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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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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심 파괴, 이솝 우화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코지했다는 이유로 여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실컷 앙갚음하려고 여우를 붙잡아 기름에 담갔던 밧줄을 꼬리에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인 다음 풀어놓았다. 그러나 어떤 신이 그 여우를 풀어놓은 사람의 밭으로 인도했다. 때는 마침 수확기라 그는 울면서 뒤쫓아갔건만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우화 58 사람과 여우79)

 

 

무슨 잔인한 이야기일까. 생소하게 여기겠지만 실은 이솝 우화 중 한 꼭지다. 혹자는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이솝 우화에 이런 잔인한 장면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수백 편의 이솝 우화에는 이보다 더 심한 장면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동심 파괴에 가깝다.

 

 

독수리와 여우는 친구가 되어 서로 가까운 곳에서 살기로 했다. 가까이 살면 우정도 두터워지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높다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가 그곳에 둥지를 쳤다. 여우는 나무 아래 있는 덤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그곳에서 새끼를 낳았다. 하루는 여우가 먹을거리를 구하러 집을 비운 사이 역시 먹을거리가 떨어진 독수리가 덤불 위를 덮쳐 새끼 여우들을 채어가서는 제 새끼들과 함께 먹어치웠다.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여우는 제 새끼들이 죽음보다도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중략) 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독수리는 우정을 모독한 죗값을 치르게 된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있을 때 독수리가 내기 덮쳐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내장을 채어갔는데, 독수리가 그것을 제 둥지로 날라갔을 때 강풍이 불어와 내장의 불이 둥지 안의 마른 지푸라기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불이 불자 새끼 독수리들이 (아직은 날 수 없었기 때문에)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여우가 달려가 독수리가 보는 앞에서 새끼 독수리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21~22)

 

 

이 이야기와 함께 전해 내려오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정을 모독한 자는 피해자가 허약할 때는 복수를 피할 수 있어도 하늘의 벌은 피하지 못한다.”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내고 마는 복수의 연속성을 주제로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초기 비극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의 동물 우화 버전을 보는 듯하다. 죄의 대가는 결국 천벌에 의해서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용 우화로 각색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의 근간이 되는 복수의 필연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순수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에게 썩 권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된다.

 

믿기지 않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엽기적인 이야기들은 진짜 이솝 우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읽던 그 내용과 전혀 다른 정본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중에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장면이 더러 있다. 어떤 이야기는 육식동물인 여우와 초식동물인 당나귀가 함께 사냥하기도 한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솝 우화은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집처럼 불행한(?) 운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내용이 잔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림형제 동화집은 독일에서 전해내려 오는 민담을 묶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초판을 펴냈을 때 독일 부모들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아이에게 어떻게 읽힐 수 있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잔인한 폭력성뿐만 아니라 과도한 성적 표현도 들어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림형제의 작품은 대부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내용을 풀어내고 표현을 순화해 만든 동화. 이솝 우화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인간 세상의 권력구조를 표현했다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던 시기 때 외면 받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린이용 우화로 살아남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윤리적인 교훈을 강조하는 착한 이야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베짱이는 쇠똥구리로, 산신령은 헤르메스로

 

정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원형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솝 이후 수많은 세월동안 후대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은 정본에 손을 댔다.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용 이솝 우화를 비교하면 내용상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이솝 우화 한 꼭지로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베짱이는 일하지 않고 놀다가 겨울이 되어서 굶게 되어 후회한다. 베짱이는 여름철에 짝을 찾기 위해 양 날개를 비벼 울음소리를 낸다. 어린이용 우화에서는 베짱이를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등장한다. 반면 제대로 먹이를 저장한 개미는 삶의 여유가 있다. 정본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베짱이 대신 매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에는 쇠똥구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쇠똥구리 역시 개미 못지않게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쇠똥을 동그랗게 뭉쳐서 집으로 운반해 저장한다. 그런 쇠똥구리는 왜 겨울이 되자 개미에게 구걸을 했던 것일까? 이유가 너무나도 허무하다. 겨울에 내리는 비 때문에 모아 놓은 쇠똥이 녹아버려서.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은 간단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강자는 약자에게 냉정하다. 먹이를 비축한 개미는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 쇠똥구리를 꾸짖고 있다. 쇠똥구리에게는 조금 억울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우화 한 꼭지로 인해 개미는 일약 근면’, ‘부지런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종의 비틀어 보기식으로 이솝 우화를 재해석하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우화 속 개미를 현대인으로 비유하면 일개미. 쉬지도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다. 근면, 성실한 면모는 본받을 수 있겠지만 휴식 없는 노동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본 우화에 등장하는 개미가 선량한 이미지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개미의 특성을 비꼬기도 한다.

 

 

지금의 개미는 옛날에는 사람이었다. 개미는 농사꾼이었는데 제 노력의 결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소출에 눈독을 들이다가 이웃이 수확한 것을 훔쳤다. 제우스는 그의 욕심이 못마땅하여 그를 개미라 불리는 동물로 바꿔놓았다. 그는 몸이 바뀌었어도 마음씨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며 남의 밀과 보리를 모아 저를 위해 저장하니 말이다. (우화 240 개미264)

 

 

본성이 나쁜 자는 벌을 받아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성악설(性惡說)을 강조하고 있다. 순자는 외부의 가르침에 의한 수양을 통해 선한 본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솝의 성악설은 다르다. 외부로부터 벌을 받아도 나쁜 본성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미가 등장하는 우화들 중에서 진짜 개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개미는 다른 집단의 개미집을 침략하여 먹이를 약탈하는 습성이 있다.

 

한국 전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바로 금도끼와 은도끼이야기다. 정직한 나무꾼은 금도끼를 얻고 욕심쟁이 나무꾼은 쇠도끼마저 잃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로 알려져 있다. 이솝 우화에서는 산신령이 아닌 전령(傳令)의 신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정본으로 전해져 내린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이솝이 지었다거나 고대 그리스에서 맨 처음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금도끼 은도끼이야기의 분포는 매우 광범하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다 건너 유럽으로 전달되어 이솝이 활동한 시대 이후에 이솝 우화의 한 꼭지로 편입될 가능성도 있다.

 

 

 

 현상의 양면성을 집약한 세상의 알레고리

 

모든 우화의 이야기 전개는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뻔하다. 권선징악형 결론도 많다. 상대방에게 해를 가한 자는 똑같이 그대로 벌을 받는다. 겉모습은 변하더라도 나쁘고 사악한 본성은 달라질 수 없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 등장인물과 상황만 다를 뿐 주제와 이야기 구조가 비슷한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이솝 우화는 문학성이 떨어지며 일독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래봬도 성서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300여 편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인간의 특성과 현상의 이치가 집약되어 있다. 선악, 강한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삶과 죽음으로 구분되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성을 유지한 인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이중적인 동물 혹은 인간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한 권의 알레고리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처럼 우정을 어긴 자는 복수에 의해서 무너지기도 하지만 적선을 하거나 은혜를 베푼 자는 상대방에게 보은을 받기도 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개미에게 나뭇잎을 떨구어 구해준 비둘기가 훗날 포수의 총에 맞을 뻔했을 때 개미가 포수의 다리를 깨물어 비둘기를 구해 주는 훈훈한 결론도 있다 (우화 242 개미와 비둘기)

 

 

 

 

 

 

야콥 요르단스  『사튀로스와 농부들』1620년경

 

 

반인반수(伴人伴獸) 사튀로스는 이중적인 성격의 사람과의 우정을 경계하고 있다. (우화 60 사람과 사튀로스) 사튀로스가 어느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식사 때 농부는 뜨거운 수프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사튀로스는 추울 때 손에 입김을 불던 사람의 모습이 생각나 의아해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은 수프를 식히기 위해,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튀로스는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의 이중적 행동을 비난했다. 자연에 길들여지지 않은 호색한 사튀로스가 인간의 이중성을 지적하니 역설적이다.

 

언젠가는 우리 숨결을 스쳐 갈 죽음의 신 하데스의 손길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죽음 앞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너무나 쉽게 죽음을 당하고 마는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우리는 파리 목숨이라고 말한다. 파리는 인간보다 수명이 짧지만 인간도 마찬가지. 누군가는 갑작스레 찾아 온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만 잘못된 탐욕에 의해서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는 사람은 뒤늦은 후회를 한다. 우리 인생 또한 보잘 거 없을 정도로 허무하며 죽음이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Vanitas, 바니타스) 우화 속 두 마리의 파리가 처한 운명을 보라. 과연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감정을 표출할까?

 

고기가 가득 든 냄비에 파리가 빠졌다. 파리는 국물에 빠져 죽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우화 238 파리262)

 

광에서 꿀이 쏟아지자 파리들이 날아와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하도 맛있어서 파리들은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발이 꿀에 달라붙어 날아오를 수 없게 되자 파리들은 숨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야말로 가련하구나! 순간의 쾌락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니!” (우화 239 파리들263)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어렸을 때 본 우화 속 개미는 착하고 부지런했다. 반면에 게으른 베짱이처럼 살기 싫었다. 여우는 꾀가 많았고 당나귀는 세상 물정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 그 때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화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겨 들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우화 속 교훈은 한낱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니 편법이 판을 치고 정이 사라진 지금 교훈처럼 그대로 도덕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요즘 시대적 분위기가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우화는 읽어야 한다. 교훈의 가치는 퇴색되었지만 인생의 이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가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는 클래스는 영원하다. 우화가 표현한 세상과 동물(혹은 사람)은 양면적이다. 고지식하게 세상을 한 쪽만 편협하게 본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화를 받아들이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교훈에 있는 문자 그대로 믿을 시기는 현실적으로 지났다. 어렸을 때 우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교화적 감정은 이제는 재현할 수 없다. 이솝 우화에는 그 착했던 이솝은 없다. 외부에 의해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고 상황에 따라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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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숍우화, 를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의외여서 한참 들여다본 적 있던 책이에요. 숲출판사 이벤트도 있길래.하하. 두꺼울 것 같은데 cyrus님 읽기 속도는 못 따라갈 것 같아요 @.@ 그림형제랑 같이 꼭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해서 또 그 교훈이 맘에 안 들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이 책은 cyrus님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뜨거운 여름 보내요!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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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6] 돈키호테

 

 

 

 

 

 

 

 

 

“운명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저기를 보아라. 산초 판사야. 서른 명이 넘는 거인들이 있지 않느냐. 나는 저놈들과 싸워 모두 없앨 생각이다. 전리품으로 슬슬 재물도 얻을 것 같구나. 이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 악의 씰르 뽑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99쪽)

 

 

이 말을 마친 돈키호테는 창을 곧추들고 애마 로시난테와 함께 적진을 향하다 거대한 풍차에 부딪혀 나가떨어진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대표적 장면이다.

 

때로 요란한 장광사설부터 행간 곳곳에 숨어 접전을 벌이는 유머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기사 무용담을 변주하며 예술과 사회, 꿈 혹은 광기에 대한 속설과 날선 통찰을 쏟아내는 세르반테스의 입담이 워낙 풍부하고 맛깔스럽다. 특히 그 걸출한 입담을, 크고 작은 대결과 선택의 경험이 좀 쌓인 이후에 다시 만나는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어려서 처음 접했던 돈키호테, 다수는 이해 못할 꿈을 노자 삼아 좌충우돌하며 심지어 풍차와도 대결하던 중년 사내는 아무래도 좀 우스꽝스럽지 않았던가 말이다.

 

스페인 시골 마을 라 만차에 살고 있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노신사. 그는 밤낮 기사도 이야기에 몰두하다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자기 이름을 ‘돈키호테’라고 고친 뒤 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자들을 돕기 위한 편력에 나선다. 중세 기사도에 매료된 돈키호테는 세상의 부정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그는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지만 그의 용기와 고귀한 꿈은 꺾이지 않는다. 산초 판사라는 농민을 종자로 거느린 돈키호테는 모든 것을 기사도 이야기로 해석하고 그 이상에 따라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산초는 주인과는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의 타협을 잊지 않으며, 게으르지만 주인에게 충실한 종자다. 돈키호테는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비통한 실패와 패배를 맛본다. 이러한 가혹한 패배를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좌충우돌식 인간형을 두고 ‘돈키호테‘라고 한다. 물불을 못 가리고 나서지 않아야 할 자리에 나서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모험적인 방랑 기사’를 다룬 이전의 ‘기사 소설’과는 달리 ‘돈키호테’는 우선 귀족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을 위한 기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에 의해 그려지는 평행선은 바로 우리 인간이 삶 속에서 겪는 끊임없는 투쟁을 상징하고 있다. 돈키호테는 ‘내일’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독자들에게는 우리가 패배하면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돈키호테는 억울하게 ‘현실감각이 없는 정신 나간 기사’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돈키호테가 너무 희화화되어 왔다. 정직한 사람들이 ‘돈키호테적 몽상가’로 취급되는가 하면, 아집과 독선, 한탕주의가 ‘돈키호테적 용기’로 정당화되기 일쑤다.

 

그의 모험 길에 동행할수록 호감보다 연민이 앞설 만큼 엉뚱하다 여겼던 그 모습이, 갈수록 마음 깊이 파고든다. 그 자신의 시대에도 시효 지난 가치 취급을 받는 기사도로 대변되는 정의와 자유, 사랑을 외치는 방랑기사. 무엇이 옳다 그르다 제 기준에 따라 돌진하고, 미친 괴짜 취급을 받아도 자신만의 꿈을 좇는 돈키호테의 여정은, 눈앞의 현실과 다른 이상으로 앓아본 적이 있는 한 그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돈키호테는 이상에 따른 의무를 다한다. 성패는 중요치 않다. 최선을 다해 앞으로 갈 뿐이다. 그에게 가장 슬픈 것은 실패가 아니라 꿈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돈과 사회적 성공 등 소위 보편적인 행복이라 설파되는 삶의 궤도나 정치적, 문화적 대세와 다른 선택으로 소심해질 때, 돈키호테는 살가운 동지적 위안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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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와 돈키호테는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인물이죠.그만큼 <군주론>과 <돈키호테>를 실제로 읽은 사람이 없다는 거구요.

cyrus 2013-05-17 22:04   좋아요 0 | URL
제가 읽는 책은 1부였어요. 돈키호테가 1, 2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거에요.
 
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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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635킬로그램의 의학적으로 치명적인 뚱보가 된 마흔 다섯 살의 사내가 20년 만에 침대 바깥으로 나오기까지 그와 그의 가족, 연인이 겪는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 맬컴이 침대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겠다는 자신의 선언을 무력하면서도 집요하게 실천하는 과정을, 질투와 분노와 연민이 뒤범벅된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생 ‘나’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635kg의 몸을 묘사하는 화자의 서술은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읽는 이를 압도한다. 인간에서 거대한 식물로 변해버린 맬컴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의료장치와 마치 참전 간호사처럼 형의 몸 구석구석을 닦고 치료하고 보살피는 어머니의 모습이 읽고 있으면 후각마저 자극될 정도로 생생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침울하고 무기력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선택한 맬컴. 사랑에 실패하고 죽을 때까지 형과 한 방에서 살 운명이라고 자포자기한 ‘나’, 탄광사고의 생존자로 그 기억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

 

특히 소설 속 맬컴의 모습은 흡사 피터맨을 연상시킨다. 침대에만 살다가 비대해진 피터팬. 피터팬은 자라지 않는 아이의 대명사다. 그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른 세계로 편입되지 못하는 어른아이들을 가리켜 ‘피터팬 증후군’이라 하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어린아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없지만 몸은 어른이지 그의 행동은 어린아이와 같다. 집에 있으면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며 그가 누운 침대 자리 주변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침대에서만 생활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변 대신 머리가 가발이 아닌지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순진무구한 점이 있긴 하다. 그리고 엄마 없이는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책임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감, 이런 부담감에서 벗어나 영원히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싶은 심리가 맬컴의 물컹물컹한 살덩어리에 압축되어 있다. 맬컴에게 '네버랜드'는 침대다.

 

무엇이 그를 ‘살찐 피터팬’이 되게 만들었을까? 아들에 대한 엄마의 맹목적인 사랑만이 원인이 아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그의 순순하고 연약한 성격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나’의 은사이기도 한 케이 선생님은 맬컴에게 나중에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맬컴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선생님이 한 말.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도 마!’(142쪽)

 

세상 심지어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루마저도 담을 쌓고 자신을 폐쇄적인 침대에 가둔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맬컴은 유년시절에 생긴 상처 때문에 고통을 성장하는 내내 자각했을 것이다. 맬컴의 몸에 생긴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의 약손마저도 미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 말이다.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그에 따른 무력감이 뚱뚱한 사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직업을 가지는 것을 귀찮게 여기며 루의 사랑을 포기할 정도로 삶의 의욕은 상실되어 있다. 맬컴의 삶은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신을 세워 나갈 수 있는 의지와 정신적 힘의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인 것이다.

 

“기분이 우울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은 어딘가에 숨어서 혼자만의 안락함을 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 침대로 가는 겁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죠. 어차피 당신도 이런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겠지만요.” (117쪽)

 

마음속에 내재된 상처가 곪을수록 인간의 본능은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만의 세계 속에 갇혀 지내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맬컴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현실은 외면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맬컴, 아버지는 ‘자기만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연장이 가득한 다락방. 아이러니하게도 맬컴에 밀려 어머니와 짝사랑했던 루로부터의 애정과 인정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자 ‘나’ 역시 잠시 형처럼 생활하기도 한다. 소설 속 가족 이야기는 단순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쭉 따라 가다보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 채 숨기기기에 급급했던 우울 속의 나태함. 우리 마음 속에는 맬컴처럼 ‘살찐 피터팬’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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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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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열대야가 무척 지독하다. 차가운 맥주의 거품만으로도 뜨뜻미지근한 밤 공기를 식혀주지 못하고 있다. 억지로 잠을 청해해보지만 수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창문을 열어놔도 시원한 바람 한 점 불어오는 대신에 습한 공기의 손길이 자꾸만 내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다. 자다가 깨고나면 TV로 올림픽 중계를 시청하는 대신에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고해서 열대야가 싹 달아나는 건 아니지만 한밤중의 고요 속에서 책을 읽는 기분은 정말 유쾌하고 좋다. 특히 딱딱하고 두꺼운 분량의 인문서나 사회과학 서적 대신에 감성을 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나 시집 한 권 읽으면 어느 정도 무더위와 피곤함은 잊혀지게 된다.

 

고요한 열대야가 찾아 온 어제 새벽 3시 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다.  '설국'. 이름만 봐도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설국』을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하던데 나는 순전히 소설 제목만으로 열대야의 무더위에 지쳐버린 감성을 식혀주지 않을까 싶어서 책장 속에 꽂혀 있던 얇고 하얀 『설국』을 집어 들었다. 일본 소설은 많이 읽는 건 아니라서 이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설국』의 니가타 현으로 향하는 국경의 긴 터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금은 망설였다. 평생 고독과 허무에 지배당한 삶을 살다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마는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설국』곳곳에서도 삶의 유한성 앞에서 비롯되는 감상적인 허무의 매력은 회화적인 은유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소설로 인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일본 특유의 미의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설국』의 섬세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스토리를 서양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혔는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스웨덴의 한림원은 이 작품을 노벨 문학상으로 선정하는 이유를 '자연과 인간 운명에 내재하는 존재의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어쩌면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가 만들어 낸 자연의 정경 묘사가 서구인들에게는 비서구인 일본의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품 속에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허무'의 감정마저도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동양의 미학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시마무라는 허무주의자다. 그나마 정형적인 성격의 시마무라와는 정반대인 게이샤 고마코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삶이라는 감옥 안에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한낱 시마무라 앞에서 울분만 토해내는 불만 표출에 그칠 뿐이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시마무라는 여인에게서 고미코에서도 허무를 읽는다. 하지만 시마무라와 고미코, 이들은 서로에게 '허무'만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연민 또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시마무라는 고마코분만 아니라 설국 지방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도 만나게 된 요코라는 여자에게도 은근한 감정을 품는다.

 

 

 

요코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가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이러한 모습을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p 110)

 

 

 

소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 이 세 인물 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눈에 많이 띄는 여주인공은 고마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마코는 처음에 시마무라를 만났을 때만 해도 과거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시마무라를 접대하는 일이 잦아들게 되면서 고마코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이 궁금해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한다. 여성들이 남성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빙빙 둘러서 말하듯이 고마코도 은근슬쩍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고마코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박복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눈만 쌓이는 폐쇄적인 설국 지방에서 자란 고마코는 타 지방에서 오는 수많은 낯선 손님들을 접대하고 눈 녹듯이 떠나보내야하는 게이샤로서의 삶은 지루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기적인 만남보다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애가 묻어나오는 사람다운 사람의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가 원하고 원했던 만남의 최적 대상이 바로 시마무라인 셈이다.

 

 

고마코는 깔끔하게 앉아 있다가 탕에서 나온 시마무라에게,

 '이렇게 조용한 데서 바느질을 했으면' 

방금 청소를 끝낸 방의 낡은 다다미 위에 가을 아침 햇살이 깊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느질 할 줄 아나?'

 '그런 말은 실례예요, 형제 가운데 가장 고생했죠. 생각해 보면 바로 제가 자랄 무렵이 집안이 힘든 시기였떤 것 같아요'

 

 (p 99)

 

 

고마코 말대로 시마무라는 정말 그녀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고마코는 천상 여자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던 고마코에게 조용한 방에서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로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한낱 희망사항일뿐이다. 더욱이 이 무뚝뚝한 허무주의자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여성적이면서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이성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그 누구로부터 확인마저 받지 못한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게 된다. 고마코는 정말 사마무라로부터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시마무라가 불쑥 말했다.

 '당신은 좋은 애야'

 '어째서요?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라고'

 '그래요? 이상한 분이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하고 고마코는 시선을 돌리고 시마무라를 흔들며 뚝뚝 끊어 혼내듯 말하더니 잠자코 있었다.

 

 (중략)

 

 '그런데 어디가 좋은 애라는 거죠?'  하며 고마코는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처음 만났을 땐 당신이 정말 싫더군요.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는 이는 또 없을 거예요. 정말 싫었어요'

 시마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지금까지 제가 그걸 말 않고 있었던 걸 아세요? 여자가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이미 다 끝난 거 아닌가요?'

 '괜찮아'

 '그래요?' 하고 고마코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듯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한 여자의 삶의 느낌이 따스하게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왔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어떻게 좋은데요?'

 '좋은 여자'

 '이상한 사람' 하고 어깨가 가려운 듯 얼굴을 가렸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뜻이죠? 네, 무슨 말이에요?'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고마코를 보았다.

 '말해 줘요. 그래서 절 만나러 온 거예요? 당신은 절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계셨던 거군요'

 

 (p 126~127)

 

 

   

하지만 시마무라의 감정은 고마코에게만 향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시마무라는 전형적인 게이샤인 고마코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요코를 떠올리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시마무라가 요코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없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마무라는 사랑의 감정조차 자연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마치 나무가 계절을 입듯, 아무 것도 없었다가, 초록의 잎을 갖고, 그리고는 빨갛게 물들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못하다.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그래도 연정을 품고는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허무한 행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고마코의 사랑이 부질없는 '투명한 허무'가 되어 하얀 눈 속으로 파묻혀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고요한 열대야 속에 읽은 『설국』은 한 여름밤에 마시는 따뜻하게 데운 사케였다. 따뜻한 사케는 추운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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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8-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북극 허풍담]을 읽을 동안 시루스님께서는 [설국]을 읽으셨군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여름엔 아무리 사케라도 시원하게 마셔야하지 않을까요?
아니 여름에 사케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군요.
역시 겨울에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뜨거운 사케가 제 맛이죠. ^^

cyrus 2012-08-12 21:42   좋아요 0 | URL
소설 문장은 참 좋습니다. 설경이나 자연물을 등장인물의 심리와 정서에 비유하는 표현이
저는 좋더라고요. ^^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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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71] 시계태엽 오렌지

 

 

 

 

 

 폭력과 범죄 행위가 많아지고 있는 우리 사회

 

요즘 뉴스를 보면 종종 엽기적인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한 중년 여성이 슈퍼마켓 안에서 여중생에게 심한 욕설과 폭행을 가한다거나 지하철 안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반말로 막말을 하는 등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의 호불황과 사람들의 분노에는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형태가 도가 지나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살인이라는 단어도 뉴스나 언론에서 볼 수 있다. 어마어마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친가족들을 살해하고 마는 가장에서부터 아무 죄도 없는 자식들을 무참히 폭행한 끝에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일까지. 다행히도 요즘은 그런 사건이 터지지 않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묻지마 살인', '연쇄 성 범죄 사건'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들은 일본 또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한 사회에 '도덕' '윤리'. 이런 가치들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악의 무리들이 판을 치는 고담 도시보다 더 심한 생지옥처럼 변할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저주받은 사회의 모습은 배트맨이 살고 있는 고담 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앤서니 버지스의『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원작 소설보다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더 유명하다. 소설 속 엽기적인 장면들을 영상으로 담아냄으로써 원작보다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평이 많았으며 개봉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폭력 묘사와 약물복용, 강간장면 등을 이유로 영국에서는 수십년간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 유명한(?) 영화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 영상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원작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엽기와 충격 역시 무시 못한다. 충격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윤리적인 만행만큼이나 읽는 독자들을 분노케 할 수 있다.

 

 

 

 폭력성 짙은 소설로만 볼 수 없는 『시계태엽 오렌지』

 

원작 소설에서도 과도한 폭력과 노골적인 성 묘사가 등장한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고 무비판적으로 그러한 사회폭력의 일부로서 작용하는 16세의 알렉스는 환락과 성(性), 물질적 욕망의 본성에 충실하게 폭행, 강도, 마약, 강간 등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특히 소설 초반부에 알렉스와 그의 일행등인 소설가의 부인을 윤간하는 장면은 아마도 세계문학 사상 최악의 장면일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원칙에 반발하려는 악동 기질이 보이고 있는 알렉스의 모습은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홀든 콜필드를 연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알렉스에 비하면 홀든의 악동 기질은 새 발의 피다. 알렉스는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매번 비행을 저지를 뿐이다.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고 14년 형을 언도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교도소에 수감된 알렉스는 교도소 생활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요량으로 국가에서 시험적으로 시도하는 새로운 교정 방법에 자원하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실험은 일종의 조건 반사적인 세뇌훈련을 통해서 인간의 폭력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거부반응들을 알렉스의 몸에 각인시켜 놓는다. 짧은 시간내에 범죄자들을 '개조'하여 교도소에서 방출시키고 남는 공간에 사상범들을 수용하려는 루도비코 프로젝트는 인간의 자유의사와는 무관한 국가 권력의 인간 의식영역에 대한 지배기제에 다름 아니다. 알렉스 개인의 자기반성과 교화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그저 마치 감겨진 시계태엽처럼 외부의 공권력에 의해 주입되어지고 프로그램 되어진 것일 뿐이다. 범죄적 속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국가권력의 극단적인 믿음이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형벌인 것이다. 이처럼 강요된 선(善)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앗아가버린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인생을 개척해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파괴하게 된다.

 

제목인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는 '시계태엽'과 과일 '오렌지'를 합친 말로, '조직화된 사회에서 마치 기계의 일부분처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나타나는 폭력과 그것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국가의 인권침해, 인간의 본성마저도 바꾸려는 현대의학의 오만함과 정치행정의 부도덕함, 그것을 놓칠세라 이용하는 현대 언론의 선정주의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바라보는 버지스의 시선은 무척 냉소적이다.

 

 

 

 

 위험한, 너무나도 위험한 사회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개조'하거나 '무력화'해서 아예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못하게 하는 루도비코 요법은 이제는 소설 속 엽기적인 치료 방법이 아니다. 성 범죄자들이 더 이상 재발 범죄 행위를 일어나기 않기 위해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도 논란이 남아 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격분하게 된다. 처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를 생각하면 짐승 같은 범죄자에게 어떤 처벌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화학적 거세는 물론 만일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루도비코'를 병째 투약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러나 성폭행 범죄자에 대한 대중적 증오감에 편승한 법제화는 인권 침해 우려가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도 있다.

 

버지스에게 있어서 루도비코 제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고 억업하는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소설 속 알렉스보다 더 악랄하고 지능적인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이상 그에 대한 상응한 처벌 수단도 필요하다. 그야말로 루도비코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 규제를 도입하느냐 안 하느냐에 떠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모든 인간은 제 아무리 강력한 외부 통제를 받더라도 완벽한 개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수 차례 범죄 전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랜 복역 생활 후에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비록 전과자 이력이 사회 진출에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는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반성하거나 다시 한 번 새로운 인생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범죄자에 대한 통제가 재발 범죄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더라도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완벽하게 '착한 사람'으로 변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은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과 악, 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실체를 분명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특정 사람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저 행동에 대해서 '선하다, 악하다'라고 구분할 수 있다. 한 여자가 갑자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무심코 폭행을 가한다면 분명 그 여자는 잘못된 행동이며 악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폭력을 가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과연 선한지 악한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결국에는 행동에 의한 실천에 의해서 구분할 뿐이다.  공동체의 규범이나 법률적 규칙은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실천을 통해 체득한 결과를 형상화한 것이다. 결국 선이라 함은 인간이 다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통제 장치가 고도화된 현대에서는 개인들이 점차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유 공간이 좁아지게 된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그만큼 박탈된다. 주체적인 반성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는 윤리와 도덕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처벌'과 '통제'가 옳다고 보는 대중의 인식은 범죄자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만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가 된다. '막말녀', '폭행녀'로 한 번 낙인찍힌 가해자는 수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인신공격성 비난을 받을 뿐더러 강제로 옷이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개인 신상 정보마저도 낱낱이 공개되고 만다. 자신들이 이러한 행동들인 비윤리적이면서도 악의적인 행동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라고 인식하지만 한낱 익명성을 이용한 '언어'로 이루어진 폭력이다.  범죄자라고 해도 그 사람의 신상 정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엄연히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통제는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완전한 삶을 송두리째 박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잇단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는 사회도 '위험한 사회'이지만 대중의 증오 감정에 휩쓸려 외부 통제만 가지고 범죄자의 인권은 묵살하거나 침해해도 좋다는 식의 사회 흐름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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