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통의동의 '갤러리 시몬'에서 오늘부터 10월 18일까지 황혜선 작가의 개인전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이 열린다(02-549-3031). 몇년 전 개인전 도록에 작가론을 실은 인연으로 이번에도 전시회 도록 서문을 쓰게 됐다.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

 

오랜만에 황혜선 작가에게서 연락을 받고 갤러리를 찾았다. 새 개인전의 서문을 부탁받은 참이다. 잠시 작가를 기다리는 동안 전시장 1층에서 ‘풍선들’과 ‘풍선을 든 아이’를 보았다. 풍선과 풍선장수라는 소재는 낯설었지만 곧 ‘황혜선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익은 스타일의 드로잉이었기 때문이다.


널따란 공간에서 인물들은 제각각 자기 몫의 풍선을 들고 서 있었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들. 바람은 바람(風)이면서 바람(願)이다. 풍선들의 풍만함은 그 바람들의 풍만함이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리려는 자세로 충만한 풍선들. 작가는 물론 이 풍선들을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감정이입이 없다면, 풍선과 풍선을 든 사람들은 한낱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포착행위가 드로잉-조각의 입체감을 얻게 될 때 거기엔 어떤 의지가 개입한다. 그것을 오래 응시하고 보존하려는 의지 말이다.


어떤 것이 놀랍거나 진기할 때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의 충동은 본능적이다. 하지만 풍선이나 풍선을 든 아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진기한 오브제가 아니다. 유원지에서 그런 풍경은 일상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다. 작가는 아주 태연하게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천연스레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는 것 아닌가요, 라고 묻는다. 아니 그 질문은 과거형으로 읽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각자가 든 풍선을 채우고 있는 바람이 서풍이다. 적어도 황혜선의 세계에서는 서풍이어야 한다. 작가는 드뷔시의 전주곡에서 ‘서풍이 본 것’이란 제목을 따왔다고 알려주면서, 거친 바람을 뜻하는 서양의 서풍과 달리 우리의 서풍은 ‘하늬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비유컨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아니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서풍이다.


돌이켜보면 작가는 언제나 그런 세계를 작품으로 형상화해왔다. 지난 2010년 개인전의 제목이 ‘아주 잠깐, 조금씩만(For a moment, Just a bit)’이었던 것도 떠올려볼 수 있다. 예컨대 손으로 떠올린 물이 손바닥에 머무는 한순간을 작가는 포착하여 오래 보존하고자 한다. 그런 순간들에 영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황혜선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조금씩만 변화해온 여정임에도 전시장 2층에서는 또 다른 황혜선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만나는 황혜선이다. 그의 많은 드로잉-조각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너무도 많은 ‘인물들’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주어야 한다. 주로 일상의 사소한 소품들에 주목해온 작가가 주변의 사람들과 여행지에서 본 인물들을 드로잉-조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에. 물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작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인물들의 한순간과 그 순간의 표정, 그리고 자세를 보여주고자 한다. 정작 그들은 기억하지 못할 한순간일 테지만, 이 전시공간에서는 그 순간들이 그들을 굳건하게 대변하고 있다. 은박거울에 에칭으로 새긴 풍경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풍이 본 것’은 작가 황혜선이 본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같이 보게 된 것이다. 모두가 서풍이 되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을 잠시 내려다보는 순간, 그 ‘몇 초간의 여유’이다. 차를 마시는 아이, 책을 읽는 여인, 헤드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는 남자, 카페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노신사 등등 모두가 각자의 ‘몇 초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날들이 많지 않고, 그런 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포착해내는 작가의 태도에서 그런 조바심을 읽어낸다면 과장일까.


전시장 3층에서 우리는 작가의 작업실 풍경을 엿보게 된다. 황혜선이 내다보는 풍경이면서 서풍이 지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 잠시, 다만 몇 초간이라도 머물러달라고 작가는 제안하는 듯싶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으로 잠시 서풍이 되고 서풍의 바람맞이가 된다. 전시장 곳곳에서 우리 안의 나뭇잎이 잠시 흔들리는 소리를 당신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2. 09. 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