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씨의 연속이다. 오늘은 낮에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했단다. 여름에 에어콘 없이 지내는 집이라고 우리집 얘기를 '세상에 이런 일이' 코너에 보내자고(아이는 진담이었다). 선풍기 두 대를 풀로 돌리고는 있지만 땀이 많은 아이인지라 여름나기가 힘겨울 만하다. 그래도 너무 덥다고 짜증을 부리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이런 날씨와 무관하게 읽어야 할 책들은 많고, 정리해야 할 글들도 많으며 써야 할 것들도 산적하다. 한데, 잠시 '세상에 이런 일이' 정신에 여유를 얻어서 재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로 소일했는지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예전에 쓴 글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미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놓지 않은 게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모스크바 통신에서는 '생활이란 또 무엇인가'란 제목을 달았지만, 10년전에 쓴 글의 원제는 '중력과 은총'이었으며(같은 제목의 책을 만든 바 있는데, 그 한 꼭지였다) 여기서는 그걸 다시 복원해둔다(물론 '중력과 은총'은 내가 좋아했던 시몬느 베이유의 책 이름이다). 곧, 96년 여름에 쓰고, 2004년 여름에 다시 정리해놓은 걸(*더러 붙인 군말은 그때의 것이다) 2006년에 업그레이드 해놓는다.

 #. 사랑은 우리들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S. 베이유, <중력과 은총>)

#. 87년에 시작된 우리의 여정은 이제 96년 봄과 여름에 이르렀다. 이건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이문세, '옛사랑')에서 “오, 제발!”(김건모, '스피드')에 이르는 여정에 맞먹는 것이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일단 ‘중력’과 ‘은총’을 정의해야 할까? 아니면 한 여류 시인이 “직업적인 능청”이라고 부른, 시들을 늘어놓아야 할까?.. 다 내 마음이다.

(1) 생활이란 또 무엇인가 아침부터 햇빛은 들창을 때리고 나뭇잎들은 자꾸 구멍이 뚫리고 무엇인가 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햇빛은 무게 없는 타격을 던지고 있다 무더기로 떨어지는 햇빛의 시체를 보며 이럴 때일수록 나는 안 지려고 조바심을 한다 무엇이 나를 이기려 드는지 모르지만 내 지고 나면 저 햇빛도, 햇빛의 무게 없는 타격도 없을 것이기에

(2) 햇빛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아직 쌀쌀해서 새들은 자꾸 목을 감춘다 기숙사 담벽 아래 흰 매화꽃들이 검은 가지에 소복이 앉아 미끄러질 듯하고 아까부터 벤치에 앉은 젊은 남녀는 붕어처럼 입을 맞춰댄다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아보지만 그건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붙어 있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친화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 내 마음은 두 편의 시를 골랐다. (1)은 이성복의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이고, (2)는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7'이다. 이 두 편에서 나는 각각 ‘조바심’과 ‘친화력’이란 말을 고른다. ‘조바심’(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조바심!)이 '게으른 저공비행Low Flying'에 대응한다면(*'게으른 저공비행'은 책에 실린 다른 글로서 '중력과 은총'의 짝패였다), ‘친화력’은 '중력과 은총Gravity & Grace'에 대응한다. ‘조바심’은 “무게 없는 타격”과의 싸움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질병(=중력의 거품)과의 싸움이고 곧 LF의 세계이다. 하지만 ‘친화력’은 싸움이 아니다. 아니 싸움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무게’(=존재근거)와의 싸움이기에 그러하다. “으드득 이를 갈아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

물론 이러한 대응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 이미 LF에서 다룬 ‘꽃나무’나 ‘항아리’의 주제는 이 GG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략적인 윤곽에 있어서 이러한 대응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막연한가? 사실, ‘은총’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중력’에 대해서만 조금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중력에 대한 물음은 나의 고유한 물음이다. 언젠가 나는 나만의 <중력과 은총>을 쓸 계획으로 있다).

그럼 중력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에 앞서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이때의 ‘어떤 것’은 어떤 작용력이다. M. 하이데거의 존재(Sein; Being)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글자들, 유전형(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중력은 그런 것이다. 아니, 이게 중력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런 중력을 ‘발명’하고자 한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 좋다, 가령 “근처 공원에는 마로니에나무들이 빛나는 창 같은 흰 꽃을 세우고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불쑥불쑥 솟은 유방은 공격적이다 이곳에서 나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루가 얼마나 길까 생각해본다”('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8')라거나 “이런 세상에, 어쩌자고, 세상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2')라는 건 모두 중력의 품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중력의 끄나풀로서 우리는 “관념은 이유없는 참견”('미녀와 야수')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력이라는 거대조직의 세포들이다! 이 다함 없는 충성의 나날들? 아, 나는 파리에 있던 P형에게 정말 ‘공격적’이더냐고 편지를 낸 적이 있다. 말도 말라고 했던가?.. 나는 입다물고 이런 걸 쓴다.

(1) 가짜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꽃바구니를 보고 있다
중력은 얇은 가슴들에게 관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심을 먹고 생등심집을 나서려는 참에도
나비 한 마리, 조직의 끄나풀처럼! 가짜 꽃바구니를 맴돈다
중력은 참으로 질긴 조직을 가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2 )어항 속 금붕어에게 구두를 넣어준다
헤엄치는 일과 구두 닦는 일은 생의 소명과도 같은 것
(가끔 구두를 내팽개치고 강물로 뛰어드는 금붕어는 뭔가?)
하루 세 번 이빨을 닦듯이 빠닥빠닥 구두를 닦아야지
닦는 김에 어항 밑바닥도 닦고 책상도 닦고
그렇게 닦아놓은 세상이 어항 속 그랜드 캐넌!

어항 속 금붕어에게 또 하루치의 구두를 넣어준다

#. (1)은 '중력에 대하여.1'이고, (2)는 '중력에 대하여.2'이다. 5월말, 6월초에 쓴 시들이다. 3월 중순부터 6월말까지 나는 대략 30여 편의 시를 쓴다(*대략 나는 98년 정도까지 시를 썼다). 5월에 이 시집을 기획하고 6월 중순에 시집의 제목을 정한다. “중력과 ××”라는 제목을 찾았는데 작년에 읽은 S.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보다 나은 걸 찾을 수가 없었다(*후보로는 ‘중력의 왈츠’ ‘중력과 탱고’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짬짬이 중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은 개략적일 따름. 중력은 한 눈에 들여다보거나 한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념적인 언어로 잘 표상할 수 없다. 오직 시적인 언어, 비유적인 언어로 만져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주 잠깐씩! 그래 어떤 생각들을 했냐고? 이제 그걸 말하려는 참이다.

 

 

 



#.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할 때, 그는 중력에 대해서 잠시 잊은 것은 아닐까? 즉 그는 현존재의 한 면만을 말한 것. 다른 한 면이란 바로 현존재가 ‘잡아당겨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로, 운명에로, 소명에로, 명분에로, 행복에로, 자유에로, 사랑에로, 본능에로 잡아당겨진다.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채로 가만 놔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린다. 따라서 내던져짐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현존재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는다(<존재와 시간>은 미완의 책이다). 잡아당겨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는 제 값의 덩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대학 신입생에게는 좀 어려워 보이지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 또한 내가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또, ‘현존재 Dasein’에서 ‘Da’의 문제. 현존재를 ‘거기에 있음’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현존재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 못 된다. 독어의 접두어 ‘Da’가 ‘거기에(저기에)’이면서 ‘여기에’를 뜻하듯이 현존재는 ‘거기에 있음’과 ‘여기에 있음’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갖는다. “밤은 이미 왔으며 노래하며 울릴 종은 없다/ 가난한 세월은 흐르지 않아 나는 늘 여기 있다”(장정일, '푸른 다리')에서 ‘여기에 있음’은 분명 ‘거기에 있음’과 동일시될 수 없다. 중력은 바로 이 잡아당겨짐과 여기에 있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요구한다. 이게 시작이었던 것.

#. 중력에 대한 사유는 ‘잡아당겨짐’과 ‘여기에 있음’에 대한 사유라고 했다(*지젝식으로 얘기하자면, ‘잡아당겨짐’/‘여기에 있음’은 ‘내던져짐’/‘거기에 있음’의 짝패이면서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가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이데거라면 얘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중력에 대한 사유가 왜 요구되는가?”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그것이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얘기는 나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걸어 다니면서도 정작 우리의 무게를 받쳐주고 있는 중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지낸다. 그래서 중력은 이 망각이라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항상 있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사유를 우리는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이 망각은 결코 실수나 죄악이 아니다. 그것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망각조차 중력의 프로그램인 것.

 

 

 



중력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도록 잡아당긴다. 중력은 우리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어 놓을 뿐, 결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은총이라 불렀던가? 그리하여 중력에 대한 우리의 망각은 바로 중력에 의해 권유되고 보증되는 망각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중력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자신을 뒤로 빼돌려 감추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낸다. 중력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중력의 역운(Geschick)이다. 그래서인가? 번번이 우리는 중력에 대한 사유(가령, C.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1859)의 경우)를 거부하고 무시하며 비웃었던 것이다. 우리는 중력의 맨얼굴을 쳐다보는 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마치 우리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문득 계시의 순간은 오는 것인지, 이렇게. 어떻게? 느닷없이!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 '北魚')

 

 

 

 

“너도 북어지?”란 내면의 소리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당신을 찾으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음을 알게 된다(두 번까지는 괜찮겠지만).

#.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우리는 특권적인 존재이니까. ‘깊은 개별성’이란 특권(*나는 이 ‘깊은 개별성’ 혹은 ‘단독성’을 ‘중력의 거품’이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종들이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자손을 낳고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면, 우리 종의 운명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큰 뇌는 사람에게, 의식과 기억과 불멸성에 대한 꿈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우리 종(우리 중 어떤 한 사람이 아니고, 어떤 가족이 아니고, 종족, 종교, 국가가 아니라)이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종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깊은 개별성을 주었다.”(R. 폴락, <생명의 기호>)

이 특권은 모든 망각을 주도하는 매우 막강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달리 ‘유한성의 방어기제’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모든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한다(*정신분석학에서라면 이 ‘무한성의 침입’은 ‘실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흔한 말로 ‘자기 앞가림’이라는 것. 바로 생활이라는 것. 또 한편은 이렇다. 우리는 마냥 기분 좋게 살기를 희망하고 다른 주변적인 것들은 우리의 기분이나 맞춰주며 살기를 희망한다.

가령, “공부는 잘 하지만 정서발달이 늦어서 정신연령이 낮고 미숙하며 자기만 위해 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하며 특별 대우를 바라는 여성이 많아졌다.”(<여자도 모르는 여자의 콤플렉스>)는 것. 이 깊은 개별성의 거품! 이 거품이 간혹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아으, 눈뜬 장님들의 덧없고도 맹렬한 희망이여, 의지여, 의지박약이여! 그리하여 우리가 이 중력의 손바닥 안에서 끝내 헤아릴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깊은 시간, 중력의 시간이다.



#. 우리의 깊은 개별성은 지질학자들이 제안한 깊은 시간(deep time)에 대한 이해를 곤란하게 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10억을 의미할 때 10뒤에 0이 몇 개나 붙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10억 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건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가령 이 깊은 지질학적 시간을 1마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마지막 몇 인치를 차지한다. 또 우주 달력을 예로 든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제야의 종이 울리기 불과 몇 분 전에 나타났을 따름이다. 한 지질학자는 지구의 역사를 왕의 코에서부터 쭉 뻗은 손끝까지를 거리로 쟀던 옛 영국식 야드 자로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왕의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손톱줄로 한 번 갈면 인간의 역사는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즉 중력의 시간, 깊은 시간 앞에 놓일 때 우리는 가련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것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두려운 일이고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예의 우리는 자신의 발등만을 주시하며 자신의 일생에만 목을 매는 것. 이걸 겸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으, 겸손이여!

#. 이 겸손이야말로 영국의 생물학자 J. M. 스미스의 개념을 빌면 가장 유력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lly Stable Strategies), 즉 ESS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해 망각하는 것(*이 망각은 정신분석학의 ‘억압’/‘배제’에 대응한다), 그래서 중력의 품안에 안주하는 것, 이것이 진화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바로 ESS인 것이다. ESS로서의 겸손/망각은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과 주변의 일이나 알아서 잘 하라!” 이것이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의 ESS이다. 가령, 이제 막 바닷가의 모래무지에서 깨어나온 새끼 거북이가 전력을 다해 자신의 고향이자 거처가 될 바다로 기어갈 때, 우리의 거북이는 ‘존재사유’를 개진할 수 있을까? 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관심할 수 있을까, 질문할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런 따위의 일들은 ESS가 아니기에 존재의 문턱을 넘어서질 못한다. 즉 현존하지 않는다. 이건 아주 단순 명쾌한 일이다. 이걸 현실이라고 부르던가? 이러한 현실은 인간이란 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생활(*생존) 이전의 사유는 ESS가 아니다. 즉 존재에 대한 사유나 중력에 대한 사유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특권적인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기억에의 특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지적했던 망각에의 특권과 동음이의어(homonym)이다. 깊은 개별성은 두 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너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릴케)는 것은 어느 쪽의 목소리일까? ESS의 가장자리에서, ‘여기에 있음’으로서의 나는 두 눈을 끔벅여 본다. 한 이백 년 묵은 거북이처럼?..


 

 

 


#. 고작 이십팔 년 묵은 거북이가 이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게도 20대가 있었다!). 나는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자주 들먹이는 홍어(洪魚)와 광어(廣魚) 얘기를 또 해줄까(*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이미 이름에서 보이듯이 이들은 바다 밑바닥에 사는 몸이 납작한 물고기들이다. 이 동네에서 사는 데는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바닥에 엎드리는 편이 유리하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큰 차이가 있다. 몸을 납작하게 만드는 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온 것. 상어와 가까운 종류인 가오리과의 홍어는 ‘정규과정’을 거쳐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 녀석은 몸을 양 옆으로 늘려서 커다란 날개를 만든 것. 그래서 마치 압착기를 통과한 상어와 같다. 여전히 몸이 좌우대칭.



하지만 가자미과의 광어(일명 넙치)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골어류인 이 녀석은 상어와 다르게 대개 세로로 납작하다. 따라서 광어의 조상이 바다 밑바닥에 엎드릴 때, 홍어의 조상처럼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몸을 한쪽으로 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 그러나 이런 방식은 아래를 향한 눈 하나가 항상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어 결과적으로 외눈잡이가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눈이 돌아가는 과정은 광어의 어린 새끼가 자라는 동안 재현되므로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란 가자미는 양쪽 눈이 모두 위로 향한, 마치 피카소의 그림과 같은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덕분에 이 녀석은 기이하게 뒤틀린 두개골을 가지게 된다. 물론 광어에게도 홍어와 같은 방식으로 납작해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하지만 광어의 조상이 만약 그와 같은 진화 경로를 따랐다면, 단기적으로는 한쪽으로 눕는 종과의 경쟁에서 뒤졌을 것이다(*그 결과 광어는 현존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

#. 우리의 넙치는 나름대로 다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삶의 질(commme il faut!)을 따질 여가가 없었다. 이젠 두개골마저 뒤틀려 버렸으니 무얼 차근차근 제대로 생각할 만한 여건도 안 된다. 오호, 이 일을 어찌할까?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오규원)일까? 어떤가, 남들이 3백 년 동안 해놓은 일을 30년 만에 해치운 나라의 국민들이여? 이 조바심 아닌 자부심! 그런 자부심을 우리의 넙치도 가지고 있을까?(*진화론에 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우리의 모든 존재양태와 행동양식이 이미 유전자에 프로그램 돼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홍어/광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프로그램’은 완벽하지 않으며 우연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즉 필연적이지 않다. 다만, 거기에 어떤 방향성(=경향성)이 주어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우연과 양립가능하며, 오히려 우연을 자신의 구성적 계기로서 포함한다. 홍어/광어의 서로 다른 ‘모양’을 프로그램의 필연적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전부 조물주의 계획(=섭리)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태도의 이면이다. ‘프로그램=신’이라는.)

#. 생명체, 정신, 또는 문명 속에 감춰진 정보는 정보가 살아남는 성공적 경쟁이나 협력을 통해 결정하는 거대한 선택계(selective system)의 일부분이다... 선택계는 규칙적 형태를 생성하는 그리고 인식하는 계이며, 그것은 지구상의 생명의 규칙적 형태, 정신의 상징적 질서, 또는 문명의 규칙적 형태가 된다. 선택계는 복잡성을 다룬다. (H. 페이겔스, <이성의 꿈>)



#. 이 선택계, 즉 SS는 자기조직계(self organizing system), 즉 SOS와 함께 중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개념적 도구이자 이해의 전략이다. 이런 것이 필요한 이유는 중력(의 역운)이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복잡한 것은 바로 깊은 시간, 즉 중력의 시간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규칙(형태)도 이 시간을 통과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것이 된다. 따라서 중력(의 역운)에 대한 이해는 복잡한 단계와 절차를 필요로 한다. 아주 탁월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중력의 거품은 단순하다. 그것이 단순한 것은 얕은 시간 때문이다(비키니 수영복은 고작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우리의 평균적인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일들이 대개 여기에 속한다. 그저 유행에 불과한 것. 이런 유행은 주로 사회학에서 다룬다. 이에 대해 중력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그리고 요즘 대두하는 복잡성의 과학에서 다룬다(*거기에 몇 년 전부터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신분석학이 포함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중력의 역운과 중력의 거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을 결코 혼동하면 안된다. 적어도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 지난 계절에 아주 뛰어난 데뷔작을 발표한 영화감독 H는 “영화란 표면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H는 홍상수이며, 그는 한국 영화사에서 아주 드문 ‘영화-작가’이다. 한국영화에 판돈을 건다면 나는 그에게 걸겠다). “나는 영화를 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 싫다. 주제를 내세우기보다는 기본적 맥락만 가지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상황에 반응하는 모습과 사람들의 관계들을 보여준다. 그걸 나는 ‘표면’이라 부른다. 그 표면 연마가 잘 된다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보여줄 때면 감독은 교만해지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좋은 인간이 되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여러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사진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다. 소설이 인물의 심리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사진이 순간의 정지된 느낌을 잘 잡아내듯이 영화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뭐랄까, 현실의 표면을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표면을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거기서 어떤 덩어리가 보일 것이다. 난 그게 진짜 우리 삶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걸 한마디로 옮길 수는 없겠다. 그럼 영화 만들 필요가 없어지니까.”



내가 여기저기서 발췌한 그의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는 일단 절대적인 가시성의 세계이니까(보여지지 않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이 가시성의 세계는 ‘1초/24프레임’으로 세계를 분할하는 영화의 기초 몽타주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필름의 두께만큼 얇다. 그것은 자신의 두께만큼의 현실을 영화적 현실로 포착한다(엉터리 영화들은 더 많은 걸 찍으려고 한다). 그래서 표면이다. 영화적 ‘덩어리’라는 것은 이 표면들의 쌓임이다. 영화적 깊이라는 것은 이 쌓임의 효과이다. 나는 중력의 효과(=감동?) 또한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그런 효과들을 탐구하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홍상수의 모든 영화들은 탁월하다).

 

 

 



#. <도덕의 계보>의 저자는 가치들을 그들과 그들의 기원 사이의 친족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평가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가치들은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의 존재방식, 존재양태”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방식은 고급하거나 저급하며, 고귀하거나 비천하다. 고귀한 존재방식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이며 긍정적인 반면, 비천한 존재방식은 반동적이며 부정적이다. 가치들은 존재방식을 통해 창조된다. 바로 이 존재방식(존재양태; mode(s) of being)을 투시할 수 있는 안목, 이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 같은 것. 고급하고 고귀한 것은 복잡한 것의 MOB이고, 저급하고 비천한 것은 단순한 것의 MOB이다. 중력에 대한 앎은 바로 이 MOB의 기원과 유형과 계보와 진화에 대한 앎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MOB와 존재상태(state(s) of being), 즉 SOB이다. 물은 얼음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눈물이 되어도 H2O라는 동일한 존재자질에 의해 정체성이 유지된다. 이 정체성이 가치로부터, 즉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의 MOB로부터 독립적일 때 우리는 그걸 SOB라 부를 것이다. 나는 이 MOB와 SOB에 대한 지식(=과학)이 또한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MOB에 대한 앎은 주체의 MOB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하는 것이기에 복잡하다. 나는 이걸 ‘즐거운 지식’(gay science)이라고 부르겠다. 이에 반하여 SOB에 대한 앎은 주체의 MOB와 무관하다. 이걸 ‘객관적 지식’(dummy science)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 즐거운 지식이 주는 즐거움은 ‘울적한 즐거움’(gloomy gay)이다. 이때의 울적함은 존재양태의 다양성에 기인하는 존재의미의 다양성을 우리가 망연히 마주할 때 느끼는 울적함이다. 결코 자기화되지 않는 타자의 현존을,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망연자실함 같은 것. 이때의 즐거움은 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님의 침묵')붓는 즐거움이다. “그대는 발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그대 순결은/ 형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대는 나의 노래 나의 춤”('처용삼장')인 즐거움 말이다. 그리하여 이 ‘울적한 즐거움’, 즉 gg가 바로 GG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 지지한 것. 지지, 어린아이들에게 ‘더러운 것’이라고 일러주는 소리. 그래서 우리가 만질 수 없던 것! 하지만 이젠 만질 수 있는 것(나이가 어려서 못 만질까)! 미숙한, 저급한 MOB에게 지지는 다만 더러운 것이고 울적한 것이다. 그것은 겸손한 것, 얌전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성숙한, 고급한 MOB에게 그것은 즐거운 것이다. 폭풍우가 치는 날의 즐거움, 바로 그것이다. 그걸 이제 다시 사랑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은 나의 자유이고 당신의 오판이다. 아직 당신은 지지부진한 것 같으니까, 개미처럼? 당신은 베짱이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그것은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다.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중 어느 것이 될 것인지 망설인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것저것 긁어 모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개미가 아니라고? 그럼 기계이지. ‘그것’(ça)은 기계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기계이다. 학교도, 제도도, 국가도 모두 기계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기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MOB를 재생산할 따름. 물건의 형태로, 지식의 형태로, 그리고 생명의 형태로 말이다. 세상은 그런 기계들이 밤낮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리며 무얼 만들어낸다. 그리고 제대로 만든 걸 보면 “바로 이/그/저거야!”라고 말한다. “C'est ça!”라는 것(영어로는 “That's it!”). 이때 ça는 주객동일성의 표지이다. 이 ça에서 세계를 개량하는 것과 자신을 개량하는 것은 만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ça의 개량, 기계의 개량이다. 새로운 기계, 이것이 몇 푼의 돈보다 중요하다.

#. 언제였던가. 90년 여름, 나는 7년 만에 양양군 S면 K리에 첫사랑의 여자를 찾아갔다. 휴일이었는데 아직도 그곳은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다녔다. 나는 만 22세가 될 참이었고, 아마 그녀도 나만한 나이였겠지. 그녀는 집에 없었다. 시골 학교 운동장을 서성이다가 한 꼬마에게 “너 ×자 아니?”라고 물었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녀요.”(아, 그래서 못 만났었구나!) 그리고 또 6년이 지났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지 13년이 지난 것이다. 어디선가 만나게 되더라도 이젠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는 고작 16세, 만 15세였다. 그리고 이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마 다시 만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그녀의 행복을 빈다, 는 건 아, 말이 안 되는구나!



#. S. 베이유(1909-1943)는 1934-5년에 공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동자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노동이 사고와 발명과 비판에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계의 효율성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계가 노동자에게 얼마나 사고를 요구하고 허용하는가를 고려하여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 시몬느가 유명해지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중에 자기 딸의 명성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난 그 애가 유명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기를 얼마나 더 바랐는지 몰라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 시몬느는 ‘볼셰비키’였던 어릴 때부터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인형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나는 그런 여자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느질도 싫어했다. 눈에 띄게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싫어했다. 대신에 문학을 좋아했다. 오빠인 앙드레와 아주 단짝이었는데, 라신과 코르네이유의 희곡을 모두 외어 함께 암송하면서 상대방이 틀릴 때마다 번갈아 따귀를 때렸다. 동생 시몬느가 고집이 세서 무슨 일이건 양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남매는 자주 싸웠다. 하지만 혹시 어머니가 싸우는 걸 알고 와서 둘을 떼어놓을까봐, 얼굴이 새하얘진 채 서로 물고 뜯으면서도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마치 친구처럼 어디에나 붙어 다녔으며 항상 사내아이들이 하는 장난을 즐겨 했다. 언젠가는 이 두 장난꾸러기가 손을 잡고 이웃집의 문을 두드린 다음 “우린 배가 고파 죽겠어요. 엄마와 아빠가 먹을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아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너무나 불쌍하게 여긴 이웃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며 과자와 빵을 주었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시몬느의 양친은 이웃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1943년 영국 런던, 34세의 시몬느는 폐결핵으로 입원했으나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여 끝내 죽음에 이른다. 검시관은 자살이라는 판정을 내리지만 서류상으로는 “기아와 폐결핵으로 인한 심장 근육의 마비”라고 적힌다. 영국 법률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중력이란 주제가 아니었다면 나는 시몬느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동생도 없으니까. 시몬느의 다른 생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녀의 전기를 참조하면 된다. 나는 그저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녀의 의견에 동감할 따름이다(*베이유는 보부아르, 아렌트 등과 함께 20세기 3대 여성 철학자로 꼽히기도 한다).



#. 새로운 사유가 새로운 기계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가 새로운 기계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신들로서는 너무 늦게 왔고, 존재로서는 너무 일찍 왔다. We are too late for the gods and too early for the Being.”(그래서 기계들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인간은 이제 막 시작인, 존재의 시이다. Being's poem, just begun, is man.” 그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라는 시의 맨 첫 줄인 모양이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읽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몇 줄을 중력이라는 나의 언어로 번역해왔지만, 이쯤에서 ‘거기에 있음’에 대응하는 ‘존재’와 ‘여기에 있음’에 대응하는 ‘중력’의 차이를 지적해야겠다.

존재-시와는 달리 인간은 중력-시의 맨 마지막 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고래들!)의 싸움”에서는 고작 새우급이지만 “중력을 둘러싼 난쟁이들의 싸움”에서는 적어도 넙치급이다. 우리는 중력의 역운을 마감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유되지 않는 중력을 사유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중력-시의 맨 마지막 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마감되지 않은 이 중력-시의 윤곽을 읽어낼 수 있다. 도대체 이 시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 몇 통”(김종삼, '물桶') 길어다 나르면서 우리는 짬짬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머리를 굴려본다. 중얼중얼거리며.



나는 밀밭에서 들려오는 낱알들의 기도를 듣는다
이 고요한 시간 냄비뚜껑을 열고
주여, 우리는 당신의 아들로서 너무 늦게 왔나이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이젠 튀겨주소서
자글자글 끓는 물에 우리의 연사(演士)들을 모두 넣어주소서
오, 나의 사랑하는 면발들이 이제 막 몸을 푸는 시간!
나는 별스런 감미로움에 젖어 눈물을 훔친다

주여, 우리는 당신의 면발로서 너무 일찍 왔나이까!

#. '나의 사랑하는 면발들'은 내가 지난 계절에 맨 마지막으로 쓴 것이다. 시작과 끝을 벌써 말해버렸으니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질까?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도대체 우리 동료 면발들이 나한테 무얼 더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바쁜 사람은 이 자리를 떠도 좋다. 나는 이유 없는 참견은 하지 않겠다. 그래도 몇 사람은 남겠지. 그래도 몇 사람은 남겠지.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정말, 다 가냐?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 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 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오규원,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P.S.1. 그런 식으로 주절거리는 얘기는 계속되지만, 분량상 여기에서 끊는다(그 사이에도 할 일들은 점점 밀리고 있다). 나에게 감동적인 것은, 하이데거가 <형이상학 입문>에서 던진 질문이지만, 무엇인가가 차라리 없지 않고 도대체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 반짝”이면서 말이다. 더불어, 그러한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언제나 꼼지락거리며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인가가 차라리 모스크바에 가만히, 얌전히 있지를 못하고 도대체가 언제나…

P.S.2. 한 아나운서의 이른 죽음이 몇 가지 추억거리를 가져다 주었고, 5년 전 겨울 모스크바에서 사고로 죽은 한 친구도 떠올리게 했다(이미 얼마 전부터 그 친구의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 이른 죽음, ‘안타까운 죽음’들에 대한 애도의 글이 머릿속에는 들어 있지만(그들은 차라리 더 있지 않고 도대체가 갑작스레 없어진 이들이다!), 당장은 뽑아낼 여유가 없다(<두이노의 비가>는 그러한 애도에 적합하다). 그것이 또한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어젯밤에는 지젝의 <이라크>도 다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도 뭔가 할말이 있지만, 역시나 그 또한 말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 나는 요즘 형편없이 살고 있다…

04. 08. 06./ 06.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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