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와 전체주의의 기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부터인가 화요일 연재에서 금요일 연재로 바뀌었다. 점심때까지 아이템을 놓고 고심하다가 '난세의 후흑학'에 대해 쓰기로 하고 서두로 '법가' 얘기를 꺼냈는데, 그걸로 그냥 분량이 차버렸다. 후흑학 얘기는 꼼수로 아껴두기로 했다.  

   

경향신문(11. 09. 02) [문화와 세상]승승장구하는 ‘법가들’

중국 전국시대에 나온 법가사상은 알다시피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법가에 근거한 가혹한 통치가 시황제 사후 진나라의 몰락을 초래했고 뒤이은 한나라 무제는 유가사상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다. ‘냉혹한 법가’ 대신에 ‘부드러운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고 법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아니다.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저자 정위안 푸는 중국에서 관이 주도한 정통 유교가 실상은 정통 유가의 수사법을 법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혼합물이었다고 말한다. 겉은 유가이지만 속은 법가라는 의미의 ‘외유내법’이 그 결과물이다.

법가의 목적은 군주와 정부가 백성의 사회생활 거의 모든 부분을 무제한의 권력으로 통제하는 사회질서의 구축이었다. 법가에 따르면 백성은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가축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법가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 천지는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다룬다”(도덕경)는 도가의 통찰을 더욱 확장한다. 군주에게 백성은 가축이자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법가는 군주의 이익이 곧 ‘공익’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최고 지배자로서 군주는 ‘공공’을 대표하기에 군주 개인의 이익이 곧 ‘공공의 이익’과 같다. 이러한 공공의 이익을 지키고 무지한 백성의 ‘사적 이익’을 막는 것이 법의 중요한 역할이다. 법가가 주장하는 ‘법치’란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일 따름이다.

정위안 푸는 중국 정치에서 법가의 중요성이 마키아벨리가 서양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법가의 요체는 마오쩌둥에 의해서도 계승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법가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장악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법가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법가적 전통에 대한 이런 통찰이 남의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 같진 않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혹 민주주의란 허울을 앞세운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교적 국가체제가 민주공화국 체제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권력자의 이익이 곧 ‘국익’이라는 법가적 관점이 폐기된 것 같지 않다. 요즘엔 그 권력이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이원화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군주, 곧 권력자를 제외하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법가의 평등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법가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상대적 법치도 다 포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민은 과거의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제물로 귀하게 쓰이다가 제사가 끝나면 버려지는 지푸라기 개처럼, 선거철에만 귀한 대접을 받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시 ‘가축’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사실 조작적인 여론몰이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심리’는 법가의 육질 좋은 먹잇감이다. 공권력의 남용과 편의적 법적용에 앞장서며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법가들’ 말이다. 어쩌면 비싼 대학 등록금을 비롯한 고비용의 교육체계 배후에도 백성을 지적으로 열등하고 무지한 채로 놔두어야 한다는 법가의 가르침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백성이 유순하고 무지해야, 군주는 세속의 모든 쾌락을 즐기면서 천하를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게 법가의 생각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얘기인가

11. 09. 01. 

P.S.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역자는 '옮긴이 서문'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가 2009년 용산사태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를 다시 되묻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란 말인가? 왜 형법만 더 강화되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에는 법가의 잔재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는데도 국내에는 이를 분석한 책이 거의 없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역자는 법가적 전제 정치를 우선 박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법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말이다.(11쪽)  

'법가적 전제정치'를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외피를 쓴 '법가적 법치주의'라면 어떨까. 현재의 공권력이 휘두르는 전횡적 법치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는 견제할 수 있을까. '사법개혁' '검찰개혁'이 구호로만 남아있는 현실은 역자가 희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직은 요원하다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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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우껴 2011-09-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닌가요?

댓글들에서 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이거 본의 아니게 결례했네요..^^;

로쟈 2011-09-03 09:20   좋아요 0 | URL
댓글에서 보셨을 수는 있겠는데, 아무튼 제가 쓴 기억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