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들(Daughters of the Vicar)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가 쓴 초기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초고였을 때 제목은 두 결혼(Two Marriages)이었다. 1911년에 써졌다가 1914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패니와 애니(창비, 2013)

* [구판 절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목사의 딸들(창비, 2001)

 

    

 

초고 제목은 소설의 핵심 인물인 어니스트 린들리 목사의 두 딸 메리루이자의 결혼을 의미한다. 린들리는 자신이 상류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탄광촌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는 가난한 목사로 살아간다. 메리는 기울어진 가세를 살리기 위해 매시라는 젊은 목사와 결혼한다. 매시는 성실하게 목회 활동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열두 살 소년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체격이 상당히 왜소하다. 매시는 자식을 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이가 얼른 태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메리의 삶은 가정에서 남편을 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내/어머니 역할을 하는 게 전부다. 루이자는 그런 언니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루이자는 메리와 다르게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다. 그녀는 언니의 결혼에 손톱만큼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자신은 계급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다짐한다. 루이자가 사랑하는 알프레드 듀랜트는 하류 계급에 속한 광부. 막둥이로 자란 알프레드는 어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았지만, 광부가 되려고 하자 어머니와의 관계가 냉랭해진다. 어머니는 신사(남자)답지 못한 알프레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남성성을 찾기 위해 해군에 복무하지만, 해군 특유의 엄격한 규율과 권력적 상하 관계에 적응하지 못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 알프레드는 자신이 남자답지못한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수록 자존감은 계속 떨어지고, 여성을 멀리하게 된다.

 

어느 날 알프레드는 부사관과 함께 술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여성 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구애하는 이탈리아 남성을 보게 된다. 알프레드는 아주 쉽게 여성에게 다가가는 이탈리아 남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성에게 말조차 걸어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개인과 무관한 본능적인 힘에 끌려 몸이 여자에게 다가가는, 우쭐거리며 편하게 사랑하는 이딸리아인들을 기묘한 부러움으로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남자였고 자신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마치 문둥이 같다고 느끼며 앉아 있었다(He sat feeling short, feeling like a leper). 그리고 그는 자신과 어떤 여자와의 성적인 교접 장면을 상상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런 몽상에 몰두한 채 걸어 다녔다.

 

 

(목사의 딸들, 《패니와 애니, 101)

 

 

알프레드는 자신의 소심한 남성성을 문둥이(leper)’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프레드의 자기비하적인 심리 상태를 문둥이로 비유한 로렌스의 표현, 그리고 ‘leper’문둥이로 번역한 백낙청의 단어 선택(차별하려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으로서의 한센인(나환자)을 비하하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백영경, 이유림, 나영, 나영정 외,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후마니타스, 2018)

 

* 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오월의봄, 2018)

 

    

 

로렌스는 여자와 섹스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동정(童貞) 알프레드를 나환자의 삶과 일치시킨다. 이때 로렌스는 한센인을 성적 권리와 무관한 비정상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로렌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와 장애인의 삶을 잘 모르는 비장애인의 문제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가는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을 정상적인 몸의 범주에 벗어난 존재로 보기 시작했고, 그들이 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출산과 관련된 재생산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했다. 특히 국가가 만든 수용시설은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1].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그들의 실질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들을 정의하게 만드는 단편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인식에 익숙한 비장애인은 수용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은 애당초 없는 것[2]으로 규정한다.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심각한 편견 중 하나는 장애인은 성적 욕구와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무성적으로 잘못 정의되기 쉽고,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무시당한다.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장애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많은 장애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거나, 대화해보거나, 실행해보거나, 실패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나영정, 어쩌면 이상한 몸, 79)

 

 

문둥이는 한센인 후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문둥이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란 말과 같은 의미로 쓰였고, 사회에 격리된 한센인들은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 목사의 딸들이 수록된 로렌스의 단편 선집이 처음 나온 해는 1991년이다. 그때는 문둥이가 한센인을 가리키는 표준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구시대적인 악어(惡語)를 쓴 백낙청의 번역도 문제지만, 이를 교정하지 않은 출판사의 편집자도 문제.

 

혹자는 필자의 지적에 책 읽는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사회적 약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거부하게 만들고, 배제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예민해져야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적 사회구조를 인지하는 예민함은 부단한 성찰과 자기반성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반응이다. 예민함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가 발전하는 데 이로운 건강한 비판이다. 세상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자극을 주어 한층 더 생각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향상한다. 나는 상대방의 진지한 예민함을 스트레스에 의한 증상으로 여기면서 걱정하는 그들이 더 걱정된다. 그들은 고민보다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예민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원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변혁의 목소리는 예민한 성찰이 함께 하지 않으면 커질 수 없다.

 

 

 

[1] 조미경, 수용시설에 감금된 성과 재생산 권리, 배틀그라운드, 후마니타스, 2018, 193~194.

      

[2] 같은 책, 각주,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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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의 책들, 제목만 외우고 있는 책중에 하나가 <목사의 딸들>인데, 이것까지 읽어셨군요! 괜히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cyrus 2019-02-26 23:55   좋아요 1 | URL
구판 <목사의 딸들>은 단편 네 편이 수록되었고요, <패니와 애니>는 <목사의 딸들> 수록작 네 편에 단편 세 편이 추가된 책입니다. 저는 이 책으로 로렌스의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요, 로렌스가 여성을 ‘결혼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한 것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읽을 때마다 찝찝하게 느껴지는 장면 몇 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렌스의 소설을 아예 읽지 말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소설에 대한 해석도 그렇고 그 책을 읽는 행위 역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니까요. 원래 로렌스의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품 하나씩하나씩 읽으면서 장점도 찾고 싶습니다. 얼른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고 싶어요. ^^

카알벨루치 2019-02-27 00:01   좋아요 1 | URL
제가 <아들과 연인>을 가지고 논문을 썼기 때문에 로렌스를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시대의 분위기나 트렌드가 지금 나타난다면 난리나겠죠 로렌스는 남근숭배주의자로도 볼 수 있으니깐요
제가 로렌스의 매력에 꽂힌 것은 그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비평이었다는 역설 ㅎㅎㅎㅎ

cyrus 2019-02-27 00:15   좋아요 2 | URL
제가 꾸준히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렌스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요. 저는 케이트 밀렛이 쓴 <성 정치학>을 통해 로렌스를 알기 시작했는데, 부정적 평이 많았어요. 페미니즘 독서 모임 중에 로렌스의 소설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의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제대로 비판을 하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하니까요. 단편적인 인용이나 설명을 근거로 로렌스의 작품을 단정하면 작품의 진면목을 못 볼 수 있어요. 카알벨루치님은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보셨으니 로렌스를 주제로 한 제 글을 보신다면 의견을 주셔도 좋습니다. 제 견해에 반박하셔도 좋습니다. 변증법적(?)으로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로렌스의 문학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

2019-02-26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7 00:16   좋아요 1 | URL
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나병’, ‘문둥병’이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저는 2010~2011년에 알라딘 블로그에 한하운 시인에 대한 글을 썼어요. 그 글에 ‘문둥이’라는 표현을 썼을 거예요. ‘한센병’, ‘한센인’의 ‘한센’은 나병을 일으키는 균을 처음으로 증명한 학자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나병’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센이 누군지, 한센병이 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

레삭매냐 2019-02-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 샘의 책은 한 개도 읽어 본 게 없네요.

언제고 읽고 말리라 !

<채털레이 부인>부터 읽어야 하나요.

cyrus 2019-03-04 13:48   좋아요 0 | URL
저는 발표 연도순으로 읽으려고 해요. <채털리 부인>은 로렌스 후기 작품에 속하고요, 초기 장편소설은 <아들과 연인>입니다. ^^

2019-02-27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04 13:59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페미니즘 독서 모임의 주제가 ‘인정과 재분배’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잘 살려면 그들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재분배 정책이 나오지 못합니다. 일단 사회적 약자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인정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정 투쟁을 하지 않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들에 향한 ‘무시’와 ‘모욕’은 이어질 것입니다. 인정이 먼저, 재분배가 먼저냐,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정의론을 논할 때 반드시 논의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서 ‘인정 투쟁’이 많아져야 한다는 걸 느껴졌어요.

페크pek0501 2019-03-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말이든 글이든 언어에 예민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어느 쪽에선 상처를 받게 되지요. 편한 것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저 역시 잊으면 안 되는 점을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3-04 14:03   좋아요 1 | URL
저도 종종 글을 쓰다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표현을 쓸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뭔가 생각나면 바로 글을 썼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경솔한 표현이 나올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난 뒤에 글을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