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그 낮의 syo와 밤의 syo

 

 

1

 

백수에게 명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무게감이 만만하지 않은 화두로서 1년에 두 차례, 정말 징하게도 오랫동안 고민해온 질문인데, 어쨌든 노답이다. 뜨거운 눈총(적당히 하세요, 뜨거워서 정월 초하루에 반팔 입게 생겼잖아요)에 데고 날카로운 충고(라고 부르시니까 그렇다고 쳐드립니다)에 베이는 하루 종일을 10~15회쯤 겪고 나면 이쪽도 어쩐지 무감각해지고 저쪽도 어쩐지 지쳐서, 무승부라기보다는 쌍방이 패배하는 결론이 늘상 도출되는 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서로가 아는 것이다. 의미가 농축된 짧은 한 마디 말과, 감정이 쪼르르 새어나오는 능숙하지 못한 눈빛과, 그걸 덮기 위해 던지는 어색한 웃음 같은 것들이 긴 이야기를 단번에 대신한다. 아, 역사란 이렇게나 편리한 것이다. 때리지 않지만 때리고, 얻어맞지 않지만 얻어맞는 기적의 현장. 그런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너의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누군가는 말했다돈은 빵이야.

누군가는 말했다돈은 상품이야.

누군가는 말했다돈은 삶이야.

 

하지만 누가 말할까돈이 당신이라고상품이라고?

오 이런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생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데?

 

이것은 절대 좋은 거래가 아니다.

국가들은 진짜 살아 있는 것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대 자신이!

 

그 책에 당신의 표식을 할 때에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삶이란 가난한 이들과 영원한 추종자들을 위해

망각을 퍼트리고씨앗을 뿌리고낭비하는 것 아닐까?

에곤 실레영원한 아이, 13-15쪽

 

가끔은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애쓰는 나를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어린 나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김정선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194

 

나는 왜 글을 쓰는가내 손가락이 촉침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질문을 추적한다젊었을 때부터 내 앞에 놓인 익숙한 수수께끼언어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이와 친구들과 사랑의 계곡에서 한 박자 바깥으로 물러서기.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패티 스미스몰입, 129


 

 

2

 

백수에게 명절은 도리 없이 그런 것인데, 백수+독서가에도 명절은 일종의 허방이다.

 

휴일이 기니까 이게 다 가능할 거라는 기대로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호연지기로 연휴의 문을 열었으나, 나올 때는 쥐구멍으로 나왔던 경험을 서너 번쯤 하고 나니까 비로소 문제의 원인이 드러난다. 핵심은, 백수에게는 평일이 명절이고 명절이 평일이지만 non백수에겐 평일이 평일이고 명절이 명절이라는 점이다. 백수는 명절에 바쁘다. 평일에는 놀아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울며 겨자를 먹든 웃으며 피자를 먹든 어쨌거나 읽는 일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 그러나 명절이 되면 집단수용소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이 떼로 거리에 몰려나와, 그간 바삐 사느라 녹이 슬었던 우정의 표면에 기름을 칠하거나 함께 돼지껍데기를 뒤집으며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할 친구, 감정의 배터리를 완충시켜 다시 일상을 헤쳐 나가는데 힘이 돼 줄 25YearAh짜리 대용량 보조배터리를 찾아서 전화번호부를 샅샅이 뒤지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syo는 이리저리 불려나가고, 늦은 밤까지 너덜너덜해지고, 알딸딸한 표정과 마음을 하고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이렇게, 책 대신 사랑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읽는데 시간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좋구나, 감당할만한 행복이구나, 뭐 이런 생각들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아직도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김소연i에게」 부분

 

인생의 고랑에 맺힌

찰나의 수화물처럼

신의 비밀스러운 섭리 따라

한 세대가 싹트고 익고 사라지면,

또 다른 세대가 그 뒤를 잇고......

그렇게 우리 경망스러운 인간은

자라고 요동치고 들끓다가

조상들의 무덤가로 모여든다.

우리의 때도 곧 닥쳐오리니,

그 시간에 후손들은

우리를 상에서 밀어내리라!

 

벗들이여그때까진 이 가벼운 인생을

취하도록 마실지라!

알렉산드르 푸슈킨 지음김진영 옮김예브게니 오네긴 

 

 


3

 

내가 정말 쓰임이 없으며 여러 사람의 얼굴에 불편한 웃음이나 걸어놓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시름하는 낮과, 내가 그래도 쓰임이 있으며 몇몇 사람의 마음에서 진짜배기 웃음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심장이 저리게 느끼며 위안하는 밤이 접붙어 감정의 일교차가 극심한 날. syo에게 명절이란 그런 날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이야기는 계속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은 잃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김금희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작가의 말

 

시간은 흐르는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는커녕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까 봐 겁난다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일단 멈춘다면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게 뻔하니까시간은 순환한다는 말은 위로일 뿐이다시간은 앞으로 간다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조경란소설가의 사물, 64

 

 

 

 

--- 읽은 ---

몰입 패티 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예브게니 오네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김진영 옮김

소설가의 사물 / 조경란 지음

, 영원한 아이 / 에곤 쉴레 지음 / 문유림, 김선아 옮김


  

--- 읽는 ---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이현우 지음

전락 / 알베르 카뮈 지음 / 유영 옮김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지음 / 정영목 옮김

맑스주의 역사 강의 / 한형식 지음

후설의 현상학 / 단 자하비 지음 / 박지영 옮김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 황성원, 김민철 옮김

불교입문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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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2-0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죽어가는 짐승
오호~~ 캘리번과 마녀

친구들과의 뜨거운 밤. 좋은 시간 되세요!!!
뜨거운 밤 후기도 올려주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2-02 11:50   좋아요 0 | URL
안 뜨거워요. 좀 뜨거웠으면 좋겠는데 친구들이 다 식었어....
식은 건지 삭은 건지 하여튼 막 그래요 ㅋㅋ
사회생활이 그런 걸까요?
저만 백수라서 어린이 같고 ㅋㅋㅋㅋ 재미없어 ㅋㅋㅋ

레삭매냐 2019-02-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에는 엄청 두터운 책을 읽어 봅시다... 메리 설날입니다.

syo 2019-02-02 11:52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레삭매냐님 서재에 명절 인사 드리러 가는 걸 잊었네요.....
레삭매냐님도 메리 설날, 엄청 두터운 설날 되세요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2-0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짱박혀 책냄새 맡고 싶은 주말이네요~

syo 2019-02-02 12:24   좋아요 1 | URL
따뜻한 주말이네요,
책냄새와 공냄새를 두루 섭렵하시는 양수겸장의 배카알님!

카알벨루치 2019-02-02 12:45   좋아요 1 | URL
근데 진짜 쇼군의 페이퍼는 독서를 자극하게 한다 이런거 넘 좋은거 아냐 근데 난 왜 잠이 올라하노 ㅋㅋ

stella.K 2019-02-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수에게 명절이 그렇기는한데 백수를 가격하는 그들도
알고보면 다 고만고만한 삶을 살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에서 위안삼으려 하는 뭐 그렇고 그런 심리.
명절은 그저 그동안 만나지 못한 일가친척 만나는 날이니
그냥 그런 것에 의미를 두는 거지 별거 있습니까?
그래도 전 오랜만에 조카 녀석들 볼 생각을 하니 기다려지기도 하더군요.
물론 이것도 다 아직 결혼 안한 조카와 아직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 계신
울엄니 때문에 가능한 합작품이긴 하지만...ㅋ
암튼 명절 즐겁게 잘 보내십시오.^^

syo 2019-02-02 17:50   좋아요 0 | URL
역시 각자의 고충이 있겠으나 각자가 자기 고충 처리하는 데만 전념하고 남의 일은 남에게 돌려주는 명절이 되면 좋겠달까요.....

스텔라님 복작복작한 명절 보내세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19-02-03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수가 많아서 안 누르려다가 눌렀습니당~~ 킁킁~~
즐거운 설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syo 2019-02-03 14:13   좋아요 2 | URL
과분한 수의 좋아요가 페크님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말았나요 ㅎㅎㅎㅎ

페크님도 즐겁고 알차고 보람찬 명절 연휴 보내세요^-^

이하라 2019-02-0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절만한 날이 없는 것 같아요.

즐겁고 행복한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9-02-03 14: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
이하라님도 걱정 없이 즐거운 일만 가득한 명절, 그리고 새해 되세요^-^

블랙겟타 2019-02-0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일에는 평일, 명절에는 명절... 공감이가네요 ^^;;;
그런 의미로 안그래도 저도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ㄷ..(응?)
내일부턴 채..책읽으려구요.. ㅎㅎㅎ
syo님 즐거운 연휴 보내시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yo 2019-02-04 08:4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어느덧 연휴의 후반전이 시작되고 있군요. 독서가 있는 연휴를 기원하면서, 블랙겟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무식쟁이 2019-02-0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이래 이제 쇼님글 복습시작. 어느새 1주일이나 지났다니.. (잘 살아남으셨쥬?)

syo 2019-02-09 21:3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명절 따위에 질 수 있나요!! 적당히 잘 살아남아버렸습니다 ㅎㅎ
 

 

<감자엔 소스닷 토마토케첩 맛>을 먹다가 입천장을 베었다. 따끔하기에 뱉었더니 감자칩에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당연히 케첩맛 소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RH+A맛 소스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감자. 내가 그를 아끼는 마음의 반절의 반절만이라도 그가 나를 아꼈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지.

 

내 너를 너무도 사랑하여 거침없이 내 안으로 받아들였거늘 너는 어찌 날카로운 비수를 몰래 품고 들어와 내 마음에 한줄기 붉은 상흔을 남겼느냐. 스스럼없이 내 가장 약하고 부드러운 곳을 너에게 맡겼는데 너의 그 매섭고 차가운 칼질에 나는 다쳤고 향후 최소 아홉 끼는 고춧가루 구경도 못하게 되고 말았구나. 내 너를 사랑한 것이 네게 그리도 무거운 일이었더냐. 어찌하여 내게 닝닝하고 밍밍한 아홉 끼를 형벌로 내렸느냐. 대답을 해 보아라. 어서. 입이 있다면 말을 해 보란 말이다. , 너는 입이 없구나. 그것은 나에게 있구나. 너는 입이 없어 변명할 길도 없겠으나 나는 입이 있어 입의 일을 하려한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이리 아플 수도 있는 일이었음을 이제 알았으나 그럼에도 내 사랑은 변함없이 사랑의 일을 하려 한다. 피는 내가 흘릴 터이니 너는 즙을 흘리자. 그리하여 나의 것과 너의 것이 한데 어우러져 떠나자꾸나, 멀고 먼 대장 소장 십이지장으로. 혈액은 아랑곳 않고, 가거라, 감자칩아.

 

융털을 만나면 흡수되기 전에 꼭 안부를 전해다오.

 

 

우리에게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그러나 그 운명은 순순히 응종하면 할수록 점점 증장하여 닥쳐오는 것이다강하게 대하면 의외에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나혜석글 쓰는 여자의 탄생


결국 내 입에 느껴지는 맛이란나는 계속해서 숙제를 읽었다내가 가장 최근에 먹은 도리토스 맛에서 기억해낸 것과맛을 내는 일종의 화학물질과그리고 실제로 무슨 맛이 나는지 따위는 별로 관심 없는 나의 의식 없는 마음이 합쳐진 것입니다기억화학물질그리고 의식 없는 마음마술을 만들어내는 삼총사라고 할까요이것들이 합쳐져서 한 봉지를 다 먹고 싶게 만들고 그러고 나서 어쩌면 한 봉지 더 먹고 싶게 만드는 미각의 속임수를 만들어냅니다.

에이미 벤더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201901 : 44


 

1.고전학 공부의 기초 / 브루스 손턴 지음 / 이재만 옮김

: 정말 목록 제공 수준의 얇은 책이다. 가치와 무가치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2. 책혐시대의 책읽기 / 김욱 지음

: 혐오란 게 그렇더라. 혐오를 없애는 길은 혐오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뿐인데 요원하다. 혐오하는 이들은 어지간해서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대부분은 자기들이 혐오중인지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는 책을 혐오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 말이 맞았거나 틀렸거나, 책을 안 읽는 건 맞잖아. 결국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를 역설하는 책은 읽지 않는 이들을 설득하는 쪽보다는 읽는 이들의 자위용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더 큰 것 같다. 우린 달라. 우린 나아. 그리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맞았거나 틀렸거나 그 말은 까딱하면 읽는 이들이 스스로를 망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읽지 않는 이도 망할 수 있고 읽는 이도 망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책이 인간을 혐오하는 시대 같기도 하다.

 

3. 아무튼 비건 / 김한민 지음

: 천천히 식습관을 교체하기 위해, 일단 일주일에 하루라도 육류 및 유류 섭취를 중지함으로써 조심스레 첫발을 내딛어 보기로 했다. 물론 김한민 선생님은 이렇게 쭈뼛쭈뼛 시작하는 syo를 호되게 야단칠 것이다. 전체적으로 분노와 한탄의 정서가 드러나는 책이다. 치킨의 노예, 시종일관 죄송한 남자 syo는 그저 조아릴 뿐이옵니다......

 



4. 어쩐지 더 피곤한 것 같더라니 / 나카네 하지메 지음 / 류두진 옮김

: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내게 필요한 책을 골라야겠다. 어쩐지 더 피곤한 것 같더라니.

 

5. 최고의 엔지니어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 다쿠미 슈사쿠 지음 / 김윤정 옮김

: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내게 필요한 책을 골라야겠다.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최고의 뭐가 됐건 어떻게든 성장하려면.

 

6. 황인숙이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 / 고종석, 황인숙 지음

: 고종석이라는 사람을 한 번도 좋아한 적은 없었지만, 한 번은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이 사람 한 번을 좋아하지 않겠구나 싶어졌고, 그 사실 자체가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는 것은 syo나 고종석 선생님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아니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왜 읽은 것인가?

 


7. 도시의 발견 / 정석 지음

: 딱딱하다고까지는 하지 않겠으나, 그다지 읽는 재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도시에 관해 식견이 없어놔서 내용이 충실한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사두고 반복하여 읽을 책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것 같다.

 

8. 모두의 내력 / 오선영 지음

: 발견할 때, 그리고 재발견할 때 독자는 발견의 기쁨과 동시에 자신의 안목과 감각에 대한 신뢰를 조금쯤 얻는다.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이런 사람이 있다는 걸 나조차 이제껏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 , 이게 이렇게 좋았다니!(그땐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것이지!) 레벨이 더 많이 오르면 이런 발견과 재발견들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의 syo는 아직 발견 앞에 심장이 쿵쿵 뛰고 마음이 들썩거려 내가 이 작품을, 이 작가를 발견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안달하는 쪼렙일 뿐이다.

: 아니, 그래서 이 책이 그랬다는 건 아니구요...... 이 책을 읽으며 syo는 심장이 뛰었다가 말았다가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다. 역시 이 작가의 새 책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들썩거렸다가 말았다가 할 것이다. 읽게 될까? 결론이 선명하지 않다.

 

9. 마르크스 씨, 경제 좀 아세요? / 이완배 지음

: 제목이 마르크스를 목 놓아 불렀으나, 마르크스 책이 아니라 큼직큼직한 경제학자들을 빠르게 훑어주는 청소년용 책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마르크스를 불렀다면 읽어 줘야 진정한 맑덕후가 아니겠는가.

: 아 참, 책을 평하자면, 어른이 읽기에는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이라는 만화책이 이 책보다 재미와 깊이 양면에서 월등하다.



10.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 김정선 지음

: 좋은 글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나와는 맞지 않은 글임을 직감하게 되는 때가 많다. 아름답지만 탐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가 자리하겠으나 내 가슴의 문 앞에서는 되돌아서는 글들이 있다. 그런 글에 대해 평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11.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 김금희 지음

: 작가로서 김금희의 단점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김연수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처음 읽었던 젊은 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카버의 <대성당>을 읽었던 날 같은, 내 어리고 비린 눈으로는 눈곱만큼의 단점조차 찾아내기 어려운 작가를 만났던 충격의 날들이 있었다. 사실 그런 작가들은 속속 등장했고, 그러다보니 이후의 만남에서는 점차 충격량이 감소하곤 했다. 리스트가 길어지면서, 감동 없는 찬사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래서 찬사를 조심성 없이 남발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나중에 철회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지.

: syo의 머릿속에서 김금희는 최은영의 좋은 맞수, 정도로 기억되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책이 나오고, 결국에는 최은영한테 지는, 그러니까 최은영이 손오공이라면 김금희는 베지터 같은...... 그런데 지금 보면 어쩐지, 결국에는 김금희가 이길 것 같다.

 

12. 보통의 식탁 / 조동범 지음

: 아무리 보통이 아닌 사람이더라도 인생에서 보통이 아닌 식탁보다는 보통의 식탁을 더 많이 마주할 것이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에게라면. 그러나 그 어떤 보통의 식탁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보통의 사연일 수 있고 보통이 아닌 사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사연들을 건너와 매일 보통의 식탁을 차린다. 당연한 듯이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먹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치운다. 그 당연하거나 아무렇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내일의 식탁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모레도, 그 다음날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식탁과 식탁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조금 더 깊은 눈으로 들여다 보아도 좋지 않을까.

 



13.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지음 / 신유진 옮김

: 섹스 전에 벗어 놓은 옷더미를 섹스가 끝나고 찍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섹스가 아니라 그 전과 그 후를 생각하자. 섹스의 주변을 훑어보자. 거기가 생각할 게 많은 장소다.

 

14. 무신론자와 교수 / 데니스 C. 라스무센 지음 / 조미현 옮김

: 거대한 지성들 사이의 빛나는 우정의 사례로써 자주 언급되곤 하는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 흄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편지를 몇 남겨놓지 않은 편이라, 이 두 사상가의 교류에 대해 서술하는 책이 과연 얼마만큼의 두께를 지녀야 좋을지(지닐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흄과 스미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 이상의 특별한 사실을 채굴하진 못한 듯하고, 오히려 두 사람의 사상을 비교 대조하는 데서 뜻밖의 역량을 드러냈다. 특히 흄에 대해서라면, syo는 이 책에서 굉장히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15. 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 / 김민주 지음

: 깔끔하다. 지도나 상황도가 거의 인포그래픽에 가깝다 할 정도로 깔끔하여 힙해 보였다. 일단 여기까지만 써 놓고,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이 얼마나 기억나는지 월말에 다시 점검해서 다음 줄을 써 보겠다.

: ......헤헤(머쓱).



16. 철현쌤, 공무원 연봉 진짜 얼마에요? / 조철현 지음

: 그랬구나, 공무원이, 그랬었어.....

 

17. 밥보다 일기 / 서민 지음

: syo는 자기가 쓰는 모든 글을 일기로 규정하는데(독서 일기, 연애 일기, 추억 일기, 일기, 일기, 일기....), 그것은 일기를 너무너무 사랑하여서가 아니라, 도리어 일기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을 리뷰라고 부르기에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므로, 누구나 충분히 떳떳할 수 있는 일기라는 장르를 참칭하는 것이 맞춤했다. 스스로 일기를 미완의 글, 부족해도 되는 글, 제 멋대로 써도 되는 글이라 낮잡아보았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이제 일기를 존중하게 되었다, 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저를 업수이 여겨도 저 착한 일기 녀석, 항상 내가 내 글과 성품을 함양하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쿨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고마워 일기야. 나도 어릴 적에 친구 신발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전화카드를 슬쩍한 적이 있지만, 오늘날 해인사에 쳐들어가 팔만대장경을 훔쳐내는 인간으로 자라지 않을 수 있었어. 이게 다 네 덕분이야.

 

18.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 마쓰무라 게이치로 지음 / 최재혁 옮김

: 아주 예전에, 내가 지금 대체 뭘 읽고 있는지 정말 1도 모른 채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조르주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을 읽었던 적이 있다. 뭘 자꾸 주고 심지어 뭘 자꾸 불태우라는데, 이 양반들이 왜 이러는지 영 알쏭달쏭하기만 했던 기억이다. 오늘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문득 그들이 그리워진다. 나는 이제 어느 사회에 주도적으로 퍼져 있는 재화와 감정의 교환 방식이 인간의 자아와 관계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납득할 만큼의 지성은 갖춘 듯하다. 제목만 보고서는 젠더 문제에 관한 책이리라 짐작하고 집었는데, 뜻밖에 새로운 방향의 독서 길이 열린 듯하다.



19.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지음 / 김명남 옮김

: 1회독 당시 별 5

: 2회독 후 별 5+ 마음속의 추가 별 2(팬심 1, 회독 보너스 1)

: 이런 식이라면 과연 나 죽을 때, 마음속에 몇 개의 별이 나와 함께 질 것인가.

 

20. 인생 직업 / The School of Life 지음 / 이지연 옮김

: 알랭 드 보통의 글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려고 무슨 시도를 하진 않았지만.

: 알랭 드 보통의 지성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려고 얄팍한 시도를 했을 뿐이지만.

: 알랭 드 보통의 머리(두뇌 말고)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갖은 시도를 다했다. 샴푸, 검은 콩, 검은 콩, 검은 콩...... 내 나이 때의 그의 사진을 보면,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방어를 하고 있다.

: 이런 걸 평이라고 쓰고 앉았으니, 아무래도 앞의 두 가지 항목은 달성이 요원하겠다. 이러니 나는 더욱더 세 번째 항목에 목을 매게 되는 것이다.....

 

21.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지음

: 진짜 딱 이만큼이다.



22.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 위화 지음 / 김태성 옮김

: 제목이 좀 거창한 바가 크다. 선생님은 새로운 말씀을 하시진 않으셨다. 그 감옥을 살펴보았지만 나는 특별히 무엇인가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선생님이 지금 글쓰기의 감옥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일까. 독서 피라미드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소용에 닿는 책이 아닐 수 있다. , 모든 책이 그렇긴 하다.

 

23. 요즘 것들의 사생활 : 결혼생활탐구 / 이혜민 글 인터뷰 / 정현우 사진

: 마음이 그리는 여러 그림 가운데, 사랑의 풍속도는 시대가 변하면 가장 빨리 따라 바뀌는 그림일까, 가장 마지막에서야 바뀌는 그림일까? 새로운 형식의 사랑과 결혼이 세상에 만개하였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가올 거대한 변화의 조짐으로 봐야 할까, 이미 세상이 크게 변하였다는 증거로 봐야 할까?

: 각자의 사랑을 지키는 일에 각자의 사랑을 지키고 있는 다른 이들의 행보를 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이 지키고 있는 사랑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꾸짖거나 응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지키고 있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도.

 

24. 진심의 공간 / 김현진 지음

: 좋은 글 솜씨가 그에 걸맞은 소재를 만나는 것이 훌륭한 작품을 낳는 기초적인 조합이겠지만, 더 크게 보았을 때, 좋은 눈과 좋은 손을 지닌 인간이 사색에 친한 직업을 만나는 것은 훌륭한 작품을 낳는 궁극의 조합이 아닐까. 부럽다. 앞으로 나올 그녀의 모든 책을 나는 읽을 것이다.



25.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용호 옮김

: 이 두 배쯤 되는 분량이었다면 어쩌면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포기했어도 언젠가는 돌아와 읽었을 것이다. 페터 한트케가 내게 무슨 짓을 해놨는지 당장은 알 수 없겠지만, 무슨 짓인가 해 놓기는 해 놨다는 느낌이 든다.

: 100자평이 이 따위야. 읽으래는 거야 말래는 거야.

: , 제가 읽고 딱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26.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지음

: 박노자 선생님의 글이 언제나 그렇듯, 이 책도 현재를 향해 있다. 러시아 혁명이 뒤집어 쓴 누명 같은 건 벗겨도 좋고 못 벗겨도 그만이지만,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영양분만큼은 어떻게든 추출하여 오늘 날 우리 땅에 링거라도 한방 놓고 싶어서 지은 책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27. 경제학의 모험 / 니알 키시타이니 지음 / 김진원 옮김

: 무심하게 칼로 툭툭 끊어서 대애애충 던져주는 것 같아서 받아먹어봤더니 꽃등심.



28.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 내가 두 개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면 이 책을 읽고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했을 것이다. 아마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정신적 활동을 이어나가야 하는, 이를테면 외국에서의 유학생활 같은 상황 속이었다면, 아마 울거나 그에 준하는 거센 감정 날씨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국이 내 모국을 식민지로 삼은 적이 있었더라면 많이 아팠을 것이고, 심지어 내게 식민 치하의 어두운 역사를 겪은, 이를테면 형틀에 묶여 온 몸을 두들겨 맞는 가운데 누군가 내 코에 주전자로 천천히 모래를 들이부은 그런 끔찍한 경험이 내게도 있었더라면, 아마 나는 이 책과 함께 실종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29.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지음 / 김명남 옮김

: 미셸 오바마는 기대 이상으로 글을 잘 썼고, 특히 자기 인생에서 인상적이라 할 순간들을 골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차림으로 독자의 앞에 가져다 놓을 줄 아는 능력이 있다. 500쪽이 넘는 책을 읽다 보면 긴장감이 떨어지고 차창 너머 지나가는 풍경 보듯 책장을 휙휙 넘기고 싶은 때가 오게 마련이다. 그럴 때, 독자의 눈을 다시 붙들어 매는 닻은 역시 에피소드다. 그런데 자서전은 그대로 에피소드의 연속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에피소드로 집중력을 잡아채는 데는 오히려 불리한 면이 있다. 우유 우유 꿀 우유의 꿀은 달지만, 초코 초코 꿀 초코의 꿀은 조금 덜 단 법이니까. 그래서 자서전은 에피소드의 위치, 중량, 밀도를 결정하는 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게 이 책에는 있다.

 

30.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정지혜 지음

: 이상하게 syo가 고른 독립 서점, 동네 책방 관련 책들은 대체로 폐업했거나, 휴업하는 걸로 마무리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무사정도만 무사했지 나머지 책은 어쩐지 늘 슬픈 결말이나 슬플 결말로(그러나 아직 희망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는 뉘앙스와 함께) 마침표를 찍어왔다. 그렇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동네 책방이 동네의 공공재에 가깝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현실을 조작할만한 역량이 있는 이가 몇이라도 있으면 더 좋겠다.



31.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지음 / 이정임 옮김

: 소설을 예술이나 고전이 아니라, ‘이야기로 읽었던 아름답고 행복한 독서의 때가 syo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아련해서 언제였는지는 흐릿하지만. ,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언제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할 게 아니라 응당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32. 키 재기 외 / 히구치 이치요 지음 / 임경화 옮김

: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도련님의 시대를 보면, 히구치 이치요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겨 있는 모리 오가이의 아련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장면이 나온다. 20세에 첫 작품, 23세에 마지막 작품을 내놓고 폐결핵으로 스러져야 했던 아까운 천재. 모리 오가이는 아직 읽지 못했으니 나쓰메 소세키와만 비교해 볼 때, ‘안타까운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나쓰메 소세키보다 히구치 이치요 쪽이 훨씬 아름답고 아련한 데가 있다. 도리어 현대적이랄지. 그것은 히구치 이치요가 여성, 그것도 아픈 몸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정혼자에게 파혼까지 당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취였다고 넘겨 짐작해본다.

 

33.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지음 / 류경희 옮김

: 고전이라는 명찰이 작품에게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고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도 있다. 유명 대학이라면 다 하는 짓이 있는데, 그 학교 교수라는 작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고전 100따위의 리스트를 뽑는 일이다. 그걸 보고 있자면, 과연 이 리스트를 만든 인간들이 이 책을 다 읽었는지 묻고 싶어질 때가 여간 아니다. 나 같아도 고전에 경기하게 생겼다.

: 오만과 편견이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는 사실 자체도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크지만,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불가피하게 가져다주는 편견(, 너무나 지루할 것 같애)을 생각하면, 제인 오스틴은 좀 복잡한 심정일 듯하다. 한 마디만 하고 싶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 책은, 되게 웃기다. 빵빵 웃음이건 실실 웃음이건, 제각각 한두 번씩만 터진 게 아니다.

: 그러나 번역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15년도 더 전에 민음사 판으로 읽었다가 굉장히 지루하여 1부도 못 넘기고 포기한 기억이 있다. 사실 당시 코흘리개였던(추우면 대학생도 코를 흘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syo의 역량이 역겨울 지경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공산이 더 크다. 민음사 판을 다시 읽지 않은 상태라 섣부르게 번역 탓을 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문학동네 판은 2017년 번역이다. 민음사는 그보다 14년 앞선다.



34.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 /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 양영란 옮김

: ‘사용 설명서라는 이름에서 어쩐지 초심자용 책이라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실제로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근데 그게, ‘마르크스 철학 초심자는 읽기 힘든 책이라기보다는, ‘프랑스 철학자 문체 초심자에게 쉽지 않은 책이라고 보는 쪽이 더 나은 설명이겠다. 좀 과하게 현란한 데가 있다.

 

35.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지음

: 십 몇 쇄를 찍고 개정판까지. syo는 임경선 작가님의 매력을 잘 못 느끼는 축인데도 판세가 이 정도로 돌아가면 어떤 아우라에 얻어맞으며 꼼꼼히 읽게 된다. 그리고 판단하건대, 이 책이 이만큼 팔릴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책들이 이 책만큼 팔릴 만한데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한 것이라 생각하는 쪽이 더 안전하며 일견 더 정확하기도 하겠다.

 

36. 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 공부 / 홍춘욱 지음

: 못마땅한 데가 없진 않았으나, 믿고 한 번 추천하는 책들을 주욱 읽어보기로 하였다. 내 입장에선 그것이 성과가 있어야 이 책을 평할 수 있겠다.




37. 은근한 잘난 척에 교양 있게 대처하는 법 /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 강수연 옮김

: 읽고 나서 이제 5일이 지났는데, ! 다 사라졌지! 감쪽같지?!

 

38. 어둠의 심연 / 조셉 콘라드 지음 / 이석구 옮김

: 코흘리개 대학생 시절 <암흑의 핵심>을 읽었었는데, 이제 허리가 다 굽어 <어둠의 심연>을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둘 중 어느 게 더 나은지 비교하기에는, 두 권 사이에 흐르는 세월의 강이 너무도 넓고 깊고 세차게 흐르고 있구나......

: 이 책의 경우, 실은, 책 자체에서 어떤 재미나 감동을 얻는다든지 지혜나 통찰을 챙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읽는 것보다, 이 책이 (결점으로) 지니고 있는 다양한 논점들을 들춰내고, 그것들에 관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지나가는 데 집중하는 방식으로 거꾸러뜨리고 나가는 쪽이 훨씬 남는 장사겠다.

 

39.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한국사 1 / 김상훈 지음




40. 오영수 교수의 매직 경제학 / 오영수 지음

: syo는 경제학에 관해서라면 아는 바가 적지만(이렇게 적고 나니까 경제학 빼곤 좀 아는 놈 같아서 좋다. 신나는 자기기만), 이 책 괜찮은 줄은 알겠다. 첫 번째 경제학 책으로 손색이 없(진 않다만-예를 들면 철지난 유머-없는 걸로 해도 거의 무방하겠).

: 위의 유쾌한 이코노미스트께서 제시한 도서목록의 1번 타자인데, 못해도 2루타 정도는 때린 것 같다. 시작이 좋다.

 

41. 노생거 사원 / 제인 오스틴 지음 / 조선정 옮김

: 번역. 오역은 당연히 아니겠으나, 류경희 번역의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의 그 실감, 말맛, 캐릭터의 다채로운 대화들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 이 판본 하나만 읽고 뭐라고 하긴 섣부르니 다른 번역을 읽어보고 기회가 되면 언급하기로 하겠지만, 어쨌든 100쪽 더 이상을 읽어나갈 맛이 나지 않아서 중도 포기.

 

42. 예브게니 오네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김진영 옮김

: 오랜만에 이 책을 읽으니, 로쟈 선생님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듣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풋풋한 30대 초반이었는데, 어느덧 이제 몇 해만 더 살면 푸슈킨이 세상 뜬 바로 그 나이가 되는구나. ..... ....

: 이야기는 정말 단출하다. 복잡한 플롯도 없고 갈등선도 한두 개에 그친다. 이야기로서 그다지 매력이 넘치는 책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어떻게 러시아 문학사에 거대한 이름을 남긴 책이 되었는고 하니,

: 푸슈킨은 원래 시인이고, 이 작품은 원래 시다. 러시아어로 읽으면 뭔가 운율과 라임이 쩌는 작품인 것 같다(는 것을 역자 해설을 통해 짐작이나 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쩌는지 마는지를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야기만 먹고 빠지자면 굳이 권할만하지는 않다.



43. 소설가의 사물 / 조경란 지음

: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없기에 놀랐다. syo는 조경란 작가님의 작품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심지어 수상 작품집 속의 단편조차 한 번도. syo는 조경란 작가님이 수상하지 않은 수상 작품집만 골라 읽었고, 조경란 작가님은 syo가 읽지 않은 수상 작품집만 골라 수상하셨다. , 우리의 이 수상한 관계.

: 그리하여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덧칠하고자하는 욕심이 정말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문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반적으로 시인의 산문집보다 소설가의 산문집이 욕심을 덜 부리는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까지 색을 빼고 선으로만, 전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걸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만 지은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그러면 이 글의 주인이 다른 장르 다른 곳에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고 싶어지는 마음이 쓱 드는 것이다.

 

44. , 영원한 아이 / 에곤 실레 지음 / 문유림, 김선아 옮김

: 큰 울림이 없었다. 어쩌지...... 어쩐지 저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근데 어떡해, 글이고 그림이고, 난 저 사람이 그냥 그런 걸......




2월이구나. 2월은 February.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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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1-3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나도 아침에 <오만과 편견> 읽었는데... 찌찌뽕!!
우리집엔 민음사판, 펭귄판 있는데, 나두 문학동네로 읽어야겠어요. 아, 기다려진다. 오스틴 읽는 시간^^

syo 2019-01-31 17:05   좋아요 0 | URL
제인 오스틴은 <감자엔 소스닷>과 함께!
하지만 페이지 귀퉁이에 빨간 케첩 소스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해요.

북깨비 2019-01-3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답지만 탐나지 않고. 이거 강렬한데요?

syo 2019-01-31 17:07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김정선 선생님의 이야기는 항상 저하고는 겉돌더라구요.....

북깨비 2019-02-01 14:30   좋아요 0 | URL
김정선님은 아직 모르는 분이에요 ㅠㅠ syo님 표현이 너무 멋있어서. 아름답지만 탐나지 않는게 저도 있어요. ㅎㅎ

짜라투스트라 2019-01-3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재밌네요
근데 요새 저는 동양철학책을 너무 많이 읽다보니 다시 소설이 이야기처럼 보이며 재미있네요 ㅎㅎㅎ

syo 2019-01-31 17:23   좋아요 0 | URL
어마어마한 책들을 어마어마하게 읽고 계시던데요?
ㅎㅎㅎㅎ 짜라님 곧 동양철학의 거장이 되시겠더라구요.

짜라투스트라 2019-01-31 19:55   좋아요 0 | URL
^^;; 책모임 때문에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모르는 걸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네요ㅎㅎㅎ

syo 2019-01-31 20:22   좋아요 1 | URL
응원합니다. 나중에 제가 동양철학책 읽을 때 짜라님께 많이 배우겠습니다ㅎㅎ

목나무 2019-01-3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번 의견에 저도 동조하며 24번 책은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
35번은 정말이지 왜 쇄를 거듭하는지 저는 여전히 모르겠으며 42번은 몇 년전 친구들과 함께 읽은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감자칩을 어떻게 먹으면 피맛을 볼 수 있나요. @.@
하지불안증후군때문에 저는 오늘 철분제를 처음 먹어봤는데 약간 피맛이 나더군요. -.-

syo 2019-01-31 18:08   좋아요 1 | URL
뭔가를 장바구니에 담으셨다는 말씀은 항상 저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ㅎㅎㅎㅎㅎㅎ 취향이란 무엇인가요.....
35번의 정체는 또 무엇인가요.....

감자칩을 왕창 넣고 씹었는데, 그 중 몇몇이 옆으로 섰더라구요-_-;;;
피맛이 알고보면 혈액속의 철분 맛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맛...

카알벨루치 2019-01-31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4권이라 그 숫자는 나를 향해 죽으란 44한 말!!!!! 아~웜메 기죽어 ㅋㅋㅋㅋㅋ1월도 읽는다고 고생한 쇼군 👏👏👏

syo 2019-01-31 20:23   좋아요 0 | URL
콕 찝어 44라면 노림수 냄새가 물씬나긴 하네요. 올해는 444를 목표로 할까요.....

카알벨루치 2019-01-31 20:26   좋아요 0 | URL
쇼님 매달 44권 목표도 개안네 500권은 족히 넘을거고 ㅎㅎ

syo 2019-01-31 20:28   좋아요 0 | URL
엌ㅋㅋㅋㅋ 올해는 슬쩍 줄여보려 했는데ㅋㅋㅋㅋㅋ 카알님 철벽방어... 골키퍼 아니신데 이러기 있어요?

카알벨루치 2019-01-31 20:32   좋아요 0 | URL
내가 막지 않아도 그대는 그렇게 흘러갈 것을 아니 “쇼군의 쇼군됨”을 지키심이 좋겠다는 ㅎㅎ

stella.K 2019-01-31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이제 두 권 읽었는데...
내가 비교를 말아야지. 비교하면 지는 거예요.ㅋ

카알벨루치 2019-01-31 20:41   좋아요 1 | URL
비교불가 쇼군!!!

syo 2019-01-31 22:24   좋아요 0 | URL
다 부질 없는 일입니다...... 허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요.... 어허허....

카알벨루치 2019-01-31 23:08   좋아요 1 | URL
들도 있제 ㅋㅋ

stella.K 2019-02-01 14:5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한 분은 절로 가실 태세고
한 분은 광야에서 외치실 태세군요.
오호 통제라.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8:04   좋아요 0 | URL
마자요 저 광야에 있습니다 ㅋㅋ

무식쟁이 2019-02-0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슬럼프.. 라고.. 내가 들은 적..이..

syo 2019-02-01 09:01   좋아요 0 | URL
다행히 사흘만에 물러갔습니다. 눈이 즉효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02-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거 별로야...나랑 안 맞아...라는 소리를 자신 있게 하기 위해 참고 읽는 시간도 있지요...이번 달에는 운수?좋게 그런 시간이 줄어들길 빌며! 감자에 금이 간 syo님 입의 쾌유도 빕니다.

syo 2019-02-01 14:24   좋아요 1 | URL
금세 낫고 있습니다. 날고 긴데도 제깟놈이 감자칩인데 그어봐야 얼마나 긋겠어요. 입의 상처보다 걔가 나한테 그랬다는 마음의 상처가 큰 것이지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겁고 알찬 시간 보내시요 맛난거 많이 드시고 be happy~ 사람들 말에 신경도 잘 끄고 ^^

syo 2019-02-01 23:07   좋아요 0 | URL
카알님두요 ㅎㅎㅎㅎ 즐겁고 알차고 배도 차고 공도 차는 해피 설날 되세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10   좋아요 0 | URL
배차면 안되 내가 “배씨”야 ㅋㅋ

syo 2019-02-01 23:11   좋아요 1 | URL
배카알님ㅋㅋㅋㅋㅋ

서니데이 2019-02-01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좋은 인사 남겨주셔셔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명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블랙겟타 2019-07-08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하게 건너건너 여기까지 오게된 당시 놓친 syo님의 이 페이퍼를 발견했어요 ^^ 그런데 제가 읽었던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랑 최근에 다읽은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를 syo님이 당시에 읽으셨다는 글에 반가워서 이렇게 글을 남기네요. 제가 읽었던 책이 다른 분 글에서 보면 재미도 있고 반갑네요 ㅎㅎㅎ (๑╹◡╹๑)

syo 2019-07-08 14:24   좋아요 1 | URL
이게 또 알라딘 생활의 묘미 아니겠어요 ㅎㅎㅎ 블랙겟타님도 혹시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저처럼 페미니즘 관련 책인 줄 알고 손에 쥐셨나요? ㅎㅎ

블랙겟타 2019-07-08 14:43   좋아요 0 | URL
......헤헤(머쓱). (´ . .̫ . `)
(syo님의 본문 글을 무단(?)인용합니ㄷ..;;)
 

 

건조와 조건

 

 

1

 

한동안 지치지 않고 읽었는데, 마침내 그가 돌아왔다. 슬럼프.

 

 

 

2

 

세 시 전에는 눕고, 아홉 시 전에는 침대에서 나오려 한다. 둘 다 잘 되지는 않는다.

 

일어나면 바로 커피를 마시고 싶다. 빈속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좋지 않은 것들이 세상엔 너무 많고, 그것들을 나는 잘도 해왔다. 좋지 않아도? 혹은 좋지 않아서?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3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눈이라도. 그리고 기왕 내릴 거라면 밤이나 새벽을 골라줬으면 좋겠다. 깊은 잠보다 얕은 잠이 나은 이유를 나는 딱 하나 알고 있는데, 빗소리에 귀가 젖어 잠깰 수 있다는 점이다. 눈을 비비며 창틀에 팔을 괴고 어둠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 일. 더운 여름의 밤에도, 싸늘한 늦가을의 새벽에도.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어쩐지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4

 

흥얼거림이 그대로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을 열쇠로 꽂아 남의 마음에 제 마음대로 침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노래의 바탕에 재능이 있었을 것이되 재능이 모든 일을 하진 않았을 것이며, 노력이 있었을 것이되 노력만으로 전부 얻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툭툭 던져놓은 글 토막이 아름다워 심장을 얻어맞고, 그렇게 맞은 자리를 어루만질 때마다 부럽고 부끄럽다. 눈과 손과 용기와 끈기. 아름다운 글을 낳는 부모는 아무래도 이렇게 넷인 것 같다. 그저 짐작일 따름이다. 저 넷을 다 모아 본 적이 없으니.

 

 


5

 

행복은 늘 창밖에 내린다. 비를 기다리다 잠든 이가 빗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었을 때, 창밖으로 팔을 뻗어 비를 만질 때, 그는 내민 팔만큼만 겨우 젖는다. 흉내를 내겠다고 손바닥으로 빗물을 받아 얼굴에 바를 수도 있다. 하지만 창 안으로 넘어온 빗물은 더 이상 비가 아니다. 젖으려면 이 창틀을 밟고 넘어 저 밖으로 나가야 하리라는 것을 다 알지만, 그건 쉽지가 않은 일이다. 빨랫감이 늘어날까봐 창밖으로 나가기 겁난다. 감기에 걸릴까봐 젖기 두렵다. 지금 비는 하염없이 내리지만 언젠간 그칠 것이다. 지금 나는 하염없이 빗소리를 듣지만 언젠간 다시 누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비 개인 아침, 빈속에 커피를 부어넣으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생각할 것이다. 손과 눈과 용기와 끈기에 관해서.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칩니다가장 창조적이 됩니다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입니다.

우치다 다쓰루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그거."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서 제어 불가능하게 그냥 흘러나오는 거 있잖아세상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거."

  개성의 광채나는 생각했다내적인 빛아니면 내적인 어둠비밀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오래전내가 판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순진하게도 피고인이건 증인이건 내 앞에 선 모든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했던 것절대 무관심하지 않겠다고나의 판결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 맹세했던 것.

다비드 그로스만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의젓해지려고 애쓰는 이 순간에도 삶도 글도 여전히 어렵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하루를 구성하는 것도하루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다다만 고요한 시간에 나와 대화해 보면 나는 여전히 나무를 닮은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자주 있었으나그 경험으로 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리라그리고 나무에 찾아오는 바람처럼 글이라는 움직임이 굳는 성질인 나를 아주 굳지는 않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원최소의 발견

 

 

 

 

--- 읽은 ---

은근한 잘난 척에 교양 있게 대처하는 법 /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 강수연 옮김

어둠의 심연 / 조셉 콘라드 지음 / 이석구 옮김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한국사 1 / 김상훈 지음

오영수 교수의 매직 경제학 / 오영수 지음

노생거 사원 / 제인 오스틴 지음 / 조선정 옮김

 

 

--- 읽는 ---

소설가의 사물 / 조경란 지음

예브게니 오네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김진영 옮김

불교는 왜 그래? / 장웅연 지음

현상학 / 한전숙 지음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 김동규 옮김

, 영원한 아이 / 에곤 쉴레 지음 / 문유림, 김선아 옮김

맑스주의 역사강의 / 한형식 지음

몰입 / 페티 스미스 지음 / 김선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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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1-3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책을 새벽 3시까지 읽고 9시엔 일어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단 말이죠?
저는 새벽 3시에 잠자다 잠깐 깰 수는 있어도 그 시간까지는
절대로 안 자고 있을 수 없죠.
오늘 거의 3시 무렵에 깼는데...ㅋ

저도 빗소리가 그립더군요.
내일 남부지방에 비가 올거라고 하던데
대구도 내리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사는 서울은 언감생심입니다.ㅠ

syo 2019-01-30 17:24   좋아요 0 | URL
그냥 책도 잘 안 넘어가고 글도 잘 안 써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 무얼 뜻하는건지 알고 싶지 않다.....ㅋㅋㅋ

대구도 비 소식이 있다고 하더군요. 올 겨울은 너무 가물어서 걱정입니다.....


북깨비 2019-01-3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을 읽고 지금 당장 빗소리 듣고 싶어졌어요. ㅠㅠㅠ ☔️🌧 해리포터의 마법부 사무실처럼 창문에 마법을 걸어서 원하는 날씨를 보면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syo 2019-01-30 17:25   좋아요 1 | URL
1인 1도라에몽이 시급합니다. 걔가 좁은 지역의 날씨를 조작할 수 있는 발명품을 가지고 있었어요.....

cyrus 2019-01-30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가 강원도처럼 엄청 추운 지역이었다면 비가 눈이 되는 기적을 자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ㅎㅎㅎ 대구는 따뜻한 곳이라서 하늘에 눈이 내리면 녹아서 빗물이 됩니다... ^^;;

syo 2019-01-30 17:28   좋아요 0 | URL
비가 눈이 되는 기적은 강원도라고 해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정말 희한한 일이죠.

전 눈보다 비가 좋아서, 내리다 녹는 건 언제나 환영입니다.
어릴 적에는 이놈의 대구, 눈 한 번이 안 오냐, 그렇게 날씨타박을 했었는데 말이지요....

목나무 2019-01-30 17:36   좋아요 0 | URL
올해는 강원도도 가물어서 산불이 여기저기서 난다네요.
얼마전에 제 고향 삼척에서 크게 산불이 나서 부모님 식겁하셨네요.
눈이든 비든 하늘에서 뭐라도 좀 내려주면 좋겠네요. ^^;;

syo 2019-01-30 17:39   좋아요 1 | URL
올해가 유독 심하다고, 정말 심한 곳은 예년 강수량의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문 겨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허어..... 알라디너들이 힘을 합쳐 기우독서제라도 지내야 하는 것인가.

목나무 2019-01-3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올 겨울에는 눈과 비가 무척이나 보고싶네요. 이렇게 가물어서야 올해 곡식들 제대로 맛볼 수나 있을지....--;;
슬럼프라.... syo님은 그 슬럼프마저 끈기있는 독서로 물리치실 것 같은데요. ^.~

syo 2019-01-30 17:30   좋아요 1 | URL
비가 안 와서 그런가 끈기가 메말라서 쩍쩍 갈라진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전 이미 틀렸어요. 전 버려두고 설해목님 먼저 끈기있는 독서의 길로 가시기를.....

비 오면 좀 나아지길 바라면서 ㅠㅠ

목나무 2019-01-30 17:38   좋아요 0 | URL
syo님은 엄살쟁이! ㅋㅋㅋ
연휴동안 끈기를 보충해서 올 한해도 함께 열독해요. 혼자는 싫어요! 죽어도 같이 죽자요~~ ㅋㅋ

syo 2019-01-30 17:41   좋아요 1 | URL
슬럼프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빗물이라도 받아마실 의향이 있습니다.....
ㄴ(-ㅇ-)ㄱ

공쟝쟝 2019-01-30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우치다다쓰루 문장 너무 좋아요! 그런데 읽기에 슬럼프가 오신 것 치곤 너무 많이 읽으신거 아닌가요??😯

syo 2019-01-30 19:39   좋아요 1 | URL
1. 저 책 정말 저런 문장들이 수두룩빽빽 나오는 책입니다. 우치다 다쓰루 선생님은 정말이지......

2. 닷새 중 앞쪽 이틀은 상태가 괜찮았거든요.....

공쟝쟝 2019-01-30 21:03   좋아요 0 | URL
책 독이 많이 들어찰땐 휴독 만한게 없다고 ㅎㅎ 읽기의 말들에서 박총님이 그러셨어요.. 잠시 휴독 하시면서 책의 독기를 빼소서🙏

syo 2019-01-30 21:29   좋아요 0 | URL
그 책을 저도 읽었는데 왜 그런 말씀은 기억이 안 날까요 ㅋㅋㅋㅋ 전 왜 항상 ‘더 읽거라. 죽을 때까지 읽거라. 그래도 안 죽느니.‘ 이런 말씀들에만 밑줄을 치는 걸까요 😢

반유행열반인 2019-01-3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오는 날의 장점: 피부가 덜 가렵다. 코딱지가 덜 생긴다. 가습기 저렴한 걸로 마련했더니 매일 밤 빗소리 듣고 살아요....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이러다 또 7월 장마 오면 이놈의 비 언제 그치나...하는 사람 마음이란...syo님 글은 근데 하나도 안 건조하네요...적당히 촉촉하네요...

syo 2019-01-30 21:31   좋아요 1 | URL
가습기 전략(전락??) 어쩐지 혹하네요.....

몇 시간 뒤면 비 또는 눈이 내린다니까 기다려보려구요. 세 시까지만.....

jeje 2019-01-3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지금 비가 오면 좋겠어요. 빗소리 잠결에 들으면 잠도 더 달고. 비.비.비왔으면 좋겠어요. 오늘

syo 2019-01-30 23:23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최근 jeje님도 저처럼 기우글(?) 쓰셨지요.
저는 지금 홍차 한 잔 받아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ㅎ

jeje 2019-01-31 01:40   좋아요 0 | URL
오지않습니다. 오지않고있어요. 네, 그날은 일분쯤 비가 와서 아쉬운 마음에. 계속 비가 오길 바랬드랬죠.
비가 오지 않아 아쉽지만. 새벽이 참 좋아요 그쵸? 새벽을 즐겁게 누리고 계실줄 믿습니다?

syo 2019-01-31 01:44   좋아요 0 | URL
그럼요 ㅎㅎㅎ 제가 있는 곳도 아직 비도 눈도 오지 않지만, 세 시까지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카알벨루치 2019-01-3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소리 좋아요...굿나잇! 지금도 책보고있을 소년? 쇼년? 이건 아닌데 ㅎㅎㅎㅋㅋㅋ

syo 2019-01-31 01:3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카알님. 정말 그건 아니네요 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1-31 07:16   좋아요 0 | URL
쇼놈? ㅋㅋ그만해야긋다 쇼군이 있네 다 소년으로 잘못시작되서 그렇네 출발이 ㅎㅎ

syo 2019-01-31 08:51   좋아요 0 | URL
역시 카알 총무님 ㅋㅋㅋㅋ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훌륭한 플레이어라더니.

카알벨루치 2019-01-31 08:53   좋아요 0 | URL
쇼타임 끝!!!🎶 티타임 시작! ☕️

무식쟁이 2019-01-31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온다던 고도씨대신 슬럼프씨가 오셨나봐요.
2. 올빼미형은 어두울때 마음의 평안이. 그냥 생긴대로 사시는게 건강에 좋으실 듯. 저는 아침 커피를 위해 빵 한쪽을 꼭 같이 먹어요. 그리고나서 책을 얼굴에 얹고 세컨슬립에 빠져든다는 현실.
3. 대체.. 쇼님은. 쇼녀갬성까지 갖춘.. 쇼님으로서.. 없는게 대체 무엇.
4. 쇼님이 툭툭 던져놓는 글토막에도 얻어 맞는 분들이 많을 거라는 데 제 모닝커피를 걸죠. 쇼님의 글에는 얻어 맞는다기 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힘을 얻는다는 게 더 맞겠지만.
5. 창 밖의 행복을 찾아서 비 오는 밖으로 나가본 적 있어요. 용기있게 온 몸으로 맞는 비가 너무 시원하고 자유로워요. 스스로 계획한 대로 아주 열심히 돌아다녀요. 시간이 한참 지나니 추워요. 내가 어떤 각오로 나왔는데.. 참고 견뎌서 이겨낼거야. 근데 점점 오들오들 떨리고 열도 나고 너무 힘들어요. 준비를 잘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몸으로 맞는 비가 점점 너무 아파요. 내가 가진 능력은 노력으로도 커버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요. 내리는 비가 이제 더이상 즐겁지 않고 두려워 지는 상태까지 가서 결국은 방안으로 다시 들어왔어요. 것봐라. 시간과 경력만 낭비하고 돌아왔구나. 내 그럴즐 알았다. 아무것도 얻은것 없는 패전병 취급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때 창 밖으로 나간 걸 후회하냐구요?
아니요. 아니더라구요. 시간이 지나니 더 확실해져요. 창 밖으로 나가봤기 때문에 오히려 후회없어요. 그 이후로 시간이 한참 지나니 내가 있는 바로 여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었어요. 그때 창 밖에 나가서 미친삐리리처럼 돌아다니다 지쳐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창 밖의 행복만 바라보며 미련하게 살았을 거예요. 저라면요.

옴마야. 내 책리뷰보다 더 긴 댓글이라니.. •_•

syo 2019-01-31 09:07   좋아요 0 | URL
1. 어쩌면 고도는 ‘무료배송 랜덤박스‘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기대하며 열었더니, 악 이번엔 슬럼프 3종 세트 구성이네.....

2. 전 아무래도 밤이 좋은데, 낮에 자고 밤에 싸돌아다녔으면 좋겠어요. 싸돌아다닌대봤자 한 바퀴에 열 걸음 겨우 나오는 좁은 방이지만요.

3. 지금까지 쟁이 님이 보신 것, 그게 다예요. 그 이외에는 물심양면으로 몰지각합니다.

4. ‘따뜻한 위로와 힘‘ 같은 어마무시한 것들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바란 적은 거의 없었어요. 여자 친구가 읽고 힘냈으면 좋겠다 싶은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잘 된 건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모닝커피는 제 걸 마시도록 하죠.

5. 부럽다, 쟁이 님. 저 같은 경우에는 어설프게 비를 맞고 났더니 두 가지 후회가 생기더라구요. 어떨 땐, 아, 비 맞지 말 걸. 또 다른 땐, 아, 맞을 거 제대로 맞아 볼 걸. 비를 맞으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하나만 후회했을 텐데 이게 무슨 꼴이지..... 이게 다 아플 때까지 얻어맞지 못하고 적당히 적당히 놀다 들어온 탓이겠지요....ㅠ

+ 리뷰보다 더 긴 댓글이라니 엄청 감사하면서도 댓글보다 더 긴 리뷰를 기대하다니 이게 무슨 마음일까요-_-?

독서괭 2019-01-3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럼프를 지나고 나면 한층더 깊어져 돌아오시겠죠~ 명절연휴에는 읽기 계획 세우지 마시고 좀 쉬시는 것도!
저도 syo님 글 보니 빗소리가 듣고 싶어지네요. 이번 겨울 진짜 메말랐어요ㅜㅜ

syo 2019-01-31 09:08   좋아요 0 | URL
대구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리면서 절반은 비가 되고 있긴 한데요 ㅎ

생각보다 일찍 깨진 못했지만 빗소리 덕분에 오늘은 9시 훨씬 전에 침대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어요.

뒷북소녀 2019-01-3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비와 눈이 모두 내리고 있어요.
출근 전에는 비가 내리더니 지금은 눈이 내려서... 퇴근길이 걱정입니다만... 저도 반갑네요.
가끔씩 슬럼프에 빠지는 일도 있어야... 다른 일도 하죠.^^

syo 2019-01-31 14:00   좋아요 0 | URL
여기도 비로 시작한 것 같았는데 어느덧 씨알이 굵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퇴근길이 무탈하셔야 할 텐데요.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났더니 슬럼프가 좀 씻겨나갔습니다. 다행입니다. 짧아서요.
 
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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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변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와 지금 이곳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는 남자의 손에 지팡이도 물통도 아닌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철물점 집 사내놈이 봤다는구먼.” 사람들은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그 멍청한 놈이 아직 글을 못 깨쳤잖아. 그래서 그 나그네가 들고 있는 책이 뭔지, 그 중요한 걸 알아내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거야.” “세상에!” 몇몇 사람들이 동요하며 발을 굴렀는지, 바닥에 짜넣은 널빤지가 끽- 불길한 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얼마나 중요한 책이면 이 넓은 나라의 끝에서 끝을 가로지르는 내내 손에서 내려놓질 못하는 걸까?” 사람들은 궁금증에 너무도 깊이 매몰되어 제일 중요한 사실, 아직 맥주를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술집 주인마저 그랬다. 때때로 궁금함은 어떤 독주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확실히 사람을 취하게 한다.

 


러시아 작가의 소설이 아닐까? , 전당포 할멈을 도끼로 잔인하게 내리친 어느 가난하고 비열한 겁쟁이가 죄책감과 자기기만 속에서 벌벌 떠는 이야기로 천 페이지를 꽉 채운 그 유명한 책 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목수였다. “책 속의 그놈은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치안의 그물망에 걸려들고 말지. 망설였거든. 멍청하게도. 저 나그네인지 뭔지 하는 작자도 어쩌면 국경에서 사람을 도끼로 쳐 죽이고 끈질기게 도망치는 중인지도 몰라. 그건 정말 좆같이 힘든 일이지.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거든. 거기 서 있는 예쁜 언니가 신은 싸구려 검정 스타킹처럼 말이지. 그래 언니, 거기, 거기 말야. , 하여튼 도망치다보면 말이지,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온다구. 신체의 자유를 팔고 그걸로 마음의 자유를 사고 싶은 약한 마음이 드는 거지. 그럴 때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고는 구두끈을 고쳐 매는 거야. 마음의 자유라는 게 생각보다 꽤 비싸거든. 제 몸을 꽁꽁 묶고, 심지어 전당포 할망구처럼 머리통을 쪼개 도끼를 처박은 채로 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대도, 그 망할 마음의 자유라는 놈을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재수 없으면 몸은 교도소에 처박혔는데 마음도 계속 지옥 불에 튀겨지는 꼴이 나는 거거든. 결국 몽창 꼬라박고 쪽박만 찰까봐 불안한 거지.” 목수가 아이 머리통만한 손을 탁자에 쾅쾅 내리쳐대며 말을 이었다. 마을에 흘러 들어온 게 두 해도 채 되지 않는 그가 그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마을 사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가 그 크고 투박한 손에 든 연장을 오로지 목재를 다루는 데만 썼다고 보증해줄 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이 목수의 가장 친한 이웃조차 그의 과거를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이유였다. “어쩐지 난 알 것 같단 말이지.” 목수는 두꺼운 목을 세차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책은 아마도 성경이 아닐까 싶은데요.” 다음으로 입을 연 이는 며칠 전에 목사관에 새로 짐을 풀었다는 신출내기 목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늘지만 깊은 그의 눈, 마찬가지로 가늘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목 같은 곳을 훑는 동안 목사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작은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가 흙으로 빚어 입김을 불어넣으시고 직접 그 이름을 지으셨으며 다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지을 위대한 권한을 내려주신 아담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과실을 탐하여 낙원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인간이 정처 없이 걸어야만 하는 운명을 받게 된 그 순간을요. 에덴의 출구에 찍혔을 인간의 첫 발자국부터,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땅을 뒤덮고도 모자라 이제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에까지 찍어놓은 인간의 수많은 발자국들, 그 모든 발자국은 추방의 순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요?” 목사가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글쎄, 누더기 하나 걸치고 쫓겨났으니 배가 고팠을 테고, 스컹크 한 마리라도 잡아먹으려고 근처 풀숲을 뒤지지 않았을까?” “두고 온 사과 생각이 절실했겠는데?”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 아버지, 구하소서. 신앙이 약한 마을이로다. 목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번에는 들으라는 듯이 티 나게 목을 가다듬더니, 외치다시피 했다. “그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죄 사함을 받으러 길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 바로 그렇습니다. 그 모든 여행이 죄의 길이면서 사죄의 길이었고, 반란의 길인 동시에 반성의 길이었으며, 역경의 길이지만 곧 희열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하신 그 길 위에 어리석은 우리가 범한 죄업들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럴 때마다 점점 가벼워지는 우리의 발걸음, 점점 천사와 닮아가는 우리의 웃음을 상상해 보는 겁니다!” 목사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치켜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행이 그런 것이라면, 그 여행의 길이 길고 길수록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는 바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은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다고 했지요? 그럴 수밖에요. 그는 그 어떤 지팡이보다 훌륭한 지팡이, 바로 거룩한 성경을 들고 다니고 있으니까요! 한 걸음에 한 구절, 말씀을 짚고 발걸음을 옮기는 그 거룩한 여행자가 목사관 앞을 지나만 간다면, , 내가 바로 뛰어나가 꿀처럼 달콤한 물과 그보다 몇 배는 단 기도와 축복을 그에게 부어줄 텐데!” 스스로의 말에 도취되기라도 한 듯, 목사는 두 손을 모으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도 이런 유형의 인물은 건드리지 않는 쪽이 낫다는 것을 알만큼은 똑똑했다. 그러는 자기는 빈손이구만. 몇 백 킬로미터를 걷는 사람도 들고 다닐 만큼 훌륭한 책이라지만, 목사관에서 이 술집까지 오는 짧은 거리를 걷는 데는 성경이 별 필요가 없었나 보군. 목수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이어가는 목사의 가는 목덜미에 송송 돋아있는 솜털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빈정거렸다.


 

우리 젊은 목사님, 기도하는 목소리는 듣기 좋은데 세상 사는 게 어떤 건지 알려면 앞으로 한참 더 마셔야 되겠어요.” 한 사람이 들고 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맥주잔을 테이블에 소리도 없이 내려놓으며, 여인이 말했다. 여인은 왼손으로 허벅지 근처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맥주를 옮기다 묻은 거품을 닦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스타킹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가리는 중이었다. 숭숭 까지는 아니라고, 숭숭 까지는. 여인은 조용히 목수를 흘겨보았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목수는 누구보다 먼저 맥주잔을 낚아채 단숨에 들이켜는 중이었다. “길에 얹혀 사는 인생이라는 게 있는 거라, 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역시 길 위에서 하루를 끝내는 사람들이 제일 욕심내는 게 뭔지 알아요? 그건 바로, 고향이에요, 고향. 그리고 추억이지. 걷고 또 걷는 동안 닳아 없어지는 게 신발 밑창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라구요.” 여인은 허벅지에서 뗀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낮은 눈빛으로 훑었다. “신발 안에 자꾸 모래나 돌멩이가 들어온다거나, 재수 없을 땐 피를 보고 나서야 신발 바닥에 구멍이 났다는 걸 알게 되는 거잖아, 인간이란 게.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 문득,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태어나 처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곰 인형이었는지 토끼 인형이었는지, 글도 다 못 뗀 코흘리개 시절 혼자 좋아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그 철자법 선생님의 이름이 뭐였는지.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개울에서 헤엄치고 놀다가 바닥에서 뭘 주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살아있는 메기 새끼였어요. 난 그때 내 손에 들어있는 길고 미끈한 그 물건이 너무 징그러워서 얼른 내던져버리고는 엉엉 울었거든요. 그때 사촌 오빠가 제일 먼저 다가와서 세상 모르고 우는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 주고 있었는데, 멀리서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우리 아버지가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오빠의 뺨을 후려치는 거야. 그게 무슨 상황인지 알 턱이 없는 나는 계속 울기만 했고, 아빠는 나를 번쩍 들쳐 매고는 성큼성큼 물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오빠는 너무 놀란 얼굴로 울지도 못한 채 개울 속에 멍하니 서서 뺨을 만지고 있더라구요. 이 모든 그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그때 그 여름날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단 말이죠.” 맥주잔 세 개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여인은 물어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겨 주인의 시선을 끌더니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바 너머에서 주인이 새 맥주잔을 꺼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실내는 조용한 가운데 사람들은 여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이 얼마나 많을 거야. 그걸 서서히 잃어버리는 건, 그러니까 우물에 빠뜨린 설탕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랑 비슷한 거죠. 돌이킬 수도 없는 거고. , 내가 없어지고 있어, 아아 내가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있어.” 여인은 연극 대사라도 읊듯 텅 빈 눈동자로 공중을 응시하며 말했다. 주인이 새로 채운 맥주 세 잔을 내려놓고 빈 잔을 거둬갔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술집에서 맥주를 나르는 여자도 심심할 때는 책을 읽기도 하죠. 그게 성경도 아니고, 우리 산도적 같이 생긴 목수 씨가 읽었다는 천 페이지짜리 그런 두꺼운 책도 아니고, 그냥 한낱 이야기책에 불과하지만요. 그 이야기책에는요,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가고 싶어서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를 포기하는 공주가 하나 나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라구요.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세상 어느 남자든지 그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런 고운 목소리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 목소리를 포기하는 거예요. 놀랍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내가, 이 작고 초라한 마을에서, 밑바닥 판자가 다 꺼져가는 낡은 술집에서 술이나 나르는 하찮은 여자인 내가, 그 공주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글쎄, 내가 눈물이 다 나더라니까요? 여기 누구, 내가 우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당신들이 오늘 마신 맥주는 내가 다 사죠.” 그러나 그럴 일은 결코 없었다. “난 공주도 아니고, 이제껏 몇 놈을 만나왔지만 나한테 들러붙은 것들은 죄다 쓰레기였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 뭐야, 지금 나를 계속 짜증나게 하는 이 구멍 난 스타킹하고도 바꿀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놈들뿐이었다구요. 그런 내가, 어떻게 겪기는커녕 냄새도 못 맡아본 그 공주의 경험에 공감을 할 수 있었을까?” 여인이 다시 손가락 네 개를 들어올렸다. 목수는 이번에도 새 잔을 받을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게 내가 잃어버린 추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공주가 아니었던 건 확실하지만, 나라고 사랑을 하거나 사랑을 받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닐 거잖아요. 단지 내가 잊은 거야, 기억이 안 나는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선생님의 이름 같은 거야, 울지 않는 오빠를 울면서 바라보던 꼬맹이의 나이 같은 거야, 그렇게 생각했죠. 그러고 나니까 말이에요, 이 개떡 같은 인생도 조금은 봐줄만해지는 것 같았어요. 언제까지 이 허름한 술집에서 찌든내 나는 맥주나 나를지도 알 수 없고, 당장 이번 주말에 새 스타킹을 살 급료를 받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요,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주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 주까지 꾹 참고 살아도 되지 않겠냐구요.” 여인은 누구라도 대답해 보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어쩐지 먹먹한 표정으로 먼 데를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도 눈치 채진 못했지만 목수는 입술을 닦는 척 슬쩍 눈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저 불쌍한 나그네가 들고 다니는 것도, 분명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득 찬 책일 거예요. 확실해요. 이야기에 기대지 않고 대체 어떻게 자기를 지키며 끝없이 걸을 수가 있겠냐는 거예요.”


 

이거 뜻밖에 꽤 좋은 이야기를 들었구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백발의 깡마른 노인이 역시 백발인 턱수염에 묻은 거품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다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아마도 그건, 그냥 지도책이거나 도감 같은 걸걸?”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후회되는 게 참 많아. 아직 젊은 우리 마누라 손 놓고 그냥 그렇게 보낸 거, 그러다보니 하나뿐인 자식 놈을 응석받이로 키우게 된 거, 그 응석받이 응석에 못 이겨 결국 새 마누라를 맞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놓쳐 버린 거...... 심지어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달걀을 어제 부쳐 먹지 않은 것도! 오늘 아침에 깨 봤더니 아슬아슬하게 상했더라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이 만드는 안타까운 표정은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진지하기 일쑤라, 마을 사람들은-특히 목사는-노인이 타조알이나 심지어 공룡 알을 먹지도 못하고 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동정어린 표정들일랑 넣어 두게. 아직 가장 후회되는 것은 꺼내지도 않았으니.” 노인은 잠깐 혀를 찼고, 말을 이었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무엇보다 후회되는 건 말일세, 바로 일찌감치 책을 읽지 않은 것일세.” 노인은 지금이야말로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이었다.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과 그 옆에 서 있는 두 번째로 한심한 사람을 쳐다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젓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세상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해답을 준비해놓고 있더란 말이지. 단지 그 해답이라는 놈을, 문제를 맞닥뜨린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야.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제아무리 운이 좋은 인간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모든 답을 입에 물고 날 수는 없더라 이거지. 그 답들은 우리가 얼른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세상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데 말이야, 내 이날 이때껏...... 근데 내가 이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나? 아니지?” 두어 명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직 이 마을에는 희망이 있군. 목사가 생각했다. “하여튼, 지나고 보니 내가 틀렸던 모든 문제의 답들이 책에 다 들어있더라고.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가장 비참한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 그건 바로 아, 내가 이 책을 이십 년 전에만 읽었더라면 오늘 이 모양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며 읽던 책을 바닥에 내던지는 순간이야! 그것보다 더 비참한 순간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똑같은 꼴의 후회를 하되 이십 년 전이 아니라 두 시간 전에 읽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는 순간이지.” 흥분하여 밭은기침을 내뱉느라 이야기가 자꾸 지연되었으나, 사람들은 아무 내색도 없이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목사는 점점 희망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들고 있는 건 그냥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이 들어있는 책일 확률이 높아. 그랬으니 그 사람이 이렇게 먼 길을 아무 탈 없이 계속 걸어올 수 있는 거라니까. 알겠으면 다들 책 좀 읽으란 말이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가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책과 노인은 그야말로 지혜의 보고라고.” 노인은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손을 들어 테이블을 두드렸지만 그 손이 너무도 가냘파서 테이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우리 집 영감이 책을 못 읽는지 알겠구만. 일단 책을 손에 들 수가 없겠는걸.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노인의 수많은 후회 가운데 하나인 응석받이 아들의 되바라진 아들이었다. “어떤 지혜의 보고에는 내가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라는 말이 끝도 없이 적혀있나 보네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또 술집에 오신 걸 아버지가 알면 잔소리를 세 시간은 쉬지 않고 들으셔야 할 거예요.” “차라리 네 어미한테 말하려무나. 그래도 똑같이 잔소리 세 시간이겠지만 최소한 네 어미는 나를 훌쩍 들쳐 업고 집까지 갈 만한 힘과 배짱은 갖췄잖니? 징징거리기만 하는 네 애비랑은 다르게.” 주점에 웃음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엄마가 됐든 아버지가 됐든, 아마도 두 사람 중 누군가는 할아버지를 잡으러 여기로 오고 있을 거니까, 기다리는 동안 우린 그 책 이야기나 더 하는 게 좋겠군요.” 청년이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 그럴듯하고 또 좋은 말씀들이었어요. 그렇지만 다들 책을 크게 과소평가하고 계신 것 같아요. 책은 그러니까 그야말로 불꽃같은 것이라구요.” 급하게 달아오르는 것은 어느 시대나 청년의 미덕이자 단점이었다. “꼬마야, 네 말대로라면 책 한 권이 다른 책들을 홀랑 다 태워 먹겠구만? 그럼 누가 책 한권만 가지고 와 봐, 나 담뱃불 좀 붙여야겠어.” 목수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럼요! 태우고 말구요. 책뿐만 아니라 사람도, 집단도, 한 나라나 심지어 온 세계도 다 태워버릴 수 있는 게 책인데요. 봐요. 어떤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못한 인간으로 취급하던 관습들이 있었어요. 그 관습들을 싹 불태우는 데 책이 몇 만 권이나 필요했을까요? 아니에요. 몇 권이면 충분했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할 수 있었던 기생충 같은 무리들을 모조리 화형시키는 불쏘시개로 쓰려고 몇 백 권의 책을 찍어내야 했을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좋은 세상, 모두가 배부르고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열차를 움직이기 위해 몇 권의 책을 태워야 하냐구요? 딱 한 권! 딱 한 권이에요.” 청년은 목이 말랐지만, 어쩐지 아무도 그에게 맥주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책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래서 책을 읽는다구요. 저는 어쩐지 그 사람이 여행하는 혁명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 먼 길을 그저 걷는다구요?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죠. 그 사람은 지금 어딘가로 가서 그곳의 뭔가를 바꾸려고 걷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런 사람의 손에 들린 책이 뭐겠어요. 그게 뭐가 되었든, 얼마나 크고 위험한 책이겠어요. 나는 우리도 그 책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마을 사람들도 다 그 책을 읽어야 한다구요.” 말을 마친 청년이 주인 없는 맥주잔에 손을 뻗는데 목수가 테이블을 쾅 치더니 맥주잔을 가로채며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가 어디서 헛바람만 잔뜩 들었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개소리야. 떠들 힘이 있으면 손에 연장이나 쥘 일이지.” 목수의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분분한 의견이 주점을 온통 뒤흔들었다. 주인은 조용히 빈 술잔을 세어 보았다.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고, 술은 더 많이 필요할 것이었다. 책이야 어찌 되었건, 주인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다들 그렇게 궁금하면 그 여행자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붙잡고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출입구에 작업복 차림의 여인이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었다. "엄마가 오셨네요. 할아버지, 이제 들쳐 업힐 차례예요." 청년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이 채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작업복 여인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팔에 낀 검정색 토시를 걷어붙였다. "입 닫고 너도 얼른 따라 나오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이런 데 들락거리려면 넌 아직 한참 더 자라야 된다고, 이 천하에 불효자식놈아." 여인이 옆에 다가서자 청년은 유독 작아보였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아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이, 얼른 데리고 나가서 젖이나 더 먹이라고. 그리고 여긴 어른들 말씀 나누시는 곳이니까 앞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래." 이미 다섯 잔이나 비운 목수의 말이 조금씩 꼬이고 있었다. "지랄하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군. 내일도 무사히 대패질 하고 싶으면 입은 맥주 마시는 데나 쓰는 게 좋을걸. 이놈이나 저놈이나 팔뚝이나 가슴팍에 그 징그러운 털만 달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목수는 딸국질을 시작했다. "여기 있는 당신들, 죄다 똑같아. 술집에 모여 앉아 맥주잔만 비우면 나라에서 남자 자격증이라도 주는 줄 아나 본데, 천만에. 당신들이 진짜배기라면 여기 모여 주접떨 시간에 그 사람 발걸음을 붙잡고 직접 물어봤겠지. 대체 뭐가 겁이 나서 이 음침한 소굴에 모여서 쑥덕공론이야? , 내 말이 틀려?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지금 그 그넨지 나그넨지가 광장 벤치에 앉아서 신발을 말리고 있더군.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으려는 모양이지. , 당신네들이 진짜 남자임을 증명할 시간이 앞으로 반나절 정도 남았다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어? 특히 당신, 그 솥뚜껑 같은 손을 달고 다니는 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박차고 일어나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 이 양반아." 여인이 한 손에는 청년의 손목을 쥐고, 다른 한 팔로는 노인을 옆구리에 끼우듯이 들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솥뚜껑 손을 한 목수가 비틀거리며 뒤를 따랐고, 그 뒤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술값을 받지 못한 주인이 바 너머에서 자신도 광장으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고민은 잠시였다.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둑어둑한 광장 한 귀퉁이에서, 여행자는 벤치에 등을 대고 길게 누운 채 책을 잘도 읽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책을 읽는 일에 꽤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그네는 상체를 일으켜 책을 내려놓고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벤치 아래에 벗어둔 신발을 들고 모래를 털어냈다. 양쪽 신발의 뒤축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를 광장의 바닥돌을 지치는 발소리가 난폭하게 밀고 들어왔다. 나그네는 신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특별한 것을 원하지 않소." 사람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말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당신이 들고 왔다는 책 말이오, 그게 뭔지 알고 싶을 뿐이오. , 그리고 우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다른 목소리였다. 역시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당신이 읽는 그 책의 제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면, 오늘 밤 우리 중 하나가 당신에게 지붕과 바람 막을 벽, 따뜻한 찌개가 있는 저녁을 제공할 의사가 있어요." 비교적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나그네에게 그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한 덩어리 목소리들의 윤곽을 짚어보려 했으나 그사이 하늘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광장의 가로등을 켜는 이가 자기 일을 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그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세 권의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당신들은 어떤 책을 말하는 건가요?" "오늘 우리 마을에 들어설 때 당신이 들고 있었던 그 책의 이름을 원하오." "다른 두 권의 책은 관심이 없으신가요?" "그건 알려주어도 나쁠 건 없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바로 그 책만큼은 반드시 알아야겠소."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나그네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다. 비로소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었지만, 나그네에게 그들의 얼굴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는 다시 고개를 숙여 광장의 바닥돌을 적시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검은 덩어리였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검은 덩어리였다. "당신들도 책을 읽으시나요?" "그렇소. 즐기진 않소만." 나그네가 벤치 위에 내려놓았던 책을 손에 들었다. "댁에도 책을 가지고들 계신가요?" ". 아쉽게도 큰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가진 사람은 없지만요." 나그네가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오늘도 책을 읽으셨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는 어땠나요?"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번 주 중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분이 계신가요?" 질문하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당신이 들고 다니는 그 책의 이름이라구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칵, 라이터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났을 때, 나그네의 손에 든 책에 불이 붙었다. 가로등 불빛은 비교도 안될 만큼 밝은 빛이 불타는 책에서 뿜어져 나왔다. 광장이 순간 환해졌다. 나그네는 어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손을 뻗는 듯도 했지만 꼭 닿으라고 뻗은 것 같지는 않았다. 책은 금세 재가 되었고, 재는 나그네가 벗어놓은 신발 위로 한들거리며 떨어졌다. 나그네는 신발에 발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제겐 지붕도 바람 막을 벽도, 따뜻한 저녁 식사도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방금 제가 불태운 책의 이름이 당신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요." 나그네는 사람들을 헤집으며 걸어 나갔다. "그 책은, 애초에 별다를 것 없는 책이었어요. 흔한 책이었지요. 어쩌면 당신들 중 몇몇의 책장에도 그 책은 이미 꽂혀 있을지도 모르죠." 나그네는 변경으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바로 그 속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마을 밖으로 길을 잡았다. 나그네의 그림자가 광장 끄트머리를 스치고 사라졌을 무렵,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나그네가 불태운 그 책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했다. 단지 그 궁금함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없었을 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다시는 나그네도, 그 책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신의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를 털고, 책등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그러다 때로는 그 자리에서 몇 페이지씩 읽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치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하는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몇 있었으나, 차츰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나그네가 불태운 그 책과 같은 책을 자기들 책장에서 찾아냈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끔 주점에서 마주치면, 답을 알아낸 사람들의 얼굴에는 뭔가 다른 빛이 도는 듯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 빛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우는 모두의 빛이 되었다. 각자의 것이 다 다른 듯 또한 닮아있는 그 빛이, 이제는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을 추궁해 마침내 답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 나그네가 불태운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당신들에게 알려주려는 의도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제 그 답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언제나 정답보다 의미 있는 오답들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굳이 정답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 그래서 이제 당신에게 말하겠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에 있는(혹은 옆이나, 다른 방일수도 있겠다) 당신의 책장에 서서 눈을 감아 보라.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을 짚어 보라. 첫 번째 짚은 책은 그냥 넘길 것이다. 두 번째 짚은 책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짚은 바로 그 책을 그대로 뽑아 들라.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 그 책을 펼치라. 지금 당신의 눈앞에 첫 번째 문장을 열어놓는 그 책이, 나그네가 광장에서 불태운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당신이 내가 말해준 정답을 믿건 말건, 그건 내겐 별다른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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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1-2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 공짜로 읽어도 되나 모르겠네요. 숨도 못 쉬고 읽었다구요. 기왕이면 종이에 인쇄해서 예쁜 책 표지까지 달아서 두고두고 책장에 꽂았다 뽑았다 하며 읽고 싶네요. (거기에 자괴감까지 드네요...내 글은 미세먼지 수준이야 공해야....이 글은 청정 고원의 태초의 공기야...너무 좋아서 고산병 걸리겠어 엉엉)

syo 2019-01-28 10:42   좋아요 2 | URL
아니, 이거 왜 이러세요.

열반인님이 이러시면 제가 좋아할 줄 아셨어요? 아셨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19-01-2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죠?? 이거 책에서 발췌하신 거 아니죠? 단편소설 하나 읽은 것 같네요. 오~~ 넘 좋아요!!

syo 2019-01-28 10:43   좋아요 0 | URL
리뷰라고 올려 놨는데 정작 책에서 한 줄도 발췌하지 않았네요.
저도 가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요.....

다락방 2019-01-2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리뷰 쓰지 말아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보다 더 재미있게 쓸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아직 안읽었지만.

syo 2019-01-28 11:51   좋아요 0 | URL
아무튼 일단 읽어봐요. 그럼 생각이 또 바뀔 수도 있거든요!! ㅎㅎㅎㅎ

나무처럼 2019-01-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정말 좋았어요.

syo 2019-01-28 15:2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말씀두요^-^

무식쟁이 2019-01-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있던 내 안의 파란 돌, 개미 눈꼽 만 한 파란 돌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그랬어요.

syo 2019-01-28 15:23   좋아요 0 | URL
궁금하다 그 파란 돌.....
어떤 돌인지 페이퍼로 한 번 써주세요 ㅎ

책읽는나무 2019-01-2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 한 편 본 듯한~~^^
고도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으로 책 제목을 알고 싶어하는 인물들???
재치있는 재능을 겸비한 자!!
역시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어라~~^^

syo 2019-01-28 18:0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별말씀을요. 엉망진창이에요. 다시 볼 때마다 손댈 데가 자꾸 튀어나와서 곤란한 상황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1-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다 발췌를 안했다고 오오~축구하고와서 넘 피곤해서 나중에 다시 읽고 댓글 달아야겠소

syo 2019-01-28 18: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스킵하세요. 피로에 양보하세요ㅎㅎ

cyrus 2019-01-2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나 에세이를 써볼 생각은 없어요? ^^

syo 2019-01-28 18:10   좋아요 0 | URL
없어요.
겨우 이런 거 쓰는 것도 벅찹니다 ㅎ

stella.K 2019-01-28 18:1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내 말이. 그런데 이 양반은 너무 욕심이 없어.
그나저나 너는 출판사 낼 생각없니?
좀 어떻게 해 봐야되지 않을까?ㅎ

syo 2019-01-28 18:22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이 출판사를 열어서 스텔라님 책을 내시는 구도로군요.
윈윈이로다.....

stella.K 2019-01-28 18: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말이나 못하면...흥!
 

 

소금 씨앗

 

 

1



  나는 20대 때 35살 이후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35살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그 후에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인 줄로만 알았다웬걸그 후에도 길고 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우리가 변해간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일에 대한 좋은 태도들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싶다.

  '변화'라는 개념은 전혀 새롭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다. '변화'는 '결코 변하지 않을 좋은 것들'에서 온다.

임경선태도에 관하여, 161 

 

이미 도착한 체념의 시간이 이제 그만 문을 열라며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발버둥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인간이 있다. 그런 마음에는 깊은 상처를 내기가 도리어 쉽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상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상처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그가 부서져본 적이 없으니 세상에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으리라고 쉽게 단정했다. 사실 그는 부서져본 적이 없기에 세상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두려웠고 너라서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더 두려웠다. 그 말들에 부딪혀 깨져나갈 때마다 그는 떨었고, 바래고, 가벼워졌다.

 

세상의 모든 벼랑 끝에는 한 줌의 소금더미가 쌓여 있다. 그것은 한때 인간이었다. 그들은 상처를 모르고 두려움을 몰랐다. 버티는 법을 버티면서 배웠고, 버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버틸 수 없었고, 자신을 향한 세상의 오해나 과신에 쫓겨 골방에 숨어들어서는, 끝없이 끝없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큰 오해와 과신의 눈빛이 출발하는 곳을 발견한다. 그리고 조용히 거울을 치운다.

 

그때쯤 이미 그는 손쓸 수 없을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잔바람에도 존재가 온통 흔들렸다. 세상은 큰 바람이 쉴 새 없이 부는 곳이었다. 그는 방문을 잠갔다. 우리는 그 방 안을 들여다 볼 때, 끝까지 조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무신경한 날숨에 그가 흩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얼른 방문을 닫아주어야 한다. 가루가 된 사람들에겐 우리가 필요한 시간과 혼자가 필요한 시간이 밀물과 썰물처럼 다녀간다. 그는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에 위안을 얻고, 우리가 지켜보지 않는 동안에 평안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만져주는 동안에 부드러워지고, 스스로 만져주는 동안에 단단해질 것이다.

 

골방은 충분히 좁고 넉넉히 어두워 무너진 마음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뿌리는 빛이 들지 않는 땅속의 흙을 밀어내며 자란다. 이제는 그도 안다. 싹은 약하고 줄기는 바람에 흔들릴 것이다. 잎은 마르고 꽃은 시들며 열매는 썩을 것이다. 그것이 생물이 부서지고 상처 입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의 뿌리가 알 것이다.

 

어느 날 다시 방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그가 흩어져 사라졌으며, 그가 웅크렸던 자리에 그의 씨앗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오래된 새 씨앗이고,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자라날지를 알지만 모른다.

 

구멍을 메워야 할 틈으로만 본다면 평생 부질없는 삽질을 해야 하겠지모두 메웠다 싶어 돌아보면 다시 드러난 틈에 절망할지도 모르고만약 뚫린 그곳에 빛을 들일 수 있다면삽은 그만 내려놓고 거기 쪼그리고 앉아 쏟아지는 빛에 등을 데우고 싶어그러면 마음까지 훈훈해질 것 같은데 말이야.

김민아윤지영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109.

굳이 집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네 책상에 머문 채로 귀를 기울여라한 번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기다려라한 번만 기다리지 말고완전히 고요하게 홀로 있어라세상이 네게 본색을 드러내 보이려고 스스로를 제공하리라별 도리 없이환희에 찬 채로 네 앞에서 굽이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죄와 고통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내 인생과 상관없다안타깝게도 내 뜻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다나는 그저 한 마리 크릴새우가 해류를 따라 흘러가듯 거대한 혼란 속에서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고래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바다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그저 새우로서 살아간다싫은 것들을 피하며 가능한 한 즐겁게다른 새우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만이다.

  운이 좋다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행복할 수 있겠지만아니어도 괜찮다불행하지만 않으면 된다.

  다행히 아직도 불행하진 않다.

김보통아직불행하지 않습니다 

 

 


2



자기 개념은 실제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자기 제시에 의해 정말로 행동이 바뀐다정서가 안정되어 있는 척함으로써 정말로 정서가 안정되고반대로 정서가 불안정한 척함으로써 정말로 정서가 불안해지는 것이다.

에노모토 히로아키은근한 잘난 척에 교양 있게 대처하는 법, 201

 

무언가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인 무언가보다 더 의미 있는 경우가 있다. 사람에 대한 마음이 주로 그렇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면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사랑의 전반전은 선수가 모르게 시작될 수도 있지만, 사랑을 깨달은 선수는 어쨌든 후반전을 시작하고 그때부터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인식과 믿음이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 사랑한다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감정의 규범의 법조문들은 의외로 우리의 사랑을 변동시키는 데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질투하는 스스로를 보고 사랑을 깨달을 수도 있지만, 평소에 질투할 줄 모르던 사람도 사랑한다면 저런 상황에선 질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념의 힘에 이끌려 질투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메커니즘을 속임수에 당하는 일로 치부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의미는 없다. “사랑한다면 질투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은 속임수야라는 인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라는 식으로 내가 지닌 사랑의 관념을 교체하고 나서야, 마음이건 행동이건 비로소 내가 바뀔 수 있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렇다. 평소에 사랑한다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어느 날 실제로 질투를 느꼈다면, 저건 그저 말뿐이었고 실제로 내가 가진 사랑관은 사랑하니까 질투가 나는 거지였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걸 몰랐거나, 알았지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내가 진짜로 믿지도 않는 명제를 내 사랑관인 양 착각 또는 기망하고 살았다는 것. 그 말이 곧 내가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명제로는 나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냐면, 그렇지 않다.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그를 좋아한다고 자주(그리고 오래, 거의 항상)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그를 좋아할 수 있다. 겪어봤습니다. 세 번쯤이(). 사랑관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자신의 굳은 신념이라고 착각했던 저 사람 역시, 그 착각을 더 길게 유지했더라면 같은 상황에서 질투를 느끼지 않거나 덜 느꼈을 수 있다. 오랜 착각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더 오래 묵으면 일종의 진실로 진화한다는 사실은 놀랍거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아도, 실제 살다 보면 종종 그런 꼴을 겪거나 지켜보게 된다.

 

요컨대, 사랑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니까 사랑할만하기도 하고.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사랑하기도 하고. 그 시작이 어떻던, 사랑의 과정 속에서 어차피 사랑을 귀납하기도 하고 연역하기도 하고 합디다.

 

.....합디다?

 

시이기 때문이 아니라사랑으로 쓰였기 때문에 사랑의 시라고 하는 것이다시인은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했지사랑이란 게 존재했기 때문에 사랑한 게 아니었다.

페르난두 페소아페소아와 페소아들 

 

  "아마 제가 소개를 부탁했더라면더 현명했을 겁니다." 다아시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낯선 사람의 호감을 얻는 데 대단히 서툽니다."

  "그럼 사촌분께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 한번 물어볼까요?"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피츠윌리엄 대령을 향해 말했다. "교육도 받았고분별력도 있고세상 경험도 해본 신사가 어째서 낯선 사람의 호감을 얻는 데는 서툰지를 한번 물어볼까요?"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습니다." 피츠윌리엄이 말했다. "동생에게 물어보실 필요 없습니다아마 그런 수고로움을 피하고 싶어서일 겁니다."

  "확실히 저는 어떤 사람들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다아시가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편하게 대화하는 능력 말입니다흔히들 그렇게 하지만저는 대화의 분위기도 잘 감지하지 못할뿐더러 사람들의 관심사에 흥미 있는 척도 못합니다.

  "제 손가락이 제가 본 많은 여성들이 연주할 때처럼 이 악기 위를 능숙하게 움직이지 못하네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들 같은 힘이나 민첩함도표현력도 없어요하지만 그렇더라도 전 늘 제 탓이라고 생각했어요연습이라는 귀찮은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요제 손가락이 탁월한 연주 실력을 지닌 다른 여성들의 손가락만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죠."

제인 오스틴 지음류경희 옮김오만과 편견 

 

 


3



  "그런데 당신 표정이 왜 그래학생들은 다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써왔잖아!"

  "바라다니무슨 얘기야?"

  "책을 읽어야 한다는 원칙그건 그야말로 교리와 같은 거잖아어쨌든 당신이 이단을 잡아내서 화형에 처하려고 아이들 과제물을 한 뭉치나 거둬들인 건 아닐 거 아냐!"

  "내가 바라는 건 아이들이 워크맨을 던져버리고 진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야!"

  "천만에...... 당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닐걸당신이 아이들에게 기대한 건당신이 정해준 소설을 읽고 그럴듯한 독후감을 쓰는 것당신이 골라준 시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거 아니야그래서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학생들이 당신이 뽑아준 예상 문제 중에서 나온 텍스트를 능숙하게 분석해서 적절히 '설명'하거나당일 아침 시험관이 학생들의 코앞에 들이미는 문안을 칼같이 '요약'하기를 바라는 거잖아시험관도당신도부모도특별히 아이들이 책을 읽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니잖아뭐 그렇다고 딱히 책을 읽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바라는 것이라곤 어떻게든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점수를 받는 일이지어른들은 성적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플로베르도 마찬가지였을걸책 읽는 일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겠어플로베르가 루이즈에게 책을 보냈던 건그녀가 더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고 조용히 보바리 부인에 전념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지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에게 아이라도 하나 덥석 안기지나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했고당신도 잘 알다시피그게 바로 플로베르의 본심이자 진실이었어플로베르가 루이즈에게 '책을 읽는 생활을 하시오'라고 했던 말에는 '내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당신은 책이나 읽구려'라는 속셈이 은연중에 담겨 있었다고그걸 학생들에게 말해주었어안 했지?"

  아내가 웃는다그러곤 가만히 남편의 손을 잡는다.

  "그게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야책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마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법이거든당신은 바로 그 책에 대한 사랑을 전도하는 대사제인 셈이야."

다니엘 페나크소설처럼, 95-96 

 

읽을 만한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데, 그럴 때마다 이 책 저 책 떠올리고, 눈앞에 앉아 있는 정신에다가 걸쳐줄 만한 책인지 이리저리 대어 보느라 골머리를 싸매면서도, 이 사람에게 왜 책을 읽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 일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정말 근본적인 질문이고, 어쩌면 오히려 책보다 그 질문이 더 오래 살아남을 듯도 하다.

 

책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야 책 읽을 이유란 적는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넘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다 부질없거나 부적절한 것들 같기도 하다. 일단 필요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리 정해지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독서의 필요성은 그야말로 일반적이라 일방적이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맞는 독서 이유가 있는 법인데, 본인은 또 그걸 잘 모를 수도 있고. 그래서 반 전문가 쯤으로 보이는 이에게 찾아가 진단을 요구했더니, 이 양반이 자꾸 뻔한 이야기를 여러 개 늘어놓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 앞에 처방전을 십 수개 깔아놓고 그 중에서 하나 골라 보라는 식으로 나오면, 실제로 그 처방전이 죄다 효과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환자 입장에서는 이 가운 입은 양아치가 나한테 돌을 파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은, 질문자에는 마뜩찮은 표정인데 오히려 대답하는 인간만 눈을 반짝이며 흥분해대는 풍경화를 그리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그저 어쨌든 책은 읽어야 한다’, ‘너한테 딱 맞는 이유를 지금 내가 말하진 못하겠으나, 어쨌든 읽어 봐라, 알게 된다따위의 책 숭배나 강요하는 꼴이 아닌지? 책 읽을 이유도 찾지 못하는 이 불쌍한 인생아- 하며 몰아붙이면 편하긴 한데, 수천 권을 읽어놓고 책 읽을 이유 하나 제대로 전수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참 허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 허탈함과 부끄러움을 청소하기 위해, 글 잘 쓰는 다니엘 페나크가 나서서 이 책 소설처럼을 쓴 것 같다. 그냥 이 책 하나 던져주고 말고 싶다. 좀 지친다.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인간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얽어놓을 뿐이다그 작고 은밀한 얼개는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사가의하다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같은 책, 225

 

그래도 굳이 따져 보자면 이런 증언들이 있다.


 

1. 재밌잖아 

어쨌거나 통계적으로 확인되었듯이독서가 레져 활동으로서 살아 남으려면독서의 (불분명한혜택보다는 즐거움을 장려해야 한다어떤 사람에게도 책을 읽지 말라고 설득할 생각은 없다다만부탁이니 읽고 있는 책이 재미없어 죽을 지명이면 내려놓고 다른 것을 읽기 바란다. ...... 내가 아는 것은 읽느라 힘들어 눈물이 나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 뿐이다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며다음번 선택 기회가 왔을 때 책보다는 <빅 브라더>(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영국의 리얼리티 쇼-옮긴이)를 선택할 것이다.

닉 혼비런던 스타일 책 읽기


2. 그래, 재밌기도 하겠지

책읽기는 분명 놀라운 재미를 줄 것이다하지만 나는 책읽기에서 오직 재미만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또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정신적 환상을 추구하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모두가 니체처럼 "모든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경지에 오를 수는 없겠지만책읽기가 '고통 없는 재미'만을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실제로 그런 책읽기라면 단언컨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책읽기는 재미와 고통을 동시에 줄 것이다. '고통 없는 재미'만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읽기에서 '재미있는 고통'을 상상하는 게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다른 차원의 문을 연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설레는 위안이 될 것이다.

김욱책혐 시대의 책읽기 

  

3. 인간 너는 사회적 동물

독서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현상이다독서의 수행은 사람마다의 몸과 뇌(지력)를 통해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이다독서는 적당한 체력과 선행 지적 훈련그리고 독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TV 보기 같은 일과는 달리 매우 의식적이고 집약적인 지적 활동이다그런데 책의 선택과 구입독서 과정과 독서 후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 이르는 모든 일은개인이 속한 당대의 이런저런 문화적 정황에 의해 주어지는 집합적 행위의 일부다이 집합적 행위와 인식을 '독서문화'라 지칭하고자 하는데그 안에서 개인은 어떤 책을 택하고 읽는(또는 택하지 않거나 읽지 않는자유를 가진다.

천정환전종현대한민국 독서사 


4.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상처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간혹 내 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왜 없겠는가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정희진정희진처럼 읽기 

 

5. 나다운 게 뭔데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다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가 된다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이현우책에 빠져 죽지 않기 

 

6. 태생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단어를 섭취하고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자아도 확인한다.

알베르토 망구엘은유가 된 독자 

 

7. 읽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독서가 가지는 여러 가지 놀랍도록 무궁무진한 효용과는 별개로 저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가 책을 읽으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몰입할 때입니다요리사는 요리에 집중하고바이올리니스트는 연주에 몰입하고소방관은 화재를 진압하고강사는 강의에 열정을 다할 때 가장 아름답죠그런데 이것은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아름다운 순간이죠반면독서하는 그 순간은 사람의 직업신분나이성별에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프리뷰티 인 리딩 


8. 다 그쪽 덕입니다

책은 내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당연시하는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일깨웁니다그리하여 내가 누리는 안락에 감사하고 내가 겪는 아픔을 고집하지 않게 하며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 원망 없이 받아들이게 하지요.

김이경책 먹는 법 



 

 

 

--- 읽은 ---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지음 / 류경희 옮김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 /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 양영란 옮김 / 샤르브 그림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지음

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 공부 / 홍춘욱 지음

 

 

--- 읽는 ---

은근한 잘난 척에 교양 있게 대처하는 법 /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 강수연 옮김

/ 최희봉 지음

안전 통행증·사람들과 상황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 임혜영 옮김

어둠의 심연 / 조지프 콘라드 지음 / 이석구 옮김

오영수 교수의 매직 경제학 / 오영수 지음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한국사 1 / 김상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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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1-2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페나크 책 빌렸다가 그대로~~ 반납했는데 이 책 좋은책이었네요.
읽고 싶은 책이고 내가 읽으면 좋아할 책인데, 나는 왜 그랬을까요?
다니엘 페나크... syo님 방에서 재발견하고 갑니다.^^

syo 2019-01-25 10:33   좋아요 0 | URL
깜짝 놀라실 걸요?? 아니 이건 완전 단발머리 책인데?! 이걸 이제야..... 이러시면서😆

목나무 2019-01-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구판을 가지고 있지만 안 읽고 있었는데 이 책 좋은책이었군요! 읽어야겠다....ㅋㅋ
독서에 대한 저 많은 이유들 중에서도 저에게는 로쟈 이현우님의 이유가 가장 와 닿네요.
많은 책을 읽어도 나와 감응하는 책은 따로 있는 걸 보면 그게 또다른 나이구나 싶을 때가 있거든요. ~

사랑도 일도 그 어떤 것도 내 생각대로 되는 건 없으니 차라리 내 마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보자...
저는 이러고 삽니다. ^^
물론 그것 역시 어렵기는 하지만........ -.-

syo 2019-01-25 12:28   좋아요 1 | URL
<소설처럼>은 저런 주제인지 모르고 읽었는데, 정말 뜻깊고 재미가 있었어요. 그리 두껍지도 않은데다가 1~2쪽 단위의 꼭지로 나뉘어 있어서 짧게 읽었다 덮었다 하기도 좋아요. 얼른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책 읽는 이유에 대한 인용은 정말 30가지도 더 찾을 수 있었는데, 랜덤하게 콕 8개만 뽑아보았어요. 설해목님께 설해목님의 이유가 있으시겠죠? ㅎㅎㅎ

‘마음대로‘라는 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마음을 먼저 만들고, 그 마음의 모양대로 일과 사랑을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잖아요. 단단한 말입니다.^-^

다락방 2019-01-2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처럼 사서 어제 도착했지요. 후훗. 이제 읽는 일만 남았다!

오만과 편견 리뷰 따로 올라오나요? (기대기대)

syo 2019-01-25 12:30   좋아요 0 | URL
미뤄 놓은 리뷰가 산더미처럼 쌓였네요..... 그 위로 등반해도 될 지경이다-_ㅜ
<소설처럼>을 읽으시면, 조카분들 생각이 팍팍 나실 거예요. 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19-01-25 16:47   좋아요 0 | URL
오만과 편견 리뷰 따로 언제 올라온다고요? 이런 거는 묻기 전에 공지해주면 참~~~ 좋을텐데요. 기다리느라 syo님 방에 3번이나 들어오고 있거든요.

syo 2019-01-25 16:5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님 <오만과 편견> 어마무시하게 좋아하시죠?
실망시켜드릴까봐, 리뷰를 안 할 생각...... 엣헴.

2019-01-25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5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01-25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그게 잘못 됐다는 거죠. 아니면 너무 광범위 하거나.
읽을만한 책 있으면 추천해 달라는 게.
정확하게 뭐에 관한 또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얘기하고
거기에 맞는 책을 골라 달라면 좋은데
막연하게 그렇게 말하면 독서를 넘 우습게 보거나
걍 화장실에서 한 번 보겠다는 정도로 밖에는 안 들려요.
스요님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채널 예스> 보면 독서 고수들이
독서처방전 해 주는 코너가 있잖아요.
처방 내려주는 것도 그렇지만 독자가 난 이래요. 저래요. 거기에 뭐 좋은 책 없을까요?
이런 게 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같으면 그 따위 질문엔 엿이나 먹어. 그럴텐데
스요님은 8가지로 정리도 잘하구. 역시 독서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syo 2019-01-25 16:51   좋아요 0 | URL
진짜로 읽을 마음이 간절해서 묻는 거라면, 질문하는 쪽에서도 그렇게밖에 못 묻는 스스로가 불만족스러울 거예요. 사실 그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안다고 해서 딱 맞는 책을 떡하니 골라줄 수 있을만한 역량이 안 되는거라, 니가 말을 똑바로 안 해줘서 못 골라주는 거잖아- 하고 탓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수도 있겠어요 ㅋㅋㅋㅋㅋ

무식쟁이 2019-01-2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스라져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에 저를 건져내준 책이 < 소설처럼> 이었어요. 덕분에 제2의.. 아니. 3.. 아니다. 제4의 인생쯤 되려나. 암튼 이제 불행하지 않게 잘 살고있다는. 은인같은 책을 쇼님 글에서 보니 좋네요.

syo 2019-01-26 19:15   좋아요 0 | URL
이 책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추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꽤 있네요.
앞으로도 계속 은인 같은 책들을 만나면서 다시 태어나실 쟁이님의 무한한 인생을 응원합니다 ㅎㅎ

아타락시아 2019-01-2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던 <오만과 편견>이 보여서 잠시 적고 갑니다.

syo 2019-01-26 21:50   좋아요 0 | URL
아타락시아 님, 반갑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1-2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처럼> 입력완료! 이 글이 어제 올라왔는데 왜 난 인제 찾아들어와 보는거지? 내가 틈이 많구나 아...

1월은 애들 방학이라 원래 방과후수업이 방학때도 운영하는데 그노무 지붕공사한다고 애들이 학교를 못가네~우아! 이런 느낌...오늘도 도서관에 가서 시청각자료실에서 김혼비 책 보다가 졸고 왔네 소님 땜에 김혼비 읽었네 북홀릭님 중간에 도움주시고 ㅋㅋ암튼 땡스!

syo 2019-01-26 21:51   좋아요 1 | URL
이제 애정이 식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ㅎㅎㅎㅎㅎ

그나저나 김혼비를 읽다가 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네요. 얼마나 피로가 누적되어 있으시길래 그 웃긴 책을 보시다가......

카알벨루치 2019-01-26 22:02   좋아요 1 | URL
소님에게 내가 서운한게 있나? 소님이 나한테 서운한 게 있나? 우리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발생했나?
ㅋㅋㅋ피곤하다 근데 김혼비 잼나네 축구팀 이야기 남 이야기가 아니네요~일주일이 겁나게 빨리 지나가네요 월요날 친선경기때 나만의 뻥축구를 구사해봐야긋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