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이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언급했다. 영국인에게 셰익스피어가 어떤 존재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상상을 해보자.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를 괴테(Goethe)와 바꿀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쉽게 결정하기 힘든 고민이다. ‘셰익스피어와 괴테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셰익스피어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어떤 연구가는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까지 했다. 반면 괴테는 굵직굵직하게 살아왔다. 여든이 될 때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또 많은 여성과 연애를 즐기기도 했다. 작가로, 과학자로, 화가로, 정치인으로 괴테가 이룩한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 한국괴테학회 괴테 사전(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 카를 비에토르 젊은 괴테(숭실대학교출판부, 2009)

* 클라우스 제하퍼 괴테(생각의나무, 2009) 

 

 

괴테가 남긴 작품들의 분량이 엄청나다. 그의 대표작을 골라 읽는 것도 만만치 않다. 괴테의 작품을 읽어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괴테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괴테에게 영향을 준 시대적 배경, 동시대 문학, 주변 인물과의 관계, 종교, 철학 등을 파악해야 한다. ‘괴테 읽기에 셰익스피어를 간과할 수 없다. 괴테가 평생의 과제로 추구했던 문학과 예술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삶이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괴테를 지배한 운명이었다. 파우스트는 셰익스피어를 사랑한 괴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1]

 

 

    

                    

 

 

작년에 괴테 사전이 너무도 조용하게 나왔다. 한국괴테학회에 소속된 독어독문학 전공 교수들이 대거 집필에 참여했다. 집필진 명단에 익숙한 이름 몇 개 보인다. 안삼환, 이인웅, 장희창, 전영애 등은 괴테의 작품을 번역한 이력이 있고, 안진태는 괴테 연구서 세 권을 펴낸 적이 있다. 한국괴테학회는 1983년에 설립되었다. 매년 12월 27일에 <괴테 연구>라는 학회지를 발간한다. 올해 나오는 <괴테 연구>는 30집이다.

 

 

 

          

          

 

 

    

사전이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괴테 사전괴테와 괴테 문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 독자를 위한 책이다.[2] 학술적인 내용이 포함됐지만, 전문적인 분석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미 독일에서는 1998, 2004년 두 차례에 괴테 사전이 출간되었다. 발간사에 따르면 독일판 괴테 사전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참고만 했다고 한다. 따라서 괴테 사전은 국내 괴테 연구자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괴테 사전의 주요 항목으로는 괴테와 관련된 주변 인물, 괴테가 활동했던 도시, 괴테의 작품(소설/산문, 드라마, ), 괴테의 문학과 예술에 관한 주요 개념, 미학 및 자연과학 논문, <잠언과 성찰> 등이 있다. 골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년에 나온 괴테 사전‘1차 발간 작업의 결과물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두 번째 괴테 사전이 발간될 가능성이 있다.

 

괴테 사전읽기가 부담되면, 카를 비에토르의 젊은 괴테(숭실대학교출판부, 2009), 클라우스 제하퍼의 괴테(생각의나무, 2009)를 참고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 문학 연구는 문학 작품에 반영된 독일 정신의 발전을 확인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 비에토르(Karl Vietor, 1892~1951)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연관성에 관심을 가졌다. 젊은 괴테1930년에 발표된 괴테 연구서이다. 비록 책의 주제가 젊은 시절의 괴테로 한정되어 있으나 괴테의 문학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괴테의 문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체험 문학이다. , 괴테의 작품에 괴테 자신의 내면적 체험(세상과 주변 인물을 바라보는 정서적 태도)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괴테의 생애를 모르고 괴테의 작품을 읽는 것은 까막눈으로 책을 읽는 상태나 다름없다. 클라우스 제하퍼의 괴테는 괴테의 작품 해설에 중점을 둔 책이다. 이 책에 가장 먼저 소개되는 괴테의 작품이 파우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괴테 읽기를 위한 가벼운 레시피로 보기 어렵다. 이 책의 저자는 이미 괴테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을 전제로 썼다.

 

 

     

 

[1] 괴테사전(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셰익스피어, 김영옥, 68.

[2] 괴테사전발간사, 6~7.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괴테와 셰익스피어
    from Value Investing 2017-12-12 23:21 
    cyrus 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어서 먼댓글로 달아 봅니다. "내 생각에 영국인들에게는 괴테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cyrus 님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제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견해는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견해가 아닐까 싶어서요. 저로서는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듯한 표현 자체'가 너무나 놀랍고 또 생경스럽기만 합니다
 
 
2017-12-12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12 18:07   좋아요 0 | URL
괴테와 셰익스피어는 동급 수준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셰익스피어가 괴테보다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

AgalmA 2017-12-16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의 책>에서 소아르스는 셰익스피어가 허점투성이라고. <리어왕>도 자기가 손봐주고 싶다고^ㅁ^); 누구 편도 들 수 없는 나자신의 깜냥을 생각했지요..허허;;

cyrus 2017-12-18 10:33   좋아요 1 | URL
로쟈님의 말씀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작품 속 남성 인물들의 성격, 감정 상태 변화 등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대요. 그런데 여성 인물의 성격은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셰익스피어 작품 속 여성 인물을 심도 있게 분석한 의견이 많지 않아요.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초조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초조감은 불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인류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잘 먹고 잘살게 됐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의 정도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부귀, 성취 등을 놓고 한숨은 쌓여간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 카프카 전집 1(솔출판사, 2017)

* 프란츠 카프카 변신(열린책들, 2009)

* 프란츠 카프카,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변신(문학동네, 2005)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민음사, 1998)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늘 일과 시간에 쫓겨야 하는 비정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상이 버거운 외판원인 그레고리 잠자(Georg Samsa)는 자신이 어느 날 아침 벌레 한 마리로 변해 버린 것을 알아차리고도 우선은 그냥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군.

사람이란 잘 만큼 자야 해.” [1]

 

 

숙면 시간을 조금 더 원하는 잠자의 생각은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잠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소시민이다. 일밖에 모르는 획일화된 삶은 잠자의 몸과 마음을 속박한다. 그는 오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아파본 적 없으며 결근을 한 적도 없다. 이때 잠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일벌레. 따라서 잠자의 변신은 갑작스러운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다. 이미 그의 정신은 변하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일상을 사는 동안 잠자는 점점 벌레로 변하고 있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레로 변한 잠자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족들은 잠자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그를 벌레처럼 대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고, 어머니는 벌레가 된 아들을 보면 기겁한다. 벌레로 변한 자신을 살갑게 대하던 누이동생마저 등을 돌린다.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껍질에 박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숨어있고 불안해할 뿐이다.

 

 

 

 

 

 

 

 

 

 

 

 

 

 

 

 

 

 

* 양정호 하청사회(생각비행, 2017)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은 회사를 위한 수단적 존재로 전락한다.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란 용어가 있다. 회사에 출근했지만 누적된 피로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근로자의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몸이 아파도 무조건 일터로 향한다. 아파서 결근하면 수당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승진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방 안에서 전전긍긍하는 잠자는 프리젠티즘에 직면한 근로자의 모습이다. 잠자는 한 번의 결근 때문에 자신이 게으른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 때문에 부모를 욕보일까 봐 결근을 스스로 거부한다. 잠자는 출근하는 데 실패하지만, 어차피 평소대로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잠자는 가족뿐만 아니라 집에 방문한 직장 상사의 눈치도 살핀다. 이때 가족과 직장 상사는 ()’이고, 잠자는 ()’이다. 갑의 위치에 있는 가족과 직장 상사는 근로자인 잠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준다. 결국, 궁지에 몰린 근로자는 주체성을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버린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

* 한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

* 박이문 문학 속의 철학(일조각, 2011)

*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미다스북스, 2017)

 

 

 

카프카가 이미 우려했던 대로 지금 우리 사회에 자의든 타의든 일만 하는 일벌레가 많아졌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심각하게 일만 하는 사람을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 비유했다. 그녀는 맹목적인 노동을 경계한다. 그렇다면 잠자는 노동하는 벌레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아렌트의 분석이 근대사회의 인간을 설명하는 것에 적합할 뿐, 자기 착취에 빠져 피로해질 때까지 일하는 후기 근대사회의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자기 착취는 말 그대로 지배자(근로 관리자)가 없는 착취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노동을 강요하는 지배자가 되는 동시에 노동에 시달리는 일의 노예가 된다. 혼자서 12, 즉 갑을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한다. ‘나는 (결근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라는 자기 긍정은 근로자를 지치게 하는 해로운 주문(呪文)이다. 잠자는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어떻게든 침대에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해.”[2] 그는 자기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가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없다. 그렇지만 잠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누이동생이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잠자가 반드시 이뤄야 할 삶의 성과이다. 그러나 잠자는 자신의 삶의 성과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잠자의 삶의 성과는 잠자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벌레로 변하는 바람에 움직임이 둔해진 잠자의 모습은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누적된 후기 근대의 인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피로사회속에 사는 현대인은 소진 증후군에 시달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은 스스로 가하는 채찍질이다. 전염병의 공포에 사로잡힌 중세 시대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마구 채찍질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태한 자라고 꾸짖으며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계속 채찍질한다. 이제 우리는 채찍질을 멈추고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 [3]

 

 

 

 

 

 

[1] 이주동 역, 변신 : 카프카 전집 1(2개정판, 솔출판사, 2003) 110

[2] 같은 책, 114

[3]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204쪽에 나오는 (굵게 표시를 한) 문장을 변형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02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02 12:03   좋아요 2 | URL
젊은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정년퇴임 연령이 와도 일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말로 재수 없으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어요. 중장년층 노동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요. 게다가 인공지능의 노동 투입 이야기까지 나오니 일할 의지가 사라질 만도 해요.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기쁨보다는 슬픔을, 즐거움보다는 아픔을 기억에서 더 쉽게 떠올린다. 굴곡진 삶의 여정에서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이 유독 더 선명한 상처로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상처는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매우 많은 것들이 생략된 소설이다. 독자들은 에츠코가 영국인 남편과 재혼하기 전에 낳은 게이코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게이코가 왜 자살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게이코는 죽은 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일본 나가사키에 살았을 때 만났던 사치코와 그녀의 딸 마리코를 기억한다. 작가가 인물 심리의 흐름에 충실하게 서술하는 만큼,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는 외부와 내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는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에츠코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지우고 싶은 상처에 대면하게 한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창백한 언덕 풍경전후 소설이면서도 여성 소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1]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시종일관 에츠코, 사치코, 마리코, 이 세 여성의 삶을 교묘히 병치시킨다. 따라서 하나의 단선적 사건이 인과관계를 따라 풀려 가는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에게 소설은 다소 지루하며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창백한 언덕 풍경여성 소설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소재가 여성 문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는 전후 세대 여성의 삶과 심리상태를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가족 구성원에 대해 신경을 놓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에츠코 :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난 지금 아주 행복해요. 남편의 일도 잘 풀리고 있고, 원할 때 아기를 갖게 되었지요…‥.”

 

사치코 : “저 애는 사업가가 될 수도 있고, 영화배우가 될 수 있어요. 미국은 그런 곳이에요, 에츠코. 많은 일들이 가능해요. 프랭크 말이 나 역시 사업가가 될 수 있대요.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요.”

 

에츠코 : “그렇겠지요. 다만 난 개인적으로 현재 삶에 무척 만족해요.” [2]

 

 

나가사키에 살았던 시절, 에츠코는 일본인 남편을 만나 결혼해 첫째 딸인 게이코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에츠코는 가부장 사회에서 착한 여자로 인정받는 순종형 여성상이다. 그녀는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츠코가 어엿한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한 여성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다. 상처의 원인은 자살한 딸에 대한 기억이다. 에츠코는 죽은 딸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치코는 엄마가 가정을 위해서 해야 할 임무라는 환상에 휩싸여 과도한 몫을 떠안으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개인 사업과 딸 양육을 병행하는 슈퍼 우먼을 꿈꾼다. 장밋빛 미래가 보장될 거로 믿는 사치코는 직업적 성취와 모성의 의무가 대립하면서 느끼게 될 갈등을 예상하지 못한다. 사치코와 마리코는 엄연히 말하면 난민이다. 난민이란 본래 전쟁이나 재난을 당해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는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나가사키에 정착한다. 그러나 나가사키 주민들은 모녀를 외지인으로 인식하여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규범이 와해하면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지목해 분노를 키우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는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모녀는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된 약자에 속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이다. 모녀가 사는 허름한 오두막 내부는 외부와 소통이 잘 안 되는 고립되고 자폐적인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내 관심은 사치코의 찻주전자에 가 있었다. 연한 빛깔의 도기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좋은 물건이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찻잔 또한 같은 재질의 섬세한 다기였다. 그렇게 사치코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 진흙이 노출된 툇마루 바닥과 다기 세트의 대조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난 좋은 그릇을 쓰는 데 익숙해요, 에츠코. 알다시피 언제나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니거든요.” [3]

 

 

사치코가 소유한 찻잔 세트는 고립된 삶을 살던 사치코의 억압된 욕망을 자극한다. 빈곤한 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원천봉쇄한다. 가난한 사치코가 화려한 다기 세트를 사용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잠재의식을 읽을 수 있다. 잠재의식 속에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다. 사치코는 영어를 유창하게 쓸 줄 안다. 그러나 그녀의 전남편(사치코가 만나는 미국인 프랭크와 다른 인물이다)은 그녀의 외국어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쪽의 언어(일본어)가 다른 쪽 언어(외국어)의 발화를 제한하는 방식은 여성의 입을 말할 수 없는 입으로 만든다. 미국의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말을 빌리자면 남편의 강압에 밀린 사치코가 사용하는 일본어는 압제자의 언어이다. 가부장제 안에서 압제자 역할에 있는 남성은 젠더권력뿐 아니라 언어 권력조차 오랫동안 쥐어 왔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압제자의 언어는 여성의 욕망을 억압한다.

 

마리코는 세 여성 중 가장 불행한 인물이다. 전쟁의 폭력성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흔적을 남긴 채 또 다른 폭력의 온상이 된다. 마리코는 전쟁 중에 아기를 살해하는 여자를 목격한 이후로 오랜 세월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숨결이 예민한 마리코의 마음에 배어들었다. 미래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치코는 과거에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딸의 심리 상태를 예사롭게 본다. 과거를 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사치코)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래를 거부하는 자(마리코)에서 생기는 괴리감은 불편함을 낳는다.

 

 

 

 

에츠코가 보는 앞에서 거미를 먹는 시늉을 한 마리코의 돌발행동은 자신의 절망적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사치코의 모성애를 거부하는 저항 행위이다. 거미는 새끼를 보호하고 있는 모성을 상징한다. 설치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초대형 거미 형태의 작품에 마망(maman: 엄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르주아는 알을 품는 거미를 통해 어머니의 모성애를 형상화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상처받기 쉬운 여성의 내면을 표현했다. 거미를 위협하는 마리코의 돌발행동에서 에츠코가 인지하지 못한 정신적 외상(trauma)’을 포착할 수 있다. 에츠코는 마리코의 행동을 바보 같은 짓으로 생각한다.[4] 그녀의 태도는 우리가 타인의 비정상적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 마리코의 돌발행동은 혐오스러운 미친 행동이 아니다. 사치코에 대한 분노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은 구조 요청 신호이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생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작가는 전쟁의 비극성과 더불어 개인의 정신적 외상과 기억을 집요하게 다룸으로써,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는 에츠코와 사치코가 원했던 가정이 결코 상처받은 여성들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춰낸다. 다만 창백한 언덕 풍경여성소설이라고 해서 페미니즘 소설로 단정할 수 없다. 영국의 언론인 로잘린드 카워드(Rosalind Coward)[5]는 막연하게 여성 중심의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로 보는 비평 방식을 경계한다.[6] 작가는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 사연이 있는 여성들을 위한 섣부른 치유책을 내놓지 않는다. 거짓 희망에 매달리지 않고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과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에츠코는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살아있음의 강력한 증거라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볼 때 정치적 관심사를 부각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소설과 거리가 멀다. 창백한 언덕 풍경이 전달하고자 한 여성의 감정과 정서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페미니즘 소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시구로의 문체와 언어는 규정짓기 어려운 불안과 혼돈의 심리도, 스쳐 지날 법한 찰나의 상황조차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숨이 막힐 정도로 섬세한 언어로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헤집는 이야기의 전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도 치유의 방법이다. 외면하고 싶어도 담담하게 대면하는 것. 그것이 이시구로의 첫 소설을 접한 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 출처: [희미한 언덕 풍경](로쟈의 저공비행, http://blog.aladin.co.kr/mramor/9682147)

 

[2] 58~59

 

[3] 25

 

[4] 108쪽

 

[5] 그녀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푸드 포르노(Food Porno)’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푸드 포르노1984년 로잘린드 카워드가 자신의 저서 <여성의 욕망>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이다.

 

[6] 로잘린드 카워드 여성 소설은 페미니스트 소설인가?, 페미니스트 비평과 여성 문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7-11-20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서평인가에서 보니 가즈오 이시구로 선생
의 데뷔작을 나비 부인에 비교하는 글도 있더
군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 않나 싶더군요.

아무래도 작가의 데뷔작이라 그런지 개연성이나
핍진성에서 상대적으로 대표작에 비해 부족하
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cyrus 2017-11-20 14:24   좋아요 0 | URL
제 나름대로 그럴듯한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 소설을 대단한 작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야기 곳곳에 독특하면서도 모호한 묘사들이 있어서 속독하기 힘든 소설입니다.

2017-11-20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0 19:43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이시구로가 쓴 작품들의 제목이 독특해서 제목만 보고 줄거리를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소설을 다 읽고난 뒤에 제목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야 합니다. ^^
 

 

 

어제 퇴근길에 중고 책 전문 서점 ‘글수레’에 들렸다. 그곳에서 희귀한 절판본을 발견했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성애소설을 총 세 권으로 번역한 《완역 돈 쥬앙》(보람, 1995)이다. 필자는 이 책의 1권과 2권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완역 돈 쥬앙》을 처음 공개했을 때 ‘두 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관련 글: <야설작가 아폴리네르> 2014년 10월 23일 작성). 이 글은 2014년에 작성한 글을 수정하기 위해 썼다.

 

《완역 돈 쥬앙》의 번역 저본은 『Les Onze Mille Verges』(1907),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1911)이다. 아폴리네르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완역 돈 쥬앙》 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완역 돈 쥬앙》 1권 목차

제1부 우연한 로맨스

제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내용이 2권으로 이어짐)

 

《완역 돈 쥬앙》 2권 목차

제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완결 편)

제3부 여자의 환상에 마침표를 찍을 때

 

《완역 돈 쥬앙》 3권 목차

제4부 일만 일천 개의 채찍

 

 

 

출판사는 이 책을 ‘장편소설’로 소개했지만, 아폴리네르가 익명으로 발표한 두 편의 소설은 ‘장편’으로 보기 어렵다. 제1부(‘우연한 로맨스’)는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을 번역한 것이고, 제4부(‘일만 일천 개의 채찍’)는 『Les Onze Mille Verges』를 번역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제2부, 제3부는 무엇일까. 이야기의 흐름과 표현력을 봐서는 확실히 아폴리네르가 쓴 글이 아니다. 출판사가 책의 분량을 장편소설 정도로 늘려서 판매하려고 이름 모를 작가의 성애소설 두 편을 끼워 넣었다. 외국 작가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원작을 임의대로 편집하면서까지 책을 펴냈던 90년대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출판사의 거짓 홍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 아폴리네르, 곽효원 역 《돈 주앙 : 소년 돈 주앙의 회상》 (예문, 2014)

* 아폴리네르, 곽효원 역 《돈 주앙 : 일만 일천 개의 채찍》 (예문, 2014)

 

 

 

글수레 서점에 가보면 전권이 다 갖춰진 《완역 돈 쥬앙》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의 정가는 6,500원이다. 만나기 힘든 희귀 중고책이라서 중고가가 비싸다. 한 권당 15,000원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완역 돈 쥬앙》 3권만 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낱권을 사기 위해 내야 할 15,000원은 ‘매몰 비용’이 될 수 있다. 또 《완역 돈 쥬앙》 3권과 같은 내용인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문학수첩, 1999)을 가지고 있어서 다시 살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 책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구매 결정을 포기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완역 돈 쥬앙》 전 3권을 사고 싶은 분이 있으면 지금 당장 책을 주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글수레 서점에 전화로 문의해서 주문할 수 있다. 대구에 거주하고 있으면 서점에 직접 방문해서 사면 된다. 《완역 돈 쥬앙》 전 3권의 가격은 총 45,000원이다. 이 책을 사는 것보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번역본을 사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 아폴리네르, 용광남 역 《신역 돈 쥬앙》 (픽션뱅크, 1999)

 

 

 

 

1999년에 세 권짜리로 된 《신역 돈 쥬앙》(픽션뱅크)이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이 책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신역 돈 쥬앙》은 1995년에 나온 《완역 돈 쥬앙》과 비슷한 형식의 번역본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자료실에 《신역 돈 쥬앙》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보려면 서고 자료실 관리를 담당하는 사서에게 대출 요청을 하면 된다.

 

 

 

 

 

 

 

 

 

 

 

 

 

 

 

 

 

 

* 아폴리네르, 성귀수 역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 (문학수첩, 1999)

 

 

 

《신역 돈 쥬앙》이 나오고 두 달 뒤에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이 출간되었다. 알라딘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의 초판 발행일이 ‘1999년 1월’로 나오는데, 틀린 내용이다. 정확한 초판 발행일은 ‘1999년 9월 4일’이다. 《신역 돈 쥬앙》의 초판 발행일은 1999년 7월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 시리즈,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오페라의 유령》(문학세계사, 2009) 등 불문학 작품들을 번역한 성귀수 시인이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표제와 같은 제목의 소설과 또 다른 성애소설 『어린 동쥬앙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다.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의 원제는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이다.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은 철저하게 비밀에 휩싸인 채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렇다 보니 아폴리네르는 소설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성애소설을 출판하기로 했던 출판업자는 아폴리네르가 제출한 원고에 실망했다. 출판업자는 원고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는 출판업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출판하기로 계약했던 『사랑스러운 검둥이 여자』 집필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출판업자는 기다리다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작가가 쓴 성애소설인 『하얀 에르민』을 아폴리네르의 소설과 함께 묶어 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아폴리네르 사후에 출판업자가 만든 책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하얀 에르민』을 아폴리네르가 쓴 작품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했다.

 

필자는 2014년에 작성한 글을 통해 『하얀 에르민』을 《완역 돈 쥬앙》 2부 이야기와 같은 작품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추정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완역 돈 쥬앙》의 번역자가 출판 뒷이야기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완역 돈 쥬앙》 2부와 3부의 원제가 무엇이고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다.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이 정액과 피가 난무하는 ‘하드코어 포르노’라면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은 자극적인 성애 묘사에 충실한 ‘B급 포르노’이다.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에 세세하게 나온 성애 묘사들을 학문적 용어로 분류, 정리하면 이렇다.

 

난교, 사디즘(Sadism), 마조히즘(Masochism), 남색(Sodomy), 스카톨로지(Scatology), 색정광(Satyriasis), 님포마니아(Nymphomania, 여성 색정광), 페도필리아(Pedophilia),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등장하는 색정광들은 주저 없이 섹스의 향연에 뛰어든다. 색정광이 타자를 대하는 인식은 무척 단순하다. 타자를 자신의 성족 욕구를 채워주는 장난감으로 대할 뿐이다.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이성의 판단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섹스에 미쳐버려서 감정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통제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인륜을 저버린 범죄자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열광했다. 초현실주의적 선언에 참여한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을 ‘포에지(poésie: 시 또는 시적 정취)와 섹스를 결부시킨 작가의 독신자(瀆神子: 신을 모독함)적, 예언자적 의식’이라고 극찬했다.

 

 

 

 

 

 

 

 

 

 

 

 

 

 

 

 

 

 

 

 

 

 

 

 

 

 

 

 

 

 

 

 

 

 

 

 

 

 

 

 

 

 

 

 

 

 

* 호세 피에르, 르네 파스롱 《초현실주의》 (열화당, 1994)

*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한길아트, 2001)

* 피오나 브래들리 《초현실주의》 (열화당, 2003)

*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초현실주의》 (마로니에북스, 2008)

* 앙드레 브르통 외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

* 로라 톰슨 《초현실주의》 (시공아트, 2014)

* 알렉산드리앙 《에로틱 문학의 역사》 (한숲출판사, 2005)

 

 

 

초현실주의는 현실 세계로부터 단절을 추구하는 예술사조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보다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신, 성(性), 이성을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억압으로 규정한다. 그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인간 해방’의 실체는 ‘상상력의 해방’이다. 아라공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서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적 면모를 확인했다.

 

 

 

 

 

 

 

 

 

 

 

 

 

 

 

 

 

 

 

*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문학과지성사, 2004)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3서》 (문학과지성사, 2006)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4서》 (문학과지성사, 2006)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미셸 데코댕(Michel Decaudin)은 아폴리네르를 ‘라블레(Francois Rabelais)의 소스에 맛 들인 사드(Marquis de Sade)’라고 평가했다.[1] 그의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라블레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지성사, 2004)을 통해 풍요롭고 자유로운 인간 해방을 제시했다. 소설 속 거인 팡타그뤼엘(Pantagruel)의 이름에서 딴 팡타그뤼엘리슴‘육체적 만족을 통해 삶을 즐기려는 태도’[2]를 의미한다.

 

 

 

 

 

 

 

 

 

 

 

 

 

 

 

 

 

 

 

 

 

 

 

 

 

 

 

 

 

 

 

 

* 사드 《사드의 규방철학》 (도서출판b, 2005)

* 사드 《소돔의 120일》 (동서문화사, 2012)

* 사드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워크룸프레스, 2014)

* 존 필립스 《HOW TO READ 사드》 (웅진지식하우스, 2008)

 

 

 

 

라블레는 ‘웃음’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사회를 비판하고 구시대를 파괴했다면, 사드는 극단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법과 종교를 거부하고 조롱했다. 사드가 선택한 행동은 펜과 종이를 통해 외설과 부도덕, 신성모독의 악취를 뿜어내는 일이었다. 사드는 사회를 위반하는 행동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무신론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신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관습과 규범을 뛰어넘는 위반 행동을 할 수 있으면 여기에 대해 비난을 받지 않게 된다. 또 본능에 충실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팡타그뤼엘리슴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섹스를 즐기면서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쾌락주의라면 사드의 리베르탱(libertin)은 팡타그뤼엘리슴을 뛰어넘는 극단적 자유주의다. ‘무신론’을 이용하여 사회적 금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일탈을 관용한다.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맛있는 육체’를 노리고, 마음껏 누린다. 자신들의 행동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팡타그뤼엘리슴과 리베르탱 일부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아폴리네르 《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2004)

 

  

 

그러나 사드와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의 차이점이 있다. 사드는 법에 얽매인 결혼 관계와 인간의 종족 번식을 반대했다. 사드는 오로지 자기 삶의 일차적 목표인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집중했다.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의 주인공은 하렘(harem) 분위기가 있는 성에 거주하면서 성안의 모든 여성을 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방탕한 여성 편력을 조국의 인구를 늘려주는 애국적인 의무라고 말한다. 주인공의 황당한 생각은 아폴리네르의 초현실주의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2004)에도 나온다. 방탕한 성 생활을 출산과 연관 짓는 주인공의 생각은 자손 번식을 거부하는 사드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아폴리네르, 라블레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는 공통으로 ‘인간 해방’을 갈망했으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여성’을 배제했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부터 시작해서《팡타그뤼엘 제3서》《팡타그뤼엘 제4서》(한길사, 2006)까지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성적 쾌락을 누리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여성 인물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보기 어렵다. 아폴리네르의 성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끝내 남성의 쾌락을 위해 희생당하며 쾌락에 미친 남성들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초현실주의를 ‘남성 명사’라고 적은 내용을 볼 수 있다.[3] 식자층 집단을 지배한 남성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상식, 관습 등을 부정했으면서도 ‘여성은 열등하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상하로 나뉜 지배 구조를 만들었다. 이 경우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존재는 누굴까?

 

 

 

 

 

[1]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 8쪽

[2]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14쪽

[3] 《초현실주의 선언》 89쪽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1-0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2 18:5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나오는 신간도서들이 반갑긴 하지만, 사람들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책이 태반입니다. 북플에 신간도서를 소개하는 분들이 많아요. 재미는 없지만, 저 같은 별난 독서 취향을 가진 놈도 있어야 합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1-0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리뷰는 읽을때 마다 항상 입이 떡 벌어지네요..도대체 이 해박한 지식과 열정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cyrus 2017-11-02 18:58   좋아요 2 | URL
제 글의 80%는 책에서 나온 것이에요. 제 역할은 책 속의 내용을 추려서 내 입맛에 맞춰서 편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에 편향과 오류가 있어요. 그것을 확인하고 고치기 위해서 책을 읽어요. ^^

syo 2017-11-02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올라올 때 보면, 정말 ‘꾼‘인데....^-^b

cyrus 2017-11-02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말 많고, 아는 척하는 지적 허영꾼입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1-0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대단해요!

임모르텔 2017-11-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졸리니 감독의 <살로,소돔의 120일>을 예전에 봤어요. 이 영화를 만든후에 살해당했다고해요.책으로도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7-11-03 20:12   좋아요 0 | URL
악랄하고, 불쾌한 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
 
거꾸로 대산세계문학총서 59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지음, 유진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컬트(Cult)는 특정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광적인 호응을 의미하는 단어다. 소수의 팬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말할 때 쓰인다. 사실 컬트 문화의 정의는 모호하며 그 범주를 한정 짓기도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컬트 문화는 ‘세속적인 주류에 향한 반기’를 목표로 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컬트’가 들어간 작품 대부분은 난해하고, 재미가 없다. (예외로 재미 있어서 대중의 인기를 받는 컬트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록키 호러 쇼') 컬트 문화는 기존 사회의 관념과 가치를 뒤엎으면서 전통적인 서술 구조를 깨뜨린다. 황당한 상황 전개와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이 있는 컬트영화 근저에 반체제, 반권위와 같은 가치 전복의 비수가 감춰져 있다. 소수의 독자가 인정하는 소설은 ‘컬트 소설’로 분류된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거꾸로》(문학과지성사, 2007)는 ‘컬트 소설’로 불릴 만하다.

 

데 제쎙트(Des Esseintes)는 세상에 유행하는 문화나 취향에 염증을 느낀 젊은 귀족이다. 그는 솟구치는 욕망 · 열정을 지녔으나 분출구가 막혀버린 소외된 변두리 인생의 ‘난쟁이’다. 변두리 인생이 현실을 탈출하는 방법은 현실과의 정면 대결이 아니라 환상으로의 도피다. 데 제쎙트는 약 1년간 자신이 만든 별장(인공 낙원)에서 생활한다. 《거꾸로》는 ‘낡은 세계’로 상징되는 19세기 말 시대를 더 이상 투쟁으로 개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을 환기한다. “자! 무너져라, 사회여! 제발 죽어라, 낡은 세계여!”라는 데 제쎙트의 절규는 소설의 핵심 메시지다.

 

《거꾸로》 출간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분노했고, 데 제쎙트를 ‘별난 편집증 환자’로 취급했다. 《거꾸로》는 초현실주의적 환상과 독창적인 감각이 넘치는 실험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884년에 나온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계 부품으로 조립된 인조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족관, 알록달록한 보석이 박힌 ‘금박 거북이’, 여러 가지 종류의 술통으로 이루어진 ‘미각 오르간’ 등이 눈에 띈다. 데 제쎙트의 꿈에 등장한 여성들이 예사롭지 않다. 끔찍한 몰골을 한 매독의 여신, 몸에 식물이 자라나는 꽃의 여신에 대한 묘사를 보노라면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런 가상 인물을 창조했는지 궁금하게 느껴질 정도다. ‘엽기’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난해한 광기로 가득한, 조금 엽기적이고 현대적인 소설이다.

 

작가는 데 제쎙트가 겪게 된 일과 그가 느끼는 다양한 생각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기존 소설 서사 구조를 부쉈다. 독자들이 《거꾸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길어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기말을 궤도로 삼아 해석 불가능한 몽상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댄디즘(dandyism: 타인에게 정신적 우월감을 표출하는 태도), 보들레르(Baudelaire),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상징주의를 표상하는 문학적 요소와 이미지도 풍성하다. 데 제쎙트의 독서 편력과 미적 취향은 기존 사회와 기성세대의 관습 혹은 가치관으로부터 일탈한 하위문화(counter-culture)에 가깝다. 보들레르, 포, 르동 작품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주제는 일상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이채로운 것을 탐닉하는 것이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살인 · 광기 · 환상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소재를 스스럼없이 취한다. 일반 독자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와는 다른 소재들이다.

 

데 제쎙트가 지향하는 세계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설정 가능한 자유로운 사회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세상의 논리와 도덕률에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도 데 제쎙트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난쟁이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는 유행 문화를 멸시하고, 거금을 들이면서 ‘인공 낙원’을 꾸며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은 ‘절망’에 이르는 자해일 뿐이다. 그럴 때 데 제쎙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소수의 난쟁이에게 환상을 꿈꿀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상상력은 치유를 위한 것이다. 상상력은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마약이 아니다. 상상력은 현실에 갇힌 진짜 의식을 깨우는 약이다. 상상력이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라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라 2017-10-2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항은 절망에 이르는 자해일 뿐이다라는 문장과 상상력은 의식을 깨우는 약이다라는 문장을 연결지으니 왠지 암담해지는구요 결국 현실은 견뎌야하는 대상일 뿐이구나 싶으니 암울하네요...

cyrus 2017-10-25 14:33   좋아요 1 | URL
체 게바라의 명언이 있잖습니까.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자.” 본인의 의지와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면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로 믿습니다. ^^

sprenown 2017-10-2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이 발음도 어려운 작가도 있었나요? 감탄합니다... 이 무식과 무지의 베일은 언제 벗겨질런지..과연 죽기전에 저 책 1001권을 다 읽고 죽을 수는 있을 런지!..끊임없이 상상해야 겠네요.. 이런 암담한 밥벌이의 삶을 살더라도, 죽기전에 1001권을 다 읽고 죽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cyrus 2017-10-25 14:37   좋아요 1 | URL
위스망스가 에밀 졸라와 동시대에 살았던 작가입니다. 졸라와 같은 자연주의 문학을 공유했지만, 나중에 위스망스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에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죽기 전에 어떻게 1001권의 책을 다 읽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은 똑같을 수가 없죠. ‘1001권 읽기’는 제 개인적인 작업입니다. 여기에 포함된 책을 반드시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책입니다. ^^;;

임모르텔 2017-10-2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네요. 상상은 시간과 조건이 맞닿는 시점이오면, 현실로 물현화되죠. 현재 이 지상의 모든 상황과 물건들이 인간들의 생각상상에서 다 출현된 것이니까요~ 이 사회의 극악무도한 범죄들도...수많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실행하진 못하지만 강력한 집단의식이 낳은 대리자들이라고.. 사색하곤해요!

cyrus 2017-10-25 14:40   좋아요 0 | URL
변질된 상상력은 ‘망상’입니다. 망상이 현실에 출현하면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나요. 이런 최악의 결과가 나올까 봐 두려워하면 상상력의 힘을 과소 평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