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통의동의 '갤러리 시몬'에서 오늘부터 10월 18일까지 황혜선 작가의 개인전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이 열린다(02-549-3031). 몇년 전 개인전 도록에 작가론을 실은 인연으로 이번에도 전시회 도록 서문을 쓰게 됐다.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

 

오랜만에 황혜선 작가에게서 연락을 받고 갤러리를 찾았다. 새 개인전의 서문을 부탁받은 참이다. 잠시 작가를 기다리는 동안 전시장 1층에서 ‘풍선들’과 ‘풍선을 든 아이’를 보았다. 풍선과 풍선장수라는 소재는 낯설었지만 곧 ‘황혜선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익은 스타일의 드로잉이었기 때문이다.


널따란 공간에서 인물들은 제각각 자기 몫의 풍선을 들고 서 있었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들. 바람은 바람(風)이면서 바람(願)이다. 풍선들의 풍만함은 그 바람들의 풍만함이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리려는 자세로 충만한 풍선들. 작가는 물론 이 풍선들을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감정이입이 없다면, 풍선과 풍선을 든 사람들은 한낱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포착행위가 드로잉-조각의 입체감을 얻게 될 때 거기엔 어떤 의지가 개입한다. 그것을 오래 응시하고 보존하려는 의지 말이다.


어떤 것이 놀랍거나 진기할 때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의 충동은 본능적이다. 하지만 풍선이나 풍선을 든 아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진기한 오브제가 아니다. 유원지에서 그런 풍경은 일상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다. 작가는 아주 태연하게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천연스레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는 것 아닌가요, 라고 묻는다. 아니 그 질문은 과거형으로 읽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각자가 든 풍선을 채우고 있는 바람이 서풍이다. 적어도 황혜선의 세계에서는 서풍이어야 한다. 작가는 드뷔시의 전주곡에서 ‘서풍이 본 것’이란 제목을 따왔다고 알려주면서, 거친 바람을 뜻하는 서양의 서풍과 달리 우리의 서풍은 ‘하늬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비유컨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아니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서풍이다.


돌이켜보면 작가는 언제나 그런 세계를 작품으로 형상화해왔다. 지난 2010년 개인전의 제목이 ‘아주 잠깐, 조금씩만(For a moment, Just a bit)’이었던 것도 떠올려볼 수 있다. 예컨대 손으로 떠올린 물이 손바닥에 머무는 한순간을 작가는 포착하여 오래 보존하고자 한다. 그런 순간들에 영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황혜선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조금씩만 변화해온 여정임에도 전시장 2층에서는 또 다른 황혜선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만나는 황혜선이다. 그의 많은 드로잉-조각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너무도 많은 ‘인물들’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주어야 한다. 주로 일상의 사소한 소품들에 주목해온 작가가 주변의 사람들과 여행지에서 본 인물들을 드로잉-조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에. 물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작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인물들의 한순간과 그 순간의 표정, 그리고 자세를 보여주고자 한다. 정작 그들은 기억하지 못할 한순간일 테지만, 이 전시공간에서는 그 순간들이 그들을 굳건하게 대변하고 있다. 은박거울에 에칭으로 새긴 풍경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풍이 본 것’은 작가 황혜선이 본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같이 보게 된 것이다. 모두가 서풍이 되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을 잠시 내려다보는 순간, 그 ‘몇 초간의 여유’이다. 차를 마시는 아이, 책을 읽는 여인, 헤드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는 남자, 카페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노신사 등등 모두가 각자의 ‘몇 초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날들이 많지 않고, 그런 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포착해내는 작가의 태도에서 그런 조바심을 읽어낸다면 과장일까.


전시장 3층에서 우리는 작가의 작업실 풍경을 엿보게 된다. 황혜선이 내다보는 풍경이면서 서풍이 지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 잠시, 다만 몇 초간이라도 머물러달라고 작가는 제안하는 듯싶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으로 잠시 서풍이 되고 서풍의 바람맞이가 된다. 전시장 곳곳에서 우리 안의 나뭇잎이 잠시 흔들리는 소리를 당신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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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9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도올의 <사랑하지 말자>(통나무, 2012)를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미 많은 리뷰와 인터뷰가 나온 터라 뒷북성이 됐다(책의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에 실린 저자 인터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826153431 를 더 참고하시길 '나꼼수'의 최근 호외도 도올과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그래도 물론 현 시점에서 매우 요긴한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간경향(12. 09. 11) 청춘을 향한 도올의 부르짖음

 

고전 번역가이자 학술운동가인 도올 김용옥의 <사랑하지 말자>에는 ‘도올 고함(苦喊)’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소리’라고 할까. ‘서막’에서 그가 내비친 고통의 바탕은 4대강을 파(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갯벌을 파하고, 모든 산을 파하고, 모든 논밭을 파하고, 모든 촌락을 파하고, 모든 인민의 삶의 터전을 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서씨동물농장’에 대한 절망과 탄식이다. 젊은 학동과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그럼에도 자포자기 대신에 희망을 말한다. 희망의 근거는 이 세계를 변혁시킬 힘을 아직 ‘우리’가 갖고 있다는 긍정적 믿음이다. 반항과 거역과 항거의 주체로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 ‘청춘’이다. 편집자들이 뒤바꾼 순서라고는 하지만 책이 ‘청춘’이란 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온당하다.

 

<중용>의 말을 빌려서 도올은 청춘을 “중(中)에서 화(和)로 가는 끊임없는 발(發)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조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조화로 대체되는데, 그러한 ‘조화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끊임없는 불화(不和)이다. 이 불화를 가리키는 말이 곧 청춘이다. 청춘의 불화가 없으면 모든 문명은 활력을 상실하며 청춘의 모험이 없는 문명(文明)은 문명이 아니라 문암(文暗)이다. 문명의 부패다. 현 정권 하의 한국이 바로 그런 경우이며, 청춘의 실종이 낳은 결과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지난 20세기 한국사는 청춘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3·1운동에서 광주학생운동을 거쳐 4·19혁명과 군사독재정권 타도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학생문화의 정의로운 투쟁’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 ‘정의감의 찬란한 역사’가 이명박 정권 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춘의 모험’을 억압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한국의 청춘들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도올은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대해 학교측이 징계를 내린 사건을 “대한민국 청춘이 금권에 순응하는 항복을 선언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청춘은 무조건 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올은 청춘들이 그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되찾고 다시금 사회적 불의에 대한 투쟁에 나설 것을 독려한다. “조선의 역사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주체세력”이 바로 우리의 청춘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그 청춘들이 억눌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체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현재로선 그 체제 상부 권좌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은 ‘역사’와 ‘조국’에 이어 ‘대선’이란 장을 배치했다. 도올이 보기에 2012년 대선의 승자는 이미 박근혜로 결정돼 있다. 그가 ‘오늘의 승자’다. 문제는 그 승리가 이미 도를 지나쳤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권의 승리가 오히려 박근혜의 대선행보에 독이 될 것이라는 게 도올의 판단이다. 결과적으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 대선으로 미뤄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야권에 승산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민족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안철수나 야당 후보나 ‘무아(無我)’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게 도올의 주문이다. 대의를 위해서 뭉칠 때만이 승리의 가능성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혀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집필했다는 저자는 ‘청춘’에서 ‘대선’까지의 네 장은 필독해주기를 당부한다. 거기에 보태자면 뒷부분의 ‘종교’와 ‘사랑’ ‘음식’에 관한 장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와 더불어 한국인의 심령을 갉아먹기 시작한” ‘사랑’이란 말에 대한 비판은 대선주자들에 대한 평이나 대선 전망보다도 더 흥미롭고 유익하다.

 

1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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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콜르주드프랑스 강의'가 한권 더 번역돼 나왔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난장, 2012). '생명정치' 혹은 '생체정치' 등으로 옮겨져온 개념을 '생명관리정치'로 옮겼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기 위해서도 경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강의인데, 때마침 번역돼 나와 반갑다.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로는 다섯 번째로 소개된 책이기에 리스트로 묶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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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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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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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 동문선 / 2007년 3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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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인들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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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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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태풍이 지나가니 어느덧 9월이고 가을이다. 한낮의 더위는 한동안 계속될 듯싶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은 절기를 잊지 않았다. 9월은 '독서의 달'이기도 한데, 이름값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추천한 책은 편혜영의 <서쪽 숲에 갔다>(문학과지성사, 2012). 지난 6월에 나온 책이니 오히려 선정이 미뤄진 감이 있다. 나부터도 지난 8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골라놓았었으니까. 8월에 나온 책으론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 2012)이 있다. 숲에도 가보고 바다에도 가보고 하면 되겠다.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시카고'까지 다녀와도 될까.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문학동네, 2012)도 8월에 나온 책이고 9월에 읽어볼 만한 책이다.

 

 

 

외국소설로는 독일의 최근작들에 눈길을 돌려본다. 국적으론 스위스 작가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소설 두 편이 번역돼 나왔다. 1995년에 데뷔하여 평단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가라고 하는데, 데뷔작 <파저란트>(문학과지성사, 2012)와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문학과지성사, 2012) 두 작품이 번역됐고, 올해 나온 <임페리움>도 곧 소개될 예졍이라고. 2006년엔 북한을 방문하고 사진집 <총체적 기억 - 김정일의 북한>을 출간했다는 이력이 눈길을 끈다(이것도 소개되면 좋지 않을까). 샤를로테 링크의 <관찰자>(뿔, 2012)도 흥미를 끄는 작품. 작년에 독일에서 출간돼 한달만에 10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독일에선 이미 '국민작가'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는데, 평판으로 보아 우리에게도 더 소개될 듯싶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책은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역사의아침, 2012)이다. "망국의 풍경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 근대의 역사를 53가지 키워드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에서부터 일제의 잔인한 식민통치, 식민지시대의 다양한 풍경들, 독립운동의 씨앗과 발전과정, 망명정부와 만주의 삼부 통합운동까지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했다." 겹쳐서 읽어볼 만한 책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역사비평사, 2012)이다. 근현대 여성 공간으로서 명동을 다룬 김미선의 <명동 아가씨>(마음산책, 2012)도 흥미롭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책은 장-뤽 낭시의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갈무리, 2012)이다. 프랑스의 이 고명한 철학자의 책들이 몇 권 소개돼 있지만 이 책은 가장 쉽게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철학 입문서이면서 낭시 입문서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린이들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사랑하지 말자>(통나무, 2012)도 현 대선국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총체적, 우주적 시각을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도올 입문서로도 요긴하다는 생각이다. 서구의 동시대 철학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나이젤 워버튼이 <철학 한입>(열린책들, 2012)가 요긴하다. 정말 '한입'만큼씩의 인터뷰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래도 먹음직스럽다.

 

 

아, '한입 철학'의 대표격으로는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도 빼놓을 수 없겠다. 3권으로 완간됐는데(2권도 표지갈이를 했다), '철학 멀미증' 독자라도 부담 없이 들어볼 만한 '콘서트'이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고른 책은 츠베탕 토도로프의 <민주주의 내부의 적>(반비, 2012)이다. 문학이론가에서 사상가로 폭넓은 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저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거기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묵직한 저작 <정치질서의 기원>(웅진지식하우스, 2012)도 보탤 수 있겠다. 철학자 이정우의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인간사랑, 2012)도 '진보'라는 화두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우리의 생각을 자극한다.

 

 

 

'진보' 얘기가 나온 김에 진보 지식인 특강을 책으로 묶은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2012)도 읽을 거리다. 소위 '진보'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다산북스, 2012)도 같이 읽을 만한 정치비평서. 김대호, 윤범기의 <안철수의 생각을 생각한다>(필로소픽, 2012)는 이번 대선의 '최대 뉴스메이커'이자 최대 베스트셀러의 저자 안철수의 생각을 점검해보는 책.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추천한 책은 에이드리언 올드리지와 존 미클스웨이트의 <경영의 대가들>(더난출판, 2012)이다. 저자들은 <이코노미스트>지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기업, 인류 최고의 발명품>(을유문화사, 2011)도 같이 낸 바 있다. 국내에서도 많이 읽히는 경영이론가들, 경영 구루들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도 유용하다 한다. 경영서를 읽기 전에 읽을 책이라고도 하니 경영이론에 대한 가이드북으로 삼을 만하겠다.  

 

 

 

6. 과학

 

김웅서 위원이 고른 책은 진정일의 <진정일 교수, 시에게 과학을 묻다>(궁리, 2012)이다. "저자는 한 평생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쳐온 과학자이다. 그러나 여느 과학자와 남다른 데가 있다. 평소 시를 좋아해서 시집을 늘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 자연스레 시 속에 등장하는 과학 용어에 주목하고 일반 독자들이 어려워하는 과학을 시를 통해 풀어 가면 어떨까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

 

 

 

'시에게 과학을 묻는다'고 하니까 떠오르는 책은 시 쓰는 화학자(심지어 노벨화학상 수상자) 로얼드 호프만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까치, 1996)가 떠오른다. 울프 다니엘손의 <시인을 위한 물리학>(에코리브르, 2006)도 결과는 모르겠지만 애초의 의도는 제목대로인 책이다. 방식은 좀 다르지만 그러한 '크로스오버'의 대표주자 정재승 교수의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어크로스, 2012)도 빼놓을 수 없는 과학서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책은 송지원의 <한국 음악의 거장들>(태학사, 2012)이다. 저자는 드물게도 한국 음악사상사와 음악문화사를 전공했는데, <정조의 음악정책>(태학사, 2007),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 - 옛 음악인 이야기>(태학사, 2009) 등이 그간에 낸 책이고 <한국 음악의 거장들>은 우리 전통음악의 거장들을 망라한 '한국음악 명인열전'. 일종의 '인물사전'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잊고 지내던 소리들을 다시 끄집어내놓고 그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

 

 

 

8. 교양

 

교양분야의 책으로 내가 고른 건 우치다 타츠루의 <일본변경론>(갈라파고스, 2012)이다. 독도문제로 껄끄러운 관계가 계속 되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 좀더 알게 해주는 책인 듯싶어 골랐다.

불행한 근대사 때문에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이면서 동시에 심정적으로는 가장 먼 나라가 일본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서를 통해 일본을 이해하려 한다면 일본의 역사에 관한 책을 한두 권 손에 들면 되겠지만 겸하여 일본문화론도 읽어보면 좋겠다. 일본에서도 화제와 논란을 불러 모은 우치다 타츠루의 <일본변경론>은 가장 먼저 손에 꼽을 만한 일본문화론이다.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 특징이다. 먼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나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그간에 한국 독자가 가장 많이 읽은 일본문화론이지만 모두 바깥의 시각에서 본 경우라면, <일본변경론>은 일본의 지식인이 쓴 일본문화론이다. 다음으로, 대개 ‘자국문화 특수론’에 함몰되고 마는 일본 내부의 일본문화론과는 달리 저자가 이웃나라 사람들도 ‘일본을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명확한 의도를 갖고 쓴 예외적인 일본문화론이다.

 

 

9. 실용

 

손수호 위원이 추천한 실용서는 김정기의 <나를 좋아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인북스, 2012)이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많은 나라로 꼽힌다. 신생 학문이다 보니 다른 전공자까지 몰리는 데다 헬스커뮤니케이션 등 현대사회에 유용한 영역의 확장도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학자들이 이론의 틀에 갇혀 있다 보니 실생활의 효용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을 다루는 학문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다.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학의 대중 교양화를 위해 썼다는 데 미덕이 있다."고 추천의 이유를 밝혔다. 덧붙이자면, 최근에 <또 다른 세계화>(살림, 2012)란 책이 출간돼 알게 된 저자인데, 프랑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도미니크 볼통의 <불통의 시대 소통을 읽다>(살림, 2011)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개인적으론 어제 주문한 책이다.

 

 

10. 범죄소설

 

살인과 성폭력 사건이 이어지고 있어서 민심이 흉흉하기에 고른 주제는 '범죄소설'이다. '범죄'와 '범죄소설'은 별개라고 우기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김용언의 <범죄소설 - 그 기원과 매혹>(강, 2012)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입문서격이라면 추리소설에서 범죄소설로의 이행을 다룬 줄리안 시먼즈의 <블러디 머더>(을유문화사, 2012)와 20세기 미국 범죄소설사로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뮤진트리, 2011)은 '깊이 읽기'감이다. 현실이 범죄적인데, 굳이 범죄소설까지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흠, 할말은 없지만...

 

12. 09. 02.

 

 

P.S. '9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번역제목으로도 친숙한 작품으로 스페인어권에서는 <돈키호테> 다음으로 많이 팔리고 읽힌 소설. 그러니 군말이 필요없긴 하다. 국내에서는 안정효 선생이 옮긴 <백년 동안의 고독>이 중역임에도 아직까진 더 많이 읽히는 듯하다. 단권 번역이라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원전 번역인 민음사판도 통권으로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들고 다니기엔 분권이 낫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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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주제로 한 강의도 종종 하다 보니 독서법에 관한 책도 읽게 된다. 공부를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강의를 위해 읽는 셈인데, 오늘 배송받은 책은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21세기북스, 2012)이다.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이 부제. 지금은 100세를 넘긴 하시모도 다케시라는 한 국어선생님의 '전대미문의 수업'을 소개하는 게 책의 골자다.

 

 

 

1950년대부터 이분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 수업은 "교과서는 들춰 보지도 않은 채 얇은 소설책 한 권으로 3년 동안 공부"하는 '기적'의 수업이었다. 이걸 미독(味讀)이라고 부르는데, 음미하면서 읽는다는 뜻이겠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시모토의 제자들은 전후 빠르게 전개된 성장사회, 속도사회에 역행하기라도 하듯 느리게 그러나 착실하게 '배우는 힘'과 '살아가는 힘'을 익혔다. 그 결과 <은수저> 수업 3기에 해당하는 1968년 졸업생은 사립학교 사상 최초 도쿄 대학 최다 합격이라는 위헙을 달성한다. (5-6쪽)

성공작이었다는 얘기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은 2009년 일본의 최고재판소 제23대 사무총장에 취임한 야마사키 도시미쓰인데,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우연히 재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궁극의 만능선수랄까요,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事象)을 다룹니다. 판결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법률지식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교양이랄까, 그것의 바탕이 되는 사고방식,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본다는 사고입니다. 그런 모든 사고의 뿌리를 하시모토 선생님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31쪽)

찾아보니 제자들에겐 '에티 선생님'이라고 불린 하시모토 다케시의 책도 번역돼 나왔다.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슬로 리딩>(지식트리, 2012)이 그것이다. 책소개는 이렇다.

슬로 리딩의 창시자이자 하시모토 다케시는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놀이’를 통해 ‘배움’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을 주고자 ‘은수저 슬로 리딩법’을 고안해 냈다. “배우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단순히 “‘논다’라는 기분으로 배우면 되지 않겠니?”라고 대답하기보다는 교사 스스로 아이들의 눈높이와 요구에 맞게 교재를 개발하고 교안을 마련하고자 한 데서 슬로 리딩법은 시작됐다. 이후 하시모토 선생의 ‘슬로 리딩’ 학습법은 그의 제자들인 소설가 엔도 슈사쿠, 도쿄대학 총장 하마다 준이치, 최고재판소 사무총장 야마사키 도시미쓰, 가나가와 현지사 구로이와 유지 등이 집필한 <기적의 교실>, <은사의 조건> 등에 소개되었고, 이를 NHK에서 자세히 취재, 방송함으로써 일본 열도에 슬로 리딩과 고전 읽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100세를 맞이한 하시모토 선생은 나다 중학교로 복귀, 토요 특강을 통해 원조 ‘슬로 리딩’을 강의하고 있다.

100세 이후에도 강의를 한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여하튼 그의 슬로 리딩이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듯싶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에서 제안하는 '슬로 리딩', 곧 지독(遲讀)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모든 책을 다 '지독'하거나 '미독'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권 정도는 그렇게 읽는 경험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육적 효과면에서도 그렇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 2009)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에 대해 평해달라는 주문에 '걸어서 가는 소풍'을 비유로 든다.

일반적인 독서는 버스를 타고 휙 가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발짝 두 발짝 걷다가 길가의 꽃에 이끌려 발을 멈추고 이내 걸음을 옮기는, 그런 산책 같은 소풍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시모토식 '슬로 리딩'입니다.(41족)

우리 교육현장에서도 이러한 '슬로 리딩'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속독으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하시모토 선생이 교재로 사용한 나카 칸스케(간스케)의 <은수저>(세시, 1997)는 번역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은수저>만이 미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물론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은수저>처럼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읽으면 실력이 붙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답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초등학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중고생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대학생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인이라면 <논어> 정도가 좋습니다.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세계가 있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치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41쪽) 

모두가 '구면'인 작품이라 반가운데, <논어>를 제외하면 개인적으로는 모두 강의해본 작품들이다. 특히 <죄와 벌>은 6주간 읽은 적도 있다. 3년짜리 '슬로 리딩'에는 많이 못 미치지만, 한 1년간 읽는 건 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하고 있는 지젝 강의도 마찬가지인데, 얇은 책이더라도 몇달 간 같이 읽는다면, 그만큼 '실력'이 붙지 않을까. 그런 게 슬로 리딩의 힘이다...

 

12.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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