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월간 공간(53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에 대해 적었는데, 마저 못 다룬 내용은 '글래머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5802399)란 페이퍼에서 다루기도 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절판된 열화당판을 말한다.

 

 

 

공간(12년 9월호) 다른 방식으로 보기

 

“나는 이 책을 사십 년 전에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습니다.” 새롭게 번역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존 버거가 꺼낸 서두다. 1972년 영국 BBC 방송의 연속강의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의 대본이었으니 말 그대로 ‘사십 년 전’이다. 문제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이 저자의 믿음대로 ‘아직도’ 유효한가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종수로만 보자면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충분히 ‘고전’에 값한다. 그간에 각기 다른 제목으로 3종이 번역돼 나왔고,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란 제목이 붙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자이기도 한 최민 교수는 제목을 그렇게 옮긴 이유에 대해 이 책이 “기존의 아카데믹한 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이라고 알려지고 이야기된 기존의 것들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강한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제에서 ‘방식’(the way) 대신에 쓰인 복수형 ‘방식들’(ways)을 ‘다른 방식’(the other way)이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다른 방식’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미지에 대한 기존의 보는 방식, 혹은 지배적인 해석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단적인 예로 버거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서의 해설을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할스는 말년에 자선기관의 신세를 지며 연명하는 처지였는데, 이때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 '자선요양원의 이사들'과 '자선요양원의 여이사들'이란 작품이다. 버거가 보기에 이 두 그림에서 “남녀 이사들은 이미 명성도 다 잃고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늙은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두 그림이 보여주는 ‘놀라운 콘트라스트’고 드라마다. 하지만 정작 미술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연구서의 저자는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개성적 시각을 의연하게 지키려는 할스의 노력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력들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해설에 대해 버거는 “바로 이것이 신비화”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보기에 초상화가로서 할스의 의의는 문학에서 발자크가 이룬 성취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자본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난 새로운 인물유형과 그들의 표정을 최초로 묘사한” 데 있다

 

버거는 또한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 빈치의 소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이 한 미국인이 이백오십만 파운드에 사려고 하는 바람에 갑자기 유명해진 사례도 지적한다. 이후에 이 그림은 특별 전시실에 걸려 있는데, 버거는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가격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지만 버거는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시각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미술을 바라본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권위를 통해서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예술을 경험의 모든 측면과 관련시켜서 보는 ‘총체적인 접근’과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몇몇 전문가들의 ‘비교주의적(秘敎主義的) 접근’을 구분하자는 제안도 그런 입장에서 나온다.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통해서 미술을 다르게,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버거는 누드화와 유화, 그리고 광고라는 세 가지 주제 혹은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실천한다. 그는 먼저 미술에 나타난 성차별적인 재현방식을 문제 삼는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자는 능력에 따라 존재감을 갖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결정된다. 미술에서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누드화이다. 벌거벗음(nakedness)이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누드(nude)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전시되는 것이다. 곧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유럽의 누드화에서 보여지는 대상은 보통 여자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인 화가나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 깊이 각인돼 있다는 것이 버거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페미니즘 시각이론보다 앞서 나온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린 유화적 전통에 대해서도 버거는 그것이 재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자본주의 문화와 깊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 “재산과 교환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유화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유화의 본질적 특성에 따를 때 화가의 역할은 물질적 재산을 칭송하는 것에 불과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바로 그런 전통의 규범을 깨뜨리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렘브란트와 푸생, 샤르댕 고야 혹은 터너 같은 화가들은 진정한 후계자를 남길 수 없었다고 버거는 말한다. 


버거의 비판적 통찰은 현대의 광고를 유화와 연관 짓는 대목에서 더욱 빛나는데, 광고는 유화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실제 사물들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게끔 한다. 하지만 유화의 경우 소유주가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주는 데 반해서, 광고는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생활방식에 불만을 갖게 한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광고의 메시지다. 그와 함께 광고는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소비에서의 선택으로 대치함으로써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든다. 비민주적인 모든 것을 은폐하면서 광고가 자본주의 문화의 꿈이자 생명으로 각광받는 이유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서양미술사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가 갖는 사회적 역할과 의미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견해들을 제시한다. 사십 년이 지났지만, 요즘 나오는 미술사나 시각이론서들이 오히려 온건해 보일 정도라면 여전히 필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12.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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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지난주와는 달리 눈길을 끄는 책들이 많아서, 적어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는 넘어서 주제를 '법과 정치' 쪽으로 한정했다. 타이틀은 한상범, 이철호 교수의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삼인, 2012)에서 가져왔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독재 정권의 지배 법리와 지배 수법을 되돌아보고 이를 토대로 역사와 민주주의가 역주행하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점검하자는 것이 이 책의 출간 목적"이라고 저자들은 밝혔다. '작은 책자'이긴 하지만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뜻에서 타이틀로 골랐다.

 

 

두번째 책은 조유진의 <헌법 사용 설명서>(이학사, 2012). "우리가 몰랐던 헌법의 이면, 대한민국헌법의 모든 것. 이 사회를 살아가는 공화국 시민들이 헌법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자로서의 위상을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 책이다. "헌법이 나라의 근본법으로 살아 움직이길 희망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라고 조국 교수는 추천사에서 적었다. 학술서이긴 하나 헌법의 탄생과정에 대해서는 서희경의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 2012)을 참고할 수 있다. 세번째 책은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31>(현암사, 2012)이다.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가 부제. 어떤 내용일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다. "법을 전공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와 설득력 있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께 강력히 추천한다"고 금태섭 변호사는 적었다. 세 권의 법 관련서에 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문학과지성사, 2012)와 베네수엘라 현장 활동가들이 쓴 <사회주의는 가능하다>(시대의창, 2012), 두 권을 얹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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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
한상범.이철호 지음 / 삼인 / 2012년 8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2년 09월 08일에 저장

헌법 사용 설명서- 공화국 시민, 헌법으로 무장하라
조유진 지음 / 이학사 / 2012년 9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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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크 캐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2년 9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2년 09월 08일에 저장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새로운 정치 토론을 위한 원칙
로널드 드워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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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실은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한 대목을 다뤘다. 번역본이 많이 나와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7-8종인데,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들을 주로 참고했다. 분량상 에리히 프롬의 말을 말미에 덧붙이지 못했다. "오웰의 작품은 강력한 경고이다. 만약 <1984>를 스탈린주의의 잔학함에 대한 또 다른 묘사로만 해석하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다."

 

 

 

한겨레(12. 09. 08) 무산계급이 잊고 있는 말 ‘다수는 힘이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며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지식인에 대한 회의와 노동자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일기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만 있다”고 적는다. ‘무산계급’ 대신에 ‘노동자층’이나 ‘프롤’이라고 옮긴 번역본들도 있다. ‘프롤’은 ‘프롤레타리아’에서 온 단어이리라. 그가 사는 가상국가 오세아니아의 인구 85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프롤이다. 여러 번역용례를 참고하면 윈스턴은 이 ‘피압박 대중’만이, 이 ‘우글거리고 경멸당하는 대중’만이, ‘저 거대한 소외집단’만이 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전체주의 체제의 오세아니아는 다수의 프롤과 소수의 당원으로 구성돼 있다. 당원은 다시 외부당원과 내부당원으로 구분된다. 외부당원인 윈스턴은 당과 빅브러더의 지배체제에 대한 반란을 꿈꾸지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내 반체제조직인 ‘형제단’이 소문대로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철저한 감시시스템 때문에 서로 모이기도, 알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반면에 무산계급 노동자들은 음모를 꾸밀 필요도 없다. “그냥 들고일어나서 파리 떼를 쫓는 말처럼 몸을 흔들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수이고 다수는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언젠가 윈스턴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거리를 지나다가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수백 명의 여자들이 절규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 줄 알고 흥분하지만, 알고 보니 노점상에서 파는 양은냄비를 구하려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인 것이었다. 왜 정작 더 중대한 일에는 함성을 지르지 못하는가.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는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윈스턴의 잠정결론이다. 무산계급의 반란은 말하자면 ‘가능한 것의 불가능성’이다.

당연하게도 당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힘든 육체노동, 가정과 아이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영화, 축구, 맥주, 도박”이 노동자 대중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걸 파악하고 있기에 그들을 관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정치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필요도 없다.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 배급량을 줄이는 식으로 통제하고 원시적인 애국심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984> 하면 떠올리게 되는 성욕에 대한 엄격한 규제나 텔레스크린을 통한 감시도 노동자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치안경찰도 그들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다. “노동자와 동물은 자유이다”가 아예 당의 슬로건이다.

그렇지만 윈스턴은 노동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직 생각할 줄 모르더라도 그들은 가슴과 배와 근육에 세계를 뒤엎을 힘을 기르고 있다. 윈스턴은 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널고 있는 튼튼한 아낙네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언젠가는 저 힘센 여자의 배에서 의식을 가진 종족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그렇게 도래할 것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12.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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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에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슬로 리딩의 힘과 즐거움에 대해서 적었다. 인용된 만델슈탐의 시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의숲, 2012)에서 가져왔다.

 

 

 

경향신문(12. 09. 07) 독서,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초등학교 때의 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속독법 특강이 있었다. 속독의 필요성과 요령에 대한 내용이었다. 비슷한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TV프로그램에서도 속독술을 ‘묘기’로 보여주기도 했다. 몇십 초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고 질문을 알아맞혔다. 속독술은 진기한 기술이면서 부러운 능력이었다.

한창 책을 많이 읽고 독서에 대한 욕심도 컸기에 <기적의 속독법> 같은 책을 구해서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안구운동법과 함께 지금도 생각나는 요령은 독서의 단위를 단어에서 문장, 문단으로 점차 확장해나가는 것, 대각선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 등이다. 크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연습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시집을 읽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툼한 소설책이라면 속독이 요긴하겠지만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얇은 시집을 속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속독이 만능은 아니란 생각에 속독에 대한 열의도 좀 시들해졌다. 빨리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읽는 것일 테니까.

무엇이 잘 읽는 것인가. 최근에 읽은 한 사례가 인상적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책은 하시모토 다케시라는 한 국어교사 이야기다. 원제는 <기적의 교실>이다. 올해 7월에 100살이 된 하시모토는 인생의 절반 동안 고베 시의 사립 나다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이 학교는 굴지의 입시명문고로 유명한데, 1968년엔 도쿄대학 최다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어떤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하시모토의 교수법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이다. 나카 간스케란 일본 작가의 자전적 소설 <은수저>를 3년 동안 읽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따로 없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직접 만든 학습교재를 통해서 작품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고 조별로 토론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썼다. 국어가 모든 공부의 기본이고 국어 실력이 살아가는 힘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하는 방식이 하시모토에게는 ‘슬로 리딩’이었다. “모르는 것 전혀 없이 완전히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책 한 권을 철저하게 음미하는” 지독(遲讀)과 미독(味讀)이 바로 슬로 리딩이다.

빨리 읽는 속독이 아니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 미독이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독서법이었다는 사실은 음미해볼 만하다. <독서법>의 저자이기도 한 사이토 다카시는 이 슬로 리딩에 대해서 ‘걸어서 가는 소풍 같은 것’이라고 평한다.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버리는 게 아니라 길가에 꽃들에도 눈길을 주어가며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기는 산책 같은 소풍이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넘어진다”는 셰익스피어의 경구는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고, 그 책들을 모두 슬로 리딩으로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통한 배움의 경험이 없다면, 독서는 후딱 지나가버린 인생만큼이나 빈곤할 듯싶다. 독서의 목적이 ‘읽어치우는 것’은 아니잖은가.

대학원 시절에 내가 들은 놀라운 수업 중의 하나는 만델슈탐이라는 러시아 시인의 4행짜리 시 읽기였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의/ 조심스럽고 둔탁한 소리/ 숲 속 깊은 정적의/ 연이어 들려오는 선율 사이로…”가 시의 전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 반영된 시인의 시학을 포함하여 시의 이모저모를 철저하게 읽어나가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옆길로 새는 것도 권장한 하시모토식 수업과는 달리 오직 이 한 편의 시에만 집중한 슬로 리딩 강의였다.

진정한 배움은 그런 수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슬로 리딩,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더 많이 가르치면 좋겠다.

 

12.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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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통의동의 '갤러리 시몬'에서 오늘부터 10월 18일까지 황혜선 작가의 개인전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이 열린다(02-549-3031). 몇년 전 개인전 도록에 작가론을 실은 인연으로 이번에도 전시회 도록 서문을 쓰게 됐다.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

 

오랜만에 황혜선 작가에게서 연락을 받고 갤러리를 찾았다. 새 개인전의 서문을 부탁받은 참이다. 잠시 작가를 기다리는 동안 전시장 1층에서 ‘풍선들’과 ‘풍선을 든 아이’를 보았다. 풍선과 풍선장수라는 소재는 낯설었지만 곧 ‘황혜선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익은 스타일의 드로잉이었기 때문이다.


널따란 공간에서 인물들은 제각각 자기 몫의 풍선을 들고 서 있었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들. 바람은 바람(風)이면서 바람(願)이다. 풍선들의 풍만함은 그 바람들의 풍만함이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리려는 자세로 충만한 풍선들. 작가는 물론 이 풍선들을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감정이입이 없다면, 풍선과 풍선을 든 사람들은 한낱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포착행위가 드로잉-조각의 입체감을 얻게 될 때 거기엔 어떤 의지가 개입한다. 그것을 오래 응시하고 보존하려는 의지 말이다.


어떤 것이 놀랍거나 진기할 때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의 충동은 본능적이다. 하지만 풍선이나 풍선을 든 아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진기한 오브제가 아니다. 유원지에서 그런 풍경은 일상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다. 작가는 아주 태연하게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천연스레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는 것 아닌가요, 라고 묻는다. 아니 그 질문은 과거형으로 읽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각자가 든 풍선을 채우고 있는 바람이 서풍이다. 적어도 황혜선의 세계에서는 서풍이어야 한다. 작가는 드뷔시의 전주곡에서 ‘서풍이 본 것’이란 제목을 따왔다고 알려주면서, 거친 바람을 뜻하는 서양의 서풍과 달리 우리의 서풍은 ‘하늬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비유컨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아니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서풍이다.


돌이켜보면 작가는 언제나 그런 세계를 작품으로 형상화해왔다. 지난 2010년 개인전의 제목이 ‘아주 잠깐, 조금씩만(For a moment, Just a bit)’이었던 것도 떠올려볼 수 있다. 예컨대 손으로 떠올린 물이 손바닥에 머무는 한순간을 작가는 포착하여 오래 보존하고자 한다. 그런 순간들에 영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황혜선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조금씩만 변화해온 여정임에도 전시장 2층에서는 또 다른 황혜선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만나는 황혜선이다. 그의 많은 드로잉-조각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너무도 많은 ‘인물들’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주어야 한다. 주로 일상의 사소한 소품들에 주목해온 작가가 주변의 사람들과 여행지에서 본 인물들을 드로잉-조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에. 물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작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인물들의 한순간과 그 순간의 표정, 그리고 자세를 보여주고자 한다. 정작 그들은 기억하지 못할 한순간일 테지만, 이 전시공간에서는 그 순간들이 그들을 굳건하게 대변하고 있다. 은박거울에 에칭으로 새긴 풍경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풍이 본 것’은 작가 황혜선이 본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같이 보게 된 것이다. 모두가 서풍이 되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을 잠시 내려다보는 순간, 그 ‘몇 초간의 여유’이다. 차를 마시는 아이, 책을 읽는 여인, 헤드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는 남자, 카페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노신사 등등 모두가 각자의 ‘몇 초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날들이 많지 않고, 그런 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포착해내는 작가의 태도에서 그런 조바심을 읽어낸다면 과장일까.


전시장 3층에서 우리는 작가의 작업실 풍경을 엿보게 된다. 황혜선이 내다보는 풍경이면서 서풍이 지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 잠시, 다만 몇 초간이라도 머물러달라고 작가는 제안하는 듯싶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으로 잠시 서풍이 되고 서풍의 바람맞이가 된다. 전시장 곳곳에서 우리 안의 나뭇잎이 잠시 흔들리는 소리를 당신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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