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까지 쓴 원고는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에 대한 서평이었는데, 쓰다 보니 분량상 책의 뒷부분에 대해서는 간소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정작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었음에도!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광고와 '글래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인데(예전 번역본들을 읽을 때 아마 이 대목까지는 읽지 않았던 듯싶다), '못다한 리뷰'를 쓰는 셈치고 막간에 간단히 소개한다.

 

 

 

먼저 글래머(glamour)에 대한 정의. 본래는 '매력'을 뜻하는 말이지만 요즘은 주로 여성의 성적 매력을 가리키는 말로 축소돼 쓰인다. 국어사전의 정의로는 "육체가 풍만하여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나도 그렇게 단순하게만 이해했었는데, 존 버거는 좀더 넓은 의미로 정의한다. 일단 글래머가 현대의 발명품이라는 지적.

 

글래머는 현대의 발명품이다. 유화의 전성기에는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아함이라든지 고상함, 권위라는 관념이 겉으로 보기에는 글래머라는 관념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 다르다.(170쪽)

글래머가 과거에는 없었고 오직 현대사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인가? 버거는 매우 매력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글래머라는 것은, 한 개인이 사회에 대해 갖게 되는 선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공통의 정서가 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는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내기에 안성맞춤인 사회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171-2쪽)

어제 읽으면서 무릎을 친 대목인데, 일단 글래머가 탄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버거는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를 지목한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전제하는 민주주의 사회이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론 소수의 가진 자만이 물질적 부를 향유한다. 대다수는 자신이 바라는 상태와 현재 상태 사이의 간극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집을 얻으러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그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선망의 대상으로서 '글래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란 말은 거꾸로 글래머에 대한 선망의 보편성을 말해준다. 자기 안에 있는 선망(부러움)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니까. 물론 우리는 이미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버거가 보기에 광고가 바로 그러한 선망의 구조에 개입한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이 광고가 부추기는 환상이고 백일몽이다. 그리고 이 백일몽은 노동자로 하여금 또다시 "의미 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 백일몽적 선망에 대한 다른 선택지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이다. 소수가 아닌 다수가(혹은 모두가) 실질적인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한 투쟁이다(물론 그 다음 단계에선 행복에 대한 정의 자체가 바뀌어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광고는 민주주의와 대립하는가? 그렇다. 버거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은폐해준다.(173쪽)

이것이 광고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의 제시만으로도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40년이라는 먼지를 떨어내고 제값을 한다(책은 1972년에 출간됐다). 글래머에 대해서 한 수 배웠으니까. 점심 먹어야겠다...

 

12. 08. 20.

 

 

 

P.S. 존 버거의 책을 간간이 구입해서 갖고 있지만, 정색하고 읽진 않았었다. 이번에 관심을 갖게 돼 몇 권의 책을 더 주문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다시 주문했고 <포켓의 형태>는 알라딘에서 품절이어서 다른 인터넷서점을 이용했다. <시각의 의미>도 곧 주문할 예정. 다만 모두 동문선에서 나온 책들인지라 (번역을 신뢰할 수가 없어서) 원서도 같이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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