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끔찍한 사건이 삶을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몸도 마음도, 심지어 사랑까지도. 이별과 죽음은 예상했던 것일지라도 언제나 기습처럼 심장을 찌른다.

 

사야카는 사물에 말 거는 신기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왼손 엄지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어린 딸 미치루는 사별한 전 남편 사토루의 빈자리를 덮어주고 위안을 주는 존재이다. 어느 날, 사야카에게 옛 연인 이치로의 편지가 찾아온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는 의문의 편지와 함께 시작된다. 이치로는 왜 사야카의 집 마당에 자라는 히비스커스 나무가 있는 곳을 파려고 하는 걸까? 이 나무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이치로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토루라는 이중의 상실에 처한 사야카가 풀어내야만 하는 수수께끼이다.

 

외로움, 정신적 상처, 그리고 죽음을 이야기했던 요시모토 바나나. 이번 신작 서커스 나이트에서 그녀는 기억을 매개로 사람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바나나는 상처와 치유를 이야기하지만 무게 중심은 상처보다는 치유 쪽에 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서로의 관계와 인연 속에서 잊힌 추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등단 때부터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바나나는 상실의 상처, 그 슬픔을 이겨나가는 신비스러운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왔다. 사야카는 사토루가 심은 히비스커스 나무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포용하면서 죽음을 긍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얻는다. 히비스커스 나무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삶의 일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삶의 거친 물살 속에 휩쓸려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 새겨진 조각이다. 사야카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히비스커스 나무를 통해 과거와 현재, 자신과 세계를 포용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용기와 힘을 얻는다. 바나나는 치유의 힘을 지닌 자연에 향한 경외감을 사뭇 진지하게 표현한다.

 

사야카에게 기억이란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함께 성장하면서 고통을 안겨주며 때로는 위로하고 행복을 선사하는 절친한 친구 같은 것이다. 작가는 그녀의 입을 빌려 슬프지만 즐거운 추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통과 행복의 순간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추억은 마음의 상처를 헤집어 쑤시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이 된다.

 

서커스 나이트가 주는 느낌은 이러하다. 무언가 부족한 듯하면서도 무언가 꽉 찬 느낌. 바나나는 독자들이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썼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으며 서정적이지만 신파는 아니다. 그녀의 작품이 늘 그렇듯이 소설은 삶에 대한 진지한 교훈을 전달하기보다는 인물들이 과거의 아픔을 회복하는 과정을 사분사분하게 보여준다. 독자들이 서커스 나이트를 읽으면서 평소 잊고 있었던 섬세한 감정의 움직임을 다시 느꼈으면 좋겠다. 한 번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질 때 이 책을 접하게 되면 왠지 모를 공감과 함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다.

 

 

 

[주] 《서커스 나이트》 45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07-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한권 읽은것같아요 사이러스님 역쉬 글이~

cyrus 2018-07-21 13:10   좋아요 0 | URL
줄거리를 너무 많이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책의 가장 중요한 장면만 골라 언급했습니다. ^^;;

카알벨루치 2018-07-21 13:30   좋아요 0 | URL
전 요즘 스포노출에 대해 신경을 끄고 글을 적는데...이랬다 저랬다 하네요!
 

 

 

현재 시중에 나온 톨스토이(Tolstoy)《전쟁과 평화》 번역본은 1869년에 완성한 최종 판본을 원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톨스토이는 1860년부터 《전쟁과 평화》를 쓰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부터 생각한 《전쟁과 평화》는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데카브리스트(Dekabrist: 1825년에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들을 가리키는 명칭)가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잠시 집필을 중단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아이들에게 1812년 나폴레옹(Napoléon)의 러시아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이유로 톨스토이는 이야기가 1805년부터 시작되는 《전쟁과 평화》를 쓰게 된다. 이에 따라 기존에 구상했던 주인공들에 대한 묘사가 달라진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문학동네, 2016~2017)

* [절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이룸, 2001)

 

 

 

 

 

 

 

 

 

 

 

 

 

 

 

 

 

 

 

 

 

 

 

 

 

 

 

* 미셸 오쿠튀리에 《톨스토이 : 러시아의 위대한 영혼》 (시공사, 2014)

* 빅토르 쉬클롭스키 《톨스토이》 (나남출판, 2009)

* [절판] 얀코 라브린 《톨스토이》 (한길사, 1997)

 

 

 

 

1865년부터 1866년까지 <러시아 통보>라는 잡지에 《전쟁과 평화》 제1권에 해당하는 《1805년 : L. N. 톨스토이 백작의 장편소설》이 연재된다. 이때 톨스토이는 거의 완성된 《전쟁과 평화》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다. 1866년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제목이 붙여진 초고본이 완성된다. 이 초고본과 현재 알려진 최종 판본 사이에 차이가 있다. 초고본에서 안드레이 공작페탸 로스토프(로스토프 백작의 차남)는 살아 남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전쟁과 평화》 초고본은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되지 못한다. 1868~1869년에 톨스토이는 다시 소설을 수정하는 작업에 돌입했고,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전쟁과 평화》는 오랜 증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최종 판본이다.

 

 

 

 

 

 

톨스토이 전기 작가인 빅토르 쉬클롭스키(Victor Shklovsky)는 톨스토이가 ‘잘못 치료된 팔을 다시 고치듯이 낡은 소설을 부수고 이런 저런 안으로 바꾸어 가며 새롭게 집필’[1]했다고 썼다. 쉬클롭스키는 최종 판본이 ‘결정적 텍스트’라고 판단한 편집자들의 결정을 비판한다. 쉬클롭스키의 지적에 따르면 편집자들은 《전쟁과 평화》 원고를 완벽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수정 작업을 하면서 따로 떼어낸 원고를 복원해야 전체적으로 완벽한 《전쟁과 평화》를 만날 수 있다. 쉬클롭스키의 톨스토이 전기가 나온 연도는 1963년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톨스토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전쟁과 평화》 초고본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톨스토이는 초고본 원고를 ‘잘못 치료된 팔을 다시 고치듯이’ 개작했는데, 이미 썼던 글을 지우거나 새로운 문장을 추가해 덧붙여 썼다. 하지만 톨스토이 연구가 에벨리나 자이덴슈르는 50년에 걸쳐 5000장에 달하는 최종 필사본을 검토하여 초고본을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 1983년에 유실된 내용을 복원한 초고본이 공개되었고, 2000년에 독자들이 무난히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어져 출간되었다. 이듬해 우리나라에 초고본을 완역한 《전쟁과 평화》 번역본이 세 권짜리로 나왔으나 절판되었다[2]. 초고본과 최종 판본을 놓고 어느 것이 진짜 완전한 《전쟁과 평화》 텍스트인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러시아 학계 일각에서는 초고본 복원 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실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초고본의 존재를 부정한다.

 

 

 

 

 

[1] 빅토르 쉬클롭스키, 《톨스토이 2》(나남출판, 2009), 41쪽.

[2] 류필하 옮김, 《전쟁과 평화》(이룸, 2001), 이룸출판사는 ‘자음과모음’ 출판사 계열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07-1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가슴에 불을 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활활 탈 지는 모르겠네요 ㅋ전쟁과 평화...아

cyrus 2018-07-13 14:45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 작품 배경, 등장인물 정보를 먼저 알고 난 뒤에 소설을 읽으면 완독할 수 있어요. 사실 소설에 불필요한 인물 대화나 장면이 많아요. 저는 이 부분은 속독했어요.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톨스토이의 논문은 반드시 정독해야 합니다. ^^

카알벨루치 2018-07-13 15:20   좋아요 0 | URL
소설읽기전에 먼저 사전예비지식을 갖고 들어가야한다는 말씀! 오케이!

수이 2018-07-1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전쟁 평화 읽기 시작했는데~~

cyrus 2018-07-14 07:10   좋아요 0 | URL
문동꺼 다 읽어가고 있을 때 민음사꺼 나왔더라고요. 민음사꺼는 내년에 읽어봐야겠어요.. ㅎㅎㅎ

oren 2018-08-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에 걸쳐 5000장에 달하는 최종 필사본을 검토하여 초고본을 복원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군요. 더군다나 그 초고본을 우리말로 완역해 놓은 절판본도 있다니, 정말 깜놀입니다.^^

cyrus 2018-08-14 10:34   좋아요 0 | URL
초판본을 번역한 책과 최종 판본을 번역한 책(문학동네 판)을 비교해서 읽어보니 내용이나 인물 묘사에 차이가 있었어요. ^^

막시무스 2020-12-2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를 읽어내기 위해 선행학습 차원에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실수 있을까요?

cyrus 2020-12-20 23:51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이라면 막시무스의 질문에 답변을 잘 해드릴 것 같은데요.. ㅎㅎㅎ
이때 당시 제가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에 선행 독서를 한 책은 빅토르 쉬클롭스키의 <톨스토이> 뿐이었어요. 2권에 <전쟁과 평화> 집필 배경에 대한 내용이 나와요. 저는 읽은 책만 언급하는 성격이라 한 번도 안 읽은 책에 대해서 얘기해줄 수 없어요. 죄송해요. ^^;;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라.

그러면 그가 펼치게 되는 미학론은 적어도

나에게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올더스 헉슬리, 《연애대위법》, 동서문화사, 606쪽)

 

 

 

톨스토이(Tolstoy)《전쟁과 평화》는 한마디로 웅장하다. 이야기가 묵직한 데다 분량도 방대해 완독이 쉽지 않다. 《전쟁과 평화》는 귀족 사회의 허례허식, 남녀 간 사랑, 군인들의 애국심, 러시아 민중의 낙천성 등 인간의 다양한 정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다채로운 삶의 유형을 그린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 이야기 속에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있다. 아무도 톨스토이만큼 작중 인물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전달하는 표현력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1805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부터 데카브리스트(Decabrist, 십이월당원) 반란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한 1820년까지 15년 동안 격동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쓰였다. 이 소설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주인공을 한두 명으로 특정할 수 없다. 《전쟁과 평화》의 기본 줄거리는 네 가문의 흥망성쇠다. 볼콘스키 가문, 베주호프 가문, 로스토프 가문, 쿠라긴 가문의 일원들이 등장한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냉철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다. 그의 친구 피예르 베주호프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상주의자이다. 피예르는 표도르 돌로호프와 바람난 아내 옐렌과의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 프리메이슨 가입 이후로 그는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기분을 느낀다. 피예르는 신(神),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고민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기병 장교로 복무한 후 퇴역하여 영지를 경영한다. 옐렌의 오빠 아나톨 쿠라긴은 니콜라이의 여동생 나타샤를 유혹하는 바람둥이로 그녀와 약혼했던 안드레이 공작과 대립한다. 나타샤는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이다. 소설 초반부에 아름답고 기품 있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로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격의 변화가 나타난다. 나타샤와 쿠라긴의 염문이 알려지면서 안드레이 공작과의 약혼은 깨지게 되고, 한동안 나타샤는 실의에 빠진다. 그 후 종교에 귀의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다. 전투 중에 크게 다친 안드레이 공작을 만난 나타샤는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간호한다. 그녀는 피예르와 결혼하여 남편과 자식들을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아내로 살아간다.

 

《전쟁과 평화》는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쉽게 읽힐 책도 아니다. 사상 최대의 인물들이 나오는 만큼 서사 구조가 산만하다. 소설에 5백 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등장하는데 크고 작은 여러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서로 만나기도 하고 얽히기도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읽기 힘든 작품에 열광하는 걸까. 답은 책장을 넘기면서 경험하는 일반 소설과 다른 독특한 구성 방식에 있다.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만큼은 아니지만, 《전쟁과 평화》는 독특한 서사 구조로 되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 또는 특정 사건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두고, 작가는 개입하지 않는다. 작가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러나 《트리스트럼 샌디》는 작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서 두서없이 전개된다. 《전쟁과 평화》도 ‘기승전결’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탈피해 독자가 기대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거부한다. 톨스토이는 이야기 중간마다 전쟁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한다.

 

《전쟁과 평화》 3권 2부 19장은 보로디노(Borodino) 전투의 과정을 분석한 톨스토이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낸 글이다[1]. 18장과 20장은 피예르와 그 주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다. 보로디노 전투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시간적 배경이지만, 전쟁사에 관심 없는 독자라면 역사적 전투에 대한 작가의 분석을 건너뛸 수 있다. 《전쟁과 평화》는 총 2부로 구성된 ‘에필로그’로 끝맺는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역사관을 주장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썼다. 이처럼 소설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내는 작가의 개입이 《전쟁과 평화》의 독특한 매력이다.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의 등장과 러시아의 승리 원인을 하나의 원인으로만 설명하는 역사적 관점을 비판한다. 그에게 역사적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합쳐져서 생긴 시대적 산물인 것이다.

 

무슨 이런 장르가 불분명한 소설이 있을까. 사실 에필로그(정확히 말하면 ‘논문’)를 읽지 않아도 소설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 작가의 개입은 소설의 완성도를 떨어뜨리지만 다른 러시아 근대소설에서 볼 수 없는 《전쟁과 평화》만의 문학적 가치는 훌륭하다. 이 소설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야기 군데군데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다. 피예르는 프리메이슨의 중심인물이 되어 활동하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환락과 방탕 속에서 헛되이 낭비된다. 1847년 톨스토이는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에 돌아와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이상적인 경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상류사회에서 방탕과 나태한 삶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욕망, 죄의식에 관대하지 않았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결점과 자기비판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피예르처럼 지치지 않고 자신의 결점을 되돌아보면서 반성과 성찰을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톨스토이는 청년 시절부터 뼈아프게 고민했다. 《전쟁과 평화》 속에는 피예르와 톨스토이가 찾은 몇 개의 해답이 들어 있다.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은 신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이며, 이 움직임은 신이다. 삶이 있는 한, 신을 자각하는 기쁨이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이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가장 커다란 기쁨이다.[2]

 

 우리는 익숙한 생활의 궤도에서 내던져지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버리지만, 사실은 거기서부터 새롭고 좋은 것이 시작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습니다. 앞길에는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있습니다[3].

 

 

피예르의 말은 톨스토이의 목소리다. 그 말 속에는 주어진 삶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려는 의지력이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은 인생의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다. ‘현재’는 ‘살아야 할 이유’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삶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피예르와 톨스토이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는 삶의 의미였다. 톨스토이가 생각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선(善)이다. 그는 인간이라면 모두 이 선을 향해서 정진해야 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은 ‘사랑’이라고 했다. 각자가 자기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 즉 신과 삶을 사랑하는 선이 인생을 잘 살기 위한 힘이다. 이것이 피예르와 톨스토이가 발견한 ‘인생의 의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데 굳이 네 권짜리 두꺼운 소설을 볼 필요가 있나요?” 만약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질문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한 번은 아닌 두세 번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톨스토이는 역사와 현실 속 자잘한 삶의 체험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썼다. 무수히 얽힌 인간 관계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뛰어난 묘사력 덕분에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역사의 큰 물결 속에 흔들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톨스토이도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던 청년 톨스토이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 아니라 '톨스토이'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펼친 인생론은 적어도 이 책을 참고 끝까지 읽은 독자에게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1] 《전쟁과 평화 3》 284~291쪽

[2] 《전쟁과 평화 4》 249~250쪽

[3] 《전쟁과 평화 4》 346쪽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8-07-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는 오래전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책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합니다. 번역자가 달라지만, 같은 책도 조금은 느낌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8-07-08 20:00   좋아요 1 | URL
《전쟁과 평화》는 완역본으로 읽어야 이 소설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어요..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07-0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좋아요! 늘 미루던 이 고전을 언제쯤 읽을까 ㅎ

cyrus 2018-07-08 20:02   좋아요 0 | URL
진짜 큰 맘 먹고 시도해보세요. 정말 재미없으면 읽다가 덮으면 되니까요..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07-08 20:28   좋아요 0 | URL
러시아 소설은 왜 이리 손이 안 갈까요? 도스토예프스키도 사 놓고 먼지만 쌓이고 ㅜㅜ

cyrus 2018-07-08 20:32   좋아요 1 | URL
저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안 읽어봤어요. 늙어서 시력이 떨어지기 전까지 꼭 읽어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8-07-0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인디북에서 박형규 교수님 버전으로
읽어 보겠다고 하나씩 사기 시작했는데, 그만
절판되어 버리는 바람에 마저 사지 못해서
읽지 못했다는 변명을... ㅋㅋㅋ

cyrus 2018-07-08 20:21   좋아요 0 | URL
레샥매냐님이 언급한 책이 다섯권으로 된 그 책인거죠? ㅎㅎㅎ 저는 이룸출판사에서 나온 《전쟁과 평화》 원본을 번역한 세 권짜리 책을 가지고 있어요. 문학동네 번역본은 톨스토이가 여러 번 고친 텍스트예요. ^^

2018-07-0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8 20:31   좋아요 0 | URL
저는 블로그, SNS 둘 중 하나만 등록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SNS에 리뷰를 등록하지 않은 응모자를 심사에 배제한 건 아니라고 봐요. 공지에 보면 출판사가 ‘블로그 및 SNS 주소 동시 등록, 하나라도 등록 안하면 심사 불이익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말이 없잖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이버 블로그에도 리뷰 등록할께요.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stella.K 2018-07-09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작년인가, 재작년에 이걸 영화로 봤지.
BBC에서 6부작인가로 만들었는데 나름 꽤 잘 만들었어.
근데 솔직히 톨 할배도 그렇고, 도 선생도 그렇고
둘 다 산맥 같은 존재라 넘기가 어려워.
그런 걸 넌 읽고 이렇게 리뷰까지 썼구나.
잘 썼다. 아무래도 다음 달 당선작이 될 확률이 농후해 보인다.ㅋㅋ

cyrus 2018-07-09 18:13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셨으면 원작 소설 읽기에 한 번 도전해보세요. ㅎㅎㅎ

리뷰 대회 응모글이에요. 잘 쓴 분들이 많아서 3등에 입선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ㅠ ㅠ

stella.K 2018-07-09 19:3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
그렇다면 리뷰 대회는 정말 모르겠다.
그 보단 심사위원이 다르잖아.ㅋㅋ
그게 아니어도 넌 매달 4만원의 도서구입비가
생기는대도 양이 차질 않냐? 욕심은...
난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알았는데 까먹고 있었나?
아무튼 핑계낌에 잘 읽었네.
혹시 1등하면 한턱 쏴!ㅋㅋㅋ

2018-07-0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9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는 ‘페미니즘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태동은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권리를 주창했고 뒤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책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을 의미할 뿐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었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서 나섰고, 《여권의 옹호》에서 루소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여권의 옹호》는 여성들도 국민 교육의 대상이며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이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불멸의 작가’가 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태어난 지 11일 만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출신 모녀가 쓴 세 편의 소설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메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첫 소설이다. 『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 여성스러운 매력만을 보여주는 남성 작가의 감상 소설(Sentimental novel)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집필에 공을 들였다. 『마틸다』는 셸리의 미발표 작품이다. 『마틸다』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라는 파격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이다. 고드윈은 셸리가 보낸 『마틸다』 원고를 읽은 뒤 경악을 금치 못했고 원고 발표를 요청한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소설의 원조로 꼽히지만,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켄슈타인》은 당대의 남성 신화에 도전하는 텍스트이다. 서구 문명의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출산 없이 탄생한 괴물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불행한 결과를 상징한다. 『마틸다』의 여주인공 마틸다 역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근친 사랑’이라는 주제는 불순하고도 비도덕적이다. 파격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주인공의 주체적 여성상을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건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틸다는 근친 사랑을 금기하는 정상 가족 사회 자체를 거부한다. 그녀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마틸다』를 읽은 고드윈은 아버지를 못 잊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남성 독자들도 고드윈과 비슷한 정서를 느꼈으리라. 이들의 눈에는 마틸다가 ‘변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쌍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쌍년’의 의미는 남자들이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쌍년’과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쌍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회의 틀에 벗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성을 뜻한다[1]. 셸리가 창조한 마틸다는 남성이 부여한 ‘쌍년’의 부정성을 뒤집은 여주인공이다.

 

만약 울스턴크래프트가 문학적 역량을 더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메리』와 『마리아』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메리』의 여주인공 메리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능동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 생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내로서의 의무’에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결혼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메리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지만, 자신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앤을 향한 우정이 깊어질수록 메리는 사랑(이성애)과 결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녀는 한 차례 결혼을 경험했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헨리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이성애적 규범과 질서를 끝내 거부한다. 이 소설에서 메리는 앤과의 우정을 경험하면서 평소에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성찰과 낯선 감정들을 마주한다. 그녀는 결혼이나 가족, 연애가 이성애 중심의 관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은 ‘혼자’ 또는 동성 동거를 원하는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49쪽)

 

  메리는 심사숙고한 뒤 앤의 가족에게 남편과 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며 한동안 그 이유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편과 살지 않다니! 그럼 어떻게 살 생각이니? 그 질문에 메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메리』, 89~90쪽)

 

 

이성애 결혼과 가족 중심 규범이 주류를 형성하는 사회에서는 독립적 삶의 모델을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정상 가족’ 사회는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은커녕 편견과 차별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메리와 앤의 만남은 ‘성애 없는 헌신과 우정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 모델을 보여준다. 가부장제는 이성애 제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성애 규범이 전제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간의 우정은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메리』가 보여준 권력이 없는 여성들끼리의 결합은 당대 문학 작품들에 볼 수 없었기에 낯설다. 그래서 더더욱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를 시도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고 낯설지 몰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성애 부부관계만 정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도전한 여성들의 전위적 투쟁으로 평가받는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 미혼 여성 두 명이 동거하는 생활 방식)보다 한발 먼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원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마리아』에서도 울스턴크래프트가 구상했을 법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는 남편이 꾸민 계략에 빠져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자신이 낳은 딸에 대한 양육권마저 박탈당한다.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힌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 정신병원 수용소 관리인으로 일하는 제미마(Jemima)다. 두 여자는 출신 배경이 다르지만(마리아는 상류층, 제미마는 빈곤층), 공통으로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다. 『마리아』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면서 독자는 ‘열린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적 양식을 그대로 따라 결말을 지었다면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유토피아 소설은 현실의 문제점을 부각한 다음 이를 교정한 이상향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개혁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마리아의 수기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문제들을 분석하여 낱낱이 비판한다. 이러한 그녀의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결말을 상상해본다면, 울스턴크래프트는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을 ‘계급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것이다.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소설들은 오늘날의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이란 실용성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문학은 매우 역동적인 장르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 순간적인 고통이었으나 그것을 이겨낸 자신만의 역동적인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은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의 욕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고발의 언어로 표현했던 작가들의 삶과 닮았다. 그녀들은 일상성의 문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는 저만의 방식과 태도로, 세상에 대한 저항을 감행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의 문학은 여성에게 예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세상의 규범에 반기를 든다. 또, 잊힐 뻔한 여성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의 역할이고 존재 이유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작가들의 목소리로 세상에 발표된 페미니즘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성 독자는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싶은 현실과 미래는 이 작가들이 간절히 원했고 상상했던 현실과 미래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적극적인 독서는 끝없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장에서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를 얻게 해준다. 이러한 사유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드는 독서를 통해 여성 독자들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분명히 ‘오늘날의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 그녀들의 페미니즘 소설은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

 

 

 

 

 

[1] 페미니즘이 전유한 ‘쌍년’의 의미는 이 글에서 참고했다. [내 ID는 강남미인, 되살린 ‘쌍년’의 기록] (일다, 2017년 11월 7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8-05-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기존 관념에 대한 비판 내지 저항에 뿌리를 두는 바, 페미니즘 소설은 충분히 문학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cyrus 2018-05-28 11:41   좋아요 1 | URL
이제 우리나라도 페미니즘 문학,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만과 편견》의 원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한 뒤 내용을 수정하여 이름을 바꿔 내놓은 것인데 첫인상으로 인해 겪게 되는 연인 사이의 갈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엘리자베스 베넷(애칭은 ‘리지’)은 부유한 신사 피츠윌리엄 다아시의 청혼을 받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처음 만나 느낀 그의 오만한 태도에 못마땅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엘리자베스는 첫인상이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아시가 사려 깊은 인물임을 알게 된다.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 줄거리 자체보다는 대화 내용이나 인물의 행동과 성격묘사를 눈여겨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오스틴의 뛰어난 묘사력과 사회 비판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간혹 《오만과 편견》을 ‘빅토리아 시대 사회상이 반영된 작품’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는 고증에 맞지 않는 평가이다. 1817년에 오스틴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를 ‘섭정 시대’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면서 섭정 시대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아직 오지 않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는 엄격한 도덕주의와 ‘성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강인한 신사’의 반대편에는 ‘(신사에게) 보호받아야 할 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이 등장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은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점점 주변화되어 스스로 그늘진 존재로 머무른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9쪽)

 

 

세계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언급할 때 《오만과 편견》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첫 문장만 보더라도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깊은 혜안을 확인할 수 있다.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 그렇다. 이 첫 문장은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던 여성이 자신을 부양할 남편을 만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야 했던 섭정 시대 사회상을 압축하고 있다. 여성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삶을 동시에 강요하는 여성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였고, 빅토리아 시대로 이어져서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문화가 지배한 시대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으로 취급받았고, 자신의 진실한 욕망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그런 시대가 만든 틀을 은근슬쩍 비꼬고 이를 거부한 여성이 많지 않은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오스틴이다. 그녀는 첫 문장 하나로 ‘누구나 보편적인 진리’를 점잖게 비꼰다. 《오만과 편견》이 ‘로맨스의 고전’으로 많이 알려지다 보니 독자들은 첫 문장부터 보여준 작가의 사회 비판 의식을 간과한다.

 

오스틴은 ‘결혼에 목숨을 건 남성과 여성’을 풍자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결혼에 목숨을 건 남성’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다가 거절당한 성직자 윌리엄 콜린스이고, ‘결혼에 목숨을 건 여성’은 엘리자베스에게 퇴짜 맞은 콜린스의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인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 루카스다. 결혼을 신분 상승의 기회(샬럿) 또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기회(콜린스)로 삼는 것은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하려는 콜린스와 이를 거부하는 엘리자베스의 대화, 그리고 ‘결혼’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엘리자베스와 샬럿의 대화는 자의식이 뚜렷한 엘리자베스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제가 결혼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로, 저처럼 생활에 걱정이 없는 성직자라면 누구나 훌륭한 결혼 생활의 모범을 교구민들에게 보여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결혼이 저의 행복을 훨씬 더 증진시켜 주리라는 것을 제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콜린스, 152쪽)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재차 청혼을 받을 가능성에 자신의 행복을 맡길 만큼 그렇게 무모한 아가씨들과는 다릅니다. 그런 아가씨들이 있기는 있다면 말이지요. 제 거절은 진지한 거절이에요. 당신과 결혼해서 제가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엘리자베스, 155쪽)

 

 

 결혼은 언제나 그녀(샬럿-cyrus 주)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중략]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샬럿)

 

[중략]

 

  콜린스 씨의 아내인 샬럿, 정말로 창피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창피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더 무겁게 한 건 샬럿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운명 속에서 웬만큼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177, 180, 181쪽)

 

 

 

엘리자베스는 결혼이 인생의 목표이자 전부라고 여기는 인습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과 관점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다. 비록 그녀도 인습적인 결혼제도를 수용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여성의 감정을 억압하는 결혼제도를 거부하고, 하나뿐인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스틴은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을 통해 ‘여성이 (남성 중심의) 세상 앞에 떳떳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엘리자베스의 당당한 모습은 투박하거나 거칠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주변 인물의 심성을 꿰뚫을 정도로 섬세하다.

 

《오만과 편견》에는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는 시대적 제약’과 ‘전통적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습’ 등 매우 진지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일반적인 로맨스의 기승전결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 작가에 향한 예우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만과 편견》을 ‘고전적 연애소설’로 느껴지지 않으려면 영화보다 원작소설을 먼저 봐야 한다.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매체이다. 영국 사회의 보수적인 인습과 거기에 지배당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 등에 대한 오스틴의 세밀한 묘사는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8-03-2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보면 짚신도 제 짝있다는 말은 별로 맞는 말이 아니거나
엄청난 진실을 내포하는 말이거나 둘중 하난 것 같아.ㅋ

cyrus 2018-03-29 17:23   좋아요 0 | URL
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ㅎㅎㅎ 비혼주의자들은 그 말을 들으면 코웃음 칠 겁니다.. ^^;;

oren 2018-03-29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는 아무래도 찰스 디킨스(1812~1870)가 아닐까요? 제인 오스틴(1775∼1817)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영국 작가가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지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오만과 편견‘을 모두 극복하고 난 뒤에 마침내 펨벌리의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나눴던 대화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그렇지만 처음에 어떻게 시동이 걸렸죠?˝

˝시동을 건 시각이라든가, 장소라든가, 표정이라든가, 말이라든가 하는 것을 꼭 집을 수는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내가 시작했구나 알았을 때는 벌써 한참 지났더군요.˝

cyrus 2018-03-29 17:27   좋아요 0 | URL
부끄럽게도 올해에 제가 오스틴의 작품 중에 처음으로 읽은 게 <오만과 편견>입니다. 오늘 독서모임 때문에 드디어 오스틴의 대표작을 읽게 되었어요.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읽으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디킨스를 읽기 위한 시동이 언제 걸릴지 모르겠어요. ^^;;

2018-03-29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29 17:30   좋아요 0 | URL
저도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끔 지인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결혼 언제 하냐?”라는 말이 툭 나옵니다. 또 기혼자 지인을 만나면 자식 출산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고요. 이래서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인습이 무서워요. ^^;;

레삭매냐 2018-03-2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인 오스틴은 <설득> 읽고 보고 한 게
전부네요.

<오만과 편견>은 읽겠다고 일단 사두긴 했
는데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산 건 을유문화사 버전입니다.

오렌님이 언급해 주셨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서는 어째 디킨즈가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
습니다.

cyrus 2018-03-29 17:32   좋아요 0 | URL
<에마>,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그리고 작년에 나온 초기작 및 미발표작을 수록한 번역본을 제외하면 오스틴의 소설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는 정말 마음잡고 오스틴 전작 읽기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

transient-guest 2018-03-3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은 그저 사회상을 보여주는 소설로 봤지 날카로운 풍자는 묘사 이상의 수준으로 보지는 못했네요. 제 critical reading능력에 역시 많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8-03-31 15:27   좋아요 1 | URL
책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봐야 책 속에 숨어있는 진가를 볼 수 있어요. 저를 제외한 독서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오만과 편견>을 두 번 이상 읽었어요. 영화와 드라마도 봤고요. 시간이 흐른 뒤에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