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catcher’를 ‘파수꾼’으로 해석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일단 익숙한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이 소설의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The catcher in the Rye’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 「호밀밭을 지나오다가(Comin Thro the Rye, Coming Through The Rye)에서 따온 제목이다.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The Catcher in the Rye》 (Little Brown & Company, 199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1998)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어갈 때 한 아이가 흥얼거린 콧노래를 듣는다. 그 노래가 바로 번스의 「Coming Through The Rye」에 곡을 붙인 민요다. 그런데 홀든은 그 노래를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If a body catch a body coming through the rye)이라고 착각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확고히 다진다. 나중에 그의 여동생 피비(Phoebe)는 그 노래가 「Coming Through The Rye」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절판] 로버트 번스 《올드 랭 사인》 (솔출판사, 1995)

* [절판] 김천봉 엮음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이담북스, 2011)

* [e-Book] 로버트 번스, 김천봉 엮음 《다정한 입맞춤: 로버트 번스 시선》 (글과글사이, 2017)

 

 

 

 

로버트 번스는 오늘날에 민요로 더 알려진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붉고, 붉은 장미(A Red, Red Rose)를 쓴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이다. 번스가 누군지 몰라도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드 랭 사인」은 연말 또는 졸업식에 자주 불리는 노래다. ‘auld lang syne’은 ‘옛날’이라는 뜻을 가진 스코트어(Scots: 스코틀랜드 표준 영어)다. 현재의 ‘애국가’가 나오기 전에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 그리고 독립군 및 임시정부 인사들은 민요 버전의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춘 애국가를 불렀다.

 

홀든이 우연히 들은 「Coming Through The Rye」는 「올드 랭 사인」에 비하면 자주 불리는 노래는 아니지만, 사실 「Coming Through The Rye」도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이다. 우리나라에 ‘들놀이’라는 제목의 동요로 번안되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 동요 모음집 카세트테이프에 흘러나오는 ‘들놀이’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도 이 노래를 알려나?

 

 

 

 

 

 

※ 영국의 드라마틱 소프라노(dramatic soprano) 가수 플로런스 이스턴(Florence Easton)이 부른 「Coming Through The Rye」

 

 

 

 

 

 

※ 동요 ‘들놀이’

 

 

 

번스는 스코틀랜드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를 썼으며 전원생활의 평화로운 분위기, 농민들의 애환 등을 담아냈다. 그래서 번스의 시는 투박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 난다. 그의 고향에 박물관이 된 생가가 있을 정도로 번스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번스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분류되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번스의 인지도는 아주 낮다. 시 앤솔러지(anthology)에 가장 많이 수록된 번스의 시는 「붉고 붉은 장미」다. 번스의 시 선집은 1995년에 나온 《올드 랭 사인》(솔출판사)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들과 함께 수록된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이담북스)이다. 두 권 모두 스코티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지만, 절판되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한 번스의 시들은 《다정한 입맞춤》(책과책사이)이라는 새로운 제목이 붙여져 전자책 형태로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절판된 종이책과 전자책 두 권 모두 역자는 같아도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Coming Through The Rye」는 종이책에 없고, 전자책에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출판사의 번스 시 선집에도 「Coming Through The Rye」는 수록되지 않았다. 「Coming Through The Rye」가 번스의 대표 시로 보기 어렵다고 해도 소설 때문에 유명해진 시를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점은 의아스럽다.

 

종이책으로 나온 번스의 시 선집 모두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사실 번스가 시를 쓰면서 사용한 스코트어는 오늘날의 미국과 영국식 영어와 다르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18세기 초반 영국 연방에 합쳐진 후 영어와 스코트어, 그리고 스코틀랜드 방언을 함께 썼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코트어 특유의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영국 표준 영어의 철자(spelling)를 바꿔서 사용했다. 이를테면 영국인들은 ‘하나’를 뜻하는 영어로 ‘one’을 쓰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ane’라고 쓴다. 어쨌든 번스는 스코트어와 스코트랜드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번역가는 번스의 시를 2중(옛 스코트어→영국 표준 영어→한국어)으로 번역해야 하는 번뇌에 시달려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의 역자 해설(119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의 아버지(William Burness, 1721~1784: 1786년까지 번스는 자신의 이름을 ‘Robert Burness’로 표기했다)는 가난한 농부였다.

 

 

시인의 성(姓)은 원래 ‘Burnes’였다. 1786년 이후로 번스는 ‘e’를 뺀 ‘Burns’로 서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는 ‘Burness’로 잘못 적혀 있다. 고친다면 뒤에 있는 ‘s’를 빼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 있는 장시 「경건한 윌리의 기도(Holy Willie’s Prayer)」에 누락된 원문의 일부와 그것을 번역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은 이 시의 제사(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와 번스의 해설문이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의 출처는 번스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웹사이트이다.

 

링크: http://www.robertburns.org/works/58.shtml

 

 

 

“And send the godly in a pet to pray.” - Pope.

 

 

* Argument

Holy Willie was a rather oldish bachelor elder, in the parish of Mauchline, and much and justly famed for that polemical chattering, which ends in tippling orthodoxy, and for that spiritualized bawdry which refines to liquorish devotion. In a sessional process with a gentleman in Mauchline - a Mr. Gavin Hamilton - Holy Willie and his priest, Father Auld, after full hearing in the presbytery of Ayr, came off but second best; owing partly to the oratorical powers of Mr. Robert Aiken, Mr. Hamilton’s counsel; but chiefly to Mr. Hamilton’s being one of the most irreproachable and truly respectable characters in the county. On losing the process, the muse overheard him (Holy Willie) at his devotions, as follows:-

 

 

번즈에 의하면, 홀리 윌리는 실제로 윌리엄 피셔(Willie Fisher)라는 모흘린(Mauchline) 마을의 독신 장로로, 그 마을 목사와 합세하여 개빈 해밀턴(Gavin Hamilton, 또는 곤 해밀턴)이라는 선량한 사람을 교회 재판에 고소했다. 그러나 에어(Ayr, Ayrshire: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항구 도시, 번즈가 태어난 지역- 필자 주)의 장로회가 해밀턴을 무죄로 판결하자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번즈는 불만 가득한 상태의 윌리가 혼자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을 엿듣는 형식을 빌려, 자기만 옳고 선택됐다고 믿는 칼뱅교도의 오만한 독선과 편협성과 이기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솔출판사, 128쪽,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 형식으로 요약한 내용)

 

 

솔출판사 판본의 「Holy Willie’s Prayer」 역시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脚註) 형식으로 언급했지만, 제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 [e-Book]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5)

* [품절]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0)

 

 

 

제사의 출처는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1714년에 발표한 풍자적인 장시 「머리 타래의 강탈(The Rape of the Lock)」 4곡(曲, canto)의 64행 구절이다. 이 시는 흔히 ‘머리카락을 훔친 도둑’으로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The Rape of the Lock」은 총 5곡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포프 시선》(지만지)은 포프의 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본이지만, 「The Rape of the Lock」은 제1곡와 제2곡만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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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잉글리시 튜터가
<호밀 밭의 파수꾼>을 자신의 인생책
으로 꼽던 기억이 나네요 :>

cyrus 2019-03-04 14:04   좋아요 0 | URL
지난주 목요일에 <호밀밭의 파수꾼> 독서 모임이 있었는데, 저랑 다른 한 분 빼고는 이 책을 좋게 봤어요. ^^;;
 

 

 

이름만 들으면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가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쓴 작품들이 뭔지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 읽은 건 하나도 없었다. 올해 1월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그 후》였다. 소세키의 중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소세키의 초기 문학 중 걸작으로 알려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봤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진 못했다. 언젠가 다시 시도해보려고 한다.

 

 

 

 

 

 

 

 

 

 

 

 

 

 

 

 

 

 

 

 

* 나쓰메 소세키, 노재명 옮김 《그 후》 (현암사, 2014)

* 나쓰메 소세키, 윤상인 옮김 《그 후》 (민음사, 2003)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고등유민은 ‘인텔리 백수’를 뜻하는 단어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부유한 실업가이다. 그는 가족에게 용돈을 받아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간다. 다이스케가 살았던 일본 메이지(明治) 말기는 출세주의가 오늘날 못지않게 치열했던 시대였다. 에도(江戸) 시대의 봉건 가신들은 메이지 시대의 귀족이 되었고, 러일전쟁(1904~1905년)으로 큰 부를 쌓아 올린 신흥 부르주아들은 혼인을 통해 상류사회에 들어가고자 했다. 유산계급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곧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금전적 기반을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던 다이스케 역시 그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대학 동창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두 사람은 가족에게, 사회에게 버림받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사이에서 다이스케는 번민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생활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후》, 윤상인 옮김, 256쪽)

 

 

※ 글꼴을 굵게 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자신에게 떠안겨진 무겁고 벅찬 현실 때문에 고뇌하는 다이스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문장이다. 작품 해설(민음사 판본)에 따르면 ‘자연’은 소설의 핵심 주제이면서도 다양한 의미가 있는 단어다. ‘자연의 아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인위적인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와 결혼해서 살아가려면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이스케는 예전처럼 한량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제는 미치요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직업을 구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는 ‘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 전에 다이스케, 즉 ‘자연의 아들’이었던 그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 반대한다. 소설의 6장 후반에 노동의 의미를 두고 히라오카와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

 

(《그 후》, 윤상인 옮김, 107쪽)

 

 

 

민음사 판본의 역자는 다이스케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사회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가 쓴 글의 제목이다. 라파르그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위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새물결, 2005)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가들이 ‘신성한 노동’이라는 일종의 교리를 만들어 동물실험을 하듯 민중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라는 이상한 꿈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라파르그는 방직기계 한 대가 1분 동안 작업한 양이 숙련 여공이 100시간동안 일한 정도로 보면서 노동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을 불태울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라파르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구조 아래서 ‘일할 권리’는 ‘착취당할 권리’일 뿐이다. 그는 하루 노동시간을 3시간으로 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고, 개개인에게는 더욱더 많은 휴식이 주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존 러스킨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 (아인북스, 2018)

* 존 러스킨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좁쌀한알, 2018)

* 티머시 힐턴 《라파엘 전파》 (시공사, 2006)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 (예경, 2002)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는 다이스케의 입장이 존 러스킨(John Ruskin)에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러스킨은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지만, 인간적 가치를 금전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를 혐오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산업자본이 노동자를 기계로 전락시키는 참상을 목격한 러스킨은 시각 · 건축예술로 관심을 옮겼다. 그가 예술 분야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파편화된 사회를 인간 정신이 구현되는 곳으로 되돌리려는 열망이었다.

 

국내에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책(현재 ‘생명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에서 러스킨은 노동은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는 단순히 임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창조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러스킨이 생각한 ‘노동을 위한 노동’인 것이고, 이는 다이스케의 입장과 비슷하다. 다이스케가 들려주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전국시대에 일본을 통일한 무장)의 요리사 이야기에서 ‘노동을 위한 노동’에 대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최고의 요리사를 고용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맛보고는 맛이 없다면서 꾸짖는다.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요리사는 평소와 다르게 이류, 삼류 음식을 만든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 음식이 맛있다면서 칭찬한다. 다이스케는 요리 기술을 위해 일하는 요리사가 매우 불성실하고 타락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요리사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류 음식을 만든 거라고 본 것이다. 다이스케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을 선호한다.

 

러스킨이 1851년에 발표한 《라파엘 전파》의 첫 번째 글은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러스킨은 빅토리아 시대 런던 미술계를 점령했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소속 화가들을 옹호하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도 그는 자신의 노동관을 언급한다.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라파엘전파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글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추구해야 할 예술과 노동을 역설한 러스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창의성과 성취욕을 갖춘 노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노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중세에 활동했던 장인들이다. 따라서 러스킨은 노동자가 모두 이런 장인이 될 수 있을 때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정신적 공황이 심해지는 산업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러스킨은 신앙심으로 충만한 중세의 영성과 근대인의 삶을 일체화시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라파엘전파가 추구했던 것은 중세의 미학이다. 러스킨과 라파엘전파 소속 화가들이 생각하는 중세는 때 묻지 않은 소박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이다.

 

 

 

 

 

 

 

 

 

 

 

 

 

 

 

 

 

 

 

 

*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 (현인, 2018)

* 나쓰메 소세키 《런던 소식》 (하늘연못, 2010)

* 도가와 신스케 《나쓰메 소세키 평전》 (AK커뮤니케이션, 2018)

 

 

 

《그 후》를 읽다 보면 다이스케가 ‘일본의 러스킨’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영국에서 2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한 나쓰메 소세키는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에 심취했고, 박물관이 된 칼라일의 집을 세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수필에 가까운『칼라일 박물관』은 소세키가 칼라일의 집을 방문하면서 느낀 소회를 기록한 글이다. 칼라일도 러스킨처럼 자본주의를 비판했는데, 영국 문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소세키가 칼라일과 동시대에 활동한 러스킨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소세키의 초기작인 『환영의 방패』『해로행』[주]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두 작품을 위한 삽화가 나온다면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그림으로 정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좀 더 분석해봐야겠지만 존 러스킨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요긴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 故 노재명 씨가 번역한 하늘연못 번역본에 적힌 '해로행'의 작품명은 ‘북망행’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재명 씨는 '북망행'으로 제목을 바꾼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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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1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1 17:08   좋아요 1 | URL
미래에 자본의 힘이 도시 밖을 넘어 시골에도 미친다면 자급자족하는 공동체 사회도 이상향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02-1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양이...만 읽어봤는데 집에 있는 다른 소세키 작품들(그 후, 마음)도 차차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cyrus 2019-02-12 16:25   좋아요 1 | URL
나쓰메의 장편소설을 다 읽어본 독자들의 평을 보니 장편소설 모두 일독할 가치가 있다고 하네요. ^^

blueyonder 2019-02-12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소개해 주신 여러 권을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9-02-12 16:2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blueyonder님 덕분에 과학 정보를 많이 알아갑니다. ^^
 
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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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매번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다. 어떤 이는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한 성취욕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내 집을 마련해서 예쁜 마누라 혹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Nora)는 우리의 이런 세속적인 물음에 “그래, 네가 원하는 데로 사니까 행복하니?, 행복하게 살고 있는 너는 ‘인형’이니, ‘인간’이니?”라고 다시 질문한다.

 

《인형의 집》은 여권신장운동에 불을 댕긴 사회극이다. 노라 헬메르(Nora Helmer)는 변호사인 남편 토르발 헬메르(Torvald Helmer)와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지난 8년간의 결혼생활을 보낸 ‘아내’이자 ‘어머니’다. 그녀는 중병이 걸린 남편이 이탈리아에 요양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남편의 동료 변호사 닐스 크로그스타드(Nils Krogstad)에게 돈을 빌린다. 그 당시에 여성은 돈을 빌릴 수 있는 경제적 권한이 없었다. 노라 헬메르는 친정아버지의 연대 보증을 받아서 돈을 빌리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친정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져서 자신이 대신 서명하는 위증을 했다. 남편이 총재로 취임할 은행에 몸담고 있었던 크로그스타드는 해임 통고를 받아 실직자가 될 위기에 처했는데 그는 자신과 노라와의 거래를 빌미로 노라 헬메르에게 자신의 해임을 번복시켜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내의 뒷거래와 위증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오직 자신의 출세와 명예에만 집착한다. 이에 노라 헬메르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아내란 인격도 개성도 없는 존재이며 종달새나 같은 한낱 인형에 불과한 것인가? 마침내 노라 헬메르는 인간으로서의 ‘노라’가 되고자 집을 박차고 나간다. 시민사회가 기대했던 ‘예쁘고 상냥하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조건을 완벽히 갖췄던 노라가 자아를 찾기 위해 가정을 버린다는 결말은 당시로써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인형의 집》이 초연된 지 올해로 140주년이 된 지금 자신의 자아를 찾아 집을 떠나는 노라의 결정은 우리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노라를 ‘여권주의자’로 바라보는 해석은 다소 진부하다. 노라는 주체적인 자아를 자각해가는 한 여성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또는 연극 공연을 보면서) 봉건 윤리와 사회적 인습에 순응하여 살아 온 ‘헬메르의 인형 아내’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하는 모습에서 깨달음과 감동을 얻을 수 있다. 노라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외침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토르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이 옳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책에도 그런 비슷한 말들이 있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인형의 집》 3막 중에서, 164쪽)

 

※ 글꼴을 굵게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가부장제 사회 속에 사는 여성은 너무나 수동적이었고, 인형 같은 존재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나만의 생각’, ‘나만의 꿈’,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여성들은 ‘자기 삶의 의미’ 또는 ‘삶의 목표’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뚜렷한 언어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타자가 아닌 주체로 살아가는 것.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궁극에 절대적 자유를 얻는 주체적 존재가 되는 것.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삶에 관한 어떠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노라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인형의 집》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기 전에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종의 성장 소설 같은 희곡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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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2 16:33   좋아요 0 | URL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 공연작이 <인형의 집>이라서 거기에 맞춰 나온 특별판입니다. 저도 한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로라’로 생각했어요. 아마도 변진섭의 노래 제목 때문에 노라를 로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
 

 

 

 우드하우스의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독자들은 우드하우스가 코믹 작가이자 조크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력적인 플롯이나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거의, 혹은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고마워요, 지브스』[주1] 항목 중에서)

 

 

 

 

나는 나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아재다. 그래서 아재 개그를 좋아한다. 아재 개그는 흔히 말장난이 주를 이룬다. 동음이의어를 사용하거나,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활용한다. 분위기를 한순간에 얼어버리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개그는 뻔뻔하게 해야 한다. 체면도 내려놓고, 나이도 내려놓고, 눈높이도 낮추면서 자신을 낮춰야 개그가 나오고 펀펀(fun fun)해진다.

 

 

 

 

 

 

 

 

 

 

 

 

 

 

 

 

 

*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편집자는 후회 한다 외 38편》

(현대문학, 2018)

 

 

 

영국 출신의 작가 P. G. 우드하우스(P. G. Wodehouse)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귀족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권위나 체면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있다. 그들은 명석하지 않다.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에 직면하면 엉뚱한 방식으로 대처한다. 그들의 엉뚱하고 어리숙한 모습은 독자들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지브스와 우스터’ 시리즈에 나오는 귀족인 버티 우스터(Bertie Wooster)는 혼자 감당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에 마주치면 집사 지브스(Jeeves)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지브스는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가끔 그에게 딴죽을 건다. 집사에게 트집 잡히고 툭 하면 무시당하는데도 우스터는 그걸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활기차고 재미 넘치는 작가의 성격은 순진하고 낙천적인 우스터의 모습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드하우스의 소설에 나오는 남성 인물들은 재치 있는 말장난에 의존하는 영국식 유머를 구사한다. 우스터는 귀족이 아니라 ‘영국 아재’이다. 귀족 같지 않은 귀족. 이러한 인물의 특징은 우드하우스의 작품이 사랑받게 된 비결 중 하나이니라.

 

그런데 번역가들은 유머를 번역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우드하우스의 소설에 나온 유머, 즉 영국식 유머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건 까다로운 작업이다. 일상적인 대화는 그대로 번역해도 의미 전달에 크게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말장난, 농담, 비꼬는 말 등은 해당 언어에 특화된 유머 코드나 언어 표현으로 바꾸지 않으면 청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말장난은 청자의 취향에 좌지우지되는 부분이기에 재미를 못 느낄 수가 있다. 그렇지만 번역가는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원문을 우리말로 맛깔나게 번역하지 못하더라도 원문 속에 숨어있는 유머 코드를 파악하여 주석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일례로 우리말로 번역된 『모든 것은 지브스 손에』라는 소설에 지브스와 우스터가 처음 만나면서 대화하는 장면을 무심결에 보고 있으면 작가가 의도한 웃음을 지나쳐버린다. 왜냐하면 번역가는 지브스가 언급한 ‘우스터소스’가 무엇인지 주석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한번 마셔 보시겠습니까?” 그[지브스]가 마치 환자를 대하듯이 말했다. 병든 군주에게 기운을 북돋는 음료를 권하는 궁중 의사 같았다. “이건 제가 직접 개발한 음료인데, 색이 이런 것은 우스터소스 때문입니다. 날달걀을 넣었으니 영양가도 좋지요. 빨간 고추가 매콤한 맛을 내고요. 저녁 늦게 귀가한 뒤 이것을 마시면 아주 기운이 난다고 많은 신사분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아침 나[우스터]는 무엇이든 생명줄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냉큼 달려들고 싶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것을 꿀꺽 삼켰다. 순간적으로 누가 내 머리 속에 폭탄을 터뜨린 뒤 횃불을 들고 내 목구멍을 느긋하게 걸어 내려가는 것 같더니만, 갑자기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 들고, 나무에서 새들이 지저귀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희망이 다시 밝아 오고 있었다.

  “자네를 고용하겠어!”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가 세계 최고의 일꾼 중 한 명이라는 것, 어떤 집에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 이름은 지브스입니다.”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주인님.”

 

 

(『모든 것은 지브스 손에』, 180~181쪽)

 

 

※ 붉은색 글자는 필자가 표시한 것임.

 

 

 

지브스는 우스터(Wooster)의 침체된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스터소스(Worcester sauce)를 첨가한 음료를 준다. 음료의 효과에 만족한 우스터는 정식으로 지브스를 하인으로 고용한다. 이 장면에 인명 ‘우스터’와 지명 ‘우스터’의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유머가 나온다. 우스터소스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 우드하우스의 유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톰 닐론 《음식과 전쟁》 (루아크, 2018)

 

 

 

우스터소스는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우스터라는 도시에서 만들어졌다. 시큼함과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식초와 맵싸한 맛의 고추 추출물, 달콤함이 두드러지는 당밀과 설탕, 짭조름한 소금 등 다양한 맛을 내는 재료들을 한데 모아 숙성시켜 만든다. 우스터소스를 만든 사람은 요리사가 아니라 약사이다. 그래서 지브스가 만든 음료는 우스터소스가 들어간 일종의 ‘피로회복제’인 것이다.

 

우스터소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조미료 중 하나이다. 특히 바다 위를 항해하는 해운회사 승무원들이 우스터소스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바다 위에 오랫동안 생활하는 승무원들은 육지에 나는 맛있는 음식들을 접할 기회가 적다. 게다가 선박의 전속 요리사들이 만들어주는 음식들의 맛은 대부분 밋밋했다. 그들은 음식이 싱거우면 우스터소스를 찾게 되었고, 우스터소스 특유의 시큼한 맛에 중독된 승무원들은 육지에 도착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했다.

 

 

 

 

 

 

 

 

 

 

 

 

 

 

 

 

 

 

* 백욱인 《번안 사회》 (휴머니스트, 2018)

* 오카다 데쓰 《돈가스의 탄생》 (뿌리와이파리, 2006)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스터소스를 생소하게 여기겠지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맛보고 있었다. 돈가스 위에 뿌려진 조미료가 바로 우스터소스다. 다만 우리나라에 돈가스와 함께 들어온 우스터소스는 일본식이다. 돈가스는 일본이 고기를 막 먹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시기에 유럽에서 건너왔다. 당시 해산물 위주 식사를 하던 일본인에게 고기 자체를 먹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후 고기를 먹는 식문화에 점점 익숙해진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제조법(얇게 썬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많은 양의 기름에 튀겨내는 방식)으로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본식 우스터소스도 만들어졌다. 일본식 우스터소스는 기존 우스터소스에 간장을 섞은 것이다. 우리가 평소 즐겨 먹은 돈가스와 우스터소스는 서양의 음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으로 ‘번안’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변종’이다. 우스터소스의 기원, 일본식 우스터소스의 탄생 과정, 그리고 일본식 돈가스가 우리나라 경양식 문화 보급에 미친 영향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으면 《음식과 전쟁》(루아크, 2018)의 6장, 《번안 사회》(휴머니스트, 2018)의 2부 10장,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 2006)을 참조하면 된다.

 

 

 

 

 

 

 

 

 

 

 

 

 

 

 

 

 

 

 

 

 

 

 

 

 

 

 

 

 

 

 

 

 

* 존 키츠 《키츠 시선》 (지만지, 2012)

* [e-Book] 존 키츠, 김천봉 옮김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 존 키츠 시선》 (글과글사이, 2017)

* [절판] 김천봉 옮김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3》 (이담북스, 2011)

* [품절] 존 키츠 《가을에 부쳐》 (민음사, 1991)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르, 2011)

 

 

 

‘지브스와 우스터’ 시리즈에 속한 『설교 대회』라는 소설에 유명한 시구를 이용한 재미있는 대화가 나온다. 우스터의 친구 빙고(Bingo)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날씨 상태에 빗대어 표현하는데, 이 눈치 없는 우스터는 런던 날씨가 화창하다면서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빙고는 시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씁쓸한 처지를 계속해서 강조한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무의미한 대화는 우드하우스의 유머로 볼 수 있는데, 이 소설의 번역가는 대화에 나온 시구가 무엇인지 설명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이러면 독자는 작가의 지적인 유머를 그냥 쓱 지나치게 된다.

 

 

 

[빙고] “지난 몇 주는 힘든 시간이었어, 버티. 햇살은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우스터] “그것 이상하군. 런던 날씨는 아주 화창했는데.”

[빙고]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설교 대회』, 104쪽)

 

※ 붉은색 글자, 글꼴을 굵게 표시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표시한 것임.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No birds sing)…‥”라는 구절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무자비한 미녀(La Belle Dame Sans Merci)[주]에 나온다. 이 구절은 1962년 살충제 폐해로 봄이 와도 숲에서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봄’을 예견했던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책의 제사(題詞)로도 유명하다.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편집자는 후회 한다 외 38편》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 유머 작가의 작품을 수록한 최초의 선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 영국 작가의 유머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잘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우드하우스의 유머’라고 주장한 것들은 가정(假定)에 불과하다. 우드하우스 선집의 번역가는 ‘영국 아재’의 영국식 유머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1] 원제는 ‘Thank You, Jeeves’이다. 집사 지브스에게 늘 도움을 받는 주인 우스터가 하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마워요, 지브스’보다는 ‘고마워, 지브스’로 옮기는 게 적당하다.

 

[주2] 민음사 판본의 번안 제목은 ‘매정한 아가씨’, 지만지 판본의 번안 제목은 ‘무자비한 미녀: 발라드’, 이담북스와 글과글사이 판본(모두 김천봉 교수가 번역함)은 ‘무정한 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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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1-29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역시 넌 이름값을 하는구나.
역시 박사네. 시루스 박사.
나중에 너만의 백과사전 하나 편찬해도 좋을 것 같아.^^

cyrus 2019-01-29 20:14   좋아요 1 | URL
며칠 지나면 제가 뭘 썼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래도 이렇게 기록을 남기면 나중에 다시 참고할 수 있어요. ^^

2019-01-30 0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9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29 20:18   좋아요 0 | URL
외국영화에 나오는 유머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간혹 유머를 직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웃음 포인트를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

카알벨루치 2019-01-2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개를) 절레절레~👍

cyrus 2019-01-29 20:22   좋아요 2 | URL
이 글은 한 작가를 덕질하는 자세로 임하면서 썼는데,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작가라 글을 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

psyche 2019-01-29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보다 유머가 제일 어려운 분야인거 같아요. 언어로 말장난 하는 건 그 언어를 잘 알고 있어야 이해가 되고 당시의 문화나 시대상을 알아야 웃기거든요.

cyrus 2019-01-30 16: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대부분의 외국 유머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야 이해할 수 있는 고차원 유머인 것 같습니다... ^^;;

목나무 2019-01-2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아재 개그가 문득 궁금해지는 리뷰입니다. ㅎㅎ
우스터소스라고 하니 저는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문득 떠올랐어요.
늘 그렇지만 오늘도 리뷰 보고 몰랐던 지식 얻고 갑니다! ^^

cyrus 2019-01-30 16:33   좋아요 1 | URL
글을 쓰면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돼서 좋긴 한데, 대부분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식’들이네요... ㅎㅎㅎ

북깨비 2019-01-3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저도 cyrus님 아재 개그가 궁금합니다. 갑자기 돈까스도 먹고 싶고 ㅠㅠㅠ 우스터소스와 간장의 만남이었군요. 오늘도 깨알상식 얻어갑니다.
 
애서광들
옥타브 위잔 지음, 알베르 로비다 그림, 강주헌 옮김 / 북스토리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 수백 권의 책들이 나오는 이 세상에 당신이 그 정도의 책만 가지고 있다면 ‘애서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애서가에게 책은 소중한 대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지중지 대하듯이 읽고 간직해야 한다. ‘책을 사랑하는 것’은 책 내용이나 책 읽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애서가와 애서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책에 과도하게 빠져 있다는 건 같지만, 이 두 단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통 애서가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책이나 작가를 보고 선택한다. 애서광은 그러한 목적이 없으며 구하기 힘든 희귀한 책들을 찾으려고 한다. 이를테면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이나 한정판, 초판본 등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말한다. 또한 애서가는 자신이 좋다고 보는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어 하지만, 애서광은 책을 개인 수집품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 들지 않는다.

 

《애서광들》은 책을 너무 사랑해서 황당한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집이다. 총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채워져 있다. 이 소설집을 쓴 프랑스 출신의 작가 옥타브 위잔(Octave Uzanne)도 애서가이다. 그는 사드 후작(Marquis de Sade)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등 작가들의 미발표 작품을 발굴해 세상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처럼 책을 사랑하고 모으는 것 자체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의미 있는 문화 활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의 애서가가 묘사하는 애서광들은 ‘책의 노예’가 되거나 ‘책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애서광들》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 애서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뮤즈 연감, 1789년』의 화자이다. 뮤즈 연감은 프랑스 18세기 중반부터 매년 발행된 시 전문 잡지다. 헌책방에 자주 드나드는 화자는 1789년 판 뮤즈 연감을 사들인다. 그는 이 책을 읽다가 그 안에 끼워져 있는 조그마한 종이봉투를 발견한다. 그 봉투 안에 1789년 판 뮤즈 연감의 전 주인 이름으로 추정되는 머리글자가 적혀 있다. 화자는 이 책의 주인이었던 18세기 인물이 누군지 조사하게 되고, 그와 결혼한 여인의 정체까지 밝혀낸다. 두 사람은 불행하게도 1789년 프랑스혁명에 휘말려 생이별을 한 연인이었다.

 

『시지스몽의 유산』은 《애서광들》 완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미 두 차례나 번역된 적이 있는 단편[주1]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애서가인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모은 수많은 책을 경매장에 보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는 다른 애서가들이 자신의 책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시지스몽은 무덤 안에 가지고 가지 못할 책들이 경쟁자인 애서가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고, 자신의 사촌 엘레오노르에게 넘겨준다. 엘레오노르는 거대한 저택에 보관된 책들을 관리하는 주인이 된 것이다. 시지스몽이 살아있었을 때 그의 장서를 호시탐탐 노리던 경쟁자 중에 라울 기유마르로 포함되어 있다. 기유마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파리의 유명한 애서광이다. 그는 시지스몽의 유산인 책들을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 엘레오노르에 찾아가 애걸복걸한다. 기유마르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엘레오노르 앞에서 사정하는 모습은 ‘책에 빠진 바보’다운 면모이다. 엘레오노르는 책에 전혀 관심이 없고, 애서가들을 업신여기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싫어하는 악녀’‘늙고 못생긴 마녀’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지스몽은 엘레오노르와 같은 여자를 ‘음란한 욕망을 가진 하와(Ḥawwāh: 아담의 아내)의 판본’이라고 무시한다.

 

 

 

[기유마르의 대리인] “이게 시지스몽 씨의 유언장 사본입니다. 나의 사촌 엘레오노르 스테파니 퓔셰리 시지스몽 양에게 이것 등등을 유증한다.”

 

[기유마르] “결혼하면 그 책들이 내 재산이 되니까, 엘레오노르 시지스몽 양과 결혼하는 겁니다!”

 

[기유마르의 대리인] “엘레오노르 시지스몽 양의 나이가 지금 58세입니다.”

 

[기유마르] “당신은 내가 성욕이나 풀려고 결혼을 계획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비난받아 마땅한 색욕! 육체를 탐하는 욕정! 음란한 욕망! …‥쳇! 여자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와의 한 판본에 불과합니다.”

 

[기유마르의 대리인] “퐁투아즈행 기차가 몇 시에 있습니까? 당장 달려가서 내가 청혼한다고 알려주십시오.”

 

[기유마르의 대리인] “안 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또 내가 엘레오노르를 봤습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빼빼 마른 노파였습니다. 대패로 제대로 다듬지 않은 낡은 나무판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기유마르] “당장 출발하세요! 서둘러주세요!”

 

[기유마르의 대리인] “세월의 풍파에 쭈글쭈글해진 사과처럼 주름투성이였다고요! 괴물이 따로 없었습니다!”

 

[기유마르] “아 참, 그만하십시오!”

 

[기유마르의 대리인] “머리칼도 없어 가발을 썼고, 이빨도 다 빠져 틀니를 했습니다. 코도 매부리코였고, 뺨에 박힌 세 개의 사마귀에는 뻣뻣한 털들이 돋아 있더라고요…‥.”

 

 

(『시지스몽의 유산』, 55~57쪽)

 

 

 

18~19세기 남성들이 보기에 ‘책 읽는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들로 보였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남성들의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펼쳤으며 빠른 속도로 책 속에서 현실 너머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똑똑한 여자를 두려워한 남자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는 여자들이 애서가가 될 수 있는 사회적 · 경제적 여건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시지스몽의 유산』의 문제점은 ‘책 읽는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데 있다.

 

『프랑스계 일본인 무사의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유행하던 자포니슴(japonisme)[주2]이 반영된 소설이다. 라리브는 일본 서적을 수집하는 애서광이다. 일본에 푹 빠진 그는 프랑스 문화 및 예술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프랑스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오가타 리쓰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시지스몽의 유산』 다음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 이야기다. 서양의 입장에서 동양을 제멋대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리브는 한 남자의 팔을 잡고 우리 쪽으로 잡아당겼다. 거스무레한 얼굴빛, 짧게 기른 검은 콧수염, 귀의 위쪽으로 당겨진 날카로운 눈…‥.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완전한 일본인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피부색이 노랗고, 체구가 작은 사람들, 유럽식 옷을 입은 원숭이를 닮은 사람들, 유럽 대도시의 일본인 시장에서 흔히 보던 사람들과 약간 달랐다.

 

 

(『프랑스계 일본인 무사의 이야기』, 113쪽)

 

 

『프랑스계 일본인 무사의 이야기』는 ‘긍정적(positive) 오리엔탈리즘’‘부정적(negative) 오리엔탈리즘'의 사례를 동시에 제공한다.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를 낀 유럽인들은 동양 문화를 서양 문화의 대안으로 인식하면서 과도하게 찬양한다. 앞서 언급한 자포니슴은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의 한 축으로, 일본을 미지의 세계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본다. 반면 부정적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를 끼게 되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 달라진다.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동양인은 야만적(“원숭이를 닮은 사람들”)이고, 열등한 외모(“귀의 위쪽으로 당겨진 날카로운 눈”)를 가진 존재이다.

 

『나폴레옹 1세의 수첩』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전시 중에 들고 다니던 수첩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책의 종말』종이책이 사라진 미래의 모습을 그린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 언급되는 ‘스토리그라프(storygraphe)’는 저자의 목소리로 채워진 책이다. 미래의 독자는 이것을 언제든지 휴대하면서 들을 수 있다. 오늘날의 오디오북과 거의 비슷하다. 소설에 묘사된 종이책이 사라지게 될까 봐 불안해하는 19세기 유럽 애서가들의 모습, 그리고 종이책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책이 등장할 거로 예언하는 화자의 주장은 현실이 되었다. 『책의 종말』은 쥘 베른(Jules Verne)이 썼다고 하면 속아 넘어가서 믿을 정도로 책이 진화되는 현실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반영한 공상 소설이다.

 

‘책은 인간의 운명을 뒤바꿔놓는다’라는 말이 있다. 책 읽기가 중요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애서광들에게 적용한다면 그 의미는 180도 달라진다. 책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따라 애서가는 애서광으로 운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에 중독되고 ‘책의 노예’가 된 채 살아가게 된다. 애서가라고 생각하는 나는 《애서광들》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책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1] 《애서광 이야기》(범우사, 2004), 《애서 잔혹 이야기》(이모션북스, 2017)에 수록되어 있다.

 

[주2] 자포니슴은 프랑스어 발음이며 영어로 발음하면 ‘자포니즘(Japon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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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4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28 16:59   좋아요 1 | URL
일하면서 돈을 벌면 그나마 책 살 형편은 될 줄 알았는데, 역시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ㅎㅎㅎㅎ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니 책을 많이 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게 됩니다. 저비용으로 고효율 책을 사는 소비 방식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

레삭매냐 2019-01-24 17: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우리는 이미 책 읽는 노예
가 아닐까요 ㅋㅋㅋ

책 읽는 여성의 이야기에서는 선구적
페미니즘의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애서광보다는 애서가이고 싶으나,
현실계에서는 전자로 기우는 느낌이
듭니다. 책을 사고 또 한편으로는 팔아
치우는 역설적 인간의 모습이 바로
저네요.

cyrus 2019-01-28 17:0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책의 노예를 증명해주는 문서는 영수증인가요? ㅎㅎㅎㅎ
저도 가끔 필요한 책을 사고 싶으면, 가지고 있는 책을 팔 때가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