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시몬느 베이유(1909-1943)의 <중력과 은총>(이제이북스, 2008)이 재출간됐다. 책의 제목은 그대로이지만 출판사와 표지는 바뀌었고, 그에 따른 것인지 저자의 표기도 '시몬 베유'로 변경됐다(나는 가급적이면 고유명사 표기를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애장하고 있는 책이니 관심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표지이고 품새이다. 이번엔 이렇게 나왔다(알라딘의 표지가 작아서 교보에서 빌려왔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서 어떻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난번 표지보다는 조금 나은 듯도 하다. 지금은 절판된 사회평론판은 이런 표지였다. 더 나오지도 않을 책에 '사색1'이라고 붙인 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한불문화출판판. 역자가 동일하므로 내용이 그다지 바뀌었을 성싶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수집가들은 순전히 '표지'만 가지고도 유혹받는다.

세 권의 이미지를 모아놓으니 신간의 표지가 나쁘진 않아 보인다. 한데 어떤 책인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시몬 베유의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통찰을 묶은 책. 베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중력이라는 필연성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며 인간의 구원은 지성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게 해주는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생전의 베유가 남긴 노트를 사상적 동지였던 귀스타브 티봉이 발췌해 엮은 것으로 1943년 처음 출간됐다."라는 게 설명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니 '중력과 은총'이란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우리에게 충분한 영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영감 때문에 나는 자작 시집 한권의 제목을 '중력과 은총'이라 붙였더랬다(http://blog.aladin.co.kr/mramor/933104 참조). 역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력과 은총>은 제목 그대로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맡겨진 인간의 불행과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주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책은 중교적 수상록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비극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인간이 처한 근본적 삶의 조건을 파헤친 인간 탐구의 기록이다."

'기독교적 비극성'에서 출발하지만 베이유의 기록에는 유머와 위트가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아포리즘은 이런 것이다. "사랑은 우리들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당신 또한 이러한 인간적 삶의 조건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중력과 은총>은 애장서로서 충분하다. 펴보지 않아도 된다. 다만 책장 가까이에 두시길. 우리를 잡아끄는 삶의 중력 속에서도 은총의 빛을 잃지 않도록... 물론 가끔씩 들춰봐도 좋겠고...

0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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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n 2008-10-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Simone Weil의 한글표기 '시몬 베유'는 현행 국립국어원 외래인명 표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임의로 바꾼 것이 아니랍니다.

로쟈 2008-10-16 20:59   좋아요 0 | URL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외래인명 표기법이 저로선 맘에 들지 않습니다. 고유명사는 원래 언어체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 것인데, 일률적으로 짜맞추는 건 상식 밖입니다(폭력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sophia49 2008-10-1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시몬느 베이유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좋아요....
현행법이 그렇다하니...시몬 베유로 불러야겠네요..

로쟈 2008-10-16 21:01   좋아요 0 | URL
사람 이름 '개명'하는 걸 국립국어원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듯해요...--;

비로그인 2008-10-1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그 표기법일 때 시몬느면 여자, 시몬이면 남자라고 생각해왔는데 표기법이 바뀌어서 다시 헷갈리게 생겼네요;

로쟈 2008-10-16 21:09   좋아요 0 | URL
그런 차이도 표시했나요?.. '느'라고 늘려 발음하면 조금 우아하게 들리지 않나 싶어요...

hemiola 2008-10-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아름다운 제목이네요. 꼭 사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8-10-17 12:52   좋아요 0 | URL
그냥 꽂아두시기만 해도 됩니다.^^
 

교수신문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의 문학세계를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필자인 정혜숙 교수는 르 클레지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전문가'이다. 찾아보니 르 클레지오의 책으론 제일 먼저 나온,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읽은 <조서>(세계사, 1989)의 역자이기도 하다(해서 르 클레지오란 이름이 내게 제일 먼저 떠올려주는 건 '조서'와 '최수철'이다. 이 경우는 소설가가 아닌 번역자 최수철이다. 그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여러 권 번역했다). 다른 리뷰기사들 가운데는 '르 클레지오, 사라져가는 문명 증언한 ‘문학의 구도자’'(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00050295&code=960205)가 요점을 잘 정리해주고 있어서 참조할 만하다. 

진작부터 거장으로 평가받는 작가이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구도적' 경향의 작가들을 내켜하지 않는 탓이다. 그에게 붙여진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는 타이틀은 초점이 빗나간 듯하고, 영어(아버지)와 불어(어머니)에 모두 능통하지만 불어로만 쓰는 것을 고집한다는 그에게 가장 영예로운 호칭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프랑스어 작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노벨상 수상소감은 http://kr.youtube.com/watch?v=f2m78qBZPow 참조)...   

교수신문(08. 10. 13) 문명 속의 인간소외와 고독 응시한 투명한 감수성

장 마리 귀스타브 르 끌레지오(Jean-Marie Gustave LE Clezio)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변의 아름다운 도시 니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니스의 태양과 바다는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니스대학과 엑스 앙 프로방스대에서 앙리 미쇼와 로트레아몽 연구로 석사학위와 뻬르디냥대에서 멕시코의 유카단 반도의 마야 원주민 연구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대신 방콕의 불교대학에서 2년 동안 프랑스 문학을 강의한 바 있고 최근에는 뉴 멕시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대부분의 생활을 여행과 집필에 바치고 있으며, 프랑스 현대문학의 ‘살아있는 신화’라는 평을 얻고 있다.

23살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 『조서(Le Procs-Verbal)』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게 돼 프랑스 문단에 ‘젊은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 후 『열병』 ,『홍수』, 『물질적 환희』, 『사막』,『 황금 물고기』, 『우연』등 문제작들을 발표해 현대 프랑스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는 대중과의 접촉이나 언론매체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신비에 싸인 비밀스런작가다. 대중적인 인기에는 무관심한채 여행과 은둔 속에서 자기 완성의 길을 찾고자 하는 작가이다.



첫 작품 발표 당시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장에게 밝힌 바와 같이 르 끌레지오는 전통소설의 기법을 표방하지 않음과 또 1950년대부터 새로운 문학과 예술 기법으로 등장한 누보로망(Nouveau Roman)과도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며 그의 독자적인 창작입장을 밝혔다. 그의 문체는 알랭 조프로와의 ‘카메라-펜’이라는 평처럼 객관적인 서술을 중시하며, 거울에 비치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단순하고 투명하며 시적인 언어로 육화한다.

“나는 만들어 내지 않는다. 나는 옮겨 쓸 뿐이다.” 그의 소설에는 다양한 소설기법들이 등장한다. 누보로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반복법, 예언적 돈호, 상징과 은유, 꼴라주 기법, 기사와 시진의 이용, 연극과 영화기법, 문장 지우기 등의 방법으로 사물을 진실에 가까운 근본적인 의미표현에 접근하려 한다. 

르 끌레지오의 작품은 문명 속의 인간소외와 고독을 주제로 한다. 첫 작품에서부터 1980년의 사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을 통해 현대문명의 거대한 폭력에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을 고뇌에 찬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첫 작품들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마련된 기나긴 조서이다.

23살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 『조서』에 나타난 주제들은 다음에 올 그의 소설들의 원형이 된다. 이 소설은 ‘군대에서 탈영했는지 또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는지 모르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담 폴로는 전통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의 취향에는  맞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무정형의 무기력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들로 이뤄져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지중해의 어느 도시의 언덕 위의 빈집에서 혼자 햇빛을 즐기며 ‘괴물 같은 고독’ 속에 갇혀 산다. 유일한 여자 친구인 미셸 만이 가끔 그를 만나러 올뿐이다. 아담은 그녀와의 첫 포옹의 기억과 비 오는 날 나무 아래서 그녀에게 행한 성폭행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가끔 그는 시내로 내려가 담배와 먹을 것을 사기도 하며 동물원에 들리거나 개를 쫓기도 한다, 걷는 동안 그는 세계가 끊임없이 들끓고 소요하며 소음을 내는 것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에게 낯설음을 주었고 그가 참여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는 무대 앞의 관객처럼 세계를 바라보고 그의 見者(Voyant)의 시선은 인간과 사물들이 서로 부딪치며 뒤엉켜진 혼돈의 세계를 투시한다. 그 세계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언덕 위 빈집에서 그는 삶과 죽음의 이중의 공포 속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광기는 아담 폴로에게 최후의 도피처가 된다. 경찰은 광장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을 외치는 그를 붙잡아 정신병원에 수용한다. 정신병동의 네 개의 벽, 소독된 방에 수용된 그는 드디어 그가 오랫동안 갈망했던 휴식과 평화 속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을 되찾게 된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랑스러운 여자와 산책하는 꿈과 환상들로 수놓인 자신만의 세계에 영원히 갇히게 된 그가 떠올리는 단어들 ‘어머니’, ‘가슴’, ‘배’, ‘구멍’, ‘조개껍질’, ‘바다’등의 이미지들은 모성적 공간의 다른 이름들이다.

르 끌레지오의 주인공들은 전통소설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누보로망의 주인공들처럼 익명으로 존재하며 그들의 공간 역시 익명이다. 그의 소설은 각각 독립된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속의 여러 이름을 가진 여러 개의 목소리로 구성된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이 문명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 비극적인 세계를 떠돌다 도시의 혼돈 속에 소리 없이 소멸해 버리는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의 시선과 감수성이 읽어냈던 현대 문명 속의 비극적인 인간의 조건과 상황의 서술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르 끌레지오의 작품들은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 시기는 첫 작품 『조서』부터 1980년 『사막』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른 숨결로 발표한 작품들로 이뤄져있으며 일관된 흐름을 안고 있다. 작가는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현대문명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거대한 폭력의 세계와 그 세계에 던져진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로서 이중의 역할을 안은 현대인의 초상을 통해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서를 작성하고 있다.

한편, 르 끌레지오는 현대의 상업주의와 물질문명이 인간에게 가하는 소리 없는 그러나 숨겨진 거대한 폭력과 그런 상황이 만들어내는 고독한 현대인의 운명을 그렸다. 문명 속의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고뇌에 찬 시선으로 그린 르 끌레지오의 작품세계는 1980년 발표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쓴 소설’ 『사막 』을 기점으로 제2의 전환기를 마련한다. 푸른 두건의 남자들의 광활한 대지인 사막에서 태어난 랄라는 고향을 등지고 문명세계인 프랑스로 건너온다. 그녀는 많은 경험을 하게되고 마침내는 사진 기자의 눈에 들어 유명한 모델이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주었던 문명세계는 그녀가 진정한 삶을 누릴 만한 세계가 아니었다. 사막의 딸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바닷가의 무화과나무 아래 그녀의 첫 사랑이었던 목동의 아이를 낳는다.

이 소설 이후 르 끌레지오 자신도 인간의 잃어버린 실락원의 꿈을 찾아 문명세계를 뒤로한다. 현대인들이 오랫동안 잊어왔고, 잃어버렸던 공간의 빛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찾아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끝없이 수많은 여행을 한다. 마침내 시인의 혼은 긴 여정 끝에 남미의 인디언들에게서 경이로운 침묵의 언어와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발견한다. 지금까지의 작가의 서사적인 세계는 서정성으로 탈바꿈한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제 어린아이, 떠돌이 방랑자이며 도시적 공간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간인 자연과 바다가 무대가 됐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이미지는 그의 모든 시적 영감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어린아이는 빛 아름다움 순수 투명한 새벽 그 자체이며 신의 모습의 재현이다. 어린아이는 복잡한 비밀로 얽힌 세계의 문을 아무런 장애 없이 열며, 세계와 직접적이고 완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며 하늘과 땅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자이다. 자연과 어린 시절에의 귀환은 황금시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과 자유에의 복귀를 의미한다. 어린아이의 무소유, 인디언들의 침묵의 언어, 자연, 이것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가치의 힘과 단순한 삶의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

르 끌레지오는 무소유의 기쁨과 방랑자의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과 자연 속에 인간과 태양과 동물들이 한 리듬으로 어우르며 사는 단순한 삶의 기쁨, 자연에의 귀의를 권유하며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인 자연, 녹색 낙원으로의 귀환을 재촉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이루고자 하는 지상에서의 자유롭고 행복한 진정한 삶의 약속이다. “지상의 삶은 그 어떤 꿈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다(La vie terrestre est plus surprenante que n’importe quel rve).”(정혜숙 전남대·불문학)

08. 10. 14.

P.S. 경향신문의 기사를 인용하면, "스웨덴 한림원은 “르 클레지오가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며 “그는 인간성 탐구와 관능적 환희, 시적 모험, 새로운 출발 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1980년작 <사막>에 대해서는 “이민자들의 눈에 비친 북아메리카(*북아프리카)의 잃어버린 문화가 잘 그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또 40개의 작품 중 <사랑하는 대지> <도피의 서> <전쟁> <거인들> 을 주요작으로 꼽았다." 20여편에 달하는 작품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사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작품은 빠져 있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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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1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사막>은 노벨상 수상과 더불어 새 옷을 입고 그대로 다시 나왔군요. 인터넷 서점에서는 품절상태였고, 가끔 서점 구석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노벨상 특수덕에 다행입니다.

로쟈 2008-10-15 17:08   좋아요 0 | URL
네, 그런 효과가 있지요. 서점에서 따로 전시도 해주고...(대학서점 같은 곳에서만 둔감하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도적 경향이란 불교 소설에 많이 나오는 그런 분위기를 말하는지요? 클레지오가 화순 운주사를 방문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 취향과 관계가 있나 해서요.

로쟈 2008-10-16 21:31   좋아요 0 | URL
네, 그의 검소하고 경건한 생활태도에서도 묻어나는데, 소설을 쓰는 선사를 연상시킵니다...
 

퇴근길에 들른 서점에서 손에 든 책은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근간 예정이었던 도서였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책들과는 다른 표지여서 의외였다. 흰색 바탕의 표지보다는 좀더 고급스럽게 보인다. 물론 이렇듯 '고급 담론'으로 소개된다는 점이 역설적이긴 하다. 역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수행적 모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초에 나온 두 권의 랑시에르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수준의 번역서인지라 반갑다(랑시에르 수용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11741 외 허다한 페이퍼들을 참조). "랑시에르의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이 ''자리 옮김'의 철학자'의 문제의식과 사유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부터 집어드는 게 수고를 더는 길이겠다(랑시에르의 한국어판 서문도 붙어 있다). 필시 이번 주말 북리뷰들에서 다루어지겠지만 아직 아무런 리뷰도 뜨지 않은 탓에 출판사의 책소개만 옮겨놓는다(알라딘에는 이마저도 아직 뜨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 '옮긴이의 덧말'도 배여 들어간 소개이다(*국내 출판가의 '랑시에르 붐'에 대한 해설기사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41729275&code=960205 참조).

철학ㆍ정치학ㆍ문학ㆍ사회학ㆍ영화학ㆍ미학ㆍ역사학ㆍ교육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친 사유의 폭!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는 현재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라바르 등과 함께 프랑스 사상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 철학자이다. 한때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으로 함께 지적 활동을 했으나, 68운동을 경험하면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적 실천이 내포한 '앎과 대중의 분리', 그들의 이데올로기론이 함축하는 '자리/몫의 배분'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고(文書庫)를 뒤지기 시작하여 노동자들은 단지 '노동자 고유의 사유'를 전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심지어 수준 높은) 사유와 말을 전유하려는 의지를 봄으로써 자신의 사상적 체계의 근본적인 출발점, 즉 사회 질서 속에서 각자에게 분배된 자리와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정체화'(이른바 '자리 옮김')함을 목도한다. 비록 정치철학적 저술로부터 자신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무지한 스승』(1987)과 같은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책을 비롯하여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 그리고 문학ㆍ사회학ㆍ영화학ㆍ미학에 관한 다양한 방면의 독창적인 작업을 통해 21세기 세계 지성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정치'를 논하는 첫 번째 저술이자, 랑시에르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 역할!
이 책은 자크 랑시에르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저작이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정치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버전)과 정치의 회귀(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의 버전)라는 언뜻 보기에 대립되는 두 언설이 똑같이 갈등과 계급투쟁, 해방의 정치를 제거하던 정세 속에서 개입하기 위해 씌어졌다. 오늘날 정치를 경영으로 보는 실태와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랑시에르의 고민은 그 현재성을 담지해내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그의 정치철학적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전 저작들과 이후 저술들에서 보여지는 사상적 전개의 중심테마를 명쾌하게 제시하여, 우리가 감히 이 책을 랑시에르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로 봐도 손색이 없다.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과정 -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의 '정치'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정치'와 '치안',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삼항조를 제시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적인 것'이란 이질적인 두 과정, 즉 통치 과정(치안)과 평등 과정(정치)의 마주침이다. 흔히 우리는 정치란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결코 정치가 아니다. 이는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간의 통치(즉 치안)이며, 그것은 곧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랑시에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또는 '몫 없는 자들의 탈정체화')를 통한, 즉 지배적 질서 속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존재들 스스로의 드러냄의 과정이라고 본다. 앞서 랑시에르가 19세기 문서고에서 노동자들의 말과 글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과정이었던 것이며, 역자가 전태일의 예를 통해 보여준 것 역시 바로 이 지점이다. 역자의 말대로 전태일과 그의 동료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업주가 보기에, 또 치안 논리가 보기에는 주제넘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신분이나 자격, 자기 처지의 한계를 넘어 말과 행동을 통해 그것을 지나침으로써 '정치'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랑시에르에게 본래의 '정치'란 바로 이것이다. 즉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로 올곧게 자리서는 것이야말로 그것이다.

정치의 과정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주장/단언'하는 것!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랑시에르는 정치 집단을 조직화하는 형태나 미래에 대한 처방, 혹은 예단에 어떠한 이론적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인데, 그것은 국가 전복이나 조직적인 권력 장악과 같은 혁명론이 아니라 정치 혁명은 '감성적 혁명', 즉 지각장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 장악은 주체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랑시에르가 의미하는 '정치'의 과정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주장/단언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한다. 이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그 요구의 만족을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평등 전제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운데 선언되고 단언되는 평등의 입장, 이 과정이야말로 '정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의 핵심인 '정치적 주체'에 대해서도 랑시에르는 독특한 자신의 견해를 내보인다. 즉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계급결정론적인 속성)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치안 질서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게 된다고 본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의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 현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최근 국내에도 새롭게 선보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가 갖는 우리 사회에서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새롭게 문제화되고 있는 '배제된 자'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 요구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거부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언제나 행위, 그중에서도 논거를 만들고 말과 사물의 거리, 틈을 가리키는 탈정체화하는 양식으로 정의하는 랑시에르에게서 우리는 배제된 자들, 몫 없는 자들이 어떻게 정치 과정 속에 합류하는지 최근의 우리 사회 문제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08. 10. 13.

Жак Рансьер На краю политического Aux bords du politigue

P.S.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감성의 분할>, <미적 무의식> 등이 더 소개돼 있다). 최근에 검색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의 저자 토드 메이의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사상>(2008)도 탐나는 책이다(국내 대학 도서관들에는 아직 들어와 있지 않다). <질 들뢰즈>가 훌륭한 소개서라서 더욱 기대를 갖게 한다(국역본 <질 들뢰즈>는 훌륭한 번역서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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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10-14 22:32   좋아요 0 | URL
'자끄 랑시에르'하니 거의 반사적으로 '그 책'이 떠오르는군요. 이후에 해결은 잘 되셨는지요.

로쟈 2008-10-14 22:35   좋아요 0 | URL
법정까진 안 갔습니다.^^;
 

경향신문의 연재 '자서전 읽기'의 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크(죄르지) 루카치의 자서전 <맑스로 가는 길>(솔, 1994)을 다루고 있다. 하도 오랜만에 접하는 책인데다가 장문의 기사여서(원고지 25매 가량인데, 일간지 북리뷰로서는 파격적인 분량이 아닐까) 눈길이 머물렀다. 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현재는 절판된 지 오래인 듯싶다.  

  

경향신문(08. 10. 11) 게오르크 루카치의 자서전 ‘맑스로 가는길’

분명히 가슴 찢어질 듯한 고통이었으리라.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모진 풍파를 겪은 스승이 죽어가며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혁명과 반혁명, 전쟁과 숙청의 시대를 견뎌낸 노철학자이건만 생명의 순리는 어길 수 없었다. 암에 걸린 데다 동맥경화가 심해져 죽음을 준비해야 했다.

기실 서둘렀어야 했다. 혁명의 동지이기도 했던 아내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했지만, 작업을 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때부터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음을 선고 받고서야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자료를 뒤지고 문서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책을 쓸 때 흔히 했던 대로 초안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타이프를 쳤다. 죽음을 앞두고 서둘러 썼으니 제대로 된 글이 될 리 없다. 기억의 사금파리만 널려 있을 뿐이니, 난수표도 이런 난수표가 없었다. 미완성의 문장인 데다 머리글자만 적혀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스승의 육신을 떠나보낼 수는 있으나, 삶과 정신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녹음기 앞에 앉혔다. 초안을 읽으며 무슨 내용인지 물었다. 87세의 노철학자는 죽어가며 답변해주었다. 그것은 경이로운 의지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포기했을 일이다. 엄습하는 죽음 앞에, 밀려드는 육체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발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노철학자도, 그의 제자도 포기하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이제 자서전이 아니라 유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971년 5월 작업이 끝났다. 그리고 6월4일, 별을 바라보고 가야 할 길을 알았던 시대는 얼마나 복되더냐고 말했던,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영면했다.

루카치 자서전 <맑스로 가는 길>(솔)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우리말 번역본은 루카치의 초고와 대담인 <삶으로서의 사유>, 그리고 자전적 글과 또다른 대담을 부록으로 덧붙여 펴냈다). 숱한 오해와 곡해, 그리고 비판으로 얼룩진 삶이 비로소 복원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상당히 곤혹스러워지게 된다. 헝가리 역사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펼쳐진 유럽혁명사를 알지 못하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숱하게 나와서다. 이런 상황은 루카치를 다시 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루카치를 세계적인 철학자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는 헝가리라는 배경을 떼어 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문인과 예술인, 그리고 혁명가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이래서는 자서전을 읽기가 곤란하다. 헝가리 혁명사를 공부하면서까지 그의 자서전을 읽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걸림돌을 피하면서 루카치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히 있다.



자서전 서문은 공동대담자였던 이슈트반 에외르시가 썼다. 그는 여기에서 루카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을 한다. 널리 알려졌듯 토머스 만의 <마의 산>에 나오는 나프타는 루카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자서전에 토머스 만과의 관계와 그의 작품에 모델로 나온 소감을 피력하는 대목이 나온다. 에외르시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있는데, 토머스 만이 루카치 삶의 미묘한 모순을 잘 파악했다고 본다.

“나프타는 예수회 회원이다. 즉 그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조직의 이데올로기적 전위 투사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지력 탓으로, 자신이 전력을 다 쏟는 운동의 바깥에 서 있기도 하다. 비록 그에게는 운동이 자유를 보장하긴 하지만 운동 쪽에서는 그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것은 결국 그 스스로 유발한 것이다. 즉 최종적인 결론으로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이단에 거의 가깝게 되는 그의 과감한 구상에 의해서 이러한 일이 유발되는 것이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 이미 미학자로서 우뚝 섰던 사람. 서양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를 가장 높이 평가했고, 속류화한 마르크시즘을 건져내려 했던 사람. 이념과 문학의 갈등에서 진정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써냈던 사람. 중부 유럽의 변방 출신이지만, 서구 사회에 충격을 가한 사람. 그러나 줄곧 자신이 믿고 따랐던 당은 그를 못미더워했다. 늘 숙청과 망명의 대상이었고, 마침내 당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는 반복하거니와, 나프타였으니, 여기에서 루카치의 삶은 보편성을 띤다.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느냐는 화두거리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뒤쫓으며 지속적으로 드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서양 지성사의 수수께끼일 터이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운 데다 그의 지적 도반들이 대체로 자유주의적이긴 하나 좌파적 성향을 띠지 않은 탓이다.



먼저 어린시절의 독서편력을 들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매우 올바르고 사려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성공만이 올바른 행동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여겼다.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일리아드>와 <모히칸 족의 최후>를 읽고 나서다. 그는 이 책들에서 “성공이 올바른 행동의 기준은 아니며 올바르게 행동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안락한 부르주아적 삶을 거부하는 반항아로 성장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읽은 <공산당 선언>으로 마르크스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의 인상을 “매우 강렬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만하다. 대학에 들어가서 <브뤼메르의 18일> <가족의 기원> 등을 읽었고, 특별히 <자본> 1권을 깊이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몇 가지 핵심 지점들의 정당성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어린 휴머니스트가 세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곧바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만하임, 하우저 등과 같이 공부했던 일요서클 시절만 해도 그는 아직 뚜렷한 혁명적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피히테에 빗대어 그 시대를 죄악의 시대로 보았을 뿐,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전망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사상적 방황은 1918년 가을 장미혁명에 대한 회상에서 드러난다. 역사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을 믿고 있으면서도 막상 “내 자신의 행위로써 폭력을 촉진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했을 때” 큰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적 전회를 자극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도대체 누가 영국과 프랑스의 문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애매한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에외르시가 쓴 서문을 참조해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현존하는 권력과 제도, 그리고 세계를 열광에 휩쓸리게 하면서 파국으로 몰고가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루카치의 경멸을 강화했다고 풀이한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루카치는 10월 러시아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1918년 12월 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의 제자였던 그는 헝가리 공산당에 가입한다.



루카치는 본디 작가가 되고 싶었다. 18세에 희곡을 썼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형편없다 싶어 불태워버렸다. 그러고는 문학사가가 되길 꿈꾸었다. 그러다 베르테르의 눈색깔이 검은색이냐, 파란색이냐를 놓고 벌이는 논쟁에 환멸을 느껴 철학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학설은 날마다 매 시간 실천에 의거해 새로이 다듬어지고 자기화되어야 한다”는 데 충실했다. 하지만 당은 늘 그에게 자기비판을 강요했다. <소설의 이론>과 <역사와 계급의식>에 실린 서로 다른 서문은 그 갈등이 낳은 산물이다. 세계 지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존재를 걸고 혁명 대열에 동참했으나, 당은 그를 사상적으로 박해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의 자서전을 읽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나는 스탈린주의가 일종의 이성의 파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고 또 늘 그렇게 주장해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답변에 쉽게 물러설 수는 없다. 알면, 왜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틀러의 멸망이었고,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집단은 스탈린의 소련뿐이었다고 변명한다. 파시즘에 맞서려면 그를 지지해야 하나, 그의 전제적 통치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에 반대하면 유리해지는 것은 파시즘 세력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루카치의 고민이 있었다. 물론 그는 스탈린 체제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다고 말한다. 스탈린의 말을 인용해서 검열자를 만족시키면서 그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빈약한 저항이었던가.



더욱이 “나는 항상 사회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가 자본주의의 가장 훌륭한 형태보다 살기에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는 발언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당연히, 양차대전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자본주의적 폐해를 극복할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루카치의 윤리적 결단을 폄훼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20세기의 이념 지형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발언이 이념에 눈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 몰락으로 드러난 체제의 속살은 얼마나 보잘것없었던가.

루카치는 벌라주를 평가하면서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부르주아 작가로 남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자서전을 읽다보면 루카치가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실천적 지성으로 남았더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스승인 베버는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한다”고 말했다. 루카치가 줄곧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은 그의 새로운 질문이 체제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체제나 당이 내부 구성원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을 참아주겠는가. 모든 지식인은 결국 나프타로 분한 루카치와 같은 운명을 안고 있다. 결국 권력의 품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비판적 지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따로 있으니, 그를 기리는 조사에 나와 있다. “쉴 사이 없이,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그는 인간을 옹호하는 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했습니다.”(이권우 | 도서평론가)

08. 10. 12.

P.S.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루카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했던 책은 하우저와의 대담을 담은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문학과비평사, 1990)이다. <소설의 이론> 번역자인 반성완 교수의 편역으로 나왔던 책이다. 더불어,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에 실린 마샬 버먼의 글도 좋은 참고문헌이다. 흔히 브레히트와 많이 비교되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해보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중에 에세이로 써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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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13 02:25   좋아요 0 | URL
반가운 기사 옮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편애'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루카치에 대한 글은 어떤 글이라도 항상 반갑습니다. 저 또한 루카치와 벤야민의 비교에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 어서 에세이를 완성해주시기를 고대할 뿐입니다.^^

로쟈 2008-10-13 21:40   좋아요 0 | URL
'나중에'는 '좋은 시절이 오면'이란 뜻이죠...^^;

소경 2008-10-13 14:53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해 발표를 놔두고 있는데 (기한은 널널하지만) 쫌만 더 욕심을 내야 겠네요 ^^:;

로쟈 2008-10-13 21:41   좋아요 0 | URL
<역사와 계급의식>까지 포함하려면 욕심을 많이 내셔야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6:21   좋아요 0 | URL
이권우 씨는 루카치가 1956년 헝가리의 임레나지 정권을 지지했다는 죄로 고초를 당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군요.그걸 언급했다면 스탈린주의에 너무 약하게 저항했다는 평가는 유보했을텐데요.

로쟈 2008-10-13 21:44   좋아요 0 | URL
지젝은 루카치와 반목했던 브레히트가 오히려 '스탈린주의의 내적 위대성'을 보여주는 시인이라고 평했죠.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해제도 썼는데, 아직 못 읽어보고 있습니다...

히드라 2008-10-14 18:4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쓰신, P.S.를 읽고,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을 읽어봤는데, (루카치가 아니라) 주로 하우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특히, 앞쪽에 실린 (세 편의) 대담 중 두 편이 (루카치가 아닌 다른 이들과 했던) 하우저와의 대담이고, 루카치도 동참했던 하우저와의 대담에서도 루카치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아서, 사실 책을 읽고 조금 실망....^ ^;; --로쟈님으로부터 자주 공부에 도움을 받고 있어 고마워하고 있는 독자로부터 --


로쟈 2008-10-14 20:55   좋아요 0 | URL
네, 하우저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 맞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진리는 단수이다'라는 루카치의 단언이었어요. 하우저는 단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지요. 저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자주 인용하곤 했습니다.^^;

히드라 2008-10-15 01:40   좋아요 0 | URL
부정확한 사실 수정 추가 :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에 만하임과 나눈 대담은 없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루카치의 '진리는 단수이다'라는 단언에 다시 한번 더 주목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

로쟈 2008-10-15 07:17   좋아요 0 | URL
아, 하우저를 만하임으로 잘못 썼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5 16:44   좋아요 0 | URL
혹시 루카치의 정치적 유언이라는 <사회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보셨는지요?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자아비판 당할 염려도 없이 솔직하게 인간적 사회주의 노선을 밝힌 책입니다.

로쟈 2008-10-15 17:07   좋아요 0 | URL
<사회주의와 민주화운동>이나 <이성과 파괴> 등은 사놓기만 하고 안 읽은 듯합니다. 90년대엔 루카치도 '매장' 분위기였죠.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노선 자체도 스펙트럼이 넓어서(스탈린주의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니까요) '진의'가 무엇인지는 살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6 16:06   좋아요 0 | URL
스탈린주의자가 보기엔 수정주의겠지요.그런데 이성의 파괴 아닌가요?

로쟈 2008-10-16 21:16   좋아요 0 | URL
<이성의 파괴>는 흔히 루카치의 최악의 책이라고들 얘기해서 읽게 되지 않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7 15:32   좋아요 0 | URL
예.그 책이 그다지 평이 좋지 않더군요.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도식적인 분류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그런데 위에 오타가 났어요.이성과 파괴.

로쟈 2008-10-17 23:45   좋아요 0 | URL
네, 이성의 파괴죠...

독립만세 2008-10-17 23:20   좋아요 0 | URL
<딩통의 죽음> 이란책도 있나요?

로쟈 2008-10-17 23:45   좋아요 0 | URL
<당통의 죽음>인데, 어디 오타가 났나 보네요...
 

매주 주말 북리뷰에서 '처리'해야 할 책들이 몇 권씩은 된다. 이번주엔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08)도 그 중 하나다. 생소한 저자나 흔한 책 제목은 전혀 눈길을 끌지 않지만,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라는 광고문구는 호기심을 유도한다. 독일 사람들이 열광(?)하는 책은, 특히나 철학책은 어떤 것일까, 란 궁금증. 저자는 학술 저널리스트라고 한다(흠, 저널리즘적인 '글발'에 기댄 책인가? 하지만 철학박사이기도 하다). 국역본은 저자의 사진을 띠지에 크게 박아놓았는데, 젊은 저자의 '외모'로도 승부를 보려는 심산인가 보다. 아동틱한 독어판의 표지와 대비된다...

경향신문(08. 10. 11)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뇌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가고자 하는 곳은 같았다. 연구 분야는 달라도 그들은 평생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데카르트가 찾은 인간이해의 열쇠가 ‘이성’이었다면 다마시오가 발견한 답은 ‘감정과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은 데카르트를 논하고 이성에 천착할 뿐 다마시오를 거론하거나 감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독일의 학술저널리스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사진)가 볼 때 인간을 이해하는 데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성과 감정을 아울러야 ‘나라는 존재’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철학은 뇌신경과학의 성과를 쉬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과 뇌신경과학은 따로 논다. 심리학, 생물학에 대한 철학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배워왔던 철학의 틀만으로 인간 이해에 다가갈 수 없다고 여긴다. 책은 ‘육체적인 나’에서 ‘도덕적인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나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남을 돕는 것일까’ ‘도덕은 타고 나는 것일까’ ‘조물주는 계시는가’ 등 살면서 한번쯤은 부닥쳐 봤을 법한 질문 34가지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자는 기존 철학 교육이 불만이었다. 지나치게 사상의 역사적 서술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루하지 않은 철학 입문서를 쓰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다양한 학문과 주제를 넘나들며 철학의 원초적 질문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흡사 딱딱한 철학 개론서에 강렬한 한 방 펀치를 날리는 듯하다.

가령 미국 TV시리즈 <스타트렉>의 등장인물 미스터 스폭을 통해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나열한다. 스폭은 감정이 거세된 채 이성적 사고만 하는 외계인이다. 저자는 스폭을 통해 감정과 이성의 차이·양면성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 그러나 결코 유치하지 않고 논리가 정연하다. 또한 동물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피터 싱어를 통해 ‘동물을 먹어도 될까’라는 윤리적 질문에 다가간다. 고래의 고통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환경보호론에 담겨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34가지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어렴풋이 손에 잡힐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취하는 철학의 태도는 ‘장르 파괴’이자 통섭이다. 철학 고유의 문제의식만으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문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소유욕에 대해 성찰할 때 게오르크 짐멜 못지않게 로빈슨 크루소를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안락사, 배아 복제, 자살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적지 않다. 이 책이 여타 철학 개론서와 다른 점이다.

이 책은 지난해 독일에서 철학 입문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등극, 1년간 45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풍부한 일화를 통해 철학에 쉽게 다가가게 만드는 글솜씨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학년 논술교재로도 괜찮을 듯하다.(서영찬기자)

08. 10. 12.

P.S.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글솜씨가 어떤 것인지 한번 '구경'해봐야겠다.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가는 책은 작년에 같이 나온 책 <Lenin kam nur bis Lüdenscheid>이다. 좌파 가정에서 자란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룬 자서전인 듯싶다(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http://www.lenin-film.d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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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8-10-13 02:59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hahaha 2008-12-12 18:1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보고 싶네요! /ㅅ/ 언젠가 들어오려나?

로쟈 2008-12-12 23:29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을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