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알프레트 쿠빈 지음, 홍진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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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쿠빈(‘알프레드 쿠빈’으로도 표기할 수 있다, Alfred Kubin)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화가다. 쿠빈은 칸딘스키와 함께 첫 번째 ‘청기사’ 그룹전에 참여했고, E. A. 포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등을 위한 삽화를 제작했다. 쿠빈은 괴생물체, 지옥, 인간의 욕망과 타락 등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기괴한 그림체로 표현했다. 그래서 쿠빈의 그림은 어느 하나 불쾌하지 않은 게 없다.

 

쿠빈은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친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는데,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섬약한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병약한 쿠빈에게는 학교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쿠빈은 어머니의 무덤에 찾아가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쿠빈은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창 잘 나가던 중에 쿠빈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쿠빈은 또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쿠빈은 우울증에 억눌려 잠잠했던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했고, 그는 4주 만에 자신의 유일한 장편소설 《다른 한편》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1909년에 발표되었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소설답게 환상적인 세계와 초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명이며 직업은 화가다. 어느 날 주인공의 친구 클라우스 파테라는 자신이 세운 ‘꿈의 왕국 페를레’에 주인공을 초대한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꿈의 왕국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한다. 꿈의 왕국은 외부 세계의 침입을 차단하는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지역이다. 꿈의 왕국을 드나들 수 있는 문도 하나뿐이다. 꿈의 왕국에 사는 ‘꿈의 주민들’은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옛 것을 좋아하며 나날이 진보하는 현대 문화를 거부한다. 파테라는 꿈의 왕국 지배자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가 좀처럼 힘들다. 주인공의 아내는 파테라를 직접 마주친 이후로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꿈의 왕국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로 하지만, 실패한다. 주인공과 이곳 주민들은 알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는 파테라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 출신의 억만장자 허큘레스 벨은 꿈의 왕국에 들어온 ‘외부인’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을 펼쳐보려고 했으나 파테라는 미국인을 무시한다. 자신의 사업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에 못마땅한 미국인은 꿈의 왕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그는 ‘루시퍼’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꿈의 주민들에게 ‘이성’과 ‘진보’의 가치를 전파한다. 또 주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파테라를 비난하는 선전을 펼친다. 미국인은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선동을 일으켜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꿈의 왕국에 내부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한 일들이 발생한다.

 

소설 1부, 2부는 주인공이 꿈의 왕국에서 생활하면서 겪게 된 일련의 경험들을 비교적 평이하게 묘사하면서 전개된다. 3부 3장부터 이야기는 ‘범상치 않은 전개’로 흘러가고, 독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3부 3장 제목은 ‘지옥’이다. 3부 3장은 평화로운 꿈의 왕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리듯 이상 증세를 보인다. 사람을 죽이는 난폭한 행동도 이어진다. 꿈의 왕국 전역에 ‘잠 중독’이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 병에 걸린 주민들은 잠들어 버린다. 그들이 잠든 사이에 동물과 곤충들이 왕국을 점령한다. 꿈의 왕국은 ‘동물의 세계’로 변하고, 퇴폐적 욕망에 사로잡힌 주민들은 무질서한 삶을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주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무의미하다. 번역본의 ‘해설’ 편에 《다른 한편》을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들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기존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싶다. 나는 이 소설이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한 창작 방식인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쓰였을 거로 생각해본다. 주인공의 꿈을 묘사한 2부 5장 마지막 장면(부제는 ‘꿈의 혼란’, 211~214쪽)과 3부 3장 ‘지옥’ 편을 읽어 보면 초현실주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치 꿈을 꾸듯 작업을 했다. 그들은 논리와 합리, 이성이 무의식을 구속한다고 봤다. 그들이 선호한 자동기술법은 미리 계획하고 다양한 조건을 철저히 계산하는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무의식 상태에 자신을 내려놓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꿈의 왕국이 몰락하는 과정은 예기치 않은 변모의 연속이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 앞에 무너지는 왕국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무(無)’로 귀결되는 허무적인 패배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이미 낡고 닳아서 힘없는 파테라의 권력을 파괴하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환기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무시무시한 악몽에서나 볼 법하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담담하게 묘사한다. 기괴한 상황과 아무 상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의 모습은 거대한 세계 하나를 파괴하는 인간 내면의 잔혹성과 대비돼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다른 한편》에 관통하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은 섬뜩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쿠빈의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소설이 보여준 그로테스크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로테스크는 우스꽝스러운 것과 괴기스러운 것 둘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범주다. 따라서 《다른 한편》이 발산하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은 이중의 의미로 구조화되어 있다. 하늘에서 추락한 기구의 파편을 ‘거대한 고래’라고 착각하는 주민들의 반응(294~296쪽), 꿈의 왕국 주민이자 은행가인 알프레트 블루멘슈티히의 죽음(310쪽)은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를 보여주는 적절한 장면이다. 쿠빈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죽고 죽이는 게 우스운 일이 된 부조리함을 연출한다. 《다른 한편》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알프레트 쿠빈’이 누군지 모르는 독자라도 상관없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당신도 소설의 ‘마력’에 이끌려 끝까지 다 읽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단연 3부 3장이다. 이 장의 제목은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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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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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뮤리얼 스파크(Muriel Spark)의 대표작이 나오게 돼서 무척 반갑다. 1961년에 발표된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The Prime of Miss Jean Brodie)는 이미 오래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번역본 제목은 《느릅나무 밑에서의 수업》(마루, 1993)이다. 이 제목을 보면 왜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희곡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생각나는 걸까? 아무튼, 1993년에 나온 번역본은 절판됐다가 이번에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했다.

 

진 브로디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녀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 교사로 일한다. 브로디는 교정에 있는 느릅나무 밑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 ‘느릅나무 밑에서의 수업’을 받는 다섯 명의 학생들(샌디 스트레인저, 로즈 스탠리, 유니스 가드너, 제니 그레이, 메리 맥그레거)은 학교 내에서 ‘브로디 무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브로디는 학생들에게 진취적으로 살아가라고 강조한다. 그럴 때마다 브로디는 제자들을 ‘크림 중의 크림(crème de la crème: ‘최고’를 뜻하는 프랑스어)’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감이 가득한 브로디는 아직 자신의 전성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학교 측은 보통 교사와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브로디를 사직시키려는 방안을 생각해보지만, 브로디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브로디가 생각하는 ‘전성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교정 느릅나무 밑에서 브로디 무리를 가르치는 일을 의미한다. 브로디는 자신의 뚜렷한 교육관에 신념을 가지고 브로디 무리를 가르친다. 그녀는 주입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학교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고 거부하는데, 자신의 교육 방식은 학생들이 스스로 지식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머리에 많은 정보를 쑤셔넣는 것이 교장의 방식이야. 내 방법은 지식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고. 내 방식이 어원적 의미에서 더 진정한 교육이라 할 수 있지. 교장은 내가 소녀들의 머리에 어떤 생각을 집어넣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건 실은 교장의 방식이야. 내 방식은 그 반대라고. 내가 너희의 머리에 어떤 생각을 집어넣었다는 소리를 하도록 그냥 두어선 절대 안 돼. 샌디, 교육의 의미가 뭐라고?”

  “밖으로 이끄는 거요.”

 

(49쪽)

 

 

브로디 무리는 다른 교사들의 수업에서 느낄 수 없는 브로디식 교육법에 매료된다. 브로디를 따르는 다섯 명의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들을 ‘브로디 무리’라고 부르는 것에 희열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들이 ‘브로디 무리’에 속한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심리학자 매슬로(Maslow)는 인간은 욕구 충족을 위해 행동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내재한 안전과 소속감, 자아존중,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 소설에 적용해볼 수 있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 비추어서 소설에서 드러난 브로디 무리의 정서적 반응 및 변화를 유추할 수 있다. 욕구 단계설에 따르면 브로디 무리는 3단계4단계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3단계는 집단에 소속되려는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외로움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4단계는 타인의 인정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구이다. 자신감을 느끼고, 자신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느끼려는 욕구가 이에 해당한다. 이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열등감을 느낀다. 브로디는 4단계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자신만의 교육 방식으로 브로디 무리를 가르치는 위치에 오른 ‘전성기’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브로디 무리는 ‘크림 중의 크림’으로 성장해서 전성기를 누리고 싶어 한다. 브로디 무리는 4단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브로디의 가르침을 따른다.

 

인간이 행동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이다. 브로디는 자기 인정 욕구가 강한 편이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하는 음악 교사 고든 로더, 미술 교사 테디 로이드와 연애를 한다. 브로디도 ‘인간’이고, 연인을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랑 욕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연애는 실패로 끝나게 되고, 좌절한 브로디는 자신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한탄한다. 사랑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탓인지 브로디는 실연의 상처를 애써 숨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연애 경험이 사직 근거가 될 수 없다면서 자신의 사랑은 육체적 관계가 없는 플라토닉 러브라고 강조한다. 브로디는 자신의 진취적인 이미지가 훼손될까 봐 연애 사실을 브로디 무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가장 믿고 사랑하는 유일한 제자인 샌디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브로디는 외강내유형 인물이다.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나, 속은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어쩌면 브로디는 연약한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서 자신을 따르는 브로디 무리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브로디는 자신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는 ‘연약한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학생들 앞에서 파시스트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한다.

 

  “파시스트예요.” 브로디 선생은 이렇게 설명하고 나서 물었다. “누구라고, 로즈?”

  “파시스트입니다, 선생님.”

  그들은 새까만 제복을 입고 똑같은 각도로 손을 올린 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나란지 줄지어 행진하고 있었으며, 무솔리니는 체육 선생, 혹은 걸가이드 단장처럼 단상에 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샌디는 문득 자신들 역시 행군중인 브로디 선생의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서는 모르겠지만, 사실 브로디 선생의 필요에 맞춰 무솔리니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줄지어 걷고 있는 파시스트들. 그거야 그렇다 치고, 걸가이드를 향한 브로디 선생의 경멸에는 질투와 모순과 오류가 있었다. 어쩌면 걸가이드가 너무 강력한 파시스트 라이벌이라서,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리에서 제외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한번 샌디를 사로잡았고, 샌디는 브로디 선생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42~43쪽)

 

 

샌디는 브로디의 불완전하고도 모순된 모습을 간파한다. 그러나 샌디는 브로디와 브로디 무리를 지키기 위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브로디의 자아도취는 점점 심해지고, 자신이 ‘크림 중의 크림’으로 살고 있으며 ‘강인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소설은 브로디와 브로디 무리의 행동과 심리적 반응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독자는 겹겹이 쌓아 올린 서사를 잘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브로디와 브로디 무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뮤리얼 스파크는 등장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려 불완전한 인간의 모순을 표면화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시간과 상황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통해 진정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소설은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개인적 고통과 실패가 보편적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생각해보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전성기’는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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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어떤 책일까 궁금하긴 했어.

근데 너는 책을 아주 빨리 읽나 봐.
너도 완독 스타일이지?^^

cyrus 2018-03-22 17:44   좋아요 0 | URL
도서관 반납일이 얼마 남지 않은 책, 독서모임 선정도서는 되도록 빨리 읽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완독이 독서의 최고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고, 읽을거리가 점점 많아지게 되면서 완독에 집착하지 않게 됐어요.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끝까지 다 읽지 않은 책이 완독한 책보다 더 많을 거예요. ^^;;
 
랑베르 씨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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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베르 씨》(열린책들, 1999)장 자크 상뻬(Jean Jacques Sempe)의 초기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상뻬의 첫 번째 그림책인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Rien n’est simple, 국내 미출간)이 1962년에 발표되었고, 《랑베르 씨》는 1965년에 발표된 네 번째 그림책이다. 《랑베르 씨》는 상뻬의 대표작 《얼굴 빨개지는 아이》(별천지, 2009)보다 넉 달 늦게 국내에 출간되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1969년에 발표된 그림책인데, 우리나라에선 이 책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렇다 보니 《랑베르 씨》를 주목한 독자의 리뷰가 많지 않다.

 

 

 

 

 

 

랑베르 씨는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인데도 말이 거의 없다. 그림의 절반이 ‘피가르 식당’에서 수다를 떠는 단골손님들의 말들로 채워져 있다. 단골손님들은 매일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1936년 프랑스 좌파 정권이 수립한 인민전선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는 손님들이 있고, 다른 쪽 식탁에서는 1950년대에 활약한 축구선수들과 당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축구팀들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이 앉아 있다. 랑베르 씨는 항상 자신과 함께 식탁에 앉은 동료들의 대화를 경청한다. 랑베르 씨도 식당을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지만, 존재감이 없다. 가끔 랑베르가 제시간 늦게 식당에 도착하면 단골손님들이 그의 안부를 묻곤 한다. 그러나 손님들은 랑베르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손님들의 관심 대상은 랑베르가 아니라 ‘정치’와 ‘축구’였다. 랑베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손님들은 정치와 축구에 대해 말하느라 바쁘다.

 

어느 날부터 랑베르는 플로랑스라는 여성과 사귀게 된다. 랑베르의 연애 사실을 알아차린 손님들은 다시금 조용한 사내에 주목한다. 동료들은 플로랑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식당에 온 랑베르에게 다가가서 그녀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재촉한다. 평소에 랑베르를 알고 지낸 동료들은 축구 얘기를 접어두고, 자신들이 연애하면서 만났던 여자들을 주제로 대화한다. 재미있게도 연애하는 랑베르가 주변 사람들의 대화 주제를 바꿔놓은 것이다. 확실히 단골손님들은 ‘연애꾼’ 랑베르에 주목했고, 그가 식당에 나타날 때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그러나 랑베르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랑베르의 결별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예전처럼 축구 얘기를 한다. 그렇게 랑베르는 자연스럽게 ‘존재감 없는 평범한 사내’로 돌아온다.

 

알라딘에 공개된 《랑베르 씨》의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평범한 월급쟁이들의 진부한 일상에 새콤한 양념처럼 곁들여진 랑베르의 에피소드. 여기에 그의 식당 동료들의 은근한 우정이 짭잘하게[1] 가미된 감칠맛 나는 이야기.

 

 

상뻬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풍경과 얼굴들에 집중한다. 《랑베르 씨》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 미세한 변화를 느끼는 그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렇지만 나는 ‘식당 동료들의 은근한 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의 우정은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분류하는 남성 간의 연대, 즉 ‘호모소셜(Homosocial)’에서 이루어지는 ‘쉰내 나는 우정’이다. 남성들은 호모소셜 속에서 여성들은 품평과 희롱의 대상으로 소비한다. 호모소셜은 ‘내(남성)가 너를 남자로 인정한다’는 남성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존재감 없던 랑베르가 연애하기 시작하자 동료들은 그를 ‘남자’로 인정하고, 그(의 연애)에 호기심을 느낀다.

 

자, 지금부터 나오는 말이 당신의 분노를 유발하고, 당신의 뒷목을 잡게 만들 수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시대착오적인 언어들’식당 손님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남성우월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뻬의 문장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들은 딸 단속 잘 하라고!”, “여자들은 그저 처신만 잘하면 돼!” (75쪽)

 

 

“난 항상, 여자들은 정복해야 한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지.” (83쪽)

 

 

랑베르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그가 우리의 우정으로 기운을 되찾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남자들 사이의 우정은 중요하니까. 게다가 우정, 그것밖에는 없다. 인생의 온갖 크나큰 골칫거리는 여자들로부터 비롯한다는 건 누구나 뻔한 얘기다. (90쪽, 상뻬)

 

 

축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단결심을 필요로 한다(여자들은 그 단결심이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 축구란 늘 함께 모여 경기를 벌이는 걸 좋아하는 열한 명의 친구들이다. (100쪽, 상뻬)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수준 떨어지는 발언들이다. 이 절판된 책이 재출간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상뻬는 여성이 축구가 필요로 하는 단결심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썼는데, 지금까지 프랑스 여자축구가 거둔 뛰어난 성적을 생각하면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 프랑스 여자축구 대표 팀 최고 성적

 

2008년 FIFA 칠레 U-20 여자 월드컵 4위

2011년 FIFA 독일 여자 월드컵 4위

2012년 FIFA 아제르바이잔 U-17 여자 월드컵 우승

2014년 FIFA 캐나다 U-20 여자 월드컵 3위

 

 

 

 

올해 8월 5일부터 한 달간 프랑스에서 FIFA U-20 여자 월드컵이 치러진다. 내년에 있는 FIFA 여자 월드컵의 개최국도 프랑스다. 상뻬 할아버지는 지금도 정정(亭亭)하신데 조국에서 치러지는 여자축구 경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경기를 보고 나서 본인의 펜에서 나온 시대착오적인 언어를 정정(訂正)했으면 좋겠다.

 

상뻬 할아버지, 정정(亭亭/訂正)하세요!

 

 

 

 

 

[1] ‘짭잘하게’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짭짤하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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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사람들 중에서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외국의 옛) 철학자도 있어서 놀랐던 적이 있지요. 그 시대 문화의 영향 탓일까요? 어째서 글은 훌륭하게 쓰면서 여성 비하를 하는 (우리나라) 작가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미투 운동을 보면서, 인간은 알 수가 없도다, 그랬네요.

cyrus 2018-03-02 08:01   좋아요 1 | URL
시대가 변하면 인물, 문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집니다. 이제는 여성 차별, 여성 비하와 연관된 발언 및 행위들에 문제 삼아야 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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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며, 급속한 산업화, 빈부 격차의 심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언급된 현상들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변화가 미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느냐이다.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이다. 버틀러는 1872년에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소설 《에레혼》(김영사, 2018)을 발표했다. 에레혼(Erehwon)은 ‘No Where’(이 세상에 없는)를 거꾸로 쓴 제목이기도 하지만, ‘Now Here’, 즉 ‘지금 여기’라는 뜻도 된다. 즉 이상세계는 없을 수도 있지만 바로 내가 있는 이곳이기도 하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영국 식민지에 거주하는 양치기다. 그는 거대한 산맥 너머에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한다. 양치기는 ‘초복(Chowbok)’이라는 별명을 가진 늙은 원주민에게 접근하여 산맥 너머에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한다. 양치기는 초복을 여행 동반자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나 초복은 산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채 도망치고 만다. 혼자서 산맥을 넘은 양치기는 에레혼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에레혼은 모든 것이 영국과는 반대이다. 에레혼에서 질병은 죄악이다. 질병에 걸리면 구속되어 장기간 복역 생활을 해야 한다. 반면 강도, 사기 등을 저지르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병원에는 ‘교정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의사가 있는데, 교정관이 되려면 특정 기간에 온갖 나쁜 짓을 하면 된다. 에레혼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상당히 관대하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증상이 생기면 아픈 티를 내지 않게 철저히 숨긴다.

 

에레혼에서는 기계를 찾아볼 수 없다. 사용하지 않는 기계는 ‘오래된 기계’로 분류되어 박물관에 진열된다. 이곳에서 기계를 설치하거나 사용하면 중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를 싫어한다. 에레혼의 영주는 양치기가 가지고 있던 시계를 보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왜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를 싫어하는 것일까? 《에레혼》의 23~25장인 ‘기계의 책’은 에레혼 사람들의 반 기계주의를 보여주는 글이다. <기계의 책>은 에레혼의 반기계파가 쓴 논문이다. 5백 년 전에 기계파와 반기계파 간의 내전이 일어났고 반기계파가 승리한다. 양치기는 <기계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그 내용이 《에레혼》의 23~25장이다. 사실 23~25장은 버틀러의 에세이 <기계 사이의 다윈>을 보완한 글이다. 버틀러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에 큰 감명을 받아 ‘기계가 발전하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진화론을 대입했다. 그는 이 ‘기계의 책’이라는 글을 통해 기계 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기계와 인간은 서로에게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기계의 완전한 멸절을 제안하지 못하지만,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은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57쪽)

 

지금 이 시간에 기계에 종속되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내내 밤낮으로 기계만 돌보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계에 노예로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 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다는 것을 감안해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 (259쪽)

 

 

버틀러는 인간과 기계가 함께 진화하면서 발전하는 ‘공진화’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시대를 앞서간 예측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가 인간 진화의 경로를 바꿀 것이며 훗날 인간은 기계에 종속된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한 빅토리아 시대 지식인들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거로 기대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인류의 진보를 믿는 진화론자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 문명의 발전이 곧 이상향을 실현할 것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디스토피아를 제시했다. 동시대 진화론자들은 버틀러가 다윈의 진화론을 거부했다고 비판했지만, 《에레혼》을 읽다 보면 버틀러가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몸이 수백만 년에 걸친 우연과 변화의 결과로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65쪽)

 

 

버틀러는 ‘진화=진보’라는 단순한 낙관론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는 낙관론에 반기를 들고 진화의 우연성을 주장한다. 버틀러가 생각하는 진화는 ‘인류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인 진보’와 거리가 멀다. 우연성은 진화의 주된 동력이며,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인간은 우연성이 빚은 부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버틀러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보다 백 년 앞서서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에레혼》의 해제는 과학 칼럼니스트 이인식이 썼다. 이인식은 《에레혼》이 인공지능의 미래를 예측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에레혼》에서 드러난 버틀러의 ‘반기계주의’가 기계문명을 예측하는 미래학,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할 갈림길, 즉 기계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를 고민한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Now-Here(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에레혼》은 ‘시대를 앞서 간 미래소설’로 재평가를 받고 있지만, 풍자소설로서의 문학적 가치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래서 이 책의 구성 방식이 아쉽다. 빅토리아 시대는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에레혼》을 읽으면 버틀러의 풍자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역자는 《에레혼》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버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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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2-2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특이한 책이네요.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봐도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그렇고. 일단 보관함으로 보냈습니다.ㅎㅎ

cyrus 2018-02-27 12:1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분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옛날 소설이 다 그렇듯이 재미있는 이야기라 볼 수 없어요. 좀 지루한 내용도 있어요. ^^;;

2018-02-28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01 08:10   좋아요 0 | URL
그분이 쓴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칼럼 몇 편은 읽어봤어요. 그 분이 요즘 미래학에 꽂혔는데 우리 같은 일반 독자가 보기에 그 분의 글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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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원은 욕망이다.

 

- 쇼펜하우어 -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구도로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 즉 왕과 귀족,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 등 사회 세력들 간의 대립 및 종교적 갈등으로 평안한 날들이 없던 시대를 그렇게 표현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보존을 위한 이기적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홉스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상황을 자연 상태로 규정했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이나 집단들이 서로 대립하고 다투게 된다. 홉스는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가 통치해야 야만적인 자연 상태가 해소된다고 주장한다. 군주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질서를 위반한 사람을 전체를 위해서 가차 없이 처단할 수 있다. 인간의 선한 의도를 신뢰하지 않으므로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평화적인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게 홉스주의의 장점이다.

 

그러나 문제점도 있다. 이기적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법의 빈틈을 노려서 사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홉스주의에 반대한 존 로크(John Locke)는 군주도 인간이라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홉스의 군주제 옹호는 군주의 독재적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풍자소설 멋진 신세계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이 세계를 통제하는 암울한 미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 독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작품 전체에 짙게 깔린 전체주의적 사회 분위기. 멋진 신세계에 묘사된 전체주의적 사회상은 홉스의 유토피아(utopia)를 상기시킨다.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은 과학기술에 의존해 욕망을 채워나간다. 이 소설에 소마(soma)라는 약이 등장한다. 하루에 두 알씩 먹는 이 약은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마약이다. 소마 한 알만 복용하면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마치 행복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하기 위한 욕망이 과학기술과 결합하면 위험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안정된 삶을 가져다주는 과학기술에 감탄하고 있을 때, 헉슬리는 과학기술을 욕망 충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홉스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이란 서로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리는 존재다. 결국, 욕망과 자기 보호를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욕망이 완벽하게 충족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멈출 수 있다.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소마는 갈등과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행복이라는 욕망만을 갈구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소마에 중독된 국민은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스스로 실현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면시 교육을 받는다. 자는 동안 귓가에서 반복되는 수면시 교육의 격언은 홉스의 말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야.”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생산된 인간들은 배아 시절부터 화학적으로 능력이 조절된다. 이들은 능력에 맞게 사회 계급 구조에 편입되며, 세뇌 교육에 가까운 수면 시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의 상황에 만족한다. 각 계급의 역할이 분명하고 분업의 결과물을 공유하기 때문에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 서로 싸울 일 없이 주어진 계급에 따라 생활하는 세계. 이 평화로운 멋진 신세계에 산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살기 좋은 곳 같아도 개인의 직업, 생활방식, 습관, 복장, 인생의 목표까지 세계 총통의 정책에 따르도록 강요받는다. 개인의 고유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곳이다. 헉슬리가 묘사한 멋진 신세계의 암울한 사회현실은 단순히 가상의 미래가 아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멋진 신세계의 풍경은 홉스주의의 특징들과 관련되어 있다. 안정적이고 강력한 국가의 실현을 희구했던 홉스주의에 내포된 부정적 가능성의 묘사인 셈이다. 홉스가 꿈꾼 국가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경계했던 파렴치한 탐욕과 이기심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탐욕과 이기심을 전제로 한 과학 발전이 인류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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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25 12:19   좋아요 0 | URL
돈을 써서 소비할 때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끼죠. 그런데 이 행복한 기분이 너무 좋아서 돈을 물 쓰듯 쓰면 더 힘들어져요. 마음이 공허해질 때 습관처럼 과소비를 하고나면 후회하게 됩니다. ^^;;

페크pek0501 2018-01-27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욕과 이기심을 전제로 한 과학 발전이 인류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 설령 불행하게 만들지라도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인 듯해요.

cyrus 2018-01-29 14:23   좋아요 0 | URL
과학이 발전할 때 반드시 성찰과 윤리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성찰과 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과학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