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몇종 소개하면서 주요 저작 가운데 빠트린 책이 있는데,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나남, 1996)이 그것이다. 책은 구입했지만 아직 페이지는 넘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보다 온전한 그림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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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보다 먼저 구입한 책은 최근에 나온 <역사와 지식과 사회>(나남, 2011)이다. '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가 부제. 한국전쟁 연구를 갈무리하면서 이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 온축을 그대로 보여준다. 책은 오늘 받았는데, 책장을 넘기기 전에 먼저 인터뷰기사를 찾아서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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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11. 05. 08) 한국전쟁 연구, 지성사 되다
한국전쟁은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줬던 모든 사건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초래한 피해의 규모를 넘어, 두 한국이 아직도 겪고 있는 분단과 대결이라는 현실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중적으로 연구가 이뤄졌어야 하는 분야지만, 오히려 체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념에 휘둘렸던 역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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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박명림(사진) 연세대 교수가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의 흐름, 곧 한국전쟁 학지사(學知史)를 정리한 책을 펴낸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나남 펴냄)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연구 경향의 흐름만 나열하지 않고 학문과 사회가 어떤 관계에 놓여왔는지 또한 앞으로 어떤 관계를 추구해야 하는지 등을 탐구한 책이다.
박 교수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시기는 주로 1980년 ‘광주항쟁’ 때부터 최근까지 30년이다. 이전 한국전쟁 연구는 주로 무비판적 냉전반공주의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고, 광주항쟁을 겪은 80년대에야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 폭발한 현대사 연구에 대한 관심의 밑바탕에는 민족과 민중을 내세운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다만 민족해방이냐 민중민주냐 등 노선마다 필요에 따라 ‘꿰어맞추기’식으로 역사를 풀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박 교수는 “80년대 국내 연구에서 가장 뒤처진 부분은 역시 관심의 제고와 시각 전환을 넘는 사실의 발굴과 정리, 이론과 방법의 영역이었다”고 말한다. 급진주의적 시각으로 이뤄진 연구들이 나타났지만, 과거 반공주의를 대체할 정도로 객관적 평가를 받은 단독연구는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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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연구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커밍스는 미국 비밀자료와 북한 노획문서 등 폭넓은 자료 발굴로 연구 주제와 시기, 영역을 대폭 확장했고, 미국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통해 기존의 친미-반공주의적 연구 접근법에서 탈피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다. 학제적·융합적 연구의 시작을 열기도 했다.
급진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진 커밍스의 연구는 한국전쟁 연구에 질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지만 한계 또한 존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한국 사회의 내적 모순에서 찾고 한국전쟁에 대해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의 합의된 전략을 간과했다거나, 미국의 개입에 대한 강한 비판을 앞세운 나머지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 지점들을 놓치는 모습도 보였다.
그 뒤 현실사회주의 붕괴라는 또 한 차례의 전환을 통과하며, 한국전쟁 연구는 이념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박 교수의 풀이다. 인물과 마을 연구 등 세세한 차원에까지 연구가 세밀화됐고, 전통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는 낡은 틀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다만 박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가 보편의 광장으로 나아가려면, 철학적이며 해석적인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은 평화와 인권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의 문제로 이어져야 하며, 이념적 굴레가 벗겨지는 최근에야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서 한국전쟁 연구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한 일간지는 이 책의 출간에 대해 “박명림 교수가 친북에 빌미를 제공했던 브루스 커밍스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며, 커밍스 연구의 한계를 지적한 부분을 부각시켜 보도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아직도 학문을 이념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책머리에서 박 교수는 “언론이 주도하는, 사실보다 주장을 우선하고 진실보다 이념을 우선하는 현상은 이제 병리적 수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최원형 기자)
11. 06. 09.
P.S. 말미에 언급된 '한 일간지'는 중앙일보이다. 아예 '박명림 VS 커밍스'의 구도로 프레임을 짰다. 인터뷰기사에서 한국전쟁을 표나게 '6.25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선 링크해놓은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를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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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11. 06. 03) “누가 전쟁 시작했는지 묻지 말라니…브루스 커밍스의 6·25, 북한에 면죄부”
6.25전쟁 전문가 박명림(48) 연세대 교수가 브루스 커밍스(68)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커밍스 교수의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박 교수가 오는 8일 내놓을 예정인 『역사와 지식과 사회-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나남·작은 사진)에서다. 박 교수는 신간에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지금까지 30년간 6·25 연구의 흐름을 두루 살펴봤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은 브루스 커밍스. 책의 한 장(章)을 ‘커밍스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는 데 할애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 미친 커밍스의 영향이 막대함을 반영한다.
커밍스의 영향이 학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이념 분쟁의 뿌리가 그와 연관된다. 박 교수에 따르면 “커밍스는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하는 물음을 제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는데, 이 한마디가 한국전쟁과 북한 이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특히 80년대 사회운동과 급진 학문, 이념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정말 컸다. 친북주의와 반미 주사파는 이 한마디를 금과옥조처럼 삼았다”고 지적했다. 80년대 한때 커밍스의 영향을 받았던 박 교수는 “이제 커밍스 연구의 시대적 한계를 분명하게 할 때”라고 말했다. 책 출간에 앞서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커밍스의 무엇이 문제인가.
“민족·민중이라는 두 개의 기준에 초점을 두고 북한에 대해선 온정적이고 남한에 대해선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역사 서술의 객관성·균형성이 흐트러졌다. 전쟁 당시 남한과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비판하면서 북한의 학살은 간략하게 다루는 불공정성도 보였다.”
-박 교수도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고 있는데.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의 문제다. 예컨대 6·25전쟁이 남침이라는 사실은 이제 명백히 밝혀졌다. 남침을 지적한다 해서 진보가 보수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커밍스의 책을 보면 6·25전쟁과 관련, 남침과 북침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일제시기에서부터 시작된 계급갈등이 해방 이후 더욱 증폭된 일종의 ‘내전(內戰)’으로 봤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한국전쟁을 미국의 남북전쟁과 같은 내전으로 볼 수 없다. 한국전쟁의 핵심 기원인 한반도 분단은 내부 사회모순이나 계급갈등과 상관없는 국제요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며 “선제공격을 감행한 북한에 면죄부를 주고, 북한의 독재와 폭력, 반인권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또 “더욱 큰 문제는 소련의 깊숙한 개입이 증명된 이후에도 자신의 기본 가설을 회의하거나 수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새로 발굴된 역사적 자료와 비교해 수정하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했다.
-80년대 커밍스의 영향을 받았고, 『해방전후사 인식』 필자로도 참여하지 않았나.
“80년대 커밍스의 연구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학의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커밍스 책이 나온 후 국내외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 북한의 파탄, 사회주의의 붕괴 등이다. 커밍스 책에는 이런 변화가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90년대 들어 옛 소련, 중국, 동구권의 새로운 문서자료가 발굴, 공개됐다. 한국전쟁이 남침이었음이 밝혀졌다. 북한의 주장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커밍스의 책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기 전의 연구다.”
-6·25전쟁과 북한을 분석할 때 중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자유·인권·민주주의·평등·정의·개방 등 인간 사회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조명해야 한다. 자주·민족·통일 같은 특수과제도 중요하지만 보편적 가치보다 위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 교수는 커밍스의 성과를 일정 부분 인정했다. “일제시대 사회변동, 농민의 존재조건과 인식의 문제, 지방인민위원회, 게릴라 투쟁, 토지문제, 미국의 한국정책에서의 관료 갈등 문제 등은 커밍스 이전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6·25에 대한 최근 연구 경향은.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기원 논쟁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한국전쟁 발발 관련 학위 논문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생활·여성의 변화 등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으로 연구가 확대된다. 과거엔 정치학 중심이었는데 최근엔 사회학·인류학·역사학·신문방송학 등 거의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배영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