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숲, 2009)이다.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으로 새롭게 출간된 것인데, 원전 번역으론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삼성출판사본과 동서문화사본을 더 갖고 있는데, 당장 손에 들 수 있는 건 동서문화사본과 이 숲본이다. 플라톤의 <국가>와 함께 정치학의 고전이면서 '기원적' 저작에 해당하기에 시간을 내 한번쯤 숙독해봄 직하다(책의 윤곽은 강유원의 <서양 정치사상 고전 읽기>(라티오, 2008)에 잘 정리돼 있다. 강유원은 박영사본을 대본으로 삼았다). 서평기사를 일단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15) 서구 정치학의 뿌리…핵심은 공공의 이익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정치학>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희랍어 원전 번역으로 새롭게 나왔다. 이로써 서구 정치학의 고전이자 정치학 이론의 뿌리라 할 저작을 좀더 가깝게 다가가 읽을 수 있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년 시절에 스승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메이아’에서 20여년을 공부하고 가르친 뒤 40대에 새로운 학원 ‘뤼케이온’을 열어 당대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그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 작업을 했는데, 형이상학에서부터 윤리학·정치학·자연학까지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400여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술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저술들(‘엑소테리카’)과 학원 내부용 강의 노트들(‘에소테리카’)로 나뉘는데, 외부용 저술은 다 사라지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50편 정도의 내부용 저술뿐이다. <정치학>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정치학>(폴리티카)은 먼저 저술된 <윤리학>(에티카)과 짝을 이루는 저작이다. 개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그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정치학>은 그 개인들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국가 공동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윤리학>의 마지막 구절은 “자, 이제 (국가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보자”로 끝나는데, <정치학>은 이 문장에 이어서 그 국가(폴리스)의 발생과 구조와 최선의 형태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윤리학의 일부로 보았는데, <윤리학>의 핵심 원칙인 ‘중용’이 <정치학>에서도 핵심 원칙으로 작동한다. 개인의 행복이 중용에 있듯이, 훌륭한 국가도 중용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서구 정치학의 뿌리이기는 하지만 그 뿌리의 뿌리라 할 저작이 없는 것은 아닌데, 스승 플라톤의 <국가>(폴리테이아)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탁월한 제자였으면서도 스승과는 견해가 달랐고 스승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도 서슴지 않았다. <정치학>도 그런 저작 가운데 하나다. 플라톤의 <국가>가 이상국가라는 이념을 상정하고 그 국가의 성립 조건을 상상력을 동원해 밝히고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현실 세계의 국가들을 경험적으로 분석해 거기서 최선의 정치체제를 찾아내는 방식을 구사한다. 플라톤이 이상주의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적으로 현실주의적이다.
<정치학>은 ‘국가 공동체’(폴리스)의 기원과 성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출발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가정’(오이코스)이다. 폴리스는 다수의 가정 공동체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폴리스를 알려면 가정 공동체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최초의 경제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이 등장한다. 경제학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란 바로 ‘가사 관리’를 뜻한다. 여기서 가정이라고 번역된 오이코스를 그 시대의 실상대로 이해하면, 한 명의 가장 아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몇 명의 노예들과 일정한 넓이의 토지로 이루어져 있는 일종의 장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이코노미아는 이 소규모 공동체를 가꾸고 이끄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친 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의 다른 양상들도 밝히는데, 물물교환에서 화폐가 탄생하고 상업이 성립하고 독점이 발생한다는 것까지 설명한다. 그의 설명 가운데 생산된 물건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다는 대목은 훗날 카를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정치학>의 모든 주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명제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 번역서는 그 명제를 “인간은 ‘국가 공동체(폴리스)를 구성하는 동물’(zoion politikon)이다”라고 번역했다. 이 명제는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바뀐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폴리스가 보편적 질서였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목표가 구성원에게 단순한 생존이 아닌 훌륭한 삶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 훌륭한 삶을 전체적으로 보장하는, 다시 말해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치체제는 올바른 것이지만, 다스리는 자들의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모두 올바르게 운영하면 공공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가장 잘 작동할 수 있는 정치체제는 ‘혼합 정체’다. 민주정체의 좋은 요소와 귀족정체(과두정체)의 좋은 요소가 결합한 것이 그가 말하는 혼합 정체인데, 민주정체는 다수의 참여와 지배를 보장하고, 귀족정체는 뛰어난 개인들의 ‘탁월함’(아레테)을 활용할 기회를 보장한다. 이 혼합 정체가 원만히 유지되려면, 그 중심에 중간계급이 넓게 포진해 있어야 한다. 이 중간계급이 중심을 잡고 민주정과 귀족정의 장점을 떠받치는 것이 국가에서 실현되는 ‘중용’인 셈이다.(고명섭 기자)
09. 0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