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던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는다

 

 

1

 

웃을 수 있겠어? 내가 물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울 수 있다면, 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울려면 울 수는 있겠지만, 이게 울 일인지 모르겠어. 울 일이 아니더라도, 그저 울고 싶을 일이기만 해도 아낌없이 펑펑 울 수 있을 텐데, 이게 울고 싶을 일인지도 모르겠어. 나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 먼 어둠 쪽으로 던졌다. 가까운 어둠에는 내가 있었고 나에게는 어둠이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숨어서 어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종종 그게 궁금했다. 내가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그런 거구나. 그건 나한테 물으면 안 되는 거구나. 그렇지만 그건 나 아닌 다른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는 거였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항상 아무데도 물어 볼 수가 없게 되어 있어. 내가 말했다. 진짜 궁금한 질문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는 질문하는 법 자체를 잊어버리게 될 거야. 내가 말했다.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리면, 언젠가는 질문도 잊어버리게 되겠지. 내가 말했다. 모든 질문을 잊어버리면, 모든 사랑도 사라지겠지. 내가 말했다. 모든 사랑이 사라지면, 지구는 점점 작아질 거야. 내가 말했다. 우리 동네만큼 작아질 거야. 내가 말했다. 우리 집 만큼 작아질 거야. 내가 말했다. 내 방만큼 작아지고, 결국 내 마음만큼 작아질 거야. 내가 말했다. 지구가 내 마음만큼 작아지면, 나는 결국 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내가 말했다. 바깥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내가 말했다. 내 말이 중력처럼 공간을 잡아당겼다. 어둠이 넘실거렸다. 말을 그쳤지만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어때, 이제는 웃을 수 있겠어? 내가 물었다. 역시 그건 어려울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이라도 울 수 있다면, 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젓기가 어려웠다.


 

우리에게 더 큰 기억을 남기는 것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잠시나마 엿보게 해주는그 흔치 않은 깨달음의 순간들이다이러한 순간들이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낭비된 시간들도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삶은 대단치 않지만무한한 가능성이 삶의 이야기를 관통해 흐르고 있다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품고 있는 가치의 한 조각일 뿐이다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수평선 너머로 흩어지고 갈라지기 전까지우리의 손아귀를 영원히 벗어나기 전까지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중 하나를 따라갈 수 있다.

  일과를 마치고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좋은 것도나쁜 것도둘 다인 것도 있을 것이다물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만약 이 경우라면 오늘은 별일 없었다고 써도 된다.

상관없다.

로만 무라도프실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고양이처럼

 

이 같은 현실의 글쓰기를 모색해야 한다견고하게 자국을 남기는 규칙적인 발걸음의 연장 속에서만 글을 써야 한다그렇게 되면 생각을 할 때도 오직 견고한 것만을 찾게 된다이것은 오직 강렬하게 체험한 것만을 쓴다는 뜻이다오직 견고한 토대로 체험한 것만을 자신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걷기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언제나 쉽게 지치고 쉽게 실망했다.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앗다계획한 대로 성실히 살아간다고 해서 원하는 목표가 모두 이뤄진다는 보장도 없다인생에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그러니 그저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면 된다고그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바라던 모습이 된다는 걸 일본 서점 여행이 알려 주었다그 깨달음이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바꾸었다. 1년 뒤, 3년 뒤, 5년 뒤또 어떤 놀라운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질까.

정지혜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2



우리가 그곳에서 보낸 하루가 이윽고 저물었다여름 해가 서쪽 산맥 너머로 떨어졌고멀리서 폭죽이 펑펑 터졌다우리는 밤을 보내기 위해서 고속도로 옆에 있는 홀리데이인 익스프레스 호텔로 숨어들었다이튿날 버락은 미주리로 떠나고 아이들과 나는 시카고로 돌아갈 예정이었다모두 지쳤다그날 우리는 퍼레이드를 구경했고피크닉을 즐겼다뷰트 주민 전체를 다 만난 기분이었다그런 하루 끝에마침내 우리는 말리아만을 위한 작은 파티를 열었다.

  그 순간 누가 내게 물었다면나는 우리가 말리아를 제대로 챙기는 데 결국 실패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말리아의 생일이 선거운동의 정신없는 소용돌이 끝에 덧붙은 부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우리는 형광등이 켜져 있고 천장이 낮은 호텔 지하 회의실에 모였다마야와 콘래드 부부와 수하일라가 있었고선거운동본부 직원들 중 말리아와 친한 몇몇이 있었고상황을 불문하고 늘 곁에 붙어 있는 경호 요원들도 있었다풍선이 있었고식료품점에서 산 케이크가 있었고초 열 개가 있었고아이스크림 한 통이 있었다내가 아닌 딴 사람이 구입해서 대충 포장한 선물도 몇 개 있었다영 생뚱맞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딱히 파티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그냥 그날 하루가 너무 길었다버락과 나는 실패했다는 생각으로 우울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이결국에는 그것도 인식의 문제였다우리가 눈앞의 풍경을 어떻게 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린 문제였다버락과 나는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에 집중한 나머지 그 칙칙한 방과 급조한 파티에서도 그런 것만 보았다하지만 말리아는 다른 것을 찾아보았고자기가 찾는 것을 보았다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얼굴을 보았고프로스팅이 두껍게 발린 케이크를 보았고곁에 있는 동생과 사촌을 보았고새롭게 한 해가 펼쳐진 것을 보았다말리아는 그날 종일 밖에서 놀았다퍼레이드도 구경했다내일은 비행기를 탈 터였다.

  말리아는 버락이 앉아 있는 곳으로 씩씩하게 걸어가서 그의 무릎에 폴짝 올라앉았다그리고 선언했다. "이때까지 중에서 최고의 생일이에요!"

  말리아는 엄마와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도방에 있던 사람 절반쯤이 목이 메려 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말리아가 옳았다갑자기 우리도 다 알게 되었다말리아는 그날 열 살이 되었다그리고 모든 것이 최고였다.

미셸 오바마비커밍, 363-364

 

눈이 마음의 모양을 결정하듯, 마음이 눈의 기능을 여닫는다. 우리의 눈은 그저 있는 것을 보는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고, 당연히 보일 것이라 믿는 것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한 시간이 행복하지 않은 시간보다는 많아야 잘 볼 수 있는 동물이며, 잘 볼수록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는 천문학자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행복할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을 때, 생각하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지 않아서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늘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하지 않다는 기분이 행복하다는 기분을 넘어서는 경우는 그 반대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 그렇지만, 행복하자는 마음은 먹을 수 있으니까, 지금보다 더 행복하자는 마음은 먹을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 그 마음이 보여주는 풍경만으로는 절대로 불행의 끓는 냄비를 식힐 수는 없겠으나, 불유쾌하고 불필요한 감정의 거품이 나를 넘치지 못하도록 계속 걷어주는 정도의 도움은 될 테니,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

 

뭐라도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도 기다린다. 기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혜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는 운명이라고 우겨볼 수도 있겠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글쓰기는 일종의 자기중심주의를 전개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천만의 말씀이다자기애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거의 익명의 형태다.

  비록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계속 글을 쓰려면결국 약간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어렴풋이 그렇게 느껴야 한다.

아시아 제바르프랑스어의 실종 

 

 


3

 


어느 날 아침 이런 화제를 쏟아내던 딸들의 얘기를 듣고는 베넷 씨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얘기하는 태도를 보니 너희 둘이 이곳에서 가장 멍청한 아가씨들이 틀림없구나얼마 전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이젠 확신이 든다.” _ 42

 


콜린스 씨와 리지 얘기예요리지가 콜린스 씨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콜린스 씨도 리지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한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가망 없는 일 같은데.”

  “당신이 직접 리지에게 말씀 좀 해보세요콜린스 씨와 결혼하라고요.”

  “리지를 내려오라고 해요내가 할말이 있다고.”

  베넷 부인이 벨을 울렸고엘리자베스가 서재로 불려왔다.

  “이리 와라얘야.” 딸이 나타나자 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일로 널 불렀다콜린스 씨가 네게 청혼했다던데그게 사실이냐?” 엘리자베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잘 알겠다그래그 청혼을 거절했다고?”

  “그랬어요아버지.”

  “잘 알겠다이제 본론을 말하마네 엄마는 네가 그 청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고집하지안 그래요베넷 부인?”

  “그래요아니면 앞으로 저애를 다시는 안 보겠어요.”

  “불행한 선택이 네 앞에 놓여 있구나엘리자베스오늘 이후로 넌 부모 중 한 사람과 남남이 되는구나만약 네가 콜린스 씨와 결혼을 안 한다면 네 엄마가 너를 다시는 안 볼 테고만약 그 결혼을 한다면 내가 널 다시는 안 볼 테니.” _ 148

 


위컴 씨의 작별 인사는 아내보다 더 살가웠다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멋진 태도로 꽤나 그럴듯한 인사말을 참 많이도 건넸다.

  “늘 봐왔지만 역시 우리 사위는 아주 멋쟁이라니까.” 리디아 부부가 떠나자마자 베넷 씨가 말했다. “억지웃음도 잘 짓고능글맞고우리 식구를 다 꾀려 드는구나그가 엄청나게 자랑스러워이보다 더 값진 사위를 얻은 장인이 있다면윌리엄 루커스 경이든 누구든 나와 보라고 해라.” _ 417

제인 오스틴 지음류경희 옮김오만과 편견

 

나는 이 책에서 아빠가 제일 좋다. 아빠가 입만 열었다 하면, syo는 그냥 빵빵 터진다. 아쉽게도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느라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주인공인 둘째 딸 엘리자베스가 아빠를 참 많이도 닮아서 다행이다. 게다가 비록 그들 부녀처럼 말로 웃기지는 못하지만, 머저리 같은 행실로 못지않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인 오스틴이 순전히 200년 뒤에 읽을 syo의 배꼽을 훔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 같다.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4


어려서부터 읽은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뭐라 답하기가 퍽 곤란하다워낙 책을 많이 읽어 일종의 속독법을 터득한 터라 난이도가 낮은 책특히 소설이나 수필 종류는 앉은 자리에서 서너 권을 쉽게 읽는다거기에다 잡지나 만화 등까지 포함한다면 읽은 양이 수직상승할 것이다그래서 총 몇 권을 읽었는지 정확하게 헤아리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최근 3~4년을 돌이켜보면, A4 한 장 분량이 넘는 독서평을 남긴 책이 1년에 50여 권 정도 되니연간 적어도 150권 이상 읽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홍춘욱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 공부, 20

 

도대체 속독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저게 맞는 일인지도 역시 잘 모르겠다. syo의 짧은 생각으로는, 속독이라는 기술이 가장 마지막으로 겨냥해야 할 장르가 시고, 그 바로 직전이 소설일 것 같다. 물론 앉은 자리에서 서너 권을 쉽게 읽는 속도로 읽어도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설은 '오만이 오만하고 편견이 편견하다 마침내는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줄거리 파악 정도는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것들, 천천히 읽고, 음미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들어갔다 나왔더니 내 감정 역시 일렁거리기도 하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챙기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서너 권을 읽어낼 수 있다고? 혹시 그냥 소설이라는 장르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다종다양한 선물들 가운데 특정한 한두 가지 것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다 반납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이게 선생님의 오만입니까, 아니면 syo의 편견입니까?

 

이코노미스트라는 버젓한 직업을 지닌 이가 1년에 150권 이상 읽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읽는 일이긴 한데, 어쨌든 1년에 150, 그게 칭찬받을 양일 수는 있어도 자랑할 만한 양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네에는 저자가 10년 동안 읽을 양을 한 해만에 읽어내면서도 특별한 자랑 한 줄 남기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랑 같다. 자랑은 이 대목 뿐 아니라 책 전반에 깔려있는 기본 태도로서 까먹을 만하면 스멀스멀 느껴진다. 숨기려고 했는데 드러났다면 필력 부족일 것이요, 자랑이 목적이고 겸사겸사 겸손까지 자랑해보고 싶어서 책을 냈다면, 역시 언론 출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칭송할 밖에.

 

그래도 마저 읽는다. 그래도 경제 책이라니까, 경제만 보고 계속 읽어봅니다.

 

 

 

--- 읽은 ---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정지혜 지음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지음 / 이정임 옮김

키 재기 외 / 히구치 이치요 지음 / 임경화 옮김

 

 

--- 읽는 ---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지음 / 류경희 옮김

나이트 우드 / 주나 반스 지음 / 이예원 옮김

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 공부 / 홍춘욱 지음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지음

/ 최희봉 지음

30분 경제학 / 이호리 도시히로 지음 / 신은주 옮김 / 김미애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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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을 찾아서...
    from Value Investing 2019-01-24 01:42 
    어제는 syo 님의 글을 읽다가 내 눈에 번쩍 뜨이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내가 발견한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눈이 마음의 모양을 결정하듯, 마음이 눈의 기능을 여닫는다. 우리의 눈은 그저 있는 것을 보는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고, 당연히 보일 것이라 믿는 것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syo 님의 저런 멋진 표현을 읽는 동안에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랄
 
 
카알벨루치 2019-01-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종횡무진!!! 소님 덕에 종횡무진의 남경태님을 알게되었는데, 이분이 <비잔티움연대기>의 번역자라는 사실을 어제 알았네요! 암튼 소님 땡큐! 글을 읽으면 참 편안해지는게 소님 글이라 훈훈해지고 따뜻해지고 나도 빨리 포스팅하고 싶다는 충동이 입니다 요즘 포스팅꺼리가 쌓여가는 느낌이 마치 낙엽잎이 쌓여 빨리 불태워야겠다는 미화원 같은 마음이네요~근데 포스팅은 언제 할지 ㅋㅋㅋ

오늘도 화이팅!

syo 2019-01-22 10:31   좋아요 1 | URL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 글이 아니라 다 저를 향한 카알님의 과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ㅎㅎㅎ
카알님도 얼른 낙엽을 불태우셔야죠. 활활활. ㅋㅋㅋㅋㅋ 카알님도 화이팅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1-2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도 좋은 밑줄긋기도 잘 보고 품위 있게 까는 모범답안도 잘 보고 갑니다. 이건 인품의 문제지 글만 갈고 닦아서 되는게 아닌 것 같아요.

syo 2019-01-22 12:58   좋아요 1 | URL
품위요? 인품이요? ㅎㅎ 전혀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
저 그런 인간 아니구요, 저거 쓰면서도 솔직히 좀 후달렸어요. 혹시나 저자가 보실까봐...... 하지만 워낙 바쁜 분이시니까, 괜찮겠지요? 일하시느라, 읽으시느라 여력이 없으실 테니ㅎ

반유행열반인 2019-01-22 14:28   좋아요 0 | URL
혹시나 버럭하는 저자가 있다면 읍소하며 불쌍한 척 하는 방법도...저는 궁리중입니다...(이기호 선생께 글로 배운대로?ㅋㅋㅋ)

syo 2019-01-22 16:43   좋아요 1 | URL
좋은 방법입니다!! 납작 엎드릴 태세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oren 2019-01-2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눈은 그저 있는 것을 보는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와 아주 비슷한 생각을 에머슨이 날카롭게 통찰한 적이 있었고, 그의 말을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어디선가 다시 인용하고, 그걸 또다른 사람이 다른 책에서 또다시 인용한 것까지 봤는데, 그 표현들을 기록해 놓은 게 없어 아쉽네요.(책을 뒤져보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나마 그와 비슷한 문장 하나는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게 있어서 살짝 덧붙여 봅니다.
* * *
인생은 염주처럼 기분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기분들을 하나씩 겪어나갈 때, 그들은 그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칠하는 다채색 렌즈라는 것을 드러낸다.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하기 때문이다.(17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경험> 중에서

이걸 또다른 책에서는 이렇게도 번역해 놓았더군요.

인생이란 한 줄에 꿰인 염주와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며 지나갈 때, 이들은 모두 각기 독특한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고, 각기 자기의 초점 속에 들어오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형형색색의 만화경의 렌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이창기 편역, 『자신감』, <경험> 중에서

syo 2019-01-22 13:01   좋아요 0 | URL
oren님의 댓글은 언제나 제 글을 부끄럽게 합니다.

저도 열심히 읽고 문장도 열심히 모으고는 있지만, oren님처럼 적절한 대목에 자유자재로 덧붙이고 자신의 생각도 밝힐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열심히 배우고 흉내내면서 따라가겠습니다.

stella.K 2019-01-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오늘은 꼭 <어린왕자>를 읽는 기분이로군요.
출판사들은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출판사를 했다면 스요님과 계약했을 텐데...ㅠㅋ

syo 2019-01-22 13:32   좋아요 0 | URL
말씀은 정말 기뻐서 춤을 춰버렸습니다만,
스텔라님께서 출판사를 안 하셔서 어찌나 다행인지요. 하셨다면 저 때문에 망했을 텐데 ㅋㅋㅋㅋ

stella.K 2019-01-22 13:4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책 한 번 내고 망하는 출판사 못 봤는데요?
근근히 어떻게든 버티고 하더라구요.
제 책 나오고 나서 출판사에 오히려 미안했는데
그곳 사장님이 출판사는 책 하나 가지고 명운을 가르는 게
아니라 몇 종의 책을 계속내서 인지도를 쌓아야 하는 거라더군요.
더구나 제가 내달라고도 안 했어요. 사장님이 먼저 제안한 거지.
그러니까 좀 덜 미안하더군요.ㅋㅋ
스요님도 혹시 출판사에서 연락 오거든 빼지 마시고
무조건 계약 한다고 하세요. 아셨죠?ㅎㅎ

syo 2019-01-22 16:4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출판사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려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제가 어떻게 눈 딱 감고 한다 그러겠어요 ㅋㅋ

전 그냥 스텔라님 다음 책이나 기다려보겠습니다.

무식쟁이 2019-01-2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고도는 쇼님 마음속에.. (흠흠..)

syo 2019-01-22 20:2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안 와요.....
 

 

당신의 곁에서 나는 나의 일을 하겠습니다



1

 

불알친구 콘칩이 득녀하였다. , 콘칩이. syo와 콘칩과 이누는 올해로 24년차 공인인증 절친인데, 우리는 함께한 23년 가운데 20년 가량을 콘칩 저 거친 짐승을 데려갈 자 그 누구인가를 안건으로 하여 술자리를 데우곤 했다. 그런 그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에 골인함으로써 syo의 오래된 무신론적 믿음을 거세게 뒤흔들더니, 어어어 하는 사이에 일사천리로 아빠까지 되었다. 축하합니다.

 

아빠와 엄마에게서 한 글자씩 딴 이름을 가진 우리 조카님은, 초상권 문제로 사진을 올릴 수가 없어서 아쉬운데, 굉장히 득도한 표정으로 신생아실 침대에 누워 있다. 초연함과 지루함 사이 어디쯤 있는 표정으로 45도 우측 상방을 응시하고 있는데, 마치 세상에 두 번쯤 태어나 본 아이 같다. , 기껏 나왔더니 또 이 세상이네, 혹은, , 이 세상 전에 봤던 건데.

 

이미 미운 여섯 살 딸 아빠 협곡을 지나고 있는 이누는 모유수유(자기네들이 할 것은 아니지만)에 관한 정보부터 시작하여 금쪽같은 꿀팁을 단톡방에 날려댔고, 감동으로 끓인 도가니탕을 아직 다 비우지 못한 콘칩은 그 꿀팁을 받아먹느라 여념이 없다. 점차 syo는 소외되었고...... 결혼 전이지만,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 기를 생각이 없는 syo에게 저놈들이 주고받는 꿀팁은 그저 와이파이 폐기물일 뿐이었고...... 웬만하면 갠톡 열고 꺼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좋은 날 그러기도 힘들고....... 결국 윤회론의 증거일지도 모를 우리 조카님 사진이나 계속 쳐다보며, 그저 소심하게 얘들아 볼륨 좀 낮춰주겠니,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 이렇게 마무리 지으니까 되게 구슬픈데...... 더 쓸 말은 없고.

 

 

 

2



삶을 진열하고자 하는 이들은 책으로 벽을 쌓는다진심으로 살고자 한다면 '타인의 나'로부터 '자신의 나'를 세우는 일이 독서의 본연임을 인정하고 책과 인간 사이에 무엇이 존재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누군가의 책장을 곰곰이 살펴보면 찾을 수 있는 삶의 단서 같은 것이 있다이러한 관찰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의 소망과 절망이 그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김현진진심의 공간, 188


책이 우리를 연결해주리라는 비전에 나는 늘 회의적이다. 책이 인간을 바꾼다는 말도 별로 믿지 않는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어느 시점까지 살아낸 인간에게라면 책은 기껏해야 변화를 위한 방아쇠는 될 수 있어도 화약고가 되지는 못한다. 책이 다이너마이트 스위치일 수는 있어도 실제 다이너마이트는 일상이 준비해야 한다. 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책이 아니라 우리고, 인간을 바꾸는 것 역시 책이 아니라 인간이다. 연결되지 않을 사람들은 저마다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다시 만나도 우리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되지 않아도 될 이유만 잔뜩 찾아낸다. 점점 똑똑해지면서 점점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게 되고, 남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크기의 미세한 변화를 반복하는 것으로 스스로가 진화하고 있다고, 나는 고인물도 꼰대도 아닌 역동적인 인간이라고 착각한다. 책은 책으로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나, 인간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결코 인간을 만나지 않고 인간에게 무엇이 될 수 없다.

 

책 읽는 사람은 서재와 내면 양쪽에 있는 자신의 책장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에 망설임이 없을수록 더 좋은 독자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읽고 쓰는 일이 그렇다. 글의 생김새는 삶의 생김새를 따라가므로, 부득이 졸렬한 내 글이 역시 부박한 내 삶을 노출할까봐 조바심하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쓰는 것은 아마 더 좋은 독자가 되는 것을 넘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겠다. 나는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저 밖에서 저희들끼리 만나 시시덕거리게 놔두는 건 어떨까요어차피 세밑이잖아요들뜬 마음들이 들뜬 마음들을 찾아다니는...... 들뜬 마음들은 저희들끼리 한껏 들뜨도록 놔두고 우린 우리 얘길 하죠.

김정선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아주 나중에 내가 나무가 되고 나의 동족이 사람이 되었을 때그가 너무 외로워 혼자 숲길을 걷다가 우연히 나를 바라본다면와서 꼭 껴안는다면불행하게도 그가 시를 쓰고 있다면그런 것을 쓰고 있다면그의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뿌리부터 가지까지 온몸에 퍼진다면언젠가 숲에서 내가 안았던 나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가만가만 흔들리는 게 전부겠지.

 

그가 나의 피부를 조금 벗겨 가 거기에 편지를 쓰고 그걸 누군가에게 주고 그 사랑이 끝나고 절망하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고 죽고 어떤 혹독한 겨울에 태어나고 어쩌면 나무가 되고 우리가 단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이 이상한 병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따뜻하겠지.

 

살아라지금처럼 살아라바람을 시켜 등을 밀어 주는 거.

손미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이상합니까?

 

 

 

3


 

지금까지 살면서나는 운 좋게도 온갖 부류의 비범한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았다국가 원수발명가음악가우주인운동선수교수기업과화가와 작가선구적인 의사와 연구자... 그중(비록 충분한 수는 아니었지만일부는 여성이었다그중(역시 충분한 수는 아니었지만일부는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이었다어떤 사람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거나우리 같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불공평하리만치 역경으로 점철된 것 같은 삶을 살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특권이란 특권은 다 타고난 사람처럼 살아냈다내가 그들로부터 배운 교훈은그들에게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공한 후에도 대형 경기장을 메울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비판자와 회의론자가 따라붙는다그들은 그가 사소한 실책을 저지를 때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외친다그런 소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그 소음을 견디는 법을대신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목표를 꿋꿋이 밀고 나가는 법을 터득했다.

미셸 오바마비커밍, 99 


나는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해줄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해주고 싶은 게 많았다. 누구에게라도 그랬다. 헐벗은 이에게 내 옷을 벗어주거나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기꺼이 대신 굶주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역량을 넘어선다고 판단되는 것들에도 뛰어들었다. 가끔은 내가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실패하고 슬퍼했다. 나는 늘 기대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한다.

 

저 긴 대목을 읽으면서도, 나는 마지막 한 줄에 오래 머문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의지하여’. 버락은 드물게 좋은 사람이었다. 해줄 수 있는 게 많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버락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미셸은 버락의 가능성을 진작 믿었으나 버락의 주변에서 버락을 믿어주는 수많은 좋은 사람들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하는 것.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다. 말로 하자면 괜히 거창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하고, 거기서 한 뼘만 더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좋은 사람이 좋은 일을 할 때 꿋꿋이 밀고나갈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고, 성공도 실패도 함께 지나가는 사람이 되는 일, 그건 쉽지 않다. 누구에게 물어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는다. 쉽지 않은 일에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모두가 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선택지가 던져지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품성에 달린 일이라 말하며 쉽게 포기할 때가 많다. 품성의 탓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 내가 가진 자연스러운 성향을 억누르면서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르냐는 질문으로 쉽게 도피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꿈을 방해하는 내 가장 위협적인 적들이다.

 

나는 우선 옆, 내 옆을 봐야한다.


  공격성을 증오로 바꾸는 현대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문명화된 사회제도의 규모와 복잡성이다인간이 스스로를 커다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그는 공격적 자아를 확인하고 적절한 자부심과 존엄성을 지킬 기회를 박탈당한다그의 무능감은 유아기 초기에 느꼈던 무력감과 나약감을 다시 일깨우고이는 그의 표출되지 않은 정상적인 공격성을 증오와 분노로 변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독자적으로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공예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조직 구성원보다 동료를 적대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낮다.

  아주 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거대 집단은 힘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데 소홀하다인간은 비교적 작은 공동체에 속해 살면서 자신의 몫을 담당하고 자신의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데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보다 행복하다.

앤서니 스토공격성인간의 재능

 

이기주의는 누군가의 딱한 처지를 ''라는 거품에 쌓인 작은 산으로 뒤덮어 버린자기만을 의식하는 중대한 실책이다나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치명적인 환상으로 위태롭게 흔들리지만이내 곧 다시 만들어진다하지만 이 환상은 어누 누구도 속이지 못한다어느 것도 자신을 꿰뚫고 구성하는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기주의는 공허하게 현실이 뜻대로 될 것이라 낙관하며 속세의 성공을 대사건의 차원으로자신의 죽음을 엄청난 천재지변으로 확대해석한다만약 이기주의가 불행을 만든다면 불행은 이기주의를 만든다.

라파엘 앙토방철학자 사용법

 

 

--- 읽은 ---

진심의 공간 / 김현진 지음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지음

경제학의 모험 / 니알 키시타이니 지음 / 김진원 옮김

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지음 / 김명남 옮김

 

 

 

--- 읽는 ---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정지혜 지음

키 재기 외 / 히구치 이치요 지음 / 임경화 옮김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지음 / 이정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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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숲 2019-01-1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의 공간》이 ‘읽는‘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계속 기다려왔는데 드디어 ‘읽은‘으로 올라왔고 글도 쓰셨네요. 읽고 좋았어서 반갑네요. 잘 읽고 갑니다~

syo 2019-01-18 18:37   좋아요 1 | URL
하림 님께서도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진심의 공간》은 좋은 책이잖아요. 저 좋은 책을 놓고 부족한 글을 찌끄리게 되어 탐탁지 않았었는데, 말씀 듣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나무 2019-01-1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글도 참 좋네요. 좋아.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부대끼는 사람들이 오늘은 달리 보이네요. ^^
좋은 사람되기,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덕분에 주말 뿌듯하게 보낼 듯합니다. ^^

syo 2019-01-18 18:41   좋아요 1 | URL
뜻밖의 감사표시를 받거나 칭찬을 듣게 되면, 내가 하루하루 정말 쬐에에에에끔씩이나마 좋은 사람이 되고 있구나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땐 하루가 통째로 기분이 좋아지잖아요ㅎㅎㅎㅎ

설해목님의 따뜻하고 뿌듯한 주말을 기원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19-01-1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하는 것. 이 문장 뿐 아니라 구절구절 마디마디 너무 좋네요.

조카님은 이제 영원히 그 카톡방의 지배자가 될 거예요. 귀염둥이 역할은 이제 syo님에게서 그 조카님에게로^^

syo 2019-01-18 18:46   좋아요 0 | URL
단톡방의 지배자는 대환영입니다. 그 지배자는 글쎄, 눈을 뜨고 태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 단톡방에는 애초에 귀염둥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맞는 말도 참 싸가지 없게 하는 되바라진 ㅅㄲ‘를 맡고 있었어요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19-01-18 18:48   좋아요 0 | URL
눈을 뜨고 태어났다는 아기 이야기..... 거짓말 같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낳아봐서 아는데요. 진짜 그런 아기 있더라구요. 저랑 같이 사는 중 ㅋㅋㅋㅋㅋㅋ

syo 2019-01-18 18:52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국 눈 뜨고 난 아이연합‘을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이름하여 ‘한눈뜨아‘.....

와 재미 들렸어 어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구를 찾아야한다

단발머리 2019-01-18 19:10   좋아요 1 | URL
진짜 진짜 그러네요!!
일단 가입신청서 팩스로 보내주세요.
엄마는 자동가입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1-1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좋아.

syo 2019-01-19 09:12   좋아요 0 | URL
어째서 일주일 째 침묵중이세요...ㅠ

반유행열반인 2019-01-19 11:23   좋아요 0 | URL
책으로 글쓰는 사이트에 완독한 책이 없으니 그렇게 됐네요...어째서 완독한 책이 없냐 하면 간 밤의 저 댓글 달기 직전 상황이-9개월짜리가 자다가 온통 토해서-이불이며 베개커버며 애벌빨래로 털어내고-새 이불이며 옷가지며 다시 깔고 입히고-그 사이 통곡하는 9개월짜리를 다시 젖 물려 재우고-탈탈 털린 멘탈로 syo님 글을 읽으니 문장과 마음과 발췌글이 모두 다-좋네요, 좋아. 하고 평온을 찾은 상황이었는데 상황적 맥락은 커녕 목적어도 못 붙일 만큼 마음과 몸의 여유가 없었네요. 힐링 포션같은 좋은 마음과 좋은 기운과 엄선된 문장들을 담은 글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syo 2019-01-19 18:35   좋아요 1 | URL
원효대사 해골물 같은 거 아닐까요. 일체가 오직 열반인님의 마음에 달린 일이라, 제가 쓴 해골물도 달게 들이켜시는 것 같아요. 이렇다면 이건 해골물이 원효대사한테 감사해야 되는 거죠. 감사합니다 ㅎㅎㅎ^-^

2019-01-19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9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9-01-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 콘칩님, syo님이 축가 불러주신 분 아니었나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우선 옆, 내 옆을 봐야한다.- 알면서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syo 2019-01-20 09:37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바로 그 콘칩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다 득녀까지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제가 축가를 망한 덕분이지요!! 으하하하하.....

페크pek0501 2019-01-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향이 약간 다른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 제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의 글이 되면 좋겠어요.
불헹에 처한 사람이 제 글을 읽고 덜 불행하게 생각되게 만드는 것. 우울한 사람이 제 글을 보고 웃게 되는 것.
제가 너무 오만에 빠졌나요?

제가 발레로 키가 1센티미터 자랐다고 하니까 의외로 좋아하시는 분의 댓글을 받은 적이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키가 줄어 든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운동을 통해 키가 클 수 있다면 희망적이라는 거죠. 이런 것도 좋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글. 제가 또 오만에 빠졌나요? ㅋ

syo 2019-01-20 12:10   좋아요 1 | URL
˝내 글에 그런 힘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오만이지 않을까요.

페크님의 말씀은 ˝내 글에 그런 힘이 있어야 한다˝ 혹은 ˝내 글에 그런 힘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떻게 오만이겠습니까.

저는 페크님과 제가 말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는 제 옆에 있고 제가 만질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랄까요.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이에겐 글보다는 말, 말보다는 움직임으로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테니 그런 것들을 고민해 보려구요.

 

 

잠에서 깨어보니 내가 닭인지 닭이 나인지

 

 

1

 

닭을 먹고 잤는데 꿈에 닭이 나왔다. (?)에 치킨을 들고 있었다. 먹으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닭도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무서웠다. 나는 치킨이라면 누가 줘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닭이 주니까 먹기가 무서웠다. 닭은 막무가내였다. 또박또박 말했다. 먹으라고. 부리로 쫄 기세라 잔뜩 쫄았다. 나는 울먹거리며 치킨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건 닭목이었다. , 나는 목은 안 먹는데. 닭을 올려다보았다. 먹어. 닭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목은 안 먹어. 나는 닭치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닭발 맛 좀 봐야 정신 차릴래? 닭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네 목은 안 먹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는 닭이 보는 앞에서 닭목을 바닥에 팽개쳤다. 이럴 수가..... 바닥에 뒹구는 모가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닭은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목은 안 먹는다고 그랬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듣고 그래. 미안한 마음에 나는 되레 큰소리를 쳤다. 나쁜 놈. 넌 나쁜 자식이야. 난 똥집이 있는데 넌 양심도 없니. 닭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읊조렸다. 정말 내겐 닭똥집만한 양심도 없는 건지, 자괴감이 들었다. 닭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들썩이는 닭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리고 물었다. ..... 혹시 다른 부위는 없니? 그러자 닭이 코(?)를 훌쩍이며 되물어왔다. 넌 어느 부위를 좋아하는데? 참고로 나는 퍽살을 좋아하는데...... ! 나돈데? 나도 퍽살! 뜻밖에 취향의 일치를 확인하자 닭은 신이 났는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너는 정말 닭을 먹을 줄 아는 녀석이구나? , 너 역시 닭 좀 먹을 줄 아는 닭이구나? 우리는 환희에 차 두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빙글빙글 빙글빙글. 만세 만세 퍽살 만세, 롱 리브 더 가슴살!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핳 하 ㅎ......(페이드아웃)

 

이게 대체 무슨 꿈인지는 점심에 밝혀졌다. 엄마 핸드폰이 카톡카톡 난리였지만 엄마는 김치전을 부치고 있었다. 아들, 카톡 한번 봐봐. 동생이었다.

 

엄마, 내가 닭가슴살 주문한 거 2시 전에 도착한대.”

 

김치전 두 판을 먹고나서, syo는 탈 만한 작두가 요즘 얼마씩 하는지 인터넷으로 가격 검색을 시작했다.

 

그렇다그것은 행동 규칙들이었다수도꼭지 위에 놓인 설거지용 행주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명령하는 것 같았다그동안 깨끗하게 청소가 된 식탁 위에 놓인 맥주병 뚜껑 역시 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것 같았다그는 도처에서 이것은 하라저것은 하지 마라 하는 요구를 보는 것 같았다그에게는 모든 것이 미리 작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양념 통이 놓인 선반방금 끓인 잼을 담아 놓은 유리 그릇들이 놓인 선반...... 그런 것이 반복되었다.

페터 한트케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한 사회가 동물을 다루는 방식이들을 통해 식품을 생산하는 방식이 윤리와 공중보건과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준다면이는 당연히 공적인 비판과 감시규제의 대상이 된다개별 사안만 보면 개인의 선택이라고 해도이것이 모여 전체적으로 끼치는 결과가 공공 영역의 안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식탁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김한민아무튼비건 

 

2



지금 우리 세대에 결혼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잖아요뭔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어떻게 다르게 할지도 막막하고그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그런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 있나요?

 

쉽지 않다는 건 알아요보통은 부모님친구들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또 돈 때문에 그렇게 못하죠가족들이 많은 경우에는 더 힘들어지죠그런 여러 가지 여건들 때문에 사실 자유로운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소수일 거예요왜냐면 포기해야 될 게 많으니까요뿌린 돈을 생각하면 돈 걷는 형식도 맞춰야 될 거고그러니까 사실 가장 쉽고 부모님한테 잔소리도 안 들어도 되고 가장 돈이 덜 드는 게또는 돈이 남는 게 바로 일반적인 결혼식이죠속 편하게 할 거면 그냥 해도 돼요근데 사실은 그거야말로 그 사람들에게 결혼식이 별 의미가 아니란 뜻이죠모두가 결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만났고우리는 어떤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어떤 결혼식이 어울려'라고 생각했다면사실 이렇게 모든 결혼식이 다 똑같아지지는 않았겠죠정말로 자신들에게 이 결혼식이 의미가 있다면또 내 것으로 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만큼의 귀찮음과 어려움은 감수할 수 있을 거예요어른들 세대와의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어요최대한 우리 맘대로 하고그런 갈등들은 그냥 감당하자는 거예요그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서 대충 맞춰주는 식으로 넘어간다면결국 그 갈등을 우리 다음 세대가 지게 되는 거잖아요우리가 억압받고 맘에 안 드는 게 있다면 우리부터 거부를 해야 우리 다음 세대부터는 그게 좀 당연해지지 않겠나 생각해요말만 하면 입만 산 사람이 되는 거니까.

이혜인정현우요즘 것들의 사생활 결혼생활탐구, 58-59

 

내 처지가 이래서 결혼식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길 수도 있다. 그러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장 담그는 꼴이지만 구더기 무서워 김칫국도 못 마시랴 하는 오기로 가끔 이런 저런 결혼식에 대해 생각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부부들의 결혼식 혹은 결혼 생활 풍속도가 요즘 것들이라는 집단에서 정말로 대표성을 가지는지는 의심스럽다. 이 커플들에 집어넣으면 나와 여친은 어린 축인데, 그런 우리가 봐도 이들은 비범하다. 주변의 별처럼 많은 인간군상들이 나만 버려놓고 죄다 시집장가를 갔는데, 어느 하나도 이 책 속의 인물들처럼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없다. 그럴 의지도 별로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이 구역의 첫 번째 미친놈이 될 수 있겠다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쩐지 정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야말로 정말 준비된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뻑적지근한 결혼식을 하고 말 테다!

 

.......언제 인마, 언제...... 이 그지 깽깽아.....

 

 

 

3

 


그녀는 마침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 같으니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와야겠다고 했다그는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어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그러나 그녀는 벌써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열어 둔 문으로 정말 비가 오는 것이 보였다그는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셔츠 하나가 떨어졌다고 소리쳤다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부터 입구 옆에 깔아 놓았던 마룻바닥 깔개였다그녀가 식탁에 촛불을 켰을 때손에 든 초를 약간 기울여서 들고 있었기 때문에 접시 위로 촛농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촛농이 깨끗한 접시에 떨어지자그가 "조심해요." 하고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흘러내린 촛농 위에 초를 세우려고 한참동안 누르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초를 접시 위에 세우려고 그랬다는 걸 몰랐소."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그녀가 의자 없는 곳에 앉으려고 자세를 취하자블로흐는 "조심해요!"하고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아까 돈을 계산할 때 떨어뜨렸던 동전 하나를 식탁 아래서 집어 들었다어린애를 보기 위해 그녀가 침실로 갔을 때그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고심지어 식탁에서 잠시 자리를 떴을 때도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페터 한트케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102

 

이 남자(블로흐)가 애초에 미쳐서 이러고 다니기 시작한 건지, 이러고 다니다 보니까 점점 미쳐가는 건지 알기가 힘든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왜 알기가 힘든가 하면,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페터 한트케는 보여주는 작가다. 알아내는 건 독자의 일, 작가는 언어를 던지는 일만 하고, 언어가 언어의 일을 한다.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경험이 있는(ex. syo)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먼저 몸을 풀어도 좋겠다. 일단 저 두꺼운 놈들에 비해 몇 배는 얇다. 물론 카프카의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어, 잠깐, 이런 글은 월말 결산 때 쓰는 건데. 그땐 뭘 쓰지.....?

 

그나저나, 때마침 함께 읽던 위화 선생님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 완전히 관련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서 함께 적어둡니다.



루쉰과 셰익스피어가 묘사하는 광인들은 아주 조리 있고 분명하게 말할 줄 압니다이 두 작가는 이런 인물의 멀쩡하지 않은 정신 상태를 그들의 말에 담긴 의미를 통해 보여줍니다수많은 작가들은 광인의 정신 상태를 표현할 때 그 인물이 두서없는 말을 하게 하거나 중간에 문장부호를 전혀 넣지 않는 방식을 쓰곤 하지요이런 방법은 이미 일종의 공식이 되었습니다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한 무더기가 새까맣게 뭉쳐 있는 것입니다이들 작가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몇 쪽심지어 몇 십 쪽씩 늘어놓기만 하면 독자가 이 인물이 광인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이는 그들의 바람에 불과하지요독자가 미쳤다고 느끼는 것은 작품 속의 인물이 아니라 그것을 쓴 작가일 겁니다.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301 

 

 


4


 

현대 세계는 실제로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질 수 있다는 관대한 관념 위에 세워졌다여기서 가진다는 것은 물질이나 명예를 가진다는 말이 아니라 잠재적 가능성을 말한다우리 중에 누구도 이룰 수 있는 것에 한계는 없다지금 당장은 돈이 좀 부족하고명예가 낮고거절당한 상처도 있을지 모른다하지만 이런 것은 일시적 어려움일 뿐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열심히 일하고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머지않아 이 어려움을 깰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노력하는 사람에 관한힘이 되는 이야기가 언제나 돌아다닌다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별일도 없이 남아메리카를 5년간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인생을 정리하고 회사를 차렸는데 그 회사가 이제는 어지간한 나라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식이다그 사람은 갑옷도 없고생김새도 마치 수학 선생님이나 공항에서 나를 태웠던 택시기사처럼 생겼으므로 평등이라는 개념을 강화한다세계는 언젠가는 성공이 어떻게든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_ The School of Life, 인생 직업, 177-178 


우리가 뭘 해도 슬픔과 좌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알고 보면 대부분 세상의 탓이라는, 훈훈하지만 이제는 다소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시종일관 펼쳐지는데도 지겹지 않고 재미가 있다. 그 재미는 역시 알랭 드 보통의 문체, 무엇보다도 넘나 맛깔나는 예시 창조 능력에서 나온다. 배울 수 있는 데까지는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닐 수 없다.

 

 


--- 읽은 ---

인생 직업 / The School of Life 지음 / 이지연 옮김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지음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 위화 지음 / 김태성 옮김

요즘 것들의 사생활 : 결혼생활탐구 / 이혜인 글.인터뷰 / 정현우 사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용호 옮김

 

 

--- 읽는 ---

진심의 공간 / 김현진 지음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지음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 /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 양영란 옮김

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지음 / 김명남 옮김

경제햑의 모험 / 니알 키시타이니 지음 / 김진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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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9-01-16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한트케.... 좋은 작가 하나 알아갑니다...

syo 2019-01-16 09:15   좋아요 0 | URL
지금도 아시는 것 천진데 자꾸자꾸 알아가시는 프메님!!

독서괭 2019-01-16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꿈 얘기 넘 웃겨요 ㅋㅋㅋㅋㅋ “닭”이라는 글자가 몇번 나오는건지 ㅋㅋㅋ 그나저나 퍽살을 좋아하는 분들이 은근히 있더라구요? 닭다리파인 저로서는 당췌 이해가 안갑니다만...

syo 2019-01-16 09: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우리는 한마리의 닭을 같이 뜯기에 너무 적합한 친구들이네요??

cyrus 2019-01-16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결혼을 한다면 제가 처음으로 알라디너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경험을 할 수 있겠어요. ^^

syo 2019-01-16 09:17   좋아요 0 | URL
세상 일은 모르는 겁니다. syo가 영영 결혼을 못할 수도 있는 것이고, 사이러스님이 처음으로 참여하는 알라디너의 결혼식이 사이러스님의 결혼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Falstaff 2019-01-16 11:00   좋아요 1 | URL
두분 다 혼자 사세요. --;;

syo 2019-01-16 11:1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결혼식장 갈때마다 기혼 친구들한테 백만 번쯤 들은 바로 그 말입니다. 폴스타프님께서 백만 한 번째 ㅎㅎㅎㅎ

cyrus 2019-01-16 14:42   좋아요 0 | URL
저는 책들과 결혼한 몸이라서 책들과 이혼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해요. ^^;;

syo 2019-01-16 16:09   좋아요 2 | URL
사이러스님의 일부다책제를 응원합니다.

다락방 2019-01-16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비커밍, 나도 아직 시작 못했는데.... 아직 도서관은 예약도서여야 하고..... 그런데 쇼님이 시작했다니.....아아 뭔가 분하다............

syo 2019-01-16 09:18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 나는 미셸이 벌써 버락을 만났는데!!

다락방 2019-01-16 09:53   좋아요 0 | URL
치............

반유행열반인 2019-01-1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nl.go.kr/nl/visit/convenient/ceremony_use.jsp
정작 책을 한 번도 빌려보지 못 한 도서관을 빌려 뒤늦은 결혼식을 했었답니다...대관료도 저렴하다 칠만사천원! 게다가 단독 사용! 국립중앙도서관 강추합니다. ㅋㅋㅋ

syo 2019-01-16 09:20   좋아요 1 | URL
아니 ㅋㅋㅋㅋㅋㅋㅋ 이런 뜻깊은 댓글을..... 열반인님께서 말로만 듣던 국립중앙웨딩홀 출신이셨군요!!

반유행열반인 2019-01-16 11:19   좋아요 0 | URL
도서관웨딩홀 동문? 되는 것도 고려해주셔요ㅋㅋ 응원합니다.

목나무 2019-01-16 1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결혼은 못해봐도 연애는 끊임없이 하며 삽시다!!! ㅎㅎㅎ(syo님은 이미 그러고 계신 것 같지만....^^)
한동안 치킨 멀리 했는데 오늘 닭다리 뜯고 싶어 졌어요. ㅋㅋㅋ

뒷북소녀 2019-01-16 13:04   좋아요 1 | URL
아, 언니.ㅋㅋㅋ 꿈에 나타나면 어쩌죠?ㅋ

syo 2019-01-16 16:10   좋아요 0 | URL
무려 치킨을 멀리하실 수 있으셨다는 그 ‘한동안‘이란 얼마 동안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5분?? ㅎㅎㅎ

뒷북소녀 2019-01-1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관심이... 글 기다리겠습니다.

syo 2019-01-16 16:12   좋아요 0 | URL
가지신 귀한 관심을 제가 망쳐놓지 않아야 될 텐데요.... ㅎㄷㄷ.

감은빛 2019-01-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유쾌한 글을 쓰시네요. 닭이 닭목 부위 치킨을 권하고 퍽살을 좋아하는 동지가 되다니. ㅎㅎ

이 구역의 첫번째 미친놈의 영예를 어서 가지시길 바랍니다. ^^

syo 2019-01-16 16:14   좋아요 1 | URL
글만 보면 벌써 미친놈 같지요?? ㅎㅎㅎ
제가 치킨을 줄이고 줄이다 결국은 끊어야 지구를 위해 뭐라도 하는 셈일 텐데, 죽는 게 더 빠르겠다 싶을 정도로 치킨을 좋아하여......ㅠ

감은빛 2019-01-16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설마요! 어서 결혼하시라고 말씀드렸어요. 하고 싶은 일은 어서 하시는 것이 좋으니까요. 물론 결혼 후에 차라리 하지 말났다면 하는 후회는 지금 하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ㅎㅎ

치킨을 좀 드시는 것이 뭐 지구애 그리 해가 되겠습니까? 치킨 산업이 골목상권마다 뻗어 있는 현실으 문제겠지요.

드시고 싶을 때는 드시되, 퇴직자가 치킨집 밖에 열지 못하는 현실을, 닭이 좁디좁은 닭장에 갇혀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희생되는 치킨 산업을 바꾸는 고민과 시도를 같이 하시죠. ㅎㅎ

syo 2019-01-16 16:26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의 말씀은 어서 결혼하라는 뜻으로 오해없이 잘 이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맨 앞의 한 문장을 먹어버려가지고 오해를 양산했네요 ㅎㅎ

배고플 땐 눈이 벌개져서 치킨 시켜놓고 배부를 때쯤 되면 가증스럽게 지구 걱정하는 척 하며 양심도 배불리려는 시도를 하는 중입니다 ㅜㅠ 감은빛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2019-01-16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6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1-1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이상해 쇼님 글이 안 올라와 그래서 찾아봤지 근데....이거 언제 썼시유? 내 생일날 왜 이 글이 난 안 보였지? 아하~내가 늦게 접속해서였군! ㅋ인제부터 읽기 시작(지금은 읽기 전임)

카알벨루치 2019-01-18 16:10   좋아요 0 | URL
난 닭다리파 vs 쇼님은 터벅살파, 그림 좋네! 닭은 다리가 🍗

syo 2019-01-18 17:3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모 드라마에서, 퍽퍽살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이 닭을 함께 먹고 싶어한다는 식의 대사가 등장하였는데, 쓰임을 인정받는 소수자란 행복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닭 한마리 온전하게 뜯어봐요 우리 ㅎㅎ

카알벨루치 2019-01-18 17:59   좋아요 1 | URL
소수의 소였구만!!!ㅎ

노란가방 2019-01-1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글 자체가 워낙 훌륭한 드립으로 가득 차 있어서
뭐라고 덧붙일 수가 없네요..ㅎ

syo 2019-01-18 23:39   좋아요 0 | URL
라고 덧붙여주셔서 저는 신났습니다 ㅎㅎㅎㅎ
 


결손缺損


 

1

 

위안이 필요한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인간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있다. 숨 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는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그렇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위안이 될 만큼 좋은 이들의 부재를 마주하는 날이 더욱 그렇다. 부재 전에 받았던 위안의 부피만큼, 부재 후에 남은 이들은 흔들려 우는 듯하다. 들리는(보이는) 울음과 그렇지는 않은 울음의 총량으로 미루어 부재 전 그 사람의 크기와 질량을 생각한다. 그 언젠가 몇 줄의 글로 주고 받은 짧은 대화, 결국 그저 이름만 주고받은 것과 마찬가지겠으나, 이미 슬픔의 거대한 그물망 안에 들어선 이의 마음에는 이름만으로도 구멍이 뚫렸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분이 떠나셨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며칠, 그 결손의 크기만큼 이 공간이 젖고 굽고 휘었음이 보인다. 얼마나 조용히 큰 분이셨던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인사가 잘 들리는 곳에, [그장소]님이 편안히 계실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지식과 지위가 부여한 인공적 자태보다환경과 행동이 만든 은근한 자태를 가진 이를 사랑하고도 두려워한다그가 가진 평정과 침묵,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얼굴에서 밝고 개방적이며생기 넘치는 기운이 느껴지고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그런 침묵"(<침묵의 기술>)은 공간과 함께 빛이 난다이 침묵을 아는 이라면 건축과 환경의 획일화를 혐오하고물질의 외면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어떤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각자 느낀 진실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말들이 바로 글과 공감의 힘이다그래서 글이 태어나고 음악은 흐르고 건축은 세워진다자신이 느낀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할 때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마음은 일렁거린다.

김현진진심의 공간, 43 

 

 

 

2



문학작품을 읽을 때뿐 아니라 연구나 평론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연구나 평론을 위해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입니다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읽은 것은 전부 '중심사상', '단락의 대의같은 것들이었습니다이런 방식으로는 작품을 훼손할 수밖에 없지요독서는 무엇보다도 뭔가를 느끼는 것이어야 합니다이러한 느낌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즐거운지 안 즐거운지는 다음 문제지요작품을 읽고 나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고즐거움을 가져다주든 분노를 가져다주든 이런 느낌은 전부 중요합니다그 뒤에 우리는 왜 즐거운지왜 분노를 느끼게 되는지왜 마음에 안 드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연구는 반드시 2차적인 것이어야 하고 반드시 독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162

 

요는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라는 말 같다.

 

굉장히 많이 읽는데도 굉장히 안 읽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많이 읽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건 답도 뭣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뭐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계화하면 생산량은 확실히 올라가지만 생산량이 올라가도 기계가 기쁠 일은 아닌지라, 빨간 꽃 노란 꽃이 책장 가득 피었는지, 하얀 나비 꽃나비가 책장 위로 나는지 마는지 나는 모르고 그저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갈 뿐인데......

 

작품을 읽고 나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고라는 대목은 뼈를 때린다. 마련이라는데, 마련일 때가 반이고 안 마련일 때가 반쯤 있었다.

 

느낌 없는 읽기는 읽기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너무 나이브해 보이기도 하고, 자신만의 읽기를 단단히 정립한 사람들이라면 반론의 여지도 있겠으나, 그냥 한 번 믿어보자. 한글을 갓 뗀 꼬꼬마 syo는 책을 읽으면 그 책에 실린 활자보다 더 많은 양의 이야기를 떠벌리는 말 많은 아이였다는 증언이다. 그 꼬맹이도 뭔가를 느꼈던 것 같다.

 

하나만 줘도 안 잡아먹겠다고 해 놓고 떡을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뺏어먹고 결국 엄마까지 잡아먹은 호랑이 놈은 당최 왜 다이렉트로 엄마를 잡아먹지 않았는지, 어차피 엄마를 잡아먹고 나면 주인 없는 떡은 그냥 호랑이 차지일 텐데 왜 굳이 희망고문을 한 건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인 건지, syo(8)이 사촌형(13)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형이 한 대답을 정확히 기억한다. ‘원래 맛있는 거 맨 나중에 먹는 거 아이가?’ 이는 syo의 조숙했음과 형의 되바라졌음을 증거하는 사건으로서, 아직도 명절이면 되풀이되는 레퍼토리의 하나다. 하여간, syo는 예전에, 느낄 줄 아는 꼬맹이였음이 틀림없다. 걔가 자라서 내가 되었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어.

 

, 그리고 위화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신다. 이 말씀도 관절을 격하게 꺾는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어느 셰프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그가 제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나요?"

  제가 대답했지요.

  "좋은 작가가 되고 싶으면 먼저 훌륭한 독자가 되세요."

  그가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독자가 될 수 있나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평범한 작품 말고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으세요오랫동안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은 사람은 취향과 교양의 수준이 높아져서 글을 쓸 때 자연히 스스로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게 되지만오랫동안 평범한 작품만 읽은 사람은 취향과 교양 수준도 평범해져 자기도 모르게 평범한 글을 쓰게 되지요남들의 결점은 나와 무관하지만 남들의 장점은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셰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군요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좋은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저는 종종 제 수하에 있는 요리사들을 다른 음식점에 보내 식사를 하게 해서 각자의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합니다항상 다른 음식점의 음식이 맛없다고 말하는 요리사는 발전이 없고항상 다른 음식점의 음식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셰프는 크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282-283 

 

 

3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125


남을 가르치려 드는 행위가 깔고 있는 전제는 두 가지다. ‘남은 모른다나는 안다’. 이 두 가지 전제 가운데 실제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전자 쪽이겠지만, 사실 자꾸 남을 가르치려 드는 짓 자체를 끊어내는 데는 후자 쪽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런데 관람석에서 지켜보면 링 위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는 명치에 첫 펀치를 세게 얻어맏고 남은 모른다를 수정, ‘너는 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추가타를 맞으면 마지못해 ‘A도 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라운드가 계속 이어지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연속공격에 ‘B도 안다’, ‘C도 안다차츰차츰 시인하게 되는데, 그러다 ‘70억 지구인이 모두 안다까지 인정할 때쯤에는 이미 그는 그로기 상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한 방이 그의 턱을 강타하면,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내가 잘못 알았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 ‘나는 모른다는 말은 청문회장이나 법정 밖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렵지만 들어도 믿기 어려운 말이 되었고, 우리는 그 말을 대신해서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이나 그와 유사하게 변형된 일종의 예비동작들이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여성들은 결국 이런 말을 듣는 셈이다. 당신은 모른다. 당신조차 당신은 모른다. 당신은 내가 안다. 그런데 남자들이 여자들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학문영역에 (의미 있는 수의) 여성 참여가 시작된 것이 기껏해야 100년 안팎이다.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고 돌을 갈아 주먹도끼를 만들던 기술을 학문의 시작이라고 보면, 699900년 동안 학문은 남성이 독차지한 영역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거주지를 자신의 신체 구조와 동선에 맞게 편집하는 본성을 지닌 동물이다. 학문이라는 집이 세워진 이후 오늘까지의 연대표 상에서 99.9857%에 해당하는 긴 기간을 독점 거주했던 남성이, 몇 만 몇 천, 많이 양보해서 몇 백 년 뒤쯤에는 올 수도 있는(그렇게 예측했던 이는 거의 없었을 것 같지만) 여성의 입주를 기다리며 젠더편향 없는 구조로 집을 꾸몄다고 믿는 것이 699900배 비합리적이다. 때로는 편향된 인간이 편향을 만들었을 것이며(기원전의 공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오늘날 ()구글의 제임스 뭐뭐라는 엔지니어에게로 이어지는 끈질긴 계보), 또 때로는 편향이 인간을 편향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에 닭이었는지 달걀이었는지 모르겠지만(사실 닭입니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아주 쉽게 치킨을 시켜먹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학문 자체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편향성은 남자로 하여금 여자들은 모른다고 한 점 의심도 없이 잘못 믿는 일을 어쨌든 돕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 정치, 철학,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예술, 심지어 군사학까지. 다양함을 넘어서 잡다하다 싶을 만큼 많은 분야를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것은, 모든 분야의 학문 속에 숨어 있는 부조리한 편향을 잡아채 뽑아내야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일종의 군대다. 여성학자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개별 학문 안에서 각개전투를 펼치기에 699900년짜리 철옹성은 너무 견고하므로, 그 두터운 성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천막을 치고 연합군을 형성한 것이다. 남자들 주머니를 털어 먹으려고 만든 군대가 아니라.

 

쓰다 보니 분위기 타서 단언하는 말투가 되었지만, 당연히 제 개인 견해입니다. 제가 혼자 뚝딱 뚝딱 만든 견해는 당연히 아니겠지만요.

 

 

 

--- 읽은 ---

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 / 김민주 지음

철현쌤, 공무원 연봉 진짜 얼마예요? / 조철현 지음

밥보다 일기 / 서민 지음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지음 / 김명남 옮김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 마쓰무라 게이치로 지음 / 최재혁 옮김

 

 

--- 읽는 ---

인생 직업 / The School of Life 지음 / 이지연 옮김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지음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 위화 지음 / 김태성 옮김

진심의 공간 / 김현진 지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용호 옮김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지음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단 하나의 문장 / 구병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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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나무 2019-01-1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위대한 작품이란 결국 고전을 말하는 거겠지요.
저 역시 느낌을 잃어버린 채 독서를 해온 것 같아 제 독서행위를 되돌아보게 되네요.
덕분에 올해 독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syo님~ ^^

syo 2019-01-14 10:36   좋아요 1 | URL
그런 것 같죠?? 결국 고전인건가.....
죽을 때까지 욜심히 읽어도 기껏 몇 만권이면 땡이잖아요.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막 읽었다가 후회하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ㅠㅠ
 
보통의 식탁 - 조동범 산문집
조동범 지음 / 알마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여느 때처럼 정리하고 돌아와 당신은 저녁 식탁을 차린다. 어제 꺼냈다가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어 놓은 반찬은 그대로 식탁에 올려놓는다. 그저께 부친 계란말이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는 당신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계란말이는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그 빈자리는 지난 주말 당신의 어머니가 볶아 보낸 멸치 반찬으로 메운다. 밥은 새로 지었다.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며 당신은 오늘을 생각하고 어제를 생각하고 이내 내일을 생각한다. 모든 것이 닮아 있었다. 어제를 오늘에 붙여 넣는 삶이 그저 깜깜하게만 느껴졌던 시기가 당신에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즘 당신은 가끔 생각한다. 오늘 같은 내일이 기다린다는 사실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렇게 느끼는 것을 보면 나도 행복이라는 정체 모를 존재의 그림자쯤은 밟고 선 것이 아닐까 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산다는 것은 가령,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람은 식탁을 차린다는 그 거대한 일상성에, 어제의 계란말이가 오늘의 멸치볶음으로 바뀌는 정도의 소소한 변화가 버무려져 만들어지는 한 끼 식사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식탁을 둘러싼 이야기는 우리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삶의 진실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거나 홀로 식탁에 앉아 텅 빈 벽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진짜 모습이다우리가 삶에서 얻고자 하는 깨달음은 바로 그런 순간 느끼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비롯된다삶이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를 만든다. _ 189 

 

그래서 당신은 늘 타인의 식탁이 궁금하다. 당신의 오늘이 당신의 내일과 닮았듯이, 당신의 오늘이 타인의 오늘과 닮았는지를 당신은 늘 알고 싶다. 이 저녁 식탁에 면한 거대한 벽을 넘어가면 건너편 가정에도 누군가의 식탁이 있을 것이다. 그 위에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미소를 생각하며 끓여낸 미역국이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려 사 들고 온 치킨이나 족발 같은 것들이 놓여 있을 수 있다. 당신의 입에 젓가락이 물려 있는 지금 이 순간 벽 너머의 누군가는 숟가락을 물고 있을 것을 생각하는 당신은 타인의 식탁이 몹시 궁금하다. 그 식탁을 둘러싼 사연을, 식탁 위에 올라와 반찬과 함께 체내 흡수되는 말들과, 차마 말해지지 못하고 냉장 보관되어 다음 식탁까지 유예되고 마는 말들을 당신은 알고 싶다. 식탁을 차린 이의 마음과 식탁을 받는 이의 마음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되어 만났는지 당신은 알아야겠다. 설령 그 식탁에 앉은 이가 단 한사람뿐일지라도, 꼭 지금의 당신처럼.

 

당신의 식사 시간은 길어야 십오 분을 넘기지 않았다숟가락을 들고 묵묵히 음식을 먹는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서관 식당에서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고요하고 쓸쓸하다어느 밤창밖으로 비가 왔는지 눈이 내렸는지 당신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여전히 혼자 밥을 먹을 것이다당신 앞에 놓인 빈 그릇이 서늘하게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당신의 저녁이 쓸쓸하게 저문다그때 창밖으로 비가 왔는지아니면 눈이 내렸는지 당신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_ 28-29

 

이웃의 문을 두드려 당신의 식탁은 어떻습니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라서 당신은 결심한다. 타인의 식탁을 당신의 손으로 만들어보기로. 당신의 손은 밥보다 글을 잘 짓는 손이라서 당신은 결정한다. 식재료 대신 단어를 손질해보기로. 당신은 깨끗이 치운 식탁 위에 하얀 종이 한 장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식탁의 주인들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혼자다. 4인용 식탁을 혼자 쓰는 남자를 만든다. 그는 오래전 헤어진 애인을 잊었는지 잊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다. 당신은 지난여름, 노르웨이 여행에서 계획 없이 들렀던 현지 식당에서 받았던 감동을 떠올린다. 여행지의 현지 식당을 들르는 데서 여행의 의미를 찾는 익명의 여행자를 만든다. 그는 할 말이 많다. 당신이 그 식당에 들어갔을 때, 이주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당신은 고국을 기억하는 일이 힘인지 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고단한 이주노동자를 만든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한다. 일찍 죽은 친구의 장례식장, 어쩐지 씁쓸했던 서른 살의 생일 케이크, 한국에도 실제로 있을 거라 믿고 찾아다녔던 일본 드라마 속의 심야식당, 선임병의 괴롭힘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어느 군인에 대한 뉴스 같은 것들을 계속 생각한다. 생각의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 백지 위로 볼펜을 휘갈겼고, 마침내 40번째 이름을 적으며 당신은 펜을 내려놓는다. 밤이 깊었다. 그러나 당신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당신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지만 다음을 위해 아쉬움을 담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차창 밖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휴일 밤이 펼쳐진다나는 문득 내일쯤 세차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세탁소에 들러 맡겨놓은 세탁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어느덧 밤은 완벽하게 어둠을 풀어놓고집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노인 지구본을 돌리며 리투아니아아이슬란드비엔나아른험 등의 낯선 이름을 불러본다그러나 그곳들은 너무 멀리 있다닿을 수 없는 세계처럼 낯설게그러나 그 어떤 그리움처럼 있구나아주 먼 그곳에. _ 45

 

당신은 종이 위 40개의 자아를 내려다보며 그 안에 당신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를 생각한다. 40명의 주인공들은 당신의 조각인가? 그렇다. 40개의 조각을 모두 합치면 온전한 당신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은 이 40개의 자아를 모두 사랑하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온전한 당신도 아니고 온전한 사랑도 아니라면 당신이 만든 40개 자아의 현실감이나 생동감은 그만큼 부족한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이 낳은 인물들이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리라 확신하는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당신의 전략은 무엇인가?

 

나는 문득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당신들의 어깨라는 것을 깨닫는다당신들의 어깨는 움츠린 듯 힘없이 나를 등지고 있다당신들의 어깨는 고단한 이민자의 삶을 이야기하면 흐느끼고 있는 것 같다저물녘 해변과 퇴근길의 적막함을고요하게 잠든 아이들을돌아갈 수 없는 그 어떤 날들을 말하려는 것만 같다당신들의 어깨는 다른 듯 삶았다이제 곧 당신들의 어깨는 식당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겠지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는 당신들은 이제 마지막 술잔을 끝으로 오늘 밤을 마무리하려 한다술자리의 왁자함이 잦아들고 적막함이 밀려든다당신들은 저편의 테이블에서나는 이편의 테이블에서... 그렇게 오늘 밤이 침몰하기 시작한다. _ 55

 

당신은 당신이 만든 40개의 자아를 당신이라고 혹은 라고 부르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읽는 이의 마음을 직접 두드려 여는 좋은 전술이라고 당신은 믿는다. 일리가 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이라 호명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당신이라 호명됨으로써 당신이 건넨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한다. 당신이 40개의 자아를 만들어 낸 것 역시 신통한 작전이다. 우리가 당신의 호명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40배로 늘림으로써 당신은 우리에게 40배 촘촘한 그물을 던진 셈이다. 이 중 최소한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생각을 당신은 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합리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겉보기엔 굉장히 다양한 방식의 삶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40개의 올가미만 던지면 그 안에 우리 모두를 잡아넣을 수 있을 만큼 톤다운 된 삶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당신은 어쩌면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당신의 삶이고, 당신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라는 뻔하고 뻔뻔하지만 울 뻔한 말을.

 

보름과 그믐을 반복하며 시간이 지나간다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이십 대가 지나가고 서른이 펼쳐진다그러나 이십 대의 마지막 날인 어제와 서른의 시작인 오늘은 아무 차이도 없는 어제와 오늘일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오늘 밤이 지나가면 당신은 이십 대 때보다 조금 더 멀리 나아가겠지탁자 위에 놓인 생일 케이크가 물끄러미 엄마와 당신을 바라본다텔레비전 불빛에 드러난 엄마의 얼굴이 왠지 더 친숙하다당신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한 엄마의 얼굴이 텔레비전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 서글프게 일렁인다오늘은 당신의 서른 번째 생일이다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상현인지 하현인지 알 수 없는 오늘 밤 달빛이 서른이 된 당신과 삼십 년 전 엄마의 얼굴을 희미하게 내려다본다. _ 83

 

당신이 만든 40개의 자아를 내가 끝까지 40명의 주인공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사과할 일인지 아닌지를 나는 계속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쓴 40개의 짧은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실망 없이 실감한다. 우리로확장시키는 것은 당연히 섣부른 이야기겠으나, 그래도 무리하여 말해 본다면, 우리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단지 주인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다. 단지 우리 식탁의 주인일 뿐이다. 우리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인생이나 행복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그 위로 달려가기 위해 깔아놓은 철길이 아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일은 투여하는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항상 던져주지는 않는다. 행복은 때론 행복할 자격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품에 안기거나, 더 행복할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 쓸데없이 한 스푼 더해지느라 올바른 자리로 찾아드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행복의 도움 없이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차리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식탁을 차린다. 가끔 마지막 달걀로 만든 달걀찜을 홀랑 태워먹기도 하고, 김치와 물김치와 김치찌개를 한 상에 올려야만 하는 희한한 날도 있으며, 또 아주 가끔은 무슨 조홧속인지 상다리가 휘어지게 갈비를 뜯었는데도 냉장고에는 여전히 양념갈비가 잔뜩 절여져 있는 복된 날이 오기도 한다. 우리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을 한다. 이 식탁을 차리기 위해 통과해왔던 사건과 감정의 고리들이 반찬으로 차려져 있고, 우리는 그걸 집어 오늘을 배불리고 내일을 준비한다. 어디를 어떻게 무엇이 되어 지나왔든, 일단 식탁이 차려지면 우리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그 식탁의 주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식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식탁 앞에서 행복을 생각하는 일이 식탁을 서운하게 하지 않도록, 식탁 앞에서만큼은 행복을 식탁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불러도 좋겠다.


여기식탁이 있다수많은 식탁 위에는 분주했던 월요일 저녁이 웅성거리기도 하고주말 오후에 한가롭게 내리쬐는 햇살이 서성이기도 한다식탁 앞에서 당신들은 사랑이나 슬픔 혹은 고단한 저녁에 깃든 쓸쓸함과 마주하며 지나온 날들을 추억하기도 한다식탁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언제나 따스한 기억으로 남는다그것이 설령 슬프고 서러운 기억일지라도 식탁을 둘러싼 이야기는 비극만을 풀어놓는 법이 없다슬픔조차 추억이 되게 하는 시간그것이 바로 식탁이 주는 힘과 감동이다. _ 10

 

당신이 만든 이야기로 저녁상을 차렸다. 새벽까지 먹었다. 나쁘지 않은 식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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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읽고나니까 오늘 저녁 밥상에는 계란말이와 멸치볶음을 같이 올려놓고 싶어졌어요.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러운 저녁 밥상을 차려 혼자여도 맛있게 먹고 싶어졌어요. ^^
늘 그렇듯 밥상 맞은편 티비에서 나를 마주한 고로 아저씨와 각자의 식사를 즐기면서요.~

syo 2019-01-11 16:10   좋아요 1 | URL
우리 모두의 밥 친구지만 누구의 밥 친구도 아닌 고로 아저씨.....

설해목님의 오늘 저녁 행복한 식탁을 기원할게요 ㅎㅎㅎ

2019-01-11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1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19-01-1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syo님, 올해 목표하신다던 ‘한 권을 깊게 읽기‘를 실천하신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syo 2019-01-11 17: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닙니다. 깊게 읽지 않고 평소처럼 읽었어요^-^ 그냥 리뷰를 하나 써 본 것 뿐이지요.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9-01-1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 님의 인기는 굉장히 두루뭉실하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라는 마인드‘죠.
이 마인드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조금 비열하기는 하죠. 이런 식으로 표를 모으는 게 정치인이듯이
쇼 님도 그런 것을 향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그냥 좆같은 것에 대해서는 욕을 하세요...
너무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이 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평소 느낀 생각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1-11 17:08   좋아요 0 | URL
아마. 이 댓글에 대해서도 쇼 님은 굉장히 달콤한 덧글을 작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 댓글 읽고 당황하셨죠 ? ㅎㅎㅎㅎ 알리딘의 재롱둥이가 되지는 마세요.

syo 2019-01-11 17:18   좋아요 6 | URL
어제도 다른 데서 비슷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나쁜 말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인데 후지다고 해서 놀랐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오프라인에서는 호불호가 되게 쎈 인간이면서, 온라인 공간에서는 말씀하신대로 두루뭉수리하게 지나가는 일이 잦은 것 같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까지는 아니고 ‘분란 만들면 귀찮잖아‘ 정돈데 사실 그 두개는 별로 큰 차이가 없긴 하지요.

그게 비열한 마인드라는 말씀에 공감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합니다. 말로는 이게 옳다 저게 그르다 해놓고 막상 행동은 흐지부지하게 하니까요. 곰발님이 그렇게 읽으셨다면 제대로 읽으신 거고, 제대로 읽으신 거라면 관심있게 읽어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대응하는 것도 불편하시겠지만, 좆같은 것에 대해서는 욕을 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곰발님 말씀이 좆같지 않아서 욕하지 않는 거니까 이해하세요 ㅎㅎ

소심하게 태어났고 소심하게 자라나서 미움받는 일을 굉장히 겁냅니다. 인기까지는 욕심내지는 않지만 미움받는 일에는 상처를 크게 입을만큼 멘탈이 두부라서,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게 본심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거 신경쓰지 않고 좋은 것에 칭찬하고 싫은 것에 욕을 날리는 곰발님이 항상 부럽고 멋있습니다.

좆같은 것에 대해 욕하는 제게 맞는 방법을 찾도록 노력해 볼게요. 저한테 그게 필요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1-11 17:34   좋아요 1 | URL
언제부터인가 쇼 님은 알리딘의 재롱둥이가 되었어요.
의성어와 의태어 남발하면서 누님들 사랑 받는 것에 굉장한 희열을 느끼는 듯합니다만...
아니, 왜 그러세요 ? 저는 그냥 쇼 님이 좋아요 클릭 얻기 위해 희노애락 중에 희‘를 남발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게 굉장히 추합니다... 물론 인기쟁이 쇼 님을 공격해서 가뜩이나 알라딘 밉상인 제가 받을 타격이 더 심하긴 하겠지만... ㅎㅎㅎㅎ 뭐. 초심을 찾으세요.. 내 지적질이 존나 역겹겠지만...

syo 2019-01-11 17:55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완전히 틀린 말씀 아니시구요.
평소 느낀 생각이시라니 많이 참다 참다 꺼내신 말씀일텐데요.

저는 곰발님 많이 좋아합니다. 제가 미움받기 싫은 대상에는 당연히 곰발님도 포함되어 있구요. 그건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서 하신 말씀이 각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표현하신 것처럼 보였다면, 추하다는 표현도 별로 부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구요.

해주신 말씀이 ‘공격‘이라 할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곰발님께 무슨 타격이 있겠어요. 그럴 만한 일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런 거 1도 신경 안 쓰시잖아요. 하셔야 될 말씀이라 생각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하시는 거 다 압니다ㅎㅎㅎ. 일러 주신 대로 초심 생각 많이 하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1-1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포일러를 되게 싫어해서 발췌 부분은 안 읽고 리뷰어의 코멘트만 봐요. (그러면서 저는 정작 따옴표로 스포일러 남발ㅋㅋ내로남불) 결국 안 볼 책들도 그래요. 이 리뷰도 늘 그러듯 syo님 목소리만 골라 읽고 난 소감은...짝짝짝 내 맘대로 이 달의 우수 리뷰로 선정하였습니다. 누구는 그 많은 책을 집어 먹고 나서 집요하게 파고 드는, 그러면서도 깨끗하고 정리된 문장들을 쏟아 놓는구나 했어요(syo님 얘깁니다). 반면에 그만큼 집어 먹고도 그저 그런 식상한 말들을 풀어 놓거나 (저처럼) 개똥 같이 마구 갈겨 놓았네 하는 글도 많이 보네요. 지적하고 비판하고 친밀한 척 걱정하는 척 하는 것은 쉽지만 그런 것들 안 하면서 남에게 리액션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걸 느낍니다.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더 한 것 같습니다. 그 어려운 걸 하고 계시니 저는 그저 리스펙트...하면서 세상의 균형을 위해 계속 (개똥같이) 이 모냥으로 살겠습니다. (말은 이래 놓고 감화되어서 점점 착하게 읽고 쓰려고 애쓰는 중인 듯...)

syo 2019-01-11 21:0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칭찬해 주신 만큼의 대단한 글도 아니고, 역시 칭찬해 주신 만큼의 대단한 인간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읽던 대로 읽고 쓰던 대로 쓴다고는 하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는 방향으로 자기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열반인님의 마음에 드는 글이었다는 사실로 이 글은 크게 만족합니다. 제게도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썩 흡족한 글이었거든요. 짧은 이야기들을 40개 모은 책이고, 제가 옮겨 적은 문장이 크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제가 적은 것보다는 훌륭한 글들이 실려 있는 책이니, 일독하실 만한지 발췌 부분을 통해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열반인님이 제가 쓰는 것들을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성의있게 댓글을 달아주시는 것을 압니다. 항상 힘이 납니다. ㅎㅎㅎㅎ 저도 열반인님께 그런 서재친구가 되면 좋겠어요. 감화 같은 건 넣어두시구요. 지금 열반인님의 글이 얼마나 맛깔나게요 ^-^

북다이제스터 2019-01-1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지만 제겐 이렇게 솔직한 글 쓰기가 참 어렵더라구요. ^^ 부럽고 항상 응원합니다. ^^ 화이팅^^

syo 2019-01-11 21:04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북다님의 글이야말로 항상 제겐 부러운 글입니다. 잘 읽고는 댓글도 하나 없이 훌쩍 가버려서 항상 죄송스럽습니다. 이렇게 저한텐 응원 말씀도 해주시는데 ㅎㅎㅎ

원더북 2019-01-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자주 안 달지만 오늘은 꼭 보태고 싶네요. syo님의 글은 쎈 척 안 해서 좋습니다. syo님만의 방식이 있는걸요^^

syo 2019-01-11 23:12   좋아요 1 | URL
syo의 글이 이렇다 말씀해 주실 수 있을만큼 읽어주신 것 자체가 저는 감사합니다. 그게 힘이 됩니다^-^

원더북 2019-01-11 23:34   좋아요 1 | URL
syo님과 다른 몇몇 이웃님들의 좋은 글들 읽으며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읽기만 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저도 뭔가 읽을 만한 글로 보답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자주 글을 못 써서요^^; (아~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비루한 인생;;;) 저도 syo님 글 읽으면서 힘내고 있습니다. 제가 감사해요^^

카알벨루치 2019-01-1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자요 Syo님! 이불 걷어차지 말고, 바지 벗지 말고 굿밤!^^

syo 2019-01-12 00:13   좋아요 0 | URL
어제도 벗었더라구요... 벗어서 던지진 않고 발목에 걸치고 있던데ㅎㅎㅎㅎ

카알님도 좋은 꿈 꾸세요^-^

카알벨루치 2019-01-12 00:33   좋아요 0 | URL
난 쇼님의 이전모습 보다 지금 모습이 더 익숙해서 그런데...다양한 얼굴을 가진 분이시구만요 포커페이스의 달인 이시네! ㅋㅋ

syo 2019-01-12 00:4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전 모습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지금 모습만 있는 건데, 단지 이전부터 되고 싶어했던 모습이랑 지금 모습이랑 사이의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죠 뭐ㅎㅎㅎ

아직 여러모로 미흡합니다, 제가요ㅠ

2019-01-12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3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3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