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씨앗
1
나는 20대 때 35살 이후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35살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그 후에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그 후에도 길고 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우리가 변해간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일에 대한 좋은 태도들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싶다.
'변화'라는 개념은 전혀 새롭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다. '변화'는 '결코 변하지 않을 좋은 것들'에서 온다.
_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161쪽
이미 도착한 체념의 시간이 이제 그만 문을 열라며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발버둥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인간이 있다. 그런 마음에는 깊은 상처를 내기가 도리어 쉽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상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상처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그가 부서져본 적이 없으니 세상에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으리라고 쉽게 단정했다. 사실 그는 부서져본 적이 없기에 세상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두려웠고 너라서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더 두려웠다. 그 말들에 부딪혀 깨져나갈 때마다 그는 떨었고, 바래고, 가벼워졌다.
세상의 모든 벼랑 끝에는 한 줌의 소금더미가 쌓여 있다. 그것은 한때 인간이었다. 그들은 상처를 모르고 두려움을 몰랐다. 버티는 법을 버티면서 배웠고, 버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버틸 수 없었고, 자신을 향한 세상의 오해나 과신에 쫓겨 골방에 숨어들어서는, 끝없이 끝없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큰 오해와 과신의 눈빛이 출발하는 곳을 발견한다. 그리고 조용히 거울을 치운다.
그때쯤 이미 그는 손쓸 수 없을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잔바람에도 존재가 온통 흔들렸다. 세상은 큰 바람이 쉴 새 없이 부는 곳이었다. 그는 방문을 잠갔다. 우리는 그 방 안을 들여다 볼 때, 끝까지 조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무신경한 날숨에 그가 흩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얼른 방문을 닫아주어야 한다. 가루가 된 사람들에겐 우리가 필요한 시간과 혼자가 필요한 시간이 밀물과 썰물처럼 다녀간다. 그는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에 위안을 얻고, 우리가 지켜보지 않는 동안에 평안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만져주는 동안에 부드러워지고, 스스로 만져주는 동안에 단단해질 것이다.
골방은 충분히 좁고 넉넉히 어두워 무너진 마음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뿌리는 빛이 들지 않는 땅속의 흙을 밀어내며 자란다. 이제는 그도 안다. 싹은 약하고 줄기는 바람에 흔들릴 것이다. 잎은 마르고 꽃은 시들며 열매는 썩을 것이다. 그것이 생물이 부서지고 상처 입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의 뿌리가 알 것이다.
어느 날 다시 방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그가 흩어져 사라졌으며, 그가 웅크렸던 자리에 그의 씨앗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오래된 새 씨앗이고,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자라날지를 알지만 모른다.



구멍을 메워야 할 틈으로만 본다면 평생 부질없는 삽질을 해야 하겠지. 모두 메웠다 싶어 돌아보면 다시 드러난 틈에 절망할지도 모르고. 만약 뚫린 그곳에 빛을 들일 수 있다면, 삽은 그만 내려놓고 거기 쪼그리고 앉아 쏟아지는 빛에 등을 데우고 싶어. 그러면 마음까지 훈훈해질 것 같은데 말이야.
_ 김민아, 윤지영,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109.
굳이 집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 책상에 머문 채로 귀를 기울여라. 한 번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기다려라. 한 번만 기다리지 말고, 완전히 고요하게 홀로 있어라. 세상이 네게 본색을 드러내 보이려고 스스로를 제공하리라. 별 도리 없이, 환희에 찬 채로 네 앞에서 굽이칠 것이다.
_ 프란츠 카프카. 「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내 인생과 상관없다. 안타깝게도 내 뜻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다. 나는 그저 한 마리 크릴새우가 해류를 따라 흘러가듯 거대한 혼란 속에서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고래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바다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새우로서 살아간다. 싫은 것들을 피하며 가능한 한 즐겁게, 다른 새우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만이다.
운이 좋다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행복할 수 있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불행하지만 않으면 된다.
다행히 아직도 불행하진 않다.
_ 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2
자기 개념은 실제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자기 제시에 의해 정말로 행동이 바뀐다. 정서가 안정되어 있는 척함으로써 정말로 정서가 안정되고, 반대로 정서가 불안정한 척함으로써 정말로 정서가 불안해지는 것이다.
_ 에노모토 히로아키, 『은근한 잘난 척에 교양 있게 대처하는 법』, 201쪽
무언가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인 무언가보다 더 의미 있는 경우가 있다. 사람에 대한 마음이 주로 그렇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면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사랑의 전반전은 선수가 모르게 시작될 수도 있지만, 사랑을 깨달은 선수는 어쨌든 후반전을 시작하고 그때부터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인식과 믿음이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 사랑한다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감정의 규범의 법조문들은 의외로 우리의 사랑을 변동시키는 데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질투하는 스스로를 보고 사랑을 깨달을 수도 있지만, 평소에 질투할 줄 모르던 사람도 사랑한다면 저런 상황에선 질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념의 힘에 이끌려 질투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메커니즘을 속임수에 당하는 일로 치부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의미는 없다. “사랑한다면 질투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은 속임수야”라는 인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라는 식으로 내가 지닌 사랑의 ‘관념’을 교체하고 나서야, 마음이건 행동이건 비로소 내가 바뀔 수 있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렇다. 평소에 “사랑한다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어느 날 실제로 질투를 느꼈다면, 저건 그저 말뿐이었고 실제로 내가 가진 사랑관은 “사랑하니까 질투가 나는 거지”였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걸 몰랐거나, 알았지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내가 진짜로 믿지도 않는 명제를 내 사랑관인 양 착각 또는 기망하고 살았다는 것. 그 말이 곧 내가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명제로는 나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냐면, 그렇지 않다.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그를 좋아한다고 자주(그리고 오래, 거의 항상)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그를 좋아할 수 있다. 겪어봤습니다. 세 번쯤이(나)요. 사랑관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자신의 굳은 신념이라고 착각했던 저 사람 역시, 그 착각을 더 길게 유지했더라면 같은 상황에서 질투를 느끼지 않거나 덜 느꼈을 수 있다. 오랜 착각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더 오래 묵으면 일종의 진실로 진화한다는 사실은 놀랍거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아도, 실제 살다 보면 종종 그런 꼴을 겪거나 지켜보게 된다.
요컨대, 사랑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니까 사랑할만하기도 하고.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사랑하기도 하고. 그 시작이 어떻던, 사랑의 과정 속에서 어차피 사랑을 귀납하기도 하고 연역하기도 하고 합디다.
.....합디다?


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쓰였기 때문에 사랑의 시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했지, 사랑이란 게 존재했기 때문에 사랑한 게 아니었다.
_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아마 제가 소개를 부탁했더라면, 더 현명했을 겁니다." 다아시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낯선 사람의 호감을 얻는 데 대단히 서툽니다."
"그럼 사촌분께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 한번 물어볼까요?"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피츠윌리엄 대령을 향해 말했다. "교육도 받았고, 분별력도 있고, 세상 경험도 해본 신사가 어째서 낯선 사람의 호감을 얻는 데는 서툰지를 한번 물어볼까요?"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습니다." 피츠윌리엄이 말했다. "동생에게 물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아마 그런 수고로움을 피하고 싶어서일 겁니다."
"확실히 저는 어떤 사람들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다아시가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편하게 대화하는 능력 말입니다. 흔히들 그렇게 하지만, 저는 대화의 분위기도 잘 감지하지 못할뿐더러 사람들의 관심사에 흥미 있는 척도 못합니다.
"제 손가락이 제가 본 많은 여성들이 연주할 때처럼 이 악기 위를 능숙하게 움직이지 못하네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들 같은 힘이나 민첩함도, 표현력도 없어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 늘 제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연습이라는 귀찮은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제 손가락이 탁월한 연주 실력을 지닌 다른 여성들의 손가락만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죠."
_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오만과 편견』
3
"그런데 당신 표정이 왜 그래? 학생들은 다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써왔잖아!"
"바라다니, 무슨 얘기야?"
"책을 읽어야 한다는 원칙! 그건 그야말로 교리와 같은 거잖아! 어쨌든 당신이 이단을 잡아내서 화형에 처하려고 아이들 과제물을 한 뭉치나 거둬들인 건 아닐 거 아냐!"
"내가 바라는 건 아이들이 워크맨을 던져버리고 진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야!"
"천만에...... 당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닐걸. 당신이 아이들에게 기대한 건, 당신이 정해준 소설을 읽고 그럴듯한 독후감을 쓰는 것, 당신이 골라준 시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학생들이 당신이 뽑아준 예상 문제 중에서 나온 텍스트를 능숙하게 분석해서 적절히 '설명'하거나, 당일 아침 시험관이 학생들의 코앞에 들이미는 문안을 칼같이 '요약'하기를 바라는 거잖아. 시험관도, 당신도, 부모도, 특별히 아이들이 책을 읽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니잖아? 뭐 그렇다고 딱히 책을 읽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바라는 것이라곤 어떻게든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점수를 받는 일이지! 어른들은 성적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플로베르도 마찬가지였을걸. 책 읽는 일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겠어! 플로베르가 루이즈에게 책을 보냈던 건, 그녀가 더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고 조용히 보바리 부인에 전념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지.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에게 아이라도 하나 덥석 안기지나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했고. 자, 당신도 잘 알다시피, 그게 바로 플로베르의 본심이자 진실이었어. 플로베르가 루이즈에게 '책을 읽는 생활을 하시오'라고 했던 말에는 '내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당신은 책이나 읽구려'라는 속셈이 은연중에 담겨 있었다고. 그걸 학생들에게 말해주었어? 안 했지? 왜?"
아내가 웃는다. 그러곤 가만히 남편의 손을 잡는다.
"그게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야. 책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마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법이거든. 당신은 바로 그 책에 대한 사랑을 전도하는 대사제인 셈이야."
_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95-96쪽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데, 그럴 때마다 이 책 저 책 떠올리고, 눈앞에 앉아 있는 정신에다가 걸쳐줄 만한 책인지 이리저리 대어 보느라 골머리를 싸매면서도, 이 사람에게 왜 책을 읽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 일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정말 근본적인 질문이고, 어쩌면 오히려 책보다 그 질문이 더 오래 살아남을 듯도 하다.
책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야 책 읽을 이유란 적는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넘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다 부질없거나 부적절한 것들 같기도 하다. 일단 필요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리 정해지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독서의 필요성은 그야말로 일반적이라 일방적이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맞는 독서 이유가 있는 법인데, 본인은 또 그걸 잘 모를 수도 있고. 그래서 반 전문가 쯤으로 보이는 이에게 찾아가 진단을 요구했더니, 이 양반이 자꾸 뻔한 이야기를 여러 개 늘어놓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 앞에 처방전을 십 수개 깔아놓고 그 중에서 하나 골라 보라는 식으로 나오면, 실제로 그 처방전이 죄다 효과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환자 입장에서는 이 가운 입은 양아치가 나한테 돌을 파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은, 질문자에는 마뜩찮은 표정인데 오히려 대답하는 인간만 눈을 반짝이며 흥분해대는 풍경화를 그리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그저 ‘어쨌든 책은 읽어야 한다’, ‘너한테 딱 맞는 이유를 지금 내가 말하진 못하겠으나, 어쨌든 읽어 봐라, 알게 된다’ 따위의 책 숭배나 강요하는 꼴이 아닌지? 책 읽을 이유도 찾지 못하는 이 불쌍한 인생아- 하며 몰아붙이면 편하긴 한데, 수천 권을 읽어놓고 책 읽을 이유 하나 제대로 전수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참 허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 허탈함과 부끄러움을 청소하기 위해, 글 잘 쓰는 다니엘 페나크가 나서서 이 책 『소설처럼』을 쓴 것 같다. 그냥 이 책 하나 던져주고 말고 싶다. 좀 지친다.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얽어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는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사가의하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_ 같은 책, 225쪽
그래도 굳이 따져 보자면 이런 증언들이 있다.
1. 재밌잖아
어쨌거나 통계적으로 확인되었듯이, 독서가 레져 활동으로서 살아 남으려면, 독서의 (불분명한) 혜택보다는 즐거움을 장려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도 책을 읽지 말라고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부탁이니 읽고 있는 책이 재미없어 죽을 지명이면 내려놓고 다른 것을 읽기 바란다. ...... 내가 아는 것은 읽느라 힘들어 눈물이 나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 뿐이다.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며, 다음번 선택 기회가 왔을 때 책보다는 <빅 브라더>(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영국의 리얼리티 쇼-옮긴이)를 선택할 것이다.
_ 닉 혼비, 『런던 스타일 책 읽기』
2. 그래, 재밌기도 하겠지
책읽기는 분명 놀라운 재미를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읽기에서 오직 재미만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 또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정신적 환상을 추구하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니체처럼 "모든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경지에 오를 수는 없겠지만, 책읽기가 '고통 없는 재미'만을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런 책읽기라면 단언컨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책읽기는 재미와 고통을 동시에 줄 것이다. '고통 없는 재미'만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읽기에서 '재미있는 고통'을 상상하는 게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다른 차원의 문을 연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설레는 위안이 될 것이다.
_ 김욱, 『책혐 시대의 책읽기』
3. 인간 너는 사회적 동물
독서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현상이다. 독서의 수행은 사람마다의 몸과 뇌(지력)를 통해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이다. 독서는 적당한 체력과 선행 지적 훈련, 그리고 독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TV 보기 같은 일과는 달리 매우 의식적이고 집약적인 지적 활동이다. 그런데 책의 선택과 구입, 독서 과정과 독서 후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 이르는 모든 일은, 개인이 속한 당대의 이런저런 문화적 정황에 의해 주어지는 집합적 행위의 일부다. 이 집합적 행위와 인식을 '독서문화'라 지칭하고자 하는데, 그 안에서 개인은 어떤 책을 택하고 읽는(또는 택하지 않거나 읽지 않는) 자유를 가진다.
_ 천정환, 전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4.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 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5. 나다운 게 뭔데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다. 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나'가 된다. 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 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_ 이현우, 『책에 빠져 죽지 않기』
6. 태생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자아도 확인한다.
_ 알베르토 망구엘, 『은유가 된 독자』
7. 읽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독서가 가지는 여러 가지 놀랍도록 무궁무진한 효용과는 별개로 저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가 책을 읽으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몰입할 때입니다. 요리사는 요리에 집중하고, 바이올리니스트는 연주에 몰입하고, 소방관은 화재를 진압하고, 강사는 강의에 열정을 다할 때 가장 아름답죠. 그런데 이것은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아름다운 순간이죠. 반면, 독서하는 그 순간은 사람의 직업, 신분,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_ 오프리, 『뷰티 인 리딩』
8. 다 그쪽 덕입니다
책은 내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당연시하는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내가 누리는 안락에 감사하고 내가 겪는 아픔을 고집하지 않게 하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 원망 없이 받아들이게 하지요.
_ 김이경, 『책 먹는 법』








--- 읽은 ---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지음 / 류경희 옮김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 /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 양영란 옮김 / 샤르브 그림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지음
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 공부 / 홍춘욱 지음
--- 읽는 ---






은근한 잘난 척에 교양 있게 대처하는 법 /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 강수연 옮김
흄 / 최희봉 지음
안전 통행증·사람들과 상황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 임혜영 옮김
어둠의 심연 / 조지프 콘라드 지음 / 이석구 옮김
오영수 교수의 매직 경제학 / 오영수 지음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한국사 1 / 김상훈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