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이번 달 '사람과 책'에서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원고를 쓰느라 지난 8월에 다시 읽은 고전이 오웰의 <1984>였다. 여러 번역본 가운데 문학동네판으로 읽으면서 다른 주요 번역본들로 참고했다. 자투리 독후감은 지난주 한겨레 칼럼에 쓰기도 했지만, 얘깃거리들은 더 많이 남아 있다. 전기적 내용과 관련하여 참고한 평전은 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이학사, 2003)인데, 최근에 나온 고세훈 교수의 <조지 오웰>(한길사, 2012)를 방안에 두고도 못 찾아서 참고하지 못했다. 평전으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왜 오웰이 중요한가>도 주문해놓은 터여서 나중에 같이 읽어보고 싶다.

 

 

 

사람과 책(12년 9월호) 감시사회, 그 '오래된 미래'

 

‘<동물농장>의 작가’, 아마도 조지 오웰(1903-1950)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려줄 만한 별칭이다. 국내에서는 <1984>와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오웰의 대표작인 만큼 이상할 건 없지만, 오직 ‘<동물농장>의 작가’로서만 기억된다면 오웰로서는 좀 억울할 법하다. 그리고 실상이 그랬다. 전체주의를 비판한 두 ‘우화적’ 소설이 한국에서는 ‘반공소설’로 읽히고 또 권장됐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임한 작가의 운명 치고는 다소 고약했다고 할까. 


국내에서 나온 첫 평전 <조지 오웰>(이학사, 2003)을 쓴 박홍규 교수에 따르면, <동물농장>(1945)이 세계 최초로 번역된 건 놀랍게도 한국어판(1948)을 통해서였다. 우리와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반가워할 일만은 아니다. 미국의 해외정보국이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작품의 소개를 주선했기 때문이다. 오웰이 예술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을 결합시키려고 한 이 ‘정치소설’만큼 정치적으로 이용된 작품도 드물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 ‘반스탈린적 풍자소설’이 반공주의 계몽과 계도에 유용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아이러니컬한 것은 바로 그런 정치성 때문에 정작 영국에서는 출간에 애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은 영국과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우고 있었기에 출판사들은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대한 이 풍자소설의 출간을 꺼렸다. 한편 미국에서는 ‘동물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오해받아서 역시나 출간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1944년에 탈고한 <동물농장>은 우여곡절 끝에 1945년 8월에야 출간됐고 이듬해 나온 미국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웰은 비로소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마지막 작품 <1984>를 집필할 수 있는 생활의 여유도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지병인 폐결핵이 점차 악화돼 가던 참이었다. 1948년에 탈고했기에 제목을 <1984>라고 붙인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49년에 출간돼 20세기 디스토피아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는다.    

 

 


따지고 보면 <1984> 또한 우리와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1984년 1월 1일 아침에 전 세계 안방에 방송된 위성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백남준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중학생이었던 당시 ‘오웰’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고 서점에 가서 막 나온 <1984>를 구입해 읽은 기억이 있다. 1984년에 읽은 첫 책이 <1984>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오웰과 인연이 없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한 ‘반공문학’ 작가란 평판 때문에 80년대 대학가에서도 오웰은 널리 읽히지 않았고, 강한 정치성 때문에 문학적으로 대단치 않은 작가로 폄하됐다.

 

 

 

이런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 같은 그의 르포르타주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같은 에세이집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부터다. 박홍규 교수의 평전에서 “특히 그의 수많은 에세이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 에세이는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를 철저히 비판한 것이기에 대부분 소개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사뭇 대조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반공주의자 오웰’에서 ‘사회주의자 오웰’로 작가의 이미지가 이동했다고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정치성과 문학성을 결합시키려는 오웰의 시도는 문학과 예술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재평가됐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1946)에서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의식하면 할수록, 자신의 미학적·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고 적었다. 정치적 편향이 미학적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일반적 통념과는 정반대로 그러한 편향성이야말로 진정성을 희생시키지 않게끔 한다는 것이 오웰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적 입장이란 무엇인가?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자신이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영국 북부노동자들의 생활을 취재한 <위건부두로 가는 길>(1937)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에 대한 르포 <카탈로니아 찬가>(1938)에도 관철된다. 그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의용군으로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했다가 좌익 내부의 분열을 목격하고 얻은 결론은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해선 ‘소련 신화’의 파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물농장>의 집필 의도였고 <1984>는 그 연장선상에서 쓰인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란 글에서 로렌스 멀킨은 “소설로서 <1984>는 특별히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보다는 우화에 가깝고, 우화보다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다.”고 평했다(윌리엄 랭어 편,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푸른역사). 이러한 평가는 한편으론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한 작품이 치르는 대가이기도 한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사회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주제는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도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성취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은 과연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판타지’에 불과한가? 민간인사찰이 무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빅브라더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감시사회보다 과연 얼마나 나은 사회인가? 아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구조를 들여다본다면 과연 오늘날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984>에서 세계는 핵전쟁 이후에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초대형 국가로 분할돼 항구적인 전쟁상태에 놓여 있다. 이들 국가 중 두 나라가 연합한다고 해도 다른 한 나라를 정복할 수 없기에 세력 판도가 그대로 유지된다. 이들 국가의 기본적인 특징은 계급사회라는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속해 있는 오세아니아에서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절대적 존재로 당을 대신하는 빅브라더가 있고, 그 아래로는 인구의 2퍼센트 미만인 내부당원이 있다. 그리고 그 밑을 국가의 손발 역할을 하는 외부당원이 차지하고 있고, 이들 관료기구가 전체의 15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전체 인구의 85퍼센트는 ‘노동자’라 불리는 하층계급으로서 소위 ‘벙어리 대중’이다.


그러한 권력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권력인 당이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수의 당원들이다. “노동자들은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둬도 그들은 몇 대가 지나도록, 몇 세기가 지나도록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도 파악할 힘이 없이 일하고 자식을 키우며 죽어가는 것이다.” 반면에 “당원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사상경찰의 시선 안에서 살아간다.”

 

‘진리부’라는 행정관청에서 역사변조를 담당하는 공무원 윈스턴은 외부당원이며, 따라서 그러한 감시하에 놓인다. 그는 당이 강요하는 변조된 진실 너머 역사적 진실이 따로 있다고 믿고 반역을 꾀하지만 체포돼 고문을 받고서 ‘치유된다’. 윈스턴은 너무도 허술하게 반역을 기도하지만 당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응징된다. 그가 끔찍한 고문상황에 처하게 되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배신하고 결국엔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러한 음울한 결말이 집필 당시 건강이 악화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오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지식인 계급에 대한 작가 불신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윈스턴은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오웰을 닮았다. 그는 ‘빅브라더 타도’를 은밀히 결심한 이후에 자신이 죽은 목숨이고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줄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생전에 뭐 하나 바꿔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그러나 여기저기서 소규모의 저항이 일어나 사람들이 조금씩 떼를 이루고, 점차 불어나 후세에 기록을 몇 가지라도 남기게 되면 우리가 죽은 뒤 다음 세대에서는 수행할 수 있을 테지.”

 

그렇듯 ‘미래는 노동자들의 것’이라는 게 윈스턴의 신념이었다. 과연 오늘날 계급화된 자본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노동하는 다수는 ‘벙어리 대중’인가 아니면 ‘미래의 주인’인가. 그런 질문이 아직 유효하다면 오웰의 <1984>는 ‘오래된 미래’이다.

 

12.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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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월간 공간(53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에 대해 적었는데, 마저 못 다룬 내용은 '글래머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5802399)란 페이퍼에서 다루기도 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절판된 열화당판을 말한다.

 

 

 

공간(12년 9월호) 다른 방식으로 보기

 

“나는 이 책을 사십 년 전에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습니다.” 새롭게 번역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존 버거가 꺼낸 서두다. 1972년 영국 BBC 방송의 연속강의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의 대본이었으니 말 그대로 ‘사십 년 전’이다. 문제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이 저자의 믿음대로 ‘아직도’ 유효한가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종수로만 보자면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충분히 ‘고전’에 값한다. 그간에 각기 다른 제목으로 3종이 번역돼 나왔고,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란 제목이 붙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자이기도 한 최민 교수는 제목을 그렇게 옮긴 이유에 대해 이 책이 “기존의 아카데믹한 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이라고 알려지고 이야기된 기존의 것들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강한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제에서 ‘방식’(the way) 대신에 쓰인 복수형 ‘방식들’(ways)을 ‘다른 방식’(the other way)이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다른 방식’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미지에 대한 기존의 보는 방식, 혹은 지배적인 해석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단적인 예로 버거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서의 해설을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할스는 말년에 자선기관의 신세를 지며 연명하는 처지였는데, 이때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 '자선요양원의 이사들'과 '자선요양원의 여이사들'이란 작품이다. 버거가 보기에 이 두 그림에서 “남녀 이사들은 이미 명성도 다 잃고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늙은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두 그림이 보여주는 ‘놀라운 콘트라스트’고 드라마다. 하지만 정작 미술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연구서의 저자는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개성적 시각을 의연하게 지키려는 할스의 노력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력들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해설에 대해 버거는 “바로 이것이 신비화”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보기에 초상화가로서 할스의 의의는 문학에서 발자크가 이룬 성취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자본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난 새로운 인물유형과 그들의 표정을 최초로 묘사한” 데 있다

 

버거는 또한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 빈치의 소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이 한 미국인이 이백오십만 파운드에 사려고 하는 바람에 갑자기 유명해진 사례도 지적한다. 이후에 이 그림은 특별 전시실에 걸려 있는데, 버거는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가격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지만 버거는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시각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미술을 바라본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권위를 통해서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예술을 경험의 모든 측면과 관련시켜서 보는 ‘총체적인 접근’과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몇몇 전문가들의 ‘비교주의적(秘敎主義的) 접근’을 구분하자는 제안도 그런 입장에서 나온다.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통해서 미술을 다르게,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버거는 누드화와 유화, 그리고 광고라는 세 가지 주제 혹은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실천한다. 그는 먼저 미술에 나타난 성차별적인 재현방식을 문제 삼는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자는 능력에 따라 존재감을 갖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결정된다. 미술에서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누드화이다. 벌거벗음(nakedness)이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누드(nude)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전시되는 것이다. 곧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유럽의 누드화에서 보여지는 대상은 보통 여자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인 화가나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 깊이 각인돼 있다는 것이 버거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페미니즘 시각이론보다 앞서 나온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린 유화적 전통에 대해서도 버거는 그것이 재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자본주의 문화와 깊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 “재산과 교환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유화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유화의 본질적 특성에 따를 때 화가의 역할은 물질적 재산을 칭송하는 것에 불과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바로 그런 전통의 규범을 깨뜨리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렘브란트와 푸생, 샤르댕 고야 혹은 터너 같은 화가들은 진정한 후계자를 남길 수 없었다고 버거는 말한다. 


버거의 비판적 통찰은 현대의 광고를 유화와 연관 짓는 대목에서 더욱 빛나는데, 광고는 유화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실제 사물들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게끔 한다. 하지만 유화의 경우 소유주가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주는 데 반해서, 광고는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생활방식에 불만을 갖게 한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광고의 메시지다. 그와 함께 광고는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소비에서의 선택으로 대치함으로써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든다. 비민주적인 모든 것을 은폐하면서 광고가 자본주의 문화의 꿈이자 생명으로 각광받는 이유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서양미술사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가 갖는 사회적 역할과 의미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견해들을 제시한다. 사십 년이 지났지만, 요즘 나오는 미술사나 시각이론서들이 오히려 온건해 보일 정도라면 여전히 필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12.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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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지난주와는 달리 눈길을 끄는 책들이 많아서, 적어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는 넘어서 주제를 '법과 정치' 쪽으로 한정했다. 타이틀은 한상범, 이철호 교수의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삼인, 2012)에서 가져왔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독재 정권의 지배 법리와 지배 수법을 되돌아보고 이를 토대로 역사와 민주주의가 역주행하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점검하자는 것이 이 책의 출간 목적"이라고 저자들은 밝혔다. '작은 책자'이긴 하지만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뜻에서 타이틀로 골랐다.

 

 

두번째 책은 조유진의 <헌법 사용 설명서>(이학사, 2012). "우리가 몰랐던 헌법의 이면, 대한민국헌법의 모든 것. 이 사회를 살아가는 공화국 시민들이 헌법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자로서의 위상을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 책이다. "헌법이 나라의 근본법으로 살아 움직이길 희망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라고 조국 교수는 추천사에서 적었다. 학술서이긴 하나 헌법의 탄생과정에 대해서는 서희경의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 2012)을 참고할 수 있다. 세번째 책은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31>(현암사, 2012)이다.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가 부제. 어떤 내용일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다. "법을 전공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와 설득력 있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께 강력히 추천한다"고 금태섭 변호사는 적었다. 세 권의 법 관련서에 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문학과지성사, 2012)와 베네수엘라 현장 활동가들이 쓴 <사회주의는 가능하다>(시대의창, 2012), 두 권을 얹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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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
한상범.이철호 지음 / 삼인 / 2012년 8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1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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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사용 설명서- 공화국 시민, 헌법으로 무장하라
조유진 지음 / 이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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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크 캐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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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새로운 정치 토론을 위한 원칙
로널드 드워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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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실은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한 대목을 다뤘다. 번역본이 많이 나와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7-8종인데,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들을 주로 참고했다. 분량상 에리히 프롬의 말을 말미에 덧붙이지 못했다. "오웰의 작품은 강력한 경고이다. 만약 <1984>를 스탈린주의의 잔학함에 대한 또 다른 묘사로만 해석하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다."

 

 

 

한겨레(12. 09. 08) 무산계급이 잊고 있는 말 ‘다수는 힘이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며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지식인에 대한 회의와 노동자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일기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만 있다”고 적는다. ‘무산계급’ 대신에 ‘노동자층’이나 ‘프롤’이라고 옮긴 번역본들도 있다. ‘프롤’은 ‘프롤레타리아’에서 온 단어이리라. 그가 사는 가상국가 오세아니아의 인구 85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프롤이다. 여러 번역용례를 참고하면 윈스턴은 이 ‘피압박 대중’만이, 이 ‘우글거리고 경멸당하는 대중’만이, ‘저 거대한 소외집단’만이 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전체주의 체제의 오세아니아는 다수의 프롤과 소수의 당원으로 구성돼 있다. 당원은 다시 외부당원과 내부당원으로 구분된다. 외부당원인 윈스턴은 당과 빅브러더의 지배체제에 대한 반란을 꿈꾸지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내 반체제조직인 ‘형제단’이 소문대로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철저한 감시시스템 때문에 서로 모이기도, 알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반면에 무산계급 노동자들은 음모를 꾸밀 필요도 없다. “그냥 들고일어나서 파리 떼를 쫓는 말처럼 몸을 흔들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수이고 다수는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언젠가 윈스턴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거리를 지나다가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수백 명의 여자들이 절규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 줄 알고 흥분하지만, 알고 보니 노점상에서 파는 양은냄비를 구하려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인 것이었다. 왜 정작 더 중대한 일에는 함성을 지르지 못하는가.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는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윈스턴의 잠정결론이다. 무산계급의 반란은 말하자면 ‘가능한 것의 불가능성’이다.

당연하게도 당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힘든 육체노동, 가정과 아이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영화, 축구, 맥주, 도박”이 노동자 대중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걸 파악하고 있기에 그들을 관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정치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필요도 없다.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 배급량을 줄이는 식으로 통제하고 원시적인 애국심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984> 하면 떠올리게 되는 성욕에 대한 엄격한 규제나 텔레스크린을 통한 감시도 노동자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치안경찰도 그들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다. “노동자와 동물은 자유이다”가 아예 당의 슬로건이다.

그렇지만 윈스턴은 노동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직 생각할 줄 모르더라도 그들은 가슴과 배와 근육에 세계를 뒤엎을 힘을 기르고 있다. 윈스턴은 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널고 있는 튼튼한 아낙네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언젠가는 저 힘센 여자의 배에서 의식을 가진 종족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그렇게 도래할 것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12.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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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에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슬로 리딩의 힘과 즐거움에 대해서 적었다. 인용된 만델슈탐의 시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의숲, 2012)에서 가져왔다.

 

 

 

경향신문(12. 09. 07) 독서,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초등학교 때의 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속독법 특강이 있었다. 속독의 필요성과 요령에 대한 내용이었다. 비슷한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TV프로그램에서도 속독술을 ‘묘기’로 보여주기도 했다. 몇십 초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고 질문을 알아맞혔다. 속독술은 진기한 기술이면서 부러운 능력이었다.

한창 책을 많이 읽고 독서에 대한 욕심도 컸기에 <기적의 속독법> 같은 책을 구해서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안구운동법과 함께 지금도 생각나는 요령은 독서의 단위를 단어에서 문장, 문단으로 점차 확장해나가는 것, 대각선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 등이다. 크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연습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시집을 읽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툼한 소설책이라면 속독이 요긴하겠지만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얇은 시집을 속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속독이 만능은 아니란 생각에 속독에 대한 열의도 좀 시들해졌다. 빨리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읽는 것일 테니까.

무엇이 잘 읽는 것인가. 최근에 읽은 한 사례가 인상적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책은 하시모토 다케시라는 한 국어교사 이야기다. 원제는 <기적의 교실>이다. 올해 7월에 100살이 된 하시모토는 인생의 절반 동안 고베 시의 사립 나다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이 학교는 굴지의 입시명문고로 유명한데, 1968년엔 도쿄대학 최다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어떤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하시모토의 교수법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이다. 나카 간스케란 일본 작가의 자전적 소설 <은수저>를 3년 동안 읽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따로 없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직접 만든 학습교재를 통해서 작품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고 조별로 토론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썼다. 국어가 모든 공부의 기본이고 국어 실력이 살아가는 힘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하는 방식이 하시모토에게는 ‘슬로 리딩’이었다. “모르는 것 전혀 없이 완전히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책 한 권을 철저하게 음미하는” 지독(遲讀)과 미독(味讀)이 바로 슬로 리딩이다.

빨리 읽는 속독이 아니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 미독이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독서법이었다는 사실은 음미해볼 만하다. <독서법>의 저자이기도 한 사이토 다카시는 이 슬로 리딩에 대해서 ‘걸어서 가는 소풍 같은 것’이라고 평한다.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버리는 게 아니라 길가에 꽃들에도 눈길을 주어가며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기는 산책 같은 소풍이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넘어진다”는 셰익스피어의 경구는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고, 그 책들을 모두 슬로 리딩으로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통한 배움의 경험이 없다면, 독서는 후딱 지나가버린 인생만큼이나 빈곤할 듯싶다. 독서의 목적이 ‘읽어치우는 것’은 아니잖은가.

대학원 시절에 내가 들은 놀라운 수업 중의 하나는 만델슈탐이라는 러시아 시인의 4행짜리 시 읽기였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의/ 조심스럽고 둔탁한 소리/ 숲 속 깊은 정적의/ 연이어 들려오는 선율 사이로…”가 시의 전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 반영된 시인의 시학을 포함하여 시의 이모저모를 철저하게 읽어나가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옆길로 새는 것도 권장한 하시모토식 수업과는 달리 오직 이 한 편의 시에만 집중한 슬로 리딩 강의였다.

진정한 배움은 그런 수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슬로 리딩,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더 많이 가르치면 좋겠다.

 

12.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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