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와 조건
1
한동안 지치지 않고 읽었는데, 마침내 그가 돌아왔다. 슬럼프.
2
세 시 전에는 눕고, 아홉 시 전에는 침대에서 나오려 한다. 둘 다 잘 되지는 않는다.
일어나면 바로 커피를 마시고 싶다. 빈속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좋지 않은 것들이 세상엔 너무 많고, 그것들을 나는 잘도 해왔다. 좋지 않아도? 혹은 좋지 않아서?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3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눈이라도. 그리고 기왕 내릴 거라면 밤이나 새벽을 골라줬으면 좋겠다. 깊은 잠보다 얕은 잠이 나은 이유를 나는 딱 하나 알고 있는데, 빗소리에 귀가 젖어 잠깰 수 있다는 점이다. 눈을 비비며 창틀에 팔을 괴고 어둠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 일. 더운 여름의 밤에도, 싸늘한 늦가을의 새벽에도.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어쩐지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4
흥얼거림이 그대로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을 열쇠로 꽂아 남의 마음에 제 마음대로 침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노래의 바탕에 재능이 있었을 것이되 재능이 모든 일을 하진 않았을 것이며, 노력이 있었을 것이되 노력만으로 전부 얻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툭툭 던져놓은 글 토막이 아름다워 심장을 얻어맞고, 그렇게 맞은 자리를 어루만질 때마다 부럽고 부끄럽다. 눈과 손과 용기와 끈기. 아름다운 글을 낳는 부모는 아무래도 이렇게 넷인 것 같다. 그저 짐작일 따름이다. 저 넷을 다 모아 본 적이 없으니.
5
행복은 늘 창밖에 내린다. 비를 기다리다 잠든 이가 빗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었을 때, 창밖으로 팔을 뻗어 비를 만질 때, 그는 내민 팔만큼만 겨우 젖는다. 흉내를 내겠다고 손바닥으로 빗물을 받아 얼굴에 바를 수도 있다. 하지만 창 안으로 넘어온 빗물은 더 이상 비가 아니다. 젖으려면 이 창틀을 밟고 넘어 저 밖으로 나가야 하리라는 것을 다 알지만, 그건 쉽지가 않은 일이다. 빨랫감이 늘어날까봐 창밖으로 나가기 겁난다. 감기에 걸릴까봐 젖기 두렵다. 지금 비는 하염없이 내리지만 언젠간 그칠 것이다. 지금 나는 하염없이 빗소리를 듣지만 언젠간 다시 누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비 개인 아침, 빈속에 커피를 부어넣으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생각할 것이다. 손과 눈과 용기와 끈기에 관해서.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 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칩니다. 가장 창조적이 됩니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입니다.
_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그거."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서 제어 불가능하게 그냥 흘러나오는 거 있잖아. 세상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거."
개성의 광채. 나는 생각했다. 내적인 빛. 아니면 내적인 어둠. 비밀,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 오래전, 내가 판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순진하게도 피고인이건 증인이건 내 앞에 선 모든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했던 것. 절대 무관심하지 않겠다고, 나의 판결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 맹세했던 것.
_ 다비드 그로스만,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의젓해지려고 애쓰는 이 순간에도 삶도 글도 여전히 어렵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를 구성하는 것도, 하루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다. 다만 고요한 시간에 나와 대화해 보면 나는 여전히 나무를 닮은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 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자주 있었으나, 그 경험으로 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나무에 찾아오는 바람처럼 글이라는 움직임이 굳는 성질인 나를 아주 굳지는 않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_ 이원, 『최소의 발견』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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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 / 조셉 콘라드 지음 / 이석구 옮김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한국사 1 / 김상훈 지음
오영수 교수의 매직 경제학 / 오영수 지음
노생거 사원 / 제인 오스틴 지음 / 조선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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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사물 / 조경란 지음
예브게니 오네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김진영 옮김
불교는 왜 그래? / 장웅연 지음
현상학 / 한전숙 지음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 김동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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