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월간 공간(53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에 대해 적었는데, 마저 못 다룬 내용은 '글래머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5802399)란 페이퍼에서 다루기도 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절판된 열화당판을 말한다.

 

 

 

공간(12년 9월호) 다른 방식으로 보기

 

“나는 이 책을 사십 년 전에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습니다.” 새롭게 번역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존 버거가 꺼낸 서두다. 1972년 영국 BBC 방송의 연속강의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의 대본이었으니 말 그대로 ‘사십 년 전’이다. 문제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이 저자의 믿음대로 ‘아직도’ 유효한가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종수로만 보자면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충분히 ‘고전’에 값한다. 그간에 각기 다른 제목으로 3종이 번역돼 나왔고,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란 제목이 붙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자이기도 한 최민 교수는 제목을 그렇게 옮긴 이유에 대해 이 책이 “기존의 아카데믹한 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이라고 알려지고 이야기된 기존의 것들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강한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제에서 ‘방식’(the way) 대신에 쓰인 복수형 ‘방식들’(ways)을 ‘다른 방식’(the other way)이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다른 방식’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미지에 대한 기존의 보는 방식, 혹은 지배적인 해석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단적인 예로 버거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서의 해설을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할스는 말년에 자선기관의 신세를 지며 연명하는 처지였는데, 이때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 '자선요양원의 이사들'과 '자선요양원의 여이사들'이란 작품이다. 버거가 보기에 이 두 그림에서 “남녀 이사들은 이미 명성도 다 잃고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늙은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두 그림이 보여주는 ‘놀라운 콘트라스트’고 드라마다. 하지만 정작 미술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연구서의 저자는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개성적 시각을 의연하게 지키려는 할스의 노력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력들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해설에 대해 버거는 “바로 이것이 신비화”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보기에 초상화가로서 할스의 의의는 문학에서 발자크가 이룬 성취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자본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난 새로운 인물유형과 그들의 표정을 최초로 묘사한” 데 있다

 

버거는 또한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 빈치의 소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이 한 미국인이 이백오십만 파운드에 사려고 하는 바람에 갑자기 유명해진 사례도 지적한다. 이후에 이 그림은 특별 전시실에 걸려 있는데, 버거는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가격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지만 버거는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시각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미술을 바라본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권위를 통해서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예술을 경험의 모든 측면과 관련시켜서 보는 ‘총체적인 접근’과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몇몇 전문가들의 ‘비교주의적(秘敎主義的) 접근’을 구분하자는 제안도 그런 입장에서 나온다.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통해서 미술을 다르게,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버거는 누드화와 유화, 그리고 광고라는 세 가지 주제 혹은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실천한다. 그는 먼저 미술에 나타난 성차별적인 재현방식을 문제 삼는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자는 능력에 따라 존재감을 갖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결정된다. 미술에서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누드화이다. 벌거벗음(nakedness)이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누드(nude)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전시되는 것이다. 곧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유럽의 누드화에서 보여지는 대상은 보통 여자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인 화가나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 깊이 각인돼 있다는 것이 버거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페미니즘 시각이론보다 앞서 나온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린 유화적 전통에 대해서도 버거는 그것이 재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자본주의 문화와 깊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 “재산과 교환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유화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유화의 본질적 특성에 따를 때 화가의 역할은 물질적 재산을 칭송하는 것에 불과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바로 그런 전통의 규범을 깨뜨리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렘브란트와 푸생, 샤르댕 고야 혹은 터너 같은 화가들은 진정한 후계자를 남길 수 없었다고 버거는 말한다. 


버거의 비판적 통찰은 현대의 광고를 유화와 연관 짓는 대목에서 더욱 빛나는데, 광고는 유화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실제 사물들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게끔 한다. 하지만 유화의 경우 소유주가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주는 데 반해서, 광고는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생활방식에 불만을 갖게 한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광고의 메시지다. 그와 함께 광고는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소비에서의 선택으로 대치함으로써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든다. 비민주적인 모든 것을 은폐하면서 광고가 자본주의 문화의 꿈이자 생명으로 각광받는 이유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서양미술사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가 갖는 사회적 역할과 의미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견해들을 제시한다. 사십 년이 지났지만, 요즘 나오는 미술사나 시각이론서들이 오히려 온건해 보일 정도라면 여전히 필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12.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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