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럼번 달섬 세계고전 8
제시 레드먼 포셋 지음, 박재영 옮김 / 달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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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종 문제’이다. 한국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배워 왔고, 이것을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한국인이 외국에 가면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인종 차별을 당한다. 우리나라가 몇 년 전부터 다문화 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인종 차별이 심각하지 않다고 낙관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학교에서 차별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한다. 피부색으로 인한 (동급생과 교사의) 놀림, 타민족 및 문화에 대한 교사의 편견 등이 그 원인이다. 한국인도 아시아계 유색인인데 우리나라에 이주해온 다른 아시아계 유색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한다. 예를 들면 3D 업종에서 근무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건강 위험성이 큰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나라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임금 체불과 인권 유린 등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다. 한국인의 유색인 차별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

 

유색인을 차별하는 우리 사회에서 백인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非)백인에게 인종 차별적 시선을 보낸다. 특히 흑인이나 동남아 출신 사람들에게 그렇다. 이들이 지하철을 타면 옆자리에 앉는 것조차 꺼린다. 반면 백인에게는 유독 친절하게 대한다. 우리나라를 여행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 유럽 백인 여성이 출연했다. 그녀는 지하철 좌석에 앉았고, 옆에 있던 할머니는 그녀에게 영어로 말 걸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흰 피부의 여성을 ‘미국 여성’인 줄 알고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유럽인 여성은 할머니에게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활동한 혼혈 연예인 또는 그들의 가족은 대부분 백인 출신이다. 백인계 혼혈인은 선망의 대상이다. 이들은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대부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영어 콤플렉스’가 있는 ‘토종’ 한국인을 오히려 주눅 들게 한다. 미국의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10대’에 포함된 한국인 최초 흑인 모델 한현민은 학창 시절에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너, 혼혈이냐?”고 놀림 섞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유럽계 백인과 아프리카계 흑인이 만나서 태어난 혼혈인은 ‘혼혈인 차별’과 ‘흑인 차별’이란 이중 차별을 겪는다. 이 혼혈인이 여성이라면, ‘여성 차별’까지 겪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보인 제시 레드먼 포셋(Jessie Redmon Fauset)의 장편소설 《플럼 번(Plum Bun)미국에서 태어난 유색인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제시 포셋은 듀보이스(W. E. B. Du Bois)[주]를 만나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듀 보이스가 만든 잡지의 편집장을 맡아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고,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 미국 뉴욕의 흑인 지구 할렘에서 유행한 흑인예술문화 부흥 운동)로 알려진 1920년대 흑인 문학의 탄생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플럼 번은 마른 자두가 발라진 구운 빵을 말한다. 플럼 번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유색인 여성 안젤라 머레이(Angela Murray)의 성격을 상징한다. 안젤라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외모의 유색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은 하얀 피부지만, 그녀의 동생 버지니아(Virginia)는 까만 피부다. 안젤라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자신의 어중간한 유색인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면서 성장한다. 그녀는 벌써 어린 나이에 ‘백인 정체성’의 장단점을 파악한다. 안젤라가 생각하는 백인 정체성의 장점은 하얀 피부색 덕분에 백인으로서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단점은 남들 앞에 백인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혼혈 유색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공개해선 안 된다. 그래서 안젤라는 뉴욕에서 생활할 때 유색인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스페인 출신 백인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가명을 쓴다. 그 당시에 유색인도 흑인과 같이 차별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 안젤라는 시장을 가다가 흑인 아버지와 동생을 만날 뻔했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아는 척하지 않는다. 이러한 안젤라의 태도는 자신을 흑인과 상종하지 않는 백인인 것처럼 철저하게 행동하기 위한 의도적인 ‘패싱(passing)이다.

 

안젤라는 행복한 삶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그녀가 원하는 ‘행복한 삶’이란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안젤라는 백인 남자와 결혼하여 풍족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녀의 욕망은 달콤하다. 《플럼 번》의 역자에 따르면 ‘플럼 번’은 안젤라의 달콤한 욕망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안젤라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녀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흑인을 경멸하는 백인이다. 안젤라는 이 백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백인 여성’으로 행동하기 위해 또다시 동생의 면전에 대고 무시(패싱)한다. 이처럼 《플럼 번》은 하얀 피부색의 순수혈통 백인을 선호하는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혼혈 유색인의 위태로운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백인’이 아닌 혼혈 유색인은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백인과 함께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등 여러 부당한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안젤라는 하얀 피부색만 믿고 백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인 척하는 자신의 패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자신이 추구한 행복한 삶은 결국 백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안젤라가 백인 행세를 하면서 바라본 거울은 깨끗하고 참된 거울이 아니라 얼룩이 묻은 더러운 거울이다. 그래서 여기에 자신을 비추더라도 그녀가 보게 되는 것은 하얀 피부가 아니라 ‘백인 정체성’이다.

 

이야기 곳곳에 그 당시에 일어날 법한 인종 차별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화가 났던 장면은 미술학교에 다니던 안젤라가 ‘아웃팅(outing, 다른 사람이 당사자 동의 없이 성소수자 또는 차별받는 특정 대상임을 밝히는 행위) 당하는 상황이다.

 

 

 

 모델 그리기 수업이 있는 오후였다. 모델이 들어왔다. 살짝 예쁘면서 심술궂은―다소 음산하고 비열한 기질이 넘치는―얼굴에 키가 작고 늘씬한 편에 속하는 젊은 여자였다. 모델은 안젤라와 시선이 맞닿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집요하면서 회의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찍이 안젤라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에스더 배일리스였다.

  에스더가 표독스럽게 웃었다. “저기 유대인 여자 옆에, 안젤라 머레이 아닌가요?”

  쉴즈(미술학교 강사-cyrus 주)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는 유색인이에요. 비록 그녀가 말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알아요. 지금 받는 것보다 열 배를 준다면 모를까, 저 애를 위해 포즈를 취하지는 않겠어요. 네가 무슨 백인 숙녀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 앉아서 나를 그려!

  어이없고 당혹스러웠던 쉴즈 씨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안젤라가 정말 유색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매이블. 생긴 것도 그렇고 행동하는 것도 딱 백인 숙녀거든. 글쎄, 안젤라가 유색인일 리가 없어. 내가 유색인 여자를 몰라볼 것 같아?”

쉴즈 씨에게는 그것이 민감하면서도 수치스러운 문제 같았다.

  “유색인이었다면, 나에게 말을 했어야지.”

쉴즈 씨가 옹색하게 말을 불쑥 뱉었다.

  “하지만 머레이 양, 당신이 유색인이라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지.”

안젤라는 친숙한 연극의 한 장면을 리허설하는 것 같았다.

  “유색인요! 당연히 내가 유색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죠. 왜 말해야 하죠?”

 

 

(77~79쪽, 밑줄 친 문장은 글쓴이가 강조하기 위해 한 것임)

 

 

 

에스더 베일리스는 안젤라와 같은 학교에 다닌 백인 여성이다. 학생 시절 에스더는 안젤라를 무시한 백인 학생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안젤라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그녀가 유색인이라고 공개해버린다. 이 장면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독자가 과연 있을까?

 

혹자는 이 소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흑인이 오래전부터 차별받으면서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인을 파렴치한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플럼 번》은 단순히 ‘백인 대 흑인(유색인)’으로 나누어지는 이분법적 인종 구분에 사로잡힌 사회 문제만 비판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장면이라 독자들이 지나칠 수 있는데, 소설 후반부에 유색인이 가난한 백인을 무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젤라는 파리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았던 옛 집을 둘러본다. 그 집에 유색인 여자가 살고 있다. 그녀는 집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었고, 유색인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했으나 유색인 여자는 “가난뱅이 백인 쓰레기와는 볼 일이 없어”라고 투덜거린다.

 

(387~388쪽, 밑줄 친 문장은 글쓴이가 강조하기 위해 한 것임)

 

 

 

인용한 문장의 원문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백인 쓰레기’의 원문은 ‘White Trash(화이트 트래쉬)일 가능성이 있다. 화이트 트래쉬는 미국의 북부 백인들은 자신들보다 가난한 남부 백인을 낮춰 부를 때 쓰는 속어다. 백인 중심 사회에 차별받는 유색인 여자가 자신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백인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장면은 흑인과 유색인은 ‘항상 차별받는 피해자 또는 사회적 약자’라고 고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정체성 문제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가끔 인종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언더도그마(underdogma)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언더도그마는 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류이며 맹목적으로 약자는 착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이다. 흑인과 유색인을 사회적 약자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만 보게 되면, 흑인/유색인보다 못사는 백인이나 또 다른 흑인/유색인이 차별받는 상황을 외면하게 된다. 일상적인 차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따라 ‘나’라는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차별받는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때로는 누군가를 차별하는 가해자도 될 수 있다. 《플럼 번》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중산층 중심주의가 어떻게 혐오를 작동시키며 한 인간의 내면을 분할시키는지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소설이다.

 

 

 

 

 

[주] 필자가 쓴 듀보이스의 저서 《니그로》(삼천리, 2013) 서평에 듀보이스의 업적을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haesung/10098157

 

 

※ Trivia

 

 

* “으응, 내가 하께요.” (41쪽)

 

→ “내가 할게요.”의 오식.

 

 

 

* “행복을 거의 잡았었는데, 앙젤, 혹시 브라우닝의 <로마 캄파냐 평온의 두 사람> 읽어 봤어?” (153쪽)

 

→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 『로마 캄파냐 평원의 두 사람』의 오식.

 

 

 

* “끝까지 사는 거야.” 혹독한 운명이 참으로 명랑한 삶, 그 속에서 부닥치는 힘든 일들을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인종, 흑인들을 생각했다. (331쪽)

 

→ ‘어머니 아버지’라고 고쳐 써야 한다.

 

 

*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플럼번』과 같은 시기에 출간된 넬라 라슨(Nella Larsen)의 『패싱(Passing)』이라는 소설일 것이다. (작품 해설, 412쪽)

 

→ 『플럼번』은 1928년에, 『패싱』은 1929년에 발표되었다. 플럼번』과 같은 시기에 나온 넬라 라슨의 소설은 『퀵샌드(Quicksan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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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0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2 11:59   좋아요 0 | URL
네,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접근할 때 ‘사회적 약자=차별 및 불평등 피해자’라는 공식에 끼워 맞추면 안 됩니다. 역차별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현재 차별과 불평등 문제는 과거에 비해 복잡해요.

2020-10-14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년 충남 당진의 한 제철소에 설치된 섭씨 1,600도가 넘는 용광로 속에 29살 청년이 추락하여 사망했다. 추락 방지 장치 같은 기본적인 안전장치가 설치되었어도 청년 노동자는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청년 노동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도한 기사에 ‘제페토’라는 이름의 누리꾼이 조시(弔詩) 형식으로 된 댓글을 남겼다. 그 댓글이 바로 『그 쇳물 쓰지 마라』다.

 

 

 

 

 

 

 

 

 

 

 

 

 

 

 

 

 

 

* 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수오서재, 2016)

 

 

 

 

 

광염(光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냐.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전문, 25쪽)

 

 

 

 

이 시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누리꾼들은 청년 노동자를 추모하는 의미로 시를 공유했다. 그러나 제페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용광로는 여전히 뜨겁다.

 

 

 

 

 

 

 

 

 

 

 

 

 

 

 

 

 

 

 

*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돌베개, 2019)

 

 

 

하루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많은 노동자를 만난다. 그리고 우리가 늘 보는 일상용품이나 건물 속에도 노동자들이 있다. 일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흔적,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뼈와 피와 살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노동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만든 일상용품 속에 그들의 ‘피, 땀, 눈물’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이 노동자들의 숭고한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말은 기업의 이윤을 위해 쉬지도 않고 일하는, ‘살아있는’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 대다수는 힘든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인텔리에 속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노동은 이상적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미화하는 말은 현재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노동을 미화하는 인텔리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에 침묵한다. 기업은 노동자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덜 흘리면서 일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드는 일에 소극적으로 나선다. 이러면 노동자들이 주로 투입되는 작업장의 개선은 더디고, 그들의 노동은 위험한 상태로 진행하게 된다.

 

 

 

 

 

 

 

 

 

 

 

 

 

 

 

 

 

 

 

 

* [e-Book] 하야마 요시키 《단편을 맛보다, 하야마 요시키 편》 (책보요여, 2018)

* 하라 겐이치 《하야마 요시키로의 여행》 (어드북스, 2010)

 

 

 

 

노동자의 시선으로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바라보고 묘사한 작가가 있다. 그는 바로 하야마 요시키(葉山嘉樹, 1894~1945)다. 그의 문학을 ‘일본의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야마는 일본의 명문대인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화물선 수습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한다. 그 후 시멘트 공장에 일하게 되는데, 그 공장에서 노동자가 화상을 입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 일을 계기로 하야마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했으나 해고당하는 바람에 노동조합 결성이 무산된다. 그러나 하야마는 노동조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19년 이후 일본에 확산한 노동조합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인정받는다.

 

하야마의 소설은 ‘노동자’로서 살았던 작가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하야마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단편소설 『시멘트 통 속의 편지』‘알지 못하는 노동자의 죽음의 흔적’을 처음으로 언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댐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는 일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통 속에 들어있는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한다. 나무 상자 속에 누군가가 입었던 낡고 헤진 작업복과 편지가 들어 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저는 N 시멘트 회사의 시멘트 자루를 만드는 여공입니다. 재 애인은 분쇄기에 돌을 넣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0월 7일 아침, 커다란 돌을 넣다가, 그 돌과 함께 분쇄기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동료들이 구해 주려고 했지만, 재 애인은 물속에 잠기듯 돌 더미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돌과 애인의 몸은 함께 부서져 붉은 조각돌이 되어 컨테이너 벨트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벨트를 따라 분쇄 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속에서 강철 탄환과 같이, 잘게 잘게, 저주와도 같은 격한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런 다음 불구덩이로 들어가 훌륭한 시멘트가 되었습니다.

 

뼈도, 살도, 영혼도, 완전히 가루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 날, 이 편지를 써서 이 통 속에 살짝 넣어 두었습니다.

 

당신은 노동자인가요? 당신이 노동자라면, 저를 불쌍히 여겨 답장해주세요.

 

이 통 속의 시멘트는 어떤 곳에 쓰였나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곳에 쓰였나요? 당신은 미장이인가요, 건축가인가요? 저는 제 애인이 극장 복도나 커다란 저택의 담벼락이 되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제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만약 당신이 노동자라면, 이 시멘트를 그런 곳에 쓰지 마세요.

 

[중략]

 

그이는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막 26살이 된 젊디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이에게 하얀 수의를 입히는 대신, 시멘트 자루를 입히네요! 그이는 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전 가마 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중략]

 

만약 당신이 노동자라면, 제게 답장해 주세요. 그 보답으로 제 애인이 입은 작업복 조각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감싸고 있는 천이 그 조각입니다. 이 조각에는 돌가루와 그이의 땀이 배어 있습니다. 그이가 이 작업복을 입고 저를 얼마나 꼭 껴안아 주었는지 모릅니다. 부탁합니다. 이 시멘트를 쓴 날짜와 상세한 주소, 어떤 곳에 썼는지, 그리고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의 성함도, 꼭꼭 알려주세요. 당신도 부디 몸조심하세요. 안녕히.

 

 

(박소정 옮김, 『시멘트 통 속의 편지』 중에서, 11~14쪽, 밑줄은 글쓴이가 한 것임)

 

 

 

하야마는 편지에 있는 여공의 목소리로 죽으면 소모품으로 취급받는 노동자들의 처우를 고발한다. 그러면서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당신이 노동자라면, 이들을 기억해달라고. 여공의 편지는 노동자가 아닌 독자들도 노동 문제에 공감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편지의 여운을 느낀 독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 가족, 친구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죽은)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 [절판, No Image] 정태원 편역 《공포 특급 6: 일본 편》 (한뜻, 1996)

 

 

 

 

90년대에 『시멘트 통 속의 편지』가 일본 공포 문학 선집에 수록된 적이 있다. 아마도 죽은 노동자의 몸이 기계에 분쇄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내용 때문에 공포 문학으로 분류된 것 같은데, 엄연히 말하면 공포 문학으로 볼 수 없다. 『시멘트 통 속의 편지』의 장르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하야마 요시키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에서 하야마에 대판 평가가 엇갈린다. 한때 ‘좌파 작가’라는 이유로 하야마의 작품들이 외면당했고, 한편으로는 만주를 통치하려는 일본 국가 정책에 지지한 작가라고 비판받았다. 하야마는 일본의 만주 통치 정책(일본은 자신들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에 일본인들의 이민을 추진하는 ‘만주 개척단’을 만들었다)에 지지하여 자신의 외동딸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하야마는 딸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지만, 귀국하던 중 열차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하야마 요시키로의 여행》(어드북스)여행기 형식으로 된 ‘하야마 요시키 평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작가는 하야마의 흔적이 있는 장소들을 찾아가는데, 직접 하야마의 외동딸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생소한 하야마의 삶과 노동문학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이다. 《단편을 맛보다, 하야마 요시키 편》 (책보요여) 는 하야마의 단편소설 다섯 편이 수록된 선집이다. 하야마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시멘트 통 속의 편지』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단편은 『만복추상(万福追想)이다. 일본에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는 아픔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한국인인가?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만복추상』을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 Trivia

 

* 《하야마 요시키로의 여행》 155쪽 역주루쉰(魯迅)의 출생연도가 ‘1981’로 잘못 적혀 있다. 그는 1881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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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4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4 17:3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산업재해를 가볍게 여기는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안전 불감증은 고용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노동자들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레삭매냐 2019-08-1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인터넷 언론을 통해 본 청년들을
위험한 노동의 최전선에 내모는 현실
에 대한 기사를 읽어서 그런지 더 와
닿는 포스팅이었습니다.

소수의 자본가 계급을 제외하고는 거
의 모든 이들이 노동자일 텐데, 자신
의 본질 혹은 본성을 부인하는지 이해
가 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하야마 요시키라는 작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네요.

cyrus 2019-08-14 17:37   좋아요 0 | URL
‘노동’은 힘든 일을 떠올리게 하고, 좌파들이 선호하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사실 저도 그렇고 대부분 사람은 ‘노동’보다는 ‘근로’라는 말을 선호하죠. 그래서 노동자의 처우 문제를 남 일처럼 생각하기 쉬워요.

blanca 2019-08-1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로 읽은 기억이 나요. 감정을 이입하면 너무 괴로워서... 오늘 엘리베이터 사고로 또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 자꾸 미국 이야기 하는 것 안 좋아하지만 상대적으로 육체 노동을 경시하는 풍조가 유교 문화권엔 팽배한 것 같아요. 어쩌면 가장 존중받고 대우 받아야 할 직업군인데 말이에요. 시로 죽어간 익명의 청년의 영혼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기를 기원합니다.

cyrus 2019-08-15 10:5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육체노동을 경시하는 풍조에, 노동자의 건강권과 재해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겹쳐져서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구직자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노동자가 사망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죽은 노동자를 추모하는 마음보다는 저런 일은 위험하고 힘들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19세기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는 영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한 여왕의 존재감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를 ‘여왕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신사의 시대’였다.

 

 

 

 

 

 

 

 

 

 

 

 

 

 

 

 

 

 

* 설혜심, 박형지 《제국주의와 남성성》 (아카넷, 2016)

 

 

 

 

영국 제국주의를 연구한 설혜심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 사업이 영국 남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주목한다. 이 무렵 영국 신사에 부합하는 남성상은 운동으로 단련된 육체와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강인하고 엄격한 가부장적 남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 식민지로 넘어가면 태도가 확 달라진다. 영국 남성들은 본국의 여성을 ‘집 안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로 여기면서 보호하면서도 식민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대했다. 그리고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식민지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 [품절, No Image] 페터 풍케 《오스카 와일드》 (한길사, 1999)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영국 남성이 단지 ‘생물학적인 남성’이라서 남성성을 발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와 제국주의가 부여한 ‘영국 신사’와 ‘식민지 통치자’라는 일종의 역할을 수행(performance)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국 남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남성성을 긍정하면서 수행했을까? 모든 영국 남성이 남성성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남성성 역할을 거부한 남성이 있었다. 남성성을 거부한 가장 대표적인 영국 남성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이다. 그는 머리를 길렀고, 가슴에 커다란 해바라기 장식을 달고 다니는 등 세인의 주목을 이끄는 화려한 패션을 소화했다. 당시 사회의 위선을 공격하는 특유의 독설은 와일드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줬고, 그는 영국 사교계의 인사들 사이에서 재치 넘치는 셀럽(celeb)이 되었다. 기성 사회에 반하는 와일드의 행동과 복장은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양성적인 스타일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설명한 ‘캠프(camp)라는 개념에 부합한 인물이다. 캠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손택은 캠프의 다양한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총 58개의 짧은 글로 구성된 단상 형식으로 글을 썼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캠프는 엄숙한 고급문화를 거부하고, 고급문화에 반하는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캠프는 반 부르주아적이고, 반 전통적인 문화다.

 

 

 

 

 

 

 

 

 

 

 

 

 

 

 

 

 

 

 

*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오들리 부인의 비밀》 (부북스, 2019)

* 장정희 《선정소설과 여성》 (L.I.E., 2007)

*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엮음 《공포와 일탈의 상상력: 영국고딕소설》 (신아사, 2015)

 

 

 

 

그렇다면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한 문학 장르인 선정소설(sensation novel)은 캠프 성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성급하게 결론을 내는 것일 수 있으나, 나는 선정소설의 특징이 캠프 성향과 약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손택은 캠프 취향의 기원을 ‘고딕 소설(gothic novel)에서 찾는다. 고딕 소설은 비밀 통로가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을 배경으로 신비감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르이다. 프랑스에 처음 시작된 고딕 소설은 잠시 유행이 사그라졌다가 영국에서 부활했다. 고딕 소설에서 묘사되는 미스터리한 현상들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 중심주의에 싫증을 느낀 독자들은 고딕 소설을 주목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감성에 호소하고 서늘한 공포심을 유발하는 문학이 인기를 누리게 된다. 고딕 소설이 영국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고 있을 때 여기에 탄력을 받아 등장한 소설이 바로 선정소설이다. 그러나 엄격한 독자와 비평가들은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지 않는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을 ‘천박한 문학’이라고 비판했다. 영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선정소설인 《오들리 부인의 비밀》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비평가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이 철저히 외면당한 이유는 단지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은 대중의 불안과 근심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장르이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에서 묘사된 공포는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든 허구적 요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실제로 느끼는 공포(김일영,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2015).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기성 사회를 위협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지나칠 정도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오들리 부인의 비밀》의 주인공 오들리 부인은 한 집안의 명예에 흠집 낼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 성공하면서 그 후에 나온 선정소설 속 여성들은 가부장제를 위반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장정희, 2007). 기존 소설에서 보지 못한 여성들이 등장하고, 위험한 매력을 가진 선정소설의 여주인공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늘어날수록 보수적인 대중은 ‘여성의 욕망은 위험하다’는 공포를 간접적으로 느낀다.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 출구》 (동문선, 2004)

*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사월의책, 2016)

 

 

 

 

손택은 캠프를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물건을 선호한 것’이라고 했다. 선정소설의 여주인공들은 과도하게 감정을 분출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선정소설에서 재현되는 여주인공의 과다한 감정 표현을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봤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표현 방식을 엘렌 식수(Helene Cixous)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와 연관 지어서 주목하고 있다. 식수가 제안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 중심적인 논리적 글쓰기를 전복시키는 효과가 있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이 유행하면서 여성들은 창작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을 즐겨 읽은 여성 독자들이 늘어났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이 유행하기 전에 나온 소설과 문학은 ‘선택된 사람들만의 것(식수)’이었다. ‘선택된 사람들’에 속하지 못한 여성은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의 등장은 공식적인 텍스트로 인정받던 이성 및 남근 중심주의 글쓰기에 저항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그 공간에 여성들이 들어왔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겁에 질린 남성 지식인과 독자들은 책 읽고 글 쓰는 여성을 경계했다. 글 쓰는 여성은 남성 중심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을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상업적인 소설로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은 그 소설들이 나온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정확하게 반영한 문학 장르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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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8-09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두사의 웃음.. 좋은가요 ? 이 책 살까 말까 했는데 출판사가 동문선이라 안 샀는데... 개인적으로 동문선을 무지 싫어하는 1인.

cyrus 2019-08-10 06:10   좋아요 0 | URL
내용은 좋은데 번역문이 별로 좋지 않아요.

곰발님이 왜 동문선을 싫어하는지 알겠어요. 출판사 대표가 문제가 많죠.. ^^;;

2021-03-24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 부클래식 Boo Classics 78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지음, 홍덕선.오은주 옮김 / 부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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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에 나온 소설 중에 가장 인기 있었던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백여 년 전에 살았던 영국인들이 생각한 ‘인기 소설’의 기준을 잘 모를뿐더러 그 시대에 나온 책들의 판매 부수가 얼마인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소설이 인기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사람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코난 도일(Conan Doyle)의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인기 소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두 작가 모두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사랑받아온 작품들을 남겼다.

 

지금부터 내가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이 쓴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라는 소설도 인기 많았어요’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소설도 있었나요?’라고 말하면서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 빅토리아 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1862년에 잡지에 연재된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선정소설(sensation novel)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선정소설이란 말 그대로 선정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이다. 선정소설은 출생의 비밀, 불륜, 살인 등 자극적인 소재가 나오는 아침 드라마와 같다고 보면 된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에도 아침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요소들을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들리 부인은 과거에 결혼한 이력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사실 부인이 이름을 바꿔가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오들리 부인의 원래 이름은 헬렌 몰던(Helen Maldon)이다. 그녀는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벌써 어린 나이에 궁핍한 현실에 무서움을 느낀다. 헬렌은 부잣집 외아들인 조지 톨보이즈(George Talboys)를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조지는 돈을 더 벌어오겠다는 생각에 헬렌과 외아들(아버지의 이름과 같아서 ‘어린 조지’라고 부른다)을 남겨둔 채 호주로 떠난다. 혼자서 자식을 돌보면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처지가 된 헬렌은 가출을 감행한다. 헬렌은 루시 그레이엄(Lucy Graha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전처의 외동딸인 알리샤(Alicia)와 같이 살던 마이클 오들리 경(Sir Micheal Audley)과 결혼하면서 ‘루시 오들리’가 되고, 꿈에 그리던 신분 상승을 이룬다. 그러나 호주에 갔던 조지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하필이면 조지의 절친한 친구가 마이클의 조카인 로버트 오들리(Robert Audley)였다. 로버트는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지 못한 신참 변호사지만, 정의감이 투철한 인물이다. 로버트와 조지는 부인을 만나러 직접 오들리 저택에 찾아갔으나 부인은 외출해 집을 비운 상태였다. 두 사람은 알리샤의 도움으로 오들리 부인의 방에 가게 들어갔는데, 조지는 오들리 부인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조지는 사라져버리고, 행방불명이 된다. 로버트는 친구를 찾기 위해 친구와 관련된 지역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문 수사를 한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조지의 첫 번째 아내 헬렌과 오들리 부인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알아내기로 한다. 로버트는 헬렌 몰던, 루시 오들리 모두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는 부인과 대면하면서 자산이 알아낸 부인의 비밀을 모조리 밝힌다. 그러나 부인은 오히려 로버트를 정신병원에 보내거나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초강수를 던진다. ‘아름다운 귀부인’으로 묘사된 부인은 이때부터 ‘악녀’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는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 간의 양자 대립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로버트 오들리는 부인의 비밀을 밝히면서 오들리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 하고, 사라진 친구를 대신해서 복수하려고 한다. 오들리 부인은 처음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집 안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로 등장하지만,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악의를 서서히 드러내는 ‘집 안의 타락 천사’가 된다.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던 도덕적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오들리 부인은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 사회를 위협하는 해로운 존재이고, 그녀에 맞서는 로버트는 가부장(로버트 오들리와 조지 톨보이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정의감에 투철한 ‘수호천사’가 된다.

 

오들리 부인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의 모습과 다른 독특한 인물이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은 성적 욕망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없었으며 순수한 ‘집 안의 천사’, ‘가정의 빛’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브래든은 오들리 부인을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악녀’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내용만 가지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려선 안 되고, 브래든을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에 굴복한 여성 작가’로 폄하하는 평가도 적절하지 않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은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은 인기 소설이었다. 남성 독자들은 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오들리 부인의 매력에 주목했겠지만, 여성 독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면서 살아가는 부인의 과감한 결단력에 주목했을 것이다. 비록 법을 어기긴 했지만, 오들리 부인은 자신의 삶을 죄어오는 갑갑한 현실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는 여성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였고, 하류층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들이 선호하던 ‘집 안의 천사’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국 여성들은 날개 꺾인 천사로 살아갔다. 여왕이 통치하던 영국 사회 전체는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수정(水晶)으로 만든 천장[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는 여성들이 마음대로 날고 싶어도 함부로 날 수 없는 곳이었다.

 

 

 

 

[주]

영국이 절정에 이르던 1851년에 런던만국박람회가 열렸고, 영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유럽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수정궁(Crystal Palace)을 세웠다. 그래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 상승을 제한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의미하는 ‘유리 천장’과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수정궁’을 합쳐서 ‘수정 천장’이라는 단어를 썼다.

 

 

※ Trivia

 

오자가 너무 많다. 그리고 오류가 있는 역주도 있다.

 

 

* 101쪽 역주: 존 에버렛 밀레 →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 131쪽: 조지의 장인어른은 친구의 행동에 분개하는 로버트 달래주려고 애썼다.

 

 

* 270쪽 [‘니오베’에 대한 역주]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테베의 왕 암피온의 아내 니오베는 자만심에 들떠 7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자랑했다가 레토 여신의 분노를 얻었다. 여신의 부모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에 의해 14명의 아이들이 화살을 맞아 모두 죽자 니오베는 슬픔으로 돌로 변했다.

 

→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레토가 낳은 자식이다.

 

 

* 306쪽: 빈세트 부인 → 빈센트 부인

 

 

* 394쪽: 루크레치아 보르자 루크레치아 → 루크레치아 보르자(Lucrezia Borgia)

 

 

* 583쪽 역주:

플로벨 → 플로베르

보드레르 →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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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8-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드라마 느낌이 나는 소설 같아요. ^^ 사이러스님 글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9-08-09 17:54   좋아요 0 | URL
분량이 꽤 많습니다. 책의 중반부가 지루했어요. ^^;;

레삭매냐 2019-08-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 클래식, 출판사가 의심스러워
기피하고 있습니다.

cyrus 2019-08-09 17:58   좋아요 0 | URL
부북스 출판사의 책을 많이 읽어본 적이 없어서 번역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일수록 그 출판사의 책을 안 읽게 되네요.. ^^;;

수이 2019-08-09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희빈 떠올라. 여성사 쪽에서 보자면 장희빈이 긍정적인 면모가 꽤 많더라_고 전해들었는데_ 앞으로 그 위치가 달라질 거라고 하더라구. 페이퍼 읽고 떠올라서 ^^

cyrus 2019-08-10 06:16   좋아요 0 | URL
악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에도 약간의 공로가 있다면 그것 또한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
 

 

 

 

초등학교[주]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 오생근 옮김, 『자유』 중에서)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쓴 유명한 시 『자유』의 원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엘뤼아르는 이 시의 맨 마지막 문장에 자신이 사랑하는 두 번째 부인의 이름(Nusch, 뉘쉬)을 쓸려고 했다. 엘뤼아르에게 사랑이란 ‘자유’의 동의어다. 『자유』라는 이 시 한 편이 너무나 유명해서 대부분 사람은 엘뤼아르를 ‘저항 시인’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초현실주의자 그룹에서 활동한 이력이다.

 

 

 

 

 

 

 

 

 

 

 

 

 

 

 

 

 

 

* [품절] 엘뤼아르 《이곳에 살기 위하여》 (민음사, 1994)

*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서구 문명 전반에 대한 반역을 꿈꾸는 예술 운동의 하나였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 공상 등의 비현실적인 세계와 이성에 속박되지 않고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며 인간 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큰 목표로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삶도 예술의 연장선으로 여겼다. 자유연애는 기본이었고, 주목받기 위해 기행도 일삼았다.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처음으로 초현실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려고 하였다. 그는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아 꿈, 광기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 즉 꿈을 ‘해석’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캐서린 잉그램, 앤드류 레이 그림 《This is Dali》 (어젠다, 2014)

* 돈 애즈 《살바도르 달리》 (시공아트, 2014)

* 크리스티아네 바이데만 《살바도르 달리》 (예경, 2009)

* 피오렐라 니코시아 《달리: 무의식의 혁명》 (마로니에북스, 2007)

* 장 루이 가유맹 《달리: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시공사, 2006)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몽상가는 아니었다. 의외로 그들은 정치와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브르통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930년대 말에 멕시코를 방문해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만나기도 했다. 브르통 이외에도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등도 공산주의자였다. 이념에 심취하다 보니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고 이로 인해 불거진 갈등으로 인해 초현실주의 그룹을 떠나는 화가들이 속출했다. 브르통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돈에 환장한 사람(Avida Dollars)이라는 별명을 붙여가면서 비난했고, 그를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했다. 브르통이 달리를 조롱하면서 만든 별명은 달리 이름의 철자를 바꾼 것이다. 달리는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찬양했다. 파시즘을 지지하는 달리의 망언은 파시즘에 반발하며 자유를 갈구하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과 두 번의 세계대전을 지켜보며 ‘저항 시’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쓰인 시에는 전쟁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엘뤼아르는 독일군에 맞서는 레지스탕스(Resistance)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작가 단체의 책임자가 돼 독일을 비방하는 비밀 출판물을 만들었다. 엘뤼아르는 『시는 구체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라는 시에서 저항 시를 쓰지 않는 동료 시인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네들은 목적도 없이 걷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인간은

뭉쳐야 하고 희망하고 투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네

 

 

(엘뤼아르, 오생근 옮김, 『시는 구체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중에서)

 

 

엘뤼아르는 이 시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순수시를 쓰는 일에 몰두한 동료 시인을 ‘까다로운 친구들’이라고 부르면서 세계를 바꾸려는 희망과 투쟁심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그들을 진짜 현실 속으로 걸어나가도록(참여시 또는 저항 시를 쓰는 일) 인도한다. 재미있는 건 반전이 있는 이 시의 구조다. 엘뤼아르는 1연부터 4연까지 순수시를 쓰는 척한다. 5연부터 시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5연은 저항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의 행보와 순수시를 쓰는 시인들을 비교한 내용이다. 엘뤼아르는 ‘조국을 거침없이 노래하고 있다면’, 동료 시인들은 ‘사막 같은 곳’으로 가려고 한다. ‘사막 같은 곳’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시인들이 원하는 유토피아 또는 공상의 세계이다. 엘뤼아르도 한때 초현실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막 같은 곳’을 지향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7연에서 자신을 ‘힘이 없는 존재’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힘이 없는 존재’는 초현실주의에 심취했던 시인의 과거 모습을 의미한다.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이후로 엘뤼아르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적 가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을 해방해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시는 구체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자신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동료 시인들에게 바치는 시로 알려졌지만, 이 시는 초현실주의에서 시작해 현실주의(realism)로 변모하는 엘뤼아르의 참 모습이 그려진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시인’과 ‘저항 시인’, 이 두 가지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한다. 그는 ‘초현실’ 속에 있는 인간과 ‘현실’ 속에 있는 인간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담아낸 시를 썼다. 그 공통된 가치란 바로 ‘자유’였다. ‘자유’는 엘뤼아르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다.

 

 

 

[주] 민음사 번역본에는 ‘국민학교’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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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2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03 06:46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댓글을 통해 하신 말씀 중에 정말 좋았어요. 사유와 행동을 일치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유와 행동이 서로 반대가 된 상태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사는 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책을 읽으면 내가 믿고 싶은 생각들이 하나둘씩 많아져요. 그러면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찰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글로 기록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