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들른 서점에서 손에 든 책은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근간 예정이었던 도서였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책들과는 다른 표지여서 의외였다. 흰색 바탕의 표지보다는 좀더 고급스럽게 보인다. 물론 이렇듯 '고급 담론'으로 소개된다는 점이 역설적이긴 하다. 역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수행적 모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초에 나온 두 권의 랑시에르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수준의 번역서인지라 반갑다(랑시에르 수용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11741 외 허다한 페이퍼들을 참조). "랑시에르의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이 ''자리 옮김'의 철학자'의 문제의식과 사유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부터 집어드는 게 수고를 더는 길이겠다(랑시에르의 한국어판 서문도 붙어 있다). 필시 이번 주말 북리뷰들에서 다루어지겠지만 아직 아무런 리뷰도 뜨지 않은 탓에 출판사의 책소개만 옮겨놓는다(알라딘에는 이마저도 아직 뜨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 '옮긴이의 덧말'도 배여 들어간 소개이다(*국내 출판가의 '랑시에르 붐'에 대한 해설기사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41729275&code=960205 참조).

철학ㆍ정치학ㆍ문학ㆍ사회학ㆍ영화학ㆍ미학ㆍ역사학ㆍ교육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친 사유의 폭!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는 현재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라바르 등과 함께 프랑스 사상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 철학자이다. 한때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으로 함께 지적 활동을 했으나, 68운동을 경험하면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적 실천이 내포한 '앎과 대중의 분리', 그들의 이데올로기론이 함축하는 '자리/몫의 배분'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고(文書庫)를 뒤지기 시작하여 노동자들은 단지 '노동자 고유의 사유'를 전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심지어 수준 높은) 사유와 말을 전유하려는 의지를 봄으로써 자신의 사상적 체계의 근본적인 출발점, 즉 사회 질서 속에서 각자에게 분배된 자리와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정체화'(이른바 '자리 옮김')함을 목도한다. 비록 정치철학적 저술로부터 자신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무지한 스승』(1987)과 같은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책을 비롯하여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 그리고 문학ㆍ사회학ㆍ영화학ㆍ미학에 관한 다양한 방면의 독창적인 작업을 통해 21세기 세계 지성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정치'를 논하는 첫 번째 저술이자, 랑시에르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 역할!
이 책은 자크 랑시에르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저작이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정치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버전)과 정치의 회귀(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의 버전)라는 언뜻 보기에 대립되는 두 언설이 똑같이 갈등과 계급투쟁, 해방의 정치를 제거하던 정세 속에서 개입하기 위해 씌어졌다. 오늘날 정치를 경영으로 보는 실태와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랑시에르의 고민은 그 현재성을 담지해내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그의 정치철학적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전 저작들과 이후 저술들에서 보여지는 사상적 전개의 중심테마를 명쾌하게 제시하여, 우리가 감히 이 책을 랑시에르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로 봐도 손색이 없다.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과정 -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의 '정치'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정치'와 '치안',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삼항조를 제시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적인 것'이란 이질적인 두 과정, 즉 통치 과정(치안)과 평등 과정(정치)의 마주침이다. 흔히 우리는 정치란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결코 정치가 아니다. 이는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간의 통치(즉 치안)이며, 그것은 곧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랑시에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또는 '몫 없는 자들의 탈정체화')를 통한, 즉 지배적 질서 속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존재들 스스로의 드러냄의 과정이라고 본다. 앞서 랑시에르가 19세기 문서고에서 노동자들의 말과 글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과정이었던 것이며, 역자가 전태일의 예를 통해 보여준 것 역시 바로 이 지점이다. 역자의 말대로 전태일과 그의 동료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업주가 보기에, 또 치안 논리가 보기에는 주제넘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신분이나 자격, 자기 처지의 한계를 넘어 말과 행동을 통해 그것을 지나침으로써 '정치'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랑시에르에게 본래의 '정치'란 바로 이것이다. 즉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로 올곧게 자리서는 것이야말로 그것이다.

정치의 과정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주장/단언'하는 것!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랑시에르는 정치 집단을 조직화하는 형태나 미래에 대한 처방, 혹은 예단에 어떠한 이론적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인데, 그것은 국가 전복이나 조직적인 권력 장악과 같은 혁명론이 아니라 정치 혁명은 '감성적 혁명', 즉 지각장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 장악은 주체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랑시에르가 의미하는 '정치'의 과정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주장/단언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한다. 이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그 요구의 만족을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평등 전제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운데 선언되고 단언되는 평등의 입장, 이 과정이야말로 '정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의 핵심인 '정치적 주체'에 대해서도 랑시에르는 독특한 자신의 견해를 내보인다. 즉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계급결정론적인 속성)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치안 질서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게 된다고 본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의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 현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최근 국내에도 새롭게 선보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가 갖는 우리 사회에서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새롭게 문제화되고 있는 '배제된 자'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 요구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거부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언제나 행위, 그중에서도 논거를 만들고 말과 사물의 거리, 틈을 가리키는 탈정체화하는 양식으로 정의하는 랑시에르에게서 우리는 배제된 자들, 몫 없는 자들이 어떻게 정치 과정 속에 합류하는지 최근의 우리 사회 문제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08. 10. 13.

Жак Рансьер На краю политического Aux bords du politigue

P.S.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감성의 분할>, <미적 무의식> 등이 더 소개돼 있다). 최근에 검색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의 저자 토드 메이의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사상>(2008)도 탐나는 책이다(국내 대학 도서관들에는 아직 들어와 있지 않다). <질 들뢰즈>가 훌륭한 소개서라서 더욱 기대를 갖게 한다(국역본 <질 들뢰즈>는 훌륭한 번역서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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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10-14 22:32   좋아요 0 | URL
'자끄 랑시에르'하니 거의 반사적으로 '그 책'이 떠오르는군요. 이후에 해결은 잘 되셨는지요.

로쟈 2008-10-14 22:35   좋아요 0 | URL
법정까진 안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