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꾸미기 위해 역사를 오남용하지 말 것

 

 

1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이, 남루한 인생에도 생일은 온다. 따박따.

 

 

 

2

 

어른이 되는 일, 그것은 인생 한마당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서글픈 진실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그걸 모르는 상태로는, 팔자주름이 알바에서 계약직,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될 때까지 꾸역꾸역 살아봤자 어엿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 보험도 안 되는 중2병을 고2때까지 앓았던 syo에게 어른의 삶이란 한없이 요원한 것이었다. 당시 syo가 보건대, syo는 도저히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래야 아닐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잘 생기고(아니다), 이렇게 똑똑하고(틀렸다), 이런 역경 충만한 유년기(고만고만했다)를 보내면서도 착한 심성(아이고, 멍청한 놈아)을 유지하는 것은, 내가 책을 많이 읽어서(정석을 읽고앉았으니 성적이 안 나오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격이 저절로 도야된(맞고 싶냐?) 탓인가. , 젠장, 거기다가 글까지 잘 쓰다니(염병하네), 뭐지? 난 왜 이렇게 완벽하지?(, 정말 뭐지, 이 새끼는....)

 

 

 

3

 

요즘이야 핸드폰이 워낙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2019년이 아니라 2019세기의 추석 연휴까지 알아낼 수가 있지만, 이 단락에서 하려는 짧은 이야기는 핸드폰은커녕 무선 전화기조차 산업혁명 대접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syo가 하는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MSG가 참 풍부하다. 취향에 맞게 거품을 걷어내고 드시기를 추천합니다.

 

한 해가 마무리 될 때쯤이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입수된 새해 달력이 집에 쌓인다. 일단 달력이 손에 들어오면 설과 추석 연휴가 어떤 모양새로 포진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당연히 첫 번째 할일이었고, 그러고 나면 내 생일이 무슨 요일이 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4월로 되돌아가곤 했다. 언제부턴가 내 생일 아래에 臨時政府樹立記念日이라는 기묘한 상형문자가 찍히기 시작했다.

 

아빠, 여기 이상한 거 적혀 있어. 내 생일 왜 이래? syo가 물었다. 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독을 시작했다. 보자..... .......립기념일? 시정...... 시정부..... , 임시정부수립기념일! 아빠가 신이 났다. 그렇지, syo엄마, 이거 임시정부수립기념일 맞지? syo엄마는 꿀도 안 먹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빠, 임시 그게 뭔데? 이번 벙어리는 아빠였다. 아놔, 이 엄마 아빠가 나 몰래 꿀 먹고 다니나? , 임시정부 좋은 거지, 훌륭한 거지. 그 일제시대에..... 일제시대가 뭐야? , 일본 놈들이 막 쳐들어와서..... 아빠, 나 그거 알아. 이순신 장군님이 물리쳤잖아. 거북선! 거북선! 아니, 그때가 아니라..... 그때가 아니야? 그럼 일본 놈들이 또 쳐들어왔어? 아빠, 일본 놈들은 왜 자꾸 쳐들어와, 쳐들어오길? 걔넨 원래 그래...... 그럼 일제시대도 이순신 장군님이 물리쳤어? 아니, 일제시대는 그러니까 김구...... 아빠, 김구는 뭐야? 아빠, 근데 나 요즘 학원에서 구구단 가르쳐준다? 이일은 이 이이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오 십오..... 하여튼 임시정부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으려고 만든 훌륭한 단체야. 꼭 알아야 돼. 아빠, 그럼 임시정부가 좋은 거야, 정부가 좋은 거야? 다시 꿀 한 숟가락. ...... 아빠, 임시반장이 좋은 거야, 그냥 반장이 좋은 거야? 나는 반장이고, 영식이(가명)가 임시 반장이었는데......


얼추 저런 분위기였을 것이다. 아빠는 대충 알고, 엄마는 주방으로 슬쩍 물러나고, 동생은 배밀이를 시작하고, syo는 알고 싶은 것은 산더민데 구구단을 외우느라 긴 세월을 탕진하고...... 아름다우나 혼탁한 가정환경이었고, 구구단을 외우기 전에 이순신은 알아도 구구단을 외우고 나서도 김구를 모를 수도 있는 사회 환경이었고, 인터폰과 인터체인지는 있어도 인터넷은 없던 정보 환경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실체는 그저 희미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임시 정부는 수립기념일이 달력에 떡 박힐 만큼 좋은것이고, 그 좋은 날이 내 생일과 같은 날이라는 사실만이 뜻깊었다. 그것은 아무 날도 아니다보니 뜻 없는 甲午, 丙申 따위로 달력의 빈 공간만 채우는 날짜에 태어난 범인들과 syo를 차별화해주는 역사적 증거물이었다.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syo는 누군가 생일을 물어오면 명확한 날짜 대신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라고 알려주곤 했다. syo, 니 생일 언젠데? 임시정부수립기념일. ......? 임시정부수립기념일. ......그게 언젠데? ......? ......? ......모르냐? .......? ......모르네, 너 모르네. 한국 사람이 되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모르네, 저놈 저거. ......그래 모른다. 쯧쯔, 젊은이여, 널 보니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될려는지를. 뭐 이런 식이었다.

 

2병이 한참 절정일 때는 더욱 심각했다. 내 생일이 임시정부기념일이어서 내가 위대해지는 것을 넘어서, 마치 수립기념일이 내 생일이이서 임시정부가 위대해지는 것처럼 굴었다. 413? , 그날은 내 생일이고, 겸사겸사 임시정부도 수립되고 그랬지. 어느 해는 총선일까지 겹쳐 빨간 날 자격까지 받았는데, , 그때는 정말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였다. 이번 본인의 탄신일은 때마침 휴일이라 자네들이 참석하기가 참 맞춤할 걸세. ,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소소한 행사가 있다고 하니, 참석하기 전에 다들 가서 한 표씩 권리를 행사하고 오시게나. 본인의 탄신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의 안위 역시 그에 만만치 않게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아차차, 자네들은 아직 투표권이 없지?(지는) 그러면 그냥 휘 한번 둘러보시고 바로 걸음 하시게나. 주차 사정이 넉넉지 못하니 왠만하면 대중교통들 이용하시고. 아차차, 자네들은 아직 면허증이 없지?(면허증은커녕 민증도 없다허허허.

 

 

 

4

 

이런 종류의 만행들은 물론 살짝(살짝?) 기분 나쁠 수는 있었겠으나, 결국 친구들에게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라는 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정책시행자의 의도를 제 멋대로 해석하는 소수 반골들이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syo, syo의 생일이 임시정부수립기념일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syo의 생일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2018년까지는 확실히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2019. 학계의 누적된 연구 결과와 그에 따른 지속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는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수립기념일을 기존의 413일에서 411일로 정정 발표하고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옳고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으면서 스스로를 반인반신으로 만들기 위해 그 권위를 이용하려 들었던 syo는 마침내 역사의 철퇴를 맞았다. 411, 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맞춰 전혀 예상치 못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몇 개 받고 만 것이다. 무려 20년에 걸쳐 만들어 낸 자승자박이다.

 

 

 

5

 

그러나 지금은 임시정부수립일을 빼앗겨 생일마저 빼앗기겠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않지 흐릿해지지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김사인화양연화(花樣年華)」 부분


때로는 한계가 가능성을 이겼고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했다어쩔 땐 '이제 그만할까'하는 마음이 들었고어쩔 땐 '그래도 계속해 봐야지'하는 마음이 들었다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2년이 훌쩍 지나갔다나 자신과 지난하게 싸우며 지켜 낸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현재 점수는 이대일무승부서점을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해야 할지 쉽게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전반전에서 지나치게 힘을 쏟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덕분에 다음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찾을 수 있었다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다.

정지혜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지나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이를 분리하려고 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치워버리려고 하면 생활이 되지 않는다돈은 중요하다중요한 것이 늘어나면 잠자는 동안에도 걱정하게 될 것이다사랑은 기쁘다기쁜 사랑이 쌓이면 사랑을 하지 않던 옛날이 오히려 그리워질 것이다각료의 어깨에는 수백만 명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다등에는 무거운 천하가 얹혀 있다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면 분하다조금 먹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마음껏 먹으면 그다음이 불쾌하다.

나쓰메 소세키풀베개

 


--- 읽은 ---

이토록 보통의 / 캐롯 지음

단박에 조선사 / 심용환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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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4-13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일이 4월달인대 뭔가 유사성이 느껴지네요 ㅋㅋㅋ

syo 2019-04-13 13:2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앞으로는 짜라님이랑 생일이 같은 달이라는 걸 이용해서 제 위대함을 꾸며내야겠네요.

목나무 2019-04-1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왕왕 축하해요. syo님.
제 아는 지인은 올해부터 바뀐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라서 이제 절대 까먹지 않으려구요. ㅎㅎ
그 지인 생일을 기억하다보면 자연스레 옛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태어난 syo님 생일도 기억하게 될 것같아요. ^^
오늘은 좀더 특별하게 보내셔요. ^--^

syo 2019-04-13 13: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지인 분이 제게서 임정수립일을 빼앗아가셨군요..... 축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저 대신 수립일한테 잘 해 주시라고도 전해주세요. 저 같은 놈 만나서 고생이 많았던 우리 수립일이..... 안녕, 행복해라....

겨울호랑이 2019-04-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합니다. 행복한 하루보내세요!

syo 2019-04-13 13: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언젠가부터 생일이 비생일보다 덜 행복하기 시작했지만, 모른 척 행복한 하루 보내고 말겠습니다 ㅎㅎ

몰리 2019-04-1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이 글을 읽은 저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 같습니다.
무엇이든 바로 바로 잊을 수 있는 나이에 ˝이건 영원히 기억된다˝ 확신하는
기쁨 .... 잠시 맛보았습니다.

syo 2019-04-13 14:19   좋아요 0 | URL
그 기억이 하필 아무 쓸모 없는 날짜에 관한 것이라서 폐를 끼쳤습니다.
더 좋은 정보였으면 좋았을텐데요 ㅎㅎㅎ

단발머리 2019-04-1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해요!! 학계의 누적된 연구결과가 얄밉네요. syo님 생일 끝까지 임정이랑 함께 할 수 있었는데... ㅎㅎㅎㅎㅎ
<풀베개> 문단은 저도 좋아했던 거예요.
... 조금 먹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마음껏 먹으면 그 다음이 불편하다.
특히 이 두 문장^^

syo 2019-04-13 15: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성에 차도록 먹고 그 다음이 불편할 생각이에요 ㅎ

무식쟁이 2019-04-13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를 좋아하시는 쇼님.
꽃비가 내리는 오늘이 생일이시군요.
아름답기도 하셔라.

syo 2019-04-13 15:38   좋아요 0 | URL
오늘 대구도 날이 정말 좋네요. 제 생일 같은 날 써먹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좋습니다. 임정기념일이 떠나지만 않았다면 거기다 갖다붙일만한 날씬데..... 허허허.

stella.K 2019-04-1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따박따박.ㅎㅎㅎ
뭐 생일이 별겁니까? 오늘 하루 잘 지내면 그게 생일이지.
365일 중 하루는 내 생일 아니겠습니까?
너무 심한가?ㅋㅋㅋㅋㅋ
암튼 생일 잘 보내십시오.^^

syo 2019-04-13 15:39   좋아요 0 | URL
너무 자주 오네요. 이놈의 생일. 한 몇 년쯤 안보고 지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날씨도 좋은데(여기는) 스텔라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stella.K 2019-04-13 16:58   좋아요 0 | URL
캬~! 그럼 2월 29일 날 태어나면 좋았을 것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이런 꽃피는 4월에...
역시 4월은 여러모로 잔인하네요. 그죠?ㅋㅋㅋㅋ

다락방 2019-04-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생일 축하해요, 쇼님! 우리가 안지도 어언..... 얼마나 되었지요? 아무튼 작년 생일에도 축하했던 것 같은데 올해도 역시!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축하해줄게요!

syo 2019-04-13 15:40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얼마 안됐습니다. 작년에는 축하할 수 있었지만 재작년에는 그러지 않았던 그런 정도.... ㅎㅎㅎ 앞으로의 꾸준한 축하가 중요하겠어요. 제쪽에서도 마찬가지구요^-^

반유행열반인 2019-04-13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13!! 이상하게 오래 지나도 못 잊는 날짜들이 있는데 구임시정부수립기념일과 syo탄신일이 그런 날짜에 추가 되겠네요. 축하합니다.

syo 2019-04-13 22:0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어차피 곧 잊어버리실 겁니다. 그러나 내년 이맘때쯤 또다시 리프레시가 되시게 제가 만들 거구요ㅎㅎㅎ

독서괭 2019-04-1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려요~~^^ 이렇게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본인 생일을 잊지 못하게 만드시다니 ㅎㅎㅎ 2번 글 넘 재미납니다. 공감도 가고요......

syo 2019-04-13 22:01   좋아요 0 | URL
개수작입니다. 내년에도 또 이 멍뭉이수작을 부릴 겁니다 후후후하하하하.

북다이제스터 2019-04-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신 감축드립니다. ^^

syo 2019-04-13 22:02   좋아요 0 | URL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ㅎㅎㅎ 생신 ㅎㅎㅎㅎ 참신하네요

나비종 2019-04-1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양연화」.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네요. .
생일 축하드립니다, syo님. 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막 조깅을 끝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 기분좋고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내 몸에 흘렀던 땀을 씻고 뭔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힘을 주세요. 삶이 지칠 때 읽으면 위안이 되는 글입니다. 이런 이유로 감사하고 찡하고 그렇답니다. .^^

syo 2019-04-13 22:03   좋아요 0 | URL
제 글이 그런 엄청난 글일 거라고는 정말 예상도 못했습니다.... 이거 엄청난 생일선물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나비종님^-^

서니데이 2019-04-1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합니다.
임시정부 수립일에서 어느 날부터는 이틀 뒤의 날짜가 되신거군요.
어느 날이든 매년 돌아오는 생일은 좋은 날이고 축하를 받아야 하는 날인 것 같아요.
한 해를 무사히 넘기고 새로운 시간을 맞는 거니까요.
좋은 일을 많은 한 해 되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축하 많이 받으셨지만, 좋은 선물도 받으시면 좋겠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yo 2019-04-14 12:3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사실 바깥세상보다 알라딘에서 축하를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글을 쓰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별로 축하하는 기분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뭐 나도 좀 축하해보자, 하는 느낌이 되었달지요 ㅎㅎㅎ
서니데이님도 주말 마무리 잘하시구요^^

공쟝쟝 2019-04-14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신축하 드려요 ☺️

syo 2019-04-16 09:58   좋아요 1 | URL
앗 ㅎㅎㅎ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생‘신‘은 어쩐지 귓구멍에 턱 걸렸습니다만😣

또 봄. 2019-04-1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msg 좋아요.^^

syo 2019-04-16 09: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또 봄님^-^ 맛 좋고 몸에도 좋은 msg를 제조할 수 있게끔 열심히 살겠슺니다 ㅎㅎㅎ

2019-04-16 0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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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 선생과 맑 선생

 


1


비가 펑펑 내린다. 아유 좋아.

 



2



쪼개고 쪼개서 읽기를 며칠, 겨우 150쪽 남짓 읽었지만 정작 루쉰 선생은 아직 루쉰이 되기도 전이다. 장서우(樟壽)로 불리던 어린 시절을 청산하고, 세상에 나가 수런(樹人)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집안은 애저녁에 망했다. 과거에 급제해 집안의 자랑이 되었던 할아버지는 뇌물을 받고 다른 사람의 과거 입격을 돕는 부정을 저지르다 삭탈관직 당했다. 그때 이미 아버지는 과거에 도전하였으나 결국 급제하지 못해 낙오자의 인생을 살다 술로 몸을 망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과거라는 것에 장서우가 학을 뗐을 만도 하다. 결국 인간은 기술을 배워야 인간이 된다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금쪽같은 말씀처럼, 수런은 우선 함선기관사가 되고자 수군학교에 들어갔다가, 학교에 실망하고 이번에는 광산철로기술자가 되고자 광무철로학당에 들어갔다가, 학교가 폭망하고 마침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길이다.

 

여기까지 그의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지만, 이제부터가 우리가 잘 아는 루쉰, 펜이 칼보다 강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인간 루쉰의 참 일대기가 펼쳐질 것이다. 난 이걸 왜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 왜 읽고 있지? 허허허.

 

 

 

3


 

한편 이쪽 역시 기어가는 속도로 250쪽 남짓 읽었는데, 마르크스는 사생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쌩을 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개성적이다 못해 독창적이기까지 한 제 아버지의 외모를 복사해 붙여 넣은 고로, 뉘집 자식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고 전한다.


마르크스를 참 좋아하긴 하는데 그런 내 마음과는 별개로 이 양반은 참 하자다. 싸움은 참 좋아하고, 말로는 당할 자가 없다보니 어지간하면 이긴다. 필요하다 싶으면 상대의 견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거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다. 엊그제까지 둘도 없는 친구래 놓고, 한 번 틀어졌다 하면 언론과 출판계에서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 하나 순식간에 조져놓는다. 마르크스의 치명적인 펜놀림에 짓밟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을 반동 핵폐기물로 전락한 인간이 한둘이 아니다. 웬만하면 모르고 지내고 싶은 참 피곤한 성격이다


친구로서 하자라면 남편으로 두고 지내는 것은? 그렇다면 그 생은 스킵하고 싶다. 마르크스 본인이 자조 섞인 어조로 인정하듯, 그가 제일 잘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식이다. 발효곡물 마시는 그 생식 말고 하는 거...... 방도 두어 개 뿐인 작은 집에 하녀도 살고, 이미 낳아놓은 애들 세 명이 지치지도 않고 좁아터진 집구석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데도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또 애를 만든다. 하녀가 세 아이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가면 여지없이 생식을 시도한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면? 그래도 생식이다. 하녀가 있으니까. 기왕 무진장 낳았으니 부족함 없이 기르기라도 하면 이런 말을 안 할 텐데, 아픈 아이 치료할 돈은커녕 결국 죽은 그 아이의 관 값조차 없어 어딘가에서 꾸어야 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한평생을 그랬다. 공산주의의 위대한 아버지는 자식에겐 별 볼일 없는 아버지였다.

 


 

4



새삼 느낀 거지만, 예전에는 지금보다 전례典例/前例를 중요시 여겼다. 신기할 정도다. 실록편찬 자체가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인간으로 남고 싶은 최고 권력자의 압박에 맞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고집은 사관에게는 목숨에 직접 관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다. 그만큼 전례를 크고 무겁게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가령, 부인 장경왕후의 상제를 끝마치기도 전에 새장가를 들고 싶었던 중종이 가장 먼저 명한 일이 전례가 있는지 상고詳考해보라는 것이다. 전례가 있으면 비벼볼 수 있고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물론 나는 나고 옛날은 똥이라며 밀어붙이는 인간형은 언제나 있다). 잘된 사례와 망한 사례를 참고하여 일을 되게 만드는 방식으로 과거를 이용하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옛 사람들이 시경詩經에 어쩌고 서경書經에 저쩌고 하며 오늘날 보면 택도 아닌 말로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5



  써놓고 보면 볼품없는 글이 대부분입니다특별한 사건도 없고뚜렷한 주제나 교훈도 없습니다종종 '이런 글을 왜 쓰냐?'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잊혀지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그런 것들은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도리어 초라하고 남루한 경우가 많아굳이 들여다보고 싶어지지 않는 것들입니다문득 그 부재함을 깨닫지만특별한 감정은 생기지 않습니다없어져도 아쉽지 않은혹은 없어질 만했던 것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저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라는 걸 예감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그렇게 생각하니 저는 잊혀질 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음의 준비 내지는 예행연습 같은 것이겠지요.

김보통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하필 발췌한 부분에서 중복 피동이 적발된 마당이라 이런 말을 하기 살짝 민망한 감은 있지만, 스스로 볼품없는 글이라 낮잡는 것을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라 믿기는 어려울 정도로 김보통 작가는 글을 잘 쓴다. 일단 온 세상이 칭송해 마지않는 간결한 문장, 쉬운 글을 구사하는데, 그 와중에 잘 웃긴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웃기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 일은 syo에겐 특히 어렵다. 왜 안 되나 몰라. 늘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늘 내 문장이 지저분하게 꼬불꼬불 길어진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대체 안 되는 건 왜 안 되지? 안 되는 게 되는 게 되면 왜 안 되지? 안 되는 게 되는 게 안 되는...... , 알겠다, 나는 왜 안 되는지.

 

세상에는 세 등급의 장난꾸러기(이하 장꾸)가 있다. 평범한 장꾸는 장난의 대상을 빼고 모두를 즐겁게 한다. 그리고 뛰어난 장꾸는 장난의 대상조차 포함해 온 세상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구린 장꾸는 지 혼자 재밌다. 그걸 알면 관둬야 되는데, 또 지는 재밌는지라 관두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기에, syo는 너무나도 장꾸인 것이다. 그것도 평장꾸도 뛰장꾸도 아닌 구장꾸...... 이러나저러나 소인배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필력의 지존, 이덕무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_선귤당농소

 

내가 너희를 비웃지 않을 테니, 너희 또한 그 말똥 같은 글이나 굴려가며 분수에 맞게 살라는 뜻으로 읽힌다.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9 / 박시백 지음

군자를 버린 논어 / 공자 지음, 임자현 옮김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단박에 조선사 / 심용환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이토록 보통의 / 캐롯 지음

친절한 강의 대학 / 우응순 지음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종산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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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4-0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 혼자라도 재미있으면 경지에 오른 거죠. 불여락지자의 그 락지자네. 호우 좀 즐길 줄 아는 자인가...

syo 2019-04-09 21:30   좋아요 1 | URL
그렇게 보면 또 그렇군요. 은근 든든하다.....

독서괭 2019-04-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가 그렇게 왕성한 사람이었나요? 게다가 무책임.. 허허
syo님이 구장꾸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syo님 글 읽으며 많이도 웃은 저는 뭐가 되나요!!

syo 2019-04-13 13:10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과 저의 장난질 코드가 맞아서? ㅎㅎㅎㅎㅎ
힘드시겠어요, 이런 비주류 코드를 지니고 사신다는 것이.....-_ㅠ

카알벨루치 2019-04-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식이다 ㅋㅋㅋ

syo 2019-04-13 13:11   좋아요 0 | URL
맥락과 ‘ㅋ‘의 갯수에 따라 숨어있는 무의식을 해독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고 합니다.
ㅋㅋㅋㅋ

2019-04-1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3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4-1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평전 다 읽고 하염없이 마르크스 까고 싶네요. 생식이라니... 생식 ㅠㅠ

syo 2019-04-13 13:14   좋아요 0 | URL
우리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랄까요.
마르크스는 그냥 타인으로서 따로 좋아하는 걸로......
 

 

불 속의 꿈, 꿈속의 불

 

 

1

 

이곳저곳에 큰 불이 일었다. 불붙은 산, 불붙은 들, 불붙은 집. 불붙은 마음들의 까맣게 타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다 자리에 누웠다. 저 먼 곳에서 사람은 죽지 않고 오직 불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억지 잠을 청했다. 불 끄는 꿈을 꾸었다. 불 끄는 꿈이 아니라 불 못 끄는 꿈을 꾸었다. 불은 컸고, 거셌고, 인정도 사정도 볼 줄을 몰랐다. 이윽고 몸에 불이 붙었다. 나는 너무 놀랐고 놀라움을 허겁지겁 휘둘러 겨우 꿈을 찢고 나왔다. 새벽은 창밖에 고요했고, 이마와 가슴이 뜨거웠다. 미지근한 자리끼를 들이켜 급한 대로 잔불을 잡았다. 잠시 불을 켤까 망설이다 포기했다. 그것도 불이었던지.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살폈는데, 누군가 네이버에 강원도 산불 사망자 수를 검색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누군가를 내가 기억 못하다니. 아직 불이 남았다. 그런데 내 좁은 세상은 안온했다. 이 모든 일이 다 꿈인 것만 같았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아서어느 집 대문 그늘 아래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들 뒤에 앉았다나는 울지 않았다더 울 필요도 없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창피한 마음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는 상상 속의 경찰을 불러냈다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경찰을그는 다른 경찰들에 비해 백만 배는 더 큰 덩치에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방탄차까지 몇 대씩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그와 함께라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그는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터였다그가 책임을 져줄 것이므로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그는 아버지처럼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면서 내게 그렇게 여러 발의 총을 맞았는데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병원에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일을 처리해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그리고 내게 제일 좋은 방법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친숙한 현실이 느닷없이 돌변할 때현실을 빚어내는 '양상', 이를테면 신의 섭리 같은 그 무엇이 깨져버렸을 때집단이 무너지고 구성원들은 제멋대로 놀며 타자들이 적의를 드러내고 살육에 취할 때우리는 흔히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그런데 정작 무너진 것은 세계도 아니요세계에 속한 그 무엇도 아니다무너진 것은 '우주적환상이다우리는 그 환상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생각해왔을 뿐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2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제가 읽는 모든 책에서 발췌를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뒤로 평생 이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이 시기 마르크스의 독서 목록은 그의 지적 탐사 작업의 폭을 보여준다법 철학을 쓰면서 달리 누가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예술사를 꼼꼼하게 공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마르크스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오비디우스의 트리스타니아를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혼자즉 문법책을 놓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음 학기에는 민법 소성 절차와 교회법에 대한 교과서를 수십 권 읽으면서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번역했고프랜시스 베이컨을 읽었고, "라이마루스의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동물의 예술적 본능에 대한 그의 책에 즐겁게 마음을 빼앗겼다."

프랜시스 윈마르크스 평전, 42 

 

삶이 순순히 져주지 않을 때, 상당히 종종 맞닥뜨리는 이런 시기를 syo는 평전에 기대어 통과하곤 한다. 처방전은 보통 두 갈래 길이다. 빨간 약, 나보다 더 열정적인 인간의 생을 읽으며 열정의 불씨를 나누어 받기. 파란 약, 나보다 더 심하게 망한 인간의 고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저렴하게 안도하기. 그러나 정말 가끔씩, 도저히 답이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라 두 약을 동시에 처방해야 할 때도 있다.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섞으면? 정답은 마르크스.

 

그런 이유로 하루 두 번 식후 30(syo는 두 끼 인간입니다), 마르크스 평전을 복용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효험을 보는 중이다. 저 양반도 딱 보니 젊을 때부터 크게 되긴(?) 글렀던 것이다. 저 정도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syo도 비슷한 짓을 해 봐서 아는데, 저게 부인과 아이들(혹은 여자친구) 밥 굶기기 딱 좋은 독서법이다. 독서법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독서질이다. 독서짓이다. 아이고 맑선생아, 맑선생아, 철없는 맑선생아, 1818년생, 어린이날에 태어난 젊디젊은 맑선생아..... 아이고 syo......-_

 

 

 

3



  도덕을 도와 덕으로 나눴을 때 도를 이해하기란 쉽다는 길이다차나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길이니 항해길비행길이다더 나아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인생길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되는 길까지 다 아우르는 길이다.

  동양 사상이나 윤리학사회학에서 정의하는 도의 개념도 길이 갖는 이런 지향성이나 반복성연결성 같은 풍부한 함의를 활용한 것이다인간 행위나 정치 조직의 올바른 진로만물 생성의 원리보편적 진리 등 이런 식으로 정의되는 도의 개념은 모두 길의 비유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덕은 도처럼 뜻이 선명하지 않다도에 길이 대응하듯이 그렇게 대응하는 토박이말이 없기 때문이다그래도 억지로 찾아 붙이면 힘이다그냥 힘이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을 나타낼 수 있는 힘 또는 존귀한 행위나 관계에서 드러나는 힘.

  이때 덕은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면 획득하기 어렵다도를 깨치고 이를 반복해서 실천하는 이가 갖게 되는 힘이 덕이다그것은 무력폭력병력 같은 물리적 힘이 아니다마력괴력 같은 주술적인 힘도 아니다매력이나 영향력협력능력 같은 인간적 힘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도덕을 묻는 일은 어떤 길을 어떻게어떤 힘에 의존해서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이 질문에는 삶이 길을 알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를 헤쳐 갈 바른 길을 찾고자 했던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을 찾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실천하면서 생겨난 도덕규범은 구별해야 한다도덕은 삶의 매 순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새롭게 물을 필요가 있다도덕을 묻고 찾았던 시대 상황과 처지는 그때그때 변하기 마련이다.

정춘수논어를 읽기 전, 44-45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칠 때, 독서가는 아픈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도 썩 기분 좋은 표정을 짓게 마련이다.

 

도덕, 그것은 똥이라고 syo는 늘 생각해왔다.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가 논의와 동의와 권력의 압력과 자발적 비자발적 순응의 과정을 모두 거쳐 도덕이 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이 너무나 길다보니, 결국 도덕으로 인정받아 인간 내면의 법전에 새겨진 시점에는 이미 옛날 물건이 되어버려 현실과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도덕의 슬픈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도덕에 대해 더는 깊이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통용되는 도덕규범을 지키거나 말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도덕이 그놈자식이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까지를 시시콜콜 알만큼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은데, 그냥 살아있는지 확인만 하고 살지 뭐, 이런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냥 내가 욕 안 먹으려고 고분고분 지키고 사는 거지, 도덕이 그놈 그거 원래 태생이 고리타분하고 반동적인 권력의 앞잡이라니까? 하는 것이 syo의 도덕관이었다.

 

정춘수 선생님이 쓰신 위의 글은, 도덕의 출생에 대한 syo의 유치하고 초보적인 마르크스적(“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혹은 니체적(“도덕은 얼뜨기들을 허무주의로부터 보호했다. 각자에게 어떤 무한한 가치를, 어떤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 세상의 힘이나 위계질서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질서로 편입시키면서 말이다”) 해석을 모두 껴안으면서도, 이런 비도덕적(?) 도덕관을 가진 인간 역시 항상 자신의 을 휘두르는 일에 주의해야 함을 선선히 일깨워 준다. 사실 저 말은 유학이든 유물론이든 실존주의든 뭐든, 아니 철학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덕과 정의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인간들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인 것은 아닐까. . 어쨌든 힘을 정갈하게 다루어라. 그건 단지 큰 힘을 가진 이들에게만 요구되는 폭 좁은 덕목이 아닌 듯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한 사람이 큰 힘을 가진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그저 우리네 선량한 이웃 중 한 사람이었던 스파이더맨 삼촌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원래는 볼테르의 말이라고 하던데.

 

그나저나, 아니, 논어를 읽기 에 이래버리면, 그럼 논어를 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_

 

 

4




봄철 새소리는 화평하다가을철 벌레 소리는 처량하고 슬프다이것은 계절의 기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당우(이상적인 태평 시대의 상징인 고대 중국의 임금 요와 순시대의 글은 순수하고 맑고 밝다말세의 글은 화려하나 경박하다그 기운을 어찌할 것인가. _이목구심서 2

이덕무 지음한정주 엮음문장의 온도

 

말세의 글이라굽쇼..... 이덕무 선생님 참 못된 사람. 당신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요순시대 글로 사람 여럿 말종 만드신다. 어찌할 것인가.....

 

화려하고 경박한 글이 말세급이면, 화려하지도 않고 경박하기만 한 글은 멸망과 멸종을 부르는 것인가요-_ㅠ 


근데 오늘 나 왜 계속 울지?-_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7 / 박시백 지음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 정성희 외 지음

 

 

--- 읽는 ---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 조현준 지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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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4-0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진짜 무서운 불입니다.. ㅠㅠ

syo 2019-04-06 08:05   좋아요 0 | URL
정말 무서웠습니다. 전 단지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랬는데 실제 열기까지 몸으로 느끼셨을 분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ㅠㅠ
 

 

만화는 죄가 없다. 죄는 어떻게든 읽은 권수를 늘리고 싶어서 꼼수를 쓰는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허허허.

 

이번 달에는 한 번도 안 나타날 것처럼 비장하게 굴었지만 꽤 등장했고, 한 권도 안 읽을 것처럼 단호하게 굴어놓고는 스무 권을 읽었다. syo는 또 죄인인가? 아니야, 난 그저 얍삽했을 뿐이다. 스무 권 안에 만화가 5, 한 권이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인 책이 3, 무상무념으로 읽어 넘길 수 있는 가벼운 에세이가 너덧 권 들었으니, 이 정도면 사실상 한 10권 읽은 셈으로 치고,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요. 한 달에 10권이면 사흘에 1권인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것도 안 되나용......

 

그러나 딴에는 또, 이 정도 무게의 책들로 도배했는데도 20권이라니, 으아아아 이 모든 게 다 거짓말 같다. 끝나지 않는 만우절 같다.

 


201903  20

 

 


1.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 김신회 지음

: 위로는 내용보다 궁합이다. 궁합이 잘 맞는 어떤 이는 그저 옆에서 숨만 쉬어 줘도 위로가 되는 반면, 백만 명의 쓰린 마음을 다 보듬고 돌아와 내 앞에 선 위로의 그랜드마스터라도 궁합이 황이면 이쪽에서는 가뜩이나 짜증면 곱빼긴데다 불짬뽕 말아먹는 기분이 되고 만다. 더없이 아무것도 안하는 syo로서는 뭔가 큰 기대를 안고 책을 펼친 것인데, 허허허.

 

2.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 헤르츠티어 지음

: syo가 또 되게 건방진 게, 이런 장르의 책을 읽을 때면 자꾸 이 사람이 나보다 잘 쓰느냐 아니냐를 체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책들이 이 낮은 허들을 수월하게 통과하긴 한다. 가끔 그렇지 못한 책이 나오면 되게 신랄하게 깐다. 물론 소심한 syo가 할 수 있는 맥시멈 능욕이라는 것이 내가 써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정도에 그치지만, 그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되게 열 받는 말일 수 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런 장르의 책(책을 펼치면 대체로 한 페이지에는 사진, 다른 페이지에는 글이, 줄글로 써도 되는 것을 괜히 시처럼 행갈이 해놓은 글이 쓰여 있는 책)을 고를 때면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혹시 내가 까게 되면 어떡하지? 아아아, 그럼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오들오들 떨며 책을 업어오는 일에는 장점도 있는데, 막상 펼쳐보니 되게 잘 썼다 싶으면 갑절로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랬다.

 

3. Lo-fi / 강성은 지음

: syo가 아는 강성은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의 그 강성은이다. 추억 속의 그 강성은은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 시집을 읽던 무렵의 syo는 매주 한두 편씩 시를 쓰면서 제 깜냥도 모르고 언젠가는 시인이라는 것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던 천둥벌거숭이였다. 그러나 시를 쓸 욕망을 키워주는 것도, 시를 쓸 용기를 꺾어버리는 것도, 언제나 시였다. 넌 재능이 없지, 넌 흉내만 낼 줄 알지, 그것조차 넌 썩 잘하지 못하지, 우리의 시가 태어났으니 너의 시는 태어날 필요가 없지. 이런 모진 말들을 하는 시인들의 명단이 있었다. 으드득 이를 갈며 그 명단에 강성은의 이름을 꾹꾹 눌러 담던 어느 초겨울의 몽촌토성역이 syo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녀의 시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벌써 10년이 다 되가는 이야기다.

: 오늘 다시 읽은 강성은의 시는 그날의 그 시와는 좀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해주는 말도 모양새가 조금 바뀌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그때 시를 포기하길 잘 했지? . 감사합니다. 크게 잃은 것 없이 시만 쏙 버리게 해줘서. 전이되기 전에 일찌감치 적출해줘서. 그리고 과연 그러기를 잘 했다 싶게 좋은 시를 여전히 쓰고 있어줘서.

 



4.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강신주 지음

: 옛날에는 강신주라는 사람이 되게 신기했다. 세상에 모르는 게 없고, 해결하지 못하는 고민도 없고, 못하는 말도 없고. 젊은 날에 숭배하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책은 죄다 사 모았고, 강연도 몇 번 들었다.

: 지금 내가 강신주 선생님을 대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숭배의 불길은 일찌감치 잡혔고, 그 자리에 나는 어떤 씨앗을 뿌려 화전을 일구고 있나. 지금의 나라면 이 책을 두고두고 읽을 필요는 없겠다며 과감히 처분하는 동안,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 난 이제 나라는 사람이 제일 신기하다.

 

5. 3·1혁명과 임시정부 / 김삼웅 지음

: 핑계 같지만 김삼웅 선생님 책이 유독 건조하긴 하다. 사실 김삼웅 선생님의 평전들은 덕장에 널어놓고 딱 3일만 꾸덕꾸덕 말리면 사전처럼 메말라 책상으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다. 3·1운동에 대한 평전(?)이라고 크게 다를 바는 없는 듯하다. 그러니까 빗겨 말하자면, 김삼웅 선생님의 글에는 flow가 없다. 사료는 누구보다 풍부하게 갖추시지만 서술감각으로 보면 그 사료를 단순히 나열하는 데서 그다지 멀리 벗어나지는 않으신다는 느낌. 그러다보니 주인공의 인생사 자체가 flow를 타지 않으면, 평전이 비교적 지루하다는 느낌을 피하기가 어렵다. 그것도 아니면 읽는 사람이 알아서 flow를 타줘야 한다.....

 

6. 연을 쫓는 아이 /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 왕은철 옮김

: ‘당신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어떻게 이 말을 잊고 있었을까. 절대로 잊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을 했었는데. 막사에 불이 꺼지고 몇몇 아이들이 총을 차고 나가는 밤, 목까지 끌어올려 덮은 모포 아래로 두 주먹을 꽉 쥐고서 세 번씩, 더 많이 그리운 날은 다섯 번씩 마음속으로 읊었던 그 말을, 어느 결에 나는 잊어버리고 만 걸까.

: 두 번은 잊지 않으려고 단단히 읽어 두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이 말을 건네기 기꺼운 사람이 있는 독자에게라면, 이 책은 기억보다는 마음에, 그리고 입보다는 손발에 깃든다. 내용을 모두 잊고, 이 책은 그대로 버려도 좋다. 저 말을 잊지 않고, 저 말을 해줄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면.



 

7. 베를린에서 있었던 베를린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 / 김인철 지음

: 그렇습니다, 김인철 선생님. syo보다 연하이신 것 같아도 책이 몇 권이나 나왔으니 마땅히 선생님이시지요. 선생님, 글이 참 재미져요! 그리고 물론 syo보다 더 잘 쓰세요. 이건 너무도 당연한 소리라 칭찬도 뭣도 아니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고 또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선생님, 만약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하신 거라면, 정말 그렇다면 선생님, syo보다 그리 많이 앞에 가 계신 건 또 아닌 것 같아요. 후후후. 제가 보기엔 그렇다고요. 안녕하세요. 손syo입니다. 본관은 '오만불', 오만불손 씨지요.

 

8. 임정로드 4000km / 김종훈, 김혜주, 정교진, 최한솔 지음

: 이쯤 되면 임정로드를 가 보라는 건지 우리가 가 봤으니 너는 안 가 봐도 된다는 건지 헷갈린다. 사전지식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가 빙충이같이 놓치고 돌아올 것들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임정로드를 걷는 것보다 이 책을 읽는 게 훨씬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 , 다 읽었으니까 이제 안 가 봐도 되겠어,

: 라고 말하면 으하하, 그건 다 뻥이옵니다. 이 책은 임시정부와 임시정부를 일으킨 이들의 발자취를 상세히 더듬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직접 걸어보고 싶게 한다. 모조리 알지만 직접 겪어보진 못한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 번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길이 있다. 위대한 인간들이 앞서 걸었던 글이 대체로 그렇다. syo는 나라를 별로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을 만들어내고 지키는 사람들은 사랑한다. syo는 역사를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지만 그 역사를 소중하게 만든 이들을 소중히 여긴다.


9. 소설을 쓰고 싶다면 / 제임스 설터 지음 / 서창렬 옮김

: 제임스 설터를 누구보다 숭배하는 syo로서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또 어마어마하게 좋은 것도 아니라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 모으기에는 이제 돈도 없어서, 돈이 없는데 책을 사기에는 철이 좀 들고 그래서. syo가 설터에게 기대하는 것은 기본값이 어마어마고 여차하면 기절초풍이라서.

 



10.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이영미 옮김

: 에세이는 어떤 글일까? 에세이는 독자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만날 때면 항상 곱씹는 질문이다. 무라카미는 대체로 그저 에세이를 툭툭 써낼 뿐, 그 에세이를 가지고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독자의 마음속에 에세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정의되어 있느냐에 따라 무라카미의 에세이가 지니는 약효혹은 약빨은 천지차이다. 허튼 말은 하지 않는 사람 같으면서도 가끔 보면 참 허투루 말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비유만 해도 그렇다. 대체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비유를 구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무라카미가 하는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비유일 거야라는 선입견 뒤에 숨어 방만하게 비유하는 일도 있는 것 같다. 난 참 이 사람을 잘 모르겠다.

 

11. 인간이란 무엇인가 / 백종현 지음

: 뵌 적도 없는 백종현 선생님의 음성이 찌렁찌렁 울리는 것만 같다. 칸트 입문서로 더 쉬운 책, 더 친절한 책이 있기는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칸트 전집을 번역해오고 계신 선생님의 아우라를 고려해보면 최소한 다른 책의 존재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낮게 매겨질 일은 없겠다.

 

1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 서중석, 김덕련 지음

: 자칭 알라딘 빨갱이라는 syo는 무지하게도, 이 지독하다시피 한 기계적/신앙적/자동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4공화국 작픔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심지어 1공화국도 아니며, 공화국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전이라고 한다. 친일파. 난 그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약하고 가난한데 친일파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문제겠거니 하고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투쟁에 뛰어들고 프레임을 선점하는 작태를 보고 있자니 소름이 끼친다.

 



13. 부케를 발견했다 / 최정화 지음, 이빈소연 그림

: 최정화. 불안의 마에스트로. 딱 한 페이지만 더 넘기면 당장 뭔 일이 터질 것 같은데, 넘기고 넘겨도 별 일이 터지지는 않는데, , 진짜 이번에는 진짜 터질 것 같은데, 그럼에도 또 터지지는 않는데, 아니 뉘앙스가 전에 분명 뭔가 끔찍스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결코 그게 뭔지 알려주지를 않는데, 아 이게 뭐지 이게 뭐지, 이렇게 쫄깃하게만 만들어놓고 또 끝내 이거였다 떡하니 내질러주지는 않는, 불안의 맛집.

 

14. 꿈은 미니멀리즘 / 은모든 지음, 아방(신혜원) 그림

: 은모든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고 당연히 그 이름이 박힌 책도 처음 읽어 보았다. 간소한데 단아한지는 모르겠다. 소소한데 소중한지는 모르겠다. 깔끔한 만남이었지만 다시 만나고 싶을지는 모르겠다.

 

15. 아무도 없는 숲 / 김이환 지음, 박혜미 그림

: 그냥 그랬다. 모든 면에서 그랬다. syo의 관점에서는 이 이상 더 보탤 말이 없다.

 



16-2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 박시백 지음

: 출판문화 판에서 박시백 화백(무슨 유상무 상무 느낌이긴 한데)님의 독보적인 입지를 확립해준 걸작. 긴 설명이 필요할까. 이 책 욕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4월에도 박시백 선생님의 성은으로 분발할 작정이다. 마음잡고 보면 남은 15권 하루 나절에도 보겠지만 마음 같은 거 잡지 말아야지. 그리고 에세이는 도서관에 산처럼 쌓여 있다. 요즘은 유익한 동시에 후다닥 넘어가는 이런저런 만화책들도 꽤 많다. 얍삽하고 싶은 인간은 얼마든지 얍삽할 수 있는 여건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늙어 보니까 하루치 집중력과 정신력이 딱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그걸 아껴야 잘 산다. 헤겔 이런 거 읽다가 그걸 탕진하면 나는 끝장이다. ,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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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1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19-04-0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왜 안 나타시려고 그러셨어요? syo님이 안 계신 썰렁한 북플은 어쩌라구요??

syo 2019-04-01 19:48   좋아요 0 | URL
안 썰렁하고 잘 돌아가던데요?? 툐툐님도 계시잖아요 ㅎㅎㅎㅎㅎ

목나무 2019-04-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우절 거짓말이죠?
실제로는 50권쯤 읽었는데 20권으로 줄여 말한거죠? 그렇죠? ㅋㅋㅋ
요즘 설터 작가님의 저 책을 읽고 있는데 바로 전에 읽었던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와 비교가 되면서 나는 정말로 콕콕 짚어주는 주입식 교육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뭡니까.... 그래서 설터작가님 책이 잘 안넘어가요. ㅎㅎ;;

syo 2019-04-01 19:50   좋아요 0 | URL
후후후후. 진실은 저 너머에..... 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저는 만우절에 거짓말을 안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라......

이승우 선생님의 책을 읽어보아야겠네요. 전 설터를 먼저 읽었으니 손해날 게 없겠어요 ㅋㅋㅋㅋ

독서괭 2019-04-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권이라도(?) 올려주셔서 넘 좋아요~~^O^

syo 2019-04-01 19:51   좋아요 0 | URL
4월에는 10권이 될지도..... 하하하하.....ㅠ

chaeg 2019-04-0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짓말 같이 syo 님 등판^^

syo 2019-04-01 19:51   좋아요 1 | URL
토큰님 반갑습니다. 등판하였으나 방어율이 영 나쁘네요.....

단발머리 2019-04-01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syo님~~~~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꼭, 꼭, 약속합시다!!!

syo 2019-04-01 23:21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단발머리님~~~~~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요^-^

또 봄. 2019-04-02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만화에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syo 2019-04-04 21:14   좋아요 0 | URL
저도 만화한테 참 많이 배웠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으로는 좀 힘에 부치네요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4-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syo 2019-04-04 21:15   좋아요 1 | URL
😆😆😆

tintin2506 2019-04-0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선생님에 대한 단상이 저와 거의 똑같아 놀랐습니다. 그의 실력이 다소 과장이었다 할지라도, 대중들에게 분명 어떤 씨앗은 뿌려졌던 것 같아요. 중요한건 현재의 ‘내‘가 그 씨앗을 어떻게 발현시켜 나가고 있느냐 인 것 같아용.

syo 2019-04-09 20:36   좋아요 0 | URL
tintin님 반갑습니다^-^

말씀대로 당시 강신주 선생님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보적인 어떤 역할이요. 그 역할을 나눠 질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어쩐지 선생님 요즘 좀 뜸하신 것 같지만, 선생님의 일정과는 별개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꾸준히 가야겠지요 ㅎㅎ
 


창녕昌寧 2

 


꺼꾸리 할배네 논에는 크고 실한 여치 메뚜기 방아깨비가 잔뜩 살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장난꾸러기들이 아무리 몸을 웅크려본들 논두렁에 발을 올리는 순간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꺼꾸리 할배의 불같은 호령소리가 떨어졌다. 야이 종내기들아! 퍼뜩 안 나가나! , , 발모가지를 조 뿌사뿌까!

 

다음 날 학교였다. , 우리 아부지가 쫌 이상하다. 걸상을 책상 아래로 내려놓고 앉으며 친구아이가 말했다. 내가 어제 아부지한테 물어봤다 아이가. 아부지요, 종내기가 도대체 뭡니꺼. 그카이끼네 아부지가 누가 그카데 카면서 막 씅질을 씅질을 내는기라. 니는 가마이 듣고 있었나, 한 대 조 패주지 와, 이 카데. 그래가 내가 캤지. 아부지요, 꺼꾸리 할배가 그캤심니더. 그 할배는 아덜이 논두렁에 가까이 가기만 하마 소리를 버럭버럭 지릅니더. , 맞나? 그랬디 느그 아부지가 머라 카시던데? 그게 신기한기라. 내는 우리 아부지가 금방이라도 꺼꾸리 할배한테 띠 갈 줄 알았그든? 근데 갑자기 내한테 씅질을 뜩 내믄서, , 인마, 그 어르신 논에 드가지 마라! 이라믄서 내 꿀밤 때리드라 아이가...... 왜 저카는지 니는 알긋나? 하모, 알지, 딱 보이 내는 바로 알긋네. 뭔데, 뭔데? 느그 아부지가 꺼꾸리 할배캉 싸우마 지는기라, 할배한테 뚜드리맞으까봐 바로 쫄아가 꼬리 내라뿐 기지. , 이 미친개이야, 우리 아부지 해병대 나왔다. , 맞나? ......그카면 답은 딱 한 갠데. 뭔데? . ? 그래, . 내 뭐? 니 다리 밑에서 주 온 자식이네. ......디질래, 이 종내기야.

 

벼가 누렇게 익더니 이내 논이 텅텅 비어 여치도 메뚜기도 방아깨비도 모두 간데없어진 늦은 가을까지 결국 아이들은 누구도 꺼꾸리 할배네 논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해는 유독 가물었고 흉년이었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한숨 소리가 났다. 처음 들어보는 남미 어느 나라의 이름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어른들의 시름에 시름을 얹었다. 영삼이니 대중이니 하는 이름이 입에 오르면 가끔 큰소리도 들렸다. 어둡고 뻑뻑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사이에도 말이 돌았다. 꺼꾸리 할배는 쌀밥 대신에 메뚜기를 밥그릇에 항금 담아가 묵는다 카더라. 아 맞나, 어쩐지. 그래가 꺼꾸리 아제가 마누라가 토꼈구나. 아이다, 꺼꾸리 할배가 사실은 어릴 때 메뚜기한테 물리가, 그때부터 밤만 되마 메뚜기 소리를 그래 낸다 카든데? 아 맞나, 어쩐지, 그래가 우리가 논두렁에 가까이 가기만 하마 귀신같이 알아챘네. 메뚜기 우는 소리 알아들은 기네.

 

겨울의 일은 겨울에 묻어두고, 논농사 짓는 이들의 봄은 나른할 틈이 없었다. 산과 들이 개구리 울음으로 짠 녹색 옷을 입으면, 마을의 논은 바람 일 때마다 물소리 찰랑거렸다. 아이들도 바빴다. 뒷산으로 나가 개구리도 잡고, 뱀딸기도 따고, 돌아오는 길이면 개울에 발을 씻었다. 노을이 내리면 어른들이 모여 듬직한 얼굴로 낫이며 장화에 묻은 흙을 씻어내는 그 개울이었다. 어른들의 입에서 겨울을 뒤채던 그 어려운 이름들이 잠깐씩 나왔다가 개울 물소리와 함께 하류로 흘러가곤 했지만, 아이들은 더 이상 꺼꾸리 할배의 이야기를 짓지 않았다. 겨울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었다. 춥고 매운 흉년의 그 겨울, 마을에는 꺼꾸리 할배가 다녀가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집에서는 꺼꾸리 아제가 짊어지고 온 쌀가마니를 마당에 내려놓고, 꺼꾸리 할배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어려운데, 우리 집만 작년 농사가 잘 돼서. 또 어느 집 아이는 대청마루에 반쯤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꺼꾸리 할배가 하얀 봉투를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에는 입이 두 개 밖에 없어서.

 

여름에 마을 아이들은 자주 모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꺼꾸리 할배를 찾아갔고, 한 줄로 나란히 논에 들어가 피와 여뀌를 뽑았다. 그리고 그 계절이 끝나자 누구도 그 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해 거둔 쌀로 지은 밥은 유독 달았고, 장난꾸러기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새 노래를 질릴 때까지 들으며 밤마다 조금씩 키가 컸다.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 4 5 / 박시백 지음

부케를 발견했다 / 최정화 지음, 이빈소연 그림

꿈은 미니멀리즘 / 은모든 지음, 아방(신혜원) 그림

아무도 없는 숲 / 김이환 글, 박혜미 그림

인간이란 무엇인가 / 백종현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읽는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 서중석, 김덕련 지음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 정성희 외 지음

묵묵 / 고병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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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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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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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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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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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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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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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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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3-30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화인가요? 실화같은 소설인가요? 어느쪽이든 참 좋네요. 사투리가 구수하니 읽는 맛도 나고..
환절기에 건강 잘 챙기고 계시죠?^^

syo 2019-03-30 22:39   좋아요 0 | URL
소설 같은 실화랄까요. 돌아보면 소설같은 일이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환절기 전 너무 좋아요. 독서괭님도 잘 지내시죠?? ㅎㅎㅎ

다다 2019-03-30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어린시절을 창녕에서 보내셨나요?

syo 2019-03-30 22:46   좋아요 0 | URL
네. 두어 해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찐하고 재미나게 보냈습니다^-^

다다 2019-03-30 22:53   좋아요 0 | URL
어머나. 그랬군요. 제가 이 댓글을 창녕에서 쓰고 있습니다. ㅋㅋㅋ

syo 2019-03-30 22:55   좋아요 0 | URL
아, 또 그런 사연이ㅎㅎㅎㅎ 반갑습니다(?) 창녕은 안녕하신가요 ㅎㅎ

다다 2019-03-30 23:01   좋아요 1 | URL
창녕이 안녕한지 일일이 물어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
다만, 저는 안녕할 때도 있고 안녕 안 할 때도 있어요. ㅋㅋ
밤에 쌀쌀하네요. 감기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