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기획회의(29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예 그의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과 같이 다루게 됐다. 저자의 문제의식 정도를 간추렸다.   

  

기획회의(11. 06. 05) 자유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문서의 한 갈래가 ‘인문서를 읽기 위한 인문서’라면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는 그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자유론의 현재적 쟁점이 무엇이며 어떤 주장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가이드북’의 역할이다. 원저는 일본의 이와나미출판사가 기획한 ‘사고의 프론티어’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자유>(2005). 저자의 책으론 국내에 먼저 소개된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에 뒤이어 두 번째로 나온 것이다. 이 <민주적 공공성> 또한 같은 시리즈의 <공공성>(2000)을 옮긴 것이다. ‘공공성’과 ‘자유’에 대한 관심이 저자에겐 병행적이거나 연속적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하버마스와 아렌트를 넘어서’란 부제를 단 <민주적 공공성>의 키워드는 당연히 ‘공공성’이다(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한데 일본에서도 이 말은 국가가 사용하는 말, 즉 일종의 관제용어였다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그러니까 책이 쓰인 시기를 고려하면 2000년대 초반 들어서 ‘공공성’ 혹은 ‘공공권(公共圈)’이란 제목을 단 책들이 출간되고 대학에서는 ‘공공철학’ 강좌가 개설되고 하는 식으로 붐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국가가 ‘공공성’을 독점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확산과 맞물린 현상이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어판에 부친 서문에서 그는 “한국사회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라고 적었는데,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민주적 공공성>이란 책 자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그 점에선 <자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공공성이란 말도 일본만큼 널리 쓰이지 않는다. 드물게도 ‘공공성’을 제목에 달고 나온 조한상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책세상, 2009)에서 저자가 ‘공공성과 시민사회’ ‘공공성과 국가’ ‘공공성과 언론’ 등을 각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공공성의 초점은 아직 국가나 언론(미디어)에 두어져 있다. 반면에 <민주적 공공성>은 공공성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서 문제의 지형을 ‘시민사회와 공공성’ 쪽으로 옮겨가고자 한다. 이러한 재정의와 새로운 관심을 우리도 공유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체(政體)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헌법 제1조에 명시돼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박명림 교수와 함께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에서 김상봉 교수는 ‘공화국’이 이 땅에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민주국가’와 ‘공화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범주인바, “민주국가가 모두에 의한 나라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나라”이다. 공화국은 의사 결정의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 모두를 위한 것일 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말은 공화국이란 나라가 소수 권력집단이 사익이나 챙기는 기구가 아니라 ‘공공적 기구’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공공성과 공화국의 정신이 빠진다면 민주주의는 ‘내용 없는 형식’, 곧 껍데기로 전락한다(이명박 정부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인가 껍데기인가?). 우리는 아직 민주국가에서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셈이다.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두 저자는 이 공화국으로의 여정에서 같이 고민해볼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에 ‘자유’는 포함돼 있지 않다. 자유와 공공성을 나란히 다루지 않는 것은 자유가 ‘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적인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공공성에 대한 사이토 준이치의 논의는 ‘자유’에서 출발한다. 자유가 출현했다는 것은 자유가 출현할 수 있는 공공적 공간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과거와 미래 사이>)   

아렌트를 따라서 사이토는 공공적 공간이 두 가지 정치적 가치와 연계돼 있다고 말한다. 그 하나가 ‘자유’이고, 다른 하나가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아렌트적 의미에서 자유는 공공적 공간, 즉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 반면에 ‘사적(private)’이란 말은 타자의 존재가 박탈됐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위와 의견에 대해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공공적 공간이기에 타자의 부재․박탈은 곧 자유를 위한 장소의 박탈을 의미한다. ‘행위할 권리’와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위한 장소의 박탈이다. 따라서 아렌트에게서 사적인 삶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 흔히 ‘간섭의 부재’로 정의되는 ‘소극적 자유’에 대한 옹호와 대비된다.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사이토 준이치가 자유론의 출발점으로 검토하는 것이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론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은 벌린의 유명한 논문 ‘자유의 두 개념’(1958)에 근거하는데, 사이토는 벌린의 사고가 자신의 시대 인식에 토대로 두고 있다고 평가한다. “통제와 간섭이 도를 넘으면 소극적 자유의 개념이 우세해지고, 거꾸로 방임적 시장경제가 위세를 떨치면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우세해지는 것”이란 벌린의 주장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자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었기에 벌린으로선 소극적 자유를 옹호했으리라는 것이다.  

두 차례의 전쟁과 전체주의 지배를 경험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국가 폭력이 자유에 대한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것이 자유지상주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 곧 ‘방임적 시장경제’ 하에서 사정은 바뀌었다. ‘정치적인 것’(국가)과 ‘사회적인 것’(고용보장이나 사회보장)이 ‘경제적인 것’에 의해 지속적으로 식민화되고 있는 것이 그간의 경과이다. 국가의 활동영역이 후퇴한다고 해서 저절로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경험은 말해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구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사적인 문제가 아닌 공공적 문제로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소극적 자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와 공공성의 연계로 주장을 전개해나가는 저자의 결론은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자유를 누리기 위해 거부해야 할 것은 타자에 의한 간섭 일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교섭을 미리 불필요한 것, 위험한 것, 그리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상과 행동이다.”  

11.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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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두운 시대의 공공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8 20:34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잠시 궁리해보다가 공공철학을 소재로 쓰게 됐다. 최근에 자유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 책들과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등을 들춰본 탓이다.한겨레에 이어서 경향에서도 필명이 '로자'라고나갔는데, '로쟈'에서 '로자'로 개명해야 할는지도 좀 생각해봐야겠다...경향신문(11. 06. 07) 공공철학, 광장, 촛불“지금 인터넷에서 ‘공공철학’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관련 사이트가 눈에 띕니다.
 
 
2011-06-11 2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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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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