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30809551&code=910100).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편집자 주>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군에 입대하여 해병대로 베트남 전장을 다녀온 뒤에 사회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들에 눈을 돌렸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였는데 의식이 들고 나서 작품을 쓴 내용은 그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도를 떠돌며 겪었던 체험들을 스스로 자각해가는 과정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서구에서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내부에 복지라든가 사회주의적인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냉전 구조를 확정하기 위하여 과거의 종속적인 민간정부를 스스로 훈련, 교육시킨 군사정부로 교체됐다. 군사 쿠데타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지역에서 하나의 일상적 유행이 되었다.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8019.html).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쇄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07.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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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구라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아시아>라는 계간지를 읽고 있는데 그게 좀 설익고 아직은 미흡해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현재까지도 문학계에서 '민족'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 현실이겠지요. 백낙청 선생은 현재 온유한 입장으로 선회하셨다 하지만, 저는 선생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현재의 문단권력구조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테지만) 그의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문단의 '민족'주의가 고착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저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몇 번 발을 걸친 적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작가회의>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7-02-0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도 작가시란 말씀?!..

나비80 2007-02-0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까지는 아니고 그냥 언저리에서 쭈뼛대는 수준입니다.^^

짱꿀라 2007-02-0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선생님 팬인데, 기사 잘 읽고 갑니다. 늘 도움만 받아서 감사해요.

기인 2007-02-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머리가 하얀 사진은 처음 보는데, 그래도 만년 청년이신 황선생님.

비로그인 2007-02-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신 말씀... 퍼갑니다!
 

한 학기 동안 한 독서모임의 강사를 맡게 됐다. 예전에 언질이 있었던 내용인데, 오전에 시간과 장소가 확정됐다는 메일을 받고서 대학강의처럼, 아니 그보다 '빡세게' 16주 강의안을 만들어 오후에 보냈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카테고리로 해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읽기가 두루 포함돼 있는 그 강의안의 한 꼭지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단편문학과 그 유산'에 대한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둔 건 미국작가 레이몬드 카버(1938-1988)와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1949- )이다.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라고 말한 작가가 레이몬드 카버이고, (하루키의 독자들은 잘 알 테지만) 그 카버를 또 직접 번역하고 해설을 쓰기도 한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렇게 해서 세 '단편작가'는 굴비처럼 엮인다.

 

 

 

 

레이몬드 카버의 책은 이전에 <숏컷>(집사재, 1996)을 사두었지만 아마도 박스에 들어 있을 듯하고, 이번에 새로 읽어보려고 하는 단편집들은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집사재, 1996)와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집사재, 1996)이다. 이 작품집들은 문학동네에서 레이몬드 카버 선집이 기획되면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5)과 <제발 조용히 좀 해요>(문학동네, 2004)로 다시 출간됐다(역자는 다르다). 두 권 정도 더 출간되는 것으로 아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조만간 출간되는지 모르겠다.

 

 

 

 

풍문으로 듣는 하루키 문학에 대해서 나는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그런 내게도 안면이 있는 문학평론가들이 적극 추천하던 게 그의 단편들이었다.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여러 단편집들 가운데 일차적으론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문학사상사, 1992)을 골랐다. 흥미가 생기면 더 읽어볼 것이다.

체호프 단편의 계보를 굳이 러시아 밖에서 찾는 건 러시아쪽 작가/작품들이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문학적 선배로 하드 보일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어네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단편들이 있다면, 체호프의 문학적 후배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에 이삭 바벨(1894-1940, 사진)이 있다(바벨의 단편들은 예전에 <기병대> 등이 소련동구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소개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 새로운 번역본이 어쩌면 올해 출간될 것이다).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와 동시대 작가로 러시아 문학에선 체호프의 '문학적 적자'로 평가받는 작가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1941-1990)이다. 1971년 망명해서 1990년에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도블라토프는 생전에 체호프가 자신이 닮고 싶은 유일한 작가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작품집도 아마 1-2년내로 출간될 수 있을 것이다. 체호프 단편문학의 계승과 변주는 그때 가서 좀더 충실하게 조망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 카버에 관해서 검색하다 보니까 그의 한 단편집에 번역/소개돼 있는 '글쓰기에 대하여'가 눈에 띈다. 이때 '글쓰기'는 총칭어가 아닌 '단편소설 쓰기' 정도로 한정하여 읽는 게 내용에 적합해 보이는데(소위 단편과 (장편)소설은 종류가 전혀 다르다는 걸 이 글에서도 시사받을 수 있다), 아무려나 유익하고 흥미롭다. 레이몬드 카버 입문에 가름할 수 있을 듯해서 다시 옮겨놓고 몇 가지 이미지를 덧붙여둔다.



1960년대 중반, 나는 긴 대화체의 소설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 상당히 힘겹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소설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한 번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바람에, 더 이상 소설을 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얽힌 사연이 약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모두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지겨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내가 시나 단편 소설에 집착하게 된 이유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치고 빠지는 식의, 혹은 머뭇거림 없이 뛰쳐나가는 식의 방법만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무렵, 그러니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원대한 야심을 잃어버린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야심과 약간의 행운이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 지나치게 큰 야심과 지나치게 더러운 운세는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작가들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확하고 참신한 시선, 또한 그러한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하게 맥을 짚어내는 것 등은 재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가프가 본 세상(The World According to Garp)>은 존 어빙이 본 신비로운 세상에 다름 아니다. 그 밖에도 플래너리 오코너, 윌리엄 포크너,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이 바라본 또 다른 세상도 있다. 치버, 업다이크, 싱어, 스탠리 엘킨, 앤 비티, 신디아 오지크, 도널드 바셀미, 메리 로빈슨, 윌리엄 키트레지, 배리 한나, 워슐라 K. 르귄 등도 모두 특유의 독자적인 세상을 만들어 낸 작가들이다. 위대한 작가, 심지어는 아주 좋은 작가들도 모두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을 창출해 낸다.

이것은 스타일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스타일 하나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쓰는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서명이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세계일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주는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재능이 작가를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법을 가진 작가, 또한 그러한 방법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삭 디네슨(Isak dinesen)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나는 조그만 카드에 그 말을 적어서 내 책상 옆 벽에 붙여 놓을 생각이다. 지금도 벽에는 그런 카드들이 몇 장 붙어 있다.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 한 작가가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적어도 길은 제대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내 책상 맡에는 체홉의 단편에서 따온 문장 하나가 적힌 카드도 붙어 있다. “.... 갑자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명료해졌다.” 나는 몇 안되는 이 단어들이 경이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 단순한 명징성을 사랑하고,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계시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 미스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료했을까? 왜 그것이 지금에야 명료해졌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들이 있다. 나는 날카로운 안도감,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감을 느낀다.

작가 제프리 울프(Geoffrey Wolff)가 문학도들을 향해 ‘값싼 트릭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얼핏 엿들은 적이 있다. 그 말 역시 카드에 적어서 붙여야 한다. 나 같으면 ‘값싼’이라는 단어 하나는 빼 버릴 생각이다. 그저 ‘트릭은 안된다’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그만이다. 트릭이란 결국에는 지겨운 것일 수 밖에 없다. 집중 시간이 짧은 것과도 관련이 되겠지만, 나는 원래 지겨운 것은 좀처럼 참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극도로 현란하게 기교를 부린 문장, 또는 시시한 농담 같은 글은 나를 금방 잠들게 만든다. 작가에게는 트릭이나 교묘한 잔머리가 필요 없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작가라면 다소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가끔은 절대적이면서도 소박한 경이로움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입을 쩍 벌리고 이런저런 사물 - 일출도 좋고 낡은 구두 한 짝도 좋다 - 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몇 달 전 존 바스(John Barth)는 ‘뉴욕 타임즈 북 리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소설 창작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 대부분이 ‘형식의 혁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별로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1980년대의 작가들이 이른바 ‘구멍가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걱정은 실험 정신이 자유주의와 함께 그 기세를 잃어 가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나는 소설 창작에 있어 ‘형식의 혁신’이라는 우울한 논의를 접할 때마다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글쓰기에 있어 ‘실험’이 경박함과 가소로움, 혹은 모방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실험이란 미명 아래 독자를 잔혹하게 짓밟고 소외시키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런 글은 세상 소식을 전혀 전해 주지 못하며, 혹은 모래 언덕 몇 개와 도마뱀 몇 마리는 있으되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사막 풍경의 묘사에 그치고 만다. 그런 곳은 인간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살고 있지 않는, 그저 극소수의 과학 전문가들에게나 흥미있는 장소일 뿐이다.

소설의 진정한 실험이란 원초적이고, 힘든 노력의 대가로 얻어지며,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 예를 들면 바셀미의 방식 - 을 다른 작가가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의 바셀미가 있을 뿐, 만약 다른 작가가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바셀미 특유의 감수성이나 무대 장치를 도용하려 했다가는 혼란과 재앙,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기만을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참된 실험이란 파운드가 주장한 것처럼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자 스스로의 힘으로 작가들이 멀쩡한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고 자기네 세계에서 우리네 세계로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기를 바랄 것이다(*이 문장은 비문인데 확인해봐야겠다).

시나 단편 소설에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지극히 상식적인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러한 사물 - 이를테면 의자나 창문의 커튼, 포크, 돌멩이, 여자의 귀걸이 등 - 들에 거대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독이 없는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등공에 오싹한 한기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적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작가로는 나보코프(Nabokov)를 들 수 있다.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이다. 나는 실험이란 기치를 내걸건 혹은 애꿎은 리얼리즘을 내걸건 간에,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되는 대로 써내려가는 식의 글쓰기는 무척 싫어한다. 아이작 바벨 (Issac Babel)의 뛰어난 단편 ‘모파상의 친구’에서(*'이삭 바벨'이라고 읽어줘야 한다), 화자는 소설 쓰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사람의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이것 역시 카드에 적어 붙일 만한 말이다.

에반 코넬(Evan Connell)은 자신이 쓴 단편을 쭉 읽어 내려가며 쉼표를 하나하나 지웠다가, 다시 한 번 읽으며 쉼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살려 놓는 과정을 거치면 단편 하나가 완성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하건 그런 식으로 일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자신이 해놓은 일에 대한 그 정도의 관심은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어차피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단어들밖에 없으니, 이왕이면 구두점 하나라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제자리에 가 박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만약 단어들이 작가 자신의 억제되지 않는 감정으로 뒤죽박죽이 된다면, 혹은 기타 다른 이유 때문에 정확하지 못하거나 명확하지 못하게 된다면, 독자의 눈은 바로 그 단어 위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독자 자신의 미적 감각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러한 종류의 불운한 글을 ‘허약한 설명서’라고 표현했다.

나에게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혹은 편집자나 마누라의 성화 때문에 서둘러 책을 써야 한다고 털어놓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이 아주 뛰어난 글을 쓰지 못하는 변명인 셈이다.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좀더 좋아졌을 텐데.”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 사실은 안하지만 - 말문이 막힌다. 어차피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작가가 자신의 모든 힘을 모조리 내어, 쓸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과 그 힘들었던 노동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말을 한 내 친구에게, 제발 부탁이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쉽고도 정직한 방법이 반드시 있을 터이다. 그러기가 싫으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글을 쓰고, 일단 쓴 다음에는 어떠한 정당화나 핑계도 내세워서는 안된다. 어떠한 불평도, 어떠한 설명도 필요치 않다.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단편 소설 쓰기’라는 소박한 제목이 붙은 에세이에서, 글쓰기란 발견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단편 소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자기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할 때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을지 의심스럽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착한 시골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었다. 작품이 끝나기 직전까지, 자기도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목발을 짚은 철학 박사가 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두 여인에 대한 묘사 부분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둘 가운데 한 여인에게 목발을 짚은 딸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중간에 나는 성경책 판매원을 끼워 넣었는데, 나에게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가 목발을 훔치는 장면의 10줄 위를 쓸 때만 해도, 나는 그가 목발을 훔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제서야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 전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거기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을 쓸 때 이런 방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의 결점이 드러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털어놓은 글을 읽고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비록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첫 문장밖에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지만, 꽤 괜찮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이는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던 적이 있다. 그 며칠 전부터 내 머리 속에는 첫 문장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진공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레이몬드 카버 전집 제 2권 ‘숏컷’에 수록된 ‘당신도 내 입장이 되어봐’의 첫문장이다; 옮긴이) 나는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것을 쓸 시간만 낼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시작되는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원래 시간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 종일 - 12시간, 심지어 15시간도 좋다 - 시간을 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어느 날 아침 책상에 앉아 그 첫 문장을 썼다. 그러고 나니 금새 또 다른 문장이 그 뒤에 달라붙었다. 나는 시를 쓸 때처럼 그 작품을 썼다. 한 줄 쓰고, 또 한 줄, 그리고 또 한 줄을 써나가는 것이다. 머지 않아 나는 단편 하나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이 내 작품,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실상 단편쓰기란 곧 시쓰기이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는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형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프리체트(V.S.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 - 또 운을 들먹인다 - 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 데 투자하는 것이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07.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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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0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독서모임 사람들 부럽군요. 대학에서 하는건가요? 훔...

로쟈 2007-02-0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강료가 '비싸니까' 그렇게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락방 2007-02-0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이 강의는 들어보고 싶은데요. ㅜㅜ

기인 2007-02-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저도 얼른 강의해보고 싶어요 ㅎ :)

로쟈 2007-02-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제가 분위기만 띄워놓았네요...
기인님/ 프라하 여행기는 너무 싱겁던데요.^^ 강의야 뭐 나이 차면 하게 되는 거죠. 또 나이 차면 그만 두고...

moonnight 2007-02-0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막 들어보고파집니다. 굉장히 알차리란 믿음이 생기네요. 학생들이 부러워요.

로쟈 2007-02-0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획은 제가 언제나 '알차게' 세웁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아니구요, 아마 제가 제일 나이가 어릴 겁니다.^^;

나비80 2007-02-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빡센 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피곤한 일일텐데.
고생스러우시겠습니다^^

로쟈 2007-02-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주로 '계획'만 빡셉니다.^^;
 

주말이면 하던 대로 경향신문에서 '작가와 문학 사이' 연재를 옮겨놓는다. 오늘의 한국문학을 이끌고 나가는 젊은 시인, 작가들의 면면을 매주 한 사람씩 확인해보는 일은 즐겁고도 자극적이다. 이번주에 소개되는 작가는 작년에 첫 장편소설 <리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여성작가 강영숙씨이다. 문학평론가 심진경의 작가리뷰와 함께 작년 한국일보에 실린 작가의 수상소감을 같이 옮겨놓는다. 어제 세상을 떠난 스승 오규원 선생에 대한 언급도 소감에는 들어 있다(시에서 소설로 장르를 바꾼 건 스승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작가로서건 여성작가로선 앞으로 '큰 작가'로 성장해가는 것이 독자의 바람이면서 돌아가신 스승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경향신문(07. 02. 03) [작가와 문학사이](5)강영숙-여성을 배반하는 여성작가

강영숙은 여성작가다.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작가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여성문학이 ‘붐’을 이루었을 때 여성작가라는 레테르는 비평적으로 옹호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지금 작가들에게 ‘여성’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협소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법률상 여성인 작가들조차 이제는 그냥 작가로 불리기를 원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여성? 웬 여성문학?” 그러니 강영숙을 여성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영숙은 여성작가다. 그런데 여성작가이되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을 배반하는 여성작가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명사 여성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그녀들은 덩치가 크지만 힘이 세지 않고 무신경하면서도 섬세하다. 강하면서 나약하고 대범하면서 소심하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인물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다면체적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쉽게 포착되기 어렵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일종의 중간자가 되고 싶었다”(‘자이언트의 시대’)는 작가의 고백은 관습적인 성별 범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가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즈음 강영숙만큼 여성의 성과 육체를 문학적 사유의 매개체로 적극 활용하는 작가가 있을까. 소설 ‘봄밤’(소설집 ‘날마다 축제’ 수록)의 마지막 구절인 “임신이었다”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의 마지막 구절인 “초조였다”를 떠올리게 한다. 임신은 초조로 상징되는 사춘기 여자아이의 첫 번째 성장통에 이어지는 제2의 성장통을 암시한다. 오정희 소설에서 초조를 겪는 여자아이의 육체적 변화가 그대로 중국인 거리로 상징되는 낡은 세계의 몰락과 미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재연하는 것처럼, 강영숙 소설에서 임신한 여자의 육체는 이 세계의 비극적 기미를 포착해냄으로써 그러한 세계의 비극성이 빚어낸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이제 여성의 육체는 강영숙에 이르러 세계의 고통을 통각하고 재현하는 허구적 장소가 된 것이다.



장편소설 ‘리나’의 ‘국경’은 그러한 여성의 육체적 감각법을 통해 구현한 허구적 장소를 상징한다. 일차적으로 ‘리나’는 고통스럽지만 이미 익숙해진 탈북자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리나’가 성취한 득의의 영역은 매춘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탈북여성의 현실을 고발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주인공 리나의 국적을 지우고 기원을 삭제함으로써 탈북자 리나를 국경을 넘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국경 탈출자 일반에 관한 이야기로 만든다.

그리하여 ‘리나’는 불법체류 노동자의 사연이거나 자본의 유통 경로를 따라 남하하는 매춘여성에 관한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도 언제나 저쪽에서 이쪽으로 경계를 넘어가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런 과정에서 이전의 ‘나’ 위에 다른 존재들이 겹치고 쌓이는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복수적 존재가 된다. 리나의 ‘국경 넘기’는 바로 그런, 이쪽과 저쪽에도 포섭되지 않는 복수적 존재로서의 삶 자체를 의미한다.

결국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리나는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러한 ‘국경적 삶’은 고집스럽게 ‘나’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경 넘기를 통해 리나는 다른 무수한 국경적 존재들과 만나 그들의 비극적 상황을 자신의 육체 위에 허구적으로 구축한다. 우리는 그들을 타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타자는 주체의 바깥에 거주하는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나’의 단단한 외피를 말랑말랑하게 만들면서 ‘나’ 안으로 들어와 종국에는 ‘나’와 구별되지 않는, 이미 ‘너’가 아닌 존재들이다. 강영숙에게 여성은 그렇게 ‘너’를 ‘나’ 안으로 들여와 섬길 수 있게 하는 문학적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니 강영숙은 어쩔 수 없이 여성작가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6. 11. 20) 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강 영 숙

"우린 모두 리나처럼 슬픔의 자루 하나씩 달고 사는 건 아닐까"
"소설 쓰는 건 벼랑끝서 행하는 피나는 소통 따뜻하고 시원한 공기 한뼘 선물 받은 기분"


올해도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할아버지들이 꽉 들어찬 인사동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전화를 몇 통 했다. 후보에 오를 때마다, 올해도 괜찮은 단편소설 하나는 쓴 거라며 연례행사를 치르듯 그냥 흘려보냈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저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촌스럽게도 덜컥 몸살이 나버렸다. 데뷔 후 8년 동안 몸 속에서 함께 살았던 그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가면서 이 몸살이 기분 좋아졌고 누군가 지나가면서 머리를 한 대 가볍게 툭 친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혹시라도 작가적 기절이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나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초등학생 시절 내내 기초 종목인 장단거리 달리기와 넓이뛰기 선수는 물론 스케이트 선수와 배구 선수로 지냈다(*이 작가에게서 '자이언트' 모티브의 기원이겠다). 일기를 자주 쓰기는 했지만 그저 그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지금까지 직업을 가지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도 있겠다.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게 지겹기도 하지만 그런 느낌은 금세 잊고 똑같은 삶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간다. 작가라고는 하지만 작가다운 일상이란 것도 거의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깨워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직장일과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약속이 없는 날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간다. 3년째 재택근무자인 나에게 천장이 높은 도서관은 공부방이자 사무실이고, 도서관에서 보는 노을은 아주 쿨한 주홍색이다. 그러다 이것도 저것도 다 지겨워지면 시내로 나가 영화클럽 멤버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

80년대 후반의 문예창작과는 시인 지망생들로 넘쳐 났고 나도 아주 섹시한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은 학생들 중 하나였다. 오규원 선생님의 충고로 장르를 소설로 바꿨고, 데뷔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발광도 했지만, 그 긴 시간이 역설적으로 어떤 순발력 같은 것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춘천에서 살다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로 이주한 열 다섯 살 이후부터 아주 긴 일기를 썼다(*춘천은 인천에 이어서 작가 오정희의 도시이기도 하다). 서울은 슬픔에 떠밀려 다니는,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한 척의 거대한 배 같았다고 할까. 습작 때도 그런 막연한 도시 이미지를 묘사했다. 그러나 쓰면서도 내가 무엇을 쓰는지, 내가 왜 쓰는지 알고 시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릴 적, 부엌 석유곤로 위의 냄비에서 솟아나는 흰 김을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 항상 밝은 성격에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무엇인가를 응시할 때, 아주 가끔씩 마음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상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크고 작은 슬픔의 자루 하나씩을 허리 끝에 달고 다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수많은 ‘리나들’ 또한 국경을 넘은 후부터 일정 기간 동안의 시간을 자루 속에 넣어둔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그런 사라진 시간은 있는 것 같다.

리나는 어쩌면 밖으로 나가려는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여정을 대변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리나와 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피차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드러내고 싸워야 한다. 그것은 불편한 일인 동시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일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피나는 소통의 과정인 동시에 뒤로 돌아서면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환각의 공간을 헤매는 것처럼 모호한 일이기도 하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리나>는 우울증의 소산이다. 나는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제안하는 일에 참여하고 소설을 쓴다(*이 작품이 내게 떠올려주는 소설은 카프카의 <성>이다. 나는 작가가 '국경'이란 테마로 또다른 카프카적 세계를 더 발견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멜랑콜리에 유머를 칵테일한). 일의 양이 많지 않아 잠시라도 짬이 나면 슬픔들이 마음을 치고 머리로 올라온다.

긴 노동이 끝난 후에, 따뜻하고 시원한 공기 한 뼘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내 눈과 뱃속이 열을 받아 다시 따뜻해지길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한번도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텍스트 한 편을 구상하기 위한 시간을 죄책감 없이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순한 양처럼 착해져서 아침에 좀더 일찍 일어나야겠다,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 온갖 다짐으로 마음이 몹시 분주하다.

07. 02. 03.

P.S. 보너스 트랙으로 <리나>의 출간을 다룬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아직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지나쳐도 좋겠다(작가와 독자와의 만남을 다룬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74739 참조). 읽을 생각이 없으신 분들은 이 탈출소녀의 이야기를 사서 그냥 서가에 꽂아두시길. 그러다 좀 우울할 때 읽어보시면 되겠다. 아니면 어디로 탈출할 때 여권과 함께 가방에 넣으셔도 좋겠고...

한겨레(06. 09. 16) '국경 탈출’을 사랑한 소녀  

소설가 강영숙(40)씨가 첫 장편 <리나>(램덤하우스코리아)를 펴냈다. 주인공은 열여섯 살 소녀 ‘리나.’ 그는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국경을 넘어 탈출길에 오른다. 그의 조국은 대륙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나라이고, 그가 향하려는 곳은 “내가 태어난 나라와 같은 말을 쓰지만 때깔이 전혀 다르고 풍요로운 곳이라고 알려진 P국”(344쪽)이다. 그가 남쪽으로 오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작가는 구체적인 나라 이름과 지명을 괄호침으로써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러 흐릿하게 만든다. 그 결과, 국경을 건너는 리나의 탈출 이야기는 영토와 경계를 넘는 탈주와 모험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로 옮겨 가게 된다. 독자는 물론 이 소설을 리나라는 이름의 한 탈북자가 겪는 시련과 고난의 이야기로 읽을 자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작가의 의도는 ‘탈북 수기의 소설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나는 결국 ‘P국’으로 가지 못한다. 소설의 중후반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리나는 대륙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로질러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국경을 넘어 제3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제3국에서 다시 대륙으로 들어와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륙을 한 바퀴 돌아 떠나온 지점에 다시 와 있다는 황당한 사실을 안 리나는 울지도 않았다.”(191쪽)

물론 애초에 리나는 ‘P국’으로 가고자 했다. 그곳은 무엇보다 풍요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국경을 넘어 대륙에서 마주친 풍요의 일단을 엿본 리나의 생각이다: ‘내가 가서 살게 될 P국은 이 나라보다 더 잘산다고 했어. 나도 저 여자들처럼 청바지와 구두를 신겠지. 정말 대학에도 갈 수 있을까. 배가 터지게 먹기는 할 거야.’(26쪽)

감시와 단속을 뚫고 몇 개의 국경을 넘는 탈출이 손쉬울 리 만무하다. “국경은 그저 퇴로가 없이 사방이 막힌, 비탈지고 조용한 산길의 일부일 뿐”(13쪽)이라고는 하지만, 그 국경을 넘어 다른 영토로 스며들기까지는 숱한 고난을 거쳐야 한다. 장시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산길을 걸어야 하는 탈출자들이 취하는 행동을 보라.

“오후가 되자 노인들은 머리카락을 뒤져 이를 잡아먹었고 남자들은 땅속을 파거나 바위를 들쳐 누에처럼 생긴 벌레를 잡아 구워 먹었다.(…)리나도 잠자리 두 마리와 전갈처럼 생긴 벌레 한 마리를 먹었다.(…)사람들은 불 앞에 모여 앉아서 자기 팔을 입으로 물고 있거나, 겨드랑이를 긁어서 나온 것들을 입 속에 넣거나 발 새에 낀 때를 빼먹었다. 머리가 긴 신혼의 여자는 자기 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48쪽)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은 대로, 탈출자들이 겪는 참상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시련과 시험을 거쳐 리나는 드디어 ‘P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뜻밖에도 식구들을 버리고, 아울러 ‘P국’을 향한 꿈도 과감히 접은 채 또 다른 모험 길에 나선다. 그것이 반드시 “너네 나라는 미쳤고 P국은 썩었어”(109쪽)라는 선교사의 말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탈출의 초기 단계에서 식구들과 헤어져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 시달렸으며, 자본주의적 풍요의 더러운 이면을 엿본데다, 특유의 삐딱한 기질과 모험 충동이 결부되어 내려진 이런 결정은 소설 <리나>를 탈북자들의 수기와 뚜렷하게 구분짓는다. “탈출이란 것이 이제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투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혈액이 든 비닐 주머니처럼 느껴졌다.”(117쪽) 이제부터 리나의 탈출은 목표를 향한 다가감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탈출 자체를 위한 탈출로 성격을 바꾼다.

이후 리나의 삶의 유전은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어렵게 넘어간 제3국에서 대륙으로 되돌아온 그는 우연한 계기에 천막 극장의 가수가 되었다가는 집창촌의 창녀로 팔려 가고, 집창촌이 헐린 뒤에는 또 다시 대륙 북동쪽 경제자유구역의 공장 노동자로 전신한다. 소설의 중후반부 이야기는 톈진 정도로 짐작되는 이곳 공단지대에서 펼쳐지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리나는 나중에는 공단 외곽 술집 주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최초의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남자를 죽였던 리나는 이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 리나가 “어쩌나, 난 다시는 살인은 안 하려고 했는데…”(261쪽)라며, 흡사 실수로 예쁜 꽃병을 깨뜨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하는 대목은 이 소설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소설의 어조는 결코 어둡거나 심각하지 않다. 리나의 낙천적이며 강인한 성격 탓이겠지만, 극도의 고통과 수난조차 한 바탕 유쾌한 모험담쯤으로 그려진다는 데에 소설 <리나>의 개성이 있다.

모험과 탈출을 사랑하는 리나로서도 공단지대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술집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쑬쑬했다. 그러나 가스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공단은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가운데, 살아남은 리나 역시 화학 가스에 노출되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정부는 공단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리나는 또 다시 국경을 넘는 탈출 길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 “코뿔소처럼 생긴 유목민의 나라”(340쪽)가 목적지다. 리나의 수중에는 그를 ‘P국’으로 데려갈 만한 달러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리나는 그 돈을 선교사에게 건네며, 이미 ‘P국’에 정착한 식구들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탈출이 지닌 근본주의적 속성을 또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시 국경. 소설의 앞과 뒤에는 리나가 넘으려는 두 개의 국경을 묘사한 비슷한 문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은 어느 순간 활짝 열릴 거라고 믿었다.”(11쪽)

“리나는 또다시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348쪽)


리나의 삶은 하나의 국경에 이어 또 다른 국경을 거듭해서 넘는 월경의 연속이다. 소설에는 “세기가 바뀌고 난 후 전 세계의 국경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310~311쪽)는 문장도 있거니와, 몸살은 중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회복과 신생의 가능성 쪽으로도 열려 있지 않겠는가.(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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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의 부음을 들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인의 투병 소식은 전해져왔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갑작스럽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그리고 시인의 마지막 시집에서 시 한편을 옮겨놓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경향신문(07. 01. 03) ‘날 이미지의 詩’ 오규원 시인 별세

‘날(生) 이미지의 시’를 추구해온 시인 오규원씨(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2일 오후 5시10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폐기종으로 강원 영월, 경기 양평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고인은 최근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입원했다.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68년 ‘현대문학’에 시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돼 등단했다.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부터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에 이르기까지 10여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고인은 인식과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한 초기시, 자본주의의 허위성·상업성을 비판하는 해체시를 거쳐 90년대 초반부터 시인의 직관에 닿는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긴 ‘날 이미지의 시’를 주창해 시단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날 이미지’란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순수한 존재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수법. 김수영 문학과지성사 주간은 “‘날 이미지’라는 개념은 철학적인 깊은 고민을 거쳐 나왔다”면서 “치열한 시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만의 투명한 언어를 보여준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시론에도 관심이 많아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의 시론집을 내기도 했다.

83년부터 2002년까지 20년간 서울예대에 재직했던 고인은 세심하고 자상한 스승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신경숙 장석남 하성란 강영숙 천운영 강영숙 박형준 등 제자 문인 46명이 그와의 추억과 인연을 회고한 ‘문학을 꿈꾸는 시절’(2002)을 회갑 기념문집으로 냈다. 시인 장석남씨는 “선생님은 엄하면서도 제자들의 성격을 파악해 거기에 맞게 지도해 주셨다”며 “한참 연락이 없다가도 당신이 먼저 전화로 안부를 묻는 등 자상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 부문(2003)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방송작가인 부인 김옥영씨와 2남1녀가 있다.(한윤정기자)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에서

07. 02. 03.

 

 

 

 

P.S. 시인의 삶은 이제 그의 시들이 대신하게 됐다. 시인이 남겨놓은 시의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는 일은 우리의 몫이고. 해서, 그의 시집 대부분을 갖고 있어서 따로 사두지 않았던 <시전집>도 구해놓아야겠다. <오규원 깊이 읽기>는 어디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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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지난주에 깜박 잊고 넘어간 게 있다. '작가와 문학 사이'를 옮겨오지 않은 것. 짐작대로 경향신문의 이 연재는 심진경, 신형철 두 평론가가 번갈아가며 연재하고 있다(시와 소설로 분담한 것인지?). 지난주에 다루어진 작가, 아니 시인은 재작년 한국시단의 '뉴히어로' 황병승 시인이다. '미래파'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이 시인에 대해서 젊은 비평가가 차분하게 그 의의를 짚어주고 있다.

경향신문(07. 01. 27) [작가와 문학사이](4) 황병승-본능에 충실한 ‘언어 모험가’

역사적인 시집들이 있다. 한 시대의 기념비 같은 책들이다. 이를테면 이성복과 황지우의 첫 시집은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양심이 쓴 혈서다. 철조망 같은 시집들이었다. 다가가 부딪치면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독서가 곧 출혈이었다. 장정일과 기형도의 시집은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진단서다. 전자는 삐딱한 독학자의 눈으로 한국 사회의 ‘쓸쓸한 퇴폐’를 포착했고, 후자는 우울한 기자의 눈으로 ‘무서운 슬픔’을 보고했다. 90년대는? 풍요로웠지만 고요했다. 2000년대가 시작되고도 한동안은 그랬다.

그 무렵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2005)가 나왔다. 괴물 신인의 괴팍한 등장이었다. 불온한 붉은 빛깔의 시집은 단숨에 기념비가 되었다. 매력적인 정체불명의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이해되기 이전에 먼저 빨아들이는 수사들, 비문(非文)의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씌어지는 문장들, 격렬한 분노와 황량한 슬픔이 뒤엉켜 있는 정서들이 시의 막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몇몇 동료들이 그와 더불어 각개약진했다. ‘2000년대 시’ ‘미래파’ ‘뉴웨이브’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기념비 주위에 화환들이 쌓여갔다.

1970년생이니까 문태준과 동갑이다. 공통점은 그것뿐이다. 문이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顯現)을 도모하는 서정의 사도라면, 황은 언어의 모험과 정체성의 실험이 같은 것이라고 믿는 전위의 척탄병이다. 전자가 내실을 보살핀다면 후자는 외연을 넓힌다. 이것은 모든 시사(詩史)를 관류하는 두 개의 근원적 기질이다.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들을 긁어모아 ‘시’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 문과 황은 당대 한국 시의 남북극에 있는 전진기지다. 둘 사이의 거리가 곧 최근 한국 시의 넓이다.

“메리제인./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이 없지/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메리제인./가슴은 어딨니//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중략)//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메리제인. 말했지//빨고 만지고 핥아도/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슬픔이 지나간 얼굴로/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메리제인. 요코하마.” (‘메리제인 요코하마’)

인용한 시가 황병승의 본령은 아니지만 비교적 온건한 입구쯤은 된다. 태생적이라고 해야 할 비주류 의식을 여기서 본다.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다질 않는가. ‘그들 안의 블루’가 그것을 연주한다. 끼리끼리 모여 “빨고 만지고 핥아”가며 견딘다.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뿐이라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라서 그렇다. 그러니 그의 시에 출몰하는 이국의 인명과 지명은 모국어에 대한 불경이 아니다. 노동계급에 조국이 없듯, 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내 나라의 ‘꼰대’들이 아니라 ‘요코하마의 거지들’이 그들의 동포다.

그런 이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어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말문을 연다.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라고 고백하는 게이가 있다. 입술을 뜯어버리고 얼굴을 갈아버릴 테니 제발 사랑해 달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는 어쩐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시코쿠’라는 크로스드레서는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라고 냉소하고, 어느 트랜스젠더는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될래요”라고 쓸쓸히 자조한다. 이들은 실로 한국 시가 처음 경험하는 주체들이다.

그는 마이너리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가 그의 시에서 말한다. 이것이 그의 괴력이다. 세 군데 이상의 학교를 다녔고 세 장르의 예술을 넘나들고 있는 이 시인은 시를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즐겁고 슬픈, 이상한 놀이다. 그의 시에서 ‘즐거운 놀이’만을 본다면 그것은 절반밖에 못 본 것이 아니라 전부를 못 본 것이다. 어서들 오시라, 이곳은 한국시의 신개지(新開地)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1. 30.

P.S. 해설만으로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을 위해 두 편의 시를 옮겨놓는다. "그는 마이너리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가 그의 시에서 말한다."라는 평론가의 말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그의 시들은 그가 쓰는 게 아니라 그의 '똑똑한 오리들'이 쓰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검은 바지의 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 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 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 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주치의 h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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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1-3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역할극'의 달인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난장이/시인을 초과하는/압도하는 기계/인형들의 반란같은...

로쟈 2007-02-0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ture님/ 라캉-지젝 말고 미래파도 읽으시는군요.^^

sommer 2007-02-0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장남자'라는 일종의 가면이 끌려서 읽은 거죠, 미래파는 나중에 따라 온 구실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