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이번 달 '사람과 책'에서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원고를 쓰느라 지난 8월에 다시 읽은 고전이 오웰의 <1984>였다. 여러 번역본 가운데 문학동네판으로 읽으면서 다른 주요 번역본들로 참고했다. 자투리 독후감은 지난주 한겨레 칼럼에 쓰기도 했지만, 얘깃거리들은 더 많이 남아 있다. 전기적 내용과 관련하여 참고한 평전은 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이학사, 2003)인데, 최근에 나온 고세훈 교수의 <조지 오웰>(한길사, 2012)를 방안에 두고도 못 찾아서 참고하지 못했다. 평전으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왜 오웰이 중요한가>도 주문해놓은 터여서 나중에 같이 읽어보고 싶다.

 

 

 

사람과 책(12년 9월호) 감시사회, 그 '오래된 미래'

 

‘<동물농장>의 작가’, 아마도 조지 오웰(1903-1950)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려줄 만한 별칭이다. 국내에서는 <1984>와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오웰의 대표작인 만큼 이상할 건 없지만, 오직 ‘<동물농장>의 작가’로서만 기억된다면 오웰로서는 좀 억울할 법하다. 그리고 실상이 그랬다. 전체주의를 비판한 두 ‘우화적’ 소설이 한국에서는 ‘반공소설’로 읽히고 또 권장됐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임한 작가의 운명 치고는 다소 고약했다고 할까. 


국내에서 나온 첫 평전 <조지 오웰>(이학사, 2003)을 쓴 박홍규 교수에 따르면, <동물농장>(1945)이 세계 최초로 번역된 건 놀랍게도 한국어판(1948)을 통해서였다. 우리와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반가워할 일만은 아니다. 미국의 해외정보국이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작품의 소개를 주선했기 때문이다. 오웰이 예술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을 결합시키려고 한 이 ‘정치소설’만큼 정치적으로 이용된 작품도 드물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 ‘반스탈린적 풍자소설’이 반공주의 계몽과 계도에 유용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아이러니컬한 것은 바로 그런 정치성 때문에 정작 영국에서는 출간에 애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은 영국과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우고 있었기에 출판사들은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대한 이 풍자소설의 출간을 꺼렸다. 한편 미국에서는 ‘동물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오해받아서 역시나 출간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1944년에 탈고한 <동물농장>은 우여곡절 끝에 1945년 8월에야 출간됐고 이듬해 나온 미국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웰은 비로소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마지막 작품 <1984>를 집필할 수 있는 생활의 여유도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지병인 폐결핵이 점차 악화돼 가던 참이었다. 1948년에 탈고했기에 제목을 <1984>라고 붙인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49년에 출간돼 20세기 디스토피아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는다.    

 

 


따지고 보면 <1984> 또한 우리와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1984년 1월 1일 아침에 전 세계 안방에 방송된 위성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백남준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중학생이었던 당시 ‘오웰’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고 서점에 가서 막 나온 <1984>를 구입해 읽은 기억이 있다. 1984년에 읽은 첫 책이 <1984>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오웰과 인연이 없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한 ‘반공문학’ 작가란 평판 때문에 80년대 대학가에서도 오웰은 널리 읽히지 않았고, 강한 정치성 때문에 문학적으로 대단치 않은 작가로 폄하됐다.

 

 

 

이런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 같은 그의 르포르타주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같은 에세이집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부터다. 박홍규 교수의 평전에서 “특히 그의 수많은 에세이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 에세이는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를 철저히 비판한 것이기에 대부분 소개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사뭇 대조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반공주의자 오웰’에서 ‘사회주의자 오웰’로 작가의 이미지가 이동했다고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정치성과 문학성을 결합시키려는 오웰의 시도는 문학과 예술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재평가됐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1946)에서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의식하면 할수록, 자신의 미학적·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고 적었다. 정치적 편향이 미학적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일반적 통념과는 정반대로 그러한 편향성이야말로 진정성을 희생시키지 않게끔 한다는 것이 오웰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적 입장이란 무엇인가?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자신이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영국 북부노동자들의 생활을 취재한 <위건부두로 가는 길>(1937)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에 대한 르포 <카탈로니아 찬가>(1938)에도 관철된다. 그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의용군으로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했다가 좌익 내부의 분열을 목격하고 얻은 결론은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해선 ‘소련 신화’의 파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물농장>의 집필 의도였고 <1984>는 그 연장선상에서 쓰인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란 글에서 로렌스 멀킨은 “소설로서 <1984>는 특별히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보다는 우화에 가깝고, 우화보다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다.”고 평했다(윌리엄 랭어 편,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푸른역사). 이러한 평가는 한편으론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한 작품이 치르는 대가이기도 한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사회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주제는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도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성취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은 과연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판타지’에 불과한가? 민간인사찰이 무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빅브라더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감시사회보다 과연 얼마나 나은 사회인가? 아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구조를 들여다본다면 과연 오늘날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984>에서 세계는 핵전쟁 이후에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초대형 국가로 분할돼 항구적인 전쟁상태에 놓여 있다. 이들 국가 중 두 나라가 연합한다고 해도 다른 한 나라를 정복할 수 없기에 세력 판도가 그대로 유지된다. 이들 국가의 기본적인 특징은 계급사회라는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속해 있는 오세아니아에서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절대적 존재로 당을 대신하는 빅브라더가 있고, 그 아래로는 인구의 2퍼센트 미만인 내부당원이 있다. 그리고 그 밑을 국가의 손발 역할을 하는 외부당원이 차지하고 있고, 이들 관료기구가 전체의 15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전체 인구의 85퍼센트는 ‘노동자’라 불리는 하층계급으로서 소위 ‘벙어리 대중’이다.


그러한 권력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권력인 당이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수의 당원들이다. “노동자들은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둬도 그들은 몇 대가 지나도록, 몇 세기가 지나도록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도 파악할 힘이 없이 일하고 자식을 키우며 죽어가는 것이다.” 반면에 “당원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사상경찰의 시선 안에서 살아간다.”

 

‘진리부’라는 행정관청에서 역사변조를 담당하는 공무원 윈스턴은 외부당원이며, 따라서 그러한 감시하에 놓인다. 그는 당이 강요하는 변조된 진실 너머 역사적 진실이 따로 있다고 믿고 반역을 꾀하지만 체포돼 고문을 받고서 ‘치유된다’. 윈스턴은 너무도 허술하게 반역을 기도하지만 당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응징된다. 그가 끔찍한 고문상황에 처하게 되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배신하고 결국엔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러한 음울한 결말이 집필 당시 건강이 악화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오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지식인 계급에 대한 작가 불신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윈스턴은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오웰을 닮았다. 그는 ‘빅브라더 타도’를 은밀히 결심한 이후에 자신이 죽은 목숨이고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줄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생전에 뭐 하나 바꿔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그러나 여기저기서 소규모의 저항이 일어나 사람들이 조금씩 떼를 이루고, 점차 불어나 후세에 기록을 몇 가지라도 남기게 되면 우리가 죽은 뒤 다음 세대에서는 수행할 수 있을 테지.”

 

그렇듯 ‘미래는 노동자들의 것’이라는 게 윈스턴의 신념이었다. 과연 오늘날 계급화된 자본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노동하는 다수는 ‘벙어리 대중’인가 아니면 ‘미래의 주인’인가. 그런 질문이 아직 유효하다면 오웰의 <1984>는 ‘오래된 미래’이다.

 

12.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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