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잠시 궁리해보다가 공공철학을 소재로 쓰게 됐다. 최근에 자유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 책들과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 등을 들춰본 탓이다. 한겨레에 이어서 경향에서도 필명이 '로자'라고 나갔는데, '로쟈'에서 '로자'로 개명해야 할는지도 좀 생각해봐야겠다...
경향신문(11. 06. 07) 공공철학, 광장, 촛불
“지금 인터넷에서 ‘공공철학’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관련 사이트가 눈에 띕니다.” 그렇다고 바로 검색해 보시지는 마시라. 이웃 나라이면서 언제나 ‘먼 나라’ 일본 얘기니까. 일본 학자 야마와키 나오시가 쓴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말인데, 저자에 따르면 ‘공공철학’은 사실 일본에서도 생소한 학문이라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대학마다 공공철학 강좌가 생기고 도쿄대학에서는 공공철학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으며 인터넷에는 ‘공공철학 네트워크’라는 홈페이지가 등장했다. 굳이 남의 나라 유행에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우리와 다르지만도 않다. 왜 갑작스레 공공철학이 주목받게 됐는가.
흔히 공공성은 국가나 정부가 전담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일본에서는 ‘정부 기관의 공(公)’과는 다른 의미의 공공성을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관심이 일어났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저절로 사회 공공의 이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자성이 깔려 있다. 대규모 공공사업이나 공공기관 민영화에 대한 재평가 요구가 그래서 터져 나왔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만 하더라도 공공성 담론을 정부가 독점할 때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보여주는 일례다. 원자력발전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원전신화가 말 그대로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발전비중이 전체의 34%나 되는 세계 5위의 원전국가인 우리로서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비단 원전문제만이 아니다.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밀어붙이고 있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만료된다고 해서 파괴된 자연과 낭비된 예산이 저절로 복원되지 않는다. 공공성과 공익에 대한 관심을 정부에만 내맡길 수 없으며 공공철학에 대한 관심이 남의 나라의 관심일 수만은 없는 이유다.
지난해 미국의 ‘공공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하버드대 명강의’란 간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공통적인 열망과 관심사를 두 나라 국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도 이후에 소개된 <왜 도덕인가>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 원제가 ‘퍼블릭 필로소피’, 곧 ‘공공철학’이었다. 책으로 묶은 평론들을 ‘공공철학의 모험적 시도’라고 이름붙이면서 샌델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우리 시대의 정치적, 법적 논쟁거리들에서 철학의 근거를 찾기 때문이라는 것과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동시대의 대중 담론과 관계 맺게 하는 시도, 즉 공개적으로 철학을 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이다.
물론 이러한 공공철학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가 혹 사적 자유에 대한 홀대와 침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란 의혹을 가질 수도 있다. 최인훈의 <광장> 이후에 우리가 갖게 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 때문에라도 그렇다. 하지만 공적 영역의 회복을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적인 교우관계나 목표 추구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가능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유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장은 그러한 만남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광장의 자유가 없다면 밀실의 자유도 없다. 이 광장의 자유가 억압받는 시대를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가. 광장에 다시금 하나둘 촛불이 켜지고 있다.
11. 06.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