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흑인 여성 작가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다. 그녀가 쓴 소설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흑인 여성의 경험과 관념이 반영된 페미니즘 이론을 논의한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을 통해서 그녀의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 접했다.

    

 

 

 

 

 

 

 

 

 

 

 

 

 

 

* [2018년 레드스타킹 추천 도서]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 [절판] 앨리스 워커 더 컬러 퍼플(청년정신, 2007)

* [절판]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이프, 2004)

* 앨리스 워커 사랑의 힘(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4)

    

 

 

토니 모리슨과 함께 현대 흑인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는 앨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있다. 그녀의 대표작 더 컬러 퍼플(작가정신)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워커는 이 소설에서 흑인이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 특히 그중에서도 여성이 받는 상처와 경험을 이야기한다. 1980년대에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과 함께 페미니스트 저널 <미즈(Ms.)>의 편집인으로 활동했지만, 백인 중산계층 중심의 서구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3세계 페미니즘또는 흑인 페미니즘이 새롭게 대두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워커는 피부 색깔로 페미니스트를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는 의미로 흑인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대신에 우머니스트(womanist)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또 모든 종류의 차별에 저항하면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 성소수자 모두가 공존하는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워커를 포함한 흑인 여성주의자들은 인종과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등 다중적인 억압을 경험하는 흑인 여성의 문제에 저항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폭력과 착취를 받는 피해자로 머무르는 흑인 여성 담론에 치우쳐 있는 건 아니다. 혹자는 흑인 여성주의자들(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남성 인권 운동가들도 해당된다)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자신들의 경험만 줄기차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말로 그녀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면 자신들이 추구해온 다양한 춤 장르와 음악(특히, 재즈)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문화를 통한 저항 운동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워커는 가장 차별받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로 이어지면서 공유되는 흑인 여성의 정체성과 예술적 경험도 주목한다. 그녀는 산문집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이프)사랑의 힘(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할머니와 어머니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예술가라고 부르면서 강인한 생명력의 중요성을 구전 민담이나 전통 노래로 표현하여 자신에게 전달해준 그녀들을 예찬한다(두 권의 책에 실린 워커의 산문과 시는 감동적이며 독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좋은 글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의 번역은 썩 좋지 않다. 재출간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새 번역으로 다시 나오길 바란다).

    

 

 

 

 

 

 

 

 

 

 

 

 

 

 

*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문예출판사, 2014)

*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1)

 

    

 

1960년대 흑인민권 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흑인 여성 작가와 역사가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진 흑인 여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적 능력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특히 워커는 흑인 문학계에서 완전히 잊혔던 흑인 여성 작가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을 재발견했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에 수록된 글 조라의 무덤을 찾아서는 묘비명조차 없는 조라 닐 허스턴의 무덤을 찾아다닌 워커의 여정을 보여준다.

 

 

 

필리스 위틀리에 관한 내용이 있는 책들

    

 

 

 

 

 

 

 

 

 

 

 

 

 

 

 

 

 

 

 

 

 

 

 

 

 

 

* 줄리아 피어폰트, 만지트 타프 그림 페미니스트 99(민음사, 2018)

* 재키 플래밍 여자라는 문제(책세상, 2017)

* 미셸 로엠 매칸, 아멜리 웰든 세상을 뒤흔든 10대들: 소녀 편(라의눈, 2014)

* 차리스 코터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이들(아카넷주니어, 2012)

* 정길화 편역 영미시의 이해 그리고 한국시(신아사, 2007)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백산서당, 2002)

 

    

 

미국 문학사뿐만 아니라 미국 흑인문학에서조차 많이 거론되지 않은 여성 작가가 있는데 최초로 시집을 발표한 흑인 시인 필리스 위틀리(Phillis Wheatley, ‘필리스 휘틀리라고도 표기한다)다. 그녀는 노예제도를 당연하게 여기던 18세기 중반에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1753년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하지 않다. 위틀리는 감비아 혹은 세네갈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노예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필리스 위틀리는 이 아프리카 소녀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된 이름이 아니다. 그녀의 성()은 자신을 사들인 재단사 존 위틀리(John Wheatley)에서 따온 것이고, 필리스는 아프리카인들이 타고 온 노예선의 이름이다[1].

 

다행히도 존 위틀리 가는 미국 북부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 살고 있었다(예나 지금이나 보스턴은 진보적인 성향이 가장 강한 곳이다). 왜냐하면 노예제를 옹호하는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존 위틀리의 딸 메리(Mary)는 필리스가 영리한 소녀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에게 영어와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필리스는 열두 살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가 쓴 시 몇 편이 신문에 실리게 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

    

 

 

 

그러나 흑인의 지적 능력을 믿지 않았던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필리스의 재능을 의심했다. 필리스가 직접 시를 쓰는지 검증하기 위해 열여덟 명의 백인 남성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녀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북부의 백인 독자들은 필리스의 시를 호평했고,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흑인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남부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필리스의 시를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흑인들은 그녀의 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흑인들은 노예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시를 쓰지 않은 필리스에 불편함을 느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필리스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고, 영어로 시를 썼다. 흑인들이 보기에는 필리스가 백인에 동화된 흑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필리스도 자신의 몸과 정신을 죄어오는 거대한 사슬과 같은 인종 차별의 위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스무 살인 1773년에 쓴 시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실려 옴에 대하여(Being Brought from Africa to America)[3]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부정적 편견과 부당한 차별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흑인들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흑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내 이교도 땅에서 날 데려와, 내 어두운 영혼에게

하느님이 있음과 구세주 또한 있음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준 것은 축복이었어요.

한때 나는 구원을 찾지도 알지도 못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 흑인을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지요.

저들의 피부색은 악마의 색이야.”

명심하세요. 기독교인들이여, 흑인들은 카인처럼 검지만

세련될 수 있어, 천사의 행렬에 합류할 수 있음을.

 

 

(정길화 옮김, 190)

 

 

노예제가 사라진 지 꽤 오래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시선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은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시키는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임금 노동에 투입되고, 빈곤의 늪에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선입견은 착한 노예는 순종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노예제를 옹호하던 미국 남부인들의 사고방식과 겹쳐져 있다. 바뀐 게 없는데도 흑인을 차별하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주류인 백인의 시선으로 흑인을 포함한 다른 인종을 한 단계 아래로 규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

    

 

 

 

 

 

 

 

 

 

 

 

 

 

 

 

 

*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문학동네, 2014)

*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2013)

* 프라모드 K. 네이어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앨피, 2015)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말했던 바로 그 하얀 가면을 우리도 쓰고 있다. 피부가 하얗지도 않은 이들이 스스로 하얘지고 싶어서 쓰는 그 가면을 말이다[4]. 누구나 하얀 가면을 쓸 수 있으며 그 사람은 우월한 주인또는 지배자()이 된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이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얀 가면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는 동시에 우월한 주류처럼 행세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것은 인종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의 허무한 명품이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독립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흑인들의 문화적 유산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1] 차리스 코터,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이들, 아카넷주니어, 2012. 14~18.

 

[2]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 백산서당, 2002. 112.

 

[3] 우리말로 번역된 시는 영미시의 이해 그리고 한국시(신아사)에 수록되어 있다.

 

[4] 파농이 언급된 글 마지막 내용이 글의 주제(흑인 여성 작가)에 완전히 이탈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쓴 이유가 있다. 휘틀리의 시에 나오는 구절(저들의 피부색은 악마의 색이야.”)이 파농이 들었던 백인 아이의 말과 유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나오는 일화에 따르면, 백인 아이는 파농을 보자마자 엄마, 저 검둥이 봐요. 무서워요!”(문학동네, 109)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백인 아이의 말을 듣게 된 파농은 흑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고, 이 사건은 의사인 파농을 탈식민주의 사상가로 변모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프라모드 K. 네이어,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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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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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eroticism)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와 다르다. 사실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남성 작가가 묘사한 에로티시즘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감정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을 긍정하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티시즘은 여성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 즉 육체적 ․ 정서적 기쁨을 표출하게 만든다. 하지만 포르노는 여성의 진실한 감정을 거부하고 억누른다. 그것은 감정이 없는 관능만을 강조한다. 포르노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에로티시즘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서적 쾌락도 포함한다.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황금기로 알려진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절정을 매력적으로 묘사했다.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삶의 즐거움’을 뜻하는 이 프랑스어는 벨 에포크를 요약해주는 표현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는 게 그저 즐겁기만 했다. 콜레트의 글은 ‘즐거운 삶’에 대한 찬가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즐거운 관능’을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이 느끼고 싶은 ‘즐거운 관능’을 표현한 콜레트의 글쓰기는 여성들만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던 벨 에포크의 사회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콜레트는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남편과 함께 사교계가 주목하는 셀러브리티 커플이었다. 1900년에 그녀는 남편의 필명(윌리, Willy)으로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학교의 클로딘》을 써서 발표한다. 소설의 여주인공 클로딘(Claudine)은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 제도를 거부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소녀이다. 그 이후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로 알려진 《파리의 클로딘》, 《가정의 클로딘》을 연달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클로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파리의 클로딘》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고향인 몽티니를 떠나 파리로 오게 된 클로딘이 사치와 향락이 녹아든 도시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낭만적 사랑의 확산으로 남녀 간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요소가 됐고,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정상 가족’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낭만적 사랑은 성별 역할 분리, 여성의 경제적 의존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콜레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근대적 시민사회에서 벗어난 여성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남성은 거부한다. 남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가부장제 권력은 콜레트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방을 쾌락의 대상으로 즐기는 존재는 여성이다. 클로딘은 고향에서 살았을 때 만난 여학교 동급생 뤼스를 ‘살결이 부드러운 친구’라고 묘사한다. 뤼스 역시 클로딘과의 관능적인 포옹과 애무를 잊지 못한다.

 

 

 ‘클로딘, 네가 나의 제일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준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야. 우린 우리 언니 에메와 마드무아젤(클로딘과 뤼스가 다닌 여학교 교장이자 담임 교사-cyrus 주)만큼 행복할 거고, 난 평생 동안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그 정도로 널 사랑해. 넌 너무 예쁘고, 네 살결은 백합 꽃잎 속 노란 꽃가루보다 더 보드라워. 너한테 따귀를 맞아도 좋아. 네 차가운 손톱도 좋아.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88쪽)

 

 

서로 떨어져 있는 클로딘과 뤼스는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유지한다. 두 소녀는 서로가 몸의 내밀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애무를 선호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에 서로에게 만족을 준다. 동성애를 떠올리게 하는 두 소녀의 우정과 그녀들이 공유하는 관능은 남녀 간의 사랑이 부여하는 통속적인 의미의 관능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콜레트는 남성의 욕구에 초점이 맞춰진 쾌락에 대한 한정된 개념을 거부하고, 관능적 쾌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콜레트의 작품에 구현된 관능은 여성이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마음껏 즐기는 에로티시즘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콜레트의 관능은 육체적 쾌락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식물, 그리고 동물과의 교감도 여성을 만족시켜주는 즐거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이다. 클로딘은 몽티니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감정 상태는 단순하게 향수병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정서적 쾌락을 그리워한다.

 

 

 아! 다시 몽티니로 돌아갔으면…‥ 그곳에서는 키 큰 싱그러운 풀들을 한 아름 껴안았고, 피곤하면 햇볕으로 따뜻해진 벽에 기대 앉아 잠들었고, 빗방울이 수은처럼 굴러다니는 연꽃잎에 담긴 빗물을 마셨고, 강가에 핀 물망초를 따서 테이블에 놓고 시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버드나무가지 껍질을 벗겨 진액을 핥았고, 풀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깨새의 알을 훔쳤고, 야생 까치밥나무의 향내 나는 이파리들을 마구 비벼 댔는데…‥ 아,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에 입 맞추고 싶었다!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입 맞추고, 또 그 나무가 건네는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221~222쪽)

 

 

콜레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양성적인 존재이다. 클로딘은 ‘여성의 남성성’을, 그녀가 장난스럽게 유혹하는 대상인 자신의 조카 마르셀은 ‘남성의 여성성’을 지닌다. 이 소설에서 마르셀은 바느질하는 것을 좋아하며 클로딘을 그를 ‘예쁘게 생긴 계집애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과 양성성은 이 작품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콜레트의 소설은 여주인공의 성적 모험에 충실하며,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성행위 묘사가 많은 통속적인 포르노와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준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볼 수 있듯이 콜레트는 사랑과 섹스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성적 경험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렇듯 《파리의 클로딘》은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면 이성애와 결혼의 안정성을 부인하는 퀴어 소설(queer novel)로 봐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성애 중심의 사회, 가부장적 결혼의 권위를 엿 먹인다. 《파리의 클로딘》은 여성주의적이라기보다 퀴어하다. 포르노적인 성 묘사가 나오지 않는 퀴어 소설이다. 동성애의 의미를 육체적인 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육체적 ․ 정서적 쾌락을 만끽할 수 있는 대항적인 삶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전복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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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음이 비슷해서일까요, cyrus님 글을 읽다보니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영화 「클로이」가 떠오르네요. 물론 내용은 별 관련은 없습니다만^^:)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1 | URL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분한 클로이가 도발적인 여성으로 나오지 않나요? 영화를 안 봐서 잘 모르겠어요... ^^;;

수이 2019-05-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2019-05-07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7 14:46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지 못할 것입니다.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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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올해의 절반이 지났지 않았지만, 내년도 올해만큼이나 특별히 기념해야 할 일이 가득하다. 내년이면 하퍼 리(Happer Lee)가 쓴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가 발표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소설은 경제 대공황으로 악화하여가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 위치한 앨라배마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무고하게 체포된 흑인 톰 로빈슨(Tom Robinson)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의 이야기를 그의 어린 딸인 진 루이지 스카웃핀치(Jean Louise “Scout” Finch)의 시선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앵무새 죽이기미국을 대표하는 국민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중의 하나이다

    

소설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흉내지빠귀 죽이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흉내지빠귀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양서류의 울음소리까지 흉내 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 능력이면 흉내지빠귀는 조류계의 주크박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능력은 앵무새를 따라갈 수 없다. 흉내지빠귀는 앵무새와는 전혀 다른 새이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서식지도 다르다. 흉내지빠귀는 미국에 서식하고, 앵무새는 열대 지방에 서식한다.

 

‘To Kill A Mockingbird’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려진 해는 1990년이다. ‘청담문학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은 저작권자와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은 해적판이었다. 해적판 제목은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이다. 1992년에 앵무새 죽이기라는 익숙한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한겨레출판사)이 나온다. 혹자는 하퍼 리의 소설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로 잘못 알려진 것을 오역이 낳은 폐해라고 지적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To Kill A Mockingbird’ 제목 오역 사례를 너무 나쁘게 볼 필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원문을 직역하는 것보다 국내 문화와 국내 독자의 성향을 고려한 초월 번역이 필요하다. 만약 흉내지빠귀 죽이기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이 서점에 비치되었다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책이 어느 정도 판매되었다고 해도 책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 제목인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 ‘흉내지빠귀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중에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골라 보시라. 소설 제목을 직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의 익숙함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앵무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새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제목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번역 문제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는 건 시간 낭비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원작 소설과 영화 둘 다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간략한 줄거리와 애티커스 핀치의 명대사를 기억한다면 어디 가서도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소설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밑줄을 좍좍 그어 종이가 더럽혀져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애티커스는 명언이라고 해도 될 만한 훌륭한 말을 여러 개 남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애티커스의 명대사는 아빠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스카웃을 다그치면서 했던 말이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김욱동 옮김, 64~65)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미국 남부 사회에서 흑인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다. 따라서 백인 여자를 해코지한 흑인을 변호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예상대로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학교에서 스카웃은 아빠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수군대는 친구의 말을 듣는다. 그런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애티커스는 정의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묵묵히 변호 업무에 열중한다. 그가 말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편견의 함정을 지적하면서, 제대로 타인에 향해 다가서는 간단한 방법이다. 도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 도덕 교과서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된다. 말로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어도 살아가다 보면 자꾸만 잊어버린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이다. 편견은 차별, 혐오, 소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한계를 이겨내려면 타인의 경험을 똑바로, 그리고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려면 단순히 그 사람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심정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작가 은유의 말을 빌리자면 온몸이 귀가 되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자가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보는 행위와 타인의 입장을 듣는 행위는 방법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타인을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말, 그것은 실천하는 자세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공허한 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는 타인에 향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존중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애티커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207)고 말한다. 그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집중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지속해서 확산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소설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팁(tip)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을 보면서 타인의 경험을 보고 있기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속을 걸어 다닐 수 있다. 그러면 그 인물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타인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소설에도 한계가 있다. 소설 역시 작가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스며들기 좋은 장르이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인종 차별의 부당함을 강렬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 묘사한 흑인은 백인우월주의 앞에서 제대로 힘쓰지 못하며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 흑인을 억압받고 고통 받는 피해자로 그려진 것이다. 소설 중반부에 흑인들만 드나드는 교회가 나오는데, 톰 로빈슨이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분노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인은 핀치 집안의 유모 캘퍼니아(Calpurnia). 그녀는 교육을 받을 정도로 똑똑하며 흑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흑인 영어를 쓰기도 한다. 그녀의 행보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네그리튀드(Négritude)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백인 가정의 흑인 유모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틀에 벗어나지 못한다. 흑인 여성에게 부여된 충실하고 순종적인 가사노동자 이미지는 백인들이 흑인 여성을 유모로 부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캘퍼니아를 집 밖으로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애티커스의 말에 확인할 수 있다.

 

 

오빠, 마음이 상냥한 것까진 좋아요. 오빠가 인정이 많은 건 알지만 생각해야 할 딸이 있잖아요. 점점 자라고 있는 딸이에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야.

회피하지 마세요. 조만간 직면해야 할 문제예요. 어쩌면 오늘 밤에 하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이제 우리에겐 그 여자가 필요 없어요.

아빠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알렉산드라, 캘퍼니아가 원할 때까지는 내보낼 수 없어. 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그녀 없이 살림을 꾸려 올 수 없었어. 그녀는 이제 어엿한 집안 식구고, 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해. 게다가 난 네가 우리 일로 골치를 썩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필요 없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린 여전히 캘퍼니아가 필요해.

하지만 오빠―」

더구나 그녀가 애들을 키우면서 애들에게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어.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엄마보다 더 엄격했으면 엄격했지‥…. 애들이 잘못하면 벌하지 않은 적도 한 번도 없었어. 흑인 유모들이 흔히 그러듯 애들은 버릇없게 그냥 내버려 둔 적도 없었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키우려고 애썼단 말이다. 그리고 캘퍼니아의 견해란 꽤 훌륭하거든. 그리고 또 한 가지, 애들이 그녀를 좋아해.

 

(김욱동 옮김, 256~257)

 

 

애티커스는 캘퍼니아가 똑똑한 여성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집안에 있는 캘퍼니아를 똑똑한 흑인 여성이 아니라 아이들을 잘 키우는 착하고 모성 본능이 강한 흑인 유모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 아니면 가사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쫓겨날 위기를 처한 캘퍼니아를 지켜준 애티커스를 훌륭한 아버지의 귀감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애티커스의 백인가부장적 온정주의는 위계적인 주인-노예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인지 캘퍼니아는 애티커스가 맡은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녀도 흑인이라면 톰 로빈슨의 처지를 분명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다른 지역에 살다가 온 사람처럼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해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까. 자신과 말이 통하는 스카웃과 젬에게 살짝 자신의 속내를 내비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집안일을 열심히 하느라 톰 로빈슨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신 발언이 백인 주인의 귀에 들릴까 봐 마음속으로 삼켰던 것일까. 스카웃과 젬(“Jem” Finch, 애티커스의 아들이자 스카웃의 오빠)에게 타인을 손님처럼 공손하게 대하라고 따끔하게 가르치던 소설 초반부에서의 모습과 무척이나 상반된다.

 

독자들은 애티커스를 인종 차별에 맞선 정의로운 변호사로 기억한다. 그의 이미지에 따라오는 단어는 정의로움, 지혜, 자상함이다. 독자들은 흑백영화 속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의 얼굴로 그려지는 애티커스는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들 사이에서 유독 빛이 나는 인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만 보고 남부인들을 인종 차별을 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북부인을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개혁가로 추켜세웠고, 남부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종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북부인과 남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인종적 편견에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늘어났다. 남부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종종 남부인들의 인종주의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단순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역사적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의 한계를 보완해준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을 땐 등장인물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애티커스의 품성에 주목하면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는 방식은 낡았다. 출간 6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을 기점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풍성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1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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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가 먼저 죽음을 주제로 한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를 들어줄 사람들이 없다. 죽음이 너무 무섭기 때문일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죽음은 먼 옛날부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만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생각해낸 게 두 가지 묘책이었다. 하나는 지옥이나 천국과 같은 내세의 관념을 만들어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른바 불멸성이다. 이로써 삶의 유한성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될 수 있으면 죽음을 멀리 떼어놓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애써 부정하여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려 든다. 마치 햇빛 아래서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 노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2012)

*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슬픈 불멸주의자》 (흐름출판, 2016)

 

 

 

나와 그림자가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도 별개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외면하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긴다. 과거엔 가족이 시한부 환자를 부양했고, 삶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시한부 환자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죽어가는 순간이 가까울수록 가족과 사회에서 더 멀리 배제된다. 특히 의료체계는 죽음과 죽음을 환기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격리한다. 죽어가는 자는 중환자로 격리되며, 시신은 영안실의 싸늘한 침대 위에 눕혀진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노화는 실버타운에 격리된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현대 문명이 죽음을 손쉽게 숨길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과거의 죽음은 두려우면서도 친숙한 개념이었다. 과거에 아이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아이들은 세 살 무렵부터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주1].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에밀리 디킨슨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한국현대영미시학회 엮음 《현대 영미 여성시의 이해》 (동인, 2013)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의 민낯을 아주 가까이서 봤다. 그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사 간 집 주변에 묘지가 있었고, 그곳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을 자주 지켜봤다. 죽음은 그녀의 일상에서 멀지 않은 것이었다. 디킨슨은 친구, 자신과 정서적으로 교류를 나누던 지인들, 그리고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디킨슨은 죽음과 불멸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썼다. 그녀는 일상의 삶과 죽음이 동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았다. 디킨슨에게 죽음은 자신과 무관한 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일이다.

 

디킨슨은 자신의 죽음을 여러 가지 상황과 이미지를 통해 상상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

 

 

나는 내 두뇌에 장례를 느꼈네.

조문객들이 이리저리

밟고— 또 계속해서 밟았고—

마침내 감각이 완전히 터지는 것 같았다네—

 

그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추도식이, 북처럼—

울리고— 또 계속해서 울렸고—

마침내 내 마음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네—

 

그런 다음 나는, 그들이 관[주2]을 들어 올렸고,

똑같은 납 장화가 걸으며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시, 내 영혼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공간이— 조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네.

 

모든 하늘이 하나의 종이 되었고,

존재는 단지 하나의 귀가 되었고,

나와, 침묵은 어느 이방의 종족이 되어

여기서, 외로이, 난파되었다네—

 

그런 다음 이성의 널빤지가, 부서졌고—

나는 아래로, 또 아래로, 떨어지며—

사방으로 곤두박질치며, 별 세계와 부딪쳤고,

그제야— 마침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끝이 났다네—

 

 

(No. 280,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29~30쪽)

 

 

I felt a Funeral, in my Brain,

And Mourners to and fro

Kept treading — treading — till it seemed

That Sense was breaking through —

 

And when they all were seated,

A Service, like a Drum —

Kept beating — beating — till I thought

My Mind was going numb —

 

And then I heard them lift a Box

And creak across my Soul

With those same Boots of Lead, again,

Then Space — began to toll,

 

As all the Heavens were a Bell,

And Being, but an Ear,

And I, and Silence, some strange Race

Wrecked, solitary, here —

 

And then a Plank in Reason, broke,

And I dropped down, and down —

And hit a World, at every plunge,

And Finished knowing — then —

 

 

 

화자(디킨슨)는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장례식을 상상한다. 조문객들이 지나가가면서 생기는 발소리는 화자의 감각을 터뜨리게 만든다. 죽은 자를 추도하기 위해 울리는 북소리는 화자의 마음을 마비시킨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조종(弔鐘) 소리는 화자의 환청이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주변인의 죽음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을 혼자서 감당하는 시인을 예민하게 만든다. 시인의 정신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와 같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강은교 시인은 시 280번의 4행을 “다리에 아무 감각도 없어진 듯할 때까지”라고 번역했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네, 머릿속으로

애도자들은 이리저리

걸어가네 — 걸어가네 — 마치

다리에 아무 감각도 없어진 듯할 때까지.

 

 

(No. 280,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27쪽)

 

 

강은교 시인은 원문의 “Sense was breaking”을 ‘감각이 없다’는 의미로 의역을 했다. ‘breaking’은 ‘파괴’를 뜻한다. 윤명옥 교수는 “감각이 완전히 터진다”라고 옮겨 썼는데, 이 번역문을 읽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한 시인의 감정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디킨슨의 시 465번은 임종 직전의 상황을 그린 내용이다. 그녀는 이 시에 독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존재’를 등장시켜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나는 임종 때에— 한 마리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네.

방 안의 정적은—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있는—

공중의 정적과 같았다네—

 

빙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도 마르고—

숨소리도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왕께서 그 방에— 임종 증언을 위해

현현하는 순간의— 그 마지막 입성을 지켜보려고—

 

나는 내 유품에 대해 유언을 했고— 내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 가지려는 것에 서명을 했다네—

그런 다음, 한 마리 파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네—

 

푸른— 정체불명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빛과— 나 사이에 훼방을 놓았네—

그러더니 창이 가려졌고— 그런 다음

나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네.

 

 

(No. 465,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63~64쪽)

 

 

 

죽음을 앞둔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화자는 죽음에 초연한 모습이다. 윤명옥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이 시의 내용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기독교적인 전통에 반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왕(king)[주3]’은 죽어가는 화자의 눈앞에 나타나 그/그녀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신성한 분위기를 망친다.

 

 

 

 

 

 

 

 

 

 

 

 

 

 

 

 

* 프레드 게팅스 《악마 백과사전》 (보누스, 2014)

* [품절] 마노 다카야 《천사》 (들녘, 2000)

* 마노 다카야 《타락천사》 (들녘, 2000)

 

 

 

‘왕’과 ‘파리’는 대조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신’과 ‘악마’의 대립 구조를 연상시킨다. 디킨슨의 시에 나타난 파리는 ‘베엘제붑(Beelzebub) 또는 ‘벨제붑’으로 알려진 악마를 상징한다. 베엘제붑의 본래 이름은 바알제불(Ba’al Zebul)이다. 히브리어로 ‘하늘의 주인’을 뜻한다. 베엘제붑을 신으로 숭배하는 셈족(Semites)의 신앙을 적대시한 유대인들은 이 호칭이 그들이 존경하는 솔로몬 왕(Solomon)을 떠올린다는 이유로 히브리어로 ‘파리의 왕’을 뜻하는 바알제붑(Ba’al Zebûb)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악마를 가리킬 때 ‘베엘제붑’을 쓰기 시작했다. 베엘제붑은 지옥에서 상당히 높은 계급에 속한 악마이다. 사탄(Satan), 레비아탄(Leviathan)과 더불어 타락 천사 3대장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베엘제붑이 누군지 몰라도, 록밴드 (Queen)의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질리도록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 특이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절정에 이르는 오페라 파트 마지막에 “Beelzebub has the devil put aside for me”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오늘날의 죽음은 삶의 뒤편으로 밀려난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이방의 종족”이다. 그렇지만 디킨슨처럼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는 물질적인 풍요에 아주 많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거나 외면해버린다. 막연한 공포감과 거부감에 짓눌려 죽음을 외면하는 게 과연 행복하게 사는 삶일까. 디킨슨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삶에 대한 애착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죽음과 타협하는 방법을 알려고 했다. 죽음에 관한  디킨슨의 시는 독자에게 ‘삶과 함께 있는 죽음’을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제목에 대한 주]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2018.

 

[주1] 셸던 솔로몬 외, 이은경 옮김, 《슬픈 불멸주의자》, 48쪽.

 

[주2] 박재열 교수는 원문의 ‘Box’를 ‘상자’라고 직역을 했는데(《미국 여성시 연구》, 43쪽), 시의 전체 내용을 생각하면, ‘Box’는 시신을 안치하는 ‘관(coffin)’을 상징하는 단어로 봐야 한다.

 

[주3] 강은교 시인은 ‘죽음의 왕’이라고 번역했다(《고독은 잴 수 없는 것》, 73쪽). ‘king’은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신(God)’을 상징하고, 신의 권위를 깨뜨리는 존재가 ‘파리’이다. 따라서 ‘king’을 ‘죽음의 왕’으로 보기 어렵다. 파리야말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나 신과 대립하는 ‘죽음의 왕’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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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 -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산문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에이치비프레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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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은 ‘재즈 시대(Jazz age)라고 불리던 황금기였다. 재즈 시대는 낭만과 모순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금주법이 시행되었고, 알 카포네(Al Capone)가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한편에선 스윙재즈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성(性)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modern girl)‘플래퍼(flapper)라고 부른다. 그녀들은 싹둑 자른 단발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플래퍼 드레스를 찰랑거리며 무도회장을 드나들었다. 그녀들은 술과 담배, 춤과 파티, 화려하면서도 파격적인 옷차림을 즐겼고,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으며 도발적이었다.

 

스콧 F.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와 그가 탄생시킨 개츠비(Gatsby)는 재즈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환락과 환멸이 교차하는 재즈 시대에 선 젊은 세대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떠나간 연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거부가 된 뒤 날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개츠비의 모습은 그 시대의 화려한 낭만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그 이면에 감춰진 절망을 상징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역시 개츠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과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평생 그를 따라왔다.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는 피츠제럴드를 압박해온 평생의 짐이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를 뛰어넘은 대작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며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부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술과 파티를 즐겼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면서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화려함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재즈 시대는 사상 최악의 경제 대공황이 오면서 막이 내렸고, 그는 마지막 소설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피츠제럴드 못지않게 그의 아내인 젤다 세이어(Zelda Sayre)도 수많은 스캔들을 몰고 다닌 화제의 인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녀를 낭비벽이 심하고, 남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녀’로 기억한다. 피츠제럴드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증언에 따르면 젤다는 남편의 글쓰기를 질투해서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항상 술을 먹였다. 부부가 파리에 살았을 때, 젤다는 프랑스인 비행 조종사와 짧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피츠제럴드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젤다는 정신병원과 요양소를 오가며 지냈다.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나고 8년 뒤에 젤다는 입원한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사망한다. 과연 그녀는 피츠제럴드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녀였을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아내’로만 기억해야 할 인물인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피츠제럴드를 들들 볶는 젤다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작가로서의 젤다’를 들려주는 《젤다》를 읽어보자. 이 책의 부제는 ‘젤다의 편에서 젤다를 읽다’이다.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젤다의 부정적인 모습, 즉 ‘남편의 재능을 파괴한 정신이상자’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젤다는 글재주만 좋을 뿐만 아니라 발레 실력이 뛰어난 플래퍼였다. 또 그림도 잘 그렸다. 그녀가 쓴 단편소설들은 ‘스콧 피츠제럴드’ 또는 그와 같이 쓴 것으로 발표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창작 욕구와 예술적 열정과 무시했다. 젤다는 남편의 반대와 딸의 양육 문제로 인해 정식으로 무용수로 데뷔할 기회를 놓쳤다. 만약 그녀가 무용수가 되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젤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고,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그녀의 외로움과 우울증은 커져만 갔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일기와 편지에 담긴 문구를 베껴 적으면서 소설을 썼다. 그 문제의 작품들은 피츠제럴드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 준 데뷔작 《낙원의 이편》과 두 번째 장편소설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두 편 모두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다.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비평한 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Friend husband’s latest)에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을 ‘요상한 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 ‘요상한 책’을 쓴 남편의 ‘표절’을 지적한다.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꽤 편집되어 있지만 편지글들에서도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 있고요. 아무래도 피츠제럴드 씨는―스펠링 제대로 쓴 것 맞죠?―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

 

(이재경 옮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 중에서, 118쪽)

 

 

《젤다》에 총 5편의 단편소설과 총 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The original follies girl), 『남부 아가씨(Southern girl), 『재능 있는 여자(The girl with talent)‘Girl 시리즈’라는 표제를 달고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젤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사랑에 눈이 멀고 재능과 열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들이다. 『재능 있는 여자』는 젤다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루’는 미국 전역을 넘은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춤 실력을 갖춘 댄서이지만, ‘사랑’과 ‘가정’이라는 현실 앞에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미친 그들(A couple of nuts)은 재즈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담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주는 소설이다.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환락의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젊은 연인의 모습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재즈 시대의 풍경 사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제 젤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젊음의 생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춤을 추던 ‘플래퍼’ 젤다의 이야기, 그리고 열정적인 충동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예술가’ 젤다의 이야기를.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재즈 시대의 ‘전설’로 남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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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3-2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게임 이름 같은데요, 젤다 피츠제럴드였네요. 주말에 날씨가 많이 차갑다고 합니다. cyrus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9-03-26 07:22   좋아요 1 | URL
지난 주 토요일과 일요일의 날씨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어요. 토요일엔 비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요즘 같은 날씨에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감기 조심하세요. ^^

2019-03-23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26 07:25   좋아요 0 | URL
제 나름대로 언어유희를 의도한 제목을 정해봤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