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소설 《The Catcher in the Rye》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콜필드 가문 3남 1녀 중 둘째이다. 소설에서 친형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고, ‘D. B.’라는 이름의 머리글자로만 나온다. D. B.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다. 남동생 앨리(Allie)는 1946년 7월 18일에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홀든의 친구 스트라드레이터(Stradlater)는 자신의 작문 숙제를 퇴학이 확정된 홀든에게 맡기는데, 죽은 앨리를 잊지 못한 홀든은 작문 숙제에 동생과 관련된 추억에 대한 글을 쓴다. 막내 피비(Phoebe)는 홀든이 앨리 못지않게 좋아하는 여동생으로,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홀든은 과거에 형과 앨리가 주고받은 대화 한 장면을 회상한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앨리가 형에게 형은 작가니까 전쟁에 참가하면 작품 쓸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형은 앨리에게 야구 미트를 가져오게 하고는, 루퍼트 부루크와 에밀리 디킨슨 중에서 누가 훌륭한 전쟁 시인인가를 물었다. 앨리는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대답했다.

 

(이덕형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210쪽)

 

 

I remember Allie once asked him wasn’t it sort of good that he was in the war because he was a writer and it gave him a lot to write about and all. He made Allie go get his baseball mitt and then he asked him who was the best war poet, Rupert Brooke or Emily Dickinson. Allie said Emily Dickinson.

 

 

 

루퍼트 브룩(Rupert Brooke, 1887~1915)은 영국의 시인이다. 1911년에 첫 시집을 발표했으나 그의 창작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15년에 그리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지배에 저항하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열병이 악화되어 그리스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최후와 조금 비슷하다.

 

루퍼트 브룩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독자들 역시 앨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평생 독신으로 은둔의 삶을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1,775편의 시를 썼다. 그렇지만 그녀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10편에 불과했다. 그녀는 늘 흰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수녀’ 혹은 ‘백의의 처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킨슨은 죽기 직전 여동생 라비니아 디킨슨(Lavinia Norcross Dickinson)에게 자신이 남긴 기록물 전부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언니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펴내는 데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D. B.가 디킨슨을 ‘전쟁 시인’으로 보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디킨슨은 남북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살았다.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를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디킨슨은 남북전쟁을 직접 언급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대상이나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전쟁으로 비유해서 쓴 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를 썼다고 해서 그녀를 ‘전쟁 시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D. B.의 엉터리 말은 얕은 문학 지식을 가진 D. B.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D. B.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황금 금붕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는 무명작가였다. 당연히 D. B.도 콜필드가 비꼬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디킨슨의 시는 대체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쉽게 읽혀지는 시는 아니다. 디킨슨의 시에 많이 나오는 주제는 사랑, 자연, 죽음과 불멸,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 자기 성찰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 대다수는 진중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띤다. 그녀의 시는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디킨슨은 절제된 구성으로 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거나 시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시의 음률을 살리려고 ‘줄표(—, dash)를 많이 썼다. 게다가 특정 시구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문법을 무시하는 작법을 구사했다. 그 때문에 디킨슨의 시는 들어가기는 쉬워도(읽기 쉬워도), 나가기 어려운(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미로’이다.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구판 절판] 에밀리 디킨슨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민음사, 1976)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디킨슨은 시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집 출간에 참여한 편집자와 문학 연구가들은 엄청난 양의 시를 구분하기 위해 각각의 시에 숫자 번호를 붙였다. 그녀의 시를 가리킬 땐 숫자 번호와 시의 첫 번째 문장을 함께 언급한다. 시의 첫 번째 문장은 임시로 붙여진 가제(假題)가 된다.

 

만약 우리나라에 해설을 곁들인 디킨슨 시 ‘전집’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적어도 두 권으로 나올 수 있겠다. 가장 많이 알려진 디킨슨 시 ‘선집’은 1976년에 강은교 시인이 번역한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이다. 알라딘에는 이 시집의 출판연도가 ‘1997년’으로 되어 있는데, 초판 발행연도는 아니다. 1997년에 나온 건 개정 2판이다. 2016년에 나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은 개정 3판이다.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시와 강은교 시인이 쓴 해설 내용은 모두 같지만, 개정 3판을 잘 살펴보면 구판에서 드러난 어색한 번역문과 오역을 고치고 새로 다듬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판과 개정 3판에 ‘하늘나라에 갔었네’라는 가제가 붙여진 시(No. 374: I went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구판 번역문과 개정 3판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Stiller — than the fields

At the full Dew —

Beautiful — as Pictures —

No Man drew.

People — like the Moth

Of Mechlin — frames —

Duties — of Gossamer —

And Eider — names —

Almost — contented —

I — could be —

’Mong such unique

Society —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좀벌레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한 줄기 빛이 되어》, 민음사, 48쪽)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레이스나방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47쪽)

 

 

 

 

‘moth’는 나방을 뜻한다. 그런데 구판에는 ‘moth’를 ‘좀벌레(silverfish)’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 있다. 번역문 옆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구판의 오역을 발견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절판] 에밀리 디킨슨, 김천봉 옮김, 《19세기 미국 명시 6: 에밀리 디킨슨》 (이담북스, 2012)

 

 

 

민음사의 디킨슨 시 선집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의 《디킨슨 시선》이담북스의 《에밀리 디킨슨》을 읽으면 된다. 다만 이담북스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번역본은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이다. 오역으로 추정되는 시구가 몇 개 있긴 하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이 번역본이 기존의 디킨슨 시 선집과 차별화된 특징이 있는데, 시마다 붙여진 숫자 번호까지 적혀 있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은 숫자 번호가 붙여진 유일한 디킨슨 시 선집 번역본이다.

 

 

 

 

 

 

 

 

 

 

 

 

 

 

 

 

* 데이먼 영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L.I.E., 2009)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잘 알려지지 않은 디킨슨의 생애를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는 데이먼 영(Damon Young)《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박재열《미국 여성시 연구》가 있다.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는 정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자연을 관찰하면서 시를 쓴 디킨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녀에게 정원은 ‘안식처’이자 ‘천국’과 같은 곳이다. 《미국 여성시 연구》는 디킨슨을 포함한 6명의 여성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다른 시 선집 해설에서 볼 수 없는 디킨슨의 가족 관계—친오빠의 아내인 올케 수전(Susan)과의 관계이 언급되어 있고, 그녀가 친하게 지내던 남성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올케에 향한 레즈비언(lesbian)을 암시하는 듯한 디킨슨의 편지글은 그동안 ‘무성애적(asexuality) 처녀’로만 알려진 세간의 평가를 뒤집는 자료이다. 저자는 디킨슨이 쓴 편지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끝내 숨기려고 했던 그녀의 내면을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시로 구현되었는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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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3-2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cyrus 2019-03-22 17:48   좋아요 1 | URL
지만지 번역본에 원문은 없지만, 민음사 번역본에 수록된 시의 수보다 많습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syo 2019-03-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받아야 된다니까 정말......

cyrus 2019-03-22 17:51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네요... ㅎㅎㅎㅎ

oren 2019-03-22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디킨슨의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을 읽었는데, 정말 하나같이 독특한 시들만 있어서 놀랐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그녀만의 세계‘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녀가 유부남이었던 목사를 사랑했고, 자신의 사랑 고백이 거절당한 이후로 평생 집에만 틀어박혀 오로지 시를 짓는데만 열정을 쏟았다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절망에 차 있었을까 싶어서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도 짠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겠더군요.

cyrus 2019-03-22 17:56   좋아요 1 | URL
디킨슨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 시를 읽으니까 그녀가 왜 ‘죽음’과 ‘불멸’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시에서 죽음에 대한 그녀의 트라우마가 느껴졌습니다.

2019-05-31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0:21   좋아요 0 | URL
처음에 디킨슨의 시를 읽었을 땐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생각날 때마다 시를 읽으니까 그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디킨슨의 진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디킨슨이 좋아했던 장소가 정원입니다. 그래서 정원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요. 세밀한 관찰력이 없으면 쓸 수 없는 시들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327)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 주연의 영화 <콜레트(Colette)>가 개봉된다. <콜레트>는 프랑스의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콜레트 역을 맡았다.

    

 

 

 

 

 

 

 

 

 

 

 

 

 

 

* [품절]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천진난만한 탕녀(문학동네, 2000)

    

    

몇 주 전에 영화 개봉 소식을 확인한 이후부터 오랜만에 콜레트의 소설 천진난만한 탕녀(L’ingenue libertine)(약칭 탕녀’)를 펼쳤다. 3년 전(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군…‥)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탕녀1909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초기 작품이다. 1904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Minne)과 이듬해에 나온 후속작 민의 방황(Les égarements de Minne)을 합친 작품이다. 민은 탕녀로 묘사되는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탕녀는 콜레트의 첫 번째 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Henry Gauthier-Villars)와 이혼하고 난 뒤에 나온 작품이다. 콜레트는 작가 겸 음악 평론가로 활동한 빌라르의 필명 윌리(Willy)를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 ‘윌리라는 필명으로 나온 작품이 바로 클로딘 시리즈(Claudine stories)이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총 네 편의 소설이 발표되었으며 클로딘이라는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클로딘 시리즈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콜레트의 글쓰기를 의심하는 여론이 있었다. 고다르가 소설의 절반을 썼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다르가 콜레트의 글쓰기에 지나치게 간섭했던 것은 사실이다. 콜레트는 자신의 창작욕마저 지배하려는 남편의 태도에 못마땅했다. 게다가 작가로서의 명성을 앞세워 다른 여성들을 만나고 다니는 남편의 바람기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콜레트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다. 고다르와의 이혼 후 콜레트는 두 번이나 결혼했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번째 남편의 의붓아들과도 연애했다. 배우로 활동했을 땐 귀족의 딸과 4년간 동거를 했다. 어느 책에서는 콜레트를 레즈비언이라고 언급했던데, 그녀의 성 정체성은 바이섹슈얼(bisexual)에 더 가깝다.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방랑하는 여인(지만지, 2013)

    

 

 

첫 번째 이혼 후에 콜레트는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뮤직홀 댄서와 팬터마임 배우로 활동한다. 1910년에 발표된 방랑하는 여인(La Vagabonde)은 이혼 후 그녀의 삶이 일부 반영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르네 네레(Renée Néré)는 뮤직홀을 전전하는 가난한 댄서이자 팬터마임 배우이다. 그녀는 바람기 있는 화가인 남편과 이혼한 후 개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이 의미하는 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면서 확인하려는 과정이다. 르네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글을 쓰기 위해 남편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선택하지만, ‘고독이라는 그림자가 수시로 그녀를 괴롭힌다.

 

 

 내 나이의 여자에게 고독은 자유를 만끽하게 하는 한 잔의 포도주였다가 어떤 때는 머리를 벽에다 짓찧게 하는 쓰디쓴 독주가 되기도 한다.

 

(콜레트, 이지순 옮김, 방랑하는 여인, 전자책 18~19)

 

 

콜레트의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는 거울’, ‘동물그리고 정원이다. 콜레트의 소설에서 거울은 여성 인물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관능적인 여성성을 확인해주는 남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콜레트의 여성 인물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꾸밈없는 본능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암고양이(창비, 2013)

 

 

콜레트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고양이. 실제로 콜레트는 고양이로 분장하여 공연한 적이 있다.[1] 그녀가 쓴 소설에 개와 고양이를 언급한 내용이 무조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의 행동을 고양이 특유의 행동에 빗대어 묘사하기도 한다. 1933년 작 암고양이(La Chatte)는 암컷 고양이에 푹 빠진 남자와 그와 고양이의 관계에 질투하는 그의 아내의 일상과 심리 상태를 그린 소설이다.

    

 

 

 

 

 

 

 

 

 

 

 

 

 

 

* 데이먼 영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이론과 실천, 2016)

    

 

     

콜레트의 어머니 시도니(Sidonie)는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의 애칭은 시도(Sido)였고, 콜레트는 1929년에 유년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반영한 자전적인 소설 시도를 발표했다. 이 소설에 꽃을 애지중지하게 관리하는 시도의 모습이 나온다. 콜레트의 표현에 따르면 시도는 꽃에 대한 욕심이 무척 강했다. 어린 콜레트가 정원에 있는 화분의 흙을 손으로 파냈을 때, 시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덟 살짜리 살인자라고 말하면서 혼을 냈다고 한다.[2] 꽃에 대한 콜레트의 애착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콜레트에게 정원은 펄펄 뛰어오르는 감정을 잠재울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자 예민한 그녀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놀이터이다.

    

 

 

 

 

 

 

 

 

 

 

 

 

 

 

* 리디 살베르 일곱 명의 여자(뮤진트리, 2015)

* [절판] 조은섭 포도주, 해시시 그리고 섹스(밝은세상, 2003)

    

 

 

영화를 보기 전에 콜레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고 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의 파격적인 행보들(남편의 의붓아들과의 연애, 동성애, 반나체로 춤을 추거나 공연하는 콜레트의 모습)이 과연 영화에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관객들의 정서상 쾌락을 추구하는 콜레트의 자유연애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소재이다. 콜레트의 파란만장한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책으로 프랑스 작가 리디 살베르(Lydie Salvayre)일곱 명의 여자조은섭포도주, 해시시 그리고 섹스 등이 있다. 조은섭의 책은 절판된 상태라 유일하게 남아있는 콜레트에 관한 책은 일곱 명의 여자뿐이다. 콜레트를 조금이나마 언급한 책이 더 있는지 알아보고, 발견하는 대로 새로운 글을 쓸 예정이다.

 

 

 

    

 

 

[1] 사진 설명: 카바레에서 사랑에 빠진 고양이를 연기하는 콜레트(1912년). 로베르 드 라로슈, 질 르 파프 공저의 고양이85쪽에 왼쪽 사진이 실려 있다.

 

 

 

 

 

 

 

 

 

 

 

 

 

 

 

 

 

* [절판] 로베르 드 라로슈, 질 르 파프 고양이(창해, 2000)

 

 

 

 

[2] 데이먼 영, 서정아 옮김,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131~132, 이론과 실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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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 호밀밭의 파수꾼 동서문화사 월드북 9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이가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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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8. 25세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Mark David Chapman)은 아파트에 들어가던 존 레넌(John Lennon)을 향해 다섯 발의 총을 쐈다. 레넌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채프먼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도주하지 않았다. 그는 인도에 앉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채프먼은 모든 사람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만들기 위해 레넌을 암살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한동안 호밀밭의 파수꾼암살범이 좋아하는 위험한 책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독자에게 악영향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호밀밭의 파수꾼번역본 중에 독자가 피해야 할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동서문화사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이 번역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백년의 고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번역본의 정가는 12,000. 싼 가격으로 두 편의 고전을 읽을 수 있다. 책값이 싸서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이 번역본에 속으면 안 된다.

 

동서문화사는 기존에 있는 다른 출판사 번역본들의 문장을 도용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회사이다. 아예 문장을 통째로 베끼거나 여러 종의 번역본 문장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인쇄한다. 그리고 번역본의 역자 이름은 이미 고인이 된 역자, 또는 이력이 불분명한 인물(전문 번역가로 보기 어려운 사람)이다. 백 년의 고독 / 호밀밭의 파수꾼의 역자는 이가형 씨다. 이가형 씨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이다.

 

백 년의 고독 / 호밀밭의 파수꾼서지 정보에 따르면 11쇄가 나온 연도는 19791010이다. 그러나 1979년에 동서문화사가 출간했다는 호밀밭의 파수꾼국립중앙도서관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책이다. 동서문화사가 책에 기재한 초판 발행 연도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1979년에 나온 호밀밭의 파수꾼번역본이 딱 한 권이 있는데, 그 책을 만든 출판사는 동서문화사가 아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동서문화사의 호밀밭의 파수꾼문예출판사 번역본을 표절한 책이다. 더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겠다. 동서문화사의 악행은 어디 한두 번인가. ‘문화’, ‘출판사라는 이름이 아깝다.

 

 

 

 

 

 

1

 

* 샐린저가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To my mother)가 빠져 있다.

 

 

    

 

2

 

 

   

 * 문예출판사, 28

 

 

 

 

 

 * 동서문화사, 393

    

 

 

 

 

     

 

3

 

 

* 원문

 

  I didnt answer him right away. Suspense is good for some bastards like Stradlater.

      

문예출판사, 47

 

 나는 당장 대답하진 않았다. 스트라드레이터 같은 개새끼들에겐 어정쩡한 미결의 상태가 약이 되기 때문이다.

      

동서문화사, 406

 

 나는 당장 대답하진 않았다. 스트라드레이터 이 뻔뻔한 녀석들에겐 어정쩡한 상태가 약이 되기 때문이다.

 

 

 

 

 

 

4

 

 

* 원문

 

 All of a suddenfor no good reason, really, except that I was sort of in the mood for horsing aroundI felt like jumping off the washbowl and getting old Stradlater in a half nelson. That’s a wrestling hold, in case you don’t know, where you get the other guy around the neck and choke him to death, if you feel like it. So I did it. I landed on him like a goddam panther.

  “Cut it out, Holden, for Chrissake!” Stradlater said. He didn’t feel like horsing around. He was shaving and all. “Wuddaya wanna make me docut my goddam head off?”

  I didn’t let go, though. I had a pretty good half nelson on him. “Liberate yourself from my viselike grip.” I said.

      

문예출판사, 50

 

 갑자기 그저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세면대에서 뛰어내려 스트라드레이터 자식을 하프 넬슨 수법으로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하프 넬슨이 뭐냐 하면, 상대방의 목을 뒤에서 졸라 원하면 죽일 수도 있는 레슬링의 기술이었다. 나는 표범처럼 그를 덮쳤다.

  “제발 그만둬!” 하고 스트라드레이터가 소치렸다. 그는 장난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면도를 하는 도중이었으니까. “어쩌려고 이래? 내 모가지라도 베려는 거야?”

  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꽤 그럴듯한 하프 넬슨 기술을 걸고 있었다. “풀어보시지. 바이스같이 억센 내 팔을…‥하고 내가 말했다.

      

동서문화사, 408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세면대에서 뛰어내려 스트라드레이터 자식의 목을 하프 넬슨 수법으로 졸라 버리고 싶었다. 하프 넬슨이 뭐냐 하면, 상대의 목을 뒤에서 졸라, 원하면 그를 죽일 수도 있는 레슬링 기술이다. 나는 표범처럼 그를 덮쳤다.

  “제발 그만둬!” 스트라드레이터가 소리쳤다. 그는 장난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면도를 하는 도중이었으니까.

  “어쩌려고 이래? 내 모가지라도 베려는 거야?”

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꽤 그럴듯한 하프 넬슨 기술을 걸고 있었다. “풀어 보시지. 바이스같이 억센 내 팔을…‥내가 말했다.

 

 

 

 

 

5

 

 

* 원문

 

 My brother Allie had this left-handed fielder’s mitt. He was left-handed. The thing that was descriptive about it, though, was that he had poems written all over the fingers and the pocket and everywhere. In green ink. He wrote them on it so that he’d have something to read when he was in the field and nobody was up at bat.

     

문예출판사, 62

 

 내 동생 앨리는 왼손잡이 야수의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그앤 왼손잡이였다. 그 장갑에 대해서 무엇이 묘사할 만한가 하면, 앨리는 야구 장갑의 손가락이고 주머니이고 어디든 간에 시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녹색 잉크로 쓴 시였다. 그렇게 써놓으면 자기가 수비에 들어가서 타석에 아직 선수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읽을거리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동서문화사, 415~416

 

 내 동생 앨리는 왼손잡이 야수용(野手用) 글러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앤 왼손잡이였다. 그 글러브의 어떤 점이 묘사할 만한가 하면, 앨리는 글러브의 손가락이고 손바닥이고 어디고 간에 시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녹색 잉크로 쓴 시였다. 그렇게 써놓으면 자기가 수비에 들어가서 타석에 선수가 들어오길 기다릴 때 읽을거리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동서문화사 번역본의 손바닥오역이다. 원문에 손바닥을 뜻하는 단어가 없다. 도용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주머니(문예출판사)대신에 손바닥을 썼을 수도 있다. 동서문화사는 단어 하나만 바꾼다고 해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6

 

 

 * 문예출판사, 83

    

 

 

 

 

 * 동서문화사, 430

 

 

 

 

 

 

 

 

7

         

 

* 문예출판사, 256~257

 

 “‘만나면붙잡는다면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 하고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금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

  피비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또 아빠는 오빠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죽여도 좋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 동서문화사, 545 

    

      

말야는 어법상 틀린 표현이므로, ‘말이야라고 써야 한다. 그런데 동서문화사는 문예출판사 번역본에 있는 오역과 잘못 쓴 표현까지 그대로 베꼈다.

 

 

 

 

 

 

 

8

 

 

* 원문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the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

      

문예출판사, 277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서문화사, 560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같은 이유를 위해 비겁한 삶을 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동서문화사 560쪽에 있는 문장은 이유은 민음사 판본에, ‘비겁한은 문예출판사 판본에 가져와 짜깁기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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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3-0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예출판사본이 있니?
알라딘에선 없는데? 내가 못 찾나...
번역자 이름이 다르지?
그렇다면 표절이 맞기는 한데 우째 이런 일이...

cyrus 2019-03-06 17:35   좋아요 0 | URL
문예출판사 판본의 역자는 이덕형 씨에요. 문예출판사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이미 알고 있었다면 동서문화사 번역본이 판매되지 않았을 거예요.

레삭매냐 2019-03-05 1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절대 사지 않으려고 기피하는 출판사
가 몇 군데 있는데...

차라리 읽지 않고 말지 - 라고 말이죠.

그나저나 우리 싸이러스 브로의 열정
은 정말 대단합니다 쵝오 !!!

cyrus 2019-03-06 17:36   좋아요 0 | URL
알라딘의 근성(芹誠)가이라고 불려주세요... ㅎㅎㅎㅎㅎㅎ

syo 2019-03-05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정말 국가와 사회가 함께 지켜나가야 할 인간(기계??)이시옵니다......

cyrus 2019-03-06 17:39   좋아요 0 | URL
제가 기계라면 닉네임을 ‘사이보그’라고 바꿔야겠어요... ㅎㅎㅎㅎ

오후즈음 2019-03-05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한참을 읽고갑니다. 멋진 사이러스님.

cyrus 2019-03-06 17:39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chaeg 2019-03-0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

cyrus 2019-03-06 17:40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이하라 2019-03-0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이신 시간과 정성이 매리뷰 마다 가득히 느껴지네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

cyrus 2019-03-06 17:43   좋아요 0 | URL
제가 잘 할 수 있는 건 있는 정성을 다하여 글을 쓰는 것입니다. ^^

카스피 2019-03-0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70년대에 나온 동서추리문고(영어>일어>한국어 번역으로 악명)는 한때 추리소설 수집가들의 성서와도 같았던 떄가 있었습니다.하지만 2천년도에 재간되면서 70년대 번역을 그대로 가져와 많은 비난을 받았죠.그래서 싸이러스님 글대로 동서출판사가 제대로 하지 않을거란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것은 동서출판사가 몽땅 표절을 했을까 하는 점인데 만약 그렇다면 해당 출판사가 동서를 고소하지 않은것이 무척 궁금하네요.

cyrus 2019-03-06 18:09   좋아요 0 | URL
동서문화사에 나온 모든 번역본이 100% 표절로 의심되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확인된, 표절이 분명한 동서문화사 번역본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포함하면 총 3권입니다.

제가 포스팅한 글이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리키 <어머니 / 밑바닥 / 첼카쉬>
http://blog.aladin.co.kr/haesung/8284417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회상>
http://blog.aladin.co.kr/haesung/9402985

<셜록 홈즈의 회상>은 정태원 씨의 번역본을 표절했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번역한 <대망> 시리즈는 저작권을 어긴 책입니다. 정식으로 일본 출판사와 저작권을 맺은 솔출판사의 번역본이 있는데도 동서문화사는 과거에 자신들이 펴냈던 해적판 번역본을 발행했던 거죠. 그래서 동서문화사와 솔출판사 간의 법적 공방이 10년 정도 이어졌고, 최근에 판결이 났습니다. <대망>은 저작권을 무시한 책으로 확정이 되었고,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 씨는 1심에서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0597100

문예출판사 측은 동서문화사가 표절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예출판사 측에 동서문화사의 만행을 알리려고 합니다.

카스피 2019-03-09 13:41   좋아요 0 | URL
뭐 다른 책은 제가 잘 모르겠고 일단 셜록 홈즈의 경우는 약간 의문이 드네요.동서의 셜록홈즈는 70년대 후반에서 동서추리문고로 나온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은 일본에서 번역된 셜록홈즈를 번역한 이른바 중역본이죠.2천녀대 초반에 나온 동서DMB가 추리애독자에게 욕을 먹은것은 70년대 동서추리문고를 고대로 재간했기 떄문이죠.이건 아마도 베른조약 때문일겁니다.그러니 역시 2천년대 초반에 나온 시간과 공간사이 정태원씨 번역본을 표절했다는 것은 좀 아닐까 싶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03-0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지고 있는 책이네요. 두 소설 다 어쩌다보니 민음사, 동서문화사 것 두 개씩 가지고 있네요. ㅎㅎ 동서문화사 다른 책들도 번역자가 불분명하고 번역 상태도 아리송한 책이 제법 있어요. 소돔120일도 일본어 잘 할 법한 종군기자 할아버지(...살아는 계실까)가 번역자인 것 보면 아마 프랑스어 책-일본어판-중역 이렇게 책이 나온 듯 하더라구요.

cyrus 2019-03-11 12:03   좋아요 1 | URL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사드의 <악덕의 번영> 역자 역시 김문운입니다. 어떤 블로거는 김문운은 실제 인물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왜냐하면 김문운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동서문화사의 책들을 보면 역자 약력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나왔거든요. 아무튼 동서문화사, 믿을 만한 출판사가 아니에요. ^^;;

페크pek0501 2019-03-1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번역은 동서문화사가 최고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저는 님의 답글로 그렇게 읽은 것 같은데요...

cyrus 2019-03-18 12:03   좋아요 0 | URL
‘최고’라고 언급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좋았다’고 평가한 책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였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의 이력이 의심이 들어요. 가독성은 좋은데, 번역자와 출판사를 믿지 못하는 아이러니... ^^;;

2019-11-0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11-01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박사가 그냥 시루스박사가 아닙니다 ㅎㅎ

cyrus 2019-11-01 17:46   좋아요 1 | URL
오랜만입니다. 카알벨루치님. 지난달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제가 알라딘 서재에 자주 드나들지 못했어요. 늘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문학비평의 원리
I. A. 리처즈 지음, 이선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시를 썼다고 치자.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시골의 정경을 소재로 시를 쓴다. 완성된 시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시를 읽고 잊고 있었던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시에 묘사된 고향의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쓴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가 시골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시에 진술한 시골 정경은 도시 밖에 나가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경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아무리 좋아도 시인의 경험과 거리가 먼 시적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비평가 I. A. 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라면 내 시에 후한 점수를 줬을 것이다. 리처즈는 독자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 비평가다. 그는 시를 ‘정서적 언어’로 만들어진 텍스트로 봤다. 독자는 시의 정서적 언어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독자는 시적 언어로 진술된 시인의 개인적 경험에 공감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경험이 사실인지 허위인지 판단하는 건 중요치 않다. 리처즈는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효과를 기준으로 하여 그 작품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처즈는 1920년대에 영국의 신비평(new criticism)을 제시한 인물이다. 1924년에 발표한 《문학비평의 원리(Th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는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비평 수준의 위치로 한 단계 끌어올린 책이다. 리처즈가 제시한 비평가의 역할은 문학작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문학작품의 가치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긍정적 정서를 뜻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공감하는 독자의 반응 등이 ‘정서적 언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이다. 이러한 효과를 유도하는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전달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리처즈가 《문학비평의 원리》 23장의 제사(題詞)로 인용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말은 그의 비평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말이다.

 

 

 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미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다.

 

(《문학비평의 원리》, 224쪽)

 

 

흄의 말속에 있는 단어인 ‘사물’을 ‘문학작품’으로 바꿔서 설명한다면,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가치는 작품 텍스트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작품 텍스트를 읽으면서 반응하는 독자의 마음속에 있다.

 

《문학비평의 원리》에 부록 두 편이 있는데, 그 중 한 편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서 리처즈는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이 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들은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독자가 『황무지』를 신비주의 사상과 연관 지어서 읽는다거나 분석한다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리처즈는 엘리엇이 『황무지』를 쓰면서 사용한 인유(引喩)를 주목한다. 인유는 유명한 고전의 내용이나 널리 알려진 어떤 다른 개념을 끌어다가 비유하는 표현 방법이다. 리처즈에 따르면 『황무지』에 나오는 상징들은 단순히 초월적인 개념 혹은 대상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 경험’을 뜻하는 인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지식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인유를 사용해 드러나고자 하는 『황무지』의 의미는 텍스트 자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시를 분석하는 리처즈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리처즈는 시를 ‘감정의 표현’, ‘정서적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봤지만, 반대로 엘리엇은 시를 ‘지식의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리처즈의 신비평주의를 본다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정서적 언어’로 진술된 시를 무조건 가치 있는 작품으로 보는 시선,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문학작품의 분석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은 1920년대 이후로 나온 여러 가지 비평주의들과 비교하면 낡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치’라는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려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또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리처즈가 제시한 ‘훌륭한 비평가의 자질’ 중 하나인 ‘가치를 건전하게 판단하는 일’은 한계가 있는 작업이다.

 

언어로 진술된 작가의 경험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과정을 간과하는 리처즈의 비평 관점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는 몇 년 전에 불거진 ‘문단 내 미투 운동’ 사례와 관련 지어 설명할 수 있다. 남성 작가가 여권 신장을 강조하는 시나 소설을 썼다고 치자. 어떤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고 나서 작가가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에 가려진 여성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한 페미니스트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 남성 작가가 평소에 여성을 차별했다는 사실, 여성 문인을 성추행한 이력이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 작가의 모습과 그가 작품 속 언어를 통해 진술한 페미니즘 관점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작품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에 중점을 둬서 볼 것이다. 이러면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철저히 분리한 채 문학작품을 평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분리해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게 맞는가? 도덕적인 문제로 비난받은 작가가 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글이 독자에게 좋은 가치관을 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가의 경험과 무관한 글에 감동하는 독자의 반응은 결국 작가의 허위에 속아 넘어간 ‘가짜 감동’에 불과하다. 진실하지 않은 글을 쓴 작가는 독자를 기만한 것이다. 이런 작가의 글이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문학적으로 가치 있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비평 관점을 떠나서 자신과 독자들을 속이는 작가의 글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옹호할 수 없다. 독자는 자신의 삶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면서 재미와 감동을 끌어올리는 ‘이야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한다. 그러나 거짓으로 감동을 유발하면서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 Trivia

 

* 92쪽 [역주]

  미국의 물리학자인 A. A. 마이켈슨과 E. W. 모울리는 공동의 실험으로 그 당시까지 믿어 왔던 에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낳는 동기를 만들었다.

 

→ 역자는 옛 외국어 표기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몰리(Morley)를 ‘모울리’로, 아인슈타인(Einstein)을 ‘아인쉬타인’으로 썼다. 참고로 번역본이 출간된 연도는 2005년이다. 아마도 역자는 ‘에테르(ether: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상의 물질)라는 단어 자체를 몰라서 그냥 단순하게 ‘에텔’로 표기했던 것 같다.

 

 

 

* 260쪽 [역주]

  희랍 신화의 인유. 제우스는 백조의 모습으로 레다에게 접근하여 그 여성에게서 헬레네와 포류 듀케스를 낳았다.

 

→ 포유류 듀케스? 이 해괴한 이름을 정확하게 쓰면 ‘폴리데우케스(Polydeuces)이다.

 

 

 

* 287쪽

괴스타 베를링 이야기

 

→ 스웨덴의 소설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작품명이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Gösta Berlings saga)로 고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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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04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치 있는 문학이란 정말 주관적인
잣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관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나한테 재밌는 책이 저
는 좋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cyrus 2019-03-04 17:2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결국 애서가가 즐겨 읽는 책은 본인이 재미있다고 느껴지거나 관심 있는 책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책’을 절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책’과 상대방이 생각하는(원하는) ‘재미있는 책’은 아주 다르거든요.. ^^

레삭매냐 2019-03-04 17:28   좋아요 0 | URL
가끔 블로그에 책 추천해 달라는
덧글이 달리는 데 정말 난감합니다.

보는 관점이 그리고 좋아하는 킬링
포인트가 다 다른데, 어찌 추천을
해달라고 하시는지...

거의 100% 욕 먹을 확률이 높습니다.
캐공감하는 바입니다.

cyrus 2019-03-04 17:34   좋아요 0 | URL
난감한 질문이 들어오면, 저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이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해요.

상대방이 제게 특정 주제와 관련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답변해줄 수 있어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책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

페크pek0501 2019-03-04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경우, 난감하군요...

cyrus 2019-03-05 12:20   좋아요 0 | URL
삶과 문학관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 망설이게 됩니다. ‘작가는 비난할 수 있어도 그 작가가 쓴 작품까지 비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
 

 

 

목사의 딸들(Daughters of the Vicar)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가 쓴 초기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초고였을 때 제목은 두 결혼(Two Marriages)이었다. 1911년에 써졌다가 1914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패니와 애니(창비, 2013)

* [구판 절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목사의 딸들(창비, 2001)

 

    

 

초고 제목은 소설의 핵심 인물인 어니스트 린들리 목사의 두 딸 메리루이자의 결혼을 의미한다. 린들리는 자신이 상류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탄광촌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는 가난한 목사로 살아간다. 메리는 기울어진 가세를 살리기 위해 매시라는 젊은 목사와 결혼한다. 매시는 성실하게 목회 활동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열두 살 소년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체격이 상당히 왜소하다. 매시는 자식을 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이가 얼른 태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메리의 삶은 가정에서 남편을 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내/어머니 역할을 하는 게 전부다. 루이자는 그런 언니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루이자는 메리와 다르게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다. 그녀는 언니의 결혼에 손톱만큼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자신은 계급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다짐한다. 루이자가 사랑하는 알프레드 듀랜트는 하류 계급에 속한 광부. 막둥이로 자란 알프레드는 어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았지만, 광부가 되려고 하자 어머니와의 관계가 냉랭해진다. 어머니는 신사(남자)답지 못한 알프레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남성성을 찾기 위해 해군에 복무하지만, 해군 특유의 엄격한 규율과 권력적 상하 관계에 적응하지 못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 알프레드는 자신이 남자답지못한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수록 자존감은 계속 떨어지고, 여성을 멀리하게 된다.

 

어느 날 알프레드는 부사관과 함께 술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여성 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구애하는 이탈리아 남성을 보게 된다. 알프레드는 아주 쉽게 여성에게 다가가는 이탈리아 남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성에게 말조차 걸어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개인과 무관한 본능적인 힘에 끌려 몸이 여자에게 다가가는, 우쭐거리며 편하게 사랑하는 이딸리아인들을 기묘한 부러움으로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남자였고 자신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마치 문둥이 같다고 느끼며 앉아 있었다(He sat feeling short, feeling like a leper). 그리고 그는 자신과 어떤 여자와의 성적인 교접 장면을 상상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런 몽상에 몰두한 채 걸어 다녔다.

 

 

(목사의 딸들, 《패니와 애니, 101)

 

 

알프레드는 자신의 소심한 남성성을 문둥이(leper)’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프레드의 자기비하적인 심리 상태를 문둥이로 비유한 로렌스의 표현, 그리고 ‘leper’문둥이로 번역한 백낙청의 단어 선택(차별하려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으로서의 한센인(나환자)을 비하하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백영경, 이유림, 나영, 나영정 외,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후마니타스, 2018)

 

* 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오월의봄, 2018)

 

    

 

로렌스는 여자와 섹스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동정(童貞) 알프레드를 나환자의 삶과 일치시킨다. 이때 로렌스는 한센인을 성적 권리와 무관한 비정상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로렌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와 장애인의 삶을 잘 모르는 비장애인의 문제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가는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을 정상적인 몸의 범주에 벗어난 존재로 보기 시작했고, 그들이 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출산과 관련된 재생산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했다. 특히 국가가 만든 수용시설은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1].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그들의 실질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들을 정의하게 만드는 단편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인식에 익숙한 비장애인은 수용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은 애당초 없는 것[2]으로 규정한다.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심각한 편견 중 하나는 장애인은 성적 욕구와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무성적으로 잘못 정의되기 쉽고,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무시당한다.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장애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많은 장애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거나, 대화해보거나, 실행해보거나, 실패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나영정, 어쩌면 이상한 몸, 79)

 

 

문둥이는 한센인 후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문둥이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란 말과 같은 의미로 쓰였고, 사회에 격리된 한센인들은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 목사의 딸들이 수록된 로렌스의 단편 선집이 처음 나온 해는 1991년이다. 그때는 문둥이가 한센인을 가리키는 표준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구시대적인 악어(惡語)를 쓴 백낙청의 번역도 문제지만, 이를 교정하지 않은 출판사의 편집자도 문제.

 

혹자는 필자의 지적에 책 읽는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사회적 약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거부하게 만들고, 배제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예민해져야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적 사회구조를 인지하는 예민함은 부단한 성찰과 자기반성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반응이다. 예민함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가 발전하는 데 이로운 건강한 비판이다. 세상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자극을 주어 한층 더 생각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향상한다. 나는 상대방의 진지한 예민함을 스트레스에 의한 증상으로 여기면서 걱정하는 그들이 더 걱정된다. 그들은 고민보다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예민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원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변혁의 목소리는 예민한 성찰이 함께 하지 않으면 커질 수 없다.

 

 

 

[1] 조미경, 수용시설에 감금된 성과 재생산 권리, 배틀그라운드, 후마니타스, 2018, 193~194.

      

[2] 같은 책, 각주,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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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의 책들, 제목만 외우고 있는 책중에 하나가 <목사의 딸들>인데, 이것까지 읽어셨군요! 괜히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cyrus 2019-02-26 23:55   좋아요 1 | URL
구판 <목사의 딸들>은 단편 네 편이 수록되었고요, <패니와 애니>는 <목사의 딸들> 수록작 네 편에 단편 세 편이 추가된 책입니다. 저는 이 책으로 로렌스의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요, 로렌스가 여성을 ‘결혼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한 것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읽을 때마다 찝찝하게 느껴지는 장면 몇 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렌스의 소설을 아예 읽지 말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소설에 대한 해석도 그렇고 그 책을 읽는 행위 역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니까요. 원래 로렌스의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품 하나씩하나씩 읽으면서 장점도 찾고 싶습니다. 얼른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고 싶어요. ^^

카알벨루치 2019-02-27 00:01   좋아요 1 | URL
제가 <아들과 연인>을 가지고 논문을 썼기 때문에 로렌스를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시대의 분위기나 트렌드가 지금 나타난다면 난리나겠죠 로렌스는 남근숭배주의자로도 볼 수 있으니깐요
제가 로렌스의 매력에 꽂힌 것은 그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비평이었다는 역설 ㅎㅎㅎㅎ

cyrus 2019-02-27 00:15   좋아요 2 | URL
제가 꾸준히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렌스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요. 저는 케이트 밀렛이 쓴 <성 정치학>을 통해 로렌스를 알기 시작했는데, 부정적 평이 많았어요. 페미니즘 독서 모임 중에 로렌스의 소설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의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제대로 비판을 하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하니까요. 단편적인 인용이나 설명을 근거로 로렌스의 작품을 단정하면 작품의 진면목을 못 볼 수 있어요. 카알벨루치님은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보셨으니 로렌스를 주제로 한 제 글을 보신다면 의견을 주셔도 좋습니다. 제 견해에 반박하셔도 좋습니다. 변증법적(?)으로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로렌스의 문학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

2019-02-26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7 00:16   좋아요 1 | URL
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나병’, ‘문둥병’이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저는 2010~2011년에 알라딘 블로그에 한하운 시인에 대한 글을 썼어요. 그 글에 ‘문둥이’라는 표현을 썼을 거예요. ‘한센병’, ‘한센인’의 ‘한센’은 나병을 일으키는 균을 처음으로 증명한 학자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나병’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센이 누군지, 한센병이 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

레삭매냐 2019-02-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 샘의 책은 한 개도 읽어 본 게 없네요.

언제고 읽고 말리라 !

<채털레이 부인>부터 읽어야 하나요.

cyrus 2019-03-04 13:48   좋아요 0 | URL
저는 발표 연도순으로 읽으려고 해요. <채털리 부인>은 로렌스 후기 작품에 속하고요, 초기 장편소설은 <아들과 연인>입니다. ^^

2019-02-27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04 13:59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페미니즘 독서 모임의 주제가 ‘인정과 재분배’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잘 살려면 그들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재분배 정책이 나오지 못합니다. 일단 사회적 약자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인정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정 투쟁을 하지 않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들에 향한 ‘무시’와 ‘모욕’은 이어질 것입니다. 인정이 먼저, 재분배가 먼저냐,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정의론을 논할 때 반드시 논의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서 ‘인정 투쟁’이 많아져야 한다는 걸 느껴졌어요.

페크pek0501 2019-03-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말이든 글이든 언어에 예민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어느 쪽에선 상처를 받게 되지요. 편한 것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저 역시 잊으면 안 되는 점을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3-04 14:03   좋아요 1 | URL
저도 종종 글을 쓰다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표현을 쓸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뭔가 생각나면 바로 글을 썼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경솔한 표현이 나올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난 뒤에 글을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