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의 원리
I. A. 리처즈 지음, 이선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시를 썼다고 치자.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시골의 정경을 소재로 시를 쓴다. 완성된 시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시를 읽고 잊고 있었던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시에 묘사된 고향의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쓴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가 시골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시에 진술한 시골 정경은 도시 밖에 나가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경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아무리 좋아도 시인의 경험과 거리가 먼 시적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비평가 I. A. 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라면 내 시에 후한 점수를 줬을 것이다. 리처즈는 독자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 비평가다. 그는 시를 ‘정서적 언어’로 만들어진 텍스트로 봤다. 독자는 시의 정서적 언어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독자는 시적 언어로 진술된 시인의 개인적 경험에 공감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경험이 사실인지 허위인지 판단하는 건 중요치 않다. 리처즈는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효과를 기준으로 하여 그 작품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처즈는 1920년대에 영국의 신비평(new criticism)을 제시한 인물이다. 1924년에 발표한 《문학비평의 원리(Th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는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비평 수준의 위치로 한 단계 끌어올린 책이다. 리처즈가 제시한 비평가의 역할은 문학작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문학작품의 가치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긍정적 정서를 뜻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공감하는 독자의 반응 등이 ‘정서적 언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이다. 이러한 효과를 유도하는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전달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리처즈가 《문학비평의 원리》 23장의 제사(題詞)로 인용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말은 그의 비평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말이다.

 

 

 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미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다.

 

(《문학비평의 원리》, 224쪽)

 

 

흄의 말속에 있는 단어인 ‘사물’을 ‘문학작품’으로 바꿔서 설명한다면,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가치는 작품 텍스트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작품 텍스트를 읽으면서 반응하는 독자의 마음속에 있다.

 

《문학비평의 원리》에 부록 두 편이 있는데, 그 중 한 편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서 리처즈는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이 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들은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독자가 『황무지』를 신비주의 사상과 연관 지어서 읽는다거나 분석한다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리처즈는 엘리엇이 『황무지』를 쓰면서 사용한 인유(引喩)를 주목한다. 인유는 유명한 고전의 내용이나 널리 알려진 어떤 다른 개념을 끌어다가 비유하는 표현 방법이다. 리처즈에 따르면 『황무지』에 나오는 상징들은 단순히 초월적인 개념 혹은 대상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 경험’을 뜻하는 인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지식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인유를 사용해 드러나고자 하는 『황무지』의 의미는 텍스트 자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시를 분석하는 리처즈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리처즈는 시를 ‘감정의 표현’, ‘정서적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봤지만, 반대로 엘리엇은 시를 ‘지식의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리처즈의 신비평주의를 본다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정서적 언어’로 진술된 시를 무조건 가치 있는 작품으로 보는 시선,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문학작품의 분석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은 1920년대 이후로 나온 여러 가지 비평주의들과 비교하면 낡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치’라는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려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또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리처즈가 제시한 ‘훌륭한 비평가의 자질’ 중 하나인 ‘가치를 건전하게 판단하는 일’은 한계가 있는 작업이다.

 

언어로 진술된 작가의 경험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과정을 간과하는 리처즈의 비평 관점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는 몇 년 전에 불거진 ‘문단 내 미투 운동’ 사례와 관련 지어 설명할 수 있다. 남성 작가가 여권 신장을 강조하는 시나 소설을 썼다고 치자. 어떤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고 나서 작가가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에 가려진 여성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한 페미니스트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 남성 작가가 평소에 여성을 차별했다는 사실, 여성 문인을 성추행한 이력이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 작가의 모습과 그가 작품 속 언어를 통해 진술한 페미니즘 관점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작품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에 중점을 둬서 볼 것이다. 이러면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철저히 분리한 채 문학작품을 평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분리해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게 맞는가? 도덕적인 문제로 비난받은 작가가 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글이 독자에게 좋은 가치관을 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가의 경험과 무관한 글에 감동하는 독자의 반응은 결국 작가의 허위에 속아 넘어간 ‘가짜 감동’에 불과하다. 진실하지 않은 글을 쓴 작가는 독자를 기만한 것이다. 이런 작가의 글이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문학적으로 가치 있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비평 관점을 떠나서 자신과 독자들을 속이는 작가의 글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옹호할 수 없다. 독자는 자신의 삶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면서 재미와 감동을 끌어올리는 ‘이야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한다. 그러나 거짓으로 감동을 유발하면서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 Trivia

 

* 92쪽 [역주]

  미국의 물리학자인 A. A. 마이켈슨과 E. W. 모울리는 공동의 실험으로 그 당시까지 믿어 왔던 에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낳는 동기를 만들었다.

 

→ 역자는 옛 외국어 표기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몰리(Morley)를 ‘모울리’로, 아인슈타인(Einstein)을 ‘아인쉬타인’으로 썼다. 참고로 번역본이 출간된 연도는 2005년이다. 아마도 역자는 ‘에테르(ether: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상의 물질)라는 단어 자체를 몰라서 그냥 단순하게 ‘에텔’로 표기했던 것 같다.

 

 

 

* 260쪽 [역주]

  희랍 신화의 인유. 제우스는 백조의 모습으로 레다에게 접근하여 그 여성에게서 헬레네와 포류 듀케스를 낳았다.

 

→ 포유류 듀케스? 이 해괴한 이름을 정확하게 쓰면 ‘폴리데우케스(Polydeuces)이다.

 

 

 

* 287쪽

괴스타 베를링 이야기

 

→ 스웨덴의 소설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작품명이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Gösta Berlings saga)로 고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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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04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치 있는 문학이란 정말 주관적인
잣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관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나한테 재밌는 책이 저
는 좋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cyrus 2019-03-04 17:2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결국 애서가가 즐겨 읽는 책은 본인이 재미있다고 느껴지거나 관심 있는 책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책’을 절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책’과 상대방이 생각하는(원하는) ‘재미있는 책’은 아주 다르거든요.. ^^

레삭매냐 2019-03-04 17:28   좋아요 0 | URL
가끔 블로그에 책 추천해 달라는
덧글이 달리는 데 정말 난감합니다.

보는 관점이 그리고 좋아하는 킬링
포인트가 다 다른데, 어찌 추천을
해달라고 하시는지...

거의 100% 욕 먹을 확률이 높습니다.
캐공감하는 바입니다.

cyrus 2019-03-04 17:34   좋아요 0 | URL
난감한 질문이 들어오면, 저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이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해요.

상대방이 제게 특정 주제와 관련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답변해줄 수 있어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책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

페크pek0501 2019-03-04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경우, 난감하군요...

cyrus 2019-03-05 12:20   좋아요 0 | URL
삶과 문학관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 망설이게 됩니다. ‘작가는 비난할 수 있어도 그 작가가 쓴 작품까지 비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