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마트에 다녀온 걸 제외하면 하루종일 '재택'근무를 한 탓에 바깥 소식은 인터넷 뉴스로만 접한다.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이 오늘 입관되었다고 하니 이제 그의 죽음도 '현실'이 됐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은 주로 1987년 대선 정국 이후여서(그때 나는 아직 선거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정당의 선거참관인으로나 투표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따져보면 길지 않다(그래도 나에겐 얼추 반생이다!). 그 기간 동안 '한국 정치'하면 늘 한쪽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니 이른바 한국 정치사의 '상수'이다. 이제 그 '상수'를 제하고 '변수들'로만 방정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당장은 의문이 든다. 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선 김에 그의 시대의 공과도 좀더 분명하게 밝혀지면 좋겠다. 그게 가야 할 길의 방향과 보폭을 정하는 데 요긴할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DJ노믹스'를 추억하는 기사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20) 디제이노믹스에 대한 추억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국민의 정부 초기에 썼던 취재수첩을 들춰봤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맞아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 때였다. 수첩엔 그때의 숨가빴던 상황들이 거칠게 담겨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다룬 내용이 많았다. 수첩을 넘기다 ‘디제이노믹스’(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철학과 정책기조)란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1999년 8월 어느 날, 청와대에서 경제 관련 업무를 하는 비서관과 저녁을 먹으며 디제이노믹스를 소재로 오간 말들을 적어 둔 것이었다.   

질문은 주로 “디제이노믹스는 어디로 갔느냐”였다. 그는 “지금은 아이엠에프 때문에 옴짝달싹 못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대통령이 하고 싶은 경제정책들을 내놓을 것이다”라는 요지로 대답했다. 실제로 그해 8월15일 김대중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새로운 경제정책 구상을 밝혔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 들어도 도발적이다.

“…더불어 성공할 수 있는 경제 번영을 이룩하겠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하고 중산층 중심으로 경제를 바로잡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이 없도록 세제를 고치겠습니다. …중산층 육성과 서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인간개발 중심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적극 펴겠습니다. …근로능력과 의욕이 있는 모든 국민에게는 직업훈련과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야망은 그 뒤 대체로 흐지부지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한 디제이노믹스는 실종됐다고 진단했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반민주적 성장지상주의와 야만적 시장만능주의의 악조합’이 굳어졌다고 혹평한 이들도 있다. 과연 이런 비판이 타당할까.

김 전 대통령이 편 경제정책 가운데 디제이노믹스와 딱 부러지게 부합하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확실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정도가 꼽힌다. 하지만 현행법과 제도에는 디제이노믹스가 곳곳에 녹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때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라면,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기업의 구성원한테 구조조정 주체로 참여해 성과를 나눠 가질 수 있게 한 한국형 우리사주제도다. 국민의 정부는 2001년 8월에 근로자복지기본법을 제정하고,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여러 관련 법령을 개정해 우리사주제를 크게 바꿔놓았다. 주식회사 사원들한테 우리사주제를 단지 재테크 목적이 아니라 경영 참여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의 종업원주식소유제도(ESOP)를 우리 실정에 맞게 설계한 제도다. 이를 잘 활용하면 구조조정과 대규모 실업의 긴장관계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선 항공·철강·자동차 같은 기간산업의 구조조정에 활용돼 성공한 사례가 수없이 많다. 1980년대 미국 크라이슬러의 극적 회생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제너럴모터스(GM)의 구조조정도 공적자금과 노조의 퇴직연금 출자를 통한 합작이다.

디제이노믹스에 대한 되새김은 자연스럽게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쌍용자동차를 떠올리게 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쌍용차 회생의 전제로 3자 매각을 얘기한다. 새 주인을 찾아야 회생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새 주인’에서 쌍용차 사원들은 아예 배제되어 있다. 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면, 쌍용차 회생의 씨앗을 디제이노믹스에서 한번 찾아보시라.(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09.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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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1 16:02   좋아요 0 | URL
고인의 일기에 경천애민(敬天愛民) 사상이 스며있습니다.

로쟈 2009-08-22 10:07   좋아요 0 | URL
국가 지도자라면 의당 갖추어야 할 태도일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은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