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월간 소식지 책&(395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한국전쟁'이었고, 요령껏 그림을 그려보았다. 애초엔 3권의 책에 대한 소개가 될 예정이었지만 이것저것 뒤적이다 보니 몇권 더 언급하게 됐다. 거기에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책의 이미지도 몇권 더 추가했다. 아울러 지면에는 빠졌지만 병기된 책의 출간연도는 살려놓았다.

  

책&(11년 6월호) 역사가 돼가는 전쟁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해마다 6월이면 던져지는 질문이고, 이에 답하는 굵직한 저작들도 다수 출간돼 있다.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박태균의 <한국전쟁>(2005)이 입문서 역할을 해준다면, 정병준의 <한국전쟁>(2006)은 방대한 자료섭렵을 통해서 ‘한국전쟁’뿐 아니라 ‘한국전쟁 연구’에 대한 조감도 구실을 한다. ‘전쟁의 개전․성격․형성’보다도 ‘한국전쟁사의 역사’가 먼저 다뤄지는 이유다. 실상 휴전 이후에도 두 세대가 지나면서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경험’이 아니라 ‘역사’가 돼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도 경험의 증언보다는 자료의 발굴․공개와 조사․연구에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병준에 따르면 한국전쟁 연구는 두 차례의 전성기를 맞았었다. 기본적으로는 모두 전쟁 당사국들의 자료 공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첫 번째는 1970년대 중후반 미국측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비밀문서들이 대량으로 비밀 해제되어 공개됐고 이 자료들에 근거해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 2>(1981, 1990)는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커밍스는 연구대상을 남한과 북한 외에 미국으로 확대했고 1950년 6월 발발의 원인에 초점이 맞춰진 기존의 연구 시야를 1945-50년 남북한 내부 정치상황으로 확장했다. 그로써 커밍스는 ‘냉전의 소련주도설’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주의 해석에 반대하여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제시했지만, 그의 작업은 접근자료의 제한에서 비롯된 한계도 갖고 있었다. 구소련 문서들이 1990년대 초중반에야 공개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 자료의 공개가 미국의 책임을 부각시켰다면 1990년대 소련 자료의 공개는 반대로 소련 또한 상당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에서 펴낸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2010)에 실린 기광서의 ‘한국전쟁 속의 스탈린’은 소련측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스탈린의 입장과 역할을 정리해준다. 당초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 방침에 대해 스탈린은 줄곧 반대의사를 표명했지만 1950년 봄 김일성과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시 입장을 바꾼다. 입장 변화의 계기는 네 가지로 간추려지는데,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국제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고, 필요시 중국군의 파병이 가능하게 됐으며, 중․소동맹 체결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었고, 원자폭탄 개발로 소련이 고무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탈린은 대외적으로는 ‘전쟁 불개입’, 즉 공개적 개입 금지 입장을 전쟁기간 동안 견지했다. 중대한 정책적 오류로 판명이 나지만, 안전보장이사회 불참 결정도 북한과 전쟁을 공모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계산이 앞섰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비록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하진 않았더라도 전쟁기간 내내 스탈린은 ‘사회주의 모국의 수령’으로서 북한과 중국에 대해 ‘총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북한과 중국으로선 ‘무의미한’ 전쟁의 휴전협상이 장기화된 것 역시 유리한 조건을 고집한 스탈린의 완고한 입장 때문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러시아의 구소련 문서 공개 이후로 후기수정주의 혹은 신수정주의적 접근이 본격화되지만 그에 걸맞은 연구성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게 정병준이 <한국전쟁>에서 내리는 평가다. 게다가 러시아는 1950년부터 6월말까지 한국전쟁 개전 준비․발발과 스탈린의 역할과 관련한 핵심 문서들을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기에 한국전쟁은 드러난 진실만큼이나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갖고 있다. 더불어 북한과 중국측 기밀문서도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보완될 여지를 많이 남겨놓고 있다. 물론 새로운 자료가 등장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 간에도 전쟁에 대한 시각차가 너무 뚜렷해서 전쟁의 명칭 자체에서부터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김학준은 <한국전쟁>(2010)에서 국제사회에서는 ‘the Korean War’라는 명칭이 통용되는 편이지만 이것을 바로 ‘한국전쟁’이라고 옮기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다. 과거 ‘6.25사변’ 혹은 줄여서 ‘6.25’라고 부른 대로 북한이 전면남침한 전쟁 개시일을 부각시켜 이 ‘코리아의 전쟁’은 ‘6.25전쟁’으로 지칭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신전통주의에 가깝다는 이러한 견해는 보수주의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기도 한데, <6.25전쟁의 재인식>(2010)에서 제시하는 이유는 조금 더 명쾌하다. 미국과 ‘함께’ 싸운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란 말은 자칫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민족과 ‘맞서’ 싸운 전쟁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와 함께 싸운 건 미국만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도 유엔군의 일원으로 낯선 땅에서 피를 흘렸다. 1954년에 출간된 <강뉴>(2010)는 6,037명이 파병돼 124명이 전사한 강뉴부대의 한국전쟁 참전기이다.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란 질문이 한국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해준다. 

11. 06. 09.  

P.S. 한국전쟁 관련서를 모으다가 범위가 좀 확장돼 아예 전쟁과 전쟁사에 관한 책들도 사들이고 있는데(최근에 구입한 것만 해도 20권 가까이 된다), 오늘 배송받은 것은 다케나카 치하루의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와 김동춘의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그리고 후안 고이티솔로의 <전쟁의 풍경> 등이다. 전쟁의 이모저모를 짚어주고 있어서 모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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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9 23:26 
    한국전쟁에 관한 책들을 몇종소개하면서 주요 저작 가운데 빠트린 책이 있는데,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나남, 1996)이 그것이다. 책은 구입했지만아직 페이지는 넘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도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다.한국전쟁에 관한 보다 온전한 그림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기에. 하지만 그보다 먼저 구입한 책은최근에 나온 <역사와 지식과
 
 
꼬마요정 2011-06-09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은 참혹해요. 그 중에서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이 생각나는군요. 어쨌거나 이 전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일본이겠구요..

로쟈 2011-06-11 09:42   좋아요 0 | URL
그런 이해관계가 생기기에 전쟁은 계속되는 거겠죠...

그림자놀이 2011-06-1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 민간학살 문제를 주로 다룬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돌베게, 200)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6-11 09:43   좋아요 0 | URL
네, 빼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작년에 나온 책 3권에 초점을 맞추려던 글이어서 빠진 책들이 많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주의(이 용어도 좀 이상합니다만 관례대로 하겠습니다)가 우리의 사상을 오염시켰다고 비분강개하는 이들이 있지만 실제로 80년대에 번역된 수정주의학파로 분류되는 책들 중 현재 절판 안 된 것은 커밍스 것밖에 없습니다.나머지는 다 절판되었고요.

로쟈 2011-06-13 08:50   좋아요 0 | URL
그런 거 저런 거 이전에 전쟁에 대한 관심 자체가 만료된 듯싶습니다...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기획회의(29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예 그의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과 같이 다루게 됐다. 저자의 문제의식 정도를 간추렸다.   

  

기획회의(11. 06. 05) 자유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문서의 한 갈래가 ‘인문서를 읽기 위한 인문서’라면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는 그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자유론의 현재적 쟁점이 무엇이며 어떤 주장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가이드북’의 역할이다. 원저는 일본의 이와나미출판사가 기획한 ‘사고의 프론티어’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자유>(2005). 저자의 책으론 국내에 먼저 소개된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에 뒤이어 두 번째로 나온 것이다. 이 <민주적 공공성> 또한 같은 시리즈의 <공공성>(2000)을 옮긴 것이다. ‘공공성’과 ‘자유’에 대한 관심이 저자에겐 병행적이거나 연속적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하버마스와 아렌트를 넘어서’란 부제를 단 <민주적 공공성>의 키워드는 당연히 ‘공공성’이다(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한데 일본에서도 이 말은 국가가 사용하는 말, 즉 일종의 관제용어였다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그러니까 책이 쓰인 시기를 고려하면 2000년대 초반 들어서 ‘공공성’ 혹은 ‘공공권(公共圈)’이란 제목을 단 책들이 출간되고 대학에서는 ‘공공철학’ 강좌가 개설되고 하는 식으로 붐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국가가 ‘공공성’을 독점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확산과 맞물린 현상이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어판에 부친 서문에서 그는 “한국사회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라고 적었는데,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민주적 공공성>이란 책 자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그 점에선 <자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공공성이란 말도 일본만큼 널리 쓰이지 않는다. 드물게도 ‘공공성’을 제목에 달고 나온 조한상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책세상, 2009)에서 저자가 ‘공공성과 시민사회’ ‘공공성과 국가’ ‘공공성과 언론’ 등을 각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공공성의 초점은 아직 국가나 언론(미디어)에 두어져 있다. 반면에 <민주적 공공성>은 공공성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서 문제의 지형을 ‘시민사회와 공공성’ 쪽으로 옮겨가고자 한다. 이러한 재정의와 새로운 관심을 우리도 공유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체(政體)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헌법 제1조에 명시돼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박명림 교수와 함께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에서 김상봉 교수는 ‘공화국’이 이 땅에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민주국가’와 ‘공화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범주인바, “민주국가가 모두에 의한 나라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나라”이다. 공화국은 의사 결정의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 모두를 위한 것일 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말은 공화국이란 나라가 소수 권력집단이 사익이나 챙기는 기구가 아니라 ‘공공적 기구’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공공성과 공화국의 정신이 빠진다면 민주주의는 ‘내용 없는 형식’, 곧 껍데기로 전락한다(이명박 정부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인가 껍데기인가?). 우리는 아직 민주국가에서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셈이다.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두 저자는 이 공화국으로의 여정에서 같이 고민해볼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에 ‘자유’는 포함돼 있지 않다. 자유와 공공성을 나란히 다루지 않는 것은 자유가 ‘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적인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공공성에 대한 사이토 준이치의 논의는 ‘자유’에서 출발한다. 자유가 출현했다는 것은 자유가 출현할 수 있는 공공적 공간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과거와 미래 사이>)   

아렌트를 따라서 사이토는 공공적 공간이 두 가지 정치적 가치와 연계돼 있다고 말한다. 그 하나가 ‘자유’이고, 다른 하나가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아렌트적 의미에서 자유는 공공적 공간, 즉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 반면에 ‘사적(private)’이란 말은 타자의 존재가 박탈됐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위와 의견에 대해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공공적 공간이기에 타자의 부재․박탈은 곧 자유를 위한 장소의 박탈을 의미한다. ‘행위할 권리’와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위한 장소의 박탈이다. 따라서 아렌트에게서 사적인 삶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 흔히 ‘간섭의 부재’로 정의되는 ‘소극적 자유’에 대한 옹호와 대비된다.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사이토 준이치가 자유론의 출발점으로 검토하는 것이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론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은 벌린의 유명한 논문 ‘자유의 두 개념’(1958)에 근거하는데, 사이토는 벌린의 사고가 자신의 시대 인식에 토대로 두고 있다고 평가한다. “통제와 간섭이 도를 넘으면 소극적 자유의 개념이 우세해지고, 거꾸로 방임적 시장경제가 위세를 떨치면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우세해지는 것”이란 벌린의 주장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자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었기에 벌린으로선 소극적 자유를 옹호했으리라는 것이다.  

두 차례의 전쟁과 전체주의 지배를 경험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국가 폭력이 자유에 대한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것이 자유지상주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 곧 ‘방임적 시장경제’ 하에서 사정은 바뀌었다. ‘정치적인 것’(국가)과 ‘사회적인 것’(고용보장이나 사회보장)이 ‘경제적인 것’에 의해 지속적으로 식민화되고 있는 것이 그간의 경과이다. 국가의 활동영역이 후퇴한다고 해서 저절로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경험은 말해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구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사적인 문제가 아닌 공공적 문제로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소극적 자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와 공공성의 연계로 주장을 전개해나가는 저자의 결론은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자유를 누리기 위해 거부해야 할 것은 타자에 의한 간섭 일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교섭을 미리 불필요한 것, 위험한 것, 그리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상과 행동이다.”  

11.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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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두운 시대의 공공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8 20:34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잠시 궁리해보다가 공공철학을 소재로 쓰게 됐다. 최근에 자유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 책들과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등을 들춰본 탓이다.한겨레에 이어서 경향에서도 필명이 '로자'라고나갔는데, '로쟈'에서 '로자'로 개명해야 할는지도 좀 생각해봐야겠다...경향신문(11. 06. 07) 공공철학, 광장, 촛불“지금 인터넷에서 ‘공공철학’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관련 사이트가 눈에 띕니다.
 
 
2011-06-1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3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대성이냐 탈식민성이냐

방한중인 남미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의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라틴아메리카 참여민주주의의 현주소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 그리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정보기술 발전에 따른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눈길을 끈다.

 

경향신문(11. 06. 07) "남미 참여민주주의는 세계 정치의 새 경험”

우리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미국과 유럽 등 서구 학문이 중심이 돼 왔다. 마찬가지로 지난 10년 동안 중도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변혁의 소용돌이를 겪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철학에 대해서도 서구 중심의 편견으로 바라본 게 사실이다.

엔리케 두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교수(77)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해방철학’을 주창한 중남미의 대표적 학자다. 그가 고려대 문과대 주최로 열린 금호아시아나 해외석학 초청강좌와 심포지엄(1~3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의 저서인 <1492년 타자의 은폐>(그린비)가 국내에 출간된 시점이기도 하다.

지난 4일 만난 두셀 교수는 “1999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볼리바르 혁명’ 이후 중남미 정치지형이 급격하게 변했다”며 “이런 변화는 새로운 정치학을 통한 철학적 해석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베네수엘라에 이어 브라질, 볼리비아 등으로 중도좌파의 집권이 확산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중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도이며, 세계 정치의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이다. 

두셀 교수는 “그동안 어떤 국가도 헌법에서 항구적으로 민중의 참여를 보장한 적은 없었다”며 “제도적으로 보장된 6만여개의 주민평의회가 각각의 의제를 심의하고 제안하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차베스주의자’는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이 모델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시도 자체가 가치있고 깊이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21세기 정치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대의민주주의는 민중의 참여가 반영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모델은 주민평의회가 반대하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민중의 참여를 수렴하는 제도의 창조를 통한 또 다른 차원의 국가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런 현실로부터 끌어낸 그의 해방적 정치철학은 “권력은 지배이며, 정치란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라고 규정해 온 유럽 근대 정치철학을 부정한다. 기존 정치질서에서 배제되고 피해 입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질서와 체제 자체가 잘못됐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으로서 긍정적인 의미의 권력 개념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이나 유럽 이론이 담아내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바탕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무게감이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벌어진 한국의 2008년 촛불집회는 “민중의 참여가 일상적으로, 항구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제도가 없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한편 외부에서 중남미 상황이 포퓰리즘으로 인한 새로운 독재자의 등장쯤으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해 두셀 교수는 “미국이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목적으로 세계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중남미에 덧씌워진 ‘포퓰리즘적 복지 때문에 망했다’는 것도 편견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군부독재에 반대해 75년 멕시코로 망명한 두셀 교수는 모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불리는 후안 페론 대통령은 자립적인 산업화와 내수진작 정책을 썼지만, 이를 반대한 미국 산업부르주아들이 군부쿠데타를 지원함으로써 오늘날 빈곤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군부독재 정권이 미국에서 빌린 엄청난 외채가 시민들의 몫이 됐으며, 이후 집권한 민선 정권들도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빈곤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두셀 교수가 볼 때 99년 이후 중남미 국가들의 정책은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세계 리튬 매장량 1위인 볼리비아에서 원재료를 수출하지 않고 충전지를 만들어 팔겠다고 하면 서방국가들은 포퓰리즘이라고 얘기한다”며 “어떤 의미에서는 푸에블로(민중)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포퓰리즘”이라고 말했다. 브라질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 룰라 전 대통령 역시 “82%의 지지를 받으며 임기를 마쳤다는 점에서 ‘포퓰리스트’이지만 이를 봐도 라틴아메리카가 포퓰리즘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두셀 교수는 “이미 볼리바르 혁명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예견했다”고 지적한다. “중남미 국가들이 자신들의 빈곤을 불러온 신자유주의를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한국이 미국의 자본주의 체계를 따라서 성공했지만 미국 모델 자체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한국도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멕시코는 미국과의 FTA로 인해 재난 수준의 타격을 맞았다”면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함몰되기보다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철학을 고유한 현실과 전통으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황경상기자) 

한겨레(11. 06. 08) "민중 참여 제도화는 자본주의 한계 넘는 혁명”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첨병인 세계경제포럼에 대항하고 대안을 찾겠다는 취지로 2001년 첫발을 디딘 세계사회포럼은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처음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포퓰리즘 딱지를 붙이긴 하지만, ‘좌파 도미노’란 이름으로 브라질·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도 주목받고 있다. 현실 속 실질적인 대안운동에 끊임없이 밑바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라틴아메리카 ‘탈식민주의’ 담론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니발 키하노, 월터 미뇰로 등과 함께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학자이자 ‘해방철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엔리케 두셀(사진) 멕시코 메트로폴리타나 자치대 교수가 최근 고려대 문과대학,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소, 철학연구소, 한국사회연구소 등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지난 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두셀은 “민중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혁명”이라며 “발전된 전자 매체 등이 민중의 성숙과 참여를 확대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틴아메리카 탈식민주의는 서구가 주도해서 만든 근대 세계가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됐으며, 근대성의 극복은 결국 식민성의 극복과 다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두셀의 해방철학은 ‘정복하는 자아’로부터 나오는 서구의 근대적 사고를 뒤집어, 가부장주의의 희생양인 여성, 종속국가, 황폐화된 지구를 상속받을 미래 세대 등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뼈대다.

두셀은 서구 정치사상의 주요 쟁점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방철학을 설명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정복과 지배로 나아간 서구적 보편주의를 비판하지만, 합리성·이성 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전지구적 공동체를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보편주의를 찾고자 한다. 특수주의로 흐르는 것은 그 어떤 보편적인 가치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셀은 인간은 계약 이전부터 이미 사회적인 존재인데, 자유주의는 인간을 고독하고 자유로운 원자로 먼저 상정한 뒤에 사회계약을 맺게 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전쟁 상태와도 같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적 소유’를 뼈대로 한 자본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모든 교환을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물신숭배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셀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강조해 다른 공동체들과 소통할 수 없게 만드는 공동체주의 역시 비판한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해 차별과 배제를 휘두르게 되며, 결국 개별적인 특수주의에 머무를 뿐 결코 보편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서 두셀이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성이다. 여기서 국가는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제도를 변화시키는” 구실을 하는 존재다. 소통하지 못하는 공동체주의는 국가의 구실을 약화시키고, 자유주의는 시장주의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킨다. 두셀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엘리트 계층이 대표를 관료적으로 떠맡는 제도”라며 “관료 시스템, 정당이 없어지고 민중이 직접 대표가 될 수 있도록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민중이란 누구인가? 두셀은 민중에게 어떠한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하진 않는다. 기존 정치 시스템에서 차별받고 배제됐던 희생자들이 윤리적 가치에 따른 요구를 펼 때 그들은 민중이 된다고 봤다.

그렇다고 참여에 대한 요구가 곧바로 직접 민주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두셀은 “대의제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대의제가 민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베네수엘라나 멕시코시티 등에서 이뤄지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활동 등을 사례로 들었다. 10여년 전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제기된 민주주의 전략에 따라 헌법을 통해 주민 자치권을 강화했던 베네수엘라에서는 이미 6만여개의 주민회의(Community Council) 기구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예산의 결정부터 집행까지 모두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고 한다. 곧 민중이 참여하는 국가가 민중을 위해 제도를 바꿔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두셀은 이런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심장부에서도 각종 비판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민중은 참여를 통해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특히 두셀은 정보기술의 발전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다.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혁명에 자극을 받아 스페인에서 대규모 군중집회가 일어날지 그 누가 알았겠느냐”며 “각종 전자 매체의 발달로 ‘전자 민주주의’까지 바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본주의에 잘 적응했지만, 지금처럼 계속 가속페달을 밟았다가는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최원형 기자) 

11.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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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였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1920-2011)의 부음기사를 접했다. 귀감이 될 만한 '선비' 한 분이 세상을 떠나 아쉽다. 고인의 회고록 <장정>을 그간에 읽지 못했는데, 마이리스트로라도 만들어놓는다(<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흔적이 없다). 고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기사를 옮겨놓으며 명복을 빈다.

경향신문(11. 06. 08 故 김준엽, 12차례 관직 사양한 올곧은 지식인… 진보·보수 모두의 ‘참 스승’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장에서는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학생들의 외침이 퍼졌다. 3개월 동안이나 학생들이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은 고려대가 유일했다. 군사정권 시절, 학교마다 학생들이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던 총장들에게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였다. 당시 고려대 총장이었던 고인은 정권 반대 운동을 벌인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력에 맞서다 결국 쫓겨났다.

국민훈장 모란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던 김 전 총장이지만, 생전에 그는 “이때 학생들의 퇴진 반대 시위가 인생 최대의 ‘훈장’이었다”고 말했다. 그 도덕성과 지조가 김 전 총장을 진보와 보수를 넘어 모두 존경하는 우리 사회의 드문 지식인이자 원로로 만들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것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는 것과 “역사의 신을 믿어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정의·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이다.

나라를 잃은 시대를 살아낸 김 전 총장에게는 그런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암울함에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신의주고보를 다닐 때 일본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귀로에서 일본말을 쓰는 조선인 학생과 난투극을 벌인 그였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 시절 일본군의 학병으로 징집된 김 전 총장은 학병으로서는 1호로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이때 평생의 친구이자 훗날 사상계 발행인이 되는 고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된다

 

장준하와 함께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6000리의 장정’을 하는 동안 김 전 총장은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함께 절규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장준하와 함께 광복군을 찾아가 이청천·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고, 1945년 미군기를 타고 국내 진공 작전에 참가했으나 한국 진입 중지 명령을 받고 회항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김 전 총장은 회고록 <장정>에서 “과연 나는 못난 조상이라는 후세의 평을 면할 수 있겠는가 되돌아보게 된다”라고 썼다. 장정 때 스스로 다짐했던 그 말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했음이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생일상을 따로 차리지 않는다는 것과 벼슬을 안 하겠다는 것이 제 일생의 신조”라고 밝혔다. “생일날마다 일제치하에서의 아픔이 떠오르고, 두 동강 난 조국의 신음소리가 들려와 집에서 밥상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각계에서 두루 신망이 높았던 김 전 총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 후보 1순위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해 12차례의 관직 제의를 받고도 거절했다고 적었다. “사회적으로 조금만 자리를 잡으면 다들 관직 한 자리를 해서 족보에 번듯한 관직명이라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존민비의 폐습”이라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최고의 성과를 가지고 엄정한 지식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평생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시간을 5·10분 단위로 쪼개 쓰면서” 공부와 집필에 몰두한 그는 ‘20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전5권·김창순 공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광복군 참가 이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공부했던 김 전 총장은 고려대 총장직에서 쫓겨난 이후 사회과학원을 설립하고 중국과의 학술교류에 평생을 바쳤다. 1985년 당시 총장 퇴진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2년 전 제자들과 마지막 점심자리에서의 김 전 총장을 회고한다. “총장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자네들 같은 학생들을 둔 것이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어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지켜주지 못해 지금까지 짐이라고, 자네들 덕분에 나라가 민주주의로 화해와 통일로, 선진국가로 바로 가는 걸 보니까 우리가 잘못 가르치지는 않았구나 하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요.” 김 전 총장이 우리 시대의 원로이자 참 스승으로 꼽히는 이유다.(황경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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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1-06-08 21:00   좋아요 0 | URL
[장정] 초반부에서 해방 이후 중국을 누비며 공부하는 김준엽 선생의 모습이 그려지죠. 군대에 갇혀 있을때인데 잠시나마 숨통이 틔였습니다. 또한 울컥한 감정에 가르침을 주셨던 중문학과 교수님에게 중국 가서 공부하고 싶다며 편지를 띄우기도 했구요.
그게 인연이 돼 5권까지 다 보았습니다. 제게도 '장정'인 독서였는데, 또 저런 분이 우리 사회와 학계에 계실지 모르겠네요.
김준엽 선생은 학사 출신으로 교수를 하셨죠? 그 삶의 무게감이 어떤 학위보다 더 값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로쟈 2011-06-09 08:29   좋아요 0 | URL
따로 학위는 안 하셨군요. 저도 방학때 '장정'에 들어가볼까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9 18:01   좋아요 0 | URL
김준엽 씨가 돌아가셨군요...<중국최근세사>를 열심히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는 5권으로 청계연구소에서 복간되어 90년대까지는 판매되었는데 2000년대 들어와서 안 보이더라구요.워낙 분량이 많고 어려워서 안 팔리니 그런가봐요.

로쟈 2011-06-11 09:27   좋아요 0 | URL
어지간한 도서관에도 없으니 '구경'도 못해봅니다.^^;

미국사람 2011-06-11 04:54   좋아요 0 | URL
김준엽선생은 일본에서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1943년 일본 게이오(慶應) 대 중퇴가 공식학력입니다. 1948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대학원 수학 이라는 경력도 보이는데 장정에 보면 중국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고요.

당시 대학의 선생님들의 대부분이 학사였지요. 유명한 양주동 선생도 와세다대학 영문학사로 교수를 했구요. 조지훈 선생은 28살에 동대 졸업후 고대 교수를 했읍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말에도 학사출신 교수님들이 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학시절 김준엽 선생은 같은 건물에서 중국 공산당사를 비롯한 중국현대사를 가르쳤던 것 같은데 수업에 한번도 안가본 것이 아쉽네요. 당시에는 그렇게 존경받을만한 사람인지 몰랐거든요.

아마 일체의 유혹을 뿌리친 채 평생 학자의 길만 가고 선비로서만 살기로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던것 같읍니다. 선생의 절친한 친구 장준하 선생과는 비교가 많이 됩니다. 장준하 선생 집안과는 거의 한가족처럼 지낸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로쟈 2011-06-11 09:29   좋아요 0 | URL
학문은 '증'으로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요즘은 박사가 넘쳐나도 이런 분들이 없지요...
 
자유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잠시 궁리해보다가 공공철학을 소재로 쓰게 됐다. 최근에 자유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 책들과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 등을 들춰본 탓이다. 한겨레에 이어서 경향에서도 필명이 '로자'라고 나갔는데, '로쟈'에서 '로자'로 개명해야 할는지도 좀 생각해봐야겠다...  

  

경향신문(11. 06. 07) 공공철학, 광장, 촛불

“지금 인터넷에서 ‘공공철학’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관련 사이트가 눈에 띕니다.” 그렇다고 바로 검색해 보시지는 마시라. 이웃 나라이면서 언제나 ‘먼 나라’ 일본 얘기니까. 일본 학자 야마와키 나오시가 쓴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말인데, 저자에 따르면 ‘공공철학’은 사실 일본에서도 생소한 학문이라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대학마다 공공철학 강좌가 생기고 도쿄대학에서는 공공철학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으며 인터넷에는 ‘공공철학 네트워크’라는 홈페이지가 등장했다. 굳이 남의 나라 유행에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우리와 다르지만도 않다. 왜 갑작스레 공공철학이 주목받게 됐는가.

흔히 공공성은 국가나 정부가 전담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일본에서는 ‘정부 기관의 공(公)’과는 다른 의미의 공공성을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관심이 일어났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저절로 사회 공공의 이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자성이 깔려 있다. 대규모 공공사업이나 공공기관 민영화에 대한 재평가 요구가 그래서 터져 나왔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만 하더라도 공공성 담론을 정부가 독점할 때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보여주는 일례다. 원자력발전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원전신화가 말 그대로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발전비중이 전체의 34%나 되는 세계 5위의 원전국가인 우리로서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비단 원전문제만이 아니다.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밀어붙이고 있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만료된다고 해서 파괴된 자연과 낭비된 예산이 저절로 복원되지 않는다. 공공성과 공익에 대한 관심을 정부에만 내맡길 수 없으며 공공철학에 대한 관심이 남의 나라의 관심일 수만은 없는 이유다.

 

지난해 미국의 ‘공공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하버드대 명강의’란 간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공통적인 열망과 관심사를 두 나라 국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도 이후에 소개된 <왜 도덕인가>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 원제가 ‘퍼블릭 필로소피’, 곧 ‘공공철학’이었다. 책으로 묶은 평론들을 ‘공공철학의 모험적 시도’라고 이름붙이면서 샌델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우리 시대의 정치적, 법적 논쟁거리들에서 철학의 근거를 찾기 때문이라는 것과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동시대의 대중 담론과 관계 맺게 하는 시도, 즉 공개적으로 철학을 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이다.  

물론 이러한 공공철학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가 혹 사적 자유에 대한 홀대와 침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란 의혹을 가질 수도 있다. 최인훈의 <광장> 이후에 우리가 갖게 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 때문에라도 그렇다. 하지만 공적 영역의 회복을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적인 교우관계나 목표 추구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가능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유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장은 그러한 만남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광장의 자유가 없다면 밀실의 자유도 없다. 이 광장의 자유가 억압받는 시대를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가. 광장에 다시금 하나둘 촛불이 켜지고 있다.  

11.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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