언급하며 “경제 국면뿐만 아니라 전 사회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시급하다”는 새로운 전략을 내놓았다.

체르노빌 사고 원인을 조사한 정부위원회의 보고가 7월3일 정치국에서 검토됐다. 위원회는 사고 원인이 위험한 RBMK형 원자로에 있다고 결론을 냈다. 정치국 토론은 그렇게 위험한 원전을 왜 계속 만들어왔는지에 초점을 모았다.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우리는 30년간 당신들(원전 전문가, 관련 부처)로부터 모두 안전하다고 들어왔다. 당신들은 신으로 떠받들어지길 바랐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모든 정부 부처와 연구기관은 컨트롤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당신들에게서는 결론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사실을 확인해야 함에도 이래저래 속이려 한다.”

7월31일 고르바초프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페레스트로이카는 ‘혁명’이라고 단언했다.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그는 사회 전체의 페레스트로이카, 즉 혁명적인 정신 개혁을 촉구한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에 직면한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서 아직 그러한 반성, 정신적 혁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옛소련에서는 사고 원인으로 격납용기가 없는 원전 모델이 지목됐다. 사고 이후 일시적으로 고조된 원전 비판 목소리가 후퇴, 원자력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원전 붐이 일었다. 그 배경엔 ‘소련 모델은 너무 낡았고 안전하지 않다. 서구 모델은 신식으로 안전하다’는 논리가 자리한다. 그러나 격납용기가 있는 신형 모델 원자로가 후쿠시마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 지도부의 토론 내용을 보면 고르바초프가 원자력 학자와 정부 관련 부처가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독립왕국을 구축, 안전신화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온 점을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뿌리는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동일하고 영원하다고 본다.

원자력학자와 관련 부처는 전력회사와 결부돼 있다. 일본 정부 산하의 원자력안전위원회에는 원자력학자들이 모여 있다. 위원장은 마다라메 하루키 도쿄대 교수다. 대학으로 옮기기 전 그는 도시바의 원자력부 사원이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은 경제산업성에 속해 있다. 데라사카 노부아키 원장은 관료다. 도쿄전력에 경제산업성 차관이 낙하산으로 내려온다. 원자력발전소를 컨트롤하는 2개의 조직은 원전이 안전하다고 선전하는 조직이었다. 마다라메는 원전 가동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에서 전력회사 측의 증인으로 활약해온 인물이다. 이번 사고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사고 당일 모이지도 않았다. 또한 일주일 이상 지난 후에야 사고 현장에 직원을 파견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체르노빌 사고 때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의 제1부소장이자, 현장에서 사고 수습에 매달린 레스가프트라는 인물이 있다. 옛소련의 ‘원자력 마피아’ 일원이었다. 그는 2년 후인 1988년 4월27일 자살했다. 전날은 사고 2주기였으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는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한 단 한 줄의 기사도 없었다. 이게 그의 자살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체르노빌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한 그는 고농도의 방사성물질을 뒤집어썼다. 죽음을 각오한 그는 죽을 장소,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프라우다는 4월30일 그의 죽음을 보도했다. 그리고 5월20일에는 두 개 면에 걸쳐 그의 유고(遺稿) ‘이 일에 대해 말하는 나의 책무’를 실었다.

보호·관리 시스템 결함 경고 무시
그의 글은 사고 당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소속 부처의 공산당회의에 참석한 그는 “우리 부에서는 ‘만사 순조’라는 보고에 익숙했지만 이 보고는 특히 승리의 전투 보고와 닮아 원자력산업·원자력학의 찬가를 부르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보고의 마지막에서는 체르노빌 사고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가 경솔한 짓을 저질렀으나 원자력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는 식으로 결론지어졌다는 것이다. 회의 후 그는 비행기를 타고 키예프로 날아갔다. 공항에서 사고 마을로 향하던 중 자신은 이 사고가 ‘전 지구적 사건’, 폼페이 멸망과 같은 ‘인류사에 남을 사건’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사고수습대책팀의 책임자가 됐다.  

“체르노빌 원전에 도착하니 나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수십년간 취해온 잘못된 경영방식의 피날레, 그 모든 것의 도달점이라고. 물론 체르노빌 사고에는 구체적인 책임자들이 있다. 이 원자로의 보호·관리 시스템에는 결함이 있고, 이를 아는 수많은 연구자들은 그 결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건설책임자는 추가공사를 꺼리고 보호·관리 시스템을 고치는 일을 서둘지 않았다.”

경고했던 사고가 터졌고, 그는 책임을 진 것이다. 그의 회상에는 체르노빌 사고에 맞서 싸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도 담겨 있다. “나는 몇 번이고 4호기의 매우 위험한 구역에 들어갔다. 나는 사람들에게 투입될 곳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도와줄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대열을 떠나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비극이 도사렸지만 그들이 재빠르게 움직여줘 기분이 고양됐다.”

올해 4월26일 체르노빌 25주기 기념식에서는 후쿠시마 사고가 언급됐다. 체르노빌 사고현장에서 일한 바 있는 한 명이 일본 TV에 “후쿠시마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우리의 형제다. 힘내라”고 말했다. 인류는 두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교훈을 살려야 한다. 

11. 05. 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엊저녁에 뒤적거린 책은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이다. 도서관에서 <교양인의 책읽기>(해바라기, 2004)를 대출해서 비교해가며 몇 장을 읽었는데, 번역이 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진 않아서(블룸의 문장을 만족스럽게 옮기는 것이 가능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원서를 주문했다. 완역본이 아니어서 제쳐놓았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도 할인판매를 하길래 주문하고(예전에 도서관에서 잠깐 빌려서 보긴 했는데, 그 또한 원서를 구해야 할지는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오늘 잠시 들여다본 책은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어크로스, 2011)다. 제목대로라면 관심이 덜했을 텐데, 원제가 '부조리의 시대'이고, '행복의 부조리'에 대한 성찰이 주제다. '부조리'라면 또 관심사에 든다. 당장은 아니지만 대린 맥마흔의 <행복의 역사>(살림, 2008)와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김영사, 2006)와 같이 묶어서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존의 미리보기를 참고하여 앞부분만 읽어보니 '당신이 찾는 행복은 없다'는 1장의 원제는 '행복의 부조리'이다. 번역본에서는 구분이 사라졌지만 전체 4부 구성에서 1부가 문제의 제기(The Problems)이고 1장이 1부에 해당한다. 무엇이 '행복의 부조리'인가? 행복 추구의 모순을 잘 정리해준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 자신의 행복 이외에 다른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들... 만이 행복하다... 그렇게 다른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 도중에 그들은 행복을 발견한다... 행복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기회다."(14쪽) 

즉 행복을 목표로 삼아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행복의 부조리'이다. 그것은 오직 부산물로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행위'였다. 그리고 '행복'이라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오히려 '번영(flourishing)'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행복학'이란 조어에 가장 강력한 후보는 '에우다이모닉스Eudaimonics'이다. 번역본에서 '에우다이모닉'이라고만 음역한 것은 좀 인색하다).   

히말라야에 있는 부탄왕국에서 전국행복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는데, 저자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그 위원회의 첫번째 임무는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역시나 만만찮은 일이어서 위원회의 대변인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세기에는 젊은이들에게 영웅이 누구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왕을 꼽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랩 음악가를 꼽는 사람이 50%에 달한다."(12쪽) 

 

호응관계가 맞지 않는 듯싶어 확인해보니 '랩 음악가를 꼽는 사람이 50%'란 말은 'rap artist 50 Cent'를 잘못 옮긴 것이다. 50 Cent는 1975년생의 래퍼다. 요즘 젊은이들의 꿈은 왕이 아니라 래퍼라는 것.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만큼 행복을 정의하기란 요령부득이다. 플로베르의 한마디가 그래서 핵심을 짚은 듯이 보인다.  

"어리석음, 이기심, 건강은 세 가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15쪽)  

그대, 행복을 원하는가? 일단은 어리석고 볼 일이다... 

11. 05. 01.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5-02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2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5-02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그럼 전 행복해질 가능성이 농후하군요. 어리석은 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으니까요 ㅋㅋ 죄송합니다. 그냥 한번 웃자고 해본 소립니다. 그래도 잠깐 행복했네요^^

로쟈 2011-05-02 09:30   좋아요 0 | URL
이기심과 건강을 잊으신 건 아닌지요?^^

비로그인 2011-05-02 15: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무튼 행복한 5월을 보내시길...^^

델러웨이부인 2011-05-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cent가 50%로? 재밌네요~ ^^;;;

로쟈 2011-05-03 20:31   좋아요 0 | URL
^^;

두비 2011-05-0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구.... 로쟈님 비롯해 독자여러분께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재판 찍을 때 꼭 고치겠습니다. (이런 실수는 출판사가 할 말이 없습니다. ㅠㅠ 재판 찍을 기회가 오면 좋겠네요.)

로쟈 2011-05-03 20:31   좋아요 0 | URL
재밌는 책인데, 옥에티가 있더라구요...
 

낮에 택배로 받은 책은 건축 전문지 <공간>(522호)이다. 이달의 북리뷰로 김형진의 <미술법>(메이문화, 2011)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생소한 분야의 책이어서 골랐지만 사례 중심이어서 아쉬웠다.  

공간(11년 5월호) 미술법 

“법과 예술이 만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또 피하는 것만이 상책은 아닐 때도 있다. 미술이 자기만족적인 행위를 넘어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될 때, 미술시장과 미술산업의 대상, 곧 ‘예술상품’이 될 때 미술은 법과 충돌하며 또 법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실상 법의 간섭은 피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법의 도움은 받고 싶은 것이 ‘미술 본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로 피하는 것보다는 알아두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 아닐까.   

김형진의 <미술법>은 ‘더 좋은 방책’을 마련하는 데 유용한 가이드북이다. 저자는 지적재산권 분야를 전문 변호사로 대학에서는 미술법을 강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술법은 “미술에 대한 법을 말하는 것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술법(Art Law)’이란 말 자체가 아직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지만 법조항에 미술법이 특정돼 있는 건 아니므로 ‘미술과 관련한 법’으로 느슨하게 이해해도 되겠다. 사실 미술작품에 대한 저자의 정의 자체가 포괄적이면서도 느슨하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작가가 미술작품을 만들려고 했고 그렇게 하는 데 분명히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미술작품”이라고 정의내리기 때문이다.   

저자가 들고 있는 사례지만 2001년 영국 미술계 최고의 영예인 터너상을 수상한 작가 마틴 크리드가 발표한 ‘작품번호88, 구겨서 공이 된 A4 용지 한 장’을 보더라도 그렇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종이를 구긴다면 쓰레기가 될 뿐이지만 터너의 구겨진 종이는 뒤샹의 ‘변기’가 그랬던 것처럼 당당히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품으로 간주될 경우에는 ‘대우’가 달라진다. 통관 시 관세면제 혜택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저작권법과 여러 관련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은 미술작품이 법과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은 자료집처럼 구성돼 있다. 저작권에 관한 내용이 아무래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와 외설 문제, 미술품 관련 범죄, 미술과 전쟁, 미술과 세금 등 흥미로운 주제들도 포함돼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일부를 우리에게 반환한 사례와도 맞물려, 특히 작품의 소유권에 관한 장들이 눈길을 끈다.  

저자에 따르면 대체로 대륙법 국가들은 원소유자보다 현 소유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유럽 국가들은 도난 발생후 시효가 지나면 더 이상 원 소유자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영미법에서는 현 소유자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것과는 달리, 가령 프랑스에서는 설사 현소유자가 선의의 취득자가 아니더라도 도난 사건이 일어난 후 30년이 경과하면 원 소유자는 반환받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프랑스 정부는 시효에 관계없이 장물에 대해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소 편의적인 법적용이란 인상이다. 자신이 훔쳐온 물건에 대해서는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남이 훔쳐간 자기 물건에 대해서는 반환청구권을 인정하는 셈이니까.   

프랑스의 사례라면 역사적 배경이 없지 않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군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엄청난 양의 미술품을 조직적으로 노획하고 약탈하여 나폴레옹미술관에 채워놓았다. 바로 루브르 미술관의 전신이다. 이렇게 약탈해온 미술품을 프랑스는 일체 돌려주지 않았다. 이와 견주어볼 만한 것이 2차 대전 시 소련의 약탈 사례다. 전쟁기간은 물론 전쟁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 가운데는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약탈해온 미술품도 상당수 있었다. “소련이 보관하고 있는 많은 미술품 중에서 일부 밝혀진 발딘 컬렉션(Baldin Collection)은 약 2천 350만 달러 상당의 미술품으로 반 고흐, 뒤러, 렘브란트 등 거장의 작품이 포함돼 있었다.”   

요컨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995년부터 러시아의 푸시킨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는 이들 약탈 문화 재산의 전시가 시작됐다(개인적으론 2004년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본 인상파 컬렉션이 인상적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로선 유감스럽겠지만 미술품의 반환요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다.   

미술법이 문제되는 갖가지 사례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미술품 훼손 사례다. 지난 2006년에 벌어진 일인데 세계적인 재벌 스티브 윈이 소장품인 피카소의 1932년작 ‘꿈’을 친지들에게 자랑하다가 그만 팔꿈치로 그림을 치는 바람에 2인치 정도 파손했다고 한다. 시가 1억 3900만 달러에 매각할 예정인 그림이었다. 비록 복구하긴 했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수천 만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게 된 그는 매각 결정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냥 간직하기로 했다고 한다. 한숨을 돌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하느님, 그래도 제가 그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정말로 그의 안도에는 동감하는데, 훼손 당사자가 소장자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 ‘기념비적인’ 훼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사람 피네로 카나타라면 예외였을까.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미술품을 훼손한다는 ‘상습법’ 카나타는 피렌체의 다비드 상에서 발가락을 자르고 잭슨 폴록의 작품에 매직을 칠한데다가 몬드리안의 그림에 오물을 토한 화려한 전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세계적인 재벌이라 한들 스티브 윈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아닐까 싶다. 

11. 04.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